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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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일어난 동로마 및 기독교 동맹[1]과 오스만 술탄국(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 제국의 역사, 그리고 기원전 8세기부터 2,200여년간 지속된 로마 문명의 역사가 막을 내렸고[2],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대륙의 경계인 보스포로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본격적인 세계제국으로 팽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1453년이라는 한 해 동안 동방에서는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방에서는 백년전쟁이 종식되었기에 유럽사에서는 바로 이 해를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근세)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여기는 시각이 많다.[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 제국의 역사, 그리고 기원전 8세기부터 2,200여년간 지속된 로마 문명의 역사가 막을 내렸고[2],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대륙의 경계인 보스포로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본격적인 세계제국으로 팽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1453년이라는 한 해 동안 동방에서는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방에서는 백년전쟁이 종식되었기에 유럽사에서는 바로 이 해를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근세)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여기는 시각이 많다.[3]
2.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편집]
나무위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총 20차례 있었다고 판단하고 표제명으로 삼았기에, 그 영향을 받은 상당수의 한국 역덕 커뮤니티에서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라는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총 몇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는지는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던 당대의 기록에서도 다르게 나타나고 현대 서양사학계에서도 여러 이설이 있기에 숫자로 공방전의 차수를 논하는 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20차 공방전이나 다른 n차 공방전이라는 표기를 쓰기 보다는 전투가 일어난 연도를 반영한 표기가 더 적합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총 몇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는지는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던 당대의 기록에서도 다르게 나타나고 현대 서양사학계에서도 여러 이설이 있기에 숫자로 공방전의 차수를 논하는 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20차 공방전이나 다른 n차 공방전이라는 표기를 쓰기 보다는 전투가 일어난 연도를 반영한 표기가 더 적합하다.
3. 배경[편집]
4. 전개[편집]
5. 결과[편집]
6. 전후 유럽 및 지중해 세계의 정세[편집]
6.1.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잔존국[편집]
6.1.1. 메흐메트 2세의 칭제 및 황권 강화[편집]
공방전 직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페르시아어로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황제급 칭호 파디샤를 칭하은 오스만 술탄국은 비로소 황제국으로서의 오스만국, 즉 오스만 제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4]
메흐메트 2세는 단순히 중동식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신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만들고, 오스만 튀르크어(오스만어)로 '로마 황제'를 뜻하는 카이세리 룸 칭호 역시 사용했으며,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까지 책봉하며 이교도 정복자 군주가 아닌 정교회의 수호자로서의 로마 황제 역할까지 계승했다.
또한 황제의 실질적인 위상 역시 상승했는데, 7세기 우마이야 왕조를 시작으로 여러 무슬림 군주들이 목표로 삼았고, 오스만 제국이 14세기부터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는 군사적 업적을 황제가 직접 주도하는 원정을 통해 달성했으니, 제국 내에서 그 누구도 황제를 거스를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강화된 위상을 바탕으로 메흐메트 2세는 그동안 황권 강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던 대재상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숙청했고, 그 자리에 근위대장 자아노스 파샤를 앉힘으로써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황권이 신권을 압도하는 체제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단순히 중동식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신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만들고, 오스만 튀르크어(오스만어)로 '로마 황제'를 뜻하는 카이세리 룸 칭호 역시 사용했으며,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까지 책봉하며 이교도 정복자 군주가 아닌 정교회의 수호자로서의 로마 황제 역할까지 계승했다.
또한 황제의 실질적인 위상 역시 상승했는데, 7세기 우마이야 왕조를 시작으로 여러 무슬림 군주들이 목표로 삼았고, 오스만 제국이 14세기부터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는 군사적 업적을 황제가 직접 주도하는 원정을 통해 달성했으니, 제국 내에서 그 누구도 황제를 거스를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강화된 위상을 바탕으로 메흐메트 2세는 그동안 황권 강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던 대재상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숙청했고, 그 자리에 근위대장 자아노스 파샤를 앉힘으로써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황권이 신권을 압도하는 체제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6.1.2. 동로마 잔존국들의 저항과 멸망[편집]
6.1.2.1.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멸망[편집]
동로마 제국의 번국이었던 모레아는 1453년 수도 함락 및 제국 멸망 이후에도 존속했으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이자 공동 군주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내분을 벌이면서 망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형제간의 대립은 디미트리오스가 1460년에 본국을 멸망시킨 원수인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면서 파국에 이르렀고, 오스만과 디미트리오스의 연합군을 이기지 못한 토마스는 결국 모레아를 탈출하여 교황령 로마로 망명했다.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파디샤(황제) 메흐메트 2세의 가신이 되어 모레아 단독통치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파디샤는 그를 에디르네의 별궁에 감금한 후 모레아를 직할령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연금 상태에서 10년을 연명하다 1470년에 사망했다.
한편 로마로 망명한 토마스는 교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5]로 대접받다 146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뒤를 이었으나, 안드레아스는 동로마 부흥운동에 가산을 쏟아붓고도 모두 실패하고 자손도 남기지 못해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그렇게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형제간의 대립은 디미트리오스가 1460년에 본국을 멸망시킨 원수인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면서 파국에 이르렀고, 오스만과 디미트리오스의 연합군을 이기지 못한 토마스는 결국 모레아를 탈출하여 교황령 로마로 망명했다.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파디샤(황제) 메흐메트 2세의 가신이 되어 모레아 단독통치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파디샤는 그를 에디르네의 별궁에 감금한 후 모레아를 직할령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연금 상태에서 10년을 연명하다 1470년에 사망했다.
한편 로마로 망명한 토마스는 교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5]로 대접받다 146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뒤를 이었으나, 안드레아스는 동로마 부흥운동에 가산을 쏟아붓고도 모두 실패하고 자손도 남기지 못해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그렇게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6.1.2.2. 트라페준타 제국과 테오도로 공국의 멸망[편집]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북부의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동로마 잔존국인 트라페준타 제국은 인근의 이슬람 국가인 아크 코윤루 왕조(백양 왕조)와 손잡고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며 동로마가 멸망한 1453년 이후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트라페준타 황제 다비드는 기존의 동맹인 백양 왕조 대신 서방 국가의 십자군을 끌어들이려다 오스만 파디샤(황제) 메흐메트 2세의 분노를 샀고, 결국 1461년에 트라페준타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다비드를 비롯한 황족들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가, 남성 황족들은 처형당하고, 여성 황족들은 파디샤의 하렘에 들어가거나 오스만 귀족 및 장군들의 아내가 되었다.
그나마 다비드의 막내아들인 요르요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하며 목숨을 부지하다가 조지아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이후의 행적이 더이상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므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직계이면서 트라페준타의 황실이었던 메가스 콤니노스 왕조는 그렇게 사실상 멸문되었다.
이후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트라페준타의 번국인 테오도로 공국은 반도 내 영유권을 두고 경쟁하던 제노바 공화국의 속령 가자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국체를 유지했으나, 테오도로 공국 역시 1475년에 오스만 제국의 장군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가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멸망했고 같은 해에 동맹인 가자리아도 멸망했다.
그러나 마지막 트라페준타 황제 다비드는 기존의 동맹인 백양 왕조 대신 서방 국가의 십자군을 끌어들이려다 오스만 파디샤(황제) 메흐메트 2세의 분노를 샀고, 결국 1461년에 트라페준타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다비드를 비롯한 황족들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가, 남성 황족들은 처형당하고, 여성 황족들은 파디샤의 하렘에 들어가거나 오스만 귀족 및 장군들의 아내가 되었다.
그나마 다비드의 막내아들인 요르요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하며 목숨을 부지하다가 조지아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이후의 행적이 더이상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므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직계이면서 트라페준타의 황실이었던 메가스 콤니노스 왕조는 그렇게 사실상 멸문되었다.
이후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트라페준타의 번국인 테오도로 공국은 반도 내 영유권을 두고 경쟁하던 제노바 공화국의 속령 가자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국체를 유지했으나, 테오도로 공국 역시 1475년에 오스만 제국의 장군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가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멸망했고 같은 해에 동맹인 가자리아도 멸망했다.
6.1.2.3.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멸망[편집]
6.2. 전후 서방 가톨릭 세계의 정세[편집]
6.3. 러시아의 제3의 로마 선포[편집]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는 교황청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에게 시집 갔는데, 이는 가톨릭 중심으로 동서 교회 재통합을 이루려는 시도였으나, 이반 3세는 이 결혼을 스스로 동로마 황실의 후계자이면서 정교회의 수호자라 자칭하는 명분으로 활용했고, 그 일환으로 차르를 칭하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했다.
소피아 역시 남편의 이러한 정책을 거들었고 그녀와 이반 3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바실리 3세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모스크바의 류리크 왕조에는 동로마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
소피아와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차르 칭호의 사용을 확정짓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루스 차르국으로 격상시켰는데, 그 아들인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으나, 차르 칭호의 사용은 후대의 로마노프 왕조에서도 이어졌다.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1세는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열강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1721년에 로마 황제의 라틴어 칭호 중 하나였던 임페라토르를 직수입하여 전러시아의 임페라토르(황제)를 칭했으며, 그렇게 성립된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존속했다.
소피아 역시 남편의 이러한 정책을 거들었고 그녀와 이반 3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바실리 3세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모스크바의 류리크 왕조에는 동로마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
소피아와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차르 칭호의 사용을 확정짓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루스 차르국으로 격상시켰는데, 그 아들인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으나, 차르 칭호의 사용은 후대의 로마노프 왕조에서도 이어졌다.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1세는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열강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1721년에 로마 황제의 라틴어 칭호 중 하나였던 임페라토르를 직수입하여 전러시아의 임페라토르(황제)를 칭했으며, 그렇게 성립된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존속했다.
7. 여담[편집]
[1]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2] 일부 잔존국들은 1470년대까지 존속하긴 했다.[3] 오늘날에는 1453년 대신 다른 연도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 연도 또는 특정 국가의 존속을 기준으로 대륙사 또는 세계사의 시대를 나누는 방식 자체가 낡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1453년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 통용되고 있다.[4] 이전에도 오스만은 이미 제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국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으나, 공식적인 칭제는 메흐메트 2세가 처음이었다.[5] 동로마와 달리 여전히 건재했던 신성 로마 황제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로마 황제' 칭호는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