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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
라틴식 제호: '''콘스탄티누스 11세 (Constantinus XI) | |
영문 제호: Constantine XI | |
본명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Κωνσταντίνος Παλαιολόγος) |
별명 | 드라가시스 (Δραγαδης) |
출생 | 1405년 2월 8일 |
사망 | 1453년 5월 29일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A] 성 로마노스 성문 | |
재위 | |
1449년 1월 6일 ~ 1453년 5월 29일 | |
가문 | |
부모 | |
형제 | 형: 요안니스 8세,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등. 동생: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등. |
1. 개요[편집]
2. 이름[편집]
3. 생애[편집]
3.1. 황자 시절[편집]
3.2. 모레아 전제군주 재위[편집]
3.3. 로마 황제 재위[편집]
3.3.1. 황제 즉위[편집]
1448년에 요안니스 8세가 자녀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에게도 제위를 계승할 기회가 오게 되었는데, 이는 요안니스 8세보다 나이 적으면서 콘스탄티노스보다는 나이가 많은 형들이 모두 요안니스 8세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남은 형제들 중에서는 콘스탄티노스가 1순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있던 동생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자신이 선황 요안니스 8세를 임종 직전까지 보좌했으니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콘스탄티노스가 바로 즉위하지는 못하고 제위 계승 분쟁이 생겼는데, 이는 당시 동로마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력을 가진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가 콘스탄티노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콘스탄티노스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토마스와 함께 모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만 당시 동로마 교회가 오스만에 맞서기 위해 서방 가톨릭 교회와 재통합해야 할지 여부를 놓고 내분을 겪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정교회 대관식이 아닌 환호 즉위(Acclamatio)[6]라는 고대 로마 전통 즉위식을 치르고 황제가 되었다.
다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있던 동생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자신이 선황 요안니스 8세를 임종 직전까지 보좌했으니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콘스탄티노스가 바로 즉위하지는 못하고 제위 계승 분쟁이 생겼는데, 이는 당시 동로마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력을 가진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가 콘스탄티노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콘스탄티노스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토마스와 함께 모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만 당시 동로마 교회가 오스만에 맞서기 위해 서방 가톨릭 교회와 재통합해야 할지 여부를 놓고 내분을 겪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정교회 대관식이 아닌 환호 즉위(Acclamatio)[6]라는 고대 로마 전통 즉위식을 치르고 황제가 되었다.
3.3.2. 황제로서의 통치[편집]
3.3.3.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편집]
1451년에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후임 술탄으로 즉위하자, 새로운 술탄이 즉위하면 경쟁자 제거 차원에서 술탄 본인을 제외한 남성 왕족들을 몰살시키는 오스만의 전통에 따라 메흐메트 2세의 형제들 역시 숙청 대상이 되었는데 이때 메흐메트 2세의 사촌인 오르한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르한의 망명을 받아주면서 메흐메트 2세를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려 했으나, 되려 이것이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전면전을 시도하는 요인이 되었다.
1453년 4월 2일부터 시작된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동로마군은 물론이고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시칠리아 왕국 등 서방 가톨릭 국가들의 지원군까지 동원하여 항전했으나, 그렇게 동원한 병력의 총합도 8,000여명에 불과했고, 오스만군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5만에 많으면 30만에 달할[7] 정도로 병력 차가 압도적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르한의 망명을 받아주면서 메흐메트 2세를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려 했으나, 되려 이것이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전면전을 시도하는 요인이 되었다.
1453년 4월 2일부터 시작된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동로마군은 물론이고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시칠리아 왕국 등 서방 가톨릭 국가들의 지원군까지 동원하여 항전했으나, 그렇게 동원한 병력의 총합도 8,000여명에 불과했고, 오스만군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5만에 많으면 30만에 달할[7] 정도로 병력 차가 압도적이었다.
3.3.3.1. 로마의 멸망과 황제의 최후[편집]
압도적인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스 11세와 연합군은 5월 말까지 두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으나, 5월 29일 오스만군의 최후 공세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밀 쪽문인 케르카포르타가 뚫리면서 그 틈을 파고든 오스만군에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고 이후 성 로마노스 문에서 방어전을 지휘하던 콘스탄티노스 11세 역시 최후를 맞이하면서 1,48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 그리고 2,206년을 이어온 로마 문명은 멸망했다.
이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최후에 대해 서술한 동로마 유민들[8]의 기록에서 황제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지 않고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황제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을 모두 떼어낸 후 오스만군을 향해 돌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반면 오스만 측 기록과 후대 서유럽 학자들의 기록에서는 마지막에 겁을 먹고 도망치다가 목이 베였다는 상반된 서술을 남겼는데[9], 이처럼 황제의 최후에 관해 동로마와 오스만, 서유럽 측 기록이 따로 노는 것은 당대에 황제의 시신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에 수도를 탈출하여 동생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있는 모레아로 몽진하거나 아예 서유럽으로 망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공방전 시작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을 넘겨주는 대가로 항복 이후에도 목숨을 부지하거나 망명을 묵인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인물인데, 그런 사람이 성이 함락되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도망친다는 것은 개연성에 맞지 않기에, 튀르키예나 일부 친튀르키예 국가들을 제외한 나라들은 대개 동로마 측 기록을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여론이 우세한 편이다.
이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최후에 대해 서술한 동로마 유민들[8]의 기록에서 황제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지 않고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황제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을 모두 떼어낸 후 오스만군을 향해 돌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반면 오스만 측 기록과 후대 서유럽 학자들의 기록에서는 마지막에 겁을 먹고 도망치다가 목이 베였다는 상반된 서술을 남겼는데[9], 이처럼 황제의 최후에 관해 동로마와 오스만, 서유럽 측 기록이 따로 노는 것은 당대에 황제의 시신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공방전이 시작되기 전에 수도를 탈출하여 동생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있는 모레아로 몽진하거나 아예 서유럽으로 망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공방전 시작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을 넘겨주는 대가로 항복 이후에도 목숨을 부지하거나 망명을 묵인받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인물인데, 그런 사람이 성이 함락되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도망친다는 것은 개연성에 맞지 않기에, 튀르키예나 일부 친튀르키예 국가들을 제외한 나라들은 대개 동로마 측 기록을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여론이 우세한 편이다.
[1] 중세 ~ 현대 그리스어 발음은 콘스탄디노스에 가깝다.[A] 2.1 2.2 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4] 기원전 27년 제정 성립 ~ 서기 1453년 제국 멸망.[5] 기원전 753년 로마 건국 ~ 서기 1453년 로마 멸망.[6] 로마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로 황제를 추대하는 형식의 즉위식으로, 로마 공화정의 시민 정치 전통이 로마 제정 체제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제정 초기 황제들이 거행하던 즉위식이었다.[7] 다만 현대 역사학계에서 30만은 지나치게 과장된 수치로 보고 있다.[8] 미하일 흐리스토불로스, 요르고스 스프란체스 등.[9]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마지막 전투에서 동로마를 돕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로마가 망하면 다음 타깃은 자신들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것일 뿐, 동로마와 서방 가톨릭 국가들의 관계도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고, 따라서 서유럽 측 역사가들 역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최후에 대해서는 오스만 측 역사가들과 비슷한 관점에서 서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