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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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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년
299년
300년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SEVERVS ALEXANDER
파일:세베루스 알렉산데르.jpg
이름
마르쿠스 율리우스 케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MARCVS IVLIVS CESIVS BASSIANVS ALEXSIANVS)
출생
사망
235년 3월 21/22일 (향년 26세)
재위 기간
로마 황제
전임자
후임자
부모
아버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어머니: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형제자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남자형제)[1]
테오클리아(여자형제)[2]
배우자
종교
영묘
마우솔레오 디 몬테 델 그라노[3]

1. 소개2. 생애

1. 소개[편집]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제5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전임 황제이자 사촌 형이었던 엘라가발루스의 기행과 실정으로 실추된 황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온화하고 도덕적인 성품을 지녔으나, 모후인 율리아 마마이아의 과도한 간섭으로 인해 군부의 신뢰를 잃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세베루스 왕조는 막을 내렸으며, 로마는 극심한 혼란기인 3세기의 위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2. 생애[편집]

208년 10월 1일 페니키아의 아르카 카이사레아에서 태어난 그는 할머니 율리아 마에사의 정치적 수완 덕분에 222년 3월 13일 1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치세 초기에는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법학자 울피아누스 등을 중용하며 내치에 힘썼다. 그러나 230년대부터 동쪽의 사산 왕조와 북쪽의 게르만족이 침입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235년 3월 19일,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평화를 구걸하는 유약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분노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마인츠 인근에서 모후와 함께 살해당했다.
[1] 과거에는 남동생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다수에게 알렉산데르의 형으로 평가받는다.[2] 과거에는 여동생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보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이 신빙성 있어, 현재는 알렉산데르의 이복누이이자 율리아 마마이아의 수양딸로 보는 경우가 많다.[3] 로마에 위치해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 황족들의 무덤 중 아우구스투스 영묘, 하드리아누스 영묘 다음으로 크기가 크다. 에트루리아식 굴식 돌방무덤 형태를 빌려 건설된 까닭에 반지의 제왕호빗 골목쟁이네 빌보의 집처럼 생겼다. 다른 영묘와 달리 그 모양이 가장 원형에 근접하게 남아 있다.[4]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좌우명이자 국정 목표다. 알렉산데르는 재위 기간 동안 건설하거나 보수한 모든 공공건축물과 황궁 안에 이 문구를 새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