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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호3. 상징
3.1. 국기3.2. 국가
4. 역사
4.1. 건국 이전4.2. 황제 나폴레옹 1세대관식 4.3. 전성기4.4. 쇠퇴기4.5. 백일천하4.6. 멸망 이후
5. 정치
5.1. 황제5.2. 헌법5.3. 의회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804년부터 1814년까지, 그리고 1815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황제 나폴레옹 1세로서 다스린 제국.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다 멸망했지만 유럽 대륙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국가로, 프랑스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가장 높았던 프랑스의 최전성기였다.

2. 국호[편집]

당대에 사용된 공식 국호는 프랑스 제국이었으며, 제1제국이라는 숫자 명칭은 후대에 루이 나폴레옹이 세운 프랑스 제2제국과의 구분을 위해 생긴 것이다.

국가의 존속 기간이 나폴레옹 개인의 재위 기간과 거의 일치하기에[1], 나폴레옹 제국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3. 상징[편집]

3.1. 국기[편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공화국 시대의 삼색기를 계속 국기로 사용했다.

3.2. 국가[편집]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1799 ~ 1804) 시대부터 사용하던 출발의 노래를 계속 사용했다.

4. 역사[편집]

4.1. 건국 이전[편집]

중세 이래 수백년간 프랑스를 지배해온 프랑스 왕국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거쳐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무너지고 프랑스 제1공화국이 들어섰다.

제1공화국은 잦은 대외적으로는 혁명에 반대하는 대프랑스 동맹국들을 상대하는 혁명 전쟁에 시달리고, 내부적으로는 혁명 세력 간의 노선 차이로 인한 정쟁과 쿠데타, 반혁명 세력의 봉기를 겪으며 혼란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르시카 출신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내 반혁명 세력 진압 및 대외 원정에서 군공을 쌓으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고, 젊은 나이에 장성 계급을 받은 그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2]를 비롯한 정치인들과 손잡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의 총재정부를 뒤엎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당초 브뤼메르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은 시에예스였으나 나폴레옹은 시에예스를 반강제로 은퇴시키며 쿠데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802년에는 종신 통령이 되어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에서 종신 집권을 계속 유지하는 명분상 한계가 뚜렸했기에, 그는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이를 합리화하려 했다.

4.2. 황제 나폴레옹 1세대관식 [편집]

나폴레옹은 프랑스 호헌원로원[3]으로부터 황제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4], 국민투표에서 99% 이상의 찬성을 받음으로써[5] 공화국에서 제국으로의 국체 전환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로마 공화정이 사실상의 제정원수정으로 이행한 전례가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내세워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이 역사 발전의 필연적 과정임을 주장했고, 프랑스라는 국가를 소유한 봉건적 황제가 아닌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는 군주라는 의미를 담은 '프랑스인의 황제' 칭호를 채택하여 공화정이 구체제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혁명제국이자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이라 합리화함으로써 공화주의자들을 설득했다.

그의 황제 대관식교황로마에서 납치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끌고 오면서 치러졌는데, 교황 집전 대관식이라는 가톨릭 황제 대관식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교황이 머리에 씌어주는 관을 받는 게 아닌 스스로 관을 들고 머리에 쓰는 파격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써 구체제와의 단절을 보여줬다.

4.3. 전성기[편집]

나폴레옹은 국내에서 황제를 칭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의 황제국신성 로마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성국을 탈퇴시키며 사실상 해체 직전으로 몰아넣었고, 1805년에는 신성 로마 황제 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6]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맹군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격파한 후, 1806년에 구 신성 로마 구성국이 가입한 라인 동맹을 창설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포르투갈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동쪽으로는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폴란드까지 진격하여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으며,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에 괴뢰국들을[7] 세우고 북쪽으로는 북유럽 국가 스웨덴의 왕세자 겸 섭정 자리에 자신의 측근인 베르나도트를 꽂아넣는 등 동서남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절정에 달한 국력을 과시했다.

한편 그의 아내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나폴레옹은 그녀와 이혼하고 프란츠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는데[8], 그렇게 얻은 아들 나폴레옹 2세는 로마 왕으로 책봉되었다.

4.4. 쇠퇴기[편집]

나폴레옹유럽에서 그에게 굴복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가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 제국이 이를 어기고 몰래 영국과의 교역을 계속하자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들이 대관식을 치르는 도시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성지인 모스크바[9]까지 점령했으나, 러시아의 혹한과 청야전술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후퇴하는 처지에 몰렸고, 1813년에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프랑스 동맹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프랑스 본토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라는 프랑스 스스로를 제외한 유럽 열강들이 동시에 본토를 침공하자 아무리 나폴레옹이라 해도 당해내긴 어려웠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4년 퇴위를 선언한 후 대프랑스 동맹군에 항복하고 이탈리아의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4.5. 백일천하[편집]

나폴레옹의 유배 이후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정복고가 실현되었으나, 유배 1년만인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고 파리로 진군하여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자 전후처리를 위해 빈 회의를 진행 중이던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다시 군을 소집하여 나폴레옹을 저지하려 했고, 현재 벨기에 영토인 워털루 일대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워털루 전투 초반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대프랑스 동맹국들 상대로 호각으로 맞붙었으나, 결국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했고 이로써 나폴레옹의 정치 생명도 사실상 끝장났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함으로써 자신이 퇴위한 이후에도 제국 자체는 유지하려 했으나,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프랑스 제1제국은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4.6. 멸망 이후[편집]

나폴레옹은 대서양 한복판의 영국령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가 1821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 역시 1832년에 사망하여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인 루이 나폴레옹이 명목상의 프랑스 제위를 요구했는데,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851년에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고 1852년에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함으로써, 워털루 전투 이후 35년만에 프랑스 제국을 제2제국으로서 부활시켰다.

5. 정치[편집]

5.1. 황제[편집]

5.2. 헌법[편집]

  • 1804년 프랑스 헌법
  • 1815년 프랑스 헌법

5.3. 의회[편집]

  • 호헌원로원
  • 입법원
  • 호민원

명목상 삼원제를 채택했지만 호헌원로원을 제외한 두 의회는 유명무실해져서 사실상 단원제나 다름 없었다.

6. 관련 문서[편집]

[1] 1815년에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2] 성직자 출신으로 혁명 초기의 국민의회 시절부터 중앙정계에서 활약한 거물이었다.[3]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인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 시대에 설치되었다.[4] 물론 실질적으로는 나폴레옹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5] 실제로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았다는 걸 감안해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찬성율이었지만, 이에 대해 부정투표라며 이의를 제기할만한 정치 세력은 적어도 프랑스 국내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6]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1804년에 신성 로마 제국과는 별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창설한 상태였다.[7] 본인이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재위하는 이탈리아 왕국을 비롯한 여러 괴뢰국이 존재했다.[8] 당연히 프란츠 2세는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아우스터리츠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그는 나폴레옹에게 딸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9] 당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