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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제1차 부르봉 왕정복고2.2. 제2차 부르봉 왕정복고2.3. 멸망 이후
3. 정치
3.1. 역대 국왕3.2. 의회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프랑스로 귀환한 1814년 또는 1815년 이후부터[1] 1830년까지 유지된 프랑스의 왕정 체제.

부르봉 왕정복고는 어디까지나 시대 구분을 위한 통칭이며, 공식적으로는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과 같은 국호를 사용했다.

2. 역사[편집]

2.1. 제1차 부르봉 왕정복고[편집]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이탈리아의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승전국들은 혁명으로 왕위를 상실한 부르봉 왕조의 수장 프로방스 백작 루이[2]프랑스 국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부르봉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1년만인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고 귀국하여 파리로 진군하자 루이 18세는 왕위를 버리고 다시 프랑스를 탈출했다.

2.2. 제2차 부르봉 왕정복고[편집]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다시 퇴위하고 대서양 한복판의 오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자, 루이 18세가 귀국하여 복위했다.

루이 18세는 공식적으로는 혁명 이전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내세웠으나, 혁명 이후 공직에 등용된 인사들과 나폴레옹 밑에서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인사들도 체제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으면 계속 등용했으며, 혁명의 유산인 의회 및 선거 제도 역시 제한적으로 유지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안정적으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824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으로 즉위한 샤를 10세는 노골적으로 혁명 이전의 구귀족들만을 옹호하며 의회 및 부르주아 계급과 대립했고,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자 3일만에 퇴위하고 말았다.

샤를 10세는 본인이 퇴위하더라도 자손들의 왕위는 보장받기 위해 장남 루이 앙투안을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국왕 루이 19세로 재위시킨 후[3], 차남의 아들인 샹보르 백작 앙리[4]를 국왕 앙리 5세로 옹립했으나[5], 의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앙리 역시 일주일만에 폐위시킴으로써 꼼수를 통해 왕조를 유지하려던 계획마저 좌절되었다.

2.3. 멸망 이후[편집]

샤를 10세와 루이 앙투안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망명했다가 망명지인 오스트리아 제국 괴르츠[6]에서 사망했다.

7월 혁명 당시 10살의 어린아이였던 샹보르 백작 앙리는 본인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마저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이후에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국과 제2제국까지 무너진 이후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왕위를 되찾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겐 왕위에 오르더라도 본인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었고, 하필이면 당시 프랑스 왕당파가 그의 후계자로 거론한 인물이 루이 필리프의 손자였기에 그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여 제3차 부르봉 왕정복고는 실현되지 않았고,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앙리의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한 후 루이 필리프의 가문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보다 부계 혈통상 거리가 더 먼 스페인 보르본 왕조에서 후계자를 찾아서, 현재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위는 스페인 왕족 출신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7]이 요구하고 있다.

3. 정치[편집]

3.1. 역대 국왕[편집]

  • 루이 18세 (1814 ~ 1815, 1815 ~ 1824)
  • 샤를 10세 (1824 ~ 1830)
  • 루이 19세[임시][9] ( 1830)
  • 앙리 5세[임시][11] (1830)

3.2. 의회[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1815년에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이 귀환하여 황제로 복위했다.[2] 루이 16세는 혁명 당시에 처형되었고 루이 17네는 혁명정부에 억류당한 상태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루이 17세의 숙부인 프로방스 백작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고 있었다.[3] 루이 앙투안도 아버지 못지 않은 절대왕정 옹호자였기에 혁명 세력이 그를 왕으로 인정할 리 없었다.[4] 루이 앙투안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사실상 차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겨지고 있었다.[5] 앙리는 아직 10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기에 즉위하더라도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샤를 10세는 어린 손자를 즉위시키면 절대군주가 아닌 입헌군주를 원하던 혁명 세력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6] 1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왕국 영토인 고리치아(Gorizia)가 되었는데, 샤를 10세와 루이 앙투안이 안장된 수도원을 비롯한 동부 지역은 2차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할양되어 현재 슬로베니아 노바 고리차(Nova Gorica)가 되었다.[7] 프랑스식 이름은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 명목상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왕호는 루이 20세.[임시] 8.1 8.2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퇴위한 이후 양위받았으나,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9]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11] 샹보르 백작 앙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