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2. 명단[편집]
2.1. 전신[편집]
2.1.1. 프랑크인의 왕[편집]
2.1.2. 서프랑크인의 왕[편집]
2.2. 혁명 이전 프랑스 왕국(앙시앵 레짐)[편집]
2.2.1. 카페 왕조(직계)[1][편집]
2.2.2. 발루아 왕조[편집]
2.2.2.1. 발루아 왕조(직계)[편집]
2.2.2.2. 발루아-오를레앙 왕조[편집]
대수 | 왕호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23 |
2.2.2.3. 발루아-앙굴렘 왕조[편집]
2.2.3. 부르봉 왕조[편집]
2.3. 명목상 국왕(부르봉 왕조)[편집]
2.4. 부르봉 왕정복고[편집]
2.5. 7월 왕정(부르봉-오를레앙 왕조)[편집]
3. 관련 문서[편집]
[1] 후술할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 부르봉-오를레앙 왕조도 카페 왕조에 속한다.[2] 존엄왕 필리프(Phillippe Augueste).[3] 사자왕 루이(Louis le Lion).[4] 성왕 루이.[5] 나바라 국왕 루이스 1세,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 시작.[6] 나바라 국왕 호아네스 1세.[7] 나바라 국왕 필리페 2세.[8]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1세.
아들을 남기지 못해서 카페 직계가 단절되고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 또한 해체되었다.[9] 백년전쟁 시작.[10] 승리왕 샤를(Charles le Victoriex). 백년전쟁을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했다.[11] 발루아 직계 단절.[12]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남편.[1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헨리크 발레지.[14] 앙리 대왕(Henri le Gran).
프랑스 국왕 즉위 이전부터 나바라 국왕 헨리케 3세로서 재위하고 있었기에, 카페 직계 단절 이후 해체되었던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이 재건되었다.[15] 나바라 국왕 루이스 2세이기도 했으나 나바라 왕국을 정식으로 프랑스에 병합하여, 이후부터 나바라 국왕 칭호는 '프랑스와 나바르(나바라)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게 되었다.[16] 루이 대왕 또는 태양왕 루이.[17] 루이 14세의 증손자. 루이 14세의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손자 프티 도팽 루이가 각각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증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다.[18]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 페르디낭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1791년 프랑스 헌법 제정 이후부터는 프랑스인의 왕을 칭했는데, 1792년 왕정 폐지와 함께 폐위된 후 1793년 처형되었다.[19] 혁명정부에 의해 폐위된 이후에도 왕당파들에 의해 처형 직전까지 국왕으로 간주되었다.[20] 루이 16세의 아들. 혁명정부에 의해 감금당한 상태였지만 왕당파는 루이 16세 처형 이후부터 그를 프랑스 국왕으로 간주했다.[21]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루이 17세의 숙부. 루이 17세의 사망이 확인된 이후부터 망명지에서 프랑스 국왕을 자칭했다.[22]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여 왕정복고가 실현되자 귀국하여 정식으로 즉위했으나,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진군하자 다시 해외로 망명했다.[23] 나폴레옹이 황제로 복위했으며, 루이 18세는 망명지에서 명목상 왕위를 주장했다.[24]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다시 퇴위하자 귀국하여 복위했다.[25]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동생, 루이 17세의 숙부,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26] 샤를 10세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퇴위한 직후 20분간 형식적으로 재위하고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했다.[27] 샤를 10세의 손자이자 루이 19세(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의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 루이 19세의 형식적 재위 이후 양위받았으나 이미 혁명 세력이 실권을 장악한 상태라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폐위되었다.[28]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인의 왕을 칭하며 통치했으며, 1848년 2월 혁명으로 퇴위했다.[29] 프랑스 국왕 및 프랑스인의 왕 칭호의 원형이 된 칭호.
아들을 남기지 못해서 카페 직계가 단절되고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 또한 해체되었다.[9] 백년전쟁 시작.[10] 승리왕 샤를(Charles le Victoriex). 백년전쟁을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했다.[11] 발루아 직계 단절.[12]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남편.[1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헨리크 발레지.[14] 앙리 대왕(Henri le Gran).
프랑스 국왕 즉위 이전부터 나바라 국왕 헨리케 3세로서 재위하고 있었기에, 카페 직계 단절 이후 해체되었던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이 재건되었다.[15] 나바라 국왕 루이스 2세이기도 했으나 나바라 왕국을 정식으로 프랑스에 병합하여, 이후부터 나바라 국왕 칭호는 '프랑스와 나바르(나바라)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게 되었다.[16] 루이 대왕 또는 태양왕 루이.[17] 루이 14세의 증손자. 루이 14세의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손자 프티 도팽 루이가 각각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증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다.[18]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 페르디낭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1791년 프랑스 헌법 제정 이후부터는 프랑스인의 왕을 칭했는데, 1792년 왕정 폐지와 함께 폐위된 후 1793년 처형되었다.[19] 혁명정부에 의해 폐위된 이후에도 왕당파들에 의해 처형 직전까지 국왕으로 간주되었다.[20] 루이 16세의 아들. 혁명정부에 의해 감금당한 상태였지만 왕당파는 루이 16세 처형 이후부터 그를 프랑스 국왕으로 간주했다.[21]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루이 17세의 숙부. 루이 17세의 사망이 확인된 이후부터 망명지에서 프랑스 국왕을 자칭했다.[22]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여 왕정복고가 실현되자 귀국하여 정식으로 즉위했으나,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진군하자 다시 해외로 망명했다.[23] 나폴레옹이 황제로 복위했으며, 루이 18세는 망명지에서 명목상 왕위를 주장했다.[24]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다시 퇴위하자 귀국하여 복위했다.[25]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동생, 루이 17세의 숙부,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26] 샤를 10세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퇴위한 직후 20분간 형식적으로 재위하고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했다.[27] 샤를 10세의 손자이자 루이 19세(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의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 루이 19세의 형식적 재위 이후 양위받았으나 이미 혁명 세력이 실권을 장악한 상태라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폐위되었다.[28]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인의 왕을 칭하며 통치했으며, 1848년 2월 혁명으로 퇴위했다.[29] 프랑스 국왕 및 프랑스인의 왕 칭호의 원형이 된 칭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