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2.1. 앙시앵 레짐의 모순[편집]
2.2. 프랑스 왕국의 재정난과 중과세[편집]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왕국은 겉으로는 유럽 최강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잦은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을 비롯한 과도한 건축, 토목 공사 지출은 그 후손들인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대에 부담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루이 15세 시대까지는 물려받은 유산과 유능한 재무관료들의 활약으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선왕들보다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루이 16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빚더미에 오르면서, 재정난이 프랑스 정계의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 역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근대적인 세금 및 예산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시대적 한계상 아무리 온갖 세금을 쥐어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민심 이반만 심해졌다.
그나마 루이 15세 시대까지는 물려받은 유산과 유능한 재무관료들의 활약으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선왕들보다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루이 16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빚더미에 오르면서, 재정난이 프랑스 정계의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 역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근대적인 세금 및 예산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시대적 한계상 아무리 온갖 세금을 쥐어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민심 이반만 심해졌다.
3. 주요 정당 및 정파[편집]
4. 발단[편집]
4.1. 삼부회와 국민의회[편집]
4.2. 테니스 코트의 맹세[편집]
의회의 개회와 폐회가 국왕의 고유 권한이었던 프랑스 왕국에서 의원들이 사사로이 '국민의회'라는 별도의 의회를 만든 것은 국왕 루이 16세 입장에선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그는 국민의회 의원들에게 당장 자진 해산하고 삼부회에 복귀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죄드폼'이라는 테니스와 유사한 스포츠를 위해 지어진 경기장에서 모여 회의를 열어 해산 명령을 거부했고, 더 나아가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죄드폼의 맹세' 또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죄드폼'이라는 테니스와 유사한 스포츠를 위해 지어진 경기장에서 모여 회의를 열어 해산 명령을 거부했고, 더 나아가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죄드폼의 맹세' 또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5. 전개[편집]
5.1.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편집]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인해 국왕과 국민의회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자,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국왕이 지방군을 끌고 와서 국민의회를 무력 진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은 군에 맞서 스스로 무장하기로 결정하고 7월 14일에 무기고로도 쓰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올랐다.
파리 시민들의 무력 시위에 놀란 루이 16세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국민의회를 합법적인 의회로 승인했고, 이에 따라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제헌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에 앞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는데 이는 유럽 대륙 최초의 인권 선언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군에 맞서 스스로 무장하기로 결정하고 7월 14일에 무기고로도 쓰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올랐다.
파리 시민들의 무력 시위에 놀란 루이 16세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국민의회를 합법적인 의회로 승인했고, 이에 따라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제헌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에 앞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는데 이는 유럽 대륙 최초의 인권 선언이었다.
5.2.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편집]
인권 선언 이후에도 프랑스의 경제난은 여전했는데 이를 참지 못한 파리의 하층민(상퀼로트)들이 국왕 일가가 머물던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기혼 여성들이 선봉에 서고 남편들은 뒤에서 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유 습격 못지 않게 과격한 분위기로 흘러가 시위대가 왕궁에 난입하여 근위병들을 살해하는 유혈사태로 번졌고, 결국 이에 굴복한 루이 16세는 파리 시내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시위대는 기혼 여성들이 선봉에 서고 남편들은 뒤에서 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유 습격 못지 않게 과격한 분위기로 흘러가 시위대가 왕궁에 난입하여 근위병들을 살해하는 유혈사태로 번졌고, 결국 이에 굴복한 루이 16세는 파리 시내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5.3. 1791년 헌법과 입헌 왕국[편집]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공식 국호는 프랑스인의 왕국[1]으로 변경되고, 루이 16세 역시 프랑스 시민을 대표하는 왕을 뜻하는 '프랑스인의 왕'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헌법 제정이라는 임무를 완수한 제헌국민의회는 해산되고 입법의회라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었다.
또한 헌법 제정이라는 임무를 완수한 제헌국민의회는 해산되고 입법의회라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었다.
5.4. 바렌 사건과 혁명 전쟁의 시작[편집]
5.5. 1792년 8월 10일 봉기와 공화정 수립[편집]
5.6. 1793년 5월 31일 봉기[편집]
프랑스 제1공화국 초기 국민공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왕정 폐지에는 찬성하나 루이 16세 개인에게는 동정적인 온건 공화주의 세력인 지롱드파[2]였다.
그러나 강경 공화파인 자코뱅(몽테뉴파)[3]는 루이 16세를 반혁명 혐의로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처형되었다.
이렇게 지롱드와 자코뱅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1793년 3월 방데 지방에서 반혁명 봉기가 일어나고, 혁명군을 지휘하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반혁명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자, 두 정파 사이의 정쟁은 다시 불이 붙었다.
결국 1793년 5월 31일에 이르러 자코뱅의 지지 기반인 상퀼로트가 또다시 봉기했고, 이로써 지롱드파 정권은 무너지고 자코뱅 일당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강경 공화파인 자코뱅(몽테뉴파)[3]는 루이 16세를 반혁명 혐의로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처형되었다.
이렇게 지롱드와 자코뱅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1793년 3월 방데 지방에서 반혁명 봉기가 일어나고, 혁명군을 지휘하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반혁명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자, 두 정파 사이의 정쟁은 다시 불이 붙었다.
결국 1793년 5월 31일에 이르러 자코뱅의 지지 기반인 상퀼로트가 또다시 봉기했고, 이로써 지롱드파 정권은 무너지고 자코뱅 일당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5.7. 자코뱅(몽테뉴파)의 공포정치[편집]
자코뱅 중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한 파벌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파벌이었는데, 그는 최측근인 생쥐스트와 함께 공포정치를 주도하며 지롱드파는 물론이고 자코뱅 내부 온건파인 당통파의 수장인 조르주 당통마저 처형했다.
한편 로베스피에르파보다도 과격한 혁명 노선을 추구한 에베르파와 격앙파(앙라제)라는 자코뱅 초강경파도 있었는데, 해당 파벌들의 수장인 자크 르네 에베르와 자크 루 역시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되었다.
한편 로베스피에르파보다도 과격한 혁명 노선을 추구한 에베르파와 격앙파(앙라제)라는 자코뱅 초강경파도 있었는데, 해당 파벌들의 수장인 자크 르네 에베르와 자크 루 역시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되었다.
5.8. 테르미도르 반동[편집]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자코뱅 온건파는 국민공회 내에 잔존한 지롱드파와 함께 1794년 쿠데타를 일으켜 로베스피에르파 정권을 타도했는데, 이를 혁명의 급진화에 제동을 걸고 온건 노선으로 되돌렸다 하여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한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의 프랑스 제1공화국 역시 혁명 정신의 계승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나, 오늘날에는 사실상 해당 사건을 끝으로 프랑스 혁명이 종식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의 프랑스 제1공화국 역시 혁명 정신의 계승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나, 오늘날에는 사실상 해당 사건을 끝으로 프랑스 혁명이 종식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6.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의 전개[편집]
6.1. 총재정부[편집]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집권한 이른바 '테르미도르파'는 신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1795년에 총재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5명의 총재가 권력을 나눠가지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탓에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프랑스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무너졌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5명의 총재가 권력을 나눠가지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탓에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프랑스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무너졌다.
6.2. 통령정부와 제1제국[편집]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계획을 처음 입안한 인물은 1789년 국민의회 시절부터 활동한 성직자 출신 거물 정치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였고, 군을 동원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단지 행동대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정치에 문외한일 거라는 정치인들의 예상을 뒤엎고 권력을 독점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02년에 이르러 나폴레옹은 스스로 종신 통령이 되어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고, 1804년에는 공식적으로 교황이 집전하는[4] 황제 나폴레옹 1세로서의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프랑스 제1공화국을 붕괴시키고 프랑스 제1제국을 세웠다.
다만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소유한 봉건적 황제가 아닌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는 황제, 즉 '프랑스인의 황제'를 칭했고 로마 공화정이 사실상의 제정인 원수정으로 이행한 전례가 있다는 점을 들어 혁명 이전 군주정으로의 회귀가 아닌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을 표방했으며,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계속 국기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명목상으로나마 혁명의 계승을 주장하는 정권의 프랑스 통치는 1814년 나폴레옹의 1차 몰락과 1815년 백일천하를 거쳐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가 돌아와 복고왕정이 수립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리고 1802년에 이르러 나폴레옹은 스스로 종신 통령이 되어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고, 1804년에는 공식적으로 교황이 집전하는[4] 황제 나폴레옹 1세로서의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프랑스 제1공화국을 붕괴시키고 프랑스 제1제국을 세웠다.
다만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소유한 봉건적 황제가 아닌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는 황제, 즉 '프랑스인의 황제'를 칭했고 로마 공화정이 사실상의 제정인 원수정으로 이행한 전례가 있다는 점을 들어 혁명 이전 군주정으로의 회귀가 아닌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을 표방했으며,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계속 국기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명목상으로나마 혁명의 계승을 주장하는 정권의 프랑스 통치는 1814년 나폴레옹의 1차 몰락과 1815년 백일천하를 거쳐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가 돌아와 복고왕정이 수립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7. 관련 문서[편집]
[1] 훗날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도 같은 국호를 사용했다.[2] 혁명이 진행되던 당대에 사용된 명칭은 아니고 1847에 '지롱드당의 역사'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붙은 이름이다. 이는 해당 정파의 주요 인물들이 지롱드 지방 출신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3] 본래 자코뱅은 강경 공화파인 몽테뉴파는 물론이고 온건 공화파(지롱드파)와 입헌군주파(푀양파)까지 포괄하는 조직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사실상 몽테뉴파와 동일시되었다. 한편 몽테뉴라는 이름은 이들이 국민의회의 높은 뒷좌석에 앉아서 산 위에 올라간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산악파'로 번역되기도 한다.[4] 교황령 로마에서 교황을 납치(...)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끌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