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411년 서로마 제국의 라인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부르군트족은 로마의 갈리아 속주 동남부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부르군트 왕국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갈리아 침공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고, 국왕 군터가 전사하는 등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부르군트 왕국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갈리아 침공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고, 국왕 군터가 전사하는 등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2.2. 군도바트와 부르군트의 전성기[편집]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 게르만 연합군이 아틸라의 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부르군트는 가까스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군도바두스(군도바트)가 왕위에 올라 부르군트를 부흥시켰는데 그는 서로마 말기 실권자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의 조카였기에, 리키메르 사후 서로마 중앙정부를 장악한 후 서로마 황제 올리브리우스를 폐위시키고 글리케리우스 황제를 옹립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동로마군 지휘관 출신 율리우스 네포스가 글리케리우스를 축출하고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자 군도바트는 서로마 정권 장악을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부르군트 왕국의 기존 영토는 보존하며 서로마를 위협했다.
이후 군도바두스(군도바트)가 왕위에 올라 부르군트를 부흥시켰는데 그는 서로마 말기 실권자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의 조카였기에, 리키메르 사후 서로마 중앙정부를 장악한 후 서로마 황제 올리브리우스를 폐위시키고 글리케리우스 황제를 옹립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동로마군 지휘관 출신 율리우스 네포스가 글리케리우스를 축출하고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자 군도바트는 서로마 정권 장악을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부르군트 왕국의 기존 영토는 보존하며 서로마를 위협했다.
2.3. 말기[편집]
군도바트의 사망과 함께 부르군트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는데, 6세기 초부터 부르군트는 프랑크 왕국의 침공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534년 완전히 프랑크에 복속되었다.
2.4. 멸망 이후[편집]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부르군트라는 지명 자체는 남았는데, 프랑크 왕국의 군주들은 스스로 '부르군트인의 왕'을 칭하며 부르군트 유민들을 회유했고, 해당 칭호는 프랑크 왕국마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이후에도 살아남아,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로 부르군트 왕국이라는 나라가 다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해당 왕국(부르군트 제2왕국)이 세워진 시점에선 이미 독자적인 민족으로서의 부르군트족은 타민족에 동화되어 사라진 이후였기에, 어디까지나 명분과 영토 면에서의 계승이긴 하다.
한편 서프랑크 왕국을 거쳐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옛 부르군트 왕국령에는 부르고뉴 공국이 세워졌는데, 부르고뉴라는 명칭은 지금도 프랑스의 최상위 행정구역(레지옹) 중 하나인 '부르고뉴-프랑슈-콩테'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해당 왕국(부르군트 제2왕국)이 세워진 시점에선 이미 독자적인 민족으로서의 부르군트족은 타민족에 동화되어 사라진 이후였기에, 어디까지나 명분과 영토 면에서의 계승이긴 하다.
한편 서프랑크 왕국을 거쳐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옛 부르군트 왕국령에는 부르고뉴 공국이 세워졌는데, 부르고뉴라는 명칭은 지금도 프랑스의 최상위 행정구역(레지옹) 중 하나인 '부르고뉴-프랑슈-콩테'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