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국호: '동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3.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이어진 연속성의 요소4. 당대인들의 인식5. 민족, 언어, 문화 연속성에 관한 오해 및 반박
5.1. 라틴, 그리스 정체성과 로마 연속성의 관계
6. 관련 문서5.1.1. 라틴인 대신 그리스인이 주도하니까 로마가 아니다?5.1.2.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사용하니까 로마가 아니다?5.1.3. 라틴 문화 대신 그리스 문화가 주류니까 로마가 아니다?
5.2. 로마 다신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이 국가 연속성과 직결된 문제인가?1. 개요[편집]
2. 국호: '동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편집]
지금도 서구권에서는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보다는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표현이 해당 국가가 존속하던 당대에 사용된 적은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100년 이상 지난 155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역사집'이라는 저서를 편찬하면서 만들어낸 용어로, 동로마가 존속하던 당시에는 동로마인들 스스로는 물론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다투던 신성 로마 제국 측도 사용한 적 없는 신조어였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라는 국호 역시 당대에 사용된 적이 없는 신조어라는 점에 있어서는 비잔티움 제국과 큰 차이가 없긴 하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 당대인들의 인식과는 상관 없이 로마 왕국[1] - 로마 공화국[2] - 로마 제국[3]이라는 구분이 통용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비록 당대에 없던 방위명이 붙었을지언정 로마와의 연속성이 반영된 동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은 해당 국가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아예 로마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비잔티움 제국만큼 어색하지는 않다.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100년 이상 지난 155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역사집'이라는 저서를 편찬하면서 만들어낸 용어로, 동로마가 존속하던 당시에는 동로마인들 스스로는 물론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다투던 신성 로마 제국 측도 사용한 적 없는 신조어였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라는 국호 역시 당대에 사용된 적이 없는 신조어라는 점에 있어서는 비잔티움 제국과 큰 차이가 없긴 하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 당대인들의 인식과는 상관 없이 로마 왕국[1] - 로마 공화국[2] - 로마 제국[3]이라는 구분이 통용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비록 당대에 없던 방위명이 붙었을지언정 로마와의 연속성이 반영된 동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은 해당 국가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아예 로마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비잔티움 제국만큼 어색하지는 않다.
3.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이어진 연속성의 요소[편집]
4. 당대인들의 인식[편집]
4.1. 동로마인들의 인식[편집]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 칭했으며, 로마인의 땅을 뜻하는 로마니아라는 국호 역시 사용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시민권자들은 혈통에 상관 없이 스스로를 로마인[4]라 불렀고, 제국의 공용어인 중세 그리스어는 로마어(로메이카)라 했다.
이는 서방의 카롤루스 제국 및 신성 로마 제국이 형성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동로마인들은 서방 제국이 제국을 칭하는 것까진 용인해도 로마 제국을 칭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서방 제국 측이 '그리스인의 제국' 운운하는 국서를 보내는 것은 외교적 도발로 간주되었다.
또한 서방 제국 측이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동로마 황제들은 이보다 더 급을 높여서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시민권자들은 혈통에 상관 없이 스스로를 로마인[4]라 불렀고, 제국의 공용어인 중세 그리스어는 로마어(로메이카)라 했다.
이는 서방의 카롤루스 제국 및 신성 로마 제국이 형성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동로마인들은 서방 제국이 제국을 칭하는 것까진 용인해도 로마 제국을 칭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서방 제국 측이 '그리스인의 제국' 운운하는 국서를 보내는 것은 외교적 도발로 간주되었다.
또한 서방 제국 측이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동로마 황제들은 이보다 더 급을 높여서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4.1.1. 동로마인들의 로마시에 대한 인식[편집]
4.2. 외국인들의 인식[편집]
4.2.1. 서방 기독교 세계의 인식[편집]
800년 카롤루스의 대관식 이전까지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데는 큰 이견이 없었다.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동로마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를 믿으며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았고 이는 해당 국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에서 동로마가 로마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것은 800년 카롤루스의 서방 황제 대관식이었는데, 그 대관식 역시 갑자기 서로마 황제위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게 아니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킨 이리니가 남성만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을 깨고 여제로 즉위한 상황을 황제위가 비어있는 공위 상태로 간주하고 벌인 일이었다.
동로마에서 이리니가 폐위되고 남성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롤루스가 황제위를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동로마를 완전히 무시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니키포로스의 후계자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의 평화 조약에서 본인의 '황제' 지위는 인정받되 '로마 황제'는 동로마 황제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타협을 맺었다.
물론 이러한 타협이 영구적으로 지속된 건 결코 아니라서 해당 조약의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없어진 이후에는 서방 제국 측도 다시 공공연하게 로마 제국을 칭하기 시작했는데,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외교 관계가 우호적일 때는 동로마가 로마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다가도 외교적으로 대립할 때는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부르면서 도발을 일삼았다.
1204년 서방 가톨릭 영주들로 구성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세운 라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니아 제국을 칭했는데, 이는 동로마인들 스스로가 자국을 로마니아(로마인의 땅)이라 부르던 것을 십자군이 수용한 것이었다.
만약 십자군이 동로마가 로마임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면 위에서 말한 '그리스인의 제국' 내지는 '그리스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겠지만, 그들 역시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슨 못했고,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정통성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4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맹주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스스로 로마 제국 3/8의 주인이라 자처했는데, 굳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을 거론하지 않고 로마를 들먹이며 3/8이라는 숫자를 집어넣은 것은 곧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긍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통성 역시 강조하는 효과를 본다는 점에서 라틴 제국이 로마니아 제국을 칭한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동로마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를 믿으며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았고 이는 해당 국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에서 동로마가 로마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것은 800년 카롤루스의 서방 황제 대관식이었는데, 그 대관식 역시 갑자기 서로마 황제위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게 아니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킨 이리니가 남성만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을 깨고 여제로 즉위한 상황을 황제위가 비어있는 공위 상태로 간주하고 벌인 일이었다.
동로마에서 이리니가 폐위되고 남성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롤루스가 황제위를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동로마를 완전히 무시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니키포로스의 후계자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의 평화 조약에서 본인의 '황제' 지위는 인정받되 '로마 황제'는 동로마 황제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타협을 맺었다.
물론 이러한 타협이 영구적으로 지속된 건 결코 아니라서 해당 조약의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없어진 이후에는 서방 제국 측도 다시 공공연하게 로마 제국을 칭하기 시작했는데,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외교 관계가 우호적일 때는 동로마가 로마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다가도 외교적으로 대립할 때는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부르면서 도발을 일삼았다.
1204년 서방 가톨릭 영주들로 구성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세운 라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니아 제국을 칭했는데, 이는 동로마인들 스스로가 자국을 로마니아(로마인의 땅)이라 부르던 것을 십자군이 수용한 것이었다.
만약 십자군이 동로마가 로마임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면 위에서 말한 '그리스인의 제국' 내지는 '그리스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겠지만, 그들 역시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슨 못했고,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정통성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4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맹주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스스로 로마 제국 3/8의 주인이라 자처했는데, 굳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을 거론하지 않고 로마를 들먹이며 3/8이라는 숫자를 집어넣은 것은 곧 동로마의 로마 정체성을 긍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통성 역시 강조하는 효과를 본다는 점에서 라틴 제국이 로마니아 제국을 칭한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4.2.2. 슬라브 및 동방 기독교 세계의 인식[편집]
4.2.3. 이란 및 이슬람 세계의 인식[편집]
5. 민족, 언어, 문화 연속성에 관한 오해 및 반박[편집]
5.1. 라틴, 그리스 정체성과 로마 연속성의 관계[편집]
5.1.1. 라틴인 대신 그리스인이 주도하니까 로마가 아니다?[편집]
그리스인은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이전부터 남이탈리아에 마그나 그라이키아라는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한 상태였고, 기원전 3세기경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상당수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라틴화되지 않고 남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기원전 1세기 초 동맹지 전쟁 직후에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모두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다.
즉, 로마 제국 이전의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는 이미 상당수의 그리스계 시민권자를 포용한 국가였다.
또한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 본토마저 로마에 정복당했고,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 지중해 일대의 헬레니즘 국가들마저 로마령이 되었으며, 3세기에는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을 통해 그리스인을 포함한 제국 내에서 태어난 모든 자유민들이 법적으로 로마인의 신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인들은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뜬금없이 라틴인 대신 동방 제국을 차지하게 된 게 아니라, 기원전부터 3세기까지 점진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확보하여 제국이 동서로 나뉘기 이전부터 로마인이 된 상태였다.
물론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초기까지 제국을 주도하던 민족이 라틴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라틴인의 정치적 주도권 역시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선 트라키아인 황제, 아랍인 황제 등 비라틴 황제들이 여럿 등장하며 제국의 동서 분열 이전에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분열 직후에 바로 동로마 황제 자리를 그리스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힌 것도 아니라서, 제국 초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를 비롯한 비그리스 혈통의 동로마 황제들이 여럿 있었고, 제국 중기에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마케도니아 왕조가 장기집권하기도 했다.
즉, 로마 제국 이전의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는 이미 상당수의 그리스계 시민권자를 포용한 국가였다.
또한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 본토마저 로마에 정복당했고,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 지중해 일대의 헬레니즘 국가들마저 로마령이 되었으며, 3세기에는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을 통해 그리스인을 포함한 제국 내에서 태어난 모든 자유민들이 법적으로 로마인의 신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인들은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뜬금없이 라틴인 대신 동방 제국을 차지하게 된 게 아니라, 기원전부터 3세기까지 점진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확보하여 제국이 동서로 나뉘기 이전부터 로마인이 된 상태였다.
물론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초기까지 제국을 주도하던 민족이 라틴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라틴인의 정치적 주도권 역시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선 트라키아인 황제, 아랍인 황제 등 비라틴 황제들이 여럿 등장하며 제국의 동서 분열 이전에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분열 직후에 바로 동로마 황제 자리를 그리스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힌 것도 아니라서, 제국 초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를 비롯한 비그리스 혈통의 동로마 황제들이 여럿 있었고, 제국 중기에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마케도니아 왕조가 장기집권하기도 했다.
5.1.2.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사용하니까 로마가 아니다?[편집]
라틴인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정 시대부터 그리스어는 이미 귀족 및 상류층의 필수 교양이었고, 제국 동부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또한 서로마 멸망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서 반포된 로마법 대전은 처음에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다가 10세기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그리스어 완역본이 나왔다.
7세기 이라클리오스의 공용어 전환 조치로 동로마가 라틴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고 그리스어만을 사용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로마군에서 사용하는 군사 용어에 한정된 조치였고 실제 동로마에서 라틴어의 사용이 드물어지고 그리스어가 단독으로 사용되는 건 이보다 훨씬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화였다.
또한 서로마 멸망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서 반포된 로마법 대전은 처음에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다가 10세기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그리스어 완역본이 나왔다.
7세기 이라클리오스의 공용어 전환 조치로 동로마가 라틴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고 그리스어만을 사용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로마군에서 사용하는 군사 용어에 한정된 조치였고 실제 동로마에서 라틴어의 사용이 드물어지고 그리스어가 단독으로 사용되는 건 이보다 훨씬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화였다.
5.1.3. 라틴 문화 대신 그리스 문화가 주류니까 로마가 아니다?[편집]
5.2. 로마 다신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이 국가 연속성과 직결된 문제인가?[편집]
국교로서 숭상받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교의 변화, 그리고 종교적 단절이 곧 국가 정체성의 단절까지 불러왔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일단 동로마의 기독교화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만 남은 시점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하나의 로마 제국으로 공존할 당시부터 이미 진행되던 일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은 서방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에 의해 공동으로 반포되었고, 기독교 국교화를 선언한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역시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공동으로 선언한 것으로 동서 로마가 최종적으로 분할되었다는 395년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만약 로마 다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화한 것이 곧 로마 정체성을 버린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서로마 제국 역시 로마 제국이 아닌 건 마찬가지지만, 정작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던 근세 이후 서유럽 학자들도, 그리고 기독교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고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 때문이라 외치던 근대 계몽주의자들도 476년을 로마가 멸망한 해로 잡았지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이나 국교화된 380년을 로마 멸망 시점으로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교의 변화, 그리고 종교적 단절이 곧 국가 정체성의 단절까지 불러왔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일단 동로마의 기독교화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만 남은 시점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하나의 로마 제국으로 공존할 당시부터 이미 진행되던 일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은 서방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에 의해 공동으로 반포되었고, 기독교 국교화를 선언한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역시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공동으로 선언한 것으로 동서 로마가 최종적으로 분할되었다는 395년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만약 로마 다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화한 것이 곧 로마 정체성을 버린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서로마 제국 역시 로마 제국이 아닌 건 마찬가지지만, 정작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던 근세 이후 서유럽 학자들도, 그리고 기독교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고 로마의 쇠퇴가 기독교 때문이라 외치던 근대 계몽주의자들도 476년을 로마가 멸망한 해로 잡았지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이나 국교화된 380년을 로마 멸망 시점으로 여기진 않았다.
5.2.1. 국교 변경 이후에도 연속성이 이어진 타국의 사례[편집]
4세기에 기존의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는 로마 제국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선 아르메니아의 아르샤쿠니 왕조는 로마의 기독교 공인보다도 10년 넘게 이른 시기인 301년에 조로아스터교에서 기독교로 국교를 변경했고,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도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380년) 이전에 기존 국교에서 기독교로 갈아탔다.
하지만 이러한 국교 변경이 곧 기존의 국가 정체성과 완전히 결별했다고 간주하고 기독교화 이전의 아르샤쿠니 왕조, 이베리아 왕국, 악숨 왕국과 기독교화 이후의 해당 국가들을 서로 다른 나라로 구분하는 관점은 해당 국가의 역사학계에서도, 타국의 역사학계에서도 단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었다.
이는 로마보다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중세 게르만 왕국들이나 슬라브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러한 국가들 역시 기독교 국교화를 기점으로 해서 국가 정체성 자체가 뒤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중세 게르만, 슬라브 국가들은 기독교를 자국의 국교로 삼은 이후에도 기독교화 이전의 이교도 군주들을 계속 자국 왕실의 조상으로 여겼고, 슬라브 국가들 가운데 러시아는 아예 이교도 군주였던 류리크의 혈통이 기독교를 국교화하고도 한참 지난 17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해당 인물의 자손이 끊기자 왕위 계승을 놓고 대규모 내전을 겪기까지 했다.
나무위키 측은 여기에 대해 세속화와 종교 다양화가 일어났음에도 성공회 국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사례를 반론이라며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사례 역시 적합한 반론이라고 할 수 없다.
종교 개혁 이래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핵심적인 정체성이 된 건 맞지만, 정작 그렇게 가톨릭과 단절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자국이 이전의 잉글랜드와 다른 나라라고 하진 않았고 헨리 8세라는 넘버링 역시 가톨릭을 믿던 헨리 1~7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성공회나 가톨릭이나 둘다 기독교인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재반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이후부터 19세기 가톨릭 해방 이전까지 가톨릭이 잉글랜드 내 교구 설치 및 성직자 파송도 용인받지 못하고 사실상 이교도 취급을 받은 걸 감안하면, 그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 정체성과 단절하면서도 국가 정체성까지 버리지 않은 잉글랜드를 다신교를 버리고 기독교 국가가 되었지만 로마라는 정체성은 버리지 않은 동로마에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우선 아르메니아의 아르샤쿠니 왕조는 로마의 기독교 공인보다도 10년 넘게 이른 시기인 301년에 조로아스터교에서 기독교로 국교를 변경했고,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도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380년) 이전에 기존 국교에서 기독교로 갈아탔다.
하지만 이러한 국교 변경이 곧 기존의 국가 정체성과 완전히 결별했다고 간주하고 기독교화 이전의 아르샤쿠니 왕조, 이베리아 왕국, 악숨 왕국과 기독교화 이후의 해당 국가들을 서로 다른 나라로 구분하는 관점은 해당 국가의 역사학계에서도, 타국의 역사학계에서도 단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었다.
이는 로마보다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중세 게르만 왕국들이나 슬라브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러한 국가들 역시 기독교 국교화를 기점으로 해서 국가 정체성 자체가 뒤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중세 게르만, 슬라브 국가들은 기독교를 자국의 국교로 삼은 이후에도 기독교화 이전의 이교도 군주들을 계속 자국 왕실의 조상으로 여겼고, 슬라브 국가들 가운데 러시아는 아예 이교도 군주였던 류리크의 혈통이 기독교를 국교화하고도 한참 지난 17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해당 인물의 자손이 끊기자 왕위 계승을 놓고 대규모 내전을 겪기까지 했다.
나무위키 측은 여기에 대해 세속화와 종교 다양화가 일어났음에도 성공회 국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사례를 반론이라며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사례 역시 적합한 반론이라고 할 수 없다.
종교 개혁 이래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핵심적인 정체성이 된 건 맞지만, 정작 그렇게 가톨릭과 단절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자국이 이전의 잉글랜드와 다른 나라라고 하진 않았고 헨리 8세라는 넘버링 역시 가톨릭을 믿던 헨리 1~7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성공회나 가톨릭이나 둘다 기독교인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재반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이후부터 19세기 가톨릭 해방 이전까지 가톨릭이 잉글랜드 내 교구 설치 및 성직자 파송도 용인받지 못하고 사실상 이교도 취급을 받은 걸 감안하면, 그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 정체성과 단절하면서도 국가 정체성까지 버리지 않은 잉글랜드를 다신교를 버리고 기독교 국가가 되었지만 로마라는 정체성은 버리지 않은 동로마에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5.2.2. 로마 다신교, 철학과 기독교의 연속성 담론과 국가 연속성 담론의 관계[편집]
나무위키의 '동로마 제국/정체성' 문서에서는 로마 다신교에 대한 허탄함과 회의가 기독교 확산 원인이 되었는지 여부와, 고대 로마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길을 닦아놓았는지 여부를 로마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결부해서 찬반 논쟁을 서술해놓고 있다.
그러나 해당 문제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신학 내지는 철학 분야에서 다룰 문제이지, 국가 정체성의 연속성을 논하는데 필수적인 문제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교가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건 맞지만 그것만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단절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며, 이런 식의 연속성 잣대를 로마 철학보다도 기독교와 접점이 없는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고유 종교, 철학에도 들이대면서 해당 국가들의 연속성을 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해당 문제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신학 내지는 철학 분야에서 다룰 문제이지, 국가 정체성의 연속성을 논하는데 필수적인 문제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교가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건 맞지만 그것만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단절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며, 이런 식의 연속성 잣대를 로마 철학보다도 기독교와 접점이 없는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고유 종교, 철학에도 들이대면서 해당 국가들의 연속성을 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