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군사력과 더불어 제국의 존속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로마는 다수의 이질적인 민족과 정치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국경선은 시대마다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불안정한 외부 환경 속에서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의 외교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황제권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 질서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결합하여 고유한 외교 체계를 확립하였다.
동로마의 외교는 제국의 중심성과 위계질서를 외부 세계에 투영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제국은 자신을 유일한 정통 권위로 인식하였고, 그 외의 국가는 이른바 ‘야만인’으로 간주하거나 제국 질서에 예속된 존재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외교 운영에서는 그러한 관념적 위상을 고수하기보다는, 제국의 이익과 안정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하였다. 외교는 언제나 정치적 현실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용되었으며, 황제는 국익을 위해 권위적 서사를 탄력적으로 조정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수단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였다. 국경을 맞댄 부족 집단이나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약 체결과 사절 교환이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종종 일정한 공물 지급, 정기적인 외교사절 파견, 정치적 망명 수용과 같은 조항을 포함하였다. 결혼 동맹 또한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황제 일가는 다른 왕조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 우호를 조성하거나 특정 정치적 구도를 유리하게 형성하였다.
제국은 외부 세력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제도적 혜택을 통해 유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대가로 금화나 곡물, 관직명 수여 등의 물질적 유인을 제공하면서, 제국의 우위를 인정받는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제 외교는 특히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동쪽의 사산 왕조, 이후 이슬람 칼리파와의 관계에서 자주 활용되었으며, 제국의 군사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종교적 권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군주를 넘어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이자 질서의 중심자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이는 외교적 교섭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교리의 해석과 이단 규정은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개입은 종종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불가리아와 같은 기독교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입장이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였다.
또한, 동로마는 외교를 통해 적대 세력을 이간하거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특정 부족이나 국가 내의 권력 분열을 조장하여 제국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만드는 방식은 동로마 외교의 핵심적인 특성이었다. 이 같은 분열 전략은 북방의 여러 유목 집단, 이슬람권의 지방 영주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슬라브 세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외교는 단순한 평화 유지 수단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다.
동로마 제국은 국제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강성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세가 변하면 기존 조약을 무효화하거나 새로운 협상을 통해 국익을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외교 기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전문 관료 집단의 분석,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작동하였다. 동로마는 외교를 단순한 응급 대책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안목을 지닌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외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며, 황제의 성향과 제국 내부의 정치 상황, 주변 국가의 군사적 역량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에는 대외 팽창과 군사 정복이 강조되었으나, 이후 제국의 체력이 약화되면서 외교는 더욱 방어적이고 복잡한 전략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에는 체계적인 외교 기록과 관례가 정비되어 제국 행정의 일환으로서 외교가 제도화되었고, 상설 사절단과 정보 조직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이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단순히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고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질서를 조율하는 중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외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자 예술로 발전하였으며, 황제권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동로마의 정체성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동로마의 외교는 제국의 중심성과 위계질서를 외부 세계에 투영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제국은 자신을 유일한 정통 권위로 인식하였고, 그 외의 국가는 이른바 ‘야만인’으로 간주하거나 제국 질서에 예속된 존재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외교 운영에서는 그러한 관념적 위상을 고수하기보다는, 제국의 이익과 안정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하였다. 외교는 언제나 정치적 현실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용되었으며, 황제는 국익을 위해 권위적 서사를 탄력적으로 조정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수단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였다. 국경을 맞댄 부족 집단이나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약 체결과 사절 교환이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종종 일정한 공물 지급, 정기적인 외교사절 파견, 정치적 망명 수용과 같은 조항을 포함하였다. 결혼 동맹 또한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황제 일가는 다른 왕조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 우호를 조성하거나 특정 정치적 구도를 유리하게 형성하였다.
제국은 외부 세력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제도적 혜택을 통해 유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대가로 금화나 곡물, 관직명 수여 등의 물질적 유인을 제공하면서, 제국의 우위를 인정받는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제 외교는 특히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동쪽의 사산 왕조, 이후 이슬람 칼리파와의 관계에서 자주 활용되었으며, 제국의 군사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종교적 권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군주를 넘어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이자 질서의 중심자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이는 외교적 교섭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교리의 해석과 이단 규정은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개입은 종종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불가리아와 같은 기독교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입장이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였다.
또한, 동로마는 외교를 통해 적대 세력을 이간하거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특정 부족이나 국가 내의 권력 분열을 조장하여 제국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만드는 방식은 동로마 외교의 핵심적인 특성이었다. 이 같은 분열 전략은 북방의 여러 유목 집단, 이슬람권의 지방 영주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슬라브 세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외교는 단순한 평화 유지 수단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다.
동로마 제국은 국제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강성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세가 변하면 기존 조약을 무효화하거나 새로운 협상을 통해 국익을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외교 기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전문 관료 집단의 분석,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작동하였다. 동로마는 외교를 단순한 응급 대책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안목을 지닌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외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며, 황제의 성향과 제국 내부의 정치 상황, 주변 국가의 군사적 역량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에는 대외 팽창과 군사 정복이 강조되었으나, 이후 제국의 체력이 약화되면서 외교는 더욱 방어적이고 복잡한 전략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에는 체계적인 외교 기록과 관례가 정비되어 제국 행정의 일환으로서 외교가 제도화되었고, 상설 사절단과 정보 조직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이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단순히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고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질서를 조율하는 중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외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자 예술로 발전하였으며, 황제권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동로마의 정체성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2. 서방권[편집]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외교적 관계는 겉으로는 불편한 동맹이었으며, 속으로는 정치적 경쟁과 종교적 대립이 얽힌 복합적인 양상을 지녔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서유럽은 통일된 로마 세계의 이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서유럽의 여러 정치 세력은 스스로 로마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이는 곧 이미 존재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대 로마 제국 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로마’라는 이름은 단순한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곧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상이 되었으며,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가 자신들의 지배 권한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로마의 후계자임을 주장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격렬하고 장기적인 정통성 경쟁은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를 ‘로마 황제’로 대관함으로써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을 서방 세계에 다시 등장시켰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었으며, 교황청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제쳐두고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깊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실질적인 통치권과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진 제도, 문물, 군사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방의 대관식은 동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월권이자 정통성의 침해로 여겨졌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법적 후계자라고 자임하였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외교문서, 법률 문헌, 종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반영되었다. 황제는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였으며, 제국의 정치 제도는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행정 체계 속에서도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서방의 도전적 행보에 대해 강경한 외교적 대응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시선은 달랐다. 서유럽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로마’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점차 강화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지칭하며 로마적 정체성을 철저히 분리하려 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닌 정치적 전략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기반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서방의 로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문필가 아인하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기를 반영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호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혼용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서방 내부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서유럽 교회 세력은 동로마 황제를 체계적으로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외교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언어 전략은 교황청이 로마 세계의 중심이자 정신적 권위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황제의 칭호뿐만 아니라, 황제의 즉위 의례, 법전 편찬, 교회와의 관계 설정 등 모든 측면에서 고대 로마의 유산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단순한 옛 제국의 잔존 국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로마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국민들 또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불렀고, 이 정체성은 제국이 최후를 맞는 1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이념적으로도 양 제국 간 충돌은 깊었다. 교황 중심의 서방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으며, 이는 ‘교황이 왕을 세운다’는 정치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곧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신성한 권위를 지녔다는 ‘황제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이념 차이는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제국의 건설과 같은 사태를 초래하였고, 동서 교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은 정치적 정통성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였으나,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양측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도, 외부의 공통된 위협 앞에서는 때로는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중해 전역에서 이슬람이 확산되던 시기, 동로마와 서방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 속에서 제한적인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협력은 긴장과 불신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11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서방 교회가 주도한 이 원정은 겉보기에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적 연대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에 맞서려 했지만, 동시에 서방 세력이 동방에서 자율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이는 협력과 경쟁이 얽힌 이중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라틴 제국의 건설은 동로마의 경계심을 현실로 바꿔 놓았다.
이보다 앞선 10세기에도 양측은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서기 968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고자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 사이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이 제안은 명목상으로는 양 제국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결속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양 제국의 권위를 서로 동등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외교 문서 한 줄에 의해 좌절되었다. 오토 측에서 전달한 교황 요한 13세의 서신에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라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이 표현을 중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외교적 예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서방 사절단의 대표 리우트프란트를 억류한 뒤 곧바로 추방하였다. 니키포로스 황제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자처하였기에, ‘그리스인의 황제’라는 호칭은 제국의 정체성을 폄하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사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은 양측이 황제의 호칭 문제를 단순한 외교적 표현이 아니라 정통성의 본질로 여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리우트프란트는 귀국 후 자신의 저술에서 니키포로스 황제를 조롱과 모욕으로 묘사하였으며, 이는 양 제국 간의 감정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기록은 단지 개인의 불쾌한 경험담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양측의 갈등은 정치적 협상을 통한 실용적 접근으로도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문화적 오만과 정체성의 불일치가 협력의 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종교적 언어, 황제의 칭호, 의례상의 우열 문제 등은 모두 중세 세계에서 권력의 정통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기에,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단순한 외교적 예민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제국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협력을 모색하고 상호 작용을 이어갔다. 이는 중세 유럽이 단일한 권력 질서가 아닌 복합적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동로마와 서유럽은 때로는 전장에서는 적이었고, 때로는 외교석상에서는 동맹이었으며, 그 교차점에서 탄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세계의 불안정한 균형을 상징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양측은 공통의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정치적 권위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점차 깊은 균열이 나타났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점차 라틴어권 서방 세계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단지 신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교회의 통치 권한과 그에 따른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 교회 간의 긴장은 일찍이 아카키오스 분열을 계기로 격화되었고, 이후 포티오스 분열에서는 총대주교 임명권과 교회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 두 사건 모두 단순한 교리적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서방 전체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려는 데 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동방 교회의 자율성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1054년에 벌어진 상호 파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성소 제단 위에 파문장을 올려두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응하여 세계 총대주교 역시 교황 사절단을 맞파문하면서, 교회의 분열은 형식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갈등이 신학적 불일치만이 아니라, 황제권과 교황권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전개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라틴 세계 간의 관계를 사실상 적대적 양상으로 고착시켰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은 서방과 동로마의 관계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된다. 원래 이 군사 원정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개입으로 그 방향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내 상업적 이권 확보와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벌이라는 대담한 선택을 하였다. 그 결과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단지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사건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이자 심장부가 파괴되었고, 라틴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가 일시적으로 제국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제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훼손하였으며, 제국은 이후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 제국은 1261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국력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라틴 제국의 점령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제국 내부에서도 봉건적 분열과 반란이 빈번해지면서 통합된 제국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다.
또한 4차 십자군에 앞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할은 이 시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본래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해상 속령으로서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상업 도시였으며, 제국 내 주요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제국의 해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제4차 십자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베네치아는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구원병을 파견한 세력 역시 베네치아였다.
이러한 모순적 행보는 베네치아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자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였다. 제국이 붕괴할 경우 베네치아의 무역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제국 내 조계지에 정착해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주민들은 제국 질서의 안정성과 지속을 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미 제국의 문화와 행정 체계 속에 일정 부분 동화되어 있었고, 일부는 자신을 제국의 주민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동시에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상업적 우위를 확보하길 원했을 뿐, 완전한 붕괴로 인한 해상 질서의 붕괴는 자신들에게도 치명적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의 구원에 적극 나섰던 배경이기도 하다. 제국의 종말은 곧 베네치아가 기반으로 삼아온 세계의 해체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정치적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제국의 쇠퇴와 종말은 단지 내부적 원인만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관계는 단일한 구도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 종교적 분열,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동 대응은 양측의 외교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타협을 동반하게 하였다. 이 관계는 종종 모순적이고 충돌로 가득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에서 수행한 수많은 외교적 시도와 전략은 유럽 중세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 제국 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로마’라는 이름은 단순한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곧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상이 되었으며,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가 자신들의 지배 권한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로마의 후계자임을 주장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격렬하고 장기적인 정통성 경쟁은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를 ‘로마 황제’로 대관함으로써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을 서방 세계에 다시 등장시켰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었으며, 교황청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제쳐두고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깊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실질적인 통치권과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진 제도, 문물, 군사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방의 대관식은 동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월권이자 정통성의 침해로 여겨졌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법적 후계자라고 자임하였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외교문서, 법률 문헌, 종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반영되었다. 황제는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였으며, 제국의 정치 제도는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행정 체계 속에서도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서방의 도전적 행보에 대해 강경한 외교적 대응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시선은 달랐다. 서유럽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로마’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점차 강화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지칭하며 로마적 정체성을 철저히 분리하려 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닌 정치적 전략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기반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서방의 로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문필가 아인하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기를 반영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호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혼용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서방 내부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서유럽 교회 세력은 동로마 황제를 체계적으로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외교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언어 전략은 교황청이 로마 세계의 중심이자 정신적 권위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황제의 칭호뿐만 아니라, 황제의 즉위 의례, 법전 편찬, 교회와의 관계 설정 등 모든 측면에서 고대 로마의 유산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단순한 옛 제국의 잔존 국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로마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국민들 또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불렀고, 이 정체성은 제국이 최후를 맞는 1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이념적으로도 양 제국 간 충돌은 깊었다. 교황 중심의 서방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으며, 이는 ‘교황이 왕을 세운다’는 정치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곧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신성한 권위를 지녔다는 ‘황제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이념 차이는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제국의 건설과 같은 사태를 초래하였고, 동서 교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은 정치적 정통성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였으나,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양측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도, 외부의 공통된 위협 앞에서는 때로는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중해 전역에서 이슬람이 확산되던 시기, 동로마와 서방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 속에서 제한적인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협력은 긴장과 불신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11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서방 교회가 주도한 이 원정은 겉보기에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적 연대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에 맞서려 했지만, 동시에 서방 세력이 동방에서 자율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이는 협력과 경쟁이 얽힌 이중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라틴 제국의 건설은 동로마의 경계심을 현실로 바꿔 놓았다.
이보다 앞선 10세기에도 양측은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서기 968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고자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 사이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이 제안은 명목상으로는 양 제국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결속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양 제국의 권위를 서로 동등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외교 문서 한 줄에 의해 좌절되었다. 오토 측에서 전달한 교황 요한 13세의 서신에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라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이 표현을 중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외교적 예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서방 사절단의 대표 리우트프란트를 억류한 뒤 곧바로 추방하였다. 니키포로스 황제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자처하였기에, ‘그리스인의 황제’라는 호칭은 제국의 정체성을 폄하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사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은 양측이 황제의 호칭 문제를 단순한 외교적 표현이 아니라 정통성의 본질로 여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리우트프란트는 귀국 후 자신의 저술에서 니키포로스 황제를 조롱과 모욕으로 묘사하였으며, 이는 양 제국 간의 감정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기록은 단지 개인의 불쾌한 경험담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양측의 갈등은 정치적 협상을 통한 실용적 접근으로도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문화적 오만과 정체성의 불일치가 협력의 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종교적 언어, 황제의 칭호, 의례상의 우열 문제 등은 모두 중세 세계에서 권력의 정통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기에,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단순한 외교적 예민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제국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협력을 모색하고 상호 작용을 이어갔다. 이는 중세 유럽이 단일한 권력 질서가 아닌 복합적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동로마와 서유럽은 때로는 전장에서는 적이었고, 때로는 외교석상에서는 동맹이었으며, 그 교차점에서 탄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세계의 불안정한 균형을 상징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양측은 공통의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정치적 권위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점차 깊은 균열이 나타났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점차 라틴어권 서방 세계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단지 신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교회의 통치 권한과 그에 따른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 교회 간의 긴장은 일찍이 아카키오스 분열을 계기로 격화되었고, 이후 포티오스 분열에서는 총대주교 임명권과 교회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 두 사건 모두 단순한 교리적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서방 전체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려는 데 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동방 교회의 자율성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1054년에 벌어진 상호 파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성소 제단 위에 파문장을 올려두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응하여 세계 총대주교 역시 교황 사절단을 맞파문하면서, 교회의 분열은 형식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갈등이 신학적 불일치만이 아니라, 황제권과 교황권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전개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라틴 세계 간의 관계를 사실상 적대적 양상으로 고착시켰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은 서방과 동로마의 관계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된다. 원래 이 군사 원정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개입으로 그 방향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내 상업적 이권 확보와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벌이라는 대담한 선택을 하였다. 그 결과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단지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사건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이자 심장부가 파괴되었고, 라틴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가 일시적으로 제국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제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훼손하였으며, 제국은 이후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 제국은 1261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국력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라틴 제국의 점령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제국 내부에서도 봉건적 분열과 반란이 빈번해지면서 통합된 제국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다.
또한 4차 십자군에 앞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할은 이 시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본래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해상 속령으로서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상업 도시였으며, 제국 내 주요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제국의 해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제4차 십자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베네치아는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구원병을 파견한 세력 역시 베네치아였다.
이러한 모순적 행보는 베네치아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자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였다. 제국이 붕괴할 경우 베네치아의 무역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제국 내 조계지에 정착해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주민들은 제국 질서의 안정성과 지속을 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미 제국의 문화와 행정 체계 속에 일정 부분 동화되어 있었고, 일부는 자신을 제국의 주민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동시에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상업적 우위를 확보하길 원했을 뿐, 완전한 붕괴로 인한 해상 질서의 붕괴는 자신들에게도 치명적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의 구원에 적극 나섰던 배경이기도 하다. 제국의 종말은 곧 베네치아가 기반으로 삼아온 세계의 해체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정치적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제국의 쇠퇴와 종말은 단지 내부적 원인만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관계는 단일한 구도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 종교적 분열,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동 대응은 양측의 외교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타협을 동반하게 하였다. 이 관계는 종종 모순적이고 충돌로 가득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에서 수행한 수많은 외교적 시도와 전략은 유럽 중세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2.1. 십자군 국가[편집]
심자군 국가들은 지리적으로는 중근동 빛 동지중해 일대에 위치했지만, 서방 가톨릭 국가들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 건국되었기에 십자군 국가들과의 외교는 대 서방권 외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들 간의 외교 관계는 단순한 동맹이나 적대의 구도로 설명될 수 없으며, 시기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전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생존 전략과 십자군 세력의 영토 확장 야망이 얽혀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아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완화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반면 서방의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명분 아래 군사적 자율성과 새로운 봉건적 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이한 목표는 외교적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배경은 셀주크 튀르크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군에 대패하면서,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군사적 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으며, 이러한 절박한 배경 속에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이 제국의 봉신으로서 복무하기를 기대하며, 일정한 지휘 체계 아래에서 동방 영토를 탈환하고 이를 제국에 귀속시키는 방식의 협력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서방 기사들의 인식과는 명백히 달랐다. 서방의 귀족들과 기사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봉신 서약이 아닌, 일종의 명분 제공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은 독자적 군사 조직으로서 행동하려 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였고,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대의를 내세워 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외교적 긴장의 기저를 형성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조심스럽게 이들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는 십자군 지휘자들에게 과거 동로마 제국이 상실한 영토를 정복하면 이를 제국에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물자와 항로를 제공하였고, 다수의 십자군 지휘자들은 제국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였다. 이 협약은 원칙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실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서약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십자군은 니케아와 안티오키아, 에데사 등 셀주크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을 점령하며,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였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봉건 국가들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에데사 백국이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제국의 영토를 점유한 상태로 자치적 정권을 형성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배신이나 다름없었고, 제국의 전통적 영토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십자군의 군사적 활동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 제국의 행정 기반이 복구되지 않은 변방에서 독자적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봉건 사회를 형성하며 제국의 전통적인 관료 체계와는 다른 서방식 군사 영주제를 도입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과 충돌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십자군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영토와 권위를 잠식하는 세력으로 십자군을 경계하게 되며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외교적 갈등은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지휘자들 사이에는 정복한 옛 제국 영토를 제국에 반환한다는 합의가 있었고, 이에는 안티오키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98년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는 해당 도시에 대한 동로마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독립 공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외교 질서에서 이탈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군사적 침공보다는 외교적 복속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보에몽이 점령한 안티오키아를 명백한 제국 영토로 간주하며, 그의 독립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 항의와 경고를 수차례 전달하였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이던 보에몽과 직접적인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고, 1108년 데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자신은 그 영토를 제국의 봉신 자격으로 통치하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에 매년 조공을 납부하고, 동로마 황제의 요청 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실질적 이행 없이 형식에 그쳤고, 보에몽 사후 그의 후계자들은 동로마의 종주권을 다시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외교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1137년 안티오키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한 뒤, 그 통치자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외교 협상을 통해 다시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공국에서 제국의 깃발을 게양하게 하고, 레몽에게 공식 봉신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죽음 이후 제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공국은 다시 독립적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마누일 1세 역시 안티오키아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다각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는 공국 내부의 귀족 분열을 이용하여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였고, 1159년에는 안티오키아 군주 레몽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방문하여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제국의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였으며, 공식적인 조공 및 서신 교환 체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마누엘 사후 제국의 대외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이러한 봉신 관계는 다시 무력화되었고, 공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에데사 백국과의 외교 관계는 안티오키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간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에데사를 제국 영토로 복귀시키려는 외교적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에데사 건국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공식 외교 관계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1144년 셀주크계 지휘관 우르바크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제국은 군사 개입은 물론 외교적 대응조차 제한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이는 곧 에데사 백국에 대한 종주권 포기와도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는 보다 복합적인 외교 양상을 보였다.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왕국과의 연합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하였다. 특히 마누엘 1세 시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예루살렘과의 군사 동맹이 추진되었다. 마누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말릭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양측은 공동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예루살렘 측 사절단은 제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춘 공식 경례를 진행하였고, 제국은 이에 대해 각종 선물과 조공 면제 등의 외교적 호의를 보였다. 다만 이러한 동맹은 일시적인 실용 외교에 기반한 것으로, 장기적이고 제도화된 외교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트리폴리 백국과는 별다른 외교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과의 관계에 있어 별다른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제국의 전략적 이익과 거리가 있었던 탓이 크며, 그만큼 상호 교섭도 미약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제2차 십자군 때 다시 한 번 서방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콘스탄티노스 7세 시절에는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대규모 십자군을 이끌고 제국을 경유하였으며, 이들은 제국의 행정력과 식량 보급을 기대하였으나, 제국 측은 이들의 자의적인 행동을 경계하였다. 제국은 십자군이 자신의 영토를 훼손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심을 높였고, 이는 상호 간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원래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던 십자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조종과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되었고, 1204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 갈등을 넘어선 제국의 붕괴로 직결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잔존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동로마와 십자군 세력 간의 관계는 극단적 파국에 이르렀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재건되었지만, 그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고,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교황청은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들 간의 외교 관계는 단순한 동맹이나 적대의 구도로 설명될 수 없으며, 시기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전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생존 전략과 십자군 세력의 영토 확장 야망이 얽혀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아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완화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반면 서방의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명분 아래 군사적 자율성과 새로운 봉건적 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이한 목표는 외교적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배경은 셀주크 튀르크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군에 대패하면서,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군사적 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으며, 이러한 절박한 배경 속에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이 제국의 봉신으로서 복무하기를 기대하며, 일정한 지휘 체계 아래에서 동방 영토를 탈환하고 이를 제국에 귀속시키는 방식의 협력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서방 기사들의 인식과는 명백히 달랐다. 서방의 귀족들과 기사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봉신 서약이 아닌, 일종의 명분 제공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은 독자적 군사 조직으로서 행동하려 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였고,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대의를 내세워 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외교적 긴장의 기저를 형성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조심스럽게 이들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는 십자군 지휘자들에게 과거 동로마 제국이 상실한 영토를 정복하면 이를 제국에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물자와 항로를 제공하였고, 다수의 십자군 지휘자들은 제국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였다. 이 협약은 원칙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실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서약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십자군은 니케아와 안티오키아, 에데사 등 셀주크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을 점령하며,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였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봉건 국가들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에데사 백국이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제국의 영토를 점유한 상태로 자치적 정권을 형성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배신이나 다름없었고, 제국의 전통적 영토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십자군의 군사적 활동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 제국의 행정 기반이 복구되지 않은 변방에서 독자적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봉건 사회를 형성하며 제국의 전통적인 관료 체계와는 다른 서방식 군사 영주제를 도입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과 충돌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십자군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영토와 권위를 잠식하는 세력으로 십자군을 경계하게 되며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외교적 갈등은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지휘자들 사이에는 정복한 옛 제국 영토를 제국에 반환한다는 합의가 있었고, 이에는 안티오키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98년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는 해당 도시에 대한 동로마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독립 공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외교 질서에서 이탈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군사적 침공보다는 외교적 복속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보에몽이 점령한 안티오키아를 명백한 제국 영토로 간주하며, 그의 독립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 항의와 경고를 수차례 전달하였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이던 보에몽과 직접적인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고, 1108년 데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자신은 그 영토를 제국의 봉신 자격으로 통치하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에 매년 조공을 납부하고, 동로마 황제의 요청 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실질적 이행 없이 형식에 그쳤고, 보에몽 사후 그의 후계자들은 동로마의 종주권을 다시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외교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1137년 안티오키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한 뒤, 그 통치자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외교 협상을 통해 다시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공국에서 제국의 깃발을 게양하게 하고, 레몽에게 공식 봉신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죽음 이후 제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공국은 다시 독립적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마누일 1세 역시 안티오키아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다각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는 공국 내부의 귀족 분열을 이용하여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였고, 1159년에는 안티오키아 군주 레몽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방문하여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제국의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였으며, 공식적인 조공 및 서신 교환 체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마누엘 사후 제국의 대외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이러한 봉신 관계는 다시 무력화되었고, 공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에데사 백국과의 외교 관계는 안티오키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간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에데사를 제국 영토로 복귀시키려는 외교적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에데사 건국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공식 외교 관계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1144년 셀주크계 지휘관 우르바크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제국은 군사 개입은 물론 외교적 대응조차 제한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이는 곧 에데사 백국에 대한 종주권 포기와도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는 보다 복합적인 외교 양상을 보였다.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왕국과의 연합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하였다. 특히 마누엘 1세 시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예루살렘과의 군사 동맹이 추진되었다. 마누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말릭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양측은 공동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예루살렘 측 사절단은 제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춘 공식 경례를 진행하였고, 제국은 이에 대해 각종 선물과 조공 면제 등의 외교적 호의를 보였다. 다만 이러한 동맹은 일시적인 실용 외교에 기반한 것으로, 장기적이고 제도화된 외교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트리폴리 백국과는 별다른 외교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과의 관계에 있어 별다른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제국의 전략적 이익과 거리가 있었던 탓이 크며, 그만큼 상호 교섭도 미약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제2차 십자군 때 다시 한 번 서방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콘스탄티노스 7세 시절에는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대규모 십자군을 이끌고 제국을 경유하였으며, 이들은 제국의 행정력과 식량 보급을 기대하였으나, 제국 측은 이들의 자의적인 행동을 경계하였다. 제국은 십자군이 자신의 영토를 훼손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심을 높였고, 이는 상호 간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원래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던 십자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조종과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되었고, 1204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 갈등을 넘어선 제국의 붕괴로 직결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잔존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동로마와 십자군 세력 간의 관계는 극단적 파국에 이르렀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재건되었지만, 그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고,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교황청은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3. 이란 및 이슬람권[편집]
동로마 제국은 4세기 말부터 제국의 동방 국경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외교적 긴장과 군사적 충돌에 시달렸다. 이 지역은 기후와 지형이 험준하여 방어가 용이한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비옥하고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모두에게 있어 핵심적인 이해관계 지역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3세기 초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창건된 이후, 동로마 제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국으로 자처하며 유서 깊은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다. 특히 사산조는 자신들이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면서, 동방의 문명을 대표하는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둘러싼 경쟁뿐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사산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기독교 제국인 로마와의 종교적 정체성을 분명히 구분지었으며,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충돌은 양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반복적 전쟁 양상을 초래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는 유프라테스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을 경계로 설정하는 여러 차례의 국경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어느 쪽도 상대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재정복에 집중하면서도, 사산조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532년에 체결된 ‘영구 평화’는 일시적으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나, 그 기반은 극히 불안정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제국의 내정이 불안정해지고 서방에서의 군사적 부담이 커짐에 따라, 사산조는 보다 공격적으로 국경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호스로 2세는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레반트 전역, 나아가 이집트까지 차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핵심적인 속주들을 빠르게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들이 포위되고 약탈당하였으며, 전략 거점들이 줄줄이 함락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외부에서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626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에서 압박해오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삼면 포위에 직면하였다. 이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수도는 제국의 상징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중대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해상 방어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과 더불어,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비밀 병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의 해군이 사용한 특수 인화 물질로, 물 위에서도 불타는 성질로 인해 적의 함대를 효율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방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군사적 경험과 공학 기술의 집약체로, 외적의 공세를 물리치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결단력과 종교적 동원력이었다. 그는 수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수호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고, 전통적인 제국의 지도자상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단순히 수비에만 만족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공세를 단행하였다. 627년 니네베 평원에서 벌어진 대회전은 이러한 전략의 정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기동성과 지형을 이용하여 사산조의 주력을 타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니네베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제국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성과로 작용하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는 유프라테스를 넘어 티그리스강 인근까지 진격하며,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호스로 2세는 휘하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피살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동로마 제국은 이 일련의 반격을 통해 점령당했던 동방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고,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제국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벌어진 수년간의 전쟁은 동로마와 사산조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인적 손실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마을과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행정망과 세수 체계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전쟁의 상흔은 단순한 패배나 승리로 환원될 수 없는 깊은 사회적 균열로 남았다.
이로 인해 양 제국은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이러한 양 제국의 약화된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리아,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사산조는 이슬람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곧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며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영토 손실을 겪게 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정비된 체계 아래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빠르게 세를 확장하였다. 불과 20여 년 만에 사산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동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확장은 동로마 제국의 전략적 기반을 송두리째 약화시켰다. 특히 이집트는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이자 조세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곳의 상실은 제국의 세입 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의의는 사산조와는 다르게 동로마는 이슬람의 파고로부터 끝끝내 생존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관계는 복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수세기에 걸쳐 이어진 복합적인 외교와 경쟁, 그리고 전략적 공존의 역사였다. 이슬람은 제국의 변방에 머무른 적이 없었으며, 그들은 직접적으로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차례에 걸쳐 공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수세적 자세에 머물지 않았고, 정교한 외교 전략을 통해 국력을 유지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확산된 아랍 이슬람 세력은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점령하며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는 군사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외교적 수단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략이 있었던 674년부터 678년까지의 시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불을 활용한 해상 방어만이 아니라, 제국은 외교를 통해 후방의 다른 세력들과의 전선을 최소화하며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인 소규모 충돌을 벌였으나, 대대적인 전면전보다는 외교와 조공, 국경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협상 등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황제 레온 3세는 불가리아와의 외교 동맹을 체결하여 북방 방어선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의 퇴각 이후,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방어 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이는 테마 체계의 강화와 직결되었다. 이 체계는 군사 조직과 지방 행정을 통합하여, 제국 전역에 걸쳐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위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방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때로는 이슬람 내부의 분열을 활용하여 세력 간 이간을 시도하였다. 특히 아바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가 바그다드 중심의 세력과 협상하며 국경의 긴장을 완화하려 하였으며, 반대로 바그다드에 대항하는 지역 이슬람 세력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외교적 다변화는 10세기에 들어 동로마의 반격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11세기에 접어들며,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세력인 튀르크인이 등장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소아시아 내륙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는 단순한 국지 전투가 아닌, 제국의 전략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는 군사적 패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도 함께 겪었으며, 이후의 대응은 외교적 노선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셀주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은 기존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외교 채널을 개척하기 위해 서유럽 세계에 접근하였다. 이는 결국 교황청과의 외교적 협상을 거쳐 제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제국은 이 원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아나톨리아 일부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세력과의 관계는 점차 충돌로 전환되었고, 외교적 관리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수도 함락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외교 전략의 실패이자,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균형을 잃은 결과였다. 이후 제국은 니카이아, 트라페주스, 에페이로스 등으로 분열되며 잔존하였고, 이들 중 니카이아 제국이 13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외교적 주도권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는 무력 충돌과 병행된 외교 전략의 역사였으며, 특히 외교는 국경 방어, 세력 균형,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고정된 구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력 간의 이해 조정이었고, 이에 대한 유연하고 정교한 대응이 가능한 시기에는 제국이 생존과 재건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 조율에 실패한 시기에는 치명적인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몽골 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셀주크 제국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아나톨리아에는 다수의 튀르크계 베이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오스만 베이국은 전략적 위치와 결집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주변 베이국을 병합하며 팽창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 영토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였으며, 특히 발칸 반도의 정복은 제국의 생존 가능성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동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오스만 내 반란 세력을 지원하거나 혼인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전략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양 세력은 전쟁만큼이나 교류도 있었다. 동로마 군대에는 '투르코폴레스'라 불리는 튀르크계 기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정규군과 함께 국경 방어에 참여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동로마 제국 말기에는 궁정 복식이나 건축 양식에서 튀르크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반대로 오스만 초기의 통치 구조나 행정 체계에서도 동로마적 요소가 발견되며, 개국 과정에서 동로마 출신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1453년, 오스만 술탼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종말이자,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동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 오스만의 제국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써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이란 및 이슬람권 세력 간의 관계는 단순한 적대나 충돌의 연속이 아닌, 전략적 균형과 문화적 융합, 외교적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적 양상이었다. 양 세력은 지속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벌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제국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3세기 초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창건된 이후, 동로마 제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국으로 자처하며 유서 깊은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다. 특히 사산조는 자신들이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면서, 동방의 문명을 대표하는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둘러싼 경쟁뿐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사산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기독교 제국인 로마와의 종교적 정체성을 분명히 구분지었으며,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충돌은 양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반복적 전쟁 양상을 초래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는 유프라테스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을 경계로 설정하는 여러 차례의 국경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어느 쪽도 상대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재정복에 집중하면서도, 사산조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532년에 체결된 ‘영구 평화’는 일시적으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나, 그 기반은 극히 불안정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제국의 내정이 불안정해지고 서방에서의 군사적 부담이 커짐에 따라, 사산조는 보다 공격적으로 국경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호스로 2세는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레반트 전역, 나아가 이집트까지 차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핵심적인 속주들을 빠르게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들이 포위되고 약탈당하였으며, 전략 거점들이 줄줄이 함락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외부에서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626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에서 압박해오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삼면 포위에 직면하였다. 이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수도는 제국의 상징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중대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해상 방어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과 더불어,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비밀 병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의 해군이 사용한 특수 인화 물질로, 물 위에서도 불타는 성질로 인해 적의 함대를 효율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방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군사적 경험과 공학 기술의 집약체로, 외적의 공세를 물리치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결단력과 종교적 동원력이었다. 그는 수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수호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고, 전통적인 제국의 지도자상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단순히 수비에만 만족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공세를 단행하였다. 627년 니네베 평원에서 벌어진 대회전은 이러한 전략의 정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기동성과 지형을 이용하여 사산조의 주력을 타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니네베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제국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성과로 작용하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는 유프라테스를 넘어 티그리스강 인근까지 진격하며,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호스로 2세는 휘하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피살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동로마 제국은 이 일련의 반격을 통해 점령당했던 동방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고,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제국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벌어진 수년간의 전쟁은 동로마와 사산조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인적 손실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마을과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행정망과 세수 체계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전쟁의 상흔은 단순한 패배나 승리로 환원될 수 없는 깊은 사회적 균열로 남았다.
이로 인해 양 제국은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이러한 양 제국의 약화된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리아,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사산조는 이슬람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곧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며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영토 손실을 겪게 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정비된 체계 아래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빠르게 세를 확장하였다. 불과 20여 년 만에 사산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동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확장은 동로마 제국의 전략적 기반을 송두리째 약화시켰다. 특히 이집트는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이자 조세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곳의 상실은 제국의 세입 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의의는 사산조와는 다르게 동로마는 이슬람의 파고로부터 끝끝내 생존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관계는 복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수세기에 걸쳐 이어진 복합적인 외교와 경쟁, 그리고 전략적 공존의 역사였다. 이슬람은 제국의 변방에 머무른 적이 없었으며, 그들은 직접적으로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차례에 걸쳐 공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수세적 자세에 머물지 않았고, 정교한 외교 전략을 통해 국력을 유지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확산된 아랍 이슬람 세력은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점령하며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는 군사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외교적 수단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략이 있었던 674년부터 678년까지의 시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불을 활용한 해상 방어만이 아니라, 제국은 외교를 통해 후방의 다른 세력들과의 전선을 최소화하며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인 소규모 충돌을 벌였으나, 대대적인 전면전보다는 외교와 조공, 국경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협상 등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황제 레온 3세는 불가리아와의 외교 동맹을 체결하여 북방 방어선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의 퇴각 이후,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방어 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이는 테마 체계의 강화와 직결되었다. 이 체계는 군사 조직과 지방 행정을 통합하여, 제국 전역에 걸쳐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위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방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때로는 이슬람 내부의 분열을 활용하여 세력 간 이간을 시도하였다. 특히 아바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가 바그다드 중심의 세력과 협상하며 국경의 긴장을 완화하려 하였으며, 반대로 바그다드에 대항하는 지역 이슬람 세력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외교적 다변화는 10세기에 들어 동로마의 반격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11세기에 접어들며,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세력인 튀르크인이 등장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소아시아 내륙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는 단순한 국지 전투가 아닌, 제국의 전략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는 군사적 패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도 함께 겪었으며, 이후의 대응은 외교적 노선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셀주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은 기존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외교 채널을 개척하기 위해 서유럽 세계에 접근하였다. 이는 결국 교황청과의 외교적 협상을 거쳐 제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제국은 이 원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아나톨리아 일부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세력과의 관계는 점차 충돌로 전환되었고, 외교적 관리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수도 함락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외교 전략의 실패이자,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균형을 잃은 결과였다. 이후 제국은 니카이아, 트라페주스, 에페이로스 등으로 분열되며 잔존하였고, 이들 중 니카이아 제국이 13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외교적 주도권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는 무력 충돌과 병행된 외교 전략의 역사였으며, 특히 외교는 국경 방어, 세력 균형,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고정된 구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력 간의 이해 조정이었고, 이에 대한 유연하고 정교한 대응이 가능한 시기에는 제국이 생존과 재건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 조율에 실패한 시기에는 치명적인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몽골 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셀주크 제국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아나톨리아에는 다수의 튀르크계 베이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오스만 베이국은 전략적 위치와 결집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주변 베이국을 병합하며 팽창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 영토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였으며, 특히 발칸 반도의 정복은 제국의 생존 가능성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동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오스만 내 반란 세력을 지원하거나 혼인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전략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양 세력은 전쟁만큼이나 교류도 있었다. 동로마 군대에는 '투르코폴레스'라 불리는 튀르크계 기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정규군과 함께 국경 방어에 참여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동로마 제국 말기에는 궁정 복식이나 건축 양식에서 튀르크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반대로 오스만 초기의 통치 구조나 행정 체계에서도 동로마적 요소가 발견되며, 개국 과정에서 동로마 출신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1453년, 오스만 술탼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종말이자,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동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 오스만의 제국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써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이란 및 이슬람권 세력 간의 관계는 단순한 적대나 충돌의 연속이 아닌, 전략적 균형과 문화적 융합, 외교적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적 양상이었다. 양 세력은 지속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벌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제국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
4. 슬라브권[편집]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 간의 외교 관계는 수 세기 동안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얽힌 복합적인 관계로 형성되었다. 이 관계는 초기의 무력 충돌에서부터 정교회를 매개로 한 문화적 융합, 그리고 동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제3의 로마 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6세기 이후 슬라브족은 북방에서 남하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며 약탈을 일삼았으나, 곧 제국 영토 내부에 정착하여 정주민으로 변모하게 된다. 아바르족의 남하와 유목민족의 침입에 편승하거나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슬라브족은 동로마 북방 국경에서 지속적인 불안 요소였다. 제국은 이에 대해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선교를 통한 동화 전략을 병행하였다.
초기 슬라브족의 약탈은 아바르족의 남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바르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유목 민족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넓히며 슬라브족을 끌어들였다. 아바르족은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에 집중하고 있던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으나, 제국의 반격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이후 슬라브족은 단독으로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여 자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9세기 중엽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가 파견되어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를 정비하면서, 동로마 문명은 슬라브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서는 정교회를 수용하고 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이었지만,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하여 불가리아 칸국을 세운 뒤 동로마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하였고 동로마를 상대로 수차례 군사원정을 시도한 끝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차르 칭호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1]
그렇게 성립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제국의 북방을 압박하며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제국은 외교적으로 달래거나 군사적 원정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굴복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1018년 불가르는 완전히 복속되었다. 하시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재건되어 동로마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슬라브족 외에도 북방 유목 세력인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은 발칸 반도로 남하하여 제국을 공격하였다. 특히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가장 취약한 시기를 노려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였고,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쿠만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켰다. 이후 이들 부족은 제국 내에 정착하여 병사, 용병, 정주민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이 형성한 부대는 십자군 전쟁 시기 십자군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다.
슬라브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는 동슬라브족의 국가인 키이우(키예프) 루스와의 교류이다. 루스는 초기에는 제국의 적이자 침입자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노르드인(바이킹) 지배층과 슬라브 대중이 결합하여 형성된 이들은 배를 타고 도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고,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와 충돌하여 격퇴당하였다. 이후 루스는 점차 제국과의 외교 경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98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는 행정 개혁과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기존의 슬라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할 결심을 하였다. 당시 고려했던 종교는 이슬람, 유대교, 서유럽의 가톨릭,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였다.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유대교는 예루살렘을 잃은 민족의 종교라는 점에서 신의 축복을 상실했다는 해석으로 기각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중,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으로 보낸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엄과 하기아 소피아의 장엄함에 감탄한 사절들의 권고에 따라 정교회를 선택하였다.
마침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군사 귀족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블라디미르는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 포르피로예니티 안나와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 황제는 결혼 약속을 미루었고,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 남부의 헤르소니소스(헤르손)[2][3]을 침공하여 점령한 뒤 결혼 이행을 압박하였다. 제국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을 정리할 것을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하였고, 블라디미르는 988년 정식으로 개종하였다.
블라디미르는 개종 이후 전 루스 영토를 순행하며 귀족과 백성들에게 집단 개종과 세례를 강제하였다. 이는 단지 종교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제국식 정치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스의 문명적 전환을 이끈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후 루스는 제국과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우호적 동맹국으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14세기 무렵, 루스의 후계 국가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국과의 유대를 강조하며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대성당 수리비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대는 훗날 러시아 제국이 자신을 '제3의 로마'로 자처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정교회 보호와 동로마 계승이라는 명분을 활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의 외교는 단순한 충돌과 동맹을 넘어서, 종교와 문화, 제국적 이상을 매개로 한 깊은 상호작용이었다. 이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정교회와 제국의 유산으로 오랫동안 슬라브 세계에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유럽 문화와 정치 정체성의 심장이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6세기 이후 슬라브족은 북방에서 남하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며 약탈을 일삼았으나, 곧 제국 영토 내부에 정착하여 정주민으로 변모하게 된다. 아바르족의 남하와 유목민족의 침입에 편승하거나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슬라브족은 동로마 북방 국경에서 지속적인 불안 요소였다. 제국은 이에 대해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선교를 통한 동화 전략을 병행하였다.
초기 슬라브족의 약탈은 아바르족의 남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바르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유목 민족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넓히며 슬라브족을 끌어들였다. 아바르족은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에 집중하고 있던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으나, 제국의 반격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이후 슬라브족은 단독으로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여 자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9세기 중엽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가 파견되어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를 정비하면서, 동로마 문명은 슬라브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서는 정교회를 수용하고 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이었지만,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하여 불가리아 칸국을 세운 뒤 동로마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하였고 동로마를 상대로 수차례 군사원정을 시도한 끝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차르 칭호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1]
그렇게 성립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제국의 북방을 압박하며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제국은 외교적으로 달래거나 군사적 원정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굴복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1018년 불가르는 완전히 복속되었다. 하시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재건되어 동로마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슬라브족 외에도 북방 유목 세력인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은 발칸 반도로 남하하여 제국을 공격하였다. 특히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가장 취약한 시기를 노려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였고,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쿠만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켰다. 이후 이들 부족은 제국 내에 정착하여 병사, 용병, 정주민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이 형성한 부대는 십자군 전쟁 시기 십자군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다.
슬라브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는 동슬라브족의 국가인 키이우(키예프) 루스와의 교류이다. 루스는 초기에는 제국의 적이자 침입자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노르드인(바이킹) 지배층과 슬라브 대중이 결합하여 형성된 이들은 배를 타고 도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고,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와 충돌하여 격퇴당하였다. 이후 루스는 점차 제국과의 외교 경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98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는 행정 개혁과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기존의 슬라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할 결심을 하였다. 당시 고려했던 종교는 이슬람, 유대교, 서유럽의 가톨릭,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였다.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유대교는 예루살렘을 잃은 민족의 종교라는 점에서 신의 축복을 상실했다는 해석으로 기각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중,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으로 보낸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엄과 하기아 소피아의 장엄함에 감탄한 사절들의 권고에 따라 정교회를 선택하였다.
마침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군사 귀족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블라디미르는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 포르피로예니티 안나와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 황제는 결혼 약속을 미루었고,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 남부의 헤르소니소스(헤르손)[2][3]을 침공하여 점령한 뒤 결혼 이행을 압박하였다. 제국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을 정리할 것을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하였고, 블라디미르는 988년 정식으로 개종하였다.
블라디미르는 개종 이후 전 루스 영토를 순행하며 귀족과 백성들에게 집단 개종과 세례를 강제하였다. 이는 단지 종교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제국식 정치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스의 문명적 전환을 이끈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후 루스는 제국과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우호적 동맹국으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14세기 무렵, 루스의 후계 국가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국과의 유대를 강조하며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대성당 수리비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대는 훗날 러시아 제국이 자신을 '제3의 로마'로 자처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정교회 보호와 동로마 계승이라는 명분을 활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의 외교는 단순한 충돌과 동맹을 넘어서, 종교와 문화, 제국적 이상을 매개로 한 깊은 상호작용이었다. 이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정교회와 제국의 유산으로 오랫동안 슬라브 세계에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유럽 문화와 정치 정체성의 심장이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5. 유라시아 유목 세계[편집]
동로마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드는 유목 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단순한 전쟁이나 방어 차원을 넘어, 외교와 교역, 종교 교섭, 인적 교류, 문화적 조정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제국은 유목 세력과의 대립을 단지 군사적 충돌로만 대응하지 않고, 이들을 교묘하게 활용하거나 회유하며, 국경 방어와 정치적 안정을 위한 유연하고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제국의 존속이 단단한 방벽과 정교한 행정 체계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교적 재조정과 주변 세력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고대 후기부터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대한 초원 지대에서 형성된 다양한 유목 세력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집단은 훈족이었다. 훈족은 5세기 중반, 아틸라의 지휘 아래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를 침입하며 동로마 제국의 북방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였다. 특히 447년, 훈족은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접근하였고,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제국의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격퇴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대규모의 공물을 지급하며 훈족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력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무력 대결보다는 외교적 현실 감각과 실용주의를 중시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제국은 훈족 내부의 정치 분열과 계승 갈등을 면밀히 관찰하며, 이들 세력 간의 충돌을 유도하거나, 경쟁 집단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는 유목 세계의 특수한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초기 전략의 사례로 평가된다.
훈족의 세력이 쇠퇴한 이후, 6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유목 세력인 아바르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집단으로, 도나우 중류에 정착하여 그 주변의 슬라브계 부족들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지배 전략을 펼쳤다. 아바르족은 독립적인 군사력 외에도 다수의 예속 부족을 전쟁에 동원함으로써 다층적인 세력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압박도 보다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동로마는 아바르족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군사적 방어를 넘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시도하였다. 제국은 아바르와 그 예속 세력 간의 관계를 분리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 슬라브 족장들과 직접 교섭하였으며, 이들에게 명예직과 물자, 정교회 사제단을 파견함으로써 아바르의 지배권을 무력화하려 하였다. 특히 626년, 아바르족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시 공세를 전개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방어전에서 나아가 사산조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동맹 체계를 분열시키고, 북방에서는 아바르 내부의 반대파와 비밀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분산 전략은 물리적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대응 방식이었다.
626년의 포위가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아바르족과 이들의 지배 하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들의 반복적인 침입은 동로마 제국의 발칸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슬라브계 집단들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펠로폰네소스 등 내륙 깊숙한 지역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제국은 이들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상실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단순한 군사적 진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슬라브계 족장들에게 제국 내 귀족 직위를 부여하고, 수도로 초청하여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는 정치 외교는 대표적인 통합 전략이었다. 이와 함께 동로마는 정교회 사제를 슬라브 거주지에 파견하여 교회 중심의 문화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건축과 세례 의식을 통해 동로마적 질서의 상징을 확산시켰다. 이 과정은 단순한 종교 전파가 아니라 정치적 복속과 문화적 동화가 결합된 장기 외교 전략이었다.
슬라브계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아바르족의 지배 방식,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동로마의 외교 전략은 복합적인 동맹과 이탈, 교섭과 회유의 과정을 통해 발칸 질서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복잡한 구도 속에서 단순히 유목 세력을 외부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국경 안정과 정치적 우위를 도모하였다. 아바르와 슬라브의 침입은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이 다민족 사회로 이행하며 외교 기술을 정교화하는 시험대이기도 하였다.
결국 훈족과 아바르족, 그리고 슬라브계 집단들과의 초기 접촉은 동로마 제국 외교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락이었다. 이 접촉은 단지 영토 방어라는 목적을 넘어, 동로마가 유목 세계와 어떻게 교섭하고, 그 내부의 정치 동향을 어떻게 파악하며,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제국 질서 속에 통합하려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이러한 유목 세계와의 외교는 이후 마자르족, 페체네그, 쿠만족, 몽골 세력 등 다양한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으며, 제국 외교의 핵심적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바르 족의 쇠퇴 이후 등장한 불가르족은 동로마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장기적인 외교 전략과 문화적 접촉, 그리고 국경지대의 정치 지형 변화에 깊이 얽혀 있었다. 아바르 세력이 약화된 7세기 후반 이후, 흑해 북방 초원에서 남하한 불가르족은 슬라브계 주민들과 융합하여 발칸반도 북부에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부터 이들의 등장에 깊은 우려를 표하였으며, 단순한 군사적 제압을 넘어 다양한 외교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불가르족의 세력 확대는 제국 북방 방어선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불가르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혼인 외교, 종교 외교, 경제적 회유 등의 전략을 복합적으로 추진하였다. 제국은 불가르족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통상 관계를 조절하여 자원 유입 통로를 통제하려 하였다. 특히 불가르 귀족층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확대하고, 이들에게 명예직과 재정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리아 내부의 이탈 세력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점차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면서 자주적인 외교 기조를 확립하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가르와 동로마 사이의 외교는 다수의 무력 충돌과 병행되었으며,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타협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관계로 전개되었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한 사건은, 제국의 북방 외교 실패가 가져온 정치적 충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9세기 중반부터는 기독교 개종을 둘러싼 외교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의 기독교 수용을 자신들의 종교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불가리아도 한때 서방 교회와 접촉하면서 균형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불가르 통치자 보리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을 자국 내에 정착시키면서 불가리아는 동방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군사 충돌과는 별개로 외교적 영향력 확장에서 동로마 제국이 거둔 중대한 성과였다.
한편, 10세기 이후 동로마의 북방 외교는 스텝 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 세력들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그 중 페체네그는 드네프르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대를 장악하고 제국 북부 국경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국경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는 단순한 방어보다 훨씬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제국은 페체네그와의 군사적 충돌과 병행하여, 이들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물품과 금전을 지급하거나 귀족 칭호를 수여하며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 또한 때로는 이들을 제국 내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른 유목 세력이나 발칸의 반란군 진압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중적 외교는 제국이 북방 유목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였다.
페체네그가 11세기 중엽 레부니온 전투와 베로이아 전투에서 제국군과 동맹 세력에 의해 궤멸되었을 때, 이는 단순한 군사 승리를 넘어 외교와 정보전을 통한 장기 전략의 성공을 의미하였다. 특히 제국은 불가르의 잔존 세력, 러시아계 무장 세력, 그리고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의 삼각 외교를 통해 페체네그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동로마 외교의 정교함과 장기 전략 수립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불가르족과 페체네그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대응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외교적 기민함과 전략적 계산이 융합된 복합적 접근의 전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국은 때로는 참패를 겪었고 때로는 반격에 성공하였으나, 항상 유목 세력에 대한 외교적 감각을 유지하며 제국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기적 시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외교는 단지 국경 방어에 그치지 않고, 종교, 문화, 통상 전반에 걸쳐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자르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초기에는 간접적인 충돌과 긴장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교적 교섭과 문화적 교류, 상징적 위계 구조가 점차 형성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마자르족은 9세기 말, 페체네그의 압박을 받아 도나우 강 중류를 넘어 서진하였고, 결국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자르족은 유럽 내에서 새로운 유목계 정착국가로 부상하였으며, 초기에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벌이며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초기 접근은 대체로 군사적 충돌에 가까웠다. 그러나 10세기 중엽 이후, 머저르족은 점차 정주 사회로 전환하였고,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독일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성립과 함께 서방교회와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이는 겉으로는 동로마와의 외교적 간극을 넓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를 단지 서방 진영의 일부로만 간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하단 링은, 상징적으로 헝가리 왕권이 로마 황제에 의해 승인되었음을 보여주는 외교적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국이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주변 정권들에게 제국적 권위의 표식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외교는 실제로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헝가리 왕국에 대한 일정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제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와 헝가리 간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는 북방 안정화를 위해 헝가리와의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누일 1세 재위기에는 하람 전투와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일시적으로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으며, 당시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헝가리 내정에 대한 간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였다. 제국은 특정 왕위 후보를 지지하고, 이들과 혼인 외교를 추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구도를 북방에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의 사후, 제국의 대외정책은 급속히 방어적으로 전환되었고, 헝가리 역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명백히 서방교회 문화권에 편입되어 가면서, 동로마와의 외교는 주로 상징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저르족 출신 귀족이나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 내에서 활동한 사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제국 궁정과 군사 구조 내에서 문화적 교류와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한편, 동유럽 초원의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한 키예프 루스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동로마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초기부터 도나우와 흑해를 통한 교역로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통상과 동맹을 병행하면서 때때로 무력 충돌도 감행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목적으로 한 루스의 침공이 반복되었지만, 제국은 루스의 지도자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역 항구 개방이나 귀족 작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하자르 카간국을 약화시키면서 흑해 북방 초원 지대의 정치 질서는 재편되었고, 이로 인해 쿠만족이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쿠만은 중앙유라시아에서 서진한 튀르크계 유목 집단으로, 키예프 루스와의 충돌을 중심에 두면서도, 때로는 동로마 제국과 간헐적인 충돌이나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11세기와 12세기, 쿠만 전사들이 제국 군대에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쿠만계 귀족들이 동로마 귀족층과 혼인 관계를 맺고 궁정 사회에 편입된 사례는, 문화적 통합이 외교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은 쿠만족의 유목적 특성과 이동성을 고려하여 이들의 거주지를 국경 지대에서 분산시키거나, 동로마령 내의 일부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이는 쿠만의 무력적 성격을 제어하는 동시에, 국경 방어에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적 전략이었다. 나아가 쿠만 용병들은 제국 내 반란 진압이나 북방 방어에 실질적인 병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을 통한 간접적 영향력 확대는 제국 외교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머저르족, 키예프 루스, 쿠만족과의 관계는 단순한 우호나 적대의 이분법을 넘어, 상징적 외교, 실질적 군사 협력, 문화적 통합을 아우르는 다층적 구조로 발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유목 또는 반정착 세력들을 국경 너머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제국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회유하고 조절하며, 자신들의 국제 질서를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제국의 북방 외교가 단순한 군사적 방어선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 네트워크와 권위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은 몽골 제국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전례 없는 정치적 재편을 맞이하였다. 몽골 제국은 동유럽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기존의 유목 세력뿐 아니라 농경 중심의 제국들과도 새로운 관계 망을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유목 세계의 권력 구도가 거대하고 통합적인 구조로 재편되자, 동로마 제국 역시 이에 적응하며 외교 전략을 정비하였다. 당시 동로마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가칭 니케아 제국[4]의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수도가 회복된 뒤에도 새로운 외교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변화된 세계에서 단지 방어적 자세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서아시아에 자리잡은 일 칸국과의 관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일 칸국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두고 맘루크 술탄국과 지속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틈을 타 일 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공동의 위협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황제 미하일 8세는 일 칸국 군주들과의 공식적인 외교를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상호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특사 교환은 단순한 안부의 전달이나 친선 목적을 넘어, 구체적인 군사 협력과 지역 내 세력 균형을 조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국은 맘루크 세력의 동방 진출을 우려하였고, 일 칸국은 이슬람 중심 세력에 맞서 기독교 제국과의 협력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의 이해관계는 종교와 문명의 차이를 넘어서 현실 정치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외교적 접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은 혼인 외교를 통해 일 칸국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제국 황실은 몽골 귀족 가문과의 혼인 가능성을 타진하며 양측의 동맹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고, 일 칸국 또한 기독교 세력과의 정치적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방 교회 및 동로마 황제와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교섭은 일면에서 교회 일치 문제와도 연결되었으며, 일 칸국이 일부 기독교 집단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점은 제국 외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도 이러한 외교 기조는 이어졌다. 제국은 일 칸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몽골 제국의 후계 정권들이 이슬람화하는 양상을 주시하였다. 일 칸국 내부의 권력 교체와 이슬람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몽골 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교역과 군사 협력을 병행하면서도 외교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탄력적 외교 전략은 국력이 쇠퇴해가던 제국이 광역 유라시아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과 몽골 세계의 교류는 단지 군사 및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단일한 교역권으로 연결함에 따라, 동서 간의 상업 노선과 사절 교환이 활발해졌으며, 이는 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국은 몽골령을 경유하는 실크로드 상권을 활용하기 위해 동방 상인과 접촉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제국 외교사의 말기에 등장한 특수 사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계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전략적 교섭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동로마는 유목 세력을 배제하거나 단순히 저지할 수 없는 실체로 인식하였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제국이 고립된 농경 문명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복합적 힘의 교차점에서 현실적이고 유연한 외교 감각을 바탕으로 존속해온 문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유목 세계를 단순한 이질적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때로는 위협으로 경계하며, 때로는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교섭과 조정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이 다양한 민족과 세력 속에서 생존하고, 유라시아의 질서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고대 후기부터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대한 초원 지대에서 형성된 다양한 유목 세력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집단은 훈족이었다. 훈족은 5세기 중반, 아틸라의 지휘 아래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를 침입하며 동로마 제국의 북방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였다. 특히 447년, 훈족은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접근하였고,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제국의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격퇴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대규모의 공물을 지급하며 훈족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력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무력 대결보다는 외교적 현실 감각과 실용주의를 중시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제국은 훈족 내부의 정치 분열과 계승 갈등을 면밀히 관찰하며, 이들 세력 간의 충돌을 유도하거나, 경쟁 집단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는 유목 세계의 특수한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초기 전략의 사례로 평가된다.
훈족의 세력이 쇠퇴한 이후, 6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유목 세력인 아바르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집단으로, 도나우 중류에 정착하여 그 주변의 슬라브계 부족들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지배 전략을 펼쳤다. 아바르족은 독립적인 군사력 외에도 다수의 예속 부족을 전쟁에 동원함으로써 다층적인 세력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압박도 보다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동로마는 아바르족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군사적 방어를 넘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시도하였다. 제국은 아바르와 그 예속 세력 간의 관계를 분리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 슬라브 족장들과 직접 교섭하였으며, 이들에게 명예직과 물자, 정교회 사제단을 파견함으로써 아바르의 지배권을 무력화하려 하였다. 특히 626년, 아바르족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시 공세를 전개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방어전에서 나아가 사산조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동맹 체계를 분열시키고, 북방에서는 아바르 내부의 반대파와 비밀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분산 전략은 물리적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대응 방식이었다.
626년의 포위가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아바르족과 이들의 지배 하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들의 반복적인 침입은 동로마 제국의 발칸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슬라브계 집단들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펠로폰네소스 등 내륙 깊숙한 지역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제국은 이들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상실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단순한 군사적 진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슬라브계 족장들에게 제국 내 귀족 직위를 부여하고, 수도로 초청하여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는 정치 외교는 대표적인 통합 전략이었다. 이와 함께 동로마는 정교회 사제를 슬라브 거주지에 파견하여 교회 중심의 문화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건축과 세례 의식을 통해 동로마적 질서의 상징을 확산시켰다. 이 과정은 단순한 종교 전파가 아니라 정치적 복속과 문화적 동화가 결합된 장기 외교 전략이었다.
슬라브계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아바르족의 지배 방식,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동로마의 외교 전략은 복합적인 동맹과 이탈, 교섭과 회유의 과정을 통해 발칸 질서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복잡한 구도 속에서 단순히 유목 세력을 외부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국경 안정과 정치적 우위를 도모하였다. 아바르와 슬라브의 침입은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이 다민족 사회로 이행하며 외교 기술을 정교화하는 시험대이기도 하였다.
결국 훈족과 아바르족, 그리고 슬라브계 집단들과의 초기 접촉은 동로마 제국 외교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락이었다. 이 접촉은 단지 영토 방어라는 목적을 넘어, 동로마가 유목 세계와 어떻게 교섭하고, 그 내부의 정치 동향을 어떻게 파악하며,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제국 질서 속에 통합하려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이러한 유목 세계와의 외교는 이후 마자르족, 페체네그, 쿠만족, 몽골 세력 등 다양한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으며, 제국 외교의 핵심적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바르 족의 쇠퇴 이후 등장한 불가르족은 동로마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장기적인 외교 전략과 문화적 접촉, 그리고 국경지대의 정치 지형 변화에 깊이 얽혀 있었다. 아바르 세력이 약화된 7세기 후반 이후, 흑해 북방 초원에서 남하한 불가르족은 슬라브계 주민들과 융합하여 발칸반도 북부에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부터 이들의 등장에 깊은 우려를 표하였으며, 단순한 군사적 제압을 넘어 다양한 외교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불가르족의 세력 확대는 제국 북방 방어선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불가르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혼인 외교, 종교 외교, 경제적 회유 등의 전략을 복합적으로 추진하였다. 제국은 불가르족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통상 관계를 조절하여 자원 유입 통로를 통제하려 하였다. 특히 불가르 귀족층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확대하고, 이들에게 명예직과 재정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리아 내부의 이탈 세력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점차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면서 자주적인 외교 기조를 확립하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가르와 동로마 사이의 외교는 다수의 무력 충돌과 병행되었으며,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타협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관계로 전개되었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한 사건은, 제국의 북방 외교 실패가 가져온 정치적 충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9세기 중반부터는 기독교 개종을 둘러싼 외교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의 기독교 수용을 자신들의 종교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불가리아도 한때 서방 교회와 접촉하면서 균형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불가르 통치자 보리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을 자국 내에 정착시키면서 불가리아는 동방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군사 충돌과는 별개로 외교적 영향력 확장에서 동로마 제국이 거둔 중대한 성과였다.
한편, 10세기 이후 동로마의 북방 외교는 스텝 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 세력들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그 중 페체네그는 드네프르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대를 장악하고 제국 북부 국경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국경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는 단순한 방어보다 훨씬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제국은 페체네그와의 군사적 충돌과 병행하여, 이들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물품과 금전을 지급하거나 귀족 칭호를 수여하며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 또한 때로는 이들을 제국 내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른 유목 세력이나 발칸의 반란군 진압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중적 외교는 제국이 북방 유목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였다.
페체네그가 11세기 중엽 레부니온 전투와 베로이아 전투에서 제국군과 동맹 세력에 의해 궤멸되었을 때, 이는 단순한 군사 승리를 넘어 외교와 정보전을 통한 장기 전략의 성공을 의미하였다. 특히 제국은 불가르의 잔존 세력, 러시아계 무장 세력, 그리고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의 삼각 외교를 통해 페체네그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동로마 외교의 정교함과 장기 전략 수립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불가르족과 페체네그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대응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외교적 기민함과 전략적 계산이 융합된 복합적 접근의 전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국은 때로는 참패를 겪었고 때로는 반격에 성공하였으나, 항상 유목 세력에 대한 외교적 감각을 유지하며 제국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기적 시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외교는 단지 국경 방어에 그치지 않고, 종교, 문화, 통상 전반에 걸쳐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자르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초기에는 간접적인 충돌과 긴장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교적 교섭과 문화적 교류, 상징적 위계 구조가 점차 형성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마자르족은 9세기 말, 페체네그의 압박을 받아 도나우 강 중류를 넘어 서진하였고, 결국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자르족은 유럽 내에서 새로운 유목계 정착국가로 부상하였으며, 초기에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벌이며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초기 접근은 대체로 군사적 충돌에 가까웠다. 그러나 10세기 중엽 이후, 머저르족은 점차 정주 사회로 전환하였고,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독일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성립과 함께 서방교회와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이는 겉으로는 동로마와의 외교적 간극을 넓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를 단지 서방 진영의 일부로만 간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하단 링은, 상징적으로 헝가리 왕권이 로마 황제에 의해 승인되었음을 보여주는 외교적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국이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주변 정권들에게 제국적 권위의 표식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외교는 실제로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헝가리 왕국에 대한 일정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제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와 헝가리 간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는 북방 안정화를 위해 헝가리와의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누일 1세 재위기에는 하람 전투와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일시적으로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으며, 당시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헝가리 내정에 대한 간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였다. 제국은 특정 왕위 후보를 지지하고, 이들과 혼인 외교를 추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구도를 북방에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의 사후, 제국의 대외정책은 급속히 방어적으로 전환되었고, 헝가리 역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명백히 서방교회 문화권에 편입되어 가면서, 동로마와의 외교는 주로 상징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저르족 출신 귀족이나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 내에서 활동한 사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제국 궁정과 군사 구조 내에서 문화적 교류와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한편, 동유럽 초원의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한 키예프 루스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동로마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초기부터 도나우와 흑해를 통한 교역로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통상과 동맹을 병행하면서 때때로 무력 충돌도 감행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목적으로 한 루스의 침공이 반복되었지만, 제국은 루스의 지도자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역 항구 개방이나 귀족 작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하자르 카간국을 약화시키면서 흑해 북방 초원 지대의 정치 질서는 재편되었고, 이로 인해 쿠만족이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쿠만은 중앙유라시아에서 서진한 튀르크계 유목 집단으로, 키예프 루스와의 충돌을 중심에 두면서도, 때로는 동로마 제국과 간헐적인 충돌이나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11세기와 12세기, 쿠만 전사들이 제국 군대에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쿠만계 귀족들이 동로마 귀족층과 혼인 관계를 맺고 궁정 사회에 편입된 사례는, 문화적 통합이 외교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은 쿠만족의 유목적 특성과 이동성을 고려하여 이들의 거주지를 국경 지대에서 분산시키거나, 동로마령 내의 일부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이는 쿠만의 무력적 성격을 제어하는 동시에, 국경 방어에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적 전략이었다. 나아가 쿠만 용병들은 제국 내 반란 진압이나 북방 방어에 실질적인 병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을 통한 간접적 영향력 확대는 제국 외교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머저르족, 키예프 루스, 쿠만족과의 관계는 단순한 우호나 적대의 이분법을 넘어, 상징적 외교, 실질적 군사 협력, 문화적 통합을 아우르는 다층적 구조로 발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유목 또는 반정착 세력들을 국경 너머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제국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회유하고 조절하며, 자신들의 국제 질서를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제국의 북방 외교가 단순한 군사적 방어선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 네트워크와 권위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은 몽골 제국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전례 없는 정치적 재편을 맞이하였다. 몽골 제국은 동유럽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기존의 유목 세력뿐 아니라 농경 중심의 제국들과도 새로운 관계 망을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유목 세계의 권력 구도가 거대하고 통합적인 구조로 재편되자, 동로마 제국 역시 이에 적응하며 외교 전략을 정비하였다. 당시 동로마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가칭 니케아 제국[4]의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수도가 회복된 뒤에도 새로운 외교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변화된 세계에서 단지 방어적 자세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서아시아에 자리잡은 일 칸국과의 관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일 칸국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두고 맘루크 술탄국과 지속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틈을 타 일 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공동의 위협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황제 미하일 8세는 일 칸국 군주들과의 공식적인 외교를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상호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특사 교환은 단순한 안부의 전달이나 친선 목적을 넘어, 구체적인 군사 협력과 지역 내 세력 균형을 조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국은 맘루크 세력의 동방 진출을 우려하였고, 일 칸국은 이슬람 중심 세력에 맞서 기독교 제국과의 협력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의 이해관계는 종교와 문명의 차이를 넘어서 현실 정치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외교적 접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은 혼인 외교를 통해 일 칸국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제국 황실은 몽골 귀족 가문과의 혼인 가능성을 타진하며 양측의 동맹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고, 일 칸국 또한 기독교 세력과의 정치적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방 교회 및 동로마 황제와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교섭은 일면에서 교회 일치 문제와도 연결되었으며, 일 칸국이 일부 기독교 집단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점은 제국 외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도 이러한 외교 기조는 이어졌다. 제국은 일 칸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몽골 제국의 후계 정권들이 이슬람화하는 양상을 주시하였다. 일 칸국 내부의 권력 교체와 이슬람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몽골 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교역과 군사 협력을 병행하면서도 외교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탄력적 외교 전략은 국력이 쇠퇴해가던 제국이 광역 유라시아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과 몽골 세계의 교류는 단지 군사 및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단일한 교역권으로 연결함에 따라, 동서 간의 상업 노선과 사절 교환이 활발해졌으며, 이는 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국은 몽골령을 경유하는 실크로드 상권을 활용하기 위해 동방 상인과 접촉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제국 외교사의 말기에 등장한 특수 사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계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전략적 교섭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동로마는 유목 세력을 배제하거나 단순히 저지할 수 없는 실체로 인식하였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제국이 고립된 농경 문명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복합적 힘의 교차점에서 현실적이고 유연한 외교 감각을 바탕으로 존속해온 문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유목 세계를 단순한 이질적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때로는 위협으로 경계하며, 때로는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교섭과 조정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이 다양한 민족과 세력 속에서 생존하고, 유라시아의 질서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6. 비슬라브 동방 기독교권[편집]
동로마 제국은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동방 기독교권과 밀접한 외교와 종교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비슬라브 계열의 여러 국가 가운데에서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긴밀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정치·군사·종교적 접촉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자국 고유의 정체성과 기독교 전통을 유지해왔으며, 동로마의 종교 노선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단순한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 접촉을 넘어, 종교, 군사, 귀족 동맹, 영토 통제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외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갈등과 협력, 지배와 자율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국경의 전략적 완충지로 인식하였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사산조 페르시아, 후에는 이슬람 제국과의 접경지대로서 제국 방어의 핵심 축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정치 구조에 지속적인 외교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제국의 외교 전략은 아르메니아를 일방적으로 병합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현지 귀족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외교는 종교 문제로 인해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 조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이 공인한 정교회 노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다양한 시기마다 아르메니아에 칼케돈 교리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외교적 압력이나 회유책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교회 독립을 국가 정체성과 결부지었기에, 종교 일치를 통한 통합 외교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국은 대신 현실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아르메니아 귀족층과의 연대를 선택하였다. 아르메니아 내부는 여러 귀족 가문이 할거하고 있는 구조였으며, 제국은 특정 귀족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친제국적 세력을 육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메니아 귀족들에게 제국 내에서의 작위와 토지를 부여하거나, 그 자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청하여 제국 체제에 편입시키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 통합은 군사뿐 아니라 혼인을 통한 귀족 동맹으로도 전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 최고위층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외교는 군사 외교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위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거나, 국지적 분쟁에서 특정 세력을 지원하였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나 아랍 칼리파국의 확장기에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군사적 협정을 맺거나 직접적인 방위 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반면, 아르메니아 내부에서 친제국 성향이 약화되거나 반제국적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 제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완전한 외부 국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국의 시각에서 아르메니아는 종교적으로 이단일지라도 문명적으로 동방 정교권에 포함되는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제국의 외교 영역 안에 두려는 의지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 국가로서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제국의 교회, 귀족, 군사 정책에 깊이 관여되는 위치에 놓였고, 이러한 상태는 11세기 이후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 국경이 재편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요약하면,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 일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귀족 동맹, 군사 협정, 국경 안정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기반으로 긴밀히 이루어졌다.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동시에 자국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이는 제국의 동방 외교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지아와의 외교는 정교회를 매개로 한 종교적 연대와 캅카스의 지배권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조지아는 기독교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용한 국가로서, 중세 초부터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수용하고, 동방 정교회의 교의 체계를 따르는 교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지아는 교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일치된 신앙 노선을 유지하였고, 이는 양국 외교에서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일관되게 자국의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때때로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 압박이나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조지아와의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는 제국이 캅카스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일련의 전략적 조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지아는 이에 맞서 자국 영토를 방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전면적인 적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교적 조율을 통해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다. 제국은 조지아의 독립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조지아 역시 제국과의 종교적 유대와 문화적 연계성을 의식하여 일정 수준의 우호 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트라페준타 제국 등 후계 국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다. 이 시기 조지아 왕국은 흑해 남동 연안에 위치한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화하면서, 동방 정교권 내에서의 영향력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였다. 조지아의 이러한 외교는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계와 서방 십자군 사이에서 흔들릴 때, 동방 기독교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자국 중심의 전략이었다.
문화적 외교 또한 조지아와 동로마 사이의 중요한 축이었다. 조지아는 수도원 제도, 교회 건축, 성화 제작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동로마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는 조지아 정교회가 동로마 정교회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자국 고유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조지아어 문헌의 체계화와 성경 번역, 교부 문헌의 수용 과정에서 동로마의 신학 전통은 조지아 내 학문적·종교적 담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조지아는 이를 자국 문화로 융합시켜 독자적 종교 문명을 구축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치적 주권을 둘러싼 갈등과 문화적 상호 교류가 동시에 전개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지아는 정교회의 교리를 공유하며 제국과 외교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편, 자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외교적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연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하였다.
또한 고대 악숨 왕국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전개된 장거리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티오피아는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국가로, 독자적인 전통을 지닌 터와흐도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이는 동방 합성론 교회(오리엔트 정교회)[5]에 속했다. 이러한 종교적 유사성은 두 문명이 서로를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양국 간의 초기 외교는 종교적 일치감 속에서 형성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특히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아프리카 동해안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악숨 왕국을 전략적 협력자로 간주하였다. 이는 단지 해상 교역의 안정성 확보 차원을 넘어,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충돌의 대응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6세기 초, 아라비아반도 남단에 자리 잡았던 힘야르 왕국은 유대교를 국교로 채택하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에티오피아 측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응하여 홍해를 건너 힘야르를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중심의 질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와 에티오피아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며 실질적인 외교적 협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는 곧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7세기 초부터 이슬람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홍해에 대한 해상 통제권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홍해 연안의 항구와 무역로에서 밀려나면서 국제적 교류의 폭이 축소되었고, 양국 간의 직접적 접촉은 점차 희박해졌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에도 에티오피아는 독립된 기독교 왕국으로 존속하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는 해상로 단절, 중개 무역의 붕괴, 지리적 고립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실질적인 외교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종합하면, 동로마 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외교는 초기에는 종교적 유대와 정치적 전략의 일치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나, 해상 교통망과 정치 질서의 변화로 인해 단절된 특수한 외교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양국은 각기 다른 대륙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기독교권의 일원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틀 속에서 일시적으로 강력한 외교적 협력을 이룬 바 있으며, 이는 고대 후반과 중세 초기의 기독교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비슬라브 계열의 동방 기독교권 국가들과 복합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유목권, 슬라브권에서 보여준 유연한 외교술의 연장아라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종교적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채로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인 정치·군사적 접촉을 이어갔으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였다. 제국은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외교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종교적 일치가 아닌, 정치적 이익과 문화적 접점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방 기독교권이 제국의 동쪽 외교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단순한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 접촉을 넘어, 종교, 군사, 귀족 동맹, 영토 통제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외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갈등과 협력, 지배와 자율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국경의 전략적 완충지로 인식하였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사산조 페르시아, 후에는 이슬람 제국과의 접경지대로서 제국 방어의 핵심 축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정치 구조에 지속적인 외교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제국의 외교 전략은 아르메니아를 일방적으로 병합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현지 귀족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외교는 종교 문제로 인해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 조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이 공인한 정교회 노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다양한 시기마다 아르메니아에 칼케돈 교리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외교적 압력이나 회유책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교회 독립을 국가 정체성과 결부지었기에, 종교 일치를 통한 통합 외교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국은 대신 현실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아르메니아 귀족층과의 연대를 선택하였다. 아르메니아 내부는 여러 귀족 가문이 할거하고 있는 구조였으며, 제국은 특정 귀족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친제국적 세력을 육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메니아 귀족들에게 제국 내에서의 작위와 토지를 부여하거나, 그 자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청하여 제국 체제에 편입시키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 통합은 군사뿐 아니라 혼인을 통한 귀족 동맹으로도 전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 최고위층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외교는 군사 외교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위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거나, 국지적 분쟁에서 특정 세력을 지원하였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나 아랍 칼리파국의 확장기에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군사적 협정을 맺거나 직접적인 방위 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반면, 아르메니아 내부에서 친제국 성향이 약화되거나 반제국적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 제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완전한 외부 국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국의 시각에서 아르메니아는 종교적으로 이단일지라도 문명적으로 동방 정교권에 포함되는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제국의 외교 영역 안에 두려는 의지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 국가로서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제국의 교회, 귀족, 군사 정책에 깊이 관여되는 위치에 놓였고, 이러한 상태는 11세기 이후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 국경이 재편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요약하면,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 일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귀족 동맹, 군사 협정, 국경 안정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기반으로 긴밀히 이루어졌다.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동시에 자국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이는 제국의 동방 외교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지아와의 외교는 정교회를 매개로 한 종교적 연대와 캅카스의 지배권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조지아는 기독교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용한 국가로서, 중세 초부터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수용하고, 동방 정교회의 교의 체계를 따르는 교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지아는 교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일치된 신앙 노선을 유지하였고, 이는 양국 외교에서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일관되게 자국의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때때로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 압박이나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조지아와의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는 제국이 캅카스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일련의 전략적 조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지아는 이에 맞서 자국 영토를 방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전면적인 적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교적 조율을 통해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다. 제국은 조지아의 독립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조지아 역시 제국과의 종교적 유대와 문화적 연계성을 의식하여 일정 수준의 우호 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트라페준타 제국 등 후계 국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다. 이 시기 조지아 왕국은 흑해 남동 연안에 위치한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화하면서, 동방 정교권 내에서의 영향력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였다. 조지아의 이러한 외교는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계와 서방 십자군 사이에서 흔들릴 때, 동방 기독교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자국 중심의 전략이었다.
문화적 외교 또한 조지아와 동로마 사이의 중요한 축이었다. 조지아는 수도원 제도, 교회 건축, 성화 제작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동로마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는 조지아 정교회가 동로마 정교회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자국 고유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조지아어 문헌의 체계화와 성경 번역, 교부 문헌의 수용 과정에서 동로마의 신학 전통은 조지아 내 학문적·종교적 담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조지아는 이를 자국 문화로 융합시켜 독자적 종교 문명을 구축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치적 주권을 둘러싼 갈등과 문화적 상호 교류가 동시에 전개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지아는 정교회의 교리를 공유하며 제국과 외교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편, 자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외교적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연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하였다.
또한 고대 악숨 왕국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전개된 장거리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티오피아는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국가로, 독자적인 전통을 지닌 터와흐도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이는 동방 합성론 교회(오리엔트 정교회)[5]에 속했다. 이러한 종교적 유사성은 두 문명이 서로를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양국 간의 초기 외교는 종교적 일치감 속에서 형성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특히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아프리카 동해안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악숨 왕국을 전략적 협력자로 간주하였다. 이는 단지 해상 교역의 안정성 확보 차원을 넘어,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충돌의 대응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6세기 초, 아라비아반도 남단에 자리 잡았던 힘야르 왕국은 유대교를 국교로 채택하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에티오피아 측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응하여 홍해를 건너 힘야르를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중심의 질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와 에티오피아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며 실질적인 외교적 협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는 곧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7세기 초부터 이슬람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홍해에 대한 해상 통제권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홍해 연안의 항구와 무역로에서 밀려나면서 국제적 교류의 폭이 축소되었고, 양국 간의 직접적 접촉은 점차 희박해졌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에도 에티오피아는 독립된 기독교 왕국으로 존속하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는 해상로 단절, 중개 무역의 붕괴, 지리적 고립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실질적인 외교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종합하면, 동로마 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외교는 초기에는 종교적 유대와 정치적 전략의 일치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나, 해상 교통망과 정치 질서의 변화로 인해 단절된 특수한 외교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양국은 각기 다른 대륙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기독교권의 일원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틀 속에서 일시적으로 강력한 외교적 협력을 이룬 바 있으며, 이는 고대 후반과 중세 초기의 기독교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비슬라브 계열의 동방 기독교권 국가들과 복합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유목권, 슬라브권에서 보여준 유연한 외교술의 연장아라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종교적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채로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인 정치·군사적 접촉을 이어갔으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였다. 제국은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외교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종교적 일치가 아닌, 정치적 이익과 문화적 접점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방 기독교권이 제국의 동쪽 외교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7. 인도[편집]
8. 중국[편집]
[1] 어디까지나 불가리아인의 차르일 뿐,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이 있긴 했다.[2] 고대~코이네 그리스어 명칭은 케르소네소스.[3] 우크라이나의 도시 헤르손의 어원이 된 지역이지만, 오늘날의 헤르손이 아닌 세바스토폴에 위치했다.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그리스 계획에 따라 도시를 건설할 당시에는 고대~중세 헤르소니소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실제 헤르소니소스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지역에 동명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 그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4] 공식 국호는 여전히 로마 제국이었다.[5] 에우티케스의 단성론은 합성론 교회에서도 이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