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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화산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화산들
1. 개요2. 명칭3. 산토리니의 역사
3.1. 아크로티리와 미노아 문명의 흔적3.2. 청동기 시대 분화와 고대 산토리니
3.2.1. 미노아 분화와 연대 측정3.2.2. 고대 산토리니와 도리아인 정착3.2.3. 신화 속 테라의 기원3.2.4. 도리아인의 유산과 식민 활동3.2.5. 헬레니즘 시대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3. 중세오스만 시대의 산토리니3.4. 그리스 독립 전쟁과 산토리니3.5. 제2차 세계대전과 산토리니
3.5.1. 전후 시대와 현대 산토리니
3.6. 1956년 산토리니 대지진3.7. 2025년 산토리니 지진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512px-Oia_-_Santorini_-_Greece_-_11.jpg
산토리니의 풍경
산토리니(그리스어: Σαντορίνη, 로마자 표기: Santoríni)는 그리스 남부 에게해에 위치한 섬으로, 본토에서 약 200km(120마일) 떨어져 있다. 공식 명칭은 티라(Θήρα, Thíra) 또는 테라(Thera)이며,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섬 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약 73㎢이며, 2021년 기준으로 약 15,48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산토리니와 테라시아 두 개의 유인도를 포함하며, 네아 카메니, 팔레아 카메니, 아스프로니시, 아니드로스, 크리스티아나 등의 무인도를 포함하는 산토리니 지방 자치구를 구성한다. 이들 섬을 합친 전체 면적은 약 91㎢이며, 티라 지역 단위에 속한다.

산토리니는 남에게해 화산호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활동을 보이는 지역이다. 이 화산호는 길이 약 500km, 폭 20km에서 40km에 걸쳐 형성되어 있으며, 약 300만년에서 40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산토리니가 위치한 테라 섬에서는 약 200만 년 전 아크로티리 지역을 중심으로 다사이트 용암이 분출되면서 화산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산토리니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약 3,600년 전 발생한 대규모 화산 분출로,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폭발로 인해 섬의 중앙부가 함몰되며 거대한 칼데라가 형성되었고, 주변에는 두꺼운 화산재층이 쌓였다. 현재 산토리니를 둘러싸고 있는 섬들은 이때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산토리니는 2015년부터 10년 화산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는 화산의 활동성과 인구 밀집 지역과의 근접성, 과거 폭발 기록 등을 고려해 선정된 것이다.

산토리니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화산 분화를 여러 차례 경험했으며, 특히 미노아 분화(기원전 약 1600년경)는 에게해 전역에 영향을 미친 거대한 폭발로 기록되었다. 또한, 최근까지도 네아 카메니와 콜룸보 화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관측되고 있다.

2. 명칭[편집]

파일:Saint_Irene_cradling_the_head_of_Saint_Sebastian_(Paul_La_Tarte) (1).jpg
산토리니의 이름의 유래가 된 성 이레네를 묘사한 작품
산토리니라는 이름은 13세기 라틴 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으로, 페리사 마을에 있던 성 이리니(Saint Irene)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본래 산타 이리니에서 축약된 형태가 현재의 산토리니라는 명칭이 되었다.

이전에는 섬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칼리스테(Καλλίστη, "가장 아름다운 섬"), 원형의 지형을 반영한 스트롱길리(Στρογγύλη, "둥근 섬"), 또는 테라(Θήρα, Thēr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테라라는 명칭은 고대 스파르타에서 이주한 지도자 테라스(Theras)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섬과 주요 도시의 공식 명칭으로 다시 채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상적으로는 산토리니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산토리니의 역사[편집]

3.1. 아크로티리와 미노아 문명의 흔적[편집]

파일:512px-Santorini,_greece_(18792409488) (1).jpg
미노아 분화의 중심지의 해질녁 모습
산토리니는 약 3,600년 전 발생한 미노아 분화, 또는 테라 분화의 중심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규모 분화로 인해 섬 중앙부가 붕괴되면서 거대한 칼데라가 형성되었고, 두꺼운 화산재층이 쌓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화산 폭발이 아틀란티스 전설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1967년,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가 주도한 발굴 조사에서 크레타섬 이외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미노아 문명의 유적이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단순한 상업 중심지가 아니라 다층 건물과 정비된 도로, 광장을 갖춘 계획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건물은 최대 3층 규모였으며, 벽이 8미터 높이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유적에서는 거대한 도자기 저장 항아리, 맷돌, 도기류, 석재 계단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미노아 문명의 정교한 벽화가 화산재 속에서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었다. 벽화들은 당시 아크로티리의 사회와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벽화로는 우아한 선으로 그려진 영양 그림, 물고기를 들고 있는 남성, 돌고래와 함께 떠다니는 배들이 있으며, 사프란을 수확하는 여성들이 신에게 바치는 장면도 발견되었다. 이 벽화들은 고전기 그리스의 신화적 장식과는 다른 독창적인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아크로티리에는 매우 발전된 배수 시스템도 갖춰져 있었다. 고대 도시에서 발견된 최초의 급수와 배수 시스템 중 하나로, 온수와 냉수를 공급하는 이중 배관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온수의 공급은 화산 활동으로 인한 지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크로티리는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갖춘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평가받으며, 보존 상태가 뛰어나 이탈리아의 폼페이와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2005년, 유적지를 덮고 있던 보호 구조물이 붕괴하면서 한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에 따라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고 2012년 다시 개방되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아크로티리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기원전 2000년에서 1650년경에는 에게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청동기 시대 항구 중 하나로 번성했다. 발견된 유물들은 크레타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키프로스, 시리아, 이집트, 도데카네스 제도, 그리스 본토와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3.2. 청동기 시대 분화와 고대 산토리니[편집]

3.2.1. 미노아 분화와 연대 측정[편집]

파일:Minoan_Ash.png
미노아 분화의 화산재 영향
미노아 분화는 에게해 청동기 시대 연대기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이 화산 폭발의 흔적은 산토리니뿐만 아니라 에게해 전역에서 발견되며, 유적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유래한 다양한 문화재들이 출토되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미노아 분화는 크레타섬 미노아 문명의 후기 미노아 IA 시기, 그리고 주변 섬들의 후기 키클라데스 I 시기에 발생했다. 초기 연구에서는 이 분화가 기원전 1500년경에 일어났다고 추정했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645년에서 1600년 사이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다. 또한, 나이테 분석 연구에서는 기원전 1628년경을 유력한 연대로 제시했다. 이러한 과학적 증거는 기존의 문화사적 연대기와 충돌하며,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의 연대 설정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3.2.2. 고대 산토리니와 도리아인 정착[편집]

미노아 분화 이후, 산토리니는 청동기 시대 후반까지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리스 본토의 도리아인들이 섬에 정착하며 도시를 건설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니키아인들이 산토리니를 "칼리스테(Kalliste, 가장 아름다운 섬)"라고 불렀으며, 약 여덟 세대 동안 거주했다. 기원전 9세기경, 도리아인들이 현재 메사 부노 지역에 주요 도시를 세웠으며, 이곳은 이후 고대 테라로 알려지게 된다. 도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인 테라스(Theras)의 이름을 따서 섬을 테라(Θήρα, Thera)라고 명명했다.

3.2.3. 신화 속 테라의 기원[편집]

헬레니즘 시대 시인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산토리니의 기원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작품 아르고나우티카에 따르면, 바다의 신 트리톤(Triton)이 그리스 영웅 에우페모스에게 리비아에서 한 줌의 흙을 건네주었고, 그 흙을 품에 지닌 채 여러 날을 보낸 후 꿈속에서 한 여성이 나타나 자신이 트리톤의 딸 칼리스테라고 말했다. 에우페모스가 바다에 그 흙을 던지자 그것이 섬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섬을 테라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3.2.4. 도리아인의 유산과 식민 활동[편집]

도리아인들은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여러 비문을 남겼으며, 이 비문들은 섬의 사회와 문화적 전통을 보여준다. 일부 비문들은 의식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이며, 특정한 전통이나 관계를 기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7세기경 산토리니에서 7년간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도리아인들은 북아프리카의 키레네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개척하며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었을 때, 도리아인이 거주하던 테라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도 도리아계 도시국가인 스파르타를 지지하며 아테네에 맞섰다. 전쟁 중 아테네가 한때 섬을 점령했지만, 전쟁 막바지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이후 다시 스파르타 세력권으로 돌아갔다.

3.2.5. 헬레니즘 시대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편집]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산토리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 시기 산토리니는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에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이집트와 에게해를 잇는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3.3. 중세오스만 시대의 산토리니[편집]

산토리니는 로마 제국 시대에 테라로 불리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727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 치세 동안 산토리니 인근에서 화산이 다시 폭발했는데, 당시 역사가 조지 케드레누스는 화산 폭발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름 동안 테라와 테라시아 섬 한가운데에서 화염과 같은 증기가 며칠 동안 끓어올랐으며, 모든 곳이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화산재가 점차 쌓이며 단단한 돌로 변했고, 공기는 마치 거대한 불길처럼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폭발을 신의 계시로 해석했으며, 이를 계기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는 성상 파괴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산토리니는 베네치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며 낙소스 공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1280년경, 동로마 제국이 한때 섬을 탈환했으나, 1301년 베네치아 출신의 이아코포 2세 바로치가 다시 섬을 장악했다. 그의 후손들이 섬을 다스리다가 1335년경 니콜로 사누도가 최종적으로 섬을 병합했다.

14세기 동안 튀르키예계 멘테셰와 아이딘 공국이 여러 차례 산토리니를 침략했지만, 섬에 큰 피해는 없었다. 이후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가톨릭 공동체가 크게 성장했고, 현재까지도 가톨릭 교구가 유지되고 있다.

15세기 이후 베네치아는 여러 조약을 통해 산토리니에 대한 지배권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았으나, 오스만의 해적 공격이 계속되었다. 결국 1576년,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 피얄레 파샤(Piyale Pasha)가 섬을 점령하면서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산토리니는 술탄의 측근이었던 유대계 정치가 조제프 나시의 반자치 영지로 운영되었으며, 17세기에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이 반복되면서 베네치아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1768~1774년 러시아-오스만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일시적으로 산토리니를 점령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3.4. 그리스 독립 전쟁과 산토리니[편집]

1821년, 그리스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필리키 에테리아의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파트모스 출신의 디미트리오스 테멜리스와 케팔로니아 출신 해군 장교 에반겔리스 마차라키스를 산토리니로 보내 키클라데스 제도 내 독립 지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산토리니의 주민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경계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가톨릭 신자와 일부 비정통 그리스 정교도들은 하이드라와 스페체스 같은 섬에서 주도하는 독립운동을 불신하거나,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산토리니는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1821년 4월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와인 100통과 71명의 선원, 한 명의 사제 및 니콜라오스 데카자스 신부를 스페체스 함대에 파견했다.

마차라키스는 1821년 5월 5일, 산토리니의 수호성인 축일을 기념하여 혁명의 깃발을 올렸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섬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1822년 4월, 그리스 임시 정부는 산토리니를 포함한 에게해 섬들을 여섯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고, 마차라키스를 산토리니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마차라키스는 주민들에게 새 정부에 세금을 납부할 것을 요구하며, 오스만 제국보다 더 높은 세율을 부과했다. 이에 반발이 거세졌으며, 주민들은 세금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마차라키스의 독단적인 태도와 강경한 정책은 점점 불만을 키웠고, 결국 산토리니 정교회의 대주교였던 자카리아스 키리아코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키리아코스를 "친오스만 세력"으로 몰아 감금하고 추방했으며, 이에 성직자들과 수도원 관계자들이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이로 인해 마차라키스는 점차 지지 기반을 잃었고, 결국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원을 고용해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그는 섬을 떠났으며, 이후 그리스 임시 정부에 의해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산토리니 대표로 국민의회에 참여했으며, 1824년 11월 사망한 후 판톨레온 아우게리노가 그를 계승했다.

1822년 4월, 키오스 대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산토리니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프로피티스 일리아스 수도원의 수도승 16명은 서면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7월, 그리스 임시 정부는 에게해 섬들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벤자민 레스보스와 콘스탄티노스 메탁사스를 포함한 조사위원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사위원들이 마차라키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주민들은 반발하며 메탁사스를 체포하고 오스만 제국에 넘기려 했다. 다행히 그의 경호원들이 그를 구출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내부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1822년 10월, 산토리니에서 정치적 갈등이 폭력 사태로 번지며,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안토니오스 바르바리고스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결국, 1823년 그리스 국민의회는 산토리니를 에게해의 15개 행정구역 중 하나로 공식 인정했으며, 독립군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9만 그로시의 세금을 부과했다. 이후 1830년 런던 의정서에 따라 산토리니는 신생 그리스 국가의 일부로 공식 편입되었다.

1831년에는 당시 그리스 정부를 이끌던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으나, 결국 1832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독립 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최종 확정되었다.

3.5. 제2차 세계대전과 산토리니[편집]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이탈리아 군대가 산토리니를 점령했다. 이후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휴전하면서 독일군이 섬을 장악했다.

1944년, 영국 SBS 소속 특공대가 산토리니의 독일군 주둔지를 습격해 대부분의 병력을 사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현지 주민 다섯 명을 처형했으며, 이들 중에는 당시 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이후 산토리니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관광 산업이 발달하며 현대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3.5.1. 전후 시대와 현대 산토리니[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토리니의 경제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많은 산업이 아테네로 이전되면서 여러 공장이 문을 닫았고, 섬의 경제 기반이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47년 산토리니 협동조합 연합이 설립되어 섬의 주요 농산물, 특히 와인의 가공 및 수출을 촉진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2년에는 모놀리토스 마을 근처에 토마토 가공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토마토 가공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1950년대 초반, 산토리니를 찾는 관광객은 소수의 부유층이 대부분이었으며, 주로 에게해를 항해하는 요트 크루즈 여행의 일부로 섬을 방문했다. 섬의 아이들은 도착하는 관광객에게 꽃을 선물하고, 피라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작은 등불을 밝혀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1955년 9월, 유명 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페트로스 노미코스의 초청으로 산토리니를 방문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해운업계 거물 에반젤로스 P. 노미코스와 그의 아내 룰라는 섬의 발전을 위해 호텔 또는 병원 건설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주민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지방 자치 단체는 호텔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에 따라 1952년 건축가 베네치아노스가 설계한 호텔 아틀란티스가 건설되었다. 이 호텔은 당시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화려한 숙박 시설 중 하나로 손꼽혔다.

1954년 기준, 산토리니의 인구는 약 12,000명이었으며, 방문객은 극히 적었다. 당시 섬의 교통수단은 지프, 소형 버스, 그리고 당나귀와 노새뿐이었다.

3.6. 1956년 산토리니 대지진[편집]

1956년 7월 9일 오전 5시 11분, 규모 7.5~7.8의 강진이 아모르고스 섬 남쪽 30km 지점에서 발생했다. 이 지진은 20세기 그리스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산토리니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13분 후인 오전 3시 24분, 규모 7.2의 강력한 여진이 아나피 섬 근처에서 발생했으며,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피해가 이 여진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진과 함께 발생한 쓰나미는 페리사에서 3미터, 블리차다에서 2미터에 달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지진 발생 직후, 그리스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는 산토리니를 "대규모 지역 재해" 상태로 선포했으며, 7월 14일 직접 섬을 방문해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여러 국가에서 구호 지원을 제안했지만,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비상사태에 개입 중이던 영국의 군함 지원을 거부했다. 당시 산토리니에는 공항이 없어, 그리스 군대가 식량, 텐트, 보급품을 항공기로 공수했으며, 피라 외곽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캠프가 설치되었다.

이 지진으로 53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주택의 35%가 붕괴되고 45%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총 529채의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1,482채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1,750채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거의 모든 공공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유일하게 큰 피해 없이 살아남은 건물 중 하나는 새로 지어진 호텔 아틀란티스로, 임시 병원 및 공공 서비스 제공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가장 큰 피해는 칼데라 절벽을 따라 서쪽 지역, 특히 오이아에서 집중되었으며, 일부 지역의 땅이 바다로 무너져 내렸다. 이 지진으로 인해 섬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많은 주민이 생계를 위해 섬을 떠나 아테네로 이주했다.

3.7. 2025년 산토리니 지진[편집]

2025년 2월 초, 산토리니 인근 에게해에서 수백 차례의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일부 지진은 규모 5에 달했으며, 이후 몇 주간 추가적인 진동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 정부는 산토리니 주민 대피 명령을 내리고, 상당수가 배와 항공편을 이용해 섬을 떠났다.

2월 1~2일 주말 동안 200건 이상의 해저 진동이 감지되었으며, 진앙지는 산토리니, 아나피, 아모르고스, 이오스 및 무인도 아니드로스 섬 사이에 집중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규모 4.5 이상의 지진으로 기록되었으며, 2월 4일에는 규모 5.3의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진이 화산 활동이 아닌 단층 운동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지진 발생 패턴과 빈도 증가가 과학자와 당국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지진학자 마놀리스 스코르딜리스는 활성화된 단층선이 규모 6 이상의 지진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주요 지진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4.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