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전근대[편집]
사할린 북부는 윌타, 오로치 등의 퉁구스계 민족들과 니브흐족[1]의 땅이었고, 남부는 사할린 아이누의 땅이었다.
8세기 당나라에 조공한 북방 국가인 유귀국의 위치가 바로 이 사할린으로 비정되지만, 단편적인 조공 기록만이 남아있어서 구체적인 역사를 추정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사할린을 침공하기도 했으나, 워낙 척박한 땅인데다 유목제국인 몽골이 바다를 건너면서까지 지배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일시적인 원정으로 그쳤다.
연해주 일대의 여진족은 일찍부터 사할린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세운 통일국가 청나라도 마찬가지였으나, 청나라는 몽골 제국처럼 직접 지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사할린 원주민들과 제한적으로 교류하는데 그쳤다.
한편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사할린 섬을 인식했고, 비슷한 시기에 극동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 역시 사할린을 인식했으나, 전자는 아직 홋카이도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후자는 아시아 대륙 영토를 관리하기도 벅찬 상태라서 양국 간의 유의미한 충돌은 없었다.
8세기 당나라에 조공한 북방 국가인 유귀국의 위치가 바로 이 사할린으로 비정되지만, 단편적인 조공 기록만이 남아있어서 구체적인 역사를 추정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사할린을 침공하기도 했으나, 워낙 척박한 땅인데다 유목제국인 몽골이 바다를 건너면서까지 지배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일시적인 원정으로 그쳤다.
연해주 일대의 여진족은 일찍부터 사할린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세운 통일국가 청나라도 마찬가지였으나, 청나라는 몽골 제국처럼 직접 지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사할린 원주민들과 제한적으로 교류하는데 그쳤다.
한편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사할린 섬을 인식했고, 비슷한 시기에 극동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 역시 사할린을 인식했으나, 전자는 아직 홋카이도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후자는 아시아 대륙 영토를 관리하기도 벅찬 상태라서 양국 간의 유의미한 충돌은 없었다.
2.2. 근대[편집]
2.2.1.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분할 통치[편집]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 제국이 홋카이도를 완전히 정복한 후 쿠릴 열도까지 진출하자 양국 간에 사할린 영유권 분쟁이 생길 조짐이 보였다.
당시 일본은 아직 서구 열강인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붙기엔 역부족이었기에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며 쿠릴 열도 영유권만 인정받고, 사할린 섬 전체를 러시아령으로 인정했다.[2]
이러한 러시아의 사할린 단독 지배는 1905년까지 이어졌으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으면서,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잔류한 북부와 일본령 가라후토가 된 남부로 분할되었다.
당시 일본은 아직 서구 열강인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붙기엔 역부족이었기에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며 쿠릴 열도 영유권만 인정받고, 사할린 섬 전체를 러시아령으로 인정했다.[2]
이러한 러시아의 사할린 단독 지배는 1905년까지 이어졌으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으면서,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잔류한 북부와 일본령 가라후토가 된 남부로 분할되었다.
2.2.2. 소련과 일본의 분할 통치[편집]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 일어난 적백내전 당시 일본군이 북사할린까지 점령하기도 했으나, 1925년 일본 제국이 소련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수교하면서 북사할린은 소련으로 반환되어 소련과 일본의 남북 분할통치가 1945년까지 이어졌다.
남사할린(일본령 가라후토)는 원주민을 비롯한 타민족보다 일본 본토(내지) 출신 일본인(야마토 민족) 이민자의 비중이 높았기에 1943년에 공식적으로 내지에 편입되어 기존의 내지와 같은 참정권이 부여되었으나, 정작 그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서(...)[3] 큰 의미는 없었다.
남사할린(일본령 가라후토)는 원주민을 비롯한 타민족보다 일본 본토(내지) 출신 일본인(야마토 민족) 이민자의 비중이 높았기에 1943년에 공식적으로 내지에 편입되어 기존의 내지와 같은 참정권이 부여되었으나, 정작 그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서(...)[3] 큰 의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