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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폴리네시아 Polynésie Française | Pōrīnetia Farāni | |
기[1] | |
Tahiti Nui Māre’are’a 황금빛 아지랑이가 감도는 위대한 타히티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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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의 해외 집합체로, 남태평양에 위치한 100여 개 이상의 섬과 환초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약 4,167 km²이며, 인구는 약 28만 명 수준이다. 그런 인구 중에 70% 이상이 타히티에 살고 있다.
온화한 기후와 수려한 자연환경 덕분에 관광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다. 행정상 프랑스의 해외 영토이지만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며, 수도는 파페에테이다. 주요 군도는 타히티, 모레아, 보라보라 등을 포함하며, 관광 산업이 경제의 중심이다. 또한 어업과 진주 양식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천연 환경과 문화적 특성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핵심 요소이다.
온화한 기후와 수려한 자연환경 덕분에 관광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다. 행정상 프랑스의 해외 영토이지만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며, 수도는 파페에테이다. 주요 군도는 타히티, 모레아, 보라보라 등을 포함하며, 관광 산업이 경제의 중심이다. 또한 어업과 진주 양식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천연 환경과 문화적 특성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핵심 요소이다.
2. 역사[편집]
인류학,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 오스트로네시아족들이 남태평양 일대에 정착할 만한 섬을 찾아 대규모 이동을 벌인 것으로 보는데, 이를 '폴리네시아인의 대이주'라고 칭한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한 것은 기원전 200년경 마르키즈 제도 일대였다. 서기 300년경에는 폴리네시아인들이 남서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소시에테 제도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탐험가들이 폴리네시아를 처음 발견한 것은 1521년 포르투갈 참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의해서였다. 당시 스페인 국왕의 지원으로 세계 일주에 나섰던 마젤란은 오늘날 투아모투-강비에에 속한 푸카푸카섬을 처음 발견하였다.
1606년에는 스페인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케이로스가 폴리네시아 일대를 항해하던 와중에 섬을 발견하고 '사히타리아' (Sagitaria)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곳은 지금의 타히티섬 남동부에 위치한 레카레카섬으로 추정된다. 1722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선 야코프 로헤베인이 투아모투 제도의 6개 섬과 소시에테 제도의 2개 섬의 위치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보라보라섬이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도 로헤베인에 의해서였다.
1767년 영국 탐험가 새뮤얼 월리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타히티섬에 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1768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1769년에는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 타히티섬을 찾았다. 이곳에서 금성의 통과 현상의 관측 임무를 수행한 제임스 쿡은 1773년 2차 탐험을 진행하던 와중에 다시 한번, 1777년 3차 탐험 당시 또 한번 타히티섬을 찾았으며, 그 직후 하와이섬으로 향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1772년 스페인 페루 부왕령의 돈 마누엘 데 아마트 총독으로부터 타히티를 정복하라는 명을 받은 도밍고 데 보네체아는 타히티섬 외에 본 섬들을 모두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1774년에는 스페인 정착촌이 세워졌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시절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에는 아마트 총독의 이름을 따서 '아마트섬' (Isla de Amat)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스페인의 정복시도와 함께 타히티섬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1797년에는 런던 선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 폴리네시아에 영구 정착하게 되었다.
1803년에는 타히티 국왕 포마레 2세가 모오레아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유럽인들과의 접촉을 계기로 1812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34년에는 프랑스 선교단이 타히티섬에 도착하였는데, 1836년에 추방되어 1838년 프랑스 측에서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1842년에는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타히티섬과 타후아타섬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1844년에는 프랑스-타히티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847년 영국과의 자르나크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
1880년 프랑스는 타히티섬 일대 제도를 합병하였으며 그 지위도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격하하였다. 타히티섬의 식민지화 이후로도 한동안 프랑스가 폴리네시아 일대를 통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는데, 앞서 체결된 자르나크 조약으로 라이테이아섬, 후아힌섬, 보라보라섬은 어느 강대국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이며 어느 한 족장이 전체 군도를 다스릴 수도 없다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88년 프랑스는 자르나크 조약을 파기하고 나머지 섬들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타히티섬 일대와 나머지 섬들을 하나로 묶는 1889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재수립되었다.[9] 프랑스의 병합 조치에 반발한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리워드 전쟁이 발발하여 1897년까지 이어졌다.
타히티섬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제도의 경우, 투아모투 제도는 포마레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1880년대 들어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공식적으로 합병하지는 않았다. 마르키즈 제도는 1842년 타후아타섬 보호령 선포를 계기로 제도 전체를 프랑스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리마타라섬과 루루투섬은 188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위한 접촉에 나섰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889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폴리네시아 영토 확보를 마친 프랑스는 식민지 관리에 나섰다. 1843년에는 타히티섬에 수도 파페에테가 건설되었으며, 1885년 총독을 임명하고 총의회를 설립하여 식민지에 걸맞은 행정권을 부여하였다. 1892년에는 우표를 처음 발행하였다. 이 당시 식민지의 명칭은 '오세아니아 영토'(Établissements de l'Océanie)였는데, 1903년 총의회를 총독 자문위원회로 전환하고 명칭도 '프랑스령 오세아니아'(Établissements Français de l'Océanie)로 바꾸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정부는 자유 프랑스군을 승인하고 나치 독일과의 항전에 나섰으며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이 참전하였다. 같은해 9월 16일에는 일본 제국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전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동태평양 총독부'를 설치하고 일본 직할령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프랑스와 폴리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남태평양을 침략하였지만 솔로몬 제도와 길버트 제도에서 막히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는 도달하지도 못 한 채 패전하였다.
1995년 프랑스가 핵실험을 한 지역이라서 이곳 현지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프랑스는 과거 현지 언어를 금지하고 프랑스어를 강요했기에 앙금이 컸다. 결국 핵실험을 기회로 독립까지 요구되었으며 폭동까지 벌어졌다. 이럼에도 핵실험을 강행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극히 일부의 독립요구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2004년 현지 원주민으로 첫 대통령이 된 오스카 테마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던 시라크를 가리켜 앞뒤가 안 맞는 핵신봉자라고 비난하였고 2006년에 가진 프랑스-오세아니아 회의에서 독립을 요구하고 시라크를 말뿐인 평화주의자, 핵실험신봉자라고 대놓고 비난하여 시라크를 격분하게 했지만 현지에서 테마루의 인기는 높아졌다.
북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인 클리퍼턴 섬을 영토로 보유한 적이 있었다. 1901년에 이 섬의 영유권이 프랑스로 귀속되면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일부로 편입한다.
멀리 떨어진 곳을 폴리네시아 자치 정부에서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서, 1981년에 프랑스 정부에 소유권을 팔아버렸고, 2001년에는 본토에 영유권을 넘겨버렸다. 때문에 클리퍼턴 섬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이탈해서 프랑스 본토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유럽 탐험가들이 폴리네시아를 처음 발견한 것은 1521년 포르투갈 참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의해서였다. 당시 스페인 국왕의 지원으로 세계 일주에 나섰던 마젤란은 오늘날 투아모투-강비에에 속한 푸카푸카섬을 처음 발견하였다.
1606년에는 스페인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케이로스가 폴리네시아 일대를 항해하던 와중에 섬을 발견하고 '사히타리아' (Sagitaria)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곳은 지금의 타히티섬 남동부에 위치한 레카레카섬으로 추정된다. 1722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선 야코프 로헤베인이 투아모투 제도의 6개 섬과 소시에테 제도의 2개 섬의 위치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보라보라섬이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도 로헤베인에 의해서였다.
1767년 영국 탐험가 새뮤얼 월리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타히티섬에 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1768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1769년에는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 타히티섬을 찾았다. 이곳에서 금성의 통과 현상의 관측 임무를 수행한 제임스 쿡은 1773년 2차 탐험을 진행하던 와중에 다시 한번, 1777년 3차 탐험 당시 또 한번 타히티섬을 찾았으며, 그 직후 하와이섬으로 향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1772년 스페인 페루 부왕령의 돈 마누엘 데 아마트 총독으로부터 타히티를 정복하라는 명을 받은 도밍고 데 보네체아는 타히티섬 외에 본 섬들을 모두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1774년에는 스페인 정착촌이 세워졌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시절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에는 아마트 총독의 이름을 따서 '아마트섬' (Isla de Amat)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스페인의 정복시도와 함께 타히티섬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1797년에는 런던 선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 폴리네시아에 영구 정착하게 되었다.
1803년에는 타히티 국왕 포마레 2세가 모오레아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유럽인들과의 접촉을 계기로 1812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34년에는 프랑스 선교단이 타히티섬에 도착하였는데, 1836년에 추방되어 1838년 프랑스 측에서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1842년에는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타히티섬과 타후아타섬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1844년에는 프랑스-타히티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847년 영국과의 자르나크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
1880년 프랑스는 타히티섬 일대 제도를 합병하였으며 그 지위도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격하하였다. 타히티섬의 식민지화 이후로도 한동안 프랑스가 폴리네시아 일대를 통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는데, 앞서 체결된 자르나크 조약으로 라이테이아섬, 후아힌섬, 보라보라섬은 어느 강대국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이며 어느 한 족장이 전체 군도를 다스릴 수도 없다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88년 프랑스는 자르나크 조약을 파기하고 나머지 섬들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타히티섬 일대와 나머지 섬들을 하나로 묶는 1889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재수립되었다.[9] 프랑스의 병합 조치에 반발한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리워드 전쟁이 발발하여 1897년까지 이어졌다.
타히티섬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제도의 경우, 투아모투 제도는 포마레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1880년대 들어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공식적으로 합병하지는 않았다. 마르키즈 제도는 1842년 타후아타섬 보호령 선포를 계기로 제도 전체를 프랑스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리마타라섬과 루루투섬은 188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위한 접촉에 나섰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889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폴리네시아 영토 확보를 마친 프랑스는 식민지 관리에 나섰다. 1843년에는 타히티섬에 수도 파페에테가 건설되었으며, 1885년 총독을 임명하고 총의회를 설립하여 식민지에 걸맞은 행정권을 부여하였다. 1892년에는 우표를 처음 발행하였다. 이 당시 식민지의 명칭은 '오세아니아 영토'(Établissements de l'Océanie)였는데, 1903년 총의회를 총독 자문위원회로 전환하고 명칭도 '프랑스령 오세아니아'(Établissements Français de l'Océanie)로 바꾸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정부는 자유 프랑스군을 승인하고 나치 독일과의 항전에 나섰으며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이 참전하였다. 같은해 9월 16일에는 일본 제국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전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동태평양 총독부'를 설치하고 일본 직할령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프랑스와 폴리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남태평양을 침략하였지만 솔로몬 제도와 길버트 제도에서 막히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는 도달하지도 못 한 채 패전하였다.
1995년 프랑스가 핵실험을 한 지역이라서 이곳 현지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프랑스는 과거 현지 언어를 금지하고 프랑스어를 강요했기에 앙금이 컸다. 결국 핵실험을 기회로 독립까지 요구되었으며 폭동까지 벌어졌다. 이럼에도 핵실험을 강행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극히 일부의 독립요구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2004년 현지 원주민으로 첫 대통령이 된 오스카 테마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던 시라크를 가리켜 앞뒤가 안 맞는 핵신봉자라고 비난하였고 2006년에 가진 프랑스-오세아니아 회의에서 독립을 요구하고 시라크를 말뿐인 평화주의자, 핵실험신봉자라고 대놓고 비난하여 시라크를 격분하게 했지만 현지에서 테마루의 인기는 높아졌다.
북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인 클리퍼턴 섬을 영토로 보유한 적이 있었다. 1901년에 이 섬의 영유권이 프랑스로 귀속되면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일부로 편입한다.
멀리 떨어진 곳을 폴리네시아 자치 정부에서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서, 1981년에 프랑스 정부에 소유권을 팔아버렸고, 2001년에는 본토에 영유권을 넘겨버렸다. 때문에 클리퍼턴 섬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이탈해서 프랑스 본토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3. 스포츠[편집]
자국 리그가 있고 리그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타히티 출신으로 툴루즈 B팀을 거친 테라이 브레몽이라는 선수가 있다. 현재 자국 리그 팀에서 뛰고 있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