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어원[편집]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지칭하던 스페인어로 '전쟁'을 뜻하는 "Guerra"에 '작은(small)'을 뜻하는 접미사 "illa"가 합쳐진 이름인 게리야다.
영어로는 /ɡəˈrɪlə/로 (굳이 한글로 쓰면 "거릴러" 비슷하게) 발음한다. gorilla(고릴라)도 /ɡəˈrɪlə/라서 영어에서 guerrilla와 gorilla는 동음이의어다.
한국어로는 유격대(遊擊隊) 또는 편의병(便衣兵)[1]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파르티잔으로 부르며 6.25 전쟁 이후 이 단어가 한국어에서는 빨치산으로 변형되었다.[2]
영어로는 /ɡəˈrɪlə/로 (굳이 한글로 쓰면 "거릴러" 비슷하게) 발음한다. gorilla(고릴라)도 /ɡəˈrɪlə/라서 영어에서 guerrilla와 gorilla는 동음이의어다.
한국어로는 유격대(遊擊隊) 또는 편의병(便衣兵)[1]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파르티잔으로 부르며 6.25 전쟁 이후 이 단어가 한국어에서는 빨치산으로 변형되었다.[2]
3. 방법[편집]
게릴라전의 필수요소는 게릴라 세력을 지원해줄 '민중'과 '외부세력'이다. 민중은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며 경우에 따라 총알받이[3] 또는 게릴라 구성원이 되어줄 수도 있다. 외부세력은 무기와 자금을 보급해주며 이 둘이 빠진 게릴라는 단순한 비적이 되거나 세력이 약해져서 정부나 외부 군사세력에게 손쉽게 토벌될 수 있다. 그러니까 게릴라군이 주민들에게 안 따르면 죽인다 같은 식으로 처신하는 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은 정부에 보고할 것이고 당연히 비정규전은 끝장나기 때문이다. 게릴라는 지역 주민 다수의 지지가 전제로 깔려있어야 성립하며, 역으로 주민 다수가 점령군정에 강한 적개심을 품으면 게릴라 집단이 쉽게 발생한다.
이들의 소위 '게릴라 전술'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힌다. 별 거 아니다 싶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보통 짜증나고 괴로운 게 아니다. 아예 신경까지 예민해져 테러 공포증과 강박증까지 생겨 불안감에 시달릴 정도다.
다만 괴롭힐 뿐이지 이기는 것은 외부 지원과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사실상 게릴라 부대만으로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4] 그나마 현지에는 연고가 없는 외부 세력이 자국 내 반전 여론 등을 비롯하여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다인데 이런 경우 아무리 '승리'한 게릴라 세력이라고 해도 남아 있는 건 비참하게 파괴된 폐허들 뿐이다.[5]
유의미하게 전쟁에서 '이겼다'라고 할 만큼 성과를 거두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과 베트남 인민군, 이탈리아 전선의 레시스텐자와 연합군처럼 결국 어느 순간에 외부에서 정규군을 끌고 와 게릴라로 약해진 점령군을 몰아내야 전략적 차원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저렇게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경우'라고 해도 이 정도 시점이면 사실 게릴라 세력도 민심이나 정치적 입지, 인명과 물질의 손실 면에서 한계에 다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나 로디지아의 경우를 보듯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겼어도 군사적으로 패배한 경우에는 상대편도 아군의 한계를 뻔히 알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서도 주도잡기 힘들다.
만약 상대하는 적이 압도적인 물량과 절멸전으로 나와서 청야전술과 주도면밀한 학살을 진행하면 아무리 게릴라 세력이 필사적으로 저항해도 당해내지 못하고 질 수밖에 없다. 준가르인이 청나라에게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다가 멸족당한게 좋은 예다.
여러 게릴라 이론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민전쟁과 포코 이론 등이 있다.
이들의 소위 '게릴라 전술'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힌다. 별 거 아니다 싶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보통 짜증나고 괴로운 게 아니다. 아예 신경까지 예민해져 테러 공포증과 강박증까지 생겨 불안감에 시달릴 정도다.
다만 괴롭힐 뿐이지 이기는 것은 외부 지원과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사실상 게릴라 부대만으로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4] 그나마 현지에는 연고가 없는 외부 세력이 자국 내 반전 여론 등을 비롯하여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다인데 이런 경우 아무리 '승리'한 게릴라 세력이라고 해도 남아 있는 건 비참하게 파괴된 폐허들 뿐이다.[5]
유의미하게 전쟁에서 '이겼다'라고 할 만큼 성과를 거두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과 베트남 인민군, 이탈리아 전선의 레시스텐자와 연합군처럼 결국 어느 순간에 외부에서 정규군을 끌고 와 게릴라로 약해진 점령군을 몰아내야 전략적 차원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저렇게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경우'라고 해도 이 정도 시점이면 사실 게릴라 세력도 민심이나 정치적 입지, 인명과 물질의 손실 면에서 한계에 다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나 로디지아의 경우를 보듯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겼어도 군사적으로 패배한 경우에는 상대편도 아군의 한계를 뻔히 알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서도 주도잡기 힘들다.
만약 상대하는 적이 압도적인 물량과 절멸전으로 나와서 청야전술과 주도면밀한 학살을 진행하면 아무리 게릴라 세력이 필사적으로 저항해도 당해내지 못하고 질 수밖에 없다. 준가르인이 청나라에게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다가 멸족당한게 좋은 예다.
여러 게릴라 이론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민전쟁과 포코 이론 등이 있다.
4. 역사[편집]
게릴라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에도 변칙적인 유격전은 동서고금 어디서든 존재해 왔다. 전근대의 전장은 회전 중심으로서 유격전을 벌이던 의용병이나 별동대들은 적의 정규군을 회전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보급선이나 후방 혹은 게릴라를 요격하기 위해 분열한 적의 병력의 각개격파를 기도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거리를 벌려두고 보다 유연한 히트 앤 런이 가능하게 된 총기류의 발달 이후엔 전술이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고 스페인의 게릴라도 그러한 시대를 반영해서 나온 본격적인 유격대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에도 경보병이나 산병과 같은 산개해 조준사격을 가하고 적의 대열을 흐뜨려 놓는 병과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회전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대의 게릴라와는 일대일로 비교하기엔 달랐다.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 독립 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써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다.[6]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7] 다만 미국 독립 전쟁에서 게릴라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이후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성 역사 서술의 영향도 크다. 상술했다시피 게릴라전으로는 적군을 괴롭힐수는 있어도 승리를 얻어낼수는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도 게릴라 부대는 보조병으로만 썼을 뿐 주력군은 유럽식 정규군인 대륙군이었으며 이들은 야전에서 연패하면서도 끝까지 정규전을 고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게릴라로는 독일 국방군의 점령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프랑스의 지하저항조직 레지스탕스, 폴란드 국내군의 사례가 있고, 알제리 전쟁 당시 드넓고 험준한 국토를 활용해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에 맞서 식민지 독립 전쟁을 펼친 알제리, 1960~70년대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을 전개했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국가들,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점령군이었던 소련군과 친소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맞서 싸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반군 등도 게릴라의 예시다.
냉전 시대에도 게릴라전이 나름 쓸모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있는데 북베트남이 소련의 지원을 받자 미군이 확전을 우려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 못하고 베트콩만 토벌하다가 철수하기도 했다. 물론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라가 게릴라전을 시도하면 그레나다 침공처럼 그냥 털렸다. 반대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각국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이 소련군을 몰아내기도 했다. 게릴라군을 지원하는 외부세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선례다.
한국사에서는 임진왜란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병들과 6.25 전쟁 중에 활동한 각지의 반공유격대[8]가 게릴라라고 볼 수 있다.
제5차 초공작전 때 외부지원을 차단하고 강력한 중화기로 본거지를 하나씩 섬멸해 나가 공산당에게 대장정을 강요한 것은 게릴라 전투를 진압한 사례다.
당시에도 경보병이나 산병과 같은 산개해 조준사격을 가하고 적의 대열을 흐뜨려 놓는 병과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회전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대의 게릴라와는 일대일로 비교하기엔 달랐다.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 독립 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써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다.[6]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7] 다만 미국 독립 전쟁에서 게릴라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이후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성 역사 서술의 영향도 크다. 상술했다시피 게릴라전으로는 적군을 괴롭힐수는 있어도 승리를 얻어낼수는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도 게릴라 부대는 보조병으로만 썼을 뿐 주력군은 유럽식 정규군인 대륙군이었으며 이들은 야전에서 연패하면서도 끝까지 정규전을 고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게릴라로는 독일 국방군의 점령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프랑스의 지하저항조직 레지스탕스, 폴란드 국내군의 사례가 있고, 알제리 전쟁 당시 드넓고 험준한 국토를 활용해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에 맞서 식민지 독립 전쟁을 펼친 알제리, 1960~70년대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을 전개했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국가들,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점령군이었던 소련군과 친소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맞서 싸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반군 등도 게릴라의 예시다.
냉전 시대에도 게릴라전이 나름 쓸모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있는데 북베트남이 소련의 지원을 받자 미군이 확전을 우려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 못하고 베트콩만 토벌하다가 철수하기도 했다. 물론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라가 게릴라전을 시도하면 그레나다 침공처럼 그냥 털렸다. 반대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각국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이 소련군을 몰아내기도 했다. 게릴라군을 지원하는 외부세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선례다.
한국사에서는 임진왜란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병들과 6.25 전쟁 중에 활동한 각지의 반공유격대[8]가 게릴라라고 볼 수 있다.
제5차 초공작전 때 외부지원을 차단하고 강력한 중화기로 본거지를 하나씩 섬멸해 나가 공산당에게 대장정을 강요한 것은 게릴라 전투를 진압한 사례다.
5. 게릴라 단체[편집]
정규군으로 전환된 부대도 있고 무장투쟁을 포기한 단체도 있다.
5.1. 유럽[편집]
- 혁명적 인민투쟁 (ELA)
- 혁명핵 (RN)
- 11월 17일 혁명조직 (17N)
- 혁명투쟁 (RS)
- 불핵의 음모 (SPF)
- 노르웨이 파르티잔
- 독일 저항군
- 독일 적군파 (RAF)
- 혁명세포 (RZ)
- 투파마로스 베스트 베를린 (TW)
- 통일 독일
- 국가사회주의지하조직 (NSO) - 독일
- 공산주의자 전투원 세포 (CCC)
- 소련
- 소련 파르티잔
- 숲의 형제들
- 무정부 공산주의자 연맹[9]
- 특수목적 이슬람 여단 -
- 이슬람 평화유지 연대
- 리야두스 살리힌 순교자 여단
- 벨라루스 파르티잔
-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단 (OUN) - 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 봉기군 (UPA)
- 이베리아 해방운동 (MIL)
- 바스크와 자유 (ETA)
- 관체 무장군대 (FAG)
- 카나리아 제도 독립 운동 (MPAIAC)
- 아일랜드 민족해방군 (INLA)
- 알바니아 파르티잔
- 유고슬라비아 및 구 유고슬라비아 구성국
- 유고슬라비아
-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IMRO)
- 코소보 해방군 (UÇK)
- 키프로스 투사 민족 기구 (EOKA)
- 키프로스 투사 민족 기구 베타 (EOKA B)
- 혁명여단 (BR)
- 4월 25일 인민군 (FP-25)
- 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 (FLNC)
- 악시옹 디렉트 (AD)
- 혁명적 국제주의 행동그룹 (GARI)
- 인민자치를 위한 무장핵 (NAPAP)
5.2. 아시아[편집]
5.2.1. 동아시아[편집]
- 의병
- 무궁화 무장청년단
- 튀르키스탄 이슬람당 (TIP)
5.2.2. 동남아시아[편집]
5.2.3. 남아시아[편집]
- 부탄 공산당
- 타밀엘람 해방호랑이 (LTTE)
- 애국인민운동 (DJV)
- 아프가니스탄 인민 해방 기구
- 호라산 이슬람 국가 (IS-K)
- 두흐타란 에 밀라트
- 인도 무자헤딘
- 라쉬카르 에 타이바
- 라쉬카르 에 장비
5.2.4. 서아시아[편집]
- 공통
- 레바논 무장혁명파 (LARF)
- 시리아 본토
- 후라스 알딘 -
- 휘세인칠래르
- 이라크 본토
- 아사이브 아흘 알하크
- 준달라
- 자이쉬 울 아들
- 쿠르디스탄 자유 매 (TAK)
- 붉은 해커
- 혁명인민해방당/전선 (DHCP-K)
- 노동자농민해방군
- 아르메니아 해방을 위한 아르메니아 비밀군 (ASALA)
5.3. 아프리카[편집]
- 안사루
- 남아프리카 공산당
- 아잔 민족해방군
-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연합(UNITA)
- 에리트리아 인민해방전선
5.4. 북미[편집]
- 미국 본토
- 5월 19일 공산주의자 조직
- 연합자유전선
- 보리쿠아 인민군
- 푸에르토리코 민족해방군
5.5. 중남미[편집]
-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URNG)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EZLN)
- 종교자유 수호를 위한 국민연맹 (크리스테로, LNDLR)
- 9월 23일 공산주의 동맹 (LC23S)
- 혁명좌익운동 (MIR)
- 국가해방행동 (ALN)
- 알파로 비베 까라호 (엘로이 알파로 인민무장군, AVC)
- 에콰도르 붉은태양 공산당 (PCE-SR)
- 투파마로스 (MLN-T)
- 마누엘 로드리게스 혁명 전선 (로드리게스타, FPMR)
- 혁명좌익운동 (MIR)
- 라우타로 청년운동 (MJL)
-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FARC-EP)
- 인민해방군 (EPL)
- 4월 19일 운동 (M-19)
- 콜롬비아 연합자위군 (AUC)
- 콜롬비아의 가이타니스트 자위대 (AGC, 클란 델 골포)
- 파라과이 인민군 (EPP)
-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MRTA) - 페루
6. 비유적 표현[편집]
[1] 70년대까지 쓰이던 게릴라의 한자어다. 삼별초에도 편의대라는 부대가 있었다.[2] 이쪽은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를 지칭하는 용도로 한정되어 쓰인다.[3] 상황이 조금만 더러워도 진짜로 총알받이 역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좀 고와도 게릴라를 도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당연히 고운 꼴을 못 당한다. 재판이고 뭐고 당장 바로 옆 열받은 군인들에게 끔살당할 확률도 있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경우도 있다.[4] 임진왜란을 배울 때 의병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일본군을 확실히 몰아낼 수 있었던건 정규군, 즉 조선군과 명군이 야전과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하였기 때문이다.[5] 가장 대표적이며 유명한 사례가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이다.[6] 이런 이유로 영국군은 미국 민병대를 가리켜 "왜 식민지 주민들은 비겁하게 숨어서 싸우는가?"라고 경멸했다.[7] 당시엔 저격수들조차 신사스럽지 않다고 멸시했다. 물론 영국에서도 제95 라이플 연대 같이 게릴라식 전술과 저격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지만 이쪽은 경보병이나 척후병에 가깝기 때문에 게릴라와 직접 비교하는 건 무리다.[8] 1.4 후퇴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상당수의 반공 무장대원들이 서해안의 각 섬으로 피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국군, 나중에는 미군에 의해 조직되어 식량과 무기, 탄약을 지원받아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후방교란 활동을 했다. 인터넷상에서 가끔 보이는 동키 부대나 레오파드 부대, 8240부대 등이 바로 이들이다.[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무장봉기하여 푸틴의 독재 정권에 대항해 주요 기관을 습격하며 유격전을 펼치고 있다.[10] 패전 직후에는 무장투쟁을 하였다.[11] 미얀마 내전 당시[12] 새로 창당된 버마 공산당 소속으로 군부 쿠데타 이후 민중세력과 협력하여 인민전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