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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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지지국 및 지지 세력 | |
지휘관 | |
병력 | |
피해 | |
민간인 130명 사망 | |
결과 | |
국제적인 압력 및 도스 안 채택으로 인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의 철수 | |
영향 | |
프랑스의 금융위기 독일의 금융위기 및 하이퍼인플레이션 가속화 독일 내 극좌, 극우 세력의 영향력 확대 | |
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짊어져야 했던 전쟁배상금의 액수는 무려 1320억 골트마르크였다.[1] 전후 어려웠던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이같은 거금은 갚기 불가능할 정도로 과중했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 주지 않았다.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처우를 계속 완화해주면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 자체를 무효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할 테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일을 쥐어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전히 통일되지도 않았던 북독일 연방[2] 측에 자국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유례없는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독일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빌헬름 쿠노 독일 총리가 협상국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의심이 강했다.[3] 따라서 즉각적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하지만 협상국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영국은 강압적인 조약 이행에 반대하였다. 특히 영국 노동당은 프랑스가 행한 조치들이 제국주의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는 독일에 군사적인 제재 대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영국은 이조차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총리[4]는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할 것을 군대에 지시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 주지 않았다.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처우를 계속 완화해주면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 자체를 무효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할 테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일을 쥐어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전히 통일되지도 않았던 북독일 연방[2] 측에 자국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유례없는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독일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빌헬름 쿠노 독일 총리가 협상국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의심이 강했다.[3] 따라서 즉각적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하지만 협상국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영국은 강압적인 조약 이행에 반대하였다. 특히 영국 노동당은 프랑스가 행한 조치들이 제국주의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는 독일에 군사적인 제재 대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영국은 이조차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총리[4]는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할 것을 군대에 지시했다.
3.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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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민을 폭행하는 프랑스 군인들[5] |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투쟁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시민 불복종 운동이 만연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도 루르의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고, 루르 지방에서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임금 지불을 약속하며 파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를 '소극적 저항(Passiver Widerstand)'이라 부른다. 그러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자국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석탄을 채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점령 말기에는 파업뿐만 아니라 일부 저항세력에 의하여 열차 선로가 사보타주를 당하는 등 독일인들의 저항은 더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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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 지방의 '소극적 저항'에 동참할 것을 선전하는 포스터.[6] |
프랑스의 점령 통치는 민주 국가가 같은 유럽 국가에 행한 것임에도 상당히 과격했다. 2년 동안 130명 가량의 독일인들이 사보타주 혐의로 프랑스군에 처형되었다.[7] 점령 말기 한 프랑스군 중령이 독일인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이 중령의 관을 운구하면서 조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 되어서 나중에 나치가 독일에서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는 데 쓰였다.
이에 1차 대전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의 행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루르에서의 철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영미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프랑스는 양국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1924년 루르 점령의 여파로 프랑화 가치에 이상이 생기며 금융 위기까지 찾아오자 끝내 프랑스는 굴복하고 미국이 제안한 전쟁 배상금 감축안에 동의했다. 결국 1924년 도스 안 (Dawes Plan, 도스 案)이 채택된 후 프랑스와 벨기에가 군대를 철수시켜 루르 점령은 종료되었다.
4. 여파[편집]
전쟁 비용, 전후 장병들의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금, 전쟁 배상금 등의 지불을 위해 대량으로 돈을 발행한 결과 시작된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소극적 저항(Passiver Widerstand)'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받지 못한 봉급을 정부에서 대신 지불해주기로 하였는데, 재원이 부족한 정부는 이 또한 돈을 추가로 발행해서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유래 없는 인플레이션에 고통받게 되고, 특히 중산층의 임금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보편적으로 중산층 임금 노동자들은 한 체제에 순응하는 성향을 가지기 쉽기에, 이들의 붕괴는 해당 체제 유지에 커다란 위험을 준다. 그런데 평생 저축해둔 재산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산층들은 자연히 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을 키우게 됐고, 점차 극좌/극우라는 다른 선택지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192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뮌헨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스 안에 따라 배상금은 줄었고, 독일은 미국의 차관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얄마르 샤흐트의 렌텐마르크 화폐개혁의 단행으로 인플레이션을 중단시키고 독일은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리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8]
다행히 이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스 안에 따라 배상금은 줄었고, 독일은 미국의 차관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얄마르 샤흐트의 렌텐마르크 화폐개혁의 단행으로 인플레이션을 중단시키고 독일은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리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8]
5. 기타[편집]
이 일을 기억하고 있던 독일은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흑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대했다. 프랑스 침공 기간동안 프랑스군은 총 10만명에 달하는 서아프리카 병사들을 프랑스 본토 방어에 투입하였고, 독일군의 흑인 포로 학살 행위에 대해 대대적인 연구를 실시한 라파엘 셰크는 이들 중 적어도 1500명에서 3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 흑인 병사들이 독일군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한다.[9] 라파엘 셰크는 독일군의 흑인에 대한 증오의 원인을 루르 점령으로 보았다. 그는 루르 점령 기간동안 독일 땅에 진주한 흑인 병사들을 독일 민족주의 세력은 독일 인종을 오염시키는 야만인,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고 독일인과 프랑스군 흑인병사 사이에서 탄생한 독일인들을 이른바 라인란트 사생아라고 모욕한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군 흑인 병사들을 인간 이하로 보는 기사를 내보냈다.
Auch heute wieder hat Frankreich die grausamen schwarzen Bestien aus dem Urwald auf uns losgelassen und wiederum haben sie ihren tierischen Instinkten freien Lauf gelassen. Ein Teil dieser Untermenschen ist bereits in deutschen Gefangenenlagern untergebracht.
오늘날 프랑스는 다시 정글의 잔혹한 검은 짐승들을 풀어놓았고, 다시 한번 그들의 동물적 본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 인간 이하의 존재들 중 일부는 이미 독일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1940년 5월 나치당 기관지 Völkischer Beobachte의 기사 중 일부 #
여담으로 샐리 마크라는 한 연구자가 1978년에 루르 지역 점령에 따른 프랑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의외로 9억 마르크 흑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 입장에서 국제적인 이미지 하락 등 간접적인 손실을 생각해보면 결코 많은 돈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루르 점령으로 독일이 경제적으로 망가지면서 배상금을 갚을 능력을 빠르게 상실해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원래 목표였던 배상금을 지급받기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된다.
원래 독일 제국의 영토 일부였으나 패전 이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 된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으로 인해 철수했다. 이로 인해 곧 리투아니아계를 주축으로 봉기가 발생하여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로 편입되었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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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에 맨 처음 결정된 금액은 이것보다 훨씬 적은 226억 마르크였으나 미국에 진 전쟁 채무를 전쟁 배상금으로 해결하려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1921년에 엄청나게 증액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내세운 명분이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2] 다만 당시 북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았던, 바이에른 왕국을 비롯한 소국들도 북독일 연방의 편에서 싸우기는 하였다.[3] 실상은 독일이 정말로 갚을 능력이 없었고, 프랑스와 벨기에는 이 사실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란트 점령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관철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대통령을 지내다가 1차대전이 끝나면서 총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대 독일 강경파로 잘 알려져 있었다.[5] 루르 점령 말기 한 독일인에게 암살 당한 프랑스 중령의 관을 운구하던 중 모자를 벗는 조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던 독일인들을 구타하는 모습으로,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훗날 나치 정권의 반프랑스 선전으로 사용되었다.[6] "Nein! Mich zwingt Ihr nicht!". "아니! 당신들은 나를 (프랑스/벨기에를 위해 일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라 적혀 있다.[7]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로 자유군단 소속 군인이었다. 그는 저항 조직을 이끌며 프랑스군의 열차 선로에 사보타주를 감행하다가 1923년 5월 프랑스 측에 체포된 이후 처형당했다. 사후 나치 독일에 의하여 그의 이름을 비행단에 붙이는 등 프로파간다로 활용되었다.[8] 사실 이것도 전쟁 직후와 대공황시기에 비해 살 만했다는 것일 뿐, 완벽히 재건된 것은 아니었다.[9] check, Raffael (2006). Hitler's African Victims: The German Army Massacres of Black French Soldiers in 19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857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