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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 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뮌헨 폭동 | 맥주홀 폭동
Hitlerputsch | Bierkeller-Putsch
Munich Putsch | Beer Hall Putsch
파일:Beer Hall Putsch.jpg
일시
장소
원인
경제적 위기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발생한 나치당을 비롯한 독일투장동맹의 바이에른 장악 시도
교전국 및 세력
파일:기.svg
기 명칭
파일:깃발.svg
깃발 명칭
파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기.svg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기타 독일투쟁동맹 소속 단체들
지휘관
병력
당원 및 연맹원 약 2,000명
경찰 약 2,000명
국가방위군 약 3,000명
피해
당원 16명 사망
경찰 4명 사망
민간인 1명 사망
결과
반란 진압 성공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해산
주모자 아돌프 히틀러 구속
나치당원 피선거권 박탈
영향
아돌프 히틀러 등 나치당 소속 폭동주체들의 전국구 진출
아돌프 히틀러의 무장투쟁 노선 포기, 합법투쟁 노선 전개

1. 개요2. 배경: 독일 내외부의 환경3. 독일투쟁동맹, 그리고 바이에른 정부4. 맥주홀5. 사후처리6. 뮌헨 폭동의 의의7. 뒷이야기8. 매체

1. 개요[편집]

1923년 11월 8일부터 9일까지 독일국 뮌헨에서 있었던 국가 전복 시도 사건. 이 사건으로 지역 우익 정치인이던 아돌프 히틀러는 일거에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뮌헨 폭동, 뮌헨 맥주홀 쿠데타, 맥주홀 폭동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2. 배경: 독일 내외부의 환경[편집]

  • 루르 점령(1923년 1월)
    프랑스레몽 푸앵카레 정권은 1923년 1월 벨기에와 함께 군대를 파병하여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이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상의 전쟁배상금 지불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강제징수를 위해 선택한 극단적 방법으로서 라인란트 일대가 동 조약상 독일군의 주둔이 금지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일방적인 영토 불법 점령은 이념과 진영을 뛰어넘어 전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베를린의 중앙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공연히 무력항쟁을 선택하지 않은 중앙정부에 대한 비판이 늘어났고, 루르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가 택한 '소극적 저항(Passiver Widerstand)'은 결과적으로 전후 만연하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가속해 엄청난 경제적 혼란을 야기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 체제에 가장 순종적이어야 할 중산층 계급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극좌/극우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 공화국에 대한 좌파의 도전
    스파르타쿠스 봉기(1919년 1월 5일 ~ 15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수립(1919년 4월 6일 ~ 5월 3일), 작센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수립(1918년 11월 15일 ~ 1919년 5월 11일, 1920년 ~ 1923년) 등, 당시 만연한 극좌 공산주의 세력들의 정부 전복 시도에 대항한 우익 세력들의 적개심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여러 우익 세력들이 좌익 세력에게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우익 쿠데타로 정부와 체제를 전복/대체하려고 했다.
  • 바이에른의 지역감정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바이에른 지방은 좌익 세력이 득세했던 베를린이 속한 프로이센 자유주 지역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도 맞물려 있었는데, 바이에른은 천주교 전통이 강했던 반면 프로이센 지역은 개신교(루터교)의 교세가 더 강했다. 독일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의해 베를린 중앙 정부가 천주교 세력을 탄압했던 기억까지 있어서 바이에른 지역의 교인들 중 프로이센 지역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이전 프로이센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가진 왕국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통일 후 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나 반감을 가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바이에른은 뮌헨 내 사회주의 정권을 진압하며 강력한 우파 진영의 거점으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좌파 세력들이 득세했던 베를린과 우파 세력들의 거점이었던 바이에른의 관계는 단순한 지역감정을 넘어,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3. 독일투쟁동맹, 그리고 바이에른 정부[편집]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3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에서 '독일의 날(Deutscher Tag)' 집회가 열리게 된다. 해당 집회에서 우익 세력들은 <독일투쟁동맹> 이라는 연합단체를 결성하였다. 나치당오버란트 동맹, 제국깃발(Reichskriegsflagge), 전선전사동맹(Bund Wiking), 국가기(Nationalflagge) 등 난립하던 온갖 남부 극우 단체들이 결집하였다. 나치당의 돌격대 참모장이었던 에른스트 룀의 사전공작으로 나치당의 당수 히틀러는 이 <독일투쟁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되게 된다. 그러나 나치당과 달리 동맹에서 히틀러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독일투쟁동맹> 자체가 애당초 다양한 생각과 꿍꿍이를 가진 이들의 오월동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동맹 참여자들 중에선 힌덴부르크와 함께 명콤비로서 탄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있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독일투쟁동맹>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잡고 있었다면 쿠데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맹 내에서의 이런 불확실한 위치로, 동맹 내부에서 쏟아져나오던 결단, 거사와 같은 요구와 압력을 히틀러가 거스를 수 없었다는 것에 있었다. 투쟁동맹 내 중간간부진들도 경제난과 사회 혼란 속에서 투쟁동맹 조직원들 및 일반인들이 극좌로 넘어갈 수 있다며 그러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결단할 것을 히틀러에게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이에른주 정부는 바이에른주 총독(Generalstaatskommissar)[1]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에게 사실상의 독재권을 부여한 상황이었다. 카르는 바이에른 주둔 국가방위군 사령관(Befehlshaber) 오토 폰 로소(Otto von Lossow), 바이에른 주 경찰청장(Oberst) 한스 폰 자이서(Hans Ritter von Seißer)와 함께 바이에른을 통치하며 좌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우파 세력의 집회 요청도 대부분 불허하는 등 적극적으로 치안을 통제했다. 이들은 통칭 삼인방(Triumvirate)이라 불렸다. 삼인방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치안을 통제했던 것은 물론 공화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극우 성향이었던 바이에른 삼인방도 프로이센과 그들이 중심이 된 베를린의 사회민주당 정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긴 매한가지였고, 이들은 <독일투쟁동맹>을 공화국 정부를 타도하고 군부독재 정권을 수립하는데 이용만 하고 팽할 생각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삼인방 입장에서도 <독일투쟁동맹>을 비롯한 우익 세력들의 목줄을 잡고 있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삼인방이 주축이 된 바이에른 정부 세력은 로마 진군을 모방해 바이에른과 그 주변의 준군사조직 및 무장단체를 총동원해 베를린으로 진군한 다음 거국적 독재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베를린의 육군총감 한스 폰 젝트와 면담하기도 했으나 젝트는 이 어설픈 계획에 전혀 찬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압의 의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이들의 계획은 말 그대로 상상으로 끝났다. 젝트의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받은 삼인방은 혈기넘치는 <독일투쟁동맹>을 제어하여 자신들의 통제 범위 바깥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일을 막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여러 루트를 통해 동맹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내부의 압박 속에서 바이에른 정부마저 비협조적이자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우파민족적 정부 역시 결국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 와중 계속되는 아래로부터의 궐기 요구를 히틀러가 받아들여,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바이에른 주 정부를 장악한 다음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1923년 11월 6일 주요 참모들과 논의한 후 계획을 굳혔고, 11월 7일 <독일투쟁동맹> 지도자 회의에 쿠데타 계획을 내놓았다. 쿠데타 결행일로 정해진 날짜는 바로 다음 날인 11월 8일이었다. 11월 8일은 독일 11월 혁명 5주년 기념 행사가 근교 맥주홀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여기에는 카르, 로소, 자이서 삼인방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2]

4. 맥주홀[편집]

1923년 11월 8일 오후 8시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3]라는 맥주홀에서 예정대로 독일 11월 혁명 5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뮌헨과 바이에른 정부의 유력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당시 바이에른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삼인방 역시 이 집회에 참여중이었다.

그러던 오후 8시 30분 나치 돌격대의 무장병력들이 홀을 포위하였고 뒤이어 무장병력들의 호위 속에 히틀러가 천장에 권총을 난사하며 홀에 나타났다. 히틀러는 연단에 올라 바이에른 주 정부의 해산과 과도정부의 수립을 선언했고 이 과도정부에 카르, 로소, 자이서 삼인방의 참여를 요청했다. 물론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강요였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그의 돌격대원들과 함께 삼인방을 맥주홀에 있던 방으로 끌고 가 들고 있던 권총을 겨누며 자신의 폭동에 동참하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삼인방은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당시 전쟁 영웅으로 취급받았고 이를 이용해 나치당의 얼굴마담이기도 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함께 설득하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히틀러의 강압에 이끌려 과도정부 참가를 약속하는 연설을 했고 곧이어 루덴도르프도 연설을 통해 쿠데타의 지지 및 과도정부 참여 의사를 밝혔다. 히틀러는 자신을 내각 수반으로, 루덴도르프를 군 총사령관으로 하고 카르를 바이에른 주지사로, 로소를 국방장관으로, 자이서를 경찰청장으로 각각 내정하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각 나치당의 돌격대 참모장 은 돌격대를 지휘하여 뮌헨의 주요 관공서를 습격했다.[4] 뮌헨의 군 사령부와 병영, 경찰청과 주요 관공서들이 하나둘씩 접수되었다. 그러나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돌격대원들은 곳곳에서 엉성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특히 군 사령부를 기껏 점령하고도 가장 중요한 통신실을 신경쓰지 않아서 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진압을 위한 병력출동을 요구할 수 있었다.

직후 히틀러도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돌격대가 접수하지 못한 부대의 접수를 지원하기 위해 맥주홀을 떠나면서 카르, 로소, 자이서 3인방을 석방시킨 것이다. 히틀러가 자리를 비우려는 것을 본 삼인방은 루덴도르프에게 '쿠데타를 지원하려면 각 본부에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하니 석방해 달라' 라는 거짓말을 한다. 루덴도르프는 '독일 장교가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은 절대 깰 수 없다'라는 철저한 군인 정신을 믿었던, 소위 '구시대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루덴도르프 입장에선 군 시절 부하였던 이들이 자신을 속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결국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에게 3인방을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고 당시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이었던 히틀러 또한 루덴도르프의 권위에 기대어있는 측면이 컸기 때문에 이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날짜가 바뀐 11월 9일 새벽 2시경부터 석방된 3인방은 나치 돌격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며 병력 및 경찰력을 동원해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조직폭력배 수준의 어설픈 무장으로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돌격대원들은 접수했던 맥주홀, 관공서 등에서 철수해 도망치기 바빴고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밤새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11월 9일 정오 무렵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최후의 발악으로 추종자들을 이끌고 가두행진에 나서 혁명의 대의를 외치기 시작했으나 동조하는 시민들은 없었고, 곧 이들을 가로막은 경찰병력과 접촉해 짧은 총격전 끝에 시위대 14명이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도망쳤으며 경찰은 4명이 죽었다.

히틀러와 어깨동무를 하며 행진 중이던 다른 지도자급 나치 당원 에르빈 폰 쇼이브너-리히터(Erwin von Scheubner-Richter)도 총에 맞아 죽었고 히틀러는 이로 인해 어깨가 탈골된 채 도망쳐 당 동지의 집에 머무르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5. 사후처리[편집]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역설적이게도 히틀러를 일약 스타로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 오스트리아 등지로 국외망명했다는 점이 컸다. 물론 도망간 건 히틀러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히틀러는 독일 국내에 있었고 곧 체포되었으며 법정을 발언대 삼아 자신의 주장과 이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것이다. 이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에게 히틀러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믿음을 안겨 주었다. 또 다른 주모자급 인물인 루덴도르프는 억지로 끌려나왔을 뿐이라고 항변하면서 전쟁영웅의 힘을 내세워 무혐의 처분받았으나 오히려 '군인이 비겁하다'는 여론에 휩쓸려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사실 히틀러와 다른 지도자들의 차이는 얼마나 잘 도망갔냐일 뿐인데 도망치는 실력이 젬병이었던 히틀러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히틀러는 체포되기 전 구술서를 통해 당 지휘부를 재편한 다음 구속되어 란츠베르크 요새에 수감되었다. 뒤이은 재판에서도 바이에른 우익 세력들은 저열한 배신자들 대신 당당하게 맞선 히틀러를 더 높이 평가하면서 열렬히 응원했다. 아울러 히틀러는 법정에서도 쿠데타에 대해 무능한 의회 통치에 대한 국민적 방어권 행사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한편 바이에른 정부 및 정부 우익 인사들이 자신과 투쟁동맹에 어떠한 지원을 하고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등등을 다 기억한다는 협박전술을 구사했다.

그리고 이 협박전술과 히틀러의 포장술이 완벽히 맞아 떨어지면서 뮌헨 법정은 히틀러에게 금고 5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선고했다. 이후에도 규정상 최소 18개월 이상 수형 후 가석방했어야 하지만 편안한 옥중 VIP 생활을 즐기면서 나의 투쟁을 구술하다가 바이마르 정부의 정치인 사면령으로 13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애초에 이 법정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 반역죄인 만큼 지방법원이 아닌 라이프치히의 상급법원에서 다뤄져야 하지만 히틀러의 협박 전술을 두려워한 바이에른의 높으신 분들이 베를린의 중앙정부를 설득해서 뮌헨 법원에서 재판이 이뤄졌다. 때문에 히틀러에 우호적인 방청객들이 가득 찰 수 있었고 법정도 바이에른 주정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다.
  • 히틀러는 1922년 1월 폭력선동죄로 일종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기간 중에 재범을 저질렀으니 가중처벌되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 반역죄에 연루된 외국인은 추방해야 한다는 법률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적의 히틀러는 즉시 추방되어야 했으나 법원은 국적은 독일이 아니더라도 독일계이며, 스스로 독일인이라 여기고 독일인으로 행동하며, 1차대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했으니 해당 법률을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외국으로 취급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에서조차 독일과의 통합을 바랐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에서 금지하여 무산되었기 때문에 미수복영토로 바라보는 측면이 강했다.
  •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Georg Neithardt)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자였다.[5] 이는 비단 나이트하르트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이,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법부는 좌익 세력의 봉기에는 가차없는 중형을 선고하면서도 유독 우익 세력의 쿠데타, 정치 테러에 대해서는 관대한 선고를 내리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 또한 제정 시대에 임용된 보수적인 엘리트 계층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우파들의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더 찬동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히틀러는 편한 감옥 생활 끝에 석방되어 나치당의 지도자 자리에 다시 올라간다.

6. 뮌헨 폭동의 의의[편집]

대부분의 간략한 서술에서는 히틀러 개인의 쿠데타라고 보지만 실은 상당히 복잡한 구조 속에서 진행된 사건이다. 기계로 치자면 히틀러도 분명 중요한 파츠였지만 루덴도르프도 쿠데타 이전부터 히틀러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카르, 로소, 자이서 삼인방 역시 쿠데타를 진압하긴 했지만 이전에는 히틀러와 극우 준군사조직, 무장집단을 쿠데타 목적으로 활용하고 팽하고자 하는 의지가 명백했다.

오히려 히틀러가 아닌 루덴도르프를 실질적 주동자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조 속에서 히틀러가 우연찮게나마 그 중심에 있었고 본인 스스로의 결단으로 쿠데타의 트리거를 당겼다는 점은 분명하며 훗날 그에게 엄청난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통해 기존의 비합법적 수단을 통한 정권 장악을 포기하게 되었고 선거라는 합법적 수단을 통한 정권 획득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7. 뒷이야기[편집]

  • 사건을 다룬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히틀러 집권 후 히틀러로부터 은혜를 보답받아 바이에른 대법원장까지 승승장구했다. 나이트하르트는 1941년에 죽었으며 그의 유족들은 탈나치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한다.
  • 쿠데타 진압에 앞장섰던 3인방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는 이때의 원한을 잊지 않은 히틀러에 의해 장검의 밤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총살당한다. 야사에 따르면 그의 시신이 총상과 곡괭이에 난도질당한 처참한 상태로 인근 늪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3인방의 나머지 2명 로소와 자이서는 당시 이미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한 상태였기에 히틀러의 직접적인 숙청 명단에서는 제외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자신의 명성을 앞세워 무죄판결을 받아내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많은 불신을 받았고 이후 히틀러의 제안에 응해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1차 투표에서 1%에 불과한 표만 얻고 사퇴한 뒤 정계를 떠난다.
  • 이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후 나치당에서 유력한 위치에 올랐다. 다만 예외도 존재한다. 히틀러와 함께 가장 강경한 인물로, 바이에른 검찰이 끝까지 가석방에 반대했던 헤르만 크리벨은 괴벨스, 리벤트로프 등 새로 떠오른 거물들과의 불화로 인해 주중 군사고문, 상하이 총영사, 국회의원 수준에서 커리어를 끝냈다. 또한 쿠데타의 핵심 인물로서 돌격대를 이끌었던 에른스트 룀은 나치당의 독일 정권 찬탈 방향성, 당의 이념 등을 두고 히틀러와 의견이 불일치했고 결국 장검의 밤 때 숙청되어 사망한다.
  • 폭동 당시 사망한 나치당원의 피가 묻은 하켄크로이츠 깃발 블루트파네(Blutfahne)는 나치당에서 신성한 물건이 되어 히틀러가 공식 행사에서 주로 사용하게 된다.
  • 헤르만 괴링은 이 사건으로 사타구니에 총상을 입게 된다. 총상을 입은 후 오스트리아로 피신해 치료를 받긴 하지만, 이때의 후유증으로 괴링은 주기적으로 모르핀을 비롯한 마약을 투약받기 시작했고 이는 2차 대전기 괴링의 판단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된다. 한편 총상을 입은 부위가 부위다 보니, 괴링은 고환이 한개 뿐이라거나, 아예 생식 능력을 상실했다는 조롱을 듣게 된다. 다만 실제로 이 사건으로 괴링이 한쪽 고환을 적출해야 했다거나, 고자가 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훗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을 대상으로 한 신체검사가 있었는데 해당 신체검사 결과에도 괴링의 고환 수에 대한 언급은 딱히 없다.
  • 훗날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판무관이 되는 요제프 테르보펜도 이 사건에 가담했다.
  • 쿠데타가 일어난 맥주홀 뷔르거브로이켈러는 이후 나치당의 성지가 되어 회의도 자주 열리고 기념식도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나 1939년 히틀러 암살기도[6] 당시 터진 폭탄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이후 나치는 이곳을 수리, 복원하고자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의 물자 부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연합군의 공습 당시에도 운 좋게 폭격을 면했으나 1979년에 지역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이후 해당 부지에는 호텔과 문화센터가 자리잡았다.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던 장소의 바닥에는 이를 알리는 기념 표석이 지금도 설치되어 있다. #
  •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의 소유주였던 맥주 회사 뷔르거브로이는 전후 같은 뮌헨의 맥주 회사 뢰벤브로이(Löwenbräu)에 합병된다.

8. 매체[편집]

[1] 'Generalstaatskommissar'는 직역하면 '총(General)-주(Staats)-위원/판무관(Kommissar)'이다. 이 관직명은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위기 당시 바이에른 주정부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창설한 데서 유래했다. 명칭의 'Staats'는 연방 중앙정부가 아닌 바이에른 '주 정부'의 주권을 뜻하며, 'General-'과 '-kommissar'의 조합은 계엄령에 준하는 상황에서 군사와 경찰, 행정 전권을 한 손에 쥔 '최고 전권위원'임을 명시한 것이다. 즉, 상시적인 행정 관직이 아니라 위기극복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합법적 독재자 직위라는 맥락을 지닌다. '총독'이라는 번역명은 일본어 위키의 번역명을 따른 것이다.[2] 11월 혁명은 독일 제국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수립된 혁명이라 바이에른에 모인 우익 세력들이 진정으로 이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다기 보다는 '나약한 공화국을 타도하고 옛 독일의 영광을 되찾자는 다짐'을 공유하기 위해서 모인 것에 가까웠다.[3] 직역하면 '시민 맥주 저장고' 라는 뜻이다. 해당 맥주홀의 소유주였던 맥주 회사 이름이 '뷔르거브로이(시민 맥주)' 였기 때문에 '뷔르거브로이의 저장고'라는 뜻도 된다.[4] 이때 뮌헨 경찰서에 가장 먼저 총알을 발사한 사람이 광신도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이며 이후에도 슈트라이허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5] 심지어 그는 히틀러와 구면이기까지 했는데 히틀러가 육체단련대(돌격대의 전신)를 동원해 바이에른 분리주의자인 발러슈테트를 폭행한 사건을 자신이 맡았다. 결과는 보다시피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나이트하르트는 이후 히틀러의 눈에 들어 1941년 사망할 때까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승승장구했다.[6] 1939년 11월 8일 발생한 사건이다. 게오르크 엘저(1906~1945.4)라는 사람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설치했는데 그가 평소와 달리 일찍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엘저는 사건 발생 시간 직전에 스위스 국경에서 체포되었고 이 암살 기도의 주모자임이 밝혀지자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5년 4월 수용소에서 상부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7] 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서도 묘사되었기에 유일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이것의 경우에는 자료가 많지않아 아는 사람은 없다시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