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원인[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독일은 전쟁이 크리스마스 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은 예상과는 달리 길어지고 사망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SPD 당원들이 당의 전쟁 지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6년 12월 7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독일 남성에게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노동 서비스를 강제하는 보조 서비스법이 통과되자 사회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를 “강제 노동”으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이 법안을 찬성했고 전쟁 지속을 주장했다. 이 가운데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사회민주당의 급진파들은 1918년 1월 파업을 주도했다. 이 파업에 100만명 이상이 동참했으며 이들은 전쟁 종식을 요구하였다. 이에 놀란 사회민주당 지도부들은 급진파들을 강제로 탈당시켰다. 탈당한 이들은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을 창당한 뒤 전쟁의 즉각적인 종식과 독일의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3. 경과[편집]
1918년 여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졌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유주의자 귀족인 막시밀리안 폰 바덴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내각은 대부분 무소속이었지만 사민당 소속 의원도 2명이 있었다. 10월 초에 막시밀리안 폰 바덴 수상이 이끄는 내각이 성립되어 휴전 교섭을 진행했다. 협상국은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독일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잠수함 활동을 중단하고,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사임하고 의회는 독일을 입헌군주국으로 바꾸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합의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병사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을 예상하고 귀국을 간절히 바랬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말에 해군 지도부가 실패할 것이 분명한 공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수병들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하기로 하고 11월 3일 킬 항구에서 항명을 일으켰다.
이 항명을 기점으로 수병들에 이어 킬에 있던 노동자들도 호응해 항명에 가담하면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구성되었고 소비에트가 킬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사건은 독일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하여 곳곳에서 병사와 수병, 노동자들이 만든 급진적인 소비에트가 기존의 지방정부를 대체했다.
베를린, 뤼베크, 브레멘, 함부르크, 쾰른 등도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는데 이때 사회민주당은 무장 반란에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도 무색하게 뮌헨에서는 쿠르트 아이스너가 주도하는 바이에른 인민국이 선포되어서 루트비히 3세와 그의 가족들은 오스트리아로 도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열기는 브레슬라우,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등 독일 동부 지역에는 오지 않았다. 어쨌든 독일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이자 벨기에 스파에 있던 빌헬름 2세는 독일로 돌아갈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덴 총리는 퇴위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스파행 기차에 타려고 했지만, 베를린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사태 수습을 위해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그후 바덴 총리는 총리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즉각 이양하였다. 결국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바로 그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공화국 선포 직후 총리가 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빌헬름 그뢰너 장군과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공화국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과격한 소비에트 운동을 억압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 11월 10일,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과도정부는 중도 좌파인 SPD(사회민주당)와 USPD(독립사회민주당)에서 각각 3인씩 참여했으며, 사실상 공화국 권력을 대행했다. 이들은 행정·입법·군 통수권을 모두 장악하며, 당시 황제와 총리의 권한을 대체했다. 인민대표평의회는 언론·집회 자유 회복, 여성 참정권 부여, 노동시간 단축 등을 발표하며 급진적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 관료 조직과 장교 집단, 사법 체계 등 구 제도권의 인적 자원을 유지함으로써 급진적 혁명보다는 보수·안정 노선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급진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혁명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과격파들은 에베르트의 온건 노선에 반발해 독립사민당을 탈당하고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으며 이듬해 1919년 1월에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온건파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의회민주주의를 주창한 인물로, 내전 발발과 과격파 세력의 대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구체제 인사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민당의 우파 인사인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가 조직한 민병대인 자유군단(Freikorps)에 의해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비롯한 독일 공산당 세력은 진압당했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병대에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당했으며[9] 함께 체포된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처형당했다.
하지만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에도 베를린과 독일 주요 도시에서는 노동자 평의회와 급진 좌파의 불만이 남아 있었다. SPD 주도의 과도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좌파 노동자들은 여전히 평의회 공화국 수립을 요구했다. 1919년 3월 초, 베를린에서 다시 총파업과 시위가 촉발되었고, 이는 곧 무장 투쟁으로 번졌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으나, 수많은 민간인과 노동자가 학살되었다. 이 봉기를 끝으로 급진 좌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공화국 수호를 명분으로 우익 군사세력과 협력해 좌파를 진압한 사회민주당 세력을 노동자들은 불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우 대립이 심화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고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말에 해군 지도부가 실패할 것이 분명한 공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수병들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하기로 하고 11월 3일 킬 항구에서 항명을 일으켰다.
이 항명을 기점으로 수병들에 이어 킬에 있던 노동자들도 호응해 항명에 가담하면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구성되었고 소비에트가 킬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사건은 독일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하여 곳곳에서 병사와 수병, 노동자들이 만든 급진적인 소비에트가 기존의 지방정부를 대체했다.
베를린, 뤼베크, 브레멘, 함부르크, 쾰른 등도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는데 이때 사회민주당은 무장 반란에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도 무색하게 뮌헨에서는 쿠르트 아이스너가 주도하는 바이에른 인민국이 선포되어서 루트비히 3세와 그의 가족들은 오스트리아로 도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열기는 브레슬라우,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등 독일 동부 지역에는 오지 않았다. 어쨌든 독일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이자 벨기에 스파에 있던 빌헬름 2세는 독일로 돌아갈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덴 총리는 퇴위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스파행 기차에 타려고 했지만, 베를린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사태 수습을 위해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그후 바덴 총리는 총리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즉각 이양하였다. 결국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바로 그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공화국 선포 직후 총리가 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빌헬름 그뢰너 장군과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공화국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과격한 소비에트 운동을 억압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 11월 10일,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과도정부는 중도 좌파인 SPD(사회민주당)와 USPD(독립사회민주당)에서 각각 3인씩 참여했으며, 사실상 공화국 권력을 대행했다. 이들은 행정·입법·군 통수권을 모두 장악하며, 당시 황제와 총리의 권한을 대체했다. 인민대표평의회는 언론·집회 자유 회복, 여성 참정권 부여, 노동시간 단축 등을 발표하며 급진적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 관료 조직과 장교 집단, 사법 체계 등 구 제도권의 인적 자원을 유지함으로써 급진적 혁명보다는 보수·안정 노선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급진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혁명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과격파들은 에베르트의 온건 노선에 반발해 독립사민당을 탈당하고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으며 이듬해 1919년 1월에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온건파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의회민주주의를 주창한 인물로, 내전 발발과 과격파 세력의 대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구체제 인사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민당의 우파 인사인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가 조직한 민병대인 자유군단(Freikorps)에 의해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비롯한 독일 공산당 세력은 진압당했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병대에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당했으며[9] 함께 체포된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처형당했다.
하지만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에도 베를린과 독일 주요 도시에서는 노동자 평의회와 급진 좌파의 불만이 남아 있었다. SPD 주도의 과도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좌파 노동자들은 여전히 평의회 공화국 수립을 요구했다. 1919년 3월 초, 베를린에서 다시 총파업과 시위가 촉발되었고, 이는 곧 무장 투쟁으로 번졌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으나, 수많은 민간인과 노동자가 학살되었다. 이 봉기를 끝으로 급진 좌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공화국 수호를 명분으로 우익 군사세력과 협력해 좌파를 진압한 사회민주당 세력을 노동자들은 불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우 대립이 심화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고착되었다.
4. 영향[편집]
이후 대부분의 독일 황족 및 제후국의 왕족들은 외국으로 망명해서 살게 되었다.[10] 이로 인해 독일 역사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진 군주제가 종식되었다. 또한 1919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채택되며, 독일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혁명 과정의 갈등으로 인해 취약한 기반 위에 출발하게 되었고 이는 나치 독일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프라이코르프(Freikorps) 같은 준군사 조직이 혁명 진압에 동원되며, 정치적 폭력이 합법화되는 선례를 남겼다. 이는 1920년대 우익 민병대, 나치 돌격대(SA) 등 극우 폭력 세력의 성장 기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