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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明治時代
1868년 메이지 연호를 채택한 직후부터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 일본사의 시대.
메이지 덴노의 즉위는 1867년에 있었지만 즉위하면서 바로 새로운 연호를 채택하지 않고 전임 고메이 덴노의 게이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데다, 즉위 직후에는 아직 에도 막부가 건재한 상태였기에,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고 1년이 지나서야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한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시작된 시대인 동시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시대였으며, 일본이 제국주의로 폭주하여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을 침탈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1868년 메이지 연호를 채택한 직후부터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 일본사의 시대.
메이지 덴노의 즉위는 1867년에 있었지만 즉위하면서 바로 새로운 연호를 채택하지 않고 전임 고메이 덴노의 게이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데다, 즉위 직후에는 아직 에도 막부가 건재한 상태였기에,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고 1년이 지나서야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한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시작된 시대인 동시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시대였으며, 일본이 제국주의로 폭주하여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을 침탈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2. 역사 및 정치[편집]
2.1. 국내[편집]
2.1.1. 근대화 및 내정 개혁: 메이지 유신[편집]
1868년 메이지 연호 개원 이후 일본은 중앙정부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과 제도, 문화, 사상 등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달성했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2.1.2.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편집]
2.2. 대외 팽창: 일본 제국주의[편집]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은 대외적으로 주변국들을 침탈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우선 에도 시대부터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었던 류큐를 두 차례에 걸친 류큐 처분[1]을 통해 병합했고,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쿠릴 열도 영유권을 보장받았으며[2],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청의 견제로 인해 한계가 있었으나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했으며, 타이완섬을 식민지로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1900년부터 1901년까지는 의화단 전쟁에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톈진의 일부를 조계로 할양받았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는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이전까지 러시아가 지배하던 랴오둥 반도(요동반도)를 병합하여 관동주라는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정식 식민지로 만들었다.
우선 에도 시대부터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었던 류큐를 두 차례에 걸친 류큐 처분[1]을 통해 병합했고,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쿠릴 열도 영유권을 보장받았으며[2],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청의 견제로 인해 한계가 있었으나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했으며, 타이완섬을 식민지로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1900년부터 1901년까지는 의화단 전쟁에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톈진의 일부를 조계로 할양받았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는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이전까지 러시아가 지배하던 랴오둥 반도(요동반도)를 병합하여 관동주라는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정식 식민지로 만들었다.
3. 주요 사건[편집]
메이지 시대에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 또는 타국에서 일어났지만 일본이 이해당사자로 엮인 사건만 서술한다.
3.1. 메이지 00년대(1868년~1876년)[편집]
3.2. 메이지 10년대(1877년~1886년)[편집]
- 메이지 10년(1877년)
- 세이난 전쟁(서남 전쟁)
- 메이지 12년(1879년)
- 제2차 류큐 처분
- 메이지 15년(1882년)
- 임오군란
- 메시지 17년(1884년)
- 갑신정변
- 메시지 18년(1885년)
- 태정관 및 율령제 폐지, 내각 관제 도입
3.3. 메이지 20년대(1887년~1896년)[편집]
- 메이지 22년(1889년)
-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 제정
- 메이지 23년(1890년)
-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24년(1891년)
- 오츠 사건
- 메이지 25년(1892년)
-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27년(1894년)
- 제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동학 농민 혁명
- 청일전쟁 발발
- 갑오개혁
- 제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28년(1895년)
- 시모노세키 조약
- 삼국간섭
- 을미사변
- 을미개혁
- 을미의병
- 춘생문 사건
- 메이지 29년(1896년)
- 아관파천
3.4. 메이지 30년대(1897년~1906년)[편집]
- 메이지 31년(1898년)
-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제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33년(1900년)
-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의화단 전쟁 참전
- 메이지 34년(1901년)
- 신축조약
- 메이지 35년(1902년)
- 제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36년(1903년)
- 제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37년(1904년)
- 러일전쟁 발발
- 한일의정서
- 제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38년(1905년)
- 포츠머스 조약
- 을사의병
3.5. 메이지 40년대(1907년~1912년)[편집]
- 메이지 40년(1907년)
- 정미의병
- 메이지 41년(1908년)
-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42년(1909년)
- 남한 대토벌 작전
- 메이지 43년(1910년)
- 메이지 44년(1911년)
- 105인 사건
- 메이지 45년(1912년)
- 제1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메이지 덴노 사망(메이지 시대 종식)
[1] 1872년 제1차 류큐 처분, 1879년 제2차 류큐 처분.[2] 당시 쿠릴 열도는 러시아인도 일본인도 아닌 원주민들의 땅이었고, 이는 쿠릴 열도보다 북쪽에 있는 훨씬 거대한 섬인 사할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일본은 쿠릴 열도는 물론이고 사할린에 대한 영유권까지 주장했으나, 결국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고 쿠릴 열도에 대한 영유권만 보장받았기에 말이 영토 확장이지 사실상 러시아에 판정패를 당한 사건이었다.[3] 랴오둥반도(요동반도) 역시 식민지로 확보했으나 삼국간섭으로 인해 청에 반환해야 했다.[4] 같은 해에 프랑스와 청이 청불전쟁 종식을 위해 맺은 또다른 톈진 조약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