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세(로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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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VS I | Κωνσταντῖνος ὁ Μέγα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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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 ||||||||||||||||||||||||||||||||||||||||||||||
출생 | |||||||||||||||||||||||||||||||||||||||||||||||
사망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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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그러한 불경스러운 태도가 인류에게 만연하고 국가는 파멸의 위협을 맞았으니, 신께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셨겠는가? 나 자신이 바로 신께서 선택하신 도구였다. 그리하여, 해가 자연의 법칙에 순종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먼 브리타니아의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신의 도움으로 당시 만연했던 온갖 형태의 악을 내쫒고 없앴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신의 성스러운 법에 제대로 순종토록 하기 위함이었다.콘스탄티누스 1세,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4세기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자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초대 황제.
313년 메디올라눔 칙령(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삼위일체론을 정통 교리로 확립하는데 기여한 업적에 따라 사후 대제(Magnus) 칭호를 받아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불리게 되었으며[9], 이외에도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행정 수도로 삼아 훗날 해당 도시를 중심으로 존속하는 동로마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기에 그를 시초로 하는 콘스탄티누스[10] 또는 콘스탄티노스[11]라는 이름은 후대에도 로마인의 이름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에 이르기까지 10명이나 되는 후대 황제들[12]이 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313년 메디올라눔 칙령(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삼위일체론을 정통 교리로 확립하는데 기여한 업적에 따라 사후 대제(Magnus) 칭호를 받아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불리게 되었으며[9], 이외에도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행정 수도로 삼아 훗날 해당 도시를 중심으로 존속하는 동로마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기에 그를 시초로 하는 콘스탄티누스[10] 또는 콘스탄티노스[11]라는 이름은 후대에도 로마인의 이름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에 이르기까지 10명이나 되는 후대 황제들[12]이 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2. 일생[편집]
[1] 단 이때는 부제였다. 그러나 이미 4두정치의 균열이 생기고 있었으므로 정제니 부제니 하는 것들이 다 애매한 데다가 별 필요없는 구분이었다. 어차피 가장 강한 자가 승자고 정제, 나아가 단독(통일)황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 그러나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방을 온전히 점유한 312년에 가면 정제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312년부터 ''Undisputed' Augustus in the West'라는 표현을 써서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3] 324년 이전까지 사용.[4] 324년 제호 개명 후.[5] '마그누스·망누스(Magnus)'는 '위대한'이라는 뜻이다. 번역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6] 말년에 아리우스파에게 호의적으로 변하기도 했고 그에게 세례를 베푼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한때 아리우스를 변호하긴 했으나, 콘스탄티누스와 에우세비우스 모두 일단은 아리우스파가 아니라 보편교회 소속이었으며 니케아 신경 작성에도 참여한 인사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보편교회 신자로 취급된다.[7] 라틴 가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누스를 위대하다 평가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시성하지는 않았다.[8] 콥트력[9] 사실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을 논박하는데 앞장선 인물은 성 아타나시우스(아타나시오)였고, 황제 본인은 교리 논쟁 자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공의회를 개최하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교리를 공포하는 역할을 황제가 맡았기에 결과적으로 황제의 업적이 되었다.[10] 라틴어.[11] 그리스어.[12] 이것도 공동 황제나 참칭, 비정통, 임시 황제들은 제외하고 따진 숫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