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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과정
2.1. 유신 이전의 정세2.2. 메이지 시대와 유신의 시작2.3. 보신 전쟁(무진 전쟁)

1. 개요[편집]

明治維新

1868년 메이지(明治) 연호 개원 이후 일본이 중앙정부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사건.

일본어로는 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 발음하며,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경우에는 명치유신이라 한다.

2. 전개 과정[편집]

2.1. 유신 이전의 정세[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막말(일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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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흑선내항(쿠로후네 사건)을 통한 개항[1]을 계기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본격적인 막부 타도(토막) 운동이 시작되었다.

초기 토막파는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 정치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막부에 의한 개항을 무효화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른바 존황양이를 내세웠으나,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충돌했다가 격차를 실감한 이후 노선을 변경하여 막부를 타도한 후 막부보다도 적극적인 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그리고 양대 토막파 세력인 사츠마번과 조슈번이 1866년에 삿초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단일대오를 결성하기에 이르자, 1867년에 취임 1년차를 맞이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새로 즉위한 무츠히토 덴노[2]에게 쇼군직과 정권을 반납하고 막부를 해산했는데 이를 대정봉환이라 한다.

그러나 대정봉환은 어디까지나 토막파의 막부 타도 명분을 무마하는 대신 쇼군 시절에 보유하던 실권은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꼼수였기에, 명목상으로만 대정이 천황에게 반환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막부가 유지되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명목상 막부가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조정 및 삿초 동맹과 구막부 세력 간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는데, 실제로 메이지 유신은 보신 전쟁(무진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발한 후 요시노부가 에도성을 바치고 항복한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2.2. 메이지 시대와 유신의 시작[편집]

1868년 무츠히토 덴노가 5개조의 어서문을 통해 메이지(明治) 연호로의 개원을 선언하면서 메이지 시대와 유신의 막이 올랐다.

같은 해에 메이지 덴노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반포함으로써 명목상은 물론이고 실질적으로도 정치를 천황이 주도할 것을 선언했는데,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 세력이 이를 인정할 리가 없었기에 보신 전쟁(무진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의 발단이 되었다.

2.3. 보신 전쟁(무진 전쟁)[편집]

1868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직접 막부군을 이끌고 천황의 조정이 있는 수도 교토로 진격하여 반막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려 했는데, 이로써 보신 전쟁(무진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동원된 병력만 따지면 막부군이 조정과 삿초 동맹의 신정부군보다 우세했기에 메이지 신정부는 여차 하면 메이지 덴노를 교토에서 탈출시키는 것까지 고려했으나, 교토 인근에서 벌어진 토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신정부군은 후퇴하는 막부군을 추격하여 막부의 심장인 에도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막부 가신들은 장기전으로 가서 재역전을 노리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요시노부는 일부 영지를 보존받는 대가로 신정부에 항복하는 것을 택했고, 이로써 신정부군이 피를 흘리지 않고 에도에 입성하는 에도성 무혈개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요시노부의 항복에 불만을 품은 도호쿠 일대의 친막부 세력은 오우에츠 열번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지속했으나 모두 신정부군에 진압되었고, 이후 홋카이도까지 밀려난 구막부군 잔당이 에조 공화국을 세우고 정권을 지속했으나 1869년에 항복하며 보신 전쟁은 신정부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1]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2] 당시에는 아직 메이지 연호가 아닌 전임 고메이 덴노의 '게이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