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04년 12월 21일 |
사망 | 1881년 4월 19일 (향년 76세)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시티 오브 웨스터민스터 메이페어 | |
국적 | |
직업 | |
소속 정당 | |
제임 기간 | 제40대 총리 1868년 2월 27일 ~ 1868년 12월 1일 |
제42대 총리 1874년 2월 20일 ~ 1880년 4월 21일 | |
학력 | Eliezer Cogan school |
1. 개요2. 가문3. 개종과 정체성4. 생애
4.1. 출생과 유년기4.2. 청년기의 투기와 실패4.3. 문학 데뷔4.4. 동방 여행4.5. 네 번의 낙선4.6. 하원 입성4.7. 젊은 영국 운동4.8. 펜으로 정치를 하다4.9. 로버트 필과의 결별4.10. 당권 장악의 서막4.11. 유대인 구제법4.12. 제1차 재무장관 취임4.13. 제2차 선거법 개정4.14. 일국 보수주의 정립4.15. 제1차 총리 취임4.16. 글래드스턴의 대승과 야당 시절, 절치부심의 6년4.17. 크리스털 팰리스 연설4.18. 1874년 총선 압승4.19. 2차 재임 시절4.20. 인도 황제 추대4.21. 귀족 작위 수여4.22. 동방 문제와 러시아4.23. 베를린 회의4.24. 아프가니스탄과 줄루 전쟁4.25. 농업 불황과 몰락4.26. 1880년 총선 패배4.27. 마지막 소설 《엔디미온》4.28. 사망
5. 평가6. 글래드스턴과의 관계7. 여담7.1. 어록의 화신
1. 개요[편집]
"변화는 불변하는 것이다."(Change is inevitable. In a progressive country change is constant.)
2. 가문[편집]
디즈레일리 가문의 시조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뿌리를 둔 유대인이었다. 가문 내부의 전승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스페인에서 쫓겨난 세파르딤(Sephardim) 유대인이었으며, '디즈레일리(D'Israeli)'라는 성씨 자체도 '이스라엘의 아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벤저민의 할아버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 1세는 1748년 영국으로 건너와 주식 중개업과 금융업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았다. 그는 성공한 상인이었으며, 당시 영국 사회에서 유대인에게 허용된 좁은 문을 뚫고 중산층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디즈레일리는 훗날 자신의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베네치아의 화려한 혈통을 지닌 고귀한 가문"이라고 묘사하길 즐겼는데, 이는 사실 역사적 고증보다는 자신의 출신을 미화하고자 했던 디즈레일리 특유의 낭만주의적 허풍이 섞인 것이었다.[1] 어쨌든 이러한 '세파르딤 자부심'은 그가 영국 정계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롱받을 때, 오히려 상대방을 '북방의 야만인 후예'로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
벤저민의 아버지인 아이작 디즈레일리(Isaac D'Israeli)는 가업인 금융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전형적인 문학 선비였다. 그는 평생을 서재에 파묻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비평서를 썼는데, 특히 《문학의 일화(Curiosities of Literature)》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하며 당대 영국 지성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했다. 아이작은 유대교 신앙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훗날 가문이 성공회로 개종하는 단초가 된다.
어린 벤저민은 아버지의 거대한 서재에서 자랐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인 이튼(Eton)이나 해로우(Harrow)에 진학하는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수만 권의 고전과 역사서를 탐독하며 스스로를 교육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방대한 지식과 화려한 수사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은 훗날 그가 하원에서 글래드스턴과 같은 엘리트들과 맞붙을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글쓰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도구임을 배웠다. 디즈레일리가 정계 입문 전후로 꾸준히 소설을 집필했던 것도, 정치를 단순한 행정의 영역이 아니라 서사(Narrative)와 드라마의 영역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벤저민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버지의 책들에서 읽은 위대한 정치가와 정복자들의 연대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디즈레일리 가계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817년에 일어난 유대교 회당(Bevis Marks Synagogue)과의 마찰이었다. 아이작 디즈레일리는 회당의 간부직을 맡으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받자, 분노하여 유대교 공동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 친구인 샤론 터너의 권유로 아이작은 벤저민을 포함한 자녀들을 성공회 세례를 받게 한다.
당시 12세였던 벤저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이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만약 그가 유대교도로 남았다면,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유대인 참정권 제한 때문에 하원 의석은커녕 총리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
하지만 이 개종은 그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배교자' 혹은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는 변절자라는 시선을 받았고, 보수적인 영국 귀족 사회로부터는 '기독교인 코스프레를 하는 유대인'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러한 가계의 특수성은 디즈레일리가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서의 냉철한 시각을 갖게 함과 동시에,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권력의 정점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디즈레일리의 기록이나 서신에서 어머니 마리아 바세비(Maria Basevi)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마리아 역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으나, 디즈레일리는 아버지와는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눈 반면 어머니와는 정서적으로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학자들은 디즈레일리가 지닌 여성에 대한 태도나 훗날 빅토리아 여왕을 대할 때 보여준 독특한 공경심이 이러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결핍의 보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결국 디즈레일리의 가계는 '유대인의 혈통', '기독교인의 신분',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요소들이 뒤섞여있었다. 그는 이 배경 속에서 영국 보수주의를 단순한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모든 계급과 인종을 아우르는 '국가적 통합'의 서사로 재해석할 수 있는 독특한 시야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3][4]
디즈레일리는 훗날 자신의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베네치아의 화려한 혈통을 지닌 고귀한 가문"이라고 묘사하길 즐겼는데, 이는 사실 역사적 고증보다는 자신의 출신을 미화하고자 했던 디즈레일리 특유의 낭만주의적 허풍이 섞인 것이었다.[1] 어쨌든 이러한 '세파르딤 자부심'은 그가 영국 정계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롱받을 때, 오히려 상대방을 '북방의 야만인 후예'로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
벤저민의 아버지인 아이작 디즈레일리(Isaac D'Israeli)는 가업인 금융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전형적인 문학 선비였다. 그는 평생을 서재에 파묻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비평서를 썼는데, 특히 《문학의 일화(Curiosities of Literature)》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하며 당대 영국 지성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했다. 아이작은 유대교 신앙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훗날 가문이 성공회로 개종하는 단초가 된다.
어린 벤저민은 아버지의 거대한 서재에서 자랐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인 이튼(Eton)이나 해로우(Harrow)에 진학하는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수만 권의 고전과 역사서를 탐독하며 스스로를 교육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방대한 지식과 화려한 수사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은 훗날 그가 하원에서 글래드스턴과 같은 엘리트들과 맞붙을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글쓰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도구임을 배웠다. 디즈레일리가 정계 입문 전후로 꾸준히 소설을 집필했던 것도, 정치를 단순한 행정의 영역이 아니라 서사(Narrative)와 드라마의 영역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벤저민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버지의 책들에서 읽은 위대한 정치가와 정복자들의 연대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디즈레일리 가계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817년에 일어난 유대교 회당(Bevis Marks Synagogue)과의 마찰이었다. 아이작 디즈레일리는 회당의 간부직을 맡으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받자, 분노하여 유대교 공동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 친구인 샤론 터너의 권유로 아이작은 벤저민을 포함한 자녀들을 성공회 세례를 받게 한다.
당시 12세였던 벤저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이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만약 그가 유대교도로 남았다면,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유대인 참정권 제한 때문에 하원 의석은커녕 총리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
하지만 이 개종은 그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배교자' 혹은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는 변절자라는 시선을 받았고, 보수적인 영국 귀족 사회로부터는 '기독교인 코스프레를 하는 유대인'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러한 가계의 특수성은 디즈레일리가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서의 냉철한 시각을 갖게 함과 동시에,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권력의 정점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디즈레일리의 기록이나 서신에서 어머니 마리아 바세비(Maria Basevi)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마리아 역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으나, 디즈레일리는 아버지와는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눈 반면 어머니와는 정서적으로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학자들은 디즈레일리가 지닌 여성에 대한 태도나 훗날 빅토리아 여왕을 대할 때 보여준 독특한 공경심이 이러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결핍의 보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결국 디즈레일리의 가계는 '유대인의 혈통', '기독교인의 신분',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요소들이 뒤섞여있었다. 그는 이 배경 속에서 영국 보수주의를 단순한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모든 계급과 인종을 아우르는 '국가적 통합'의 서사로 재해석할 수 있는 독특한 시야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3][4]
3. 개종과 정체성[편집]
그는 스스로를 '히브리 출신의 잉글랜드인'으로 정의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제창한 '일국 보수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역사적 연속성'과 '전통의 결합'이라는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디즈레일리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12세였던 1817년을 지목한다. 그해 7월 31일, 벤저민은 런던의 홀본에 있는 세인트 앤드루 교회에서 성공회 세례를 받았다. 이는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버지 아이작 디즈레일리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아이작은 당시 유대교 회당(Synagogue) 지도부와 뿌리 깊은 갈등을 빚고 있었고, 유대교의 형식주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자녀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5]
이 사건은 단순히 종교를 바꾼 것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당시 영국의 테스트법(Test Acts)에 따르면, 하원의원이 되거나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으로서' 선서를 해야 했다. 즉, 이때 개종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그가 하원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전형적인 영국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기독교적 도덕주의를 내세웠다면, 디즈레일리는 이 '개종'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평생을 '이방인'이자 '기회주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이 '완성된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구약의 전통(유대교)이 신약(기독교)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는 유대인을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혈통을 지닌 귀족적 인종"으로 묘사하며, 오히려 평범한 영국 귀족들보다 자신의 뿌리가 더 깊고 고귀하다는 선민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6]
정계 진출 이후에도 정적들은 그를 공격할 때 항상 그의 혈통을 문제 삼았다. "유대인 벼락출세자", "사기꾼 히브리인" 같은 멸칭은 그에게 일상적인 것이었다. 한 예로, 하원에서 다니엘 오코넬이 그의 유대인 혈통을 조롱하며 공격하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디즈레일리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12세였던 1817년을 지목한다. 그해 7월 31일, 벤저민은 런던의 홀본에 있는 세인트 앤드루 교회에서 성공회 세례를 받았다. 이는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버지 아이작 디즈레일리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아이작은 당시 유대교 회당(Synagogue) 지도부와 뿌리 깊은 갈등을 빚고 있었고, 유대교의 형식주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자녀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5]
이 사건은 단순히 종교를 바꾼 것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당시 영국의 테스트법(Test Acts)에 따르면, 하원의원이 되거나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으로서' 선서를 해야 했다. 즉, 이때 개종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그가 하원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전형적인 영국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기독교적 도덕주의를 내세웠다면, 디즈레일리는 이 '개종'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평생을 '이방인'이자 '기회주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이 '완성된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구약의 전통(유대교)이 신약(기독교)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는 유대인을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혈통을 지닌 귀족적 인종"으로 묘사하며, 오히려 평범한 영국 귀족들보다 자신의 뿌리가 더 깊고 고귀하다는 선민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6]
정계 진출 이후에도 정적들은 그를 공격할 때 항상 그의 혈통을 문제 삼았다. "유대인 벼락출세자", "사기꾼 히브리인" 같은 멸칭은 그에게 일상적인 것이었다. 한 예로, 하원에서 다니엘 오코넬이 그의 유대인 혈통을 조롱하며 공격하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그렇다. 나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귀하의 조상들이 야만적인 섬(아일랜드)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을 때, 나의 조상들은 솔로몬 왕의 성전에서 제사장이었다."
이 발언은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로 꼽힌다. 그는 자신을 열등한 소수자가 아니라, 서구 문명의 근간인 유대-기독교 전통을 잇는 진정한 정신적 귀족으로 포지셔닝한 것이다.
그의 신앙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수단이었는지는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성공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지지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교회가 단순히 종교 기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고 하층민을 보호하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훗날 그가 제창하는 일국 보수주의의 종교적 토대가 된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철저한 정교분리와 공리주의적 사고가 영국의 전통적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기독교(성공회)는 유대교의 예언자적 전통과 영국의 위계질서를 잇는 가교였으며, 이를 통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한 국가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누구보다 영국적인 제국주의자였으나, 동시에 영국 정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를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정치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가 제안하는 모든 정책에 대해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따라붙게 만든 근원이기도 했다.
4. 생애[편집]
4.1. 출생과 유년기[편집]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1804년 12월 21일, 당시 런던의 신흥 주거지였던 펜턴빌(Pentonville)의 킹스로 6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할아버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 1세는 1748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주식 중개인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당시 영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세파르딤과 중동부 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이었다. 디즈레일리 가문은 스스로를 세파르딤의 후예라고 굳게 믿었으며, 이는 훗날 벤저민이 자신의 혈통을 '유럽의 어떤 귀족보다도 오래된 고귀한 혈통'이라며 과시하는 근거가 된다.[7]
아버지 아이작 디즈레일리는 가업인 금융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평생을 서재에 파묻혀 지낸 문학 연구가였다. 그는 《문학의 일화(Curiosities of Literature)》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정도로 학구적인 인물이었으나, 종교적 신념은 그리 깊지 않았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향은 어린 벤저민에게 종교적 도그마보다는 문학적 상상력과 냉소적인 지성을 먼저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벤저민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고작 12살이었던 1817년에 벌어졌다. 당시 아버지 아이작은 출석하던 '베비스 마크스(Bevis Marks)' 유대교 회당의 간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받자, 격분한 나머지 유대교 공동체와 완전히 결별해 버린다.
이때 아이작의 친구였던 역사학자 샤론 터너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아이작은 이를 받아들여 1817년 7월 31일, 벤저민을 포함한 네 자녀를 영국 국교회에서 세례받게 한다.
이 사건은 영국 정치사에서 "신의 한 수"라 불릴 만큼 중요하다. 당시 영국법상 유대교도는 하원의원이 될 수 없었으나, 유대인 혈통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받은 자는 법적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그의 정적들은 그를 '개종한 유대인'이라며 공격했지만, 만약 이때의 세례가 없었다면 디즈레일리는 총리는커녕 의회 문턱조차 밟지 못했을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이튼 칼리지나 해로우 학교 같은 당시 엘리트 코스의 필수 관문을 거치지 않았다. 그는 블랙히스에 있는 작은 사립학교를 거쳐 월섬스토의 하이엄 홀 학교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그는 고전 문학에는 두각을 나타냈으나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둔 그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자아를 형성했다. 이 시기 그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독서에 몰입하며 볼테르, 루소, 바이런 등의 저작을 섭렵했다. 정규 교육 과정의 틀에 박히지 않은 이 독학의 시간은 그에게 독창적이고 화려한 수사학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명문교 인맥이 전무하다는 소외감과 이를 가리기 위한 과도한 허세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사 계급의 상징인 '공립학교-옥스브리지' 라인을 타지 못했다는 열등감은 그를 더욱 화려한 옷차림과 튀는 행동으로 내몰았고, 이는 청년기 댄디즘(Dandyism)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당시 영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세파르딤과 중동부 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이었다. 디즈레일리 가문은 스스로를 세파르딤의 후예라고 굳게 믿었으며, 이는 훗날 벤저민이 자신의 혈통을 '유럽의 어떤 귀족보다도 오래된 고귀한 혈통'이라며 과시하는 근거가 된다.[7]
아버지 아이작 디즈레일리는 가업인 금융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평생을 서재에 파묻혀 지낸 문학 연구가였다. 그는 《문학의 일화(Curiosities of Literature)》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정도로 학구적인 인물이었으나, 종교적 신념은 그리 깊지 않았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향은 어린 벤저민에게 종교적 도그마보다는 문학적 상상력과 냉소적인 지성을 먼저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벤저민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고작 12살이었던 1817년에 벌어졌다. 당시 아버지 아이작은 출석하던 '베비스 마크스(Bevis Marks)' 유대교 회당의 간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받자, 격분한 나머지 유대교 공동체와 완전히 결별해 버린다.
이때 아이작의 친구였던 역사학자 샤론 터너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아이작은 이를 받아들여 1817년 7월 31일, 벤저민을 포함한 네 자녀를 영국 국교회에서 세례받게 한다.
이 사건은 영국 정치사에서 "신의 한 수"라 불릴 만큼 중요하다. 당시 영국법상 유대교도는 하원의원이 될 수 없었으나, 유대인 혈통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받은 자는 법적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그의 정적들은 그를 '개종한 유대인'이라며 공격했지만, 만약 이때의 세례가 없었다면 디즈레일리는 총리는커녕 의회 문턱조차 밟지 못했을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이튼 칼리지나 해로우 학교 같은 당시 엘리트 코스의 필수 관문을 거치지 않았다. 그는 블랙히스에 있는 작은 사립학교를 거쳐 월섬스토의 하이엄 홀 학교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그는 고전 문학에는 두각을 나타냈으나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둔 그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자아를 형성했다. 이 시기 그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독서에 몰입하며 볼테르, 루소, 바이런 등의 저작을 섭렵했다. 정규 교육 과정의 틀에 박히지 않은 이 독학의 시간은 그에게 독창적이고 화려한 수사학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명문교 인맥이 전무하다는 소외감과 이를 가리기 위한 과도한 허세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사 계급의 상징인 '공립학교-옥스브리지' 라인을 타지 못했다는 열등감은 그를 더욱 화려한 옷차림과 튀는 행동으로 내몰았고, 이는 청년기 댄디즘(Dandyism)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4.2. 청년기의 투기와 실패[편집]
20대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전형적인 '영앤리치'를 꿈꾸던 무리한 투자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리치는커녕, 평생을 따라다니는 '빚의 굴레'에 발을 들인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사회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 열풍과 함께 그 지역의 은광 사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20세의 젊고 혈기 왕성한 디즈레일리는 이 '거품'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원(Articled Clerk)으로 일하며 법조계의 지루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남미 광산 주식이었다. 그는 단순히 투자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투기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홍보 팜플렛을 직접 작성하며 투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8] 이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의 지인이자 유력한 금융가였던 J.D. 파울스(J.D. Powles)와 손을 잡고 수천 파운드의 주식을 신용으로 사들였다.
그러나 1825년, 영국의 금융 시장을 뒤흔든 '1825년 공황'이 닥치면서 거품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주가는 폭락했고, 디즈레일리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7,000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게 된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중산층 가구 1년 생활비가 200~300파운드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지금의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 부채는 그가 70대가 되어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까지도 완벽하게 청산되지 않아, 평생 채권자들의 추적을 피하거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텨야 했다.]
이 실패는 디즈레일리에게 심각한 신경쇠약을 안겨주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무력감에 빠져 지냈는데, 이 시기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서서 보여준 집요함과 냉소적인 현실 감각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돈이 급해진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문학계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무리수를 던지는데, 바로 일간지 **《리프리젠터티브(The Representative)》**의 창간이었다. 그는 출판업자 존 머레이(John Murray)를 설득해 당시 최고의 신문인 더 타임스에 대적할 매체를 만들자고 부추겼다. 그러나 신문은 창간 반년 만에 막대한 적자를 내며 폐간되었고, 디즈레일리는 존 머레이와도 절교하며 자신의 사회적 평판에 먹칠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디즈레일리를 요약하자면, '세상을 우습게 봤던 천재 청년이 현실이라는 벽에 머리를 제대로 박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건들로 인해 런던 금융가와 사교계에서 "믿지 못할 사기꾼 기질이 있는 청년"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이는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특히 정적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이러한 도덕적 결함을 평생 비난하며 그를 '사기꾼'이라 칭하곤 했다.]
실패는 그에게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가르쳐주었지만, 동시에 '돈'과 '평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게 만든 뼈아픈 교훈이었다. 그는 이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의 데뷔작 《비비언 그레이》이다. 즉, 그의 정치적 야망은 역설적으로 '파산 면치기'라는 매우 세속적인 이유에서 그 동력을 얻기 시작한 셈이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원(Articled Clerk)으로 일하며 법조계의 지루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남미 광산 주식이었다. 그는 단순히 투자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투기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홍보 팜플렛을 직접 작성하며 투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8] 이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의 지인이자 유력한 금융가였던 J.D. 파울스(J.D. Powles)와 손을 잡고 수천 파운드의 주식을 신용으로 사들였다.
그러나 1825년, 영국의 금융 시장을 뒤흔든 '1825년 공황'이 닥치면서 거품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주가는 폭락했고, 디즈레일리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7,000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게 된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중산층 가구 1년 생활비가 200~300파운드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지금의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 부채는 그가 70대가 되어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까지도 완벽하게 청산되지 않아, 평생 채권자들의 추적을 피하거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텨야 했다.]
이 실패는 디즈레일리에게 심각한 신경쇠약을 안겨주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무력감에 빠져 지냈는데, 이 시기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서서 보여준 집요함과 냉소적인 현실 감각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돈이 급해진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문학계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무리수를 던지는데, 바로 일간지 **《리프리젠터티브(The Representative)》**의 창간이었다. 그는 출판업자 존 머레이(John Murray)를 설득해 당시 최고의 신문인 더 타임스에 대적할 매체를 만들자고 부추겼다. 그러나 신문은 창간 반년 만에 막대한 적자를 내며 폐간되었고, 디즈레일리는 존 머레이와도 절교하며 자신의 사회적 평판에 먹칠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디즈레일리를 요약하자면, '세상을 우습게 봤던 천재 청년이 현실이라는 벽에 머리를 제대로 박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건들로 인해 런던 금융가와 사교계에서 "믿지 못할 사기꾼 기질이 있는 청년"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이는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특히 정적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이러한 도덕적 결함을 평생 비난하며 그를 '사기꾼'이라 칭하곤 했다.]
실패는 그에게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가르쳐주었지만, 동시에 '돈'과 '평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게 만든 뼈아픈 교훈이었다. 그는 이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의 데뷔작 《비비언 그레이》이다. 즉, 그의 정치적 야망은 역설적으로 '파산 면치기'라는 매우 세속적인 이유에서 그 동력을 얻기 시작한 셈이다.
4.3. 문학 데뷔[편집]
법조계 진출 실패와 남미 광산 투기라는 뼈아픈 실책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그는, 이 지옥 같은 채무의 늪에서 탈출할 유일한 비상구로 '문학'을 선택한다. 당시 영국 사교계에서는 상류층의 화려한 삶과 그 이면의 추잡한 권력 투쟁을 다룬 이른바 '은식기 소설(Silver-fork novels)'이 대유행하고 있었는데, 디즈레일리는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하기로 마음먹는다.
1826년, 그는 자신의 첫 소설인 《비비언 그레이(Vivian Grey)》를 익명으로 발표한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소설의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다. 주인공 비비언 그레이는 천재적인 두뇌와 화려한 언변을 가졌으나 가문도 돈도 없는 청년으로, 오로지 자신의 매력과 간계만으로 고위 정치인들을 조종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려 한다. 이는 사실상 디즈레일리 자신이 꿈꾸던 야망을 소설이라는 틀을 빌려 투사한 것에 가까웠다.
당시 출판업자 헨리 콜번(Henry Colburn)은 이 소설을 홍보하면서 "실제 사교계 거물들이 익명으로 쓴 폭로작"이라는 식의 노이즈 마케팅을 펼쳤다.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실제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찾느라 혈안이 되었고, 작품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디즈레일리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작가가 상류층 인사가 아닌,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유대인 청년 벤저민 디즈레일리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된다. 사교계는 "애송이 유대인이 우리를 조롱했다"며 분노했고, 비평가들은 "무례하고 건방진 사기꾼의 낙서"라며 무자비한 인신공격성 혹평을 쏟아냈다. 특히 주인공 비비언이 결국 자신의 음모에 휘말려 파멸하는 결말은, 마치 훗날 디즈레일리가 겪게 될 수많은 정치적 부침을 예견하는 듯한 묘한 뒷맛을 남겼다.[9]
이 시기 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이른바 '댄디즘(Dandyism)'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가꾸었다. 화려한 꽃무늬 자수가 새겨진 조끼,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장화, 손가락마다 끼워진 보석 반지, 그리고 정성스럽게 기름을 발라 꼬아 올린 검은 곱슬머리까지. 그는 어딜 가나 시선을 끌었고, 그 시선이 조롱이든 감탄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 무관심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적 데뷔와 청년기의 기행은 그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긍정적으로는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강렬한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었으며, 부정적으로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허영을 쫓는 기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평생 붙여주었다. 훗날 그가 하원에서 진지한 정책을 발표할 때조차 동료 의원들이 그를 "소설가 나부랭이"라며 비웃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비비언 그레이》 시절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에게 펜은 칼보다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다. 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영국의 미래를 논했고, 귀족 계급의 타락을 비판했으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수사학을 연마했다. 《비비언 그레이》는 비록 시작은 미약하고 끝은 창대하지 못했을지언정, 훗날 대영제국의 총리가 될 남자가 세상을 향해 내던진 첫 번째 도전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 시기 그가 쓴 다른 소설들인 《젊은 공작(The Young Duke)》이나 《콘타리니 플레밍(Contarini Fleming)》 등도 주제는 비슷했다. 주로 예술적 기질을 가진 청년이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성장하는 내용인데, 사실상 디즈레일리의 자서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특히 《콘타리니 플레밍》에 대해서는 대문호 괴테가 "작가의 재능이 돋보인다"며 찬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비평가들의 혹평과는 별개로 그의 문학적 재능 자체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10]
결국 이 '문학적 댄디' 시절의 경험은 디즈레일리에게 정치란 단순히 법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서사(Narrative)'를 대중에게 들려주는 예술이라는 통찰을 안겨주었다. 이는 훗날 그가 감성적인 연설과 화려한 상징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1826년, 그는 자신의 첫 소설인 《비비언 그레이(Vivian Grey)》를 익명으로 발표한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소설의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다. 주인공 비비언 그레이는 천재적인 두뇌와 화려한 언변을 가졌으나 가문도 돈도 없는 청년으로, 오로지 자신의 매력과 간계만으로 고위 정치인들을 조종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려 한다. 이는 사실상 디즈레일리 자신이 꿈꾸던 야망을 소설이라는 틀을 빌려 투사한 것에 가까웠다.
당시 출판업자 헨리 콜번(Henry Colburn)은 이 소설을 홍보하면서 "실제 사교계 거물들이 익명으로 쓴 폭로작"이라는 식의 노이즈 마케팅을 펼쳤다.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실제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찾느라 혈안이 되었고, 작품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디즈레일리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작가가 상류층 인사가 아닌,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유대인 청년 벤저민 디즈레일리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된다. 사교계는 "애송이 유대인이 우리를 조롱했다"며 분노했고, 비평가들은 "무례하고 건방진 사기꾼의 낙서"라며 무자비한 인신공격성 혹평을 쏟아냈다. 특히 주인공 비비언이 결국 자신의 음모에 휘말려 파멸하는 결말은, 마치 훗날 디즈레일리가 겪게 될 수많은 정치적 부침을 예견하는 듯한 묘한 뒷맛을 남겼다.[9]
이 시기 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이른바 '댄디즘(Dandyism)'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가꾸었다. 화려한 꽃무늬 자수가 새겨진 조끼,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장화, 손가락마다 끼워진 보석 반지, 그리고 정성스럽게 기름을 발라 꼬아 올린 검은 곱슬머리까지. 그는 어딜 가나 시선을 끌었고, 그 시선이 조롱이든 감탄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 무관심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적 데뷔와 청년기의 기행은 그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긍정적으로는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강렬한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었으며, 부정적으로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허영을 쫓는 기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평생 붙여주었다. 훗날 그가 하원에서 진지한 정책을 발표할 때조차 동료 의원들이 그를 "소설가 나부랭이"라며 비웃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비비언 그레이》 시절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에게 펜은 칼보다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다. 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영국의 미래를 논했고, 귀족 계급의 타락을 비판했으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수사학을 연마했다. 《비비언 그레이》는 비록 시작은 미약하고 끝은 창대하지 못했을지언정, 훗날 대영제국의 총리가 될 남자가 세상을 향해 내던진 첫 번째 도전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 시기 그가 쓴 다른 소설들인 《젊은 공작(The Young Duke)》이나 《콘타리니 플레밍(Contarini Fleming)》 등도 주제는 비슷했다. 주로 예술적 기질을 가진 청년이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성장하는 내용인데, 사실상 디즈레일리의 자서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특히 《콘타리니 플레밍》에 대해서는 대문호 괴테가 "작가의 재능이 돋보인다"며 찬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비평가들의 혹평과는 별개로 그의 문학적 재능 자체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10]
결국 이 '문학적 댄디' 시절의 경험은 디즈레일리에게 정치란 단순히 법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서사(Narrative)'를 대중에게 들려주는 예술이라는 통찰을 안겨주었다. 이는 훗날 그가 감성적인 연설과 화려한 상징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4.4. 동방 여행[편집]
보통 영국의 엘리트들이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돌며 교양을 쌓는 '그랜드 투어'에 나설 때, 디즈레일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수를 틀었다. 1830년 6월, 그는 친구 윌리엄 메러디스와 함께 지중해를 건너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로 향하는 대장정에 올랐다. 이 여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당시 디즈레일리는 《비비언 그레이》 이후의 문학적 침체기와 막대한 부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인해 일종의 정신적 붕괴 상태에 직면해 있었고, 이 '동방(The East)'으로의 탈출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된다.
디즈레일리는 지브롤터와 몰타를 거쳐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대재상(Grand Vizier) 레쉬드 파샤를 접견하게 되는데, 서구의 정형화된 예법과는 다른 동방 특유의 화려함, 권위주의, 그리고 정적인 질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알바니아 군인들의 복장을 "금과 은으로 수놓아진 눈부신 예술품"이라 묘사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훗날 그가 영국 정계에서 보여준 화려한 패션 감각과 '제국주의적 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남들이 오스만을 "유럽의 환자"라고 조롱하며 멸시할 때, 디즈레일리는 그들의 문화적 깊이와 통치 체제 속에 숨겨진 강력한 카리스마를 포착해 낸 것이다.
이 여행의 정점은 단연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유대인 혈통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했던 그에게 예루살렘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그는 통곡의 벽과 성묘 교회를 동시에 방문하며, 유대교와 기독교가 뿌리를 공유하는 '영적 연속성'을 몸소 체험했다.[11]
예루살렘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혈통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유럽의 귀족들이 아직 숲속에서 짐승을 쫓던 시절에 유대인들은 이미 고도의 문명과 법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평생 간직하게 된다. 이 시기 그가 느낀 감정들은 훗날 그가 보수당 내의 편견에 맞서 유대인 참정권을 지지하거나, 대외 정책에서 유대계 금융 자본(로스차일드 등)과 긴밀히 협력하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이 1년간의 여행은 훗날 디즈레일리가 총리가 되었을 때 펼친 대외 정책의 설계도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이 남하하여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로 나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는데, 이는 그가 여행 중에 본 오스만의 전략적 가치와 문화적 생명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친(親) 투르크 노선의 확립은 오스만 제국이 비록 부패했을지언정 영국의 인도 항로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벽'이라고 보았다.
슬라브 민족주의를 앞세운 러시아의 확장을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 계기가 이 시기의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런던의 좁은 의사당 안에 갇혀 있던 그의 시야는 이 여행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아우르는 '세계 제국(Global Empire)'으로 확장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디즈레일리는 더 이상 방황하는 청년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동방의 신비주의와 서구의 의회 정치를 결합할 준비가 된, 야망에 찬 정치가로 변모해 있었다. 다만 여행 중 약혼자였던 메러디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생사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닫고 더욱 정치적 성공에 집착하게 되는 어두운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디즈레일리는 지브롤터와 몰타를 거쳐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대재상(Grand Vizier) 레쉬드 파샤를 접견하게 되는데, 서구의 정형화된 예법과는 다른 동방 특유의 화려함, 권위주의, 그리고 정적인 질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알바니아 군인들의 복장을 "금과 은으로 수놓아진 눈부신 예술품"이라 묘사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훗날 그가 영국 정계에서 보여준 화려한 패션 감각과 '제국주의적 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남들이 오스만을 "유럽의 환자"라고 조롱하며 멸시할 때, 디즈레일리는 그들의 문화적 깊이와 통치 체제 속에 숨겨진 강력한 카리스마를 포착해 낸 것이다.
이 여행의 정점은 단연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유대인 혈통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했던 그에게 예루살렘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그는 통곡의 벽과 성묘 교회를 동시에 방문하며, 유대교와 기독교가 뿌리를 공유하는 '영적 연속성'을 몸소 체험했다.[11]
예루살렘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혈통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유럽의 귀족들이 아직 숲속에서 짐승을 쫓던 시절에 유대인들은 이미 고도의 문명과 법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평생 간직하게 된다. 이 시기 그가 느낀 감정들은 훗날 그가 보수당 내의 편견에 맞서 유대인 참정권을 지지하거나, 대외 정책에서 유대계 금융 자본(로스차일드 등)과 긴밀히 협력하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이 1년간의 여행은 훗날 디즈레일리가 총리가 되었을 때 펼친 대외 정책의 설계도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이 남하하여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로 나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는데, 이는 그가 여행 중에 본 오스만의 전략적 가치와 문화적 생명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친(親) 투르크 노선의 확립은 오스만 제국이 비록 부패했을지언정 영국의 인도 항로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벽'이라고 보았다.
슬라브 민족주의를 앞세운 러시아의 확장을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 계기가 이 시기의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런던의 좁은 의사당 안에 갇혀 있던 그의 시야는 이 여행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아우르는 '세계 제국(Global Empire)'으로 확장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디즈레일리는 더 이상 방황하는 청년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동방의 신비주의와 서구의 의회 정치를 결합할 준비가 된, 야망에 찬 정치가로 변모해 있었다. 다만 여행 중 약혼자였던 메러디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생사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닫고 더욱 정치적 성공에 집착하게 되는 어두운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4.5. 네 번의 낙선[편집]
디즈레일리의 초기 정계 도전사는 한마디로 '처절한 삽질의 연속'이자 '생존을 위한 카멜레온식 변신'의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보수주의의 거두' 디즈레일리와는 달리, 1830년대 초반의 그는 이념적 정체성보다는 일단 '당선'이라는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
디즈레일리가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진 곳은 하이 위컴(High Wycombe) 선거구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직전과 직후에 열린 두 번의 보궐 및 총선에서 그는 무소속 급진파(Radical)를 자처하며 등장했다. 당시 그가 내세운 공약은 비밀투표제 실시와 연례 의회 개최 등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좌파적 의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진심으로 급진주의자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휘그당(Whig, 현재 영국의 자유당 전신)의 독주를 막기 위해 토리당(Tory, 보수당의 전신) 지지자들과 급진파의 표를 동시에 흡수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계산이었다.[ 실제로 그는 당시 토리당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린드허스트 경과 교류하면서도, 겉으로는 급진파의 우두머리였던 대니얼 오코넬의 추천서를 구걸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과는 참담한 낙선이었다. 하이 위컴에서의 두 차례 패배 이후, 그는 1835년 초 또다시 같은 곳에서 도전했으나 세 번째 고배를 마셨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는 지역구민들에게 "나는 어떤 정당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소리쳤지만, 대중의 눈에는 그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야심가'로 비칠 뿐이었다.
연이은 낙선으로 인해 막대한 선거 자금을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디즈레일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1835년 4월, 톤턴(Taunton)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그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보수당(Tory) 소속임을 선언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급진파의 공약을 읊조리던 입에서 "보수주의야말로 영국의 진정한 전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수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우클릭 행보는 당연히 정적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특히 과거 그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던 아일랜드의 정치 지도자 대니얼 오코넬은 디즈레일리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강도의 후손"이라는 희대의 패드립성 비난을 퍼부었다.[ 오코넬은 디즈레일리의 유대인 혈통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며 그를 '배신자'라고 몰아세웠다. 이에 분노한 디즈레일리는 오코넬의 아들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톤턴에서의 네 번째 도전 역시 낙선으로 끝났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라는 이름을 영국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네 번의 낙선' 기간은 디즈레일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영국 정계에서 무소속이나 어설픈 제3지대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반드시 강력한 정당의 기반이 필요하다는 사실. 둘째, 자신의 유대인 혈통과 화려한 배경은 평생 공격받을 약점인 동시에, 이를 압도할 만한 '수사학적 타격감'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디즈레일리가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진 곳은 하이 위컴(High Wycombe) 선거구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직전과 직후에 열린 두 번의 보궐 및 총선에서 그는 무소속 급진파(Radical)를 자처하며 등장했다. 당시 그가 내세운 공약은 비밀투표제 실시와 연례 의회 개최 등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좌파적 의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진심으로 급진주의자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휘그당(Whig, 현재 영국의 자유당 전신)의 독주를 막기 위해 토리당(Tory, 보수당의 전신) 지지자들과 급진파의 표를 동시에 흡수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계산이었다.[ 실제로 그는 당시 토리당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린드허스트 경과 교류하면서도, 겉으로는 급진파의 우두머리였던 대니얼 오코넬의 추천서를 구걸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과는 참담한 낙선이었다. 하이 위컴에서의 두 차례 패배 이후, 그는 1835년 초 또다시 같은 곳에서 도전했으나 세 번째 고배를 마셨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는 지역구민들에게 "나는 어떤 정당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소리쳤지만, 대중의 눈에는 그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야심가'로 비칠 뿐이었다.
연이은 낙선으로 인해 막대한 선거 자금을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디즈레일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1835년 4월, 톤턴(Taunton)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그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보수당(Tory) 소속임을 선언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급진파의 공약을 읊조리던 입에서 "보수주의야말로 영국의 진정한 전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수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우클릭 행보는 당연히 정적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특히 과거 그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던 아일랜드의 정치 지도자 대니얼 오코넬은 디즈레일리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강도의 후손"이라는 희대의 패드립성 비난을 퍼부었다.[ 오코넬은 디즈레일리의 유대인 혈통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며 그를 '배신자'라고 몰아세웠다. 이에 분노한 디즈레일리는 오코넬의 아들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톤턴에서의 네 번째 도전 역시 낙선으로 끝났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라는 이름을 영국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네 번의 낙선' 기간은 디즈레일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영국 정계에서 무소속이나 어설픈 제3지대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반드시 강력한 정당의 기반이 필요하다는 사실. 둘째, 자신의 유대인 혈통과 화려한 배경은 평생 공격받을 약점인 동시에, 이를 압도할 만한 '수사학적 타격감'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4.6. 하원 입성[편집]
1837년은 디즈레일리의 인생에서 거대한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해 6월, 윌리엄 4세가 서거하고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규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앞선 네 번의 낙선으로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정계의 비웃음을 샀던 디즈레일리에게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정치적 생명'을 건 마지막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디즈레일리는 켄트주의 메이드스톤(Maidstone) 선거구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이 지역은 두 명의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는데, 디즈레일리는 현직 의원이자 부유한 자산가였던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12]와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선거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흙탕 싸움이었다. 상대 진영인 자유파(Liberal)는 디즈레일리의 유대인 혈통과 엄청난 부채 문제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길거리에는 "유대인 사기꾼을 몰아내자"는 벽보가 붙었고, 유세장에서는 그를 향해 "Old Clothes!"[13]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과 화려한 언변으로 맞섰다. 결과는 윈덤 루이스에 이은 2위 당선.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영국 하원 입성에 성공한다.
1837년 12월 7일, 디즈레일리는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하원 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당시 하원의 관례상 초선 의원의 첫 연설(Maiden Speech)은 가급적 짧고 겸손하게, 그리고 논쟁적이지 않은 주제로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이방인' 디즈레일리에게 그런 미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지도자 대니얼 오코넬을 공격하는 것을 연설 주제로 삼았다. 오코넬과는 과거 결투 직전까지 갔던 악연이 있었기에, 디즈레일리는 이 기회에 그를 무너뜨려 보수당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려 했다.
문제는 그의 '비주얼'과 '태도'였다. 이날 디즈레일리는 병아리색 꽃무늬 조끼에 금색 단추가 달린 녹색 코트, 손가락마다 끼워진 화려한 반지, 그리고 기름을 발라 정교하게 꼬아 올린 검은 머리칼을 뽐내며 등장했다. 전형적인 컨트리 젠틀먼들이 주류였던 하원 의원들에게 그의 모습은 정치가가 아니라 '삼류 극단의 광대'처럼 보였다.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회의장은 폭소와 야유의 도가니가 되었다. 디즈레일리가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아일랜드의 신성한 권리" 운운하는 수사학을 쏟아내자, 반대편 의석의 자유파 의원들은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며 연설을 방해했다.
디즈레일리는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여러 번 인생을 바닥에서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비웃음을 사고 있지만..."이라며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소음은 더욱 커졌다. 의장조차 장내를 진정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준비한 연설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단상을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기 직전, 그는 하원 역사에 남을 명대사를 사자후처럼 내뱉었다.
디즈레일리는 켄트주의 메이드스톤(Maidstone) 선거구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이 지역은 두 명의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는데, 디즈레일리는 현직 의원이자 부유한 자산가였던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12]와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선거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흙탕 싸움이었다. 상대 진영인 자유파(Liberal)는 디즈레일리의 유대인 혈통과 엄청난 부채 문제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길거리에는 "유대인 사기꾼을 몰아내자"는 벽보가 붙었고, 유세장에서는 그를 향해 "Old Clothes!"[13]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과 화려한 언변으로 맞섰다. 결과는 윈덤 루이스에 이은 2위 당선.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영국 하원 입성에 성공한다.
1837년 12월 7일, 디즈레일리는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하원 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당시 하원의 관례상 초선 의원의 첫 연설(Maiden Speech)은 가급적 짧고 겸손하게, 그리고 논쟁적이지 않은 주제로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이방인' 디즈레일리에게 그런 미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지도자 대니얼 오코넬을 공격하는 것을 연설 주제로 삼았다. 오코넬과는 과거 결투 직전까지 갔던 악연이 있었기에, 디즈레일리는 이 기회에 그를 무너뜨려 보수당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려 했다.
문제는 그의 '비주얼'과 '태도'였다. 이날 디즈레일리는 병아리색 꽃무늬 조끼에 금색 단추가 달린 녹색 코트, 손가락마다 끼워진 화려한 반지, 그리고 기름을 발라 정교하게 꼬아 올린 검은 머리칼을 뽐내며 등장했다. 전형적인 컨트리 젠틀먼들이 주류였던 하원 의원들에게 그의 모습은 정치가가 아니라 '삼류 극단의 광대'처럼 보였다.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회의장은 폭소와 야유의 도가니가 되었다. 디즈레일리가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아일랜드의 신성한 권리" 운운하는 수사학을 쏟아내자, 반대편 의석의 자유파 의원들은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며 연설을 방해했다.
디즈레일리는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여러 번 인생을 바닥에서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비웃음을 사고 있지만..."이라며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소음은 더욱 커졌다. 의장조차 장내를 진정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준비한 연설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단상을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기 직전, 그는 하원 역사에 남을 명대사를 사자후처럼 내뱉었다.
"나는 지금 여러분의 비웃음을 사며 자리에 앉지만,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여러분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날이 올 것입니다!"(I sit down now, but the time will come when you will hear me.)[14]
이 처녀 연설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실패였다. 다음 날 언론들은 "자칭 천재라는 유대인 청년의 몰락"이라며 조롱 섞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실패를 철저히 분석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패의 원인은 내 내용이 아니라 형식(Style)에 있었다. 의회는 시적인 웅변보다 사실과 통계에 기반한 논리를 선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이후 몇 달 동안 의회에서 입을 다물고 선배 의원들의 화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이전의 화려함을 걷어내고 냉철하고 논리적인 연설가로 재탄생하여 복귀한다. 1837년의 굴욕은 디즈레일리라는 원석이 '영국 정치의 거물'로 깎여나가는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4.7. 젊은 영국 운동[편집]
1841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고 로버트 필이 총리직에 올랐을 때, 디즈레일리는 당연히 자신이 내각의 일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명예를 지켜달라"며 노골적으로 관직을 갈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당시 필의 눈에 디즈레일리는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뢰할 수 없는 '유대인 모험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15]
이러한 개인적인 모멸감은 디즈레일리를 당내 비판 세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머물지 않고, 이를 거대한 정치 철학적 담론으로 승화시키는 비범함을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젊은 영국(Young England)' 운동이다.
이 운동은 디즈레일리를 중심으로 조지 스마이스(George Smythe), 로드 존 매너스(Lord John Manners) 등 이튼과 케임브리지 출신의 젊은 보수당 귀족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가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부를 쌓은 '신흥 중산층(Bourgeoisie)'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과거 봉건제 하에서 존재했던 계급 간의 유대감과 상호 책임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를 "현금 지불만이 유일한 관계가 된 시대"라고 비판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를 그저 소모품으로 취급했고, 노동자들은 빈민가로 내몰려 처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젊은 영국 운동가들은 이러한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의 회귀'를 제안했다. 물론 이것은 중세 시대로 물리적인 시간을 되돌리자는 의미가 아니라, '고귀한 자의 의무(Noblesse Oblige)'를 복원하자는 낭만주의적 반동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를 지닌다.
이러한 개인적인 모멸감은 디즈레일리를 당내 비판 세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머물지 않고, 이를 거대한 정치 철학적 담론으로 승화시키는 비범함을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젊은 영국(Young England)' 운동이다.
이 운동은 디즈레일리를 중심으로 조지 스마이스(George Smythe), 로드 존 매너스(Lord John Manners) 등 이튼과 케임브리지 출신의 젊은 보수당 귀족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가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부를 쌓은 '신흥 중산층(Bourgeoisie)'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과거 봉건제 하에서 존재했던 계급 간의 유대감과 상호 책임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를 "현금 지불만이 유일한 관계가 된 시대"라고 비판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를 그저 소모품으로 취급했고, 노동자들은 빈민가로 내몰려 처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젊은 영국 운동가들은 이러한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의 회귀'를 제안했다. 물론 이것은 중세 시대로 물리적인 시간을 되돌리자는 의미가 아니라, '고귀한 자의 의무(Noblesse Oblige)'를 복원하자는 낭만주의적 반동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를 지닌다.
군주권의 강화: 정쟁에 휘말리는 의회보다,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군주가 진정한 국부(國父)로서 기능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 회복: 성공회가 단순히 특권층의 종교가 아니라, 빈민을 구제하고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귀족의 책임감: 지주 계급은 자신의 영지에 속한 이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하며, 노동계급은 이들을 신뢰하고 따르는 유기적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대중의 여가와 권리: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축제와 운동,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주어야 한다. |
사실 이 운동은 당대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상류층 청년들의 고상한 취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화이트 컬러 조끼를 입고 고성(古城)에서 중세 풍의 잔치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은 냉혹한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에게는 괴리감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즈레일리에게 이 운동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보수당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 즉 '민중과 함께하는 보수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로버트 필의 보수주의를 "원칙 없는 관리자의 정치"라고 깎아내렸다. 필이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할 때,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토지 귀족과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훗날 그가 집권했을 때 펼치게 될 '일국 보수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젊은 영국' 운동은 1845년경 핵심 멤버들 사이의 분열과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와해되지만, 디즈레일리는 이 운동을 통해 얻은 영감과 대중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특히 이 시기에 집필된 소설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그의 정치적 선언문으로서 영국 전역에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디즈레일리가 느꼈던 감정은 그의 수첩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구해야 한다. 전통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조는 훗날 그가 빅토리아 여왕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합리성과 수치만을 따지던 글래드스턴과 달리, 디즈레일리는 군주제의 신비로움과 제국의 영광이라는 '이미지'를 정치에 투영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젊은 영국'은 실패한 운동일지 몰라도, 디즈레일리라는 정치 거물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4.8. 펜으로 정치를 하다[편집]
1840년대 초반, 디즈레일리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로버트 필의 내각 참여 거부로 인해 하원 내에서의 입지는 좁아졌고, '젊은 영국(Young England)' 운동은 아직 의회 내 주류 세력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이때 디즈레일리가 선택한 전략은 다시 '펜'을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 시절의 《비비언 그레이》가 단순히 사교계의 주목을 받기 위한 화려한 '댄디즘'의 산물이었다면, 이른바 '정치 3부작(Young England Trilogy)'으로 불리는 《코닝즈비(Coningsby)》, 《시빌(Sybil)》, 《탠크레드(Tancred)》는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프로파간다이자 자신의 사상적 근간을 대중에게 설파하기 위한 일종의 '매니페스토'였다.
당대 영국은 산업 혁명의 가속화로 인해 사회 구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고, 전통적인 토지 귀족 중심의 보수주의는 신흥 자본가 계급(공장주)의 '공리주의'와 '자유무역' 공세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단순히 의회 연설만으로는 이 거대한 담론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독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보수당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 즉, 귀족의 의무와 민중의 복지가 결합된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영국 문학사에서도 '정치 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16]
1844년 발표된 《코닝즈비(Coningsby; or, The New Generation)》는 '젊은 영국' 운동의 이론적 교본과도 같았다. 소설의 주인공 해리 코닝즈비는 명문가 출신의 청년으로,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이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꿈꾸는 인물이다. 여기서 디즈레일리는 당시 로버트 필이 이끌던 보수당을 향해 "원칙 없는 보수주의"라고 맹비난을 퍼붓는다.
디즈레일리의 논리는 명확했다. 당시 보수당(Tory)은 단순히 현상을 유지(Status Quo)하는 데 급급할 뿐, 진정한 영국의 전통 국왕의 권위, 교회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하층민을 보호하는 귀족의 책임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인 유대인 대부 '시도니아(Sidonia)'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게 하는데, 이는 디즈레일리 본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했다. 시도니아는 "국가는 제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전통으로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물질주의에 찌든 영국 사회에 정신적 각성을 촉구한다. 이 소설은 발매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보수당 내부의 소장파 의원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디즈레일리의 문학적 성취이자 정치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시빌, 혹은 두 개의 국가(Sybil, or The Two Nations)》(1845)는 그가 단순한 권력욕에 찌든 정치가가 아니라, 산업혁명기 영국의 구조적 모순을 꿰뚫어 본 예리한 관찰자였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부제인 '두 개의 국가(The Two Nations)'는 현대 정치학에서도 여전히 인용되는 유명한 개념이다. 디즈레일리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당시 영국의 비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당대 영국은 산업 혁명의 가속화로 인해 사회 구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고, 전통적인 토지 귀족 중심의 보수주의는 신흥 자본가 계급(공장주)의 '공리주의'와 '자유무역' 공세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단순히 의회 연설만으로는 이 거대한 담론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독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보수당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 즉, 귀족의 의무와 민중의 복지가 결합된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영국 문학사에서도 '정치 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16]
1844년 발표된 《코닝즈비(Coningsby; or, The New Generation)》는 '젊은 영국' 운동의 이론적 교본과도 같았다. 소설의 주인공 해리 코닝즈비는 명문가 출신의 청년으로,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이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꿈꾸는 인물이다. 여기서 디즈레일리는 당시 로버트 필이 이끌던 보수당을 향해 "원칙 없는 보수주의"라고 맹비난을 퍼붓는다.
디즈레일리의 논리는 명확했다. 당시 보수당(Tory)은 단순히 현상을 유지(Status Quo)하는 데 급급할 뿐, 진정한 영국의 전통 국왕의 권위, 교회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하층민을 보호하는 귀족의 책임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인 유대인 대부 '시도니아(Sidonia)'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게 하는데, 이는 디즈레일리 본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했다. 시도니아는 "국가는 제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전통으로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물질주의에 찌든 영국 사회에 정신적 각성을 촉구한다. 이 소설은 발매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보수당 내부의 소장파 의원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디즈레일리의 문학적 성취이자 정치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시빌, 혹은 두 개의 국가(Sybil, or The Two Nations)》(1845)는 그가 단순한 권력욕에 찌든 정치가가 아니라, 산업혁명기 영국의 구조적 모순을 꿰뚫어 본 예리한 관찰자였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부제인 '두 개의 국가(The Two Nations)'는 현대 정치학에서도 여전히 인용되는 유명한 개념이다. 디즈레일리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당시 영국의 비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폐하, 이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교류도, 공감도 없으며 서로의 습관과 생각, 감정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처럼, 혹은 서로 다른 지대에서 자라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음식을 먹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서로 다른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바로 부자(The Rich)와 빈자(The Poor)라는 두 국가 말입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공동체가 파괴되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심연이 깊어진 영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단순히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계급 간의 단절이 결국 국가 전체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7]
디즈레일리는 소설 작성을 위해 공장 지대와 빈민가를 직접 시찰하는 등 철저한 현장 조사를 거쳤다. 덕분에 《시빌》에 묘사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당대 어떤 통계 자료보다도 생생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는 불결한 주거 환경, 아동 노동, 그리고 노동자를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공장주들의 탐욕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특이한 점은 그가 노동자들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었던 '차티즘'에 대해 의외로 온건하고 이해심 깊은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본래 사악해서가 아니라, 상층 계급이 자신들의 의무(Noblesse Oblige)를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귀족들이 하층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중세적 유대감을 잃어버리고 오직 이윤 추구에만 매몰된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에 물든 결과라는 것이다.
소설의 여주인공 '시빌'은 차티스트 지도자의 딸로, 인민의 고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반면 남주인공 '에그레몽'은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귀족 청년이다. 이들의 결합은 곧 디즈레일리가 꿈꿨던 사회적 화합을 상징한다.
여기서 디즈레일리는 독특한 정치적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부패한 의회 정치가와 탐욕스러운 중산층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강력한 왕권과 귀족의 리더십이 인민의 복지와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보수주의의 가치인 '전통'과 '질서'를 지키면서도, 그 질서의 혜택이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게 하는 '따뜻한 보수'의 원형이었다.
당대 평단은 이 소설을 두고 "정치 팜플렛을 소설로 위장시킨 것"이라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빌》은 대중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보수당 내 소장파 의원들에게 '우리가 나아갈 길은 단순한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민생 구제'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훗날 디즈레일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공중보건법, 노동조합법, 장인거주법 등 파격적인 사회 개혁 입법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다.[18] 《시빌》은 한 정치가의 문학적 외도 수준을 넘어, 영국 보수주의가 '가진 자들의 카르텔'에서 '국민 전체의 수호자'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된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3부작 중 가장 중요하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작품은 1845년에 나온《시빌(Sybil; or, The Two Nations)》이다. 이 소설의 부제인 '두 개의 국가'는 현대 영국 정치사에서도 끊임없이 인용되는 개념이다. 디즈레일리는 이 작품에서 영국이 단순히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지 않고 이해관계도 전혀 다른 '부자의 국가'와 '가난한 자의 국가'로 완전히 분열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맨체스터 등의 산업 도시를 직접 시찰하며 목격한 노동계급의 처참한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오물로 가득한 빈민가, 아동 노동, 그리고 공장주들의 가혹한 착취를 다루면서, 그는 이것이 방치될 경우 영국은 필연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의 해법은 사회주의나 급진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상류층이 그들의 특권에 따르는 의무(Noblesse Oblige)를 다할 때만 국가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가난한 자들이 차티즘(Chartism) 같은 과격 운동에 빠지지 않도록 보수적인 엘리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사회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일국 보수주의'의 맹아가 이 소설에서 완성된 것이다.[ 《시빌》에서 보여준 사회 비판적 시각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과 궤를 같이하지만, 해법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전통적 권위의 부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847년 작인 《탠크레드(Tancred; or, The New Crusade)》는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지만,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훨씬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주인공 탠크레드는 영적 허무주의에 빠진 영국을 구원할 답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난다. 디즈레일리는 이 소설을 통해 유럽 문명의 뿌리가 아시아(특히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있음을 강조하며, 영국이 단순한 섬나라를 넘어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탠크레드》는 문학적으로는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훗날 총리가 된 디즈레일리가 펼친 '제국주의 정책'과 '인도 황제 추대' 등의 외교적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영국이 물질적인 번영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그가 유대인 혈통으로서 가졌던 동양에 대한 동경과 영국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결합된 독특한 세계관의 발현이었다.
이 3부작의 성공은 디즈레일리를 단순한 '정치인'에서 '사상가'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그는 소설을 통해 보수당의 지지 기반을 전통적인 지주 계층에서 지적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일부까지 확장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그는 소설 속의 화려하고 냉소적인 문체를 의회 연설에 그대로 녹여내어, 자신을 무시하던 선배 의원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수사학을 완성했다.
물론 정적들은 그를 향해 "정치를 소설처럼 한다"거나 "진정성 없는 문학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지만, 디즈레일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펜을 통해 대중의 마음속에 '영국 보수주의의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3부작에서 정립된 사상은 훗날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공중보건법, 노동조합법 등 파격적인 사회 개혁 입법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영국 보수당이 '가난한 자를 살피는 따뜻한 보수'를 표방할 때마다 소환되는 불멸의 유산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보수당 내의 중도파 의원 모임인 'One Nation Group'은 디즈레일리의 이 시절 사상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4.9. 로버트 필과의 결별[편집]
1841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며 로버트 필이 총리에 취임했을 때, 디즈레일리는 드디어 자신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확신했다. 당시 그는 이미 하원에서 4년의 경험을 쌓았고, 당내에서 눈에 띄는 웅변가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필의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유세에 나섰으며,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활용해 당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필이 발표한 내각 명단에 디즈레일리의 이름은 없었다.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뿐만 아니라 19세기 영국 정치사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분기점이 된다. 디즈레일리는 필에게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으나, 필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필의 입장에서 디즈레일리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통 귀족 출신이 아닌 데다 부채 문제로 늘 구설에 올랐고, 무엇보다 그의 화려하고 과장된 언행은 실용주의와 진중함을 중시하던 필의 성향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19]
내각 참여가 좌절된 디즈레일리는 즉각 '복수자'로 돌변했다. 그는 하원 뒷좌석(Backbench)에 앉아 필의 정책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특히 필이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점차 자유무역주의로 기울자 디즈레일리는 이를 '배신'으로 규정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단순히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 데 그치지 않고, 필의 논리적 허점을 수사학적으로 조롱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845년 무렵부터 시작된 그의 연설은 하원의 전설로 남을 만큼 신랄했다. 그는 필을 향해 다음과 같은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뿐만 아니라 19세기 영국 정치사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분기점이 된다. 디즈레일리는 필에게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으나, 필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필의 입장에서 디즈레일리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통 귀족 출신이 아닌 데다 부채 문제로 늘 구설에 올랐고, 무엇보다 그의 화려하고 과장된 언행은 실용주의와 진중함을 중시하던 필의 성향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19]
내각 참여가 좌절된 디즈레일리는 즉각 '복수자'로 돌변했다. 그는 하원 뒷좌석(Backbench)에 앉아 필의 정책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특히 필이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점차 자유무역주의로 기울자 디즈레일리는 이를 '배신'으로 규정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단순히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 데 그치지 않고, 필의 논리적 허점을 수사학적으로 조롱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845년 무렵부터 시작된 그의 연설은 하원의 전설로 남을 만큼 신랄했다. 그는 필을 향해 다음과 같은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수상(필)은 보수당이라는 정당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자유주의자들의 옷을 훔쳐 입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의 비판은 보수당 내부에서 필의 노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뒷좌석 의원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었다. 필은 행정가로서 유능했으나 동료 의원들과의 소통에는 서툴렀고, 디즈레일리는 그 틈새를 공략해 당내 여론을 장악해 나갔다.
디즈레일리의 공격은 1846년 곡물법 폐지 논쟁에서 정점에 달한다. 필이 아일랜드 대기근을 명분으로 곡물 관세를 철폐하려 하자, 디즈레일리는 이를 보수당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몰아세웠다. 그는 필을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신한 정치적 위선자"로 묘사하며 당내 보수파를 결집시켰다.
1840년대 영국의 정치권은 '곡물법'이라는 거대한 화두 앞에 두 동강이 나 있었다. 1815년에 제정된 이 법은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를 매겨 국내 농산물 가격을 지지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농업 자급자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보수당(Tory)의 핵심 지지 기반인 지주 계급(Gentry)의 배를 불려주는 장치였다.
반면, 신흥 산업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에게 곡물법은 철폐되어야 할 악법이었다. 빵값이 비싸지면 노동자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이는 곧 임금 상승 압박으로 이어져 공장주들의 이윤을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가 이끄는 '반곡물법 연맹'은 영국 전역을 휩쓸며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고 있었다. 당시 보수당 당수이자 총리였던 로버트 필(Robert Peel)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원칙적으로는 보호무역주의자였으나, 점차 시대의 흐름이 자유무역으로 향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1845년, 운명을 바꾼 사건이 터진다. 아일랜드를 덮친 감자 마름병, 즉 아일랜드 대기근이었다. 주식인 감자가 썩어나가자 수백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로버트 필은 이 인도적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수입 곡물 관세를 철폐하여 값싼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것이 보수당의 근간을 흔드는 '배신'이었다는 점이다. 보수당 의원 대다수는 지주였고, 곡물법은 그들에게 성역과 같았다. 이때 필은 당내 반발을 억누르며 법안 폐지를 강행하려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랫동안 필에게 무시당하며 내각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복수의 칼날을 뽑아 든다.
디즈레일리는 이 논쟁을 단순히 경제적 이슈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로버트 필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정치적 중량감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다. 그는 의회에서 화려하면서도 치명적인 수사학을 동원해 필을 몰락시키기 시작했다.
"총리께서는 자신의 진영을 적의 진영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는 우리 당의 깃발을 들고 가서 적군의 성벽 위에 꽂았습니다!"
디즈레일리의 공격은 집요했다. 그는 필을 가리켜 "자신의 원칙을 상황에 따라 갈아치우는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고, 보수당 의원들의 배신감을 자극했다. 당시 디즈레일리의 연설은 의회 역사상 가장 신랄한 독설 중 하나로 꼽힌다.[20]
필은 결국 야당인 자유당(Whig)의 협조를 얻어 1846년 곡물법 폐지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다. 정책적으로는 승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파멸이었다. 디즈레일리와 그를 따르는 '보호무역파' 보수당원들은 필에게 불신임 투표나 다름없는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법안 통과 직후 필 내각은 붕괴한다.
곡물법 폐지는 영국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로버트 필을 따르는 엘리트 집단(Peelites)은 보수당을 떠났고, 이들은 훗날 자유당의 주축이 된다.[21] 보수당은 졸지에 '머리(엘리트)'를 잃고 '몸통(지주 의원들)'만 남은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아수라장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디즈레일리였다. 비록 당장은 정권을 잃었으나, 그는 당내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유능한 선동가이자 조직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를 '경박한 소설가'나 '이방인'으로 보던 보수당 지주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필을 작살낸 그의 '전투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곡물법 논쟁은 디즈레일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보수당은 계급적 이익을 대변해야 하지만, 둘째, 동시에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고립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훗날 그가 '일국 보수주의'를 제창하며 노동계급에게 손을 내미는 반전의 토대가 된다.[22]
결국 곡물법은 통과되었지만, 보수당은 필을 지지하는 세력(필 파)과 디즈레일리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로 완전히 쪼개지고 말았다. 이 분열로 인해 로버트 필 내각은 붕괴했고, 보수당은 이후 약 20년 동안 정권을 잡지 못하는 기나긴 야당 생활을 하게 된다. 디즈레일리는 필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당을 초토화시켰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23]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레일리는 이 파괴적인 과정을 통해 당내 2인자이자 하원 원내대표급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로버트 필이라는 거대한 산을 무너뜨린 이방인 청년은, 이제 보수당이라는 부서진 배를 이끌고 거친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4.10. 당권 장악의 서막[편집]
로버트 필의 곡물법 폐지 강행은 단순히 정책적 변화를 넘어, 19세기 영국 정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뒤흔든 대폭발이었다. 이 혼돈의 시기에 디즈레일리는 단순한 '야당 내 저격수'를 넘어 차기 당권 주자로 도약하기 위한 정교한 정치 공학을 가동하기 시작한다. 당시 디즈레일리의 처지는 참으로 미묘했는데, 화려한 언변으로 필을 몰아붙이며 당내 지주 계층(Country Gentlemen)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인정받기에는 그의 출신과 배경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디즈레일리가 선택한 파트너가 바로 조지 벤팅크 경(Lord George Bentinck)이었다. 포틀랜드 공작의 아들이자 경마광으로 유명했던 벤팅크는 전형적인 영국의 상류 귀족이었으며, 보수적 가치의 수호자였다. 그는 사실 정치적 야심보다는 필의 '배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는데, 디즈레일리는 이 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벤팅크는 대중 앞에 설 '명분'과 '품격'을 제공했고, 디즈레일리는 벤팅크의 뒤에서 실질적인 전략과 논리, 그리고 의회 내 전술을 담당하는 '두뇌' 역할을 자처했다.[24]
1846년 보수당이 '필 파(Peelites)'와 '보호무역 파(Protectionists)'로 완전히 쪼개졌을 때, 보호무역 파는 그들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였다. 비록 벤팅크가 형식상의 리더였으나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장기적인 지도자 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 벤팅크와 함께 밤낮으로 전국의 지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보수당의 정체성이 단순히 '곡물 가격 유지'가 아니라 '영국의 전통적 헌정 질서와 토지 기반의 공동체 수호'에 있음을 역설했다. 이는 훗날 그가 제창하게 될 '일국 보수주의'의 실질적인 태동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권 장악으로 가는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내 보수파들은 디즈레일리의 천재성에는 감탄하면서도, "어떻게 유대인 출신의 소설가 쪼가리에게 당의 운명을 맡기느냐"는 근본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디즈레일리는 벤팅크가 1848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철저히 이인자 위치를 고수하며 자신의 색깔을 지워나가는 인내심을 보였다. 벤팅크의 죽음은 디즈레일리에게 큰 슬픔인 동시에 정치적 시험대였다. 벤팅크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당내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가 보여준 가장 영리한 행보 중 하나는 당내 중진인 스탠리 경(훗날의 더비 백작)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그는 스탠리 경을 당의 얼굴로 세우면서도 하원 내에서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자신이 쥐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는 당시 보수당 내의 지주 세력들이 그를 '고용된 칼잡이' 정도로 여기게 만들면서도, 실제로는 그 칼잡이 없이는 당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결국 18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보수당 하원 의원들은 싫든 좋든 디즈레일리의 전술적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는 벤팅크라는 귀족적 상징물을 통해 당내 진입 장벽을 낮췄고, 필 파가 떠난 자리에 남은 권력의 공백을 치밀하게 메워나갔다. 이는 훗날 그가 "기름진 기둥(Greasy Pole)의 정상"에 오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자산을 확보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보호무역 파라는 오합지졸 세력을 어떻게 현대적인 정당 체제로 개편해 나갔는지에 대한 처절한 투쟁사로 이어진다. 디즈레일리는 이때 깨달았다. 보수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를 수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25]
이때 디즈레일리가 선택한 파트너가 바로 조지 벤팅크 경(Lord George Bentinck)이었다. 포틀랜드 공작의 아들이자 경마광으로 유명했던 벤팅크는 전형적인 영국의 상류 귀족이었으며, 보수적 가치의 수호자였다. 그는 사실 정치적 야심보다는 필의 '배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는데, 디즈레일리는 이 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벤팅크는 대중 앞에 설 '명분'과 '품격'을 제공했고, 디즈레일리는 벤팅크의 뒤에서 실질적인 전략과 논리, 그리고 의회 내 전술을 담당하는 '두뇌' 역할을 자처했다.[24]
1846년 보수당이 '필 파(Peelites)'와 '보호무역 파(Protectionists)'로 완전히 쪼개졌을 때, 보호무역 파는 그들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였다. 비록 벤팅크가 형식상의 리더였으나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장기적인 지도자 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 벤팅크와 함께 밤낮으로 전국의 지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보수당의 정체성이 단순히 '곡물 가격 유지'가 아니라 '영국의 전통적 헌정 질서와 토지 기반의 공동체 수호'에 있음을 역설했다. 이는 훗날 그가 제창하게 될 '일국 보수주의'의 실질적인 태동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권 장악으로 가는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내 보수파들은 디즈레일리의 천재성에는 감탄하면서도, "어떻게 유대인 출신의 소설가 쪼가리에게 당의 운명을 맡기느냐"는 근본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디즈레일리는 벤팅크가 1848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철저히 이인자 위치를 고수하며 자신의 색깔을 지워나가는 인내심을 보였다. 벤팅크의 죽음은 디즈레일리에게 큰 슬픔인 동시에 정치적 시험대였다. 벤팅크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당내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가 보여준 가장 영리한 행보 중 하나는 당내 중진인 스탠리 경(훗날의 더비 백작)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그는 스탠리 경을 당의 얼굴로 세우면서도 하원 내에서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자신이 쥐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는 당시 보수당 내의 지주 세력들이 그를 '고용된 칼잡이' 정도로 여기게 만들면서도, 실제로는 그 칼잡이 없이는 당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결국 18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보수당 하원 의원들은 싫든 좋든 디즈레일리의 전술적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는 벤팅크라는 귀족적 상징물을 통해 당내 진입 장벽을 낮췄고, 필 파가 떠난 자리에 남은 권력의 공백을 치밀하게 메워나갔다. 이는 훗날 그가 "기름진 기둥(Greasy Pole)의 정상"에 오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자산을 확보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보호무역 파라는 오합지졸 세력을 어떻게 현대적인 정당 체제로 개편해 나갔는지에 대한 처절한 투쟁사로 이어진다. 디즈레일리는 이때 깨달았다. 보수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를 수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25]
4.11. 유대인 구제법[편집]
디즈레일리는 명목상 성공회 신자였으나, 그의 외모와 성씨, 그리고 집안의 내력은 그가 결코 '잉글랜드인'으로만 보일 수 없게 만들었다. 19세기 영국 정계에서 유대인이 하원에 입성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의원은 반드시 "기독교인의 진정한 신앙에 따라(on the true faith of a Christian)"라는 선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12살에 세례를 받은 디즈레일리는 이 조항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동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챕터에서는 디즈레일리가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대와 종교적 편견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에게도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싸웠던 '유대인 구제법(Jewish Relief Act)' 논쟁의 전말을 다룬다. 이는 그가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정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사건의 발단은 1847년 런던 시 선거구에서 발생했다. 당대 최고의 금융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기독교식 선서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당선은 되었으나 의석에는 앉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보수당의 주류는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며, 의회는 기독교인들의 의회여야 한다"는 완고한 입장이었다. 반면 자유당의 로드 존 러셀은 유대인 참정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보수당을 압박했다. 보수당 내에서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바로 이때, 보수당의 실질적인 하원 리더였던 디즈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1847년 12월, 디즈레일리는 하원에서 전설적인 연설을 남긴다. 그는 단순히 '종교적 관용'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공격적인 논리를 펼쳤다.
이 챕터에서는 디즈레일리가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대와 종교적 편견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에게도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싸웠던 '유대인 구제법(Jewish Relief Act)' 논쟁의 전말을 다룬다. 이는 그가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정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사건의 발단은 1847년 런던 시 선거구에서 발생했다. 당대 최고의 금융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기독교식 선서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당선은 되었으나 의석에는 앉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보수당의 주류는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며, 의회는 기독교인들의 의회여야 한다"는 완고한 입장이었다. 반면 자유당의 로드 존 러셀은 유대인 참정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보수당을 압박했다. 보수당 내에서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바로 이때, 보수당의 실질적인 하원 리더였던 디즈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1847년 12월, 디즈레일리는 하원에서 전설적인 연설을 남긴다. 그는 단순히 '종교적 관용'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공격적인 논리를 펼쳤다.
"누가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선지자를 주었습니까? 구세주께서 어느 민족에서 나셨습니까? 바로 유대인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일 뿐이며, 유대인을 박해하는 것은 기독교의 뿌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의 주장은 당대 의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보수당 의원 대다수는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 여기며 멸시하는 분위기였는데, 디즈레일리는 거꾸로 "유대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그들을 '초기 기독교인(Early Christians)'이라 칭송한 것이다.[26]
이 발언의 대가는 혹독했다. 보수당 내의 강경파들은 경악했다. 특히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동지였던 조지 벤팅크 경조차 이 문제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보수당 지지자들은 "우리 당의 리더가 유대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며 분노했고, 사방에서 그를 당직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이 문제로 인해 정치적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사석에서 "나 자신이 유대인 혈통인데, 내 민족이 권리를 찾는 것을 외면한다면 나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는 보수당 하원 리더직을 일시적으로 사임해야 했으며, 한동안 당내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고립된 시기를 보냈다.
유대인 구제법은 상원(House of Lords)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무려 10번이나 부결되었다. 상원의 귀족들과 주교들은 유대인의 입성을 끝까지 막으려 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포기하지 않고 매번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보수당 내에서도 온건파들을 설득해 나갔다.
결국 1858년, 각 하원이 자체적으로 선서 문구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타협안이 통과되면서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는 드디어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이는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종교적 장벽이 무너진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자신의 당과 맞서 싸운 디즈레일리가 있었다.
후대의 사학자들은 디즈레일리의 이 행보를 두고 분분한 의견을 내놓는다. "진정한 민족적 자부심의 발로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서는 "어차피 유대인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이슈를 정면으로 돌파해 자신의 독보적인 정체성으로 삼으려 한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보수당이라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기독교 중심적인 집단에서 유대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레일리는 이를 관철시켰고, 이는 훗날 그가 보수당을 '특정 계급이나 종교의 정당'이 아닌 '전 국민의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일국 보수주의의 도덕적 기반이 되었다.
4.12. 제1차 재무장관 취임[편집]
1852년 2월, 로버트 필의 사망 이후 지리멸렬하던 휘그당의 존 러셀 내각이 붕괴되자, 빅토리아 여왕은 보수당의 실권자였던 제14대 더비 백작(Lord Derby)에게 조각(組閣)을 요청한다. 문제는 당시 보수당이 필의 '자유무역' 파동 이후 당내 유력 인사들이 대거 이탈한 '껍데기' 상태였다는 점이다. 행정 경험이 있는 인물들은 거의 다 자유당으로 넘어가 버렸고, 남은 것은 디즈레일리와 이름조차 생소한 시골 지주 출신 의원들뿐이었다.[27]
더비 백작은 이 '정치적 아마추어'들의 모임에서 가장 영리하고 입담이 좋았던 디즈레일리에게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과 하원 원내대표라는 중책을 맡긴다. 정계 입문 15년 만에 드디어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독이 든 성배였다. 그는 평생 숫자에 약했고,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편견에 시달리던 그에게 국가 곳간을 맡기는 것에 대해 사교계와 언론의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디즈레일리의 최대 과제는 '곡물법' 폐지 이후 도탄에 빠졌다고 믿는 농민층(보수당의 핵심 지지층)을 달래면서도, 이미 대세로 굳어진 자유무역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묘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서 실무를 접하며 깨달았다. 보호무역으로의 회귀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도시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보수당을 영원한 야당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에서 1850년대는 그가 '야당의 저격수'라는 이미지를 벗고 '국정 운영의 책임자'로 변모해가는 고통스러운 탈피의 시기였다. 특히 1852년 더비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으로 취임한 것은 그에게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당시 보수당의 정체성은 로버트 필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보호무역주의'에 발을 묶고 있었으나, 정작 영국의 경제 지표는 자유무역의 혜택으로 연일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보호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나, 정작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자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이미 영국의 대중은 저렴해진 빵값에 익숙해져 있었고, 공업 자본가들은 자유로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보호무역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특유의 수사학을 동원해 이 모순을 돌파하려 했다. 그는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으로 갔다"고 선언하며, 과거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골수 토리당원들에게는 변절로 비춰졌으나, 디즈레일리에게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었고, 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인 자유무역을 수용하되 보수당만의 색채를 입히는 작업이 급선무였다. [28]
재무장관으로서 디즈레일리가 내놓은 첫 번째 예산안은 그야말로 '디즈레일리다운' 도박이었다. 그는 보호무역 철폐로 타격을 입은 지주층과 농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과감한 감세를 제안하는 동시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대대적인 직접세 개편을 시도했다.
그의 핵심 전략은 몰트세(Malt Tax, 맥주 원료인 맥아에 붙는 세금)를 절반으로 감면하여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또한, 소득세의 차등 적용을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수치상의 허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금융 전문가를 자처하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현미경 같은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다.
당시 하원 토론에서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을 "무책임하고 선동적이며 국가 재정을 파탄 낼 제안"이라며 무려 2시간 동안 조목조목 비판했다. 디즈레일리 역시 지지 않고 "글래드스턴 씨는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며 맞받아쳤으나, 결국 하원은 예산안을 부결시켰다. 이 사건으로 더비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고, 디즈레일리는 짧은 장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이후 재무장관직에 복귀했을 때(1858년, 1866년), 과거의 과격한 세제 개혁 대신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재정 관리를 택했다. 특히 대외 무역의 활성화가 제국의 영광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력임을 설파하며, 보수주의가 '현상 유지'가 아닌 '번영을 통한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훗날 그가 사회 개혁 입법을 단행할 때 필요한 재정적 근거와 논리를 마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의 경제 정책은 종종 '글래드스턴적 재정주의(Gladstonian Finance)'의 그늘에 가려 평가절하되곤 한다. 글래드스턴이 엄격한 균형 재정과 절약을 강조한 '회계사적 천재'였다면, 디즈레일리는 경제를 정치적 통합과 국가 위신 제고의 수단으로 본 '전략가'에 가까웠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유대인 혈통 때문에 "돈 계산에는 밝겠지"라는 인종주의적 편견 섞인 기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개인 부채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에서 그가 보여준 현실주의적 노선 수정은 보수당이 산업화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수사학으로 "보호무역은 이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갔다"고 선언하며 현실주의적 노선 수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그를 믿고 따랐던 보수당 내 강경파 지주들에게는 '제2의 로버트 필'이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고, 야당인 휘그당과 필 파(Peelites)에게는 기회주의적인 변신으로 비쳐졌다. 그는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1852년 12월, 자신의 첫 번째 예산안을 발표하게 된다.
12월 16일, 예산안 심의의 마지막 날 밤. 디즈레일리는 장장 5시간에 걸친 폭풍 같은 연설로 야당을 몰아붙였다. 그는 특유의 조소와 독설을 섞어 "연합군은 한때는 위대했으나 지금은 오합지졸일 뿐"이라며 반대파들을 비난했다. 연설이 끝났을 때 하원의 분위기는 디즈레일리의 압승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야당석에서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었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인신공격적 언사와 경제적 수치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재무장관의 예산안은 국가 재정을 도박판으로 몰아넣는 행위"라고 일갈했다. 새벽 4시까지 이어진 이 세기의 대결은 결국 표결로 이어졌고, 내각은 19표 차이로 패배한다.
예산안 부결은 곧 내각의 사퇴를 의미했다. 취임 10개월 만에 디즈레일리는 장관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은 그에게 두 가지 중요한 자산을 남겼다.
첫째, 비록 예산안은 실패했지만 그가 하원을 장악하고 이끌 수 있는 '거물'급 정치인임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당초 그를 미심쩍어했으나, 디즈레일리가 매일 작성하여 보고한 재치 있는 의회 보고서에 매료되어 점차 그를 신임하기 시작했다.[30]
둘째, 평생의 라이벌 글래드스턴과의 전선이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이후 30년간 영국 정치는 '디즈레일리의 재기'와 '글래드스턴의 원칙'이 충돌하는 거대한 드라마가 된다. 그는 재무부 관저를 떠나며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비 백작은 이 '정치적 아마추어'들의 모임에서 가장 영리하고 입담이 좋았던 디즈레일리에게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과 하원 원내대표라는 중책을 맡긴다. 정계 입문 15년 만에 드디어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독이 든 성배였다. 그는 평생 숫자에 약했고,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편견에 시달리던 그에게 국가 곳간을 맡기는 것에 대해 사교계와 언론의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디즈레일리의 최대 과제는 '곡물법' 폐지 이후 도탄에 빠졌다고 믿는 농민층(보수당의 핵심 지지층)을 달래면서도, 이미 대세로 굳어진 자유무역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묘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서 실무를 접하며 깨달았다. 보호무역으로의 회귀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도시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보수당을 영원한 야당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에서 1850년대는 그가 '야당의 저격수'라는 이미지를 벗고 '국정 운영의 책임자'로 변모해가는 고통스러운 탈피의 시기였다. 특히 1852년 더비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으로 취임한 것은 그에게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당시 보수당의 정체성은 로버트 필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보호무역주의'에 발을 묶고 있었으나, 정작 영국의 경제 지표는 자유무역의 혜택으로 연일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보호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나, 정작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자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이미 영국의 대중은 저렴해진 빵값에 익숙해져 있었고, 공업 자본가들은 자유로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보호무역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특유의 수사학을 동원해 이 모순을 돌파하려 했다. 그는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으로 갔다"고 선언하며, 과거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골수 토리당원들에게는 변절로 비춰졌으나, 디즈레일리에게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었고, 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인 자유무역을 수용하되 보수당만의 색채를 입히는 작업이 급선무였다. [28]
재무장관으로서 디즈레일리가 내놓은 첫 번째 예산안은 그야말로 '디즈레일리다운' 도박이었다. 그는 보호무역 철폐로 타격을 입은 지주층과 농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과감한 감세를 제안하는 동시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대대적인 직접세 개편을 시도했다.
그의 핵심 전략은 몰트세(Malt Tax, 맥주 원료인 맥아에 붙는 세금)를 절반으로 감면하여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또한, 소득세의 차등 적용을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수치상의 허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금융 전문가를 자처하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현미경 같은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다.
당시 하원 토론에서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을 "무책임하고 선동적이며 국가 재정을 파탄 낼 제안"이라며 무려 2시간 동안 조목조목 비판했다. 디즈레일리 역시 지지 않고 "글래드스턴 씨는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며 맞받아쳤으나, 결국 하원은 예산안을 부결시켰다. 이 사건으로 더비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고, 디즈레일리는 짧은 장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이후 재무장관직에 복귀했을 때(1858년, 1866년), 과거의 과격한 세제 개혁 대신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재정 관리를 택했다. 특히 대외 무역의 활성화가 제국의 영광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력임을 설파하며, 보수주의가 '현상 유지'가 아닌 '번영을 통한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훗날 그가 사회 개혁 입법을 단행할 때 필요한 재정적 근거와 논리를 마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의 경제 정책은 종종 '글래드스턴적 재정주의(Gladstonian Finance)'의 그늘에 가려 평가절하되곤 한다. 글래드스턴이 엄격한 균형 재정과 절약을 강조한 '회계사적 천재'였다면, 디즈레일리는 경제를 정치적 통합과 국가 위신 제고의 수단으로 본 '전략가'에 가까웠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유대인 혈통 때문에 "돈 계산에는 밝겠지"라는 인종주의적 편견 섞인 기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개인 부채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에서 그가 보여준 현실주의적 노선 수정은 보수당이 산업화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수사학으로 "보호무역은 이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갔다"고 선언하며 현실주의적 노선 수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그를 믿고 따랐던 보수당 내 강경파 지주들에게는 '제2의 로버트 필'이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고, 야당인 휘그당과 필 파(Peelites)에게는 기회주의적인 변신으로 비쳐졌다. 그는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1852년 12월, 자신의 첫 번째 예산안을 발표하게 된다.
12월 16일, 예산안 심의의 마지막 날 밤. 디즈레일리는 장장 5시간에 걸친 폭풍 같은 연설로 야당을 몰아붙였다. 그는 특유의 조소와 독설을 섞어 "연합군은 한때는 위대했으나 지금은 오합지졸일 뿐"이라며 반대파들을 비난했다. 연설이 끝났을 때 하원의 분위기는 디즈레일리의 압승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야당석에서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었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인신공격적 언사와 경제적 수치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재무장관의 예산안은 국가 재정을 도박판으로 몰아넣는 행위"라고 일갈했다. 새벽 4시까지 이어진 이 세기의 대결은 결국 표결로 이어졌고, 내각은 19표 차이로 패배한다.
예산안 부결은 곧 내각의 사퇴를 의미했다. 취임 10개월 만에 디즈레일리는 장관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은 그에게 두 가지 중요한 자산을 남겼다.
첫째, 비록 예산안은 실패했지만 그가 하원을 장악하고 이끌 수 있는 '거물'급 정치인임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당초 그를 미심쩍어했으나, 디즈레일리가 매일 작성하여 보고한 재치 있는 의회 보고서에 매료되어 점차 그를 신임하기 시작했다.[30]
둘째, 평생의 라이벌 글래드스턴과의 전선이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이후 30년간 영국 정치는 '디즈레일리의 재기'와 '글래드스턴의 원칙'이 충돌하는 거대한 드라마가 된다. 그는 재무부 관저를 떠나며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상에 올랐다(I have climbed to the top). 비록 그곳이 미끄러운 장대(greasy pole) 위였을지라도."
4.13. 제2차 선거법 개정[편집]
1867년의 제2차 선거법 개정(Reform Act 1867)은 영국 헌정사에서 가장 기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대폭 확대한 이 '진보적'인 개혁을 주도한 것은 자유당이 아닌,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끄는 보수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디즈레일리라는 정치적 천재가 보여준 최고의 승부수이자, 동시에 보수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 정계의 화두는 단연 선거권 확대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이후 중산층은 투표권을 얻었으나, 정작 산업 혁명의 주역인 노동계급은 여전히 참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1866년, 자유당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온건한 내용의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오히려 당내 보수파인 '아둘람의 굴(Cave of Adullam)'[31]의 반발로 내각이 붕괴하고 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잡은 것이 제3차 더비 내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보수당은 하원 내 소수당에 불과했고, 언제든 자유당의 연합 공격에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디즈레일리는 결단했다. "자유당의 무기를 빼앗아 그들을 쏘겠다"는 전략이었다. 즉, 자유당이 머뭇거리던 개혁을 보수당이 선제적으로, 그것도 더 파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디즈레일리가 의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처음에는 다소 온건했으나, 심의 과정에서 자유당 급진파들의 수정 제안을 파격적으로 수용하며 그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글래드스턴은 당황했다. 보수당이 자신들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내놓자 비판할 명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디즈레일리는 전설적인 의회 전술을 보여주었다. 그는 당내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이것이야말로 보수당이 국민 정당으로 거듭날 기회"라고 설득하는 한편, 야당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했다. 당시 보수당의 외무장관이었던 크랜본 경(훗날의 솔즈베리 후작)[32]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라는 어둠 속으로의 도약(A leap in the dark)"이라며 맹비난했으나, 디즈레일리는 멈추지 않았다.
1867년 8월, 마침내 법안이 통과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영국 정계의 화두는 단연 선거권 확대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이후 중산층은 투표권을 얻었으나, 정작 산업 혁명의 주역인 노동계급은 여전히 참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1866년, 자유당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온건한 내용의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오히려 당내 보수파인 '아둘람의 굴(Cave of Adullam)'[31]의 반발로 내각이 붕괴하고 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잡은 것이 제3차 더비 내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보수당은 하원 내 소수당에 불과했고, 언제든 자유당의 연합 공격에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디즈레일리는 결단했다. "자유당의 무기를 빼앗아 그들을 쏘겠다"는 전략이었다. 즉, 자유당이 머뭇거리던 개혁을 보수당이 선제적으로, 그것도 더 파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디즈레일리가 의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처음에는 다소 온건했으나, 심의 과정에서 자유당 급진파들의 수정 제안을 파격적으로 수용하며 그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글래드스턴은 당황했다. 보수당이 자신들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내놓자 비판할 명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디즈레일리는 전설적인 의회 전술을 보여주었다. 그는 당내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이것이야말로 보수당이 국민 정당으로 거듭날 기회"라고 설득하는 한편, 야당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했다. 당시 보수당의 외무장관이었던 크랜본 경(훗날의 솔즈베리 후작)[32]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라는 어둠 속으로의 도약(A leap in the dark)"이라며 맹비난했으나, 디즈레일리는 멈추지 않았다.
1867년 8월, 마침내 법안이 통과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도시 유권자의 급증: 도시의 모든 가구주(Householders)와 일정 소득 이상의 하숙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유권자 수의 두 배 증가: 약 100만 명이었던 유권자가 20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특히 도시 숙련 노동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선거구 재조정: 인구가 적은 부패 선거구를 폐지하고 신흥 공업 도시와 인구가 많은 카운티에 의석을 재배분했다. |
이 개정으로 영국은 사실상 민주주의 국가로의 급격한 이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투표권을 준 보수당에게 감사하며 표를 던질 것이라고 믿었다.
디즈레일리의 이 '도박'은 단기적으로는 1868년 총선 패배로 이어졌으나, 장기적으로는 보수당의 생존 전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보수주의가 소수 귀족이나 지주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는 '애국적 노동계급'과도 결합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토으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의 실체였다. 그는 "영국 민중은 본래 보수적"이라는 신념 하에, 상류층과 하류층을 직접 연결하는 정치를 구사했다. 이는 훗날 보수당이 20세기 내내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군림할 수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 글래드스턴이 도덕과 원칙을 강조했다면, 디즈레일리는 대중의 열망과 국가적 자부심을 파고드는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준 셈이다.
4.14. 일국 보수주의 정립[편집]
디즈레일리를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일컫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유산이자, 오늘날까지도 영국 보수당의 핵심 이념으로 작동하는 '일국 보수주의(One-nation Conservatism)'는 사실 1860년대 중반 그가 정치적 정점에 오르기 시작한 시점에 완성되었다.
디즈레일리가 바라본 당시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산업 혁명의 과실은 자본가 계급에게만 집중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처참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설 《시빌(Sybil)》에서 설파했던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두 개의 국가(Two Nations)'"가 서로를 증오하며 공존하는 현실을 방치할 경우, 프랑스 혁명과 같은 파괴적인 사태가 영국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33]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디즈레일리의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는 보수당이 기득권인 지주 계급만의 정당으로 남는다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보수당은 국민의 정당(National Part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 아니었다. 사회의 상류층이 하류층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계급 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 즉 '일국(One Nation)'으로 통합하자는 원대한 전략이었다.
이 사상의 구체적인 실현이 바로 앞서 살펴본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이었다. 그는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이 머뭇거리는 사이, 노동자 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는 "노동자 계급은 본래 보수적이다"라는 그의 독특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영국의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보다는 영국의 전통, 군주제, 그리고 제국의 영광에 더 자부심을 느낀다고 보았다. 만약 보수당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 준다면, 노동자들은 보수당의 굳건한 지지 기반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일국 보수주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당시 자유당이 신봉하던 '맨체스터 학파'의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와 달리, 디즈레일리는 국가와 상류층의 적극적인 개입을 정당화했다. "궁전이 평안하려면 오두막이 행복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보수주의자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34]
결국 일국 보수주의의 정립은 보수당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기 위해 변화하는(Change to Conserve)' 유연한 보수주의의 탄생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이 이념을 통해 보수당에 '사회적 양심'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덕분에 영국 보수당은 유럽의 다른 보수 정당들이 혁명의 불길 속에서 궤멸할 때 홀로 살아남아 20세기 내내 집권 정당으로서의 위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정적 글래드스턴은 이를 "원칙 없는 기회주의"라고 비난했으며, 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보수주의를 사회주의와 타협시킨 변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디즈레일리가 '일국 보수주의'를 통해 영국의 계급 갈등을 의회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흡수하고, 제국과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그는 1870년대 대총리 시대를 열며, 수많은 사회 개혁 입법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증명해내기 시작한다.
디즈레일리가 바라본 당시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산업 혁명의 과실은 자본가 계급에게만 집중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처참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설 《시빌(Sybil)》에서 설파했던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두 개의 국가(Two Nations)'"가 서로를 증오하며 공존하는 현실을 방치할 경우, 프랑스 혁명과 같은 파괴적인 사태가 영국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33]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디즈레일리의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는 보수당이 기득권인 지주 계급만의 정당으로 남는다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보수당은 국민의 정당(National Part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 아니었다. 사회의 상류층이 하류층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계급 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 즉 '일국(One Nation)'으로 통합하자는 원대한 전략이었다.
이 사상의 구체적인 실현이 바로 앞서 살펴본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이었다. 그는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이 머뭇거리는 사이, 노동자 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는 "노동자 계급은 본래 보수적이다"라는 그의 독특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영국의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보다는 영국의 전통, 군주제, 그리고 제국의 영광에 더 자부심을 느낀다고 보았다. 만약 보수당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 준다면, 노동자들은 보수당의 굳건한 지지 기반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일국 보수주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당시 자유당이 신봉하던 '맨체스터 학파'의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와 달리, 디즈레일리는 국가와 상류층의 적극적인 개입을 정당화했다. "궁전이 평안하려면 오두막이 행복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보수주의자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34]
결국 일국 보수주의의 정립은 보수당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기 위해 변화하는(Change to Conserve)' 유연한 보수주의의 탄생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이 이념을 통해 보수당에 '사회적 양심'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덕분에 영국 보수당은 유럽의 다른 보수 정당들이 혁명의 불길 속에서 궤멸할 때 홀로 살아남아 20세기 내내 집권 정당으로서의 위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정적 글래드스턴은 이를 "원칙 없는 기회주의"라고 비난했으며, 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보수주의를 사회주의와 타협시킨 변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디즈레일리가 '일국 보수주의'를 통해 영국의 계급 갈등을 의회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흡수하고, 제국과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그는 1870년대 대총리 시대를 열며, 수많은 사회 개혁 입법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증명해내기 시작한다.
4.15. 제1차 총리 취임[편집]
"나는 이제 미끄러운 장대 끝(the top of the greasy pole)에 올라섰다."[35]
1868년 2월, 오랜 기간 보수당의 수장이자 디즈레일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제14대 더비 백작이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당시 보수당 내에서 더비의 후계자로 디즈레일리를 대체할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1867년 선거법 개정이라는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디즈레일리는 이미 당내 실세 중의 실세였고, 당원들은 그의 기민한 정무 감각과 하원을 장악하는 수사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총리가 되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당내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대인 출신의 소설가 나부랭이"가 대영제국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존재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이미 실력으로 그 모든 편견을 압도하고 있었다. 1868년 2월 27일, 그는 마침내 빅토리아 여왕의 부름을 받아 총리직을 수락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유대인 혈통 총리의 탄생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디즈레일리의 첫 번째 총리 임기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빅토리아 여왕과의 유대 관계를 확립한 것이다. 당시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을 잃은 후 깊은 실의에 빠져 정무에 소홀했고, 이로 인해 공화주의 여론이 고개를 들던 위험한 시기였다. 디즈레일리의 정적 글래드스턴은 여왕을 대할 때 마치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서류' 대하듯 딱딱하고 원칙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여왕의 반감을 샀다.
반면, 소설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감성을 자극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여왕을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한 명의 여성이자 제국의 상징으로 대우하며 화려한 찬사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여왕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유머와 문학적 수사를 섞어 넣었으며, 때로는 자신을 여왕의 충실한 '기사'로 포지셔닝했다. 훗날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 "누구나 아첨을 좋아하지만, 군주에게는 양동이째로 들이부어야 한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 덕분에 여왕은 디즈레일리를 "친애하는 벤저민"이라 부르며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이는 보수당 정권의 강력한 뒷배가 되었다.
비록 총리직에 올랐으나, 당시 보수당은 하원의 다수당이 아니었다. 1865년 총선 결과로 형성된 의회에서 보수당은 여전히 소수파였고, 디즈레일리의 내각은 자유당의 분열 덕분에 간신히 유지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대담한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레일리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입법을 단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1868년 수도권 가스법'과 '철도 규제법' 등 실용적인 행정 개혁이었다. 또한 그는 사형 집행을 공개적으로 하던 관습을 폐지하고 교도소 내부에서 집행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인도주의적 조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국 보수주의'적 대개혁은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디즈레일리의 첫 번째 총리 임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야당의 수장으로 등극한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성공회 국교 폐지'라는 강력한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내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공회 유지비를 부담시키는 불합리함을 공격하며 자유당과 급진파를 하나로 결집시켰다.
디즈레일리는 이에 맞서 "국가와 교회의 결합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를 내세워 방어하려 했으나, 하원 표결에서 잇따라 패배했다. 결국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1868년 11월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1867년 선거법 개정으로 선거권이 확대된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선거였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참정권을 준 노동계급이 보수당을 지지해 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과는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선거 패배가 확실해지자 디즈레일리는 의회가 개회되기도 전에 총리직에서 사퇴하는 전례 없는 행보를 보였다.[36] 이는 현대적인 의회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총리'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여왕에게 한 가지 청을 올렸다. 자신에게 줄 작위를 아내인 메리 앤 디즈레일리에게 먼저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평생 자신을 헌신적으로 내조했던, 하지만 사교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여왕은 이를 수락하여 메리 앤을 '비콘즈필드 자작부인'으로 서임했다. 비록 9개월이라는 짧은 임기였지만, 디즈레일리는 이 기간을 통해 자신이 대영제국을 이끌 준비가 된 지도자임을 증명했으며, 훗날 1874년 대집권을 위한 기초 체력을 다지는 시간을 보냈다.
4.16. 글래드스턴의 대승과 야당 시절, 절치부심의 6년[편집]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제1차 내각(1868~1874) 시기는 디즈레일리에게 있어 생애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역설적으로 보수당을 현대적인 정당으로 재탄생시킨 '인고의 시간'이었다. 1868년 총선에서 자유당에게 참패를 당한 후, 디즈레일리는 야당 당수로서 서슬 퍼런 글래드스턴의 '개혁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1867년 선거법 개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1868년 총선의 결과는 보수당의 처참한 패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레일리가 투표권을 부여한 노동계급의 상당수가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선택한 것이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국교회 해체"라는 강력한 카드로 비국교도와 자유주의자들을 결집시켰고, 디즈레일리는 이를 "국가 종교의 파괴"라며 비난했으나 대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디즈레일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하원의 야당 당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는 개인적으로도 큰 상실감을 겪었다.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 메리 앤(Mary Anne)이 암 투병 끝에 1872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적들은 그가 이제 노쇠하여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그는 한동안 의회에 출석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소설 작성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정치적 야망으로 승화시키며 글래드스턴의 실책을 기다리는 '노련한 사냥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37]
글래드스턴의 제1차 내각은 영국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개혁 정부 중 하나였다.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 개정, 군대 내 관직 매매 폐지, 비밀 투표법 도입 등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개혁이 쏟아져 나왔다. 디즈레일리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피로감을 느끼는 기득권층과 보수적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글래드스턴의 개혁을 '모든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의회 연설을 통해 정부의 과도한 개혁 의지를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유로 비판했다. "각료들이 마치 중앙아메리카의 화산들처럼 줄지어 앉아 있다. 그들은 불을 내뿜고 파괴하며, 이제는 연기조차 내지 못하는 식어버린 분화구가 되었다." 이 수사학적 공격은 대중들에게 개혁의 피로감을 환기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야당 시절 디즈레일리가 이룬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보수당의 조직력을 현대화한 것이다. 그는 존 고스트(John Gorst) 중령을 영입하여 보수당 중앙당(Central Office)을 설립하고, 전국적인 보수당 연맹(National Union)을 조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는데, 과거의 정당이 단순히 의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면 이제는 전국적인 하부 조직을 갖춘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조직망을 통해 디즈레일리는 노동계급 내의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 소위 '토리 민주주의자(Tory Democrats)'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방임'이 오히려 노동자들을 빈곤 속에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국가가 직접 노동자들의 삶을 보살피는 '보수적 복지'의 기틀을 닦았다. 이러한 전략은 훗날 1874년 대승의 밑거름이 된다.
디즈레일리는 국내 정책뿐만 아니라 글래드스턴의 유약한 외교 정책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글래드스턴은 도덕적 외교를 표방하며 러시아의 흑해 함대 재건을 방치하고, 미국과의 알라바마호 사건 중재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평화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대영제국의 위신을 깎아먹는 소국 근성(Little Englanderism)"이라고 맹비난했다.[38] 그는 보수당이야말로 영국의 영광을 지키고 제국을 수호할 유일한 세력임을 강조했다. 1872년 맨체스터와 크리스털 팰리스에서의 연설은 이러한 그의 제국주의적 비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영국 국민은 제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애국심을 자극했다.
6년의 기다림 끝에 기회는 찾아왔다. 글래드스턴 내각은 과도한 개혁으로 인해 지지층이 분열되었고, 경제 불황까지 겹치며 민심이 이반했다. 특히 디즈레일리는 맥주와 알코올 판매를 제한하려던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글래드스턴은 여러분의 즐거움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선동했다.
1867년 선거법 개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1868년 총선의 결과는 보수당의 처참한 패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레일리가 투표권을 부여한 노동계급의 상당수가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선택한 것이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국교회 해체"라는 강력한 카드로 비국교도와 자유주의자들을 결집시켰고, 디즈레일리는 이를 "국가 종교의 파괴"라며 비난했으나 대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디즈레일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하원의 야당 당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시기 디즈레일리는 개인적으로도 큰 상실감을 겪었다.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 메리 앤(Mary Anne)이 암 투병 끝에 1872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적들은 그가 이제 노쇠하여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그는 한동안 의회에 출석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소설 작성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정치적 야망으로 승화시키며 글래드스턴의 실책을 기다리는 '노련한 사냥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37]
글래드스턴의 제1차 내각은 영국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개혁 정부 중 하나였다.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 개정, 군대 내 관직 매매 폐지, 비밀 투표법 도입 등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개혁이 쏟아져 나왔다. 디즈레일리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피로감을 느끼는 기득권층과 보수적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글래드스턴의 개혁을 '모든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의회 연설을 통해 정부의 과도한 개혁 의지를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유로 비판했다. "각료들이 마치 중앙아메리카의 화산들처럼 줄지어 앉아 있다. 그들은 불을 내뿜고 파괴하며, 이제는 연기조차 내지 못하는 식어버린 분화구가 되었다." 이 수사학적 공격은 대중들에게 개혁의 피로감을 환기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야당 시절 디즈레일리가 이룬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보수당의 조직력을 현대화한 것이다. 그는 존 고스트(John Gorst) 중령을 영입하여 보수당 중앙당(Central Office)을 설립하고, 전국적인 보수당 연맹(National Union)을 조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는데, 과거의 정당이 단순히 의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면 이제는 전국적인 하부 조직을 갖춘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조직망을 통해 디즈레일리는 노동계급 내의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 소위 '토리 민주주의자(Tory Democrats)'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방임'이 오히려 노동자들을 빈곤 속에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국가가 직접 노동자들의 삶을 보살피는 '보수적 복지'의 기틀을 닦았다. 이러한 전략은 훗날 1874년 대승의 밑거름이 된다.
디즈레일리는 국내 정책뿐만 아니라 글래드스턴의 유약한 외교 정책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글래드스턴은 도덕적 외교를 표방하며 러시아의 흑해 함대 재건을 방치하고, 미국과의 알라바마호 사건 중재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평화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대영제국의 위신을 깎아먹는 소국 근성(Little Englanderism)"이라고 맹비난했다.[38] 그는 보수당이야말로 영국의 영광을 지키고 제국을 수호할 유일한 세력임을 강조했다. 1872년 맨체스터와 크리스털 팰리스에서의 연설은 이러한 그의 제국주의적 비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영국 국민은 제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애국심을 자극했다.
6년의 기다림 끝에 기회는 찾아왔다. 글래드스턴 내각은 과도한 개혁으로 인해 지지층이 분열되었고, 경제 불황까지 겹치며 민심이 이반했다. 특히 디즈레일리는 맥주와 알코올 판매를 제한하려던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글래드스턴은 여러분의 즐거움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선동했다.
4.17. 크리스털 팰리스 연설[편집]
"국가에 있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의무는 바로 국민의 복지(Sanitas sanitatum, omnia sanitas)입니다."[39]
1872년 6월 24일,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행해진 디즈레일리의 연설은 현대 영국 보수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단순히 야당 당수의 정치 유세를 넘어, 붕괴 위기에 처했던 보수주의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향후 100년 동안 보수당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디즈레일리는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정부가 추진하던 과격한 개혁에 지쳐있던 중산층과 노동자층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 연설에서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의 3대 핵심 강령을 천명한다. 첫째는 영국의 전통적 제도(왕실, 상원, 교회)의 유지, 둘째는 영국 제국의 유지 및 강화, 셋째는 국민의 조건(사회 복지) 개선이었다. 이는 당시 보수당이 귀족과 지주 계급만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이었다. 그는 "영국 보수주의는 국민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보수당을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제국주의(Imperialism)를 당의 핵심 의제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글래드스턴과 자유당은 식민지 유지를 경제적 부담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식민지의 점진적 독립까지 고려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국가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영국인들이 "편협한 섬나라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제국의 시민으로서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호소는 대영제국의 영광에 자부심을 느끼던 유권자들의 애국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는 훗날 '징고이즘(Jingoism)'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보수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을 형성하는 동력이 되었다.]
또한 디즈레일리는 이 연설에서 '위생(Sanitation)'을 국가적 과제로 내세웠다. 그는 "국민의 건강은 모든 것의 기초"라며, 산업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주거 환경과 위생 문제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보수주의가 단순한 현상 유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국 보수주의의 실천적 모델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털 팰리스 연설은 보수당이 단순히 과거에 매몰된 수구 집단이 아니라, 제국의 팽창과 사회 개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유능한 대안 세력임을 입증했다. 이 연설 직후 디즈레일리의 대중적 지지도는 폭발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는 2년 뒤인 18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30년 만에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40][41][42]
4.18. 1874년 총선 압승[편집]
파일:Benjamin_Disraeli_1878.jpg
라이벌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이끌던 자유당은 당시 내부 분열과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지친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 특히 글래드스턴의 금주법 관련 정책은 이른바 '맥주 제조업자와 대중 술집 주인들'의 분노를 샀고, 이는 보수당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디즈레일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영국의 영광과 안정을 되찾겠다"는 메시지를 던졌으며, 결과적으로 보수당은 350석을 확보하며 242석에 그친 자유당을 완파했다.[43]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30년 만에 하원의 확고한 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둔다. 글래드스턴은 패배를 시인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물론 나중에 복귀하지만)했으며, 디즈레일리는 70세의 나이에 드디어 실권 있는 총리로서 다시금 '정상의 유기적인 기둥'에 오르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영국 정치가 '자유주의적 개혁의 시대'에서 '보수주의적 제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44][45]
2월 20일,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조각 명명을 받고 두 번째 총리직에 올랐다. 1868년의 총리직이 사퇴를 앞둔 더비 백작의 잔여 임기를 물려받은 '관리형'이었다면, 이번에는 당당히 민의를 등에 업고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실권형' 총리로서의 등장이었다.
그는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 과거의 정적들까지 포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인도부 장관에 솔즈베리 경을, 외무장관에 제15대 더비 백작을 임명하며 당내 화합을 꾀했다. 특히 그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솔즈베리를 내각에 끌어들인 것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총리 취임 직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드디어 미끄러운 장대(Greasy pole)의 정상에 올랐다"는 그 유명한 소회를 다시금 되새기며, 자신의 정권이 단순히 자리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역사를 바꿀 것임을 예고했다.
1874년 내각의 출범은 단순히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점부터 보수주의를 '기득권 수호'라는 좁은 틀에서 해방시켜, '제국주의(Imperialism)'와 '사회 개혁(Social Reform)'이라는 두 기둥을 세운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당의 '자유방임주의'가 초래한 산업사회의 비극을 목도하며,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자신의 오랜 지론인 일국 보수주의를 정책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하층민들에게 "보수당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보호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보수당의 지지 기반을 귀족과 지주 계급에서 도시 노동자 계층으로 확장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46]
이 시기 디즈레일리 행정부의 가장 큰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바로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의 전폭적인 신뢰였다. 글래드스턴의 딱딱하고 교조적인 태도에 진저리를 쳤던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재치 있고 섬세하며 때로는 연인 같은(Courtier-like) 화법에 매료되었다.
그는 국정 보고를 할 때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들려주듯 보고했으며, 여왕을 "나의 군주"이자 "나의 여인"으로 대우하며 정서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이러한 유대 관계는 훗날 '인도 황제 추대'나 '수에즈 운하 매입' 같은 파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할 때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라이벌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이끌던 자유당은 당시 내부 분열과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지친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 특히 글래드스턴의 금주법 관련 정책은 이른바 '맥주 제조업자와 대중 술집 주인들'의 분노를 샀고, 이는 보수당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디즈레일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영국의 영광과 안정을 되찾겠다"는 메시지를 던졌으며, 결과적으로 보수당은 350석을 확보하며 242석에 그친 자유당을 완파했다.[43]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30년 만에 하원의 확고한 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둔다. 글래드스턴은 패배를 시인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물론 나중에 복귀하지만)했으며, 디즈레일리는 70세의 나이에 드디어 실권 있는 총리로서 다시금 '정상의 유기적인 기둥'에 오르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영국 정치가 '자유주의적 개혁의 시대'에서 '보수주의적 제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44][45]
2월 20일,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조각 명명을 받고 두 번째 총리직에 올랐다. 1868년의 총리직이 사퇴를 앞둔 더비 백작의 잔여 임기를 물려받은 '관리형'이었다면, 이번에는 당당히 민의를 등에 업고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실권형' 총리로서의 등장이었다.
그는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 과거의 정적들까지 포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인도부 장관에 솔즈베리 경을, 외무장관에 제15대 더비 백작을 임명하며 당내 화합을 꾀했다. 특히 그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솔즈베리를 내각에 끌어들인 것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총리 취임 직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드디어 미끄러운 장대(Greasy pole)의 정상에 올랐다"는 그 유명한 소회를 다시금 되새기며, 자신의 정권이 단순히 자리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역사를 바꿀 것임을 예고했다.
1874년 내각의 출범은 단순히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디즈레일리는 이 시점부터 보수주의를 '기득권 수호'라는 좁은 틀에서 해방시켜, '제국주의(Imperialism)'와 '사회 개혁(Social Reform)'이라는 두 기둥을 세운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당의 '자유방임주의'가 초래한 산업사회의 비극을 목도하며,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자신의 오랜 지론인 일국 보수주의를 정책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하층민들에게 "보수당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보호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보수당의 지지 기반을 귀족과 지주 계급에서 도시 노동자 계층으로 확장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46]
이 시기 디즈레일리 행정부의 가장 큰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바로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의 전폭적인 신뢰였다. 글래드스턴의 딱딱하고 교조적인 태도에 진저리를 쳤던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재치 있고 섬세하며 때로는 연인 같은(Courtier-like) 화법에 매료되었다.
그는 국정 보고를 할 때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들려주듯 보고했으며, 여왕을 "나의 군주"이자 "나의 여인"으로 대우하며 정서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이러한 유대 관계는 훗날 '인도 황제 추대'나 '수에즈 운하 매입' 같은 파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할 때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4.19. 2차 재임 시절[편집]
디즈레일리의 2차 내각이 영국 헌정사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는 단순히 외교적 성과나 제국주의적 팽창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현대 복지 국가의 초기 모델이자, 보수주의가 어떻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지를 보여주는 '일국 보수주의(One-nation Conservatism)'의 실천적 증명에 있었다. 1874년 총선 승리 후 디즈레일리는 내무장관 리처드 애슈턴 크로스(Richard Assheton Cross)와 함께 전례 없는 규모의 국내 개혁 입법을 쏟아냈다. 이는 당시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이 개인의 자유와 예산 절감을 강조하며 사회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행보였다.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업적은 1875년의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이다. 이 법안은 당시까지 파편화되어 있던 위생 관련 규정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지방 자치 단체에 배수 시설 개선, 쓰레기 처리, 수질 오염 방지 등에 대한 강력한 강제권을 부여했다.[47] 이 법은 이후 60년 동안 영국 공중보건 정책의 근간이 되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어지는 장인거주법(Artisans' Dwellings Act) 역시 혁신적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노동자들은 이른바 '슬럼(Slum)'이라 불리는 지옥 같은 환경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디즈레일리 정부는 이 법을 통해 지방 당국이 공공 보건을 해치는 불량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노동자들을 위한 깨끗한 주택을 건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국가가 사유 재산권에 개입하여 공익을 실현한 중대한 사례로 남았다. 비록 지방 자치 단체의 재량에 맡겼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국가는 가난한 자들의 삶에 개입할 의무가 있다'는 철학적 전환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조합법(Conspiracy and Protection of Property Act)과 고용주 및 노동자법(Employers and Workmen Act)은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던진 '미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이전까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음모죄'로 처벌받기 일쑤였으나, 디즈레일리는 평화적인 피케팅을 합법화하고 고용주와 노동자를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로 격상시켰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계약 위반 시 형사 처벌이 아닌 민사 소송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노동계급의 인권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결정적인 조치였다. 당시 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알렉산더 맥도널드(Alexander Macdonald)는 "보수당은 자유당이 10년 동안 말로만 했던 일을 단 2년 만에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
그 외에도 디즈레일리 정부는 아동과 여성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공장법(Factory Act)을 강화하고, 상선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선박의 과적을 금지하는 플림솔 라인(Plimsoll Line) 도입을 지원하는 등 사회 전반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열을 올렸다.[48]
이러한 개혁의 밑바탕에는 디즈레일리의 초기 소설 《시빌》에서 보여준 '두 개의 국가'론이 깔려 있었다. 그는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의 안녕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결국 영국은 혁명의 불길에 휩싸여 공멸할 것이라고 믿었다. 즉, 그의 사회 개혁은 좌파적인 평등주의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체제의 모순을 선제적으로 수정하는 '영리한 보수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는 보수당을 단순히 귀족과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정당'으로 재정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시기의 입법 활동은 디즈레일리가 단순한 정쟁의 기술자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중의 요구를 수용할 줄 아는 통치자였음을 증명한다. 그는 글래드스턴식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산업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는 훗날 현대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표를 흡수하며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49][50]
1875년 11월,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고 전격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대영제국의 인도 지배를 위한 핵심 통로인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디즈레일리 특유의 대담한 결단력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긴밀한 유대, 그리고 의회를 건너뛴 파격적인 행보가 집약된 사건이었다.
당시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는 운하 건설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였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는 무리한 근대화 사업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파산 직전에 몰린 이스마일 파샤는 자신이 보유한 수에즈 운하 주식 17만 6,602주를 프랑스 측에 매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51]
이 소식을 접한 디즈레일리는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당시 의회는 휴회 중이었고, 공식적인 예산 집행 절차를 밟기에는 프랑스 금융가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여기서 디즈레일리는 정공법 대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한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평소 친분이 깊었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에게 연락하여 거액의 자금을 긴급 요청했다.
당시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디즈레일리의 비서가 로스차일드를 찾아가 "총리께서 내일 당장 400만 파운드[52]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로스차일드는 포도를 먹으며 "담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비서가 "영국 정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대출이 성사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53]
자금을 확보한 디즈레일리는 전격적으로 주식을 매입했고, 사후 보고를 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열광했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승전보를 전했다.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업적은 1875년의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이다. 이 법안은 당시까지 파편화되어 있던 위생 관련 규정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지방 자치 단체에 배수 시설 개선, 쓰레기 처리, 수질 오염 방지 등에 대한 강력한 강제권을 부여했다.[47] 이 법은 이후 60년 동안 영국 공중보건 정책의 근간이 되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어지는 장인거주법(Artisans' Dwellings Act) 역시 혁신적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노동자들은 이른바 '슬럼(Slum)'이라 불리는 지옥 같은 환경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디즈레일리 정부는 이 법을 통해 지방 당국이 공공 보건을 해치는 불량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노동자들을 위한 깨끗한 주택을 건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국가가 사유 재산권에 개입하여 공익을 실현한 중대한 사례로 남았다. 비록 지방 자치 단체의 재량에 맡겼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국가는 가난한 자들의 삶에 개입할 의무가 있다'는 철학적 전환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조합법(Conspiracy and Protection of Property Act)과 고용주 및 노동자법(Employers and Workmen Act)은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던진 '미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이전까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음모죄'로 처벌받기 일쑤였으나, 디즈레일리는 평화적인 피케팅을 합법화하고 고용주와 노동자를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로 격상시켰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계약 위반 시 형사 처벌이 아닌 민사 소송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노동계급의 인권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결정적인 조치였다. 당시 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알렉산더 맥도널드(Alexander Macdonald)는 "보수당은 자유당이 10년 동안 말로만 했던 일을 단 2년 만에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
그 외에도 디즈레일리 정부는 아동과 여성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공장법(Factory Act)을 강화하고, 상선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선박의 과적을 금지하는 플림솔 라인(Plimsoll Line) 도입을 지원하는 등 사회 전반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열을 올렸다.[48]
이러한 개혁의 밑바탕에는 디즈레일리의 초기 소설 《시빌》에서 보여준 '두 개의 국가'론이 깔려 있었다. 그는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의 안녕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결국 영국은 혁명의 불길에 휩싸여 공멸할 것이라고 믿었다. 즉, 그의 사회 개혁은 좌파적인 평등주의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체제의 모순을 선제적으로 수정하는 '영리한 보수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는 보수당을 단순히 귀족과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정당'으로 재정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시기의 입법 활동은 디즈레일리가 단순한 정쟁의 기술자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중의 요구를 수용할 줄 아는 통치자였음을 증명한다. 그는 글래드스턴식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산업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는 훗날 현대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표를 흡수하며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49][50]
1875년 11월, 디즈레일리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고 전격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대영제국의 인도 지배를 위한 핵심 통로인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디즈레일리 특유의 대담한 결단력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긴밀한 유대, 그리고 의회를 건너뛴 파격적인 행보가 집약된 사건이었다.
당시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는 운하 건설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였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는 무리한 근대화 사업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파산 직전에 몰린 이스마일 파샤는 자신이 보유한 수에즈 운하 주식 17만 6,602주를 프랑스 측에 매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51]
이 소식을 접한 디즈레일리는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당시 의회는 휴회 중이었고, 공식적인 예산 집행 절차를 밟기에는 프랑스 금융가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여기서 디즈레일리는 정공법 대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한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평소 친분이 깊었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에게 연락하여 거액의 자금을 긴급 요청했다.
당시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디즈레일리의 비서가 로스차일드를 찾아가 "총리께서 내일 당장 400만 파운드[52]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로스차일드는 포도를 먹으며 "담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비서가 "영국 정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대출이 성사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53]
자금을 확보한 디즈레일리는 전격적으로 주식을 매입했고, 사후 보고를 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열광했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승전보를 전했다.
"당신께서 그것을 가지셨습니다, 마담.(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
이 조치로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가 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경제적 이득을 넘어 영국의 외교 정책을 '유럽 중심'에서 '제국 중심'으로 완전히 이동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또한 훗날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삼는 결정적인 명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의 전형적인 '독단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꼽힌다.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자유당 세력은 "헌법적 절차를 무시한 전제정치"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이라는 '특정 금융 자본'에 의존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는 점은 당시 반유대주의 정서와 결합하여 디즈레일리에 대한 공격 소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 매입은 대영제국의 번영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이 역사적 중론이다. 영국은 이를 통해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수에즈 운하는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제국주의의 '경동맥'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디즈레일리 개인에게는 '이방인' 출신의 총리가 대영제국의 국익을 위해 누구보다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일생일대의 쇼맨십이기도 했다.
4.20. 인도 황제 추대[편집]
영국 역사상 가장 이색적인 총리와 군주의 조합을 꼽으라면 단연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빅토리아 여왕의 관계일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단순한 정무 보고를 넘어, 여왕의 감성을 자극하는 화려한 수사학과 세련된 아부(?)를 통해 여왕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 정점이 바로 1876년의 왕실 칭호법(Royal Titles Act) 제정과 이를 통한 여왕의 '인도 여황제(Empress of India)' 취임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대할 때 마치 중세 기사가 주군을 대하듯, 혹은 연인에게 구애하듯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그는 사적인 편지에서 여왕을 '요정 여왕(The Faery)'[54]이라 부르며 찬사했고, 이는 남편 앨버트 공을 잃고 오랫동안 상심에 빠져 있던 여왕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당시 여왕은 자신의 자녀들이 독일 제국이나 다른 유럽 황실의 가문과 혼인하면서, 직함 면에서 그들보다 아래에 놓이는 것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차르나 독일의 황제(Kaiser)에 비해 '일개 국왕(Queen)'이라는 칭호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디즈레일리는 이러한 여왕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기로 결심했다.
1876년,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을 필두로 한 자유당 세력은 "영국적인 전통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이고 동양적인 전제주의의 상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영국 국왕이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것 자체가 헌법적 전통을 파괴한다는 논리였다.
언론 또한 "디즈레일리가 여왕을 위해 금박을 입힌 장난감을 선물하려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웅변술로 이를 돌파했다. 그는 인도가 대영제국의 가장 소중한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임을 강조하며, 인도인들에게 영국 군주의 권위를 확고히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황제'라는 칭호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고, 1877년 1월 1일 델리에서 성대한 '델리 더바(Delhi Durbar)'[55]가 개최되어 여왕의 즉위를 알렸다.
이 사건은 단순히 명칭 하나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이는 대영제국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음을 선포한 상징적 조치였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통해 영국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켰으며, 보수당을 '제국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왕은 이 선물을 준 디즈레일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여왕은 그에게 비콘즈필드 백작(Earl of Beaconsfield) 작위를 수여했으며, 그가 의회에서 연설할 때면 직접 꽃을 보내 격려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 영국의 전성기를 이끄는 강력한 정치적 파트너십으로 진화했다. 이 시기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서명 뒤에 'V.R.I.(Victoria Regina Imperatrix)'라는 칭호를 덧붙이기 시작했다.[56][57]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대할 때 마치 중세 기사가 주군을 대하듯, 혹은 연인에게 구애하듯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그는 사적인 편지에서 여왕을 '요정 여왕(The Faery)'[54]이라 부르며 찬사했고, 이는 남편 앨버트 공을 잃고 오랫동안 상심에 빠져 있던 여왕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당시 여왕은 자신의 자녀들이 독일 제국이나 다른 유럽 황실의 가문과 혼인하면서, 직함 면에서 그들보다 아래에 놓이는 것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차르나 독일의 황제(Kaiser)에 비해 '일개 국왕(Queen)'이라는 칭호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디즈레일리는 이러한 여왕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기로 결심했다.
1876년,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을 필두로 한 자유당 세력은 "영국적인 전통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이고 동양적인 전제주의의 상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영국 국왕이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것 자체가 헌법적 전통을 파괴한다는 논리였다.
언론 또한 "디즈레일리가 여왕을 위해 금박을 입힌 장난감을 선물하려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웅변술로 이를 돌파했다. 그는 인도가 대영제국의 가장 소중한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임을 강조하며, 인도인들에게 영국 군주의 권위를 확고히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황제'라는 칭호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고, 1877년 1월 1일 델리에서 성대한 '델리 더바(Delhi Durbar)'[55]가 개최되어 여왕의 즉위를 알렸다.
이 사건은 단순히 명칭 하나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이는 대영제국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음을 선포한 상징적 조치였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통해 영국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켰으며, 보수당을 '제국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왕은 이 선물을 준 디즈레일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여왕은 그에게 비콘즈필드 백작(Earl of Beaconsfield) 작위를 수여했으며, 그가 의회에서 연설할 때면 직접 꽃을 보내 격려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 영국의 전성기를 이끄는 강력한 정치적 파트너십으로 진화했다. 이 시기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서명 뒤에 'V.R.I.(Victoria Regina Imperatrix)'라는 칭호를 덧붙이기 시작했다.[56][57]
4.21. 귀족 작위 수여[편집]
1876년에 접어들며 디즈레일리의 건강 상태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는데, 현대의 70세와 달리 19세기의 70세는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노인' 그 자체였다. 평생을 괴롭혀온 통풍(Gout)은 발등을 넘어 온몸으로 퍼졌고, 만성적인 기관지염과 천식은 그가 하원에서 장시간 연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영국 하원은 그야말로 '정치적 격투장'이었다. 총리로서 정부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몇 시간씩 서서 야당의 파상공세를 받아내야 했고, 특히 숙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추궁은 디즈레일리의 남은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더 이상 하원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하원 의원직을 버리고 상원(House of Lords)으로 영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876년 8월 11일, 디즈레일리는 하원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마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였기에 동료 의원들은 그것이 그가 하원에 남기는 작별 인사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비콘즈필드 백작(Earl of Beaconsfield)' 및 '허거든의 비콘즈필드 자작'으로 서임했다.[58]
이 사건은 영국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평민 출신의 '이방인'이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귀족 반열에 오른 것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성공 신화였다. 동시에 이는 그가 더 이상 하원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고, 상원의 원로로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본인에게 이 작위는 단순한 명예 그 이상이었다. 그는 평생 유대인 혈통과 낮은 가문 배경 때문에 보수당 내부의 정통 귀족들에게 '근본 없는 야심가'라는 은근한 멸시를 받아왔다. 백작 작위 수여는 그가 영국의 지배 계층(Establishment) 내부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상징하는 최후의 인장과도 같았다.
작위 서임 소식이 알려졌을 때, 그의 정적들은 "결국 저 댄디(Dandy)가 가짜 관을 머리에 썼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상원에 처음 출석하는 날,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화려한 귀족 예복을 차려입고 나타나 그들을 침묵시켰다.
디즈레일리의 작위 수여 배경에는 빅토리아 여왕과의 유례없는 친밀함이 있었다. 여왕은 고지식하고 교조적인 글래드스턴을 혐오했던 반면, 자신을 '여황제'로 만들어주고 특유의 재치와 아첨(Flattery)[59]로 자신을 달래주는 디즈레일리를 무척 아꼈다.
여왕은 기력이 쇠한 총리가 하원에서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귀족 작위를 먼저 제안할 정도였다. 작위 수여 이후 여왕은 그를 '나의 친애하는 비콘즈필드 경'이라 부르며 더욱 신뢰했고, 이는 디즈레일리가 행정부 장관들을 장악하고 외교 정책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상원으로 옮긴 후에도 하원에 있는 대리인들을 통해 국정 운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상원 행이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디즈레일리는 하원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상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보수당 하원 의원들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야당의 공세를 차단해주던 '최고의 검객'이 사라진 자리는 컸다.
반면 야당의 글래드스턴은 하원에 남아 도덕주의적 열변을 토하며 대중 선동의 고삐를 당겼다. 훗날 역사가들은 디즈레일리가 상원으로 도피하듯 옮겨간 것이, 결과적으로 보수당이 하원에서의 여론 주도권을 자유당에게 내주는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백작이 된 후에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이제 내 소설 속 주인공 중 하나가 된 기분이다"라며 스스로의 삶을 극화(Dramatize)하는 면모를 보였다. 사실 그는 이미 1868년에 자신의 아내인 메리 앤에게 '비콘즈필드 자작부인' 작위를 내리도록 여왕에게 요청하여 성사시킨 바 있다. 본인은 당시 하원에 남기 위해 작위를 거절했으나, 아내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아내를 먼저 귀족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영국 하원은 그야말로 '정치적 격투장'이었다. 총리로서 정부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몇 시간씩 서서 야당의 파상공세를 받아내야 했고, 특히 숙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추궁은 디즈레일리의 남은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더 이상 하원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하원 의원직을 버리고 상원(House of Lords)으로 영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876년 8월 11일, 디즈레일리는 하원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마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였기에 동료 의원들은 그것이 그가 하원에 남기는 작별 인사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비콘즈필드 백작(Earl of Beaconsfield)' 및 '허거든의 비콘즈필드 자작'으로 서임했다.[58]
이 사건은 영국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평민 출신의 '이방인'이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귀족 반열에 오른 것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성공 신화였다. 동시에 이는 그가 더 이상 하원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고, 상원의 원로로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본인에게 이 작위는 단순한 명예 그 이상이었다. 그는 평생 유대인 혈통과 낮은 가문 배경 때문에 보수당 내부의 정통 귀족들에게 '근본 없는 야심가'라는 은근한 멸시를 받아왔다. 백작 작위 수여는 그가 영국의 지배 계층(Establishment) 내부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상징하는 최후의 인장과도 같았다.
작위 서임 소식이 알려졌을 때, 그의 정적들은 "결국 저 댄디(Dandy)가 가짜 관을 머리에 썼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상원에 처음 출석하는 날,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화려한 귀족 예복을 차려입고 나타나 그들을 침묵시켰다.
디즈레일리의 작위 수여 배경에는 빅토리아 여왕과의 유례없는 친밀함이 있었다. 여왕은 고지식하고 교조적인 글래드스턴을 혐오했던 반면, 자신을 '여황제'로 만들어주고 특유의 재치와 아첨(Flattery)[59]로 자신을 달래주는 디즈레일리를 무척 아꼈다.
여왕은 기력이 쇠한 총리가 하원에서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귀족 작위를 먼저 제안할 정도였다. 작위 수여 이후 여왕은 그를 '나의 친애하는 비콘즈필드 경'이라 부르며 더욱 신뢰했고, 이는 디즈레일리가 행정부 장관들을 장악하고 외교 정책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상원으로 옮긴 후에도 하원에 있는 대리인들을 통해 국정 운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상원 행이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디즈레일리는 하원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상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보수당 하원 의원들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야당의 공세를 차단해주던 '최고의 검객'이 사라진 자리는 컸다.
반면 야당의 글래드스턴은 하원에 남아 도덕주의적 열변을 토하며 대중 선동의 고삐를 당겼다. 훗날 역사가들은 디즈레일리가 상원으로 도피하듯 옮겨간 것이, 결과적으로 보수당이 하원에서의 여론 주도권을 자유당에게 내주는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백작이 된 후에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이제 내 소설 속 주인공 중 하나가 된 기분이다"라며 스스로의 삶을 극화(Dramatize)하는 면모를 보였다. 사실 그는 이미 1868년에 자신의 아내인 메리 앤에게 '비콘즈필드 자작부인' 작위를 내리도록 여왕에게 요청하여 성사시킨 바 있다. 본인은 당시 하원에 남기 위해 작위를 거절했으나, 아내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아내를 먼저 귀족으로 만든 것이다.
4.22. 동방 문제와 러시아[편집]
1870년대 중반,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발칸 반도는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에서 시작된 기독교 농민들의 봉기는 순식간에 보스니아, 불가리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소위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60]가 다시금 유럽 외교의 최전선으로 부상한 것이다.
디즈레일리에게 이 사태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의 세계 패권, 특히 인도에 이르는 '제국의 생명선'을 위협하는 중대한 안보 위기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워 발칸의 형제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남하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는데, 디즈레일리의 눈에 비친 러시아의 진출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점령,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지중해와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권 장악을 의미했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진압이었다. 1876년 불가리아 봉기 당시 오스만 군대(바시 보주크)는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이 소식은 영국 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때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도끼질(나무 베기)로 소일하던 디즈레일리의 숙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글래드스턴은 저명한 팜플렛 《불가리아의 공포와 동방 문제》를 발표하며, 이슬람교도인 오스만 투르크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위대한 반인류적 인종"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도덕적 외교를 강조하며 오스만과의 단절을 요구했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냉혹한 현실주의자(Realpolitiker)였다. 그는 학살 보도를 "커피하우스의 잡담"이라며 축소 보고받았고, 사적인 편지에서는 학살에 분노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국익을 위해 투르크의 영토 보전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디즈레일리는 대중으로부터 "유대인 혈통이라 기독교인의 고통에 무심하다"거나 "살인마 투르크의 친구"라는 극심한 인신공격에 시달려야 했다.[61] 하지만 그는 꿋꿋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도덕은 감상주의가 아니라 영국 제국의 안녕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결국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코앞인 산 스테파노까지 진격했다. 여기서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은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대(大)불가리아를 탄생시켜 사실상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오는 고속도로를 닦아준 꼴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즉각 반응했다. 그는 지중해 함대를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출격시키고, 인도 주둔군을 몰타로 이동시키는 등 전쟁 불사 배수진을 쳤다. 당시 영국 대중 사이에서는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만약 싸워야 한다면(Jingo) 배도 있고 사람도 있고 돈도 있다!"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여기서 바로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디즈레일리의 전략은 러시아를 외교적 고립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포섭하여 러시아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전쟁으로 지친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그는 만약 러시아가 양보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는 단호한 신호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디즈레일리는 고령과 지병(통풍, 천식)으로 고생하면서도 직접 외교전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단순히 오스만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쥘 수 있는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베를린 회의에서 키프로스 점령으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디즈레일리의 이 시기 행보는 현대 보수주의 외교의 원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가치나 이념(기독교적 형제애 등)보다 국가 간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과 지정학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는 훗날 처칠이나 대처의 외교적 결단력과도 맥을 같이 한다.
결국 그의 강경한 태도에 굴복한 러시아는 국제 회의를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하는 데 동의했고, 무대는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는 디즈레일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자, 19세기 유럽 외교사의 정점인 '베를린 회의'의 시작이었다.
디즈레일리에게 이 사태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의 세계 패권, 특히 인도에 이르는 '제국의 생명선'을 위협하는 중대한 안보 위기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워 발칸의 형제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남하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는데, 디즈레일리의 눈에 비친 러시아의 진출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점령,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지중해와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권 장악을 의미했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진압이었다. 1876년 불가리아 봉기 당시 오스만 군대(바시 보주크)는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이 소식은 영국 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때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도끼질(나무 베기)로 소일하던 디즈레일리의 숙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글래드스턴은 저명한 팜플렛 《불가리아의 공포와 동방 문제》를 발표하며, 이슬람교도인 오스만 투르크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위대한 반인류적 인종"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도덕적 외교를 강조하며 오스만과의 단절을 요구했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냉혹한 현실주의자(Realpolitiker)였다. 그는 학살 보도를 "커피하우스의 잡담"이라며 축소 보고받았고, 사적인 편지에서는 학살에 분노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국익을 위해 투르크의 영토 보전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디즈레일리는 대중으로부터 "유대인 혈통이라 기독교인의 고통에 무심하다"거나 "살인마 투르크의 친구"라는 극심한 인신공격에 시달려야 했다.[61] 하지만 그는 꿋꿋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도덕은 감상주의가 아니라 영국 제국의 안녕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결국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코앞인 산 스테파노까지 진격했다. 여기서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은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대(大)불가리아를 탄생시켜 사실상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오는 고속도로를 닦아준 꼴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즉각 반응했다. 그는 지중해 함대를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출격시키고, 인도 주둔군을 몰타로 이동시키는 등 전쟁 불사 배수진을 쳤다. 당시 영국 대중 사이에서는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만약 싸워야 한다면(Jingo) 배도 있고 사람도 있고 돈도 있다!"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여기서 바로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디즈레일리의 전략은 러시아를 외교적 고립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포섭하여 러시아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전쟁으로 지친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그는 만약 러시아가 양보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는 단호한 신호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디즈레일리는 고령과 지병(통풍, 천식)으로 고생하면서도 직접 외교전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단순히 오스만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쥘 수 있는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베를린 회의에서 키프로스 점령으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디즈레일리의 이 시기 행보는 현대 보수주의 외교의 원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가치나 이념(기독교적 형제애 등)보다 국가 간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과 지정학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는 훗날 처칠이나 대처의 외교적 결단력과도 맥을 같이 한다.
결국 그의 강경한 태도에 굴복한 러시아는 국제 회의를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하는 데 동의했고, 무대는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는 디즈레일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자, 19세기 유럽 외교사의 정점인 '베를린 회의'의 시작이었다.
4.23. 베를린 회의[편집]
파일:Disraeli_at_Berlin_Congress.jpg
19세기 후반, 소위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62]가 정점에 달했을 때, 디즈레일리는 그의 정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외교적 승리를 거둔다. 바로 1878년의 베를린 회의다.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라는 정치가가 단순히 국내용 변론가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거물급 외교 전략가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77년 발생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을 완파했고,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거대 불가리아'의 탄생이었다. 만약 이대로 확정된다면 러시아는 발칸 반도를 장악하고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며, 이는 영국의 생명선인 인도 항로와 직결된 수에즈 운하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면 할 것이다(We don't want to fight, but by Jingo if we do...)"라는 유행가 가사에서 유래한 징고이즘[63]이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단순한 감정적 대응을 넘어, 냉철하게 러시아를 압박할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디즈레일리는 당시 유럽의 중재자를 자처하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마주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이 유대인 출신의 영국 총리를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그의 통찰력과 단호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훗날 디즈레일리를 가리켜 "저 유대인 영감이야말로 진짜 사내다(Der alte Jude, das ist der Mann)"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당시 디즈레일리는 통풍으로 고생하며 지팡이에 의지하는 노인이었으나, 회의장에서는 러시아 대표단을 향해 "영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예약하겠다"며 배수진을 치는 등 노련한 심리전을 펼쳤다.
회의의 결과는 영국의 완승에 가까웠다.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약속된 '거대 불가리아'는 삼등분되어 대폭 축소되었고,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 시도는 좌절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오스만 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분하에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키프로스를 영국의 관할권으로 가져오는 밀약에 성공했다. 이는 지중해 제해권을 공고히 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6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통치권을 넘겨줌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할 또 다른 축을 만들었다.
1878년 7월 16일, 베를린에서 돌아온 디즈레일리는 차링 크로스 역을 가득 메운 군중 앞에서 승전보를 알렸다.[65]
19세기 후반, 소위 '동방 문제(Eastern Question)'[62]가 정점에 달했을 때, 디즈레일리는 그의 정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외교적 승리를 거둔다. 바로 1878년의 베를린 회의다.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라는 정치가가 단순히 국내용 변론가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거물급 외교 전략가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77년 발생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을 완파했고,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거대 불가리아'의 탄생이었다. 만약 이대로 확정된다면 러시아는 발칸 반도를 장악하고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며, 이는 영국의 생명선인 인도 항로와 직결된 수에즈 운하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면 할 것이다(We don't want to fight, but by Jingo if we do...)"라는 유행가 가사에서 유래한 징고이즘[63]이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단순한 감정적 대응을 넘어, 냉철하게 러시아를 압박할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디즈레일리는 당시 유럽의 중재자를 자처하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마주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이 유대인 출신의 영국 총리를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그의 통찰력과 단호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훗날 디즈레일리를 가리켜 "저 유대인 영감이야말로 진짜 사내다(Der alte Jude, das ist der Mann)"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당시 디즈레일리는 통풍으로 고생하며 지팡이에 의지하는 노인이었으나, 회의장에서는 러시아 대표단을 향해 "영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예약하겠다"며 배수진을 치는 등 노련한 심리전을 펼쳤다.
회의의 결과는 영국의 완승에 가까웠다.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약속된 '거대 불가리아'는 삼등분되어 대폭 축소되었고,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 시도는 좌절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오스만 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분하에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키프로스를 영국의 관할권으로 가져오는 밀약에 성공했다. 이는 지중해 제해권을 공고히 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6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통치권을 넘겨줌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할 또 다른 축을 만들었다.
1878년 7월 16일, 베를린에서 돌아온 디즈레일리는 차링 크로스 역을 가득 메운 군중 앞에서 승전보를 알렸다.[65]
"나는 베를린에서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명예로운 평화'이기를 바랍니다."
이 발언은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었으며, 그는 이 공로로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비록 훗날 이 '명예로운 평화'가 발칸 반도의 복잡한 민족 문제를 덮어둔 임시방편이었다는 비판[66]을 받기도 하지만, 당대 영국인들에게 디즈레일리는 제국의 영광을 구한 영웅 그 자체였다.
정치적으로도 이는 디즈레일리 생애 최정점의 순간이었다. 라이벌 글래드스턴이 "도덕성이 결여된 외교"라고 맹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디즈레일리의 당당한 '제국적 기상'에 열광했다. 그는 70세가 넘은 고령과 악화되는 건강 속에서도 오로지 의지와 지략만으로 유럽의 지도자들을 압도하며 영국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4.24. 아프가니스탄과 줄루 전쟁[편집]
디즈레일리 행정부 후반기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단연 '전향적 제국주의(Forward Policy)'였다. 베를린 회의의 성공으로 고무된 디즈레일리와 보수당 내각은 영국 제국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 인근과 아프리카에서 공격적인 외교 노선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현지 사령관들의 독단과 디즈레일리 내각의 안일한 판단이 겹치며, 대영제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1870년대 후반,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정보전 및 세력 다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를 위협할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1878년, 러시아 사절단이 카불에 입성하자 인도 총독 리튼 경(Lord Lytton)은 디즈레일리의 묵인하에 아프가니스탄의 아미르인 셔 알리 칸에게 영국 사절단 수용을 강요했다.
아미르가 이를 거부하자 영국군은 즉각 침공을 개시했고, 초기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카불을 점령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1879년 간다마크 조약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장악하며 디즈레일리의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카불에 주재하던 영국 정무관 루이 카바냐리가 현지 폭동으로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장기적인 게릴라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디즈레일리에게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부채가 되었다. '명예로운 평화'를 외치던 그가 실제로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힌두쿠시 산맥의 험지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67]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79년 1월, 남아프리카에서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바로 이산들와나 전투에서의 참패였다. 당시 나탈 식민지의 고등판무관 바틀 프리어 경은 본국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줄루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는 줄루 전쟁으로 이어졌다.
디즈레일리는 당시 유럽 정세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프리카에서의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프리어와 첼름스퍼드 경은 독단적으로 전쟁을 밀어붙였고, 방심했던 영국군은 창과 방패로 무장한 줄루 전사들에게 1,300여 명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런던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이 어떻게 미개한 원주민에게 패배할 수 있는가?"라는 분노가 쏟아졌다. 디즈레일리는 이 패배에 대해 깊은 자괴감을 느꼈으며, 특히 하원에서 야당의 맹공을 방어하는 데 애를 먹었다. 비록 이후 울룬디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쟁 자체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적 유능함'에 대한 신뢰는 이미 금이 간 상태였다.
줄루 전쟁은 디즈레일리에게 개인적인 슬픔도 안겨주었다. 프랑스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계자이자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유진 나폴레옹(나폴레옹 4세)이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줄루 전사들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유진을 아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향후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던 정치적 포석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진의 전사 소식을 듣고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죽으라고 보낸 것도 아니지만, 결국 우리의 전쟁에서 죽었다"며 한탄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오는 비극적인 희생을 상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 시기의 분쟁들은 디즈레일리가 주창한 '대영제국의 위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기에는 영국의 국력이 소모적이었다. 리튼이나 프리어 같은 현지 관료들의 독단은 행정부의 장악력을 약화시켰다. 문명 전파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영토 확장과 세력권 다툼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군사적 모험주의는 디즈레일리 내각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고, 국내의 농업 불황과 맞물리며 보수당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외교적 천재성을 발휘해 베를린에서 승리했으나, 제국의 끝자락에서 벌어진 작은 불길들이 그의 거대한 성을 태우기 시작한 셈이다.
1870년대 후반,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정보전 및 세력 다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를 위협할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1878년, 러시아 사절단이 카불에 입성하자 인도 총독 리튼 경(Lord Lytton)은 디즈레일리의 묵인하에 아프가니스탄의 아미르인 셔 알리 칸에게 영국 사절단 수용을 강요했다.
아미르가 이를 거부하자 영국군은 즉각 침공을 개시했고, 초기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카불을 점령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1879년 간다마크 조약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장악하며 디즈레일리의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카불에 주재하던 영국 정무관 루이 카바냐리가 현지 폭동으로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장기적인 게릴라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디즈레일리에게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부채가 되었다. '명예로운 평화'를 외치던 그가 실제로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힌두쿠시 산맥의 험지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67]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79년 1월, 남아프리카에서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바로 이산들와나 전투에서의 참패였다. 당시 나탈 식민지의 고등판무관 바틀 프리어 경은 본국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줄루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는 줄루 전쟁으로 이어졌다.
디즈레일리는 당시 유럽 정세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프리카에서의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프리어와 첼름스퍼드 경은 독단적으로 전쟁을 밀어붙였고, 방심했던 영국군은 창과 방패로 무장한 줄루 전사들에게 1,300여 명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런던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이 어떻게 미개한 원주민에게 패배할 수 있는가?"라는 분노가 쏟아졌다. 디즈레일리는 이 패배에 대해 깊은 자괴감을 느꼈으며, 특히 하원에서 야당의 맹공을 방어하는 데 애를 먹었다. 비록 이후 울룬디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쟁 자체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적 유능함'에 대한 신뢰는 이미 금이 간 상태였다.
줄루 전쟁은 디즈레일리에게 개인적인 슬픔도 안겨주었다. 프랑스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계자이자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유진 나폴레옹(나폴레옹 4세)이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줄루 전사들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유진을 아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향후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던 정치적 포석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진의 전사 소식을 듣고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죽으라고 보낸 것도 아니지만, 결국 우리의 전쟁에서 죽었다"며 한탄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오는 비극적인 희생을 상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 시기의 분쟁들은 디즈레일리가 주창한 '대영제국의 위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기에는 영국의 국력이 소모적이었다. 리튼이나 프리어 같은 현지 관료들의 독단은 행정부의 장악력을 약화시켰다. 문명 전파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영토 확장과 세력권 다툼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군사적 모험주의는 디즈레일리 내각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고, 국내의 농업 불황과 맞물리며 보수당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외교적 천재성을 발휘해 베를린에서 승리했으나, 제국의 끝자락에서 벌어진 작은 불길들이 그의 거대한 성을 태우기 시작한 셈이다.
4.25. 농업 불황과 몰락[편집]
디즈레일리 행정부 말기인 1870년대 후반, 영국 경제, 특히 농업 부문은 전례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흔히 '영국 농업의 대불황'이라 불리는 이 시기는 단순히 날씨가 나빴던 수준을 넘어, 대영제국이 유지해온 경제 체제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었다. 1877년부터 1879년까지 이어진 유례없는 흉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오고 있었다.
미국 내전(남북전쟁) 이후 철도가 미 대륙을 가로지르고, 거대 증기선들이 대서양을 정기적으로 횡단하게 되면서 미국의 저렴한 밀이 영국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라면 곡물법 등으로 보호받았을 영국 농민들이었으나, 이미 1846년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명실상부한 자유무역 국가였다. 디즈레일리 본인이 과거 로버트 필을 그토록 맹렬하게 비난하며 곡물법 폐지를 반대했던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권좌에 앉아 있을 때 그 독배를 마시게 된 것은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 농촌의 비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지주들은 임대료를 받지 못해 파산했고, 농업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도시의 빈민가로 흘러 들어갔다. "과거 보수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농촌 지역이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68]
상황이 이쯤 되자 보수당 내부, 특히 지방 지주 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보호무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디즈레일리에게 관세를 부과하여 외국산 곡물을 막아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여기서 정치적 냉혹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1852년에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갔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산업화가 고도화된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빵값을 올리는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것은 보수당의 자살 행위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농민들의 편을 들어 관세를 올린다면, 그가 공들여 쌓아온 일국 보수주의 즉, 노동계급과 보수당의 결탁은 단숨에 무너질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농업 지원책을 내놓긴 했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보수당의 전통적 기반인 지주 계층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은 "우리 덕분에 총리가 된 유대인 댄디가 정작 우리가 죽어갈 때는 외면한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디즈레일리가 '제국'과 '개혁'이라는 화려한 구호에 매몰되어, 정작 당의 뿌리가 썩어가는 것을 방치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 상황만 나빴던 것이 아니었다. 1878년부터 1880년 사이 디즈레일리 정부는 말 그대로 '운이 없었다'. 상업 공황이 발생하여 실업률이 치솟았고, 그가 공들였던 외교 정책조차 비용 문제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특히 1879년은 디즈레일리에게 최악의 해였다. 1월에는 아프리카에서 이산들와나 전투의 참패 소식이 전해졌고,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영국 사절단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는 파탄인데 해외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전개되자, 대중의 시선은 급격히 차가워졌다.
라이벌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들로디언 캠페인'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선거 운동을 발명해내며 디즈레일리의 '부도덕한 외교'와 '경제적 무능'을 맹폭했다. 디즈레일리는 이제 비콘즈필드 백작이 되어 상원에 머물고 있었기에, 하원에서 글래드스턴의 화력을 직접 받아낼 수도 없었다.
보수당의 기반은 크게 세 축이었다. 농촌의 지주, 교회의 성공회 신자들, 그리고 디즈레일리가 포섭한 도시 노동자들. 하지만 1870년대 말의 불황은 이 세 축을 모두 흔들었다.
미국 내전(남북전쟁) 이후 철도가 미 대륙을 가로지르고, 거대 증기선들이 대서양을 정기적으로 횡단하게 되면서 미국의 저렴한 밀이 영국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라면 곡물법 등으로 보호받았을 영국 농민들이었으나, 이미 1846년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명실상부한 자유무역 국가였다. 디즈레일리 본인이 과거 로버트 필을 그토록 맹렬하게 비난하며 곡물법 폐지를 반대했던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권좌에 앉아 있을 때 그 독배를 마시게 된 것은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 농촌의 비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지주들은 임대료를 받지 못해 파산했고, 농업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도시의 빈민가로 흘러 들어갔다. "과거 보수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농촌 지역이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68]
상황이 이쯤 되자 보수당 내부, 특히 지방 지주 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보호무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디즈레일리에게 관세를 부과하여 외국산 곡물을 막아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여기서 정치적 냉혹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1852년에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갔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산업화가 고도화된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빵값을 올리는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것은 보수당의 자살 행위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농민들의 편을 들어 관세를 올린다면, 그가 공들여 쌓아온 일국 보수주의 즉, 노동계급과 보수당의 결탁은 단숨에 무너질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농업 지원책을 내놓긴 했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보수당의 전통적 기반인 지주 계층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은 "우리 덕분에 총리가 된 유대인 댄디가 정작 우리가 죽어갈 때는 외면한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디즈레일리가 '제국'과 '개혁'이라는 화려한 구호에 매몰되어, 정작 당의 뿌리가 썩어가는 것을 방치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 상황만 나빴던 것이 아니었다. 1878년부터 1880년 사이 디즈레일리 정부는 말 그대로 '운이 없었다'. 상업 공황이 발생하여 실업률이 치솟았고, 그가 공들였던 외교 정책조차 비용 문제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특히 1879년은 디즈레일리에게 최악의 해였다. 1월에는 아프리카에서 이산들와나 전투의 참패 소식이 전해졌고,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영국 사절단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는 파탄인데 해외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전개되자, 대중의 시선은 급격히 차가워졌다.
라이벌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들로디언 캠페인'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선거 운동을 발명해내며 디즈레일리의 '부도덕한 외교'와 '경제적 무능'을 맹폭했다. 디즈레일리는 이제 비콘즈필드 백작이 되어 상원에 머물고 있었기에, 하원에서 글래드스턴의 화력을 직접 받아낼 수도 없었다.
보수당의 기반은 크게 세 축이었다. 농촌의 지주, 교회의 성공회 신자들, 그리고 디즈레일리가 포섭한 도시 노동자들. 하지만 1870년대 말의 불황은 이 세 축을 모두 흔들었다.
- 농민: 불황 속에 방치되었다는 배신감.
- 도시 노동자: 실업과 고물가로 인한 실질 임금 하락.
- 납세자: 끊이지 않는 식민지 전쟁 비용에 대한 피로감.
결국 1880년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 내부에선 "이번엔 힘들다"는 패배주의가 팽배해졌다. 디즈레일리 특유의 낙관주의도 노쇠함과 지병(천식 및 통풍)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영국의 위엄"을 외쳤지만, 당장 먹고살기 힘들어진 유권자들에게 그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었다.[69]
4.26. 1880년 총선 패배[편집]
1870년대 후반,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는 베를린 회의의 성공으로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왔다는 찬사 속에 정권의 정점에 서 있었다. 여왕의 전폭적인 신뢰와 제국주의적 열광은 영구 집권을 가능케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교적 성과 이면에서 영국의 내실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18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대불황(Great Depression of Agriculture)'은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지주와 농민들을 직격했다.[70]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건강 악화와 상원 진출로 인해 민심의 밑바닥을 읽는 데 소홀해졌다. 그는 대중이 여전히 제국의 영광에 취해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이나 인도 여황제의 칭호가 아니라, 식탁에 올릴 빵값과 일자리였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나무나 패던 '늙은 사자'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실책을 놓치지 않았다. 1879년 말, 글래드스턴은 스코틀랜드의 미들로디언(Midlothian) 선거구에 출마하며 현대 정치사의 전설로 남을 '미들로디언 캠페인'을 전개한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후보자가 직접 유권자 대중을 찾아다니며 대규모 야외 연설을 행한 사실상의 첫 번째 현대적 선거 운동이었다.
글래드스턴의 연설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그는 디즈레일리의 외교 정책을 '비도덕적이고 비용만 많이 드는 허세'라고 규정하며, '비콘즈필드주의(Beaconsfieldism)'를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과 줄루 전쟁의 참혹함을 도덕적 잣대로 비판하며 기독교적 양심에 호소했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두고 "정치적 열광주의자의 헛소리"라며 냉소했지만, 글래드스턴의 불같은 사자후는 불황에 지친 노동자와 중산층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71]
1880년 3월, 디즈레일리는 마침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단행했다. 그는 여전히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보수당의 참패였다. 자유당이 352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둔 반면, 보수당은 23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패배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농업 불황에 따른 지지층의 이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지부진한 전쟁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적이지 못했던 보수당의 선거 전략이 문제였다. 디즈레일리는 귀족적인 상원 의원이 되어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그가 내세웠던 '일국 보수주의'는 당장의 경제난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자유당은 조지프 체임벌린이 구축한 강력한 당원 조직(Caucus)을 앞세워 유권자들을 촘촘히 공략했다.
결과가 발표되자 디즈레일리는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윈저 성을 방문했다. 여왕은 자신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가 증오해 마지않는 글래드스턴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사실에 분노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전해진다.[72]
이 총선 패배는 단순히 한 정권의 몰락을 넘어, 영국 정치의 패러다임이 '제국의 영광'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민생과 도덕'이라는 실질적 가치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디즈레일리라는 거인이 무대 뒤로 퇴장할 준비를 시작하게 만든 결정타이기도 했다. 그는 야당 당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했으나, 이미 육체적 고통과 세월의 무게는 그를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건강 악화와 상원 진출로 인해 민심의 밑바닥을 읽는 데 소홀해졌다. 그는 대중이 여전히 제국의 영광에 취해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이나 인도 여황제의 칭호가 아니라, 식탁에 올릴 빵값과 일자리였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나무나 패던 '늙은 사자'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의 실책을 놓치지 않았다. 1879년 말, 글래드스턴은 스코틀랜드의 미들로디언(Midlothian) 선거구에 출마하며 현대 정치사의 전설로 남을 '미들로디언 캠페인'을 전개한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후보자가 직접 유권자 대중을 찾아다니며 대규모 야외 연설을 행한 사실상의 첫 번째 현대적 선거 운동이었다.
글래드스턴의 연설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그는 디즈레일리의 외교 정책을 '비도덕적이고 비용만 많이 드는 허세'라고 규정하며, '비콘즈필드주의(Beaconsfieldism)'를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과 줄루 전쟁의 참혹함을 도덕적 잣대로 비판하며 기독교적 양심에 호소했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두고 "정치적 열광주의자의 헛소리"라며 냉소했지만, 글래드스턴의 불같은 사자후는 불황에 지친 노동자와 중산층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71]
1880년 3월, 디즈레일리는 마침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단행했다. 그는 여전히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보수당의 참패였다. 자유당이 352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둔 반면, 보수당은 23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패배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농업 불황에 따른 지지층의 이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지부진한 전쟁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적이지 못했던 보수당의 선거 전략이 문제였다. 디즈레일리는 귀족적인 상원 의원이 되어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그가 내세웠던 '일국 보수주의'는 당장의 경제난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자유당은 조지프 체임벌린이 구축한 강력한 당원 조직(Caucus)을 앞세워 유권자들을 촘촘히 공략했다.
결과가 발표되자 디즈레일리는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윈저 성을 방문했다. 여왕은 자신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가 증오해 마지않는 글래드스턴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사실에 분노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전해진다.[72]
이 총선 패배는 단순히 한 정권의 몰락을 넘어, 영국 정치의 패러다임이 '제국의 영광'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민생과 도덕'이라는 실질적 가치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디즈레일리라는 거인이 무대 뒤로 퇴장할 준비를 시작하게 만든 결정타이기도 했다. 그는 야당 당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했으나, 이미 육체적 고통과 세월의 무게는 그를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다.
4.27. 마지막 소설 《엔디미온》[편집]
1880년 총선에서 숙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에게 참패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난 디즈레일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당시 그의 나이 76세였고, 평생을 괴롭힌 통풍과 천식은 이미 그를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동물'이자 '천생 문학가'였던 그는 평생을 따라다닌 빚을 청산하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문학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이때 집필된 작품이 바로 그의 마지막 완결 소설인《엔디미온(Endymion)》이다.
이 작품은 출판사 롱맨스(Longmans)로부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0,000파운드의 선인세를 받고 계약되었다.[73] 정계에서 물러난 전직 총리가 소설을 쓴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들썩였고, 이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19세기 영국 정계의 '뒷담화'이자 '회고록'으로 받아들여졌다.
소설의 배경은 1827년부터 1850년대까지의 영국 정계와 사교계이다. 주인공 엔디미온 페레스(Endymion Ferrars)는 몰락한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결국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엔디미온의 성공 가도는 디즈레일리 자신의 인생 역정을 투영한 것이다. 다만 디즈레일리는 본인의 자전적 캐릭터인 엔디미온을 실제 본인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수동적이며,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는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본인이 정계에서 겪었던 수많은 풍파와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의식하여, 자신의 성공이 개인의 야욕보다는 '운명'과 '주변의 헌신' 덕분이었다는 서사를 구축하려 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 소설이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진정한 백미인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당대 실존 인물들을 대놓고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출판사 롱맨스(Longmans)로부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0,000파운드의 선인세를 받고 계약되었다.[73] 정계에서 물러난 전직 총리가 소설을 쓴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들썩였고, 이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19세기 영국 정계의 '뒷담화'이자 '회고록'으로 받아들여졌다.
소설의 배경은 1827년부터 1850년대까지의 영국 정계와 사교계이다. 주인공 엔디미온 페레스(Endymion Ferrars)는 몰락한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결국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엔디미온의 성공 가도는 디즈레일리 자신의 인생 역정을 투영한 것이다. 다만 디즈레일리는 본인의 자전적 캐릭터인 엔디미온을 실제 본인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수동적이며,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는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본인이 정계에서 겪었던 수많은 풍파와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의식하여, 자신의 성공이 개인의 야욕보다는 '운명'과 '주변의 헌신' 덕분이었다는 서사를 구축하려 한 의도로 풀이된다.
이 소설이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진정한 백미인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당대 실존 인물들을 대놓고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 마이라(Myra): 주인공 엔디미온의 쌍둥이 누이이자 그를 총리로 만드는 결정적 조력자다. 그녀는 이후 외국 국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는데, 이는 디즈레일리의 평생의 후원자였던 여인들과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오마주가 섞여 있다.
- 글래드스턴: 당연히 그의 정적 글래드스턴을 모델로 한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디즈레일리는 소설 속에서 그를 매우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인물로 은근슬쩍 깎아내리며 마지막 복수를 감행했다.
소설 《엔디미온》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치는 지성만큼이나 감정과 야망, 그리고 운에 좌우되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하원(House of Commons)의 생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하원은 감정의 전당이다. 논리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열정과 그 사람만의 매력이다."
이는 철저하게 통계와 도덕적 당위성을 강조했던 글래드스턴의 정치관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디즈레일리만의 '낭만주의적 정치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평단에서는 《엔디미온》이 그의 초기작인 《시빌》이나 《코닝즈비》만큼의 사회 비판적 날카로움은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노 정객이 인생의 황혼에서 바라본 '정치라는 무대'에 대한 관조적인 시선과, 19세기 영국 사교계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디즈레일리는 이 소설의 인세를 통해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부채를 상당 부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후속작인 《팔콘넷(Falconet)》을 집필 중이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엔디미온》은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별 인사가 된 셈이다.
4.28. 사망[편집]
1881년 3월, 유난히 혹독했던 런던의 봄바람은 76세 노정객의 폐를 여지없이 공격했다. 그는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침상에 눕게 되었고, 영국의 온 국민은 웨스트민스터의 위대한 배우가 마지막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디즈레일리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했던 천생 정치인이자 소설가였다. 그가 남긴 임종 직전의 일화들은 나무위키에서 회자되는 정치가들의 명언 중에서도 유독 문학적인 향취가 짙다.
상태가 위독해지자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병문안을 오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대개 왕의 방문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지만, 디즈레일리는 이를 거절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디즈레일리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했던 천생 정치인이자 소설가였다. 그가 남긴 임종 직전의 일화들은 나무위키에서 회자되는 정치가들의 명언 중에서도 유독 문학적인 향취가 짙다.
상태가 위독해지자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병문안을 오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대개 왕의 방문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지만, 디즈레일리는 이를 거절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No, it is better not. She would only ask me to take a message to Albert."("아니오, 그만두는 게 좋겠소. 여왕께서 오시면 분명 (먼저 죽은 남편) 앨버트 공에게 전할 메시지를 내게 부탁할 테니까 말이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여왕의 지독한 남편 사랑을 농담 소재로 삼는 여유를 보인 것이다.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 그는 자신이 상원에서 했던 마지막 연설의 교정지를 살피고 있었다. 주변에서 쉬라고 만류하자 그는 "나는 내 글이 오타가 난 채로 후세에 남는 것을 원치 않네"라며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1881년 4월 19일, 부활절 직후의 화요일 아침. 디즈레일리는 잠시 의식을 회복해 몸을 일으키려 애쓰다가 "나는 살고 싶다... 하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숙적 글래드스턴은 의례상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성대한 국장을 제안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의 유언은 단호했다. 그는 9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리 앤(Mary Anne)의 곁에 묻히길 원했다.
결국 그의 장례식은 버킹엄셔의 휴엔든(Hughenden)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여왕은 관례상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며칠 뒤 직접 묘소를 방문해 그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꽃인 앵초 조화를 바쳤다. 이때 여왕이 남긴 "His favourite flower(그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라는 문구는 훗날 보수당 내의 디즈레일리 추모 조직인 '프림로즈 리그'의 기원이 된다.
디즈레일리의 부고가 전해지자 영국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그를 '유대인 사기꾼'이라 비난하던 보수당 내 극우파들조차 그가 당을 '대중적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업적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벌 글래드스턴의 반응이 묘했는데, 그는 의회 추도사에서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행보를 칭찬하기보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와 인내심"을 높게 평가했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증오를 넘어선,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키는 숙명적 라이벌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 평가[편집]
5.1. 정치가로서[편집]
디즈레일리에 대한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그가 생전에 입었던 화려한 조끼만큼이나 다채롭고 극단적이다. 그는 당대 영국 정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이질성을 오히려 자신의 무기로 삼아 보수당의 체질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혁신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략가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디즈레일리의 가장 큰 업적은 보수당을 '사라져가는 지주들의 이익집단'에서 '전 국민을 대변하는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이다. 로버트 필의 배신(?)으로 당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단순히 과거를 수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되 그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수주의가 '민중'과 결합해야 생존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1867년 선거법 개정이라는 일종의 '도박'을 통해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보수당이 기득권만의 정당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는 훗날 마거릿 대처나 보리스 존슨에 이르기까지 영국 보수당이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보수주의'라는 승리 공식의 원형이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 의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연설은 글래드스턴처럼 도덕적 엄숙함이나 종교적 열정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신 날카로운 풍자, 재치 있는 비유, 그리고 상대의 허점을 찔러 무너뜨리는 냉소적 유머가 일품이었다.
특히 그는 "민중을 지배하는 것은 논리보다는 감정과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여왕을 '인도 여황제'로 옹립하거나 수에즈 운하 주식을 전격적으로 매입하는 행위는 경제적 실리 못지않게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여 자부심을 고취하는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었다.
반면, 그의 라이벌이었던 글래드스턴과 자유주의자들은 디즈레일리를 '신념 없는 협잡꾼'으로 치부했다. 실제로 그의 정치 행보를 보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번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초기 급진파적 행보에서 보수당으로의 전향, 곡물법 반대를 외치며 필을 무너뜨려 놓고 정작 권력을 잡자 보호무역주의를 폐기한 점 등이 대표적인 비판 소재다.
특히 그가 보여준 극도의 현실주의(Realpolitik)는 종종 도덕적 공백을 노출했다.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 학살(불가리아 참사)에 대해 영국 제국의 이익(러시아 남하 저지)을 위해 침묵하거나 방조한 태도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냉혈한"이라는 비판을 듣기에 충분했다. 글래드스턴은 이를 두고 "선악의 구분이 없는 정치를 한다"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물론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의 이런 태도를 두고 "성인인 척하는 위선"이라며 비웃었다.]
디즈레일리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유대인 혈통의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 사회의 핵심 주류였던 토착 귀족과 지주 계급은 그를 '외국인' 혹은 '사기꾼' 취급하며 끊임없이 경멸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배짱만으로 당권과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이는 그가 가졌던 정치적 유연성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습득한 생존 전략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보수당의 전통적인 가치(왕실, 교회, 제국)를 누구보다 열렬히 옹호했지만, 그 내면에는 항상 이방인으로서의 냉철한 관찰자적 시점이 존재했다.
정치가로서의 디즈레일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임을 몸소 증명한 인물이다. 그는 보수주의를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정치 엔진으로 재창조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정략적 술수와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가 구축한 '제국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의 결합은 이후 100년 넘게 영국 정치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총리가 아니라,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영혼'과 '대중성'을 불어넣은 마법사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오늘날에도 영국 보수당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처칠과 함께 디즈레일리를 꼽는 이유는, 그가 정당에 승리하는 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디즈레일리의 가장 큰 업적은 보수당을 '사라져가는 지주들의 이익집단'에서 '전 국민을 대변하는 현대적 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이다. 로버트 필의 배신(?)으로 당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단순히 과거를 수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되 그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수주의가 '민중'과 결합해야 생존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1867년 선거법 개정이라는 일종의 '도박'을 통해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보수당이 기득권만의 정당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는 훗날 마거릿 대처나 보리스 존슨에 이르기까지 영국 보수당이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보수주의'라는 승리 공식의 원형이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 의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연설은 글래드스턴처럼 도덕적 엄숙함이나 종교적 열정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신 날카로운 풍자, 재치 있는 비유, 그리고 상대의 허점을 찔러 무너뜨리는 냉소적 유머가 일품이었다.
특히 그는 "민중을 지배하는 것은 논리보다는 감정과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여왕을 '인도 여황제'로 옹립하거나 수에즈 운하 주식을 전격적으로 매입하는 행위는 경제적 실리 못지않게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여 자부심을 고취하는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었다.
반면, 그의 라이벌이었던 글래드스턴과 자유주의자들은 디즈레일리를 '신념 없는 협잡꾼'으로 치부했다. 실제로 그의 정치 행보를 보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번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초기 급진파적 행보에서 보수당으로의 전향, 곡물법 반대를 외치며 필을 무너뜨려 놓고 정작 권력을 잡자 보호무역주의를 폐기한 점 등이 대표적인 비판 소재다.
특히 그가 보여준 극도의 현실주의(Realpolitik)는 종종 도덕적 공백을 노출했다.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 학살(불가리아 참사)에 대해 영국 제국의 이익(러시아 남하 저지)을 위해 침묵하거나 방조한 태도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냉혈한"이라는 비판을 듣기에 충분했다. 글래드스턴은 이를 두고 "선악의 구분이 없는 정치를 한다"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물론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의 이런 태도를 두고 "성인인 척하는 위선"이라며 비웃었다.]
디즈레일리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유대인 혈통의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 사회의 핵심 주류였던 토착 귀족과 지주 계급은 그를 '외국인' 혹은 '사기꾼' 취급하며 끊임없이 경멸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배짱만으로 당권과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이는 그가 가졌던 정치적 유연성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습득한 생존 전략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보수당의 전통적인 가치(왕실, 교회, 제국)를 누구보다 열렬히 옹호했지만, 그 내면에는 항상 이방인으로서의 냉철한 관찰자적 시점이 존재했다.
정치가로서의 디즈레일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임을 몸소 증명한 인물이다. 그는 보수주의를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정치 엔진으로 재창조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정략적 술수와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가 구축한 '제국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의 결합은 이후 100년 넘게 영국 정치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총리가 아니라,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영혼'과 '대중성'을 불어넣은 마법사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오늘날에도 영국 보수당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처칠과 함께 디즈레일리를 꼽는 이유는, 그가 정당에 승리하는 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5.2. 사상가로서[편집]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해 정책을 수정하는 수준의 정치인을 넘어, 영국 보수주의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정립한 일국 보수주의는 현대 보수당의 가장 강력한 지적 뿌리이며,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보살핀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영국적 실천판이라 할 수 있다. 디즈레일리 이전의 보수주의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수구적 면모가 강했다면, 디즈레일리는 보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사상적 출발점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 사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두 개의 국가(Two Nations)'로 쪼개졌다는 위기의식이었다. 그는 소설 《시빌》에서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이대로 방치한다면 계급 갈등으로 인해 영국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던 차티스트 운동과 공산주의의 발흥에 대한 디즈레일리식의 선제적 대응이기도 했다.] 그는 하층민을 적대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그들을 보수당의 지지 기반으로 흡수하고 그들에게 '제국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즉, 귀족 제도를 유지하되 그 귀족들이 민중의 복지에 헌신하게 함으로써 혁명의 불씨를 끄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보수 정당들이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근간이 되었으며, 후대의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74], 그리고 테레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에 이르기까지 영국 보수 정당이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전매특허와 같은 카드가 되었다. 그는 보수주의가 "낡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하는 것"임을 증명한 혁명적 사상가였다.
디즈레일리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보수주의를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에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점이다. 이를 흔히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라고 부른다. 그는 당시 자유주의 세력이 주장하던 원칙적인 시장 경제와 개인주의가 오히려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역설적으로 그는 강력한 왕권과 귀족, 그리고 국가가 개입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때 진정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노동자 계층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어둠 속의 도약'을 감행했다. 이는 당내 보수파들에게 "보수의 자살 행위"라는 극심한 반발을 샀으나, 디즈레일리는 "노동자들은 본래 보수적"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보다는 안정적인 군주제와 종교, 그리고 제국의 영광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고, 실제로 이는 훗날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는 기반이 되었다.[75]
또한 그는 문학적 상상력을 정리에 결합하여, 보수주의를 딱딱한 이론이 아닌 '감성과 자부심'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여황제로 추대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도한 것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목적도 있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 "우리는 세계 최강 대국의 일원"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보수당은 '애국심의 수호자'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선점하게 되었고, 라이벌인 자유당을 '국익보다는 이론에 치중하는 나약한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정치에서 수사학(Rhetoric)과 상징(Symbol)이 대중을 움직이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를 가장 잘 이해한 사상가였다.
디즈레일리 사상의 근저에는 사회를 기계적인 계약의 집합이 아닌, 역사와 전통을 통해 성장한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식의 급진적인 파괴나 추상적인 인권 선언보다는, 영국이 수백 년간 다져온 의회, 교회, 군주제라는 구체적인 '제도'들이 인민의 자유를 더 잘 보장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방임(Laissez-faire)'이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사회를 차갑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에게 국가란 단순히 치안을 유지하는 밤방범이 아니라, 국민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가족의 확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훗날 복지 국가의 초기 모델에 영감을 주었으며, 시장의 효율성만큼이나 공동체의 결속력을 중시하는 '온정적 보수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비록 정적들은 그를 "원칙 없는 기회주의자"라거나 "화려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는 사기꾼"이라 비난했지만, 그가 남긴 '일국 보수주의'라는 유산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았다. 그는 보수주의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재정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가장 선구적인 사례였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보수가 단순한 '기득권 수호'를 넘어 '전체 국민의 통합'을 말할 때 반드시 소환되는 금언이 되었다. "가진 자가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사회는 무너진다"는 그의 경고는 19세기 산업 도시의 매연 속에서 탄생했지만,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사상적 출발점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 사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두 개의 국가(Two Nations)'로 쪼개졌다는 위기의식이었다. 그는 소설 《시빌》에서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이대로 방치한다면 계급 갈등으로 인해 영국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던 차티스트 운동과 공산주의의 발흥에 대한 디즈레일리식의 선제적 대응이기도 했다.] 그는 하층민을 적대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그들을 보수당의 지지 기반으로 흡수하고 그들에게 '제국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즉, 귀족 제도를 유지하되 그 귀족들이 민중의 복지에 헌신하게 함으로써 혁명의 불씨를 끄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보수 정당들이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근간이 되었으며, 후대의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74], 그리고 테레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에 이르기까지 영국 보수 정당이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전매특허와 같은 카드가 되었다. 그는 보수주의가 "낡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하는 것"임을 증명한 혁명적 사상가였다.
디즈레일리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보수주의를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에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점이다. 이를 흔히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라고 부른다. 그는 당시 자유주의 세력이 주장하던 원칙적인 시장 경제와 개인주의가 오히려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역설적으로 그는 강력한 왕권과 귀족, 그리고 국가가 개입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때 진정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노동자 계층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어둠 속의 도약'을 감행했다. 이는 당내 보수파들에게 "보수의 자살 행위"라는 극심한 반발을 샀으나, 디즈레일리는 "노동자들은 본래 보수적"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보다는 안정적인 군주제와 종교, 그리고 제국의 영광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고, 실제로 이는 훗날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는 기반이 되었다.[75]
또한 그는 문학적 상상력을 정리에 결합하여, 보수주의를 딱딱한 이론이 아닌 '감성과 자부심'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여황제로 추대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도한 것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목적도 있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 "우리는 세계 최강 대국의 일원"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보수당은 '애국심의 수호자'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선점하게 되었고, 라이벌인 자유당을 '국익보다는 이론에 치중하는 나약한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정치에서 수사학(Rhetoric)과 상징(Symbol)이 대중을 움직이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를 가장 잘 이해한 사상가였다.
디즈레일리 사상의 근저에는 사회를 기계적인 계약의 집합이 아닌, 역사와 전통을 통해 성장한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식의 급진적인 파괴나 추상적인 인권 선언보다는, 영국이 수백 년간 다져온 의회, 교회, 군주제라는 구체적인 '제도'들이 인민의 자유를 더 잘 보장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방임(Laissez-faire)'이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사회를 차갑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에게 국가란 단순히 치안을 유지하는 밤방범이 아니라, 국민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가족의 확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훗날 복지 국가의 초기 모델에 영감을 주었으며, 시장의 효율성만큼이나 공동체의 결속력을 중시하는 '온정적 보수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비록 정적들은 그를 "원칙 없는 기회주의자"라거나 "화려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는 사기꾼"이라 비난했지만, 그가 남긴 '일국 보수주의'라는 유산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았다. 그는 보수주의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재정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가장 선구적인 사례였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보수가 단순한 '기득권 수호'를 넘어 '전체 국민의 통합'을 말할 때 반드시 소환되는 금언이 되었다. "가진 자가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사회는 무너진다"는 그의 경고는 19세기 산업 도시의 매연 속에서 탄생했지만,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6. 글래드스턴과의 관계[편집]
영국 의회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도 치열했던 라이벌 관계를 꼽으라면 단연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의 대결일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정책적 차이를 넘어 가치관, 종교, 성격, 그리고 인간적 혐오에 가까운 감정적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85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들의 대결은 이후 30년 동안 영국 정계의 향방을 결정짓는 거대한 축이 되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전 문학에 정통했으며, 독실한 고교회파(High Church) 신자로서 도덕적 엄격함과 청교도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를 '신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도덕적 소명'으로 여겼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정규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였으며, 빚에 시달리는 소설가 출신에 유대인 혈통이라는 배경을 안고 있었다. 그는 정치를 '지적인 게임'이자 '권력을 향한 화려한 무대'로 보았으며,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디즈레일리는 "신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디즈레일리 역시 글래드스턴을 향해 "위선으로 가득 찬 지루한 도덕주의자"라며 냉소했다.[76]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결정적 사건은 1852년 말에 발생했다. 당시 더비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던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첫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 예산안은 지주 계급의 지지를 유지하면서도 도시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직접세와 간접세를 복잡하게 조정한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화려한 변설로 무려 5시간 동안 예산안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의원들은 그의 언변에 압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자마자 글래드스턴이 벌떡 일어났다. 당시 폭풍우가 몰아치는 창밖의 날씨만큼이나 글래드스턴의 기세는 험악했다. 그는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이 가진 수치상의 모순과 재정적 무책임함을 하나하나 해부하며 "이것은 국가를 파멸로 이끄는 사기극"이라고 맹폭했다.
이어진 투표에서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은 부결되었고, 더비 내각은 총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레일리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 자리에 앉은 인물은 바로 글래드스턴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서로의 정책을 뒤집으며 평생의 정적이 되었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를 공격할 때 항상 '도덕적 성격(Character)'을 문제 삼았다. 그는 디즈레일리가 정책을 펴는 목적이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영달과 권력 유지에 있다고 믿었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이 제시하는 방대한 '통계와 수치(Figures)' 뒤에 숨겨진 오만함을 비웃었다.
대중의 반응도 극명하게 갈렸다. 지성적이고 진지한 중산층은 글래드스턴의 도덕성에 열광했으나, 디즈레일리의 화려함과 제국주의적 낭만에 매료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엄격하고 훈계조인 글래드스턴을 극도로 싫어했던 반면, 자신을 '여황제'로 추켜세우며 세련된 매너를 보여준 디즈레일리를 총애했다.[77]
이들의 대결은 영국 정당 정치를 양당제 체제로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은 자유무역, 재정 절약, 개인의 자유를 상징했고,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은 제국의 영광, 사회 개혁, 전통의 보존을 상징하게 되었다.
두 거물의 대결은 1881년 디즈레일리가 서거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디즈레일리의 장례식에 글래드스턴이 (정치적 도의상) 참석을 제안받았을 때, 그는 끝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을 정도로 그들의 골은 깊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전 문학에 정통했으며, 독실한 고교회파(High Church) 신자로서 도덕적 엄격함과 청교도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를 '신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도덕적 소명'으로 여겼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정규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였으며, 빚에 시달리는 소설가 출신에 유대인 혈통이라는 배경을 안고 있었다. 그는 정치를 '지적인 게임'이자 '권력을 향한 화려한 무대'로 보았으며, 글래드스턴이 보기에 디즈레일리는 "신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디즈레일리 역시 글래드스턴을 향해 "위선으로 가득 찬 지루한 도덕주의자"라며 냉소했다.[76]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결정적 사건은 1852년 말에 발생했다. 당시 더비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던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첫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 예산안은 지주 계급의 지지를 유지하면서도 도시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직접세와 간접세를 복잡하게 조정한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디즈레일리는 특유의 화려한 변설로 무려 5시간 동안 예산안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의원들은 그의 언변에 압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자마자 글래드스턴이 벌떡 일어났다. 당시 폭풍우가 몰아치는 창밖의 날씨만큼이나 글래드스턴의 기세는 험악했다. 그는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이 가진 수치상의 모순과 재정적 무책임함을 하나하나 해부하며 "이것은 국가를 파멸로 이끄는 사기극"이라고 맹폭했다.
이어진 투표에서 디즈레일리의 예산안은 부결되었고, 더비 내각은 총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레일리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 자리에 앉은 인물은 바로 글래드스턴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서로의 정책을 뒤집으며 평생의 정적이 되었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를 공격할 때 항상 '도덕적 성격(Character)'을 문제 삼았다. 그는 디즈레일리가 정책을 펴는 목적이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영달과 권력 유지에 있다고 믿었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이 제시하는 방대한 '통계와 수치(Figures)' 뒤에 숨겨진 오만함을 비웃었다.
대중의 반응도 극명하게 갈렸다. 지성적이고 진지한 중산층은 글래드스턴의 도덕성에 열광했으나, 디즈레일리의 화려함과 제국주의적 낭만에 매료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엄격하고 훈계조인 글래드스턴을 극도로 싫어했던 반면, 자신을 '여황제'로 추켜세우며 세련된 매너를 보여준 디즈레일리를 총애했다.[77]
이들의 대결은 영국 정당 정치를 양당제 체제로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은 자유무역, 재정 절약, 개인의 자유를 상징했고,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은 제국의 영광, 사회 개혁, 전통의 보존을 상징하게 되었다.
두 거물의 대결은 1881년 디즈레일리가 서거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디즈레일리의 장례식에 글래드스턴이 (정치적 도의상) 참석을 제안받았을 때, 그는 끝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을 정도로 그들의 골은 깊었다.
7. 여담[편집]
- 디즈레일리는 평생 유대인 혈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이를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선택받은 민족의 우월함'으로 포장하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나는 기독교라는 완성된 유대교를 믿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반유대주의 정서가 팽배했던 영국 정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향한 공격은 집요했다. 정적들은 그를 '사막의 자식', '동양적 환상에 빠진 자'라고 비하했으며, 만평에서는 항상 매부리코를 강조한 유대인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유대인 구제법(Jewish Relief Act) 통과를 위해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자 근대적 평등에 대한 신념의 발로였다.[78]
- 무뚝뚝하고 도덕주의적이었던 글래드스턴과 달리, 빅토리아 여왕을 대하는 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는 여왕을 '선녀(The Faery)'라고 부르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국정 보고를 할 때도 소설가다운 문장력을 동원해 여왕을 매료시켰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첨을 좋아하지만, 국왕에게는 삽으로 퍼부어줘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한 것. 남편 앨버트 공을 잃고 은둔하던 여왕을 다시 정무의 전면으로 끌어낸 공로로, 여왕은 그를 평생의 친구로 여겼다. 디즈레일리가 서거했을 때 여왕은 국왕으로서 이례적으로 평민(백작 작위를 받았으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으며, 그 조화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그가 사망한 4월 19일은 영국에서 한동안 '프림로즈 데이'로 기념되었다. 앵초(Primrose)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기일마다 지지자들이 앵초를 달고 그를 추모했다. 이는 훗날 보수당 내의 대중 조직인 '프림로즈 연맹(Primrose League)'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정당 외곽 조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젊은 시절의 디즈레일리는 패션 테러리스트와 패셔니스타의 경계에 있었다. 초록색 벨벳 바지, 보석이 박힌 단추, 화려한 레이스 소매 등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옷차림을 즐겼다. 이는 그가 가진 열등감을 과시욕으로 승화시킨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총리가 된 이후에는 차분한 검은색 코트를 입었으나, 여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마 위로 말아 올린 한 가닥의 머리카락(Spit-curl)은 유지했다.
-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대하드라마나 영화에서 글래드스턴과 함께 반드시 등장한다. 대개 글래드스턴은 고지식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디즈레일리는 영민하고 교활하지만 매력적인 책사로 묘사되는 편. 에드워드 7세 시대를 다룬 매체에서도 '선왕(빅토리아)의 총애를 받은 전설적인 총리'로 자주 언급된다.
- 상당한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최고급 포도주를 주문하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 아내인 메리 앤은 그보다 12살 연상이었는데, 처음에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실제로는 금슬이 매우 좋았다. 디즈레일리는 그녀가 죽었을 때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떠났다"며 진심으로 통곡했다.
- 현대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자신의 정치적 뿌리를 찾을 때,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만큼이나 자주 소환하는 것이 디즈레일리의 '일국 보수주의'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지 않는 보수는 필패한다는 그의 교훈은 21세기에도 유효하기 때문.
7.1. 어록의 화신[편집]
그는 영국 정치인 중 윈스턴 처칠 이전에 가장 많은 어록을 남긴 인물로 손꼽힌다.
"나는 책을 읽고 싶을 때, 책을 쓴다."(독창성에 대한 강조)
"보수 정부는 조직화된 위선이다."(곡물법 논쟁 당시 로버트 필을 비판하며)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79]
[1] 실제로 디즈레일리 가문은 부유하긴 했으나 그가 주장하듯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정계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고대 왕족의 후예'라고 믿는 정신 승리를 시전하곤 했다.[2] 1858년 전까지 영국 의회에 입성하려면 '기독교 신앙에 따라(on the true faith of a Christian)' 선서를 해야 했다. 세례를 받은 디즈레일리는 법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기에 이 장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3] 당시 영국 하원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방식의 선서를 해야 했다. 이 장벽은 1858년 유대인 구제법이 통과되어서야 철폐된다.[4] 실제로 디즈레일리 가문은 부유하긴 했으나 그가 주장하듯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정계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고대 왕족의 후예'라고 믿는 정신 승리를 시전하곤 했다.[5] 아이작은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의 의무적인 직책 수락을 거부했다가 벌금을 부과받자, 아예 공동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6] 이러한 그의 인종관은 훗날 그의 소설 《탠크레드(Tancred)》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당대 인종주의적 시각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7] 다만 현대의 가계 조사에 따르면 디즈레일리 가문은 이탈리아 레반트 출신으로, 엄격한 의미의 세파르딤보다는 이탈리아 유대인에 가깝다는 견해다.[8] 이 팜플렛들은 당시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작성되어 많은 투자자를 끌어모았으나, 정작 본인은 실무적인 재무 분석 능력이 전무했다.[9] 실제로 디즈레일리는 이 소설의 혹평과 폭로 이후 심각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한동안 런던을 떠나 은둔해야 했다.[10] 디즈레일리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전업 소설가 출신으로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총리 퇴임 후에도 소설을 써서 막대한 인세를 벌어들였다.[11] 디즈레일리는 훗날 자신의 소설 《탠크레드》에서 "기독교는 완성된 유대교"라는 논리를 펼치는데, 이는 자신의 개종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였다.[12] 훗날 디즈레일리의 아내가 되는 메리 앤 루이스의 남편이다.[13] 유대인 중고 의류 상인을 비하하는 멸칭[14] 이 발언은 당시에는 패배자의 허세처럼 들렸으나, 30년 후 그가 총리가 되어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가장 위대한 예언'으로 격상되었다.[15] 필은 디즈레일리의 화려한 복장과 유난스러운 수사학을 혐오했으며, 무엇보다 그가 전통적인 지주 계급의 가치를 대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16] 이전에도 정치적 내용을 담은 소설은 있었으나, 현직 하원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강령을 전파하기 위해 정교한 이론적 배경을 깔고 시리즈물로 소설을 쓴 사례는 디즈레일리가 유일무이하다.[17] 실제로 1840년대는 차티즘 운동이 격화되며 영국 사회에 혁명의 공포가 엄습하던 시기였다.[18] 디즈레일리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라는 용어로 정립되며, 영국 보수당이 20세기에도 생명력을 유지하며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남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19] 필은 디즈레일리를 '재능은 있으나 원칙이 없는 사기꾼(Charlatan)' 정도로 치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20] 디즈레일리는 필을 "터키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더니, 함대를 이끌고 적국인 러시아의 항구로 투항한 자"라고 비유하며 비판했다. 이는 당대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비유였다.[21] 이들 중에는 훗날 디즈레일리의 숙적이 되는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도 포함되어 있었다.[22] 곡물법 폐지는 영국이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을 완전히 버리고 산업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의 시대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사실 경제학적으로는 자유무역의 효용을 알고 있었으나, 정치적 승리를 위해 보호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23] 이 사건 이후 글래드스턴을 포함한 필 파 의원들이 대거 이탈하여 훗날 자유당의 핵심 세력이 된다. 즉, 디즈레일리의 복수가 현대 영국 양당제의 기틀을 닦은 셈이다.[24] 이를 두고 훗날 사가들은 "디즈레일리가 벤팅크라는 귀족적 외피를 입고 보수당의 심장부로 침투했다"고 평하기도 한다.[25]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 사적인 편지에서 "우리는 단순히 곡물법을 지키려는 정당이 아니라, 국가의 정신을 지키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26] 사실 이 논리는 디즈레일리 특유의 독자적인 신학관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된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선상에 있는 '귀족적 종교'로 보았다.[27] 이때 신임 장관들의 명단을 들은 늙은 웰링턴 공작이 청력이 좋지 않아 "누구?(Who?)"라고 반복해서 되물은 탓에, 이 내각은 영국 역사에서 'Who? Who? 내각'이라는 굴욕적인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28] 훗날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을 근대화했다'고 평가하지만, 당대에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지배적이었다.[29] 실제로 그는 재무장관 시절에도 채권자들의 독촉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으며, 장관 봉급의 상당 부분을 이자를 갚는 데 사용했다.[30] 디즈레일리는 딱딱한 공문서 대신 마치 소설을 쓰듯 의회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여 여왕에게 보냈는데, 이는 훗날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31] 성경 구절에서 따온 명칭으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든 굴처럼 자유당 내 반대파들이 모였다는 뜻이다.[32] 훗날 3번이나 총리를 지내는 보수당의 거물로, 이때는 디즈레일리의 급진성에 분노하여 사임했다.[33] 디즈레일리는 급진주의적인 혁명이 영국의 전통적인 제도(군주제, 교회, 의회)를 파괴할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34] 이 논리는 훗날 20세기 영국의 복지국가 모델 형성과 전후 보수당의 중도적 노선인 '버츠켈리즘(Butskellism)'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35] 1868년 2월, 총리직에 오른 직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36] 이전까지 총리들은 대개 의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된 후에야 사퇴하는 것이 관례였다.[37] 디즈레일리는 아내의 장례식 이후 "이제 나에게는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며 더욱 정무에 매진했다고 전해진다.[38] 'Little Englander'는 글래드스턴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제국 확장보다 국내 내실을 중시하는 이들을 뜻한다.[39] 라틴어 구절 '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을 비튼 표현이다.[40] 사실 디즈레일리가 이 연설에서 처음부터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글래드스턴 정부의 피로도를 공략하는 수사학적 기교에 더 능했다. 하지만 이 연설에서 제시된 '제국'과 '개혁'의 결합은 보수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41] 글래드스턴은 이 연설을 보고 "공허한 미사여구로 가득 찬 정치적 사기"라고 비난했으나, 대중은 글래드스턴의 엄격한 도덕주의보다 디즈레일리의 화려한 비전에 더 매료되었다.[42] 이 연설에서 언급된 위생 개혁은 1875년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 제정으로 이어지며, 영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회 입법 중 하나로 기록된다.[43] 당시 디즈레일리는 이 승리를 두고 "우리는 술통(Beer) 속에서 익사한 자유당을 보았다"고 농담 섞인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44] 당시 보수당 내부에서도 유대인 출신의 디즈레일리를 불신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고스트 중령의 조직화 작업 덕분에 당의 결속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45] 디즈레일리는 이 시기 소설 《로데어(Lothair)》를 출간하여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데, 현직 혹은 전직 총리가 소설을 써서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해 글래드스턴은 "경박하다"며 대단히 혐오했다고 한다.[46]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의 기원이다.[47] 당시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의 위생 상태는 참혹했는데,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빈번하게 창궐하여 하층민의 생명을 위협했다. 디즈레일리는 "Sanitas sanitatum, omnia sanitas(위생 중의 위생, 모든 것이 위생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이 정책을 밀어붙였다.[48] 사무엘 플림솔 의원이 주도한 이 법안은 초기에는 선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으나, 디즈레일리는 대중의 지지를 업고 이를 관철시켰다.[49] 당시 영국 하원에서 위생 문제를 논의할 때, 반대파들은 "국가가 개인의 청결 문제까지 간섭하는 것은 자유의 침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불결함 속에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맞섰다.[50] 이 시기의 개혁 법안들은 '크로스 법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실무자인 리처드 크로스 내무장관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 아젠다로 설정하고 의회에서 추진력을 부여한 것은 명실상부한 디즈레일리의 리더십이었다.[51] 만약 이 주식이 프랑스로 넘어갔다면 영국은 인도와 호주로 향하는 가장 짧은 항로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할 위기였다.[52]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53] 실제로는 로스차일드 역시 이 거액을 마련하기 위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했으며, 2.5%의 수수료를 챙겼다는 점 때문에 훗날 야당인 자유당으로부터 "친구에게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54] 에드먼드 스펜서의 서사시 '요정 여왕'에서 따온 별칭이다.[55] 인도 제국 선포식[56] 정적 글래드스턴은 이 조치를 두고 "디즈레일리가 여왕의 머리에 가짜 보석을 박았다"며 평생 비난했으나, 대중적인 인기는 오히려 디즈레일리에게 쏠렸다.[57] 실제 델리 선포식에 여왕 본인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인도 총독 리턴 경이 대행했다. 디즈레일리 또한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에 남았다.[58] '비콘즈필드'라는 명칭은 그가 거주하던 허거든 매너(Hughenden Manor) 인근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며, 이는 그가 존경했던 정치적 스승 에드먼드 버크가 받기로 했다가 아들의 죽음으로 포기했던 작위 명칭이기도 했다.[59]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대할 때 "누구나 아첨을 좋아하지만, 왕족에게는 삽으로 퍼붓듯이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60]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인해 발생하는 영토 분쟁과 국제 정치적 불확실성을 일컫는 용어.[61] 심지어 당시 일부 보수파 의원들조차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디즈레일리의 강경 노선에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62]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인한 발칸 반도의 진공 상태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둘러싼 열강의 갈등[63]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주의 또는 대외 강경주의[64] 당시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있었으나 디즈레일리는 "키프로스는 서아시아로 가는 열쇠"라며 밀어붙였다.[65] 특히 회의 기간 중 비스마르크와 매일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눈 개인적인 대화들은 기록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데, 두 사람은 서로의 야심과 지적 능력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존중했다고 한다.[66] 실제로 이때의 국경 획정 문제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는 발칸 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67] 훗날 글래드스턴은 이를 두고 "불의한 전쟁"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이는 1880년 총선의 주요 쟁점이 된다.[68] 당시 영국 농업 생산량은 불과 몇 년 사이에 25% 이상 급감했으며, 이는 토지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69] 실제로 1880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의석수의 거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70] 미국과 러시아산 저가 곡물이 유입되면서 영국 농업은 붕괴 위기에 처했다. 디즈레일리는 과거 곡물법 폐지에 반대하며 보호무역을 외쳤던 인물이었으나, 정작 권력을 잡은 뒤에는 자유무역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71] 당시 글래드스턴의 연설을 듣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모였으며, 그의 연설문은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타전되어 사실상 전국적인 캠페인 효과를 냈다.[72] 여왕은 디즈레일리를 위로하기 위해 그에게 공작(Duke) 작위를 제안했으나, 디즈레일리는 이를 거절하고 백작 지위를 유지하며 야당 당수로 남기를 택했다.[73] 당시로서는 소설 한 권 값으로 최고 기록이었으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74] 대처는 디즈레일리보다는 신자유주의적 면모가 강했으나, 보수당을 서민층의 정당으로 만들려 했던 디즈레일리의 대중주의적 측면은 계승했다.[75] 실제로 영국 노동계급의 상당수는 여전히 보수당에 투표하는데, 이를 '노동계급 보수주의자(Working-class Tory)'라고 부른다.[76]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을 두고 "그는 단 하나의 결점도 없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결점이다"라는 독설을 남기기도 했다.[77] 글래드스턴은 여왕을 대할 때 마치 '공적인 집회에서 연설하듯' 딱딱하게 굴었지만, 디즈레일리는 여왕을 '한 명의 여인'으로 대우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78] 이 때 보수당 내 골수 세력들은 "우리 당의 지도자가 우리 신앙을 배신했다"며 격렬히 비난했다.[79] 이 말은 마크 트웨인이 디즈레일리의 말이라고 소개하며 유명해졌으나, 실제로 디즈레일리가 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반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