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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본명
아서 네빌 체임벌린
Arthur Neville Chamberlain
출생
사망
1940년 11월 9일 (향년 71세)
영국 햄프셔 주 헥필드
국적
직업
정치인
소속 정당
제임 기간
제60대 총리
1937년 5월 28일 ~ 1940년 5월 10일
학력
1. 개요2. 가문 배경3. 생애
3.1. 바하마의 시련3.2. 버밍엄의 행정가3.3. 제1차 세계대전3.4. 의회 입성3.5. 주택 정책의 혁명3.6. 지방 행정 체계의 현대화3.7. 재무장관 시절3.8. 차기 대권 주자로의 부상3.9. 60대 총리 취임3.10. 평화주의 운동의 확산과 정치적 압박3.11. 외교 노선의 변화3.12. 재군비 프로그램의 가동3.13. 안슐루스 사건3.14. 수데텐란트 위기3.15. 평화를 위한 도박의 시작3.16. 고데스베르크 회담3.17. 뮌헨 협정
3.17.1. 협정 뒷이야기
3.18. 1939년 3월의 배신3.19. 폴란드 방위 보장3.20. 히틀러에게 선전포고3.21. 가짜 전쟁3.22. 북유럽에서의 패배와 정치적 위기3.23. 노르웨이 토론3.24. 총리 사임3.25. 사망
4. 평가
4.1. 재평가4.2. 레이더와 스핏파이어 생산
5. 처칠과의 관계6. 대중 매체에서7. 여담

1. 개요[편집]

My good friends, this is the second time in our history that there has come back from Germany to Downing Street peace with honour. 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독일로부터 다우닝 가로 '영예로운 평화'가 돌아온 것은 우리 역사상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의 연설 中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년 3월 18일 ~ 1940년 11월 9일)

영국의 정치인이자 제60대 총리. 흔히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를 상대로 유화 정책(Appeasement Policy)을 펼치며 평화를 구걸하다가 결국 인류사 최악의 전쟁을 막지 못한 '실패한 지도자'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대중적 인식이나 전후 역사학계의 초기 관점(전통주의 학파)에서 체임벌린은 독재자의 야욕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위선적인 평화주의에 취해 있었던, 혹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영국의 정부 기밀문서들이 대거 해제되고 이른바 '수정주의(Revisionism)' 학풍이 등장하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무능론'을 넘어선 복합적인 층위로 변모했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체임벌린이 결코 히틀러를 신뢰해서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며,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무너진 영국의 경제 상황과 1차 대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참전을 결사반대하던 민심,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독일과 싸워 이길 수 없었던' 영국의 비참한 군사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처절한 시간 벌기를 했던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그는 뮌헨 협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이면으로는 레이더망 구축과 최신형 전투기(스핏파이어, 허리케인 등) 양산에 국가 예산을 쏟아붓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벌어준 1년 남짓의 시간 덕분에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이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는 재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즉, 그는 "평화를 원했으나 전쟁을 준비했고, 그 전쟁의 시작과 함께 몰락한 비운의 행정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가문 배경[편집]

네빌의 아버지 조셉 체임벌린은 영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거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출신으로 버밍엄 시장을 지내며 도시 전체를 근대화시킨 인물이었는데, 이 시기 그가 보여준 행정력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버밍엄 시민들이 그를 '버밍엄의 왕(King of Birmingham)'이라고 불렀을 정도. 조셉은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자유당과 보수당을 모두 뒤흔들며 영국 정치의 지형도를 바꿨다.

특히 그는 '제국 통상 제도(Imperial Preference)'를 주장하며 대영제국을 하나의 거대한 경제 공동체로 묶으려 했던 야심가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강한 카리스마와 확고한 정치 철학은 네빌에게 거대한 산과 같았다. 네빌은 평생 아버지를 존경했으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제국 내의 관세 통합'이라는 꿈을 재무장관 시절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시키게 된다. 즉, 네빌의 정책적 뿌리는 상당 부분 아버지 조셉의 미완성된 기획에서 기인한 셈이다.

네빌에게는 이복 형인 오스틴 체임벌린(Austen Chamberlain)이 있었다. 조셉 체임벌린은 일찍부터 장남인 오스틴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었다. 오스틴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외무장관을 지내며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해 노벨평화상까지 거머쥐는 등 가문의 영광을 재현했다.

반면 네빌은 가문의 '사업'을 책임져야 하는 역할로 밀려나 있었다. 오스틴이 화려한 외교 무대를 누빌 때 네빌은 바하마의 황무지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차이가 훗날 두 사람의 정치 스타일을 갈랐다. 오스틴이 전통적인 귀족적 외교관의 면모를 보였다면, 네빌은 철저하게 '수치와 효율'을 따지는 경영인 마인드를 정계에 이식하게 된 것이다. 훗날 네빌이 총리가 되었을 때, 형 오스틴은 이미 정계의 원로가 되어 동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으나, 동시에 '위대한 아버지와 형'이라는 그림자는 네빌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네빌은 총리가 된 직후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체임벌린 가문은 종교적으로도 독특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가 아닌 유니테리언(Unitarian) 신자였다. 유니테리언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교파로,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비국교도(Nonconformist)로서 일종의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네빌에게 두 가지 성향을 심어주었다.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 "인간은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문제는 이 '이성적인 대화'에 대한 믿음이 훗날 아돌프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괴물을 상대할 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네빌은 히틀러 역시 자신이나 버밍엄의 기업가들처럼 '손익을 따지고 합의를 지키는 인간'일 것이라 가정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체임벌린 가문에게 버밍엄은 단순한 고향 그 이상이었다. 버밍엄은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지였고, 체임벌린 가문은 그곳의 노동자들과 중산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네빌은 평생 '버밍엄의 이익이 곧 영국의 이익'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그가 보건부 장관 시절 추진했던 수많은 사회 개혁 입법들은 버밍엄 시장 시절의 경험을 국가 단위로 확장한 것이었다.

또한, 이 가문의 배경은 네빌에게 '현장 중심의 행정'을 중요시하는 태도를 갖게 했다. 그는 탁상공론보다 수치와 통계, 실제 작동하는 시스템을 믿었다. 이는 그를 유능한 장관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국제 정세의 거대한 흐름과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읽어내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내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3. 생애[편집]

네빌 체임벌린은 1869년 3월 18일, 잉글랜드 버밍엄의 에지바스턴(Edgbaston)에 위치한 '사우스본(Southbourne)'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버밍엄의 신흥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던 조셉 체임벌린이었고, 어머니는 조셉의 두 번째 아내인 플로렌스 케나드(Florence Kenrick)였다.

그의 출생 환경은 그야말로 '정치적 공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네빌의 유년기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는데, 그가 불과 6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플로렌스가 막내 아이를 낳다가 산후열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네빌의 정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상실감에 빠져 업무에만 몰두했고, 네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이복 누나들과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채워야 했다. 이러한 환경은 훗날 그가 대중에게 보여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차갑고 절제된 성격'의 기저가 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1]

네빌은 영국의 명문 퍼블릭 스쿨인 럭비 스쿨에 입학했다. 이복 형인 오스틴 체임벌린이 일찌감치 아버지의 뒤를 이을 '정치적 후계자'로 점지되어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네빌의 교육 과정은 좀 더 실용적인 측면에 맞춰져 있었다.

럭비 스쿨에서의 네빌은 그리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운동에 소질이 있거나 교내 사교 모임을 주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혼자서 식물을 채집하거나 곤충을 관찰하는 것에 몰두하는 '내성적인 우등생'에 가까웠다. 특히 이 시기에 다져진 박물학(Natural History)에 대한 조예는 노년기까지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2]

학교 성적은 나쁘지 않았으나, 그는 형 오스틴처럼 고전 문학이나 수사학에 매진하기보다는 수학과 과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명분과 수사(Rhetoric)를 중시하는 당시 영국 정계의 일반적인 주류 파벌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훗날 그가 행정가로서 '데이터와 수치'를 기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갖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럭비 스쿨을 졸업한 후, 네빌은 옥스퍼드케임브리지 같은 전통적인 명문대 대신 고향인 버밍엄에 위치한 메이슨 과학 대학(Mason Science College)[3]에 진학했다. 이는 당시 조셉 체임벌린의 교육 철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조셉은 장남 오스틴은 외교와 정치를 담당할 '귀족적 지도자'로 키우려 했지만, 차남인 네빌은 집안의 가업(금속 가공업)을 잇고 실질적인 경영을 책임질 '산업 역군'으로 키우고자 했다.

대학에서 네빌은 야금학(Metallurgy)과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용광로의 온도와 금속의 배합 비율을 계산하는 정밀한 공학적 사고방식을 체득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과 논리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엔지니어적 낙관론'을 심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훗날 총리가 된 그가 히틀러라는 '비논리적이고 광기 어린 독재자'를 만났을 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게 된다. 체임벌린은 히틀러 역시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하면 타협할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로 오판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 교육받고 체득해 온 '실용주의적 합리성'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회계 법인에서 수습 과정을 거치며 철저한 경제 관념을 익혔다. 당시 버밍엄의 청년들 사이에서 네빌은 "지나치게 성실하고 재미없는 인물"로 통했다. 그는 술이나 도박, 화려한 파티보다는 가족과의 저녁 식사나 독서를 즐겼다.

하지만 이러한 '무색무취함' 뒤에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책임감과, 형 오스틴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은근한 열등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고, 이는 훗날 정적들로부터 "얼음 같은 심장을 가진 행정 기계"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배경이 된다.

체임벌린의 어린 시절과 교육 과정은 '철저한 실용주의', '감정의 절제', '데이터에 기반한 사고'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대영제국의 화려한 영광을 노래하는 웅변가보다는, 제국의 안방 살림을 책임지는 유능한 지배인(Steward)으로 길러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인적 마인드'는 1930년대라는 유례없는 격동의 시대에 대영제국의 키를 잡게 된 그에게 가장 큰 자산이자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3.1. 바하마의 시련[편집]

1891년, 22세의 청년 네빌 체임벌린은 아버지 조셉 체임벌린의 엄명에 따라 카리브해의 외딴섬, 바하마의 안드로스(Andros) 섬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조셉 체임벌린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 있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사이잘삼(Sisal)이었다. 당시 해군 국가였던 영국에 선박용 로프의 원료인 섬유 작물 재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고, 조셉은 아들 네빌을 이 사업의 총책임자로 낙점했다.

하지만 이는 네빌에게 있어 사실상의 '유배'나 다름없었다. 버밍엄의 안락한 문명 생활을 뒤로하고 그가 도착한 안드로스 섬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제대로 된 도로도, 통신 시설도 없는 곳에서 그는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네빌은 결코 게으른 경영자가 아니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뙤약볕 아래에서 현지 노동자들과 함께 땅을 일구고 식재 상태를 점검했다. 그는 안드로스 섬에 약 2만 에이커(약 2,40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농장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대영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단일 농장이었다.

그는 현지에서 다음과 여러 고초를 겪었다. 말라리아와 각종 풍토병의 위협 속에서 위생 시설조차 전무한 오두막에서 생활해야 했다. 또한 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현지인들을 통제하고 효율적인 노동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그는 행정가로서의 기초 체력을 길렀다. 사이잘삼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고 알려졌으나, 안드로스 섬의 토양은 석회암 층이 너무 얇아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했다.

훗날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보여준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챙기는 꼼꼼함"과 "숫자에 기반한 냉철한 판단력"은 바로 이 바하마 시절의 고난에서 기인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나는 끝까지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처절한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6년의 세월과 가문의 자금 5만 파운드[4]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이잘삼은 자라는 속도가 너무 느렸고, 정성껏 수확한 섬유는 품질이 낮아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결국 1896년, 그는 사업 포기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 실패는 네빌 체임벌린의 일생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겼다.그는 전지전능해 보였던 아버지의 판단이 틀렸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가문의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외부 환경(토양, 기후 등)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는 훗날 그가 나치 독일을 상대하며 "영국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강경책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게 된 심리적 배경이 된다. 실패의 고통을 잊기 위해 그는 더욱 차갑고 딱딱한 성격으로 변모했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우산 든 차가운 신사'의 이미지는 이 시기에 완성된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훗날 뮌헨 협정의 실패를 비판하는 이들이 이 바하마 시절을 자주 인용한다는 것이다. "사이잘삼이 자랄 수 없는 땅임을 알면서도 6년을 허비한 고집불통이, 히틀러가 평화를 지키지 않을 인물임을 알면서도 뮌헨에서 헛된 희망을 품었다"는 식의 비판이다.

하지만 반대로 옹호론자들은 이 시기를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행정가적 투지"의 발현으로 본다. 실제로 그는 바하마에서의 실패를 겪은 후,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예산의 효율성과 자원 배분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이게 된다. 결국 이 6년간의 '유배 생활'은 네빌 체임벌린이라는 정치가를 만든 가장 강력한 용광로였던 셈이다.

3.2. 버밍엄의 행정가[편집]

바하마에서의 사이잘삼 사업 실패는 네빌 체임벌린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이자 동시에 강력한 예방주사가 되었다. 1896년 버밍엄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가업인 금속 제조 회사를 운영하며 경영인으로서의 감각을 다졌으나, 혈관에 흐르는 '정치적 DNA'를 영원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버밍엄은 그의 아버지 조셉 체임벌린이 시장으로서 일구어 놓은 '지방 자치의 성지'였고, 네빌 역시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봉사와 행정에 관심을 두게 된다.

1911년, 42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버밍엄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그의 공직 생활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초기부터 중앙 정치보다는 '지방 행정의 효율성'에 비정상적일 만큼 집착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그가 총리가 되어서도 국가 예산의 세세한 항목까지 직접 챙기는 '마이크로 매니징' 스타일의 기원이 된다.

체임벌린이 시의회에 들어가자마자 맡은 중책은 '도시 계획 위원회(Town Planning Committee)'의 의장이었다. 당시 산업 혁명의 중심지였던 버밍엄은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인해 주거 환경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체임벌린은 이를 단순히 '가난의 문제'로 보지 않고 '설계의 문제'로 접근했다.

그는 영국 최초로 '도시 계획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난개발을 막기 위한 조례를 제정했다.[5] 특히 그는 슬럼가(Slum) 정비에 사활을 걸었는데, 단순히 낡은 집을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공원과 위생 시설을 배치하는 '가든 시티(Garden City)' 모델을 버밍엄에 이식하려 노력했다. "인간다운 삶은 인간다운 주거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신념은 훗날 보건부 장관 시절 수행한 대규모 주택 보급 사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1915년, 그는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버밍엄 시장(Lord Mayor)에 선출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시장으로서의 임무는 매우 막중했다. 그는 전쟁 물자 생산을 독려하는 한편,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시민들의 삶을 보듬는 데 주력했다.

여기서 체임벌린 특유의 혁신적인 행정 능력이 폭발하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버밍엄 시립 은행(Birmingham Municipal Bank)'이다.

설립 배경에는 전시 인플레이션 속에서 노동자들이 저축을 통해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당시 민간 은행들은 정부가 은행업에 진출하는 것에 극렬히 반대했다. 런던의 금융가(The City)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체임벌린은 특유의 꼼꼼한 논리로 반대파를 설득했고, 결국 의회에서 특별법을 통과시켜 은행 설립을 강행했다. 이 은행은 대성공을 거두어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계좌를 개설했으며, 훗날 영국 전역의 저축 은행 시스템에 영감을 주었다.

버밍엄 시장으로서의 체임벌린은 그야말로 '일 중독자'였다. 그는 모든 시정 보고서를 직접 읽고 수정했으며, 현장을 직접 방문해 하수도 시설부터 공공 도서관의 서가 배치까지 간섭했다. 시민들은 그를 "비록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지만,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가적 완벽주의'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논리와 데이터로 상대를 압도하는 데는 능했지만,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리스마나 정무적 감각은 아버지 조셉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그가 이때 쌓은 '지방 행정에서의 성공 공식'을 복잡한 국제 정세와 외교판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던 것이 그의 비극 중 하나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도시를 하나의 기업처럼 경영했으며, 효율성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1910년대에 정치 경력을 끝냈다면, 영국 현대사에서 '지방 자치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역사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내 고향 버밍엄을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정치가 해야 할 유일한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훗날 회고록 중

3.3. 제1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네빌 체임벌린은 이미 버밍엄의 시장으로서 지역 내에서 독보적인 행정 능력을 입증한 상태였다. 당시 영국은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방의 병력 보충과 후방의 군수 물자 생산을 조율할 '인적 자원 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때 중앙 정계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버밍엄에서 시립 은행을 설립하고 도시 계획을 칼같이 정비해낸 '실무의 귀재'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1916년 12월, 새로 취임한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체임벌린을 국가봉사부(Department of National Service) 장관으로 임명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만남은 '천재적 선동가'와 '치밀한 행정가'의 환상적인 조합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영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지독한 악연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의 불화는 단순히 성격 차이를 넘어, 업무 스타일과 철학의 근본적인 대립에서 기인했다. 로이드 조지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정치적 동물'이었다. 직관적이고, 유연하며, 때로는 규칙을 무시해서라도 결과를 만들어내는 타입이었다. 그는 체임벌린을 임명하면서 구체적인 권한이나 부처의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정해주지 않았다. 일단 앉혀 놓으면 알아서 '정치적으로' 풀어갈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체임벌린의 스타일은 철저한 '시스템주의자'였다. 그는 명확한 직제표, 문서화된 권한, 그리고 확실한 예산 뒷받침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부처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른 부처와의 권한 침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로이드 조지 입장에서 체임벌린은 "사소한 규정에 목숨 거는 융통성 없는 관료"처럼 보였고, 체임벌린 입장에서 로이드 조지는 "국정 운영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사기꾼"처럼 보였다.[6]

국가봉사부 장관으로서 체임벌린의 임무는 민간인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 직후부터 기존의 노동부, 군수부와 끊임없는 영역 다툼에 휘말렸다. 로이드 조지는 조정자 역할을 하기는커녕, 체임벌린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다른 장관들 앞에서 그를 면박 주며 힘을 빼놓기 일쑤였다.

결국 체임벌린은 자신의 구상이 관료주의의 벽과 총리의 무관심에 막히자, 임명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17년 8월에 장관직을 던지고 버밍엄으로 내려가 버린다. 이는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정치적 치욕이었다. 당시 정계에서는 "체임벌린은 버밍엄이라는 작은 연못에서는 고래일지 몰라도, 런던이라는 바다에서는 길을 잃은 물고기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이 짧고 강렬했던 실패는 네빌 체임벌린의 후반기 정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로이드 조지를 증오했다. 훗날 1930년대 로이드 조지가 유화 정책을 비판하며 정계 복귀를 노릴 때, 체임벌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견제했던 것은 이 시절의 앙금이 컸다. 또한 '남을 믿고 맡겼다가 망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 외무부의 조언을 무시하고 직접 히틀러와 담판을 지으려 했던 독단적인 성향은, 이때의 시스템적 실패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나 관료들은 믿을 게 못 된다, 내가 직접 챙겨야 확실하다"는 강박이 생긴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실패 이후 그는 어떤 직책을 맡든 상대방이 질릴 정도로 완벽한 자료 조사를 마친 뒤에야 회의에 임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는 훗날 그가 재무장관으로서 예산안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실상 이 시기는 네빌 체임벌린에게 있어 '중앙 정치의 매운맛'을 본 시기이자, 동시에 그가 가진 행정가로서의 한계를 노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치(Politics)보다 일을 처리하는 행정(Administration)에 특화된 인물이었다.[7][8]

3.4. 의회 입성[편집]

네빌 체임벌린이 하원에 처음 입성한 것은 1918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는 당시 영국 정계의 거물들이 보통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의원 배지를 달았던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늦은 출발이었다.[9] 하지만 이 '늦깎이 신인'은 단순한 초선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버밍엄 시장으로서 행정 실무를 밑바닥부터 훑은 베테랑이었고, 대정치인 조셉 체임벌린의 아들이라는 배경 덕분에 중앙 정치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당시 영국 정계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혼란기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보수당 연합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서부 버밍엄(Birmingham Ladywood) 지역구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가 과거 국가봉사부 장관 시절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던 로이드 조지 총리에 대해 평생에 걸친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석에서 로이드 조지를 "함께 일할 수 없는 사기꾼"이라 칭하며 복수심을 갈았고, 이는 그가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반(反) 로이드 조지 진영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동력이 되었다.

체임벌린은 의회 뒷좌석에 머물던 시절부터 일반적인 정치인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는 화려한 수사학이나 대중 연설로 좌중을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데이터와 수치로 상대를 질식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위원회 활동에서 그는 정부가 내놓은 법안의 사소한 허점까지 파고들며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이때 보여준 꼼꼼함은 관료들 사이에서 "체임벌린에게 걸리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특히 사회 복지와 공중보건 문제에 집착했다. 이는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건강과 주거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행정가적 마인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슬럼가 정비와 영아 사망률 감소를 위해 구체적인 예산안을 직접 짰으며, 현장을 방문해 실태를 조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요함은 당시 보수당 당수였던 앤드루 보너 로와 스탠리 볼드윈의 눈에 들게 되었고, 그는 등원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당내 주요 보직을 섭렵하며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린다.

1923년, 스탠리 볼드윈 내각이 출범하면서 체임벌린은 드디어 자신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보건부 장관(Minister of Health) 자리에 앉게 된다.[10] 그는 취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체임벌린의 보건부 장관 재임기는 영국 보수주의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을 차지한다. 보통 보수당은 '작은 정부'와 '예산 절감'을 외치지만, 체임벌린은 국가가 개입하여 국민의 삶을 직접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 **'진보적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장관실에 지도를 펼쳐놓고 영국 전역의 주택 보급률을 체크하며 공공 주택 건설을 독려했다. 이때 그가 보여준 추진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는데, 훗날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두고 "현대적 의미의 영국 복지 국가 시스템의 원형은 체임벌린의 책상 위에서 탄생했다"고 평가할 정도다.

그의 입법 활동은 단순히 법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지방 자치 단체와의 끊임없는 협상과 설득의 과정이었다. 그는 중앙 정부의 보조금을 미끼로 지방 의회들이 위생 시설을 정비하게 만들었고, 반대파들에게는 치밀한 통계 자료를 들이밀며 입을 막았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보수당 내에서 그를 '가장 유능한 행정 전문가'로 각인시켰고, 동시에 대중에게는 '나를 돌봐주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3.5. 주택 정책의 혁명[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선에서 돌아온 수백만 명의 퇴역 군인들과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주거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영웅들이 살기에 걸맞은 나라(A fit country for heroes to live in)"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나 다름없었다. 런던과 버밍엄, 맨체스터 등 대도시의 슬럼가는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고, 좁은 방 한 칸에 온 가족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비참한 광경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전후의 극심한 경제 불황과 천문학적인 전쟁 채무는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1919년 통과된 애디슨법(Addison Act)이 지나치게 높은 보조금 부담으로 인해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영국의 주택 보급 사업은 동력을 잃고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보건부 장관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1923년, 체임벌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주택법(Chamberlain Act)을 의회에 제출한다. 이 법안은 이전의 정책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매우 정교하고 '경영학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정부의 직접적인 건설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간 건설업자들이 집을 지을 때 정부가 정액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정부의 재정 부담을 고정시키면서도 시장의 활력을 끌어올리는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단순히 집을 많이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규격을 설정했다. 방의 개수, 채광, 화장실의 위치 등을 규제하여 '질 낮은 슬럼'의 재현을 막고자 했다. 버밍엄 시장 출신답게 그는 중앙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기보다는 각 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 지방 의회가 주택 보급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분산시켰다.

체임벌린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에서 엄청난 양의 통계 자료와 수치를 들이밀며 반대파를 압도했다. 노동당은 보조금이 너무 적다고 비판했고, 보수당 내 강경파는 국가 예산을 민생에 너무 많이 쓴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특유의 차갑고 논리적인 어조로 "사회적 불만이 폭발하여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민들에게 자신의 집을 갖게 하는 것"이라며 그들을 설득했다.

실제로 그는 보건부 장관 시절, 매일 아침 산더미 같은 서류를 검토하며 전국 각지의 주택 건설 현황을 도표로 작성해 보고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워커홀릭적인 면모는 훗날 외교 무대에서도 나타나는데,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데이터와 문서'를 믿는 그의 성향이 이때 완성된 셈이다.[11]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23년부터 1929년 사이에 영국 전역에서 약 438,000채의 주택이 건설되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민간 자본에 의해 지어졌다. 이는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경이로운 수치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주택들은 흔히 '세미-디태치드(Semi-detached, 벽 하나를 공유하는 쌍둥이 집)' 형태로, 오늘날 영국 교외 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이는 영국의 노동 계급 중 상층부가 중산층으로 편입되는 사회적 사다리 역할을 했다. 단순히 새 집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심의 낡고 병든 구역을 과감하게 허무는 '도시 재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민간 주도로 이루어지다 보니 정작 가장 가난한 최하층민들이 입주하기에는 임대료나 분양가가 다소 높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훗날 노동당의 휘틀리법(Wheatley Act)을 통해 보완되지만, 그 기초 공사를 한 것은 명백히 체임벌린이었다.

체임벌린을 단순히 '약한 총리'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기의 업적은 매우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영국 현대 복지국가의 실질적인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국가가 개입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중도 우파적 사회 개혁'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쌓은 '나는 하면 된다'는 행정적 자신감과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모든 난제를 풀 수 있다'는 신념은 훗날 그가 국제 정치라는, 행정과는 전혀 다른 판도의 무대에서 치명적인 오판을 내리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집 짓는 문제처럼 히틀러와도 수치를 맞추고 서류를 꾸미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3.6. 지방 행정 체계의 현대화[편집]

체임벌린이 보건부 장관(Minister of Health)으로서 남긴 가장 거대한 족적 중 하나는 바로 영국의 전근대적인 지방 행정 및 복지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은 것이다. 당시 영국의 지방 행정은 그야말로 '누더기' 상태였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 내려온 낡은 구빈법(Poor Law) 체계가 20세기 산업사회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복지 행정의 핵심 단위였던 '구빈 조합(Poor Law Unions)'과 이들을 관리하는 '구빈 위원회(Boards of Guardians)'는 지역마다 운영 방식이 제각각이었고, 효율성은 바닥을 쳤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실업자가 폭증하면서 이 낡은 시스템은 한계에 다다랐다. 체임벌린은 이 문제를 단순한 '자선'의 영역이 아닌 '국가 경영'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특유의 치밀한 행정력을 발휘해, 수백 년간 영국 사회를 지배해 온 구빈법 체계를 해체하고 이를 현대적인 지방 자치 단체(Local Authorities)의 기능으로 통합하는 대수술을 집도했다.

체임벌린 행정 커리어의 정점은 1929년 지방정부법의 제정이다. 이 법안은 단순히 조항 몇 개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영국의 지방 통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혁명적 조치였다.

전국에 퍼져 있던 수백 개의 구빈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그 권한을 카운티(County) 및 카운티 자치구(County Borough) 의회로 이관했다. 이는 복지 행정을 전문화된 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존에 구빈원(Workhouse) 부속 병원으로 운영되던 시설들을 일반 공립 병원으로 전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훗날 노동당 정부가 수립하는 국립보건서비스(NHS)의 실질적인 하드웨어적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12]

산업 시설과 농지에 대한 지방세 부담을 75% 이상 경감해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대공황의 전조가 보이던 시기, 제조업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전략적인 경제 활성화 방안이었다.

이 과정에서 체임벌린은 당내 보수파들로부터 "지나치게 국가 개입적이다"라는 비판을 받았고, 야당인 노동당으로부터는 "서민의 구빈 권리를 박탈한다"는 공격을 동시에 받았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행정의 효율성이 곧 국민의 복지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시혜적인 복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돌아가야만 빈곤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시기 그가 보여준 집요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수백 장에 달하는 법안 초안의 세부 조항을 직접 검토하며 관료들을 몰아붙였다. 하원 토론에서도 반대파의 논리를 데이터와 통계로 압살하며 '의회 최고의 토론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지방정부법의 통과는 체임벌린을 보수당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정책의 귀재'로 각인시켰다. 그는 이 개혁을 통해 지방 정부의 재정 자립도를 높이는 동시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적절히 배분하는 묘수를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개혁은 영국이 신자유주의적 초기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복지 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비록 훗날 유화 정책의 실패로 인해 그의 모든 업적이 가려지는 비극을 겪지만, 적어도 영국 내치(內政)에 있어서만큼은 그는 20세기 초반 가장 유능하고 혁신적인 장관 중 한 명이었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13][14]

3.7. 재무장관 시절[편집]

1931년, 영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29년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대서양을 건너 런던 시티의 금융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당시 집권 중이던 램지 맥도널드의 노동당 정부는 실업 급여 삭감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 분열을 일으키며 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결국 국가적 위기 타개를 위해 보수당자유당이 합세한 거국 내각(National Government)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네빌 체임벌린은 이 혼돈의 시기에 재무장관이라는, 사실상 총리 다음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사실 그는 이미 1923년에 짧게 재무장관을 지낸 적이 있었으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시 영국의 실업자 수는 250만 명을 돌파했고, 금 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파운드화의 가치는 연일 폭락 중이었다. 체임벌린은 취임하자마자 "영국 경제라는 거함이 침몰하느냐, 아니면 기적적으로 회생하느냐"를 결정지어야 하는 운명적인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체임벌린 재임 초기 가장 극적인 사건은 역시 금본위제(Gold Standard) 포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파운드화가 금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영제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경제 질서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은행들이 연쇄 도산하고 런던으로 향하던 금 유입이 끊기자, 체임벌린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감상주의를 배제한 행정가답게, 1931년 9월 파운드화의 금 본위 이탈을 단행한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금융계에 그야말로 '핵폭탄'급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대영제국이 파산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결단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영국의 수출 경쟁력이 회복되었고, 금 보유고에 묶여 있던 통화 정책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이를 통해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며 내수 경기를 부양할 기초 체력을 확보했다.

체임벌린은 재정 건전성에 거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국가가 번 돈보다 더 많이 써서는 안 된다"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적 가치관을 견지했다. 1932년 예산안에서 그는 공무원 급여 삭감, 실업 수당의 엄격한 제한, 그리고 소득세 인상이라는 '독사과'를 국민들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여론은 험악했다.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어 시티의 은행가들을 구한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해군 내에서는 급여 삭감에 반발한 인버고든 항명 사건(Invergordon Mutiny)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특유의 차갑고 논리적인 어조로 "지금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내일의 영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의원들을 압박했다. [ 이 과정에서 그는 노동당 의원들로부터 '차가운 물고기(Cold Fish)'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게 수치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재정 긴축으로 확보된 여력은 '저금리 전환'으로 이어졌다. 체임벌린은 정부 부채의 이자율을 5%에서 3.5%로 대폭 낮추는 국채 전환 작업을 성공시켰는데, 이는 영국 금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부채 조정 중 하나로 꼽힌다. 시중에 풀린 저렴한 자금은 갈 곳을 찾다가 건설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시기 영국 교외 지역에는 이른바 '체임벌린형 주택'이라 불리는 세미-디태치드(Semi-detached) 스타일의 근대적 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다. 재무장관으로서 그가 설계한 경제 구조가 중산층의 성장을 촉진하고, 대공황의 늪에서 영국을 가장 먼저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로 영국의 경제 회복 속도는 당시 뉴딜 정책을 시행하던 미국보다도 지표상으로는 더 안정적이고 빨랐다.

이 시기의 체임벌린은 명실상부한 거국 내각의 '엔진'이었다. 총리인 맥도널드가 건강 악화와 정치적 고립으로 허수아비가 되어갈 때, 모든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재무부와 체임벌린의 손을 거쳐갔다. 그는 복잡한 경제 수치를 암기하는 비상한 머리와, 한 번 결정한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그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수치와 논리로 설득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은, 훗날 국제 정치라는 '비논리적이고 광기 어린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오판을 낳게 된다. 그는 경제를 살린 자신의 유능함이 외교에서도 통할 것이라 믿었고, 이는 훗날 히틀러라는 변수를 만났을 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체임벌린이 재무장관으로서 수행한 가장 파격적이고도 역사적인 결단은 바로 영국이 19세기 이래 고수해 왔던 자유무역(Free Trade) 원칙을 폐기한 것이다. 사실 이는 그의 아버지 조셉 체임벌린이 생전에 그토록 부르짖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던 '관세 개혁'의 완성이기도 했다. 1932년, 체임벌린은 수입규제법(Import Duties Act)을 통과시키며 영국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정책의 정점은 1932년 8월에 체결된 오타와 협정(Ottawa Agreement)이었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보호무역의 장벽을 높이던 시절, 체임벌린은 영국 연방(British Empire)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이른바 '제국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 체제를 구축했다. 영국 본토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 자치령 간의 교역에서는 관세를 낮추거나 면제하되, 연방 외부 국가에서 들어오는 물건에는 높은 관세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조치를 넘어, 1차 대전 이후 느슨해진 대영제국의 결속력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다시 묶어세우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15]

체임벌린의 재정 철학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벌어들인 만큼만 쓴다"는 철저한 건전 재정론이었다. 그는 대공황의 여파로 정부 부채가 급증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1930년대 초반, 그는 공공 부문의 임금을 삭감하고 실업 급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등 뼈를 깎는 긴축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노동계와 야당인 노동당으로부터 "빈곤층의 고혈을 짠다"는 맹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체임벌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긴축을 통해 확보된 재정적 신뢰도를 바탕으로 국채 금리를 대폭 낮추는 데 성공했다. 1932년 단행된 전시 국채 전환(War Loan Conversion)은 그의 재무적 감각이 빛을 발한 순간으로 평가받는데, 기존 5%의 고금리 국채를 3.5%로 낮춤으로써 연간 수천만 파운드의 이자 부담을 덜어냈다. 이 절감된 비용은 훗날 그가 욕을 먹으면서도 조금씩 시작했던 초기 재군비 사업의 소중한 자금이 되었다.

체임벌린의 경제 정책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런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과 금융권에서는 "경제의 안정을 되찾아준 구세주"라는 찬사가 쏟아졌으나, 석탄·철강·조선업이 밀집한 북부 공업 지대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지의 노동자들에게 그는 "냉혈한 행정가"일 뿐이었다.

실제로 1934년부터 영국의 경제 지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주택 건설 붐이 일어났고, 내수 소비가 진작되었으며, 파운드화의 가치는 안정을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1934년 예산안에서 "영국은 이제 고난의 시기를 지나 희망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하며 감세를 단행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경제 회복은 '내수'와 '제국 내 교역'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는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자초하는 측면이 있었으며, 특히 미국과의 통상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지나치게 예산 균형에 집착한 나머지 독일이 광적으로 군비를 확충하던 시기에 영국의 군 현대화 박자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16]

이 시기 체임벌린은 사실상 내각의 이인자를 넘어 '내각의 실세'로 군림했다. 총리였던 램지 맥도널드는 노쇠했고, 스탠리 볼드윈은 세밀한 행정 업무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의 예산을 쥐고 흔들던 체임벌린은 각 부처의 세세한 정책까지 간섭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항상 정교하게 계산된 통계 수치와 보고서가 쌓여 있었으며, 그는 이를 바탕으로 관료들을 압도했다. 동료 의원들은 그를 두고 "마치 차가운 기계와 같다"거나 "인간적인 매력은 없지만, 그보다 유능한 관리자는 없다"고 평했다. 이 시기에 다져진 그의 강력한 행정 장악력은 1937년 그가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외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인 유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재무장관 시절의 체임벌린은 영국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설계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무너진 대영제국의 경제 질서를 다시 세웠고, 자국 중심의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대공황의 늪에서 가장 빨리 탈출한 국가 중 하나로 영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이 '안정적인 경제 시스템'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를 대비하기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

3.8. 차기 대권 주자로의 부상[편집]

1930년대 중반, 영국 보수당의 권력 지형은 사실상 스탠리 볼드윈 총리와 네빌 체임벌린 재무장관이라는 두 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성격이 극과 극이었다는 사실이다. 볼드윈이 특유의 느긋함과 뛰어난 대중적 소통 능력, '영국적인 평온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체임벌린은 치밀한 데이터 중심의 행정 능력과 차갑고 날카로운 효율성을 상징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협력은 견고했다. 볼드윈은 복잡한 정책 결정과 행정 실무를 체임벌린에게 전적으로 일임했고, 체임벌린은 볼드윈의 그늘 아래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차분히 다져 나갔다. 사실상 이 시기 영국의 내치는 체임벌린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임벌린이 단순히 행정 전문가를 넘어 차기 총리 후보 1순위로 올라선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압도적인 당악 능력이었다. 그는 보수당 중앙당(Conservative Central Office)의 조직을 정비하고, 당의 정책 입안 과정을 현대화했다. 당시 보수당 의원들 사이에서 체임벌린은 "질문하면 즉각 답이 나오는 백과사전" 같은 존재였다.

특히 1935년 총선을 앞두고 그는 보수당의 공약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경제 회복과 사회 복지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을 세웠다. 이는 대공황의 여파로 고통받던 노동자 계층의 표심을 일부 흡수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당내에서는 "볼드윈 이후는 당연히 네빌"이라는 공감대가 완벽히 형성되었다.

1936년 영국을 뒤흔든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위기 당시, 체임벌린은 볼드윈 총리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였다.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의 결혼 문제로 국왕이 정부와 대립할 때, 체임벌린은 누구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국왕의 사적인 감정이 입헌군주제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며, 내각의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냉철한 판단력은 보수당 원로들과 영연방 국가들의 신뢰를 사기에 충분했다. 볼드윈이 퇴위 사태 수습 후 은퇴를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체임벌린의 총리 취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체임벌린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데, 바로 유럽 정세의 급변이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 등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발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재무장관으로서 국방비 지출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군비 확장을 요구하는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이나 윈스턴 처칠 같은 인물들과 서서히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그는 "강력한 경제가 곧 강력한 국방"이라는 논리로 맞섰으나, 이는 훗날 그가 외교적 위기 상황에서 '힘의 논리'를 간과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그는 보수당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시야는 버밍엄의 시의회와 런던의 재무부 장벽 안에 갇혀 있었다." - 훗날 한 정적의 회고 중.

1937년 5월, 조지 6세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 스탠리 볼드윈이 명예롭게 은퇴하자, 체임벌린은 당내 경선조차 거치지 않고 만장일치로 보수당 당수 및 총리직을 승계받았다. 당시 영국 언론은 그를 "준비된 총리", "가장 지적인 행정가"로 찬양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사회 개혁의 완성을 외쳤으나, 운명의 장난처럼 그가 총리로서 마주해야 했던 것은 복지 정책이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의 서곡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내치)에서 쌓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외교라는 미지의 영역에서도 '합리적인 타협'이 통할 것이라 믿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3.9. 60대 총리 취임[편집]

1937년 5월 28일, 조지 6세의 대관식 직후 스탠리 볼드윈이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갑작스러운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미 수년 전부터 당내에서 조율된 '가장 완벽하고 조용한 권력 이양'이었다. 당시 보수당 내에서 네빌 체임벌린의 위상은 독보적이었으며, 그의 총리 취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복형 오스틴 체임벌린이 가문의 숙원이었던 총리직을 끝내 달성하지 못하고 불과 몇 달 전 세상을 떠났기에, 네빌의 취임은 개인적으로나 가문적으로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취임 직후 다우닝 가 10번지에 입성하며 "나의 시대가 왔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볼드윈이 특유의 친화력과 대중적인 이미지 메이킹으로 정국을 운영했다면, 체임벌린은 철저하게 데이터와 실무, 그리고 행정적 효율성을 앞세우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그를 향해 "시 의원 출신의 행정가(The Coroner's Clerk)"라며 비꼬기도 했으나, 정작 공무원들과 내각 관료들은 그의 명쾌한 업무 처리 방식에 환호했다.

체임벌린 내각은 시작부터 강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그는 장관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세부 사항까지 챙기는 이른바 마이크로매니징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는 그가 보건부 장관과 재무장관을 거치며 쌓은 방대한 행정 지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장관들의 창의성과 독립적인 판단을 억압한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18]

그는 취임사에서 내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사실 체임벌린 본인이 가장 잘하고 싶었던 것은 외교가 아니라 영국 사회의 근대화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며, 전후 침체된 산업 전반을 재구축하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만약 그가 평화로운 시대에 총리가 되었다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 개혁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총리 취임 당시 유럽의 정세는 이미 폭풍 전야였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체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있었고,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 연맹의 권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상태였다. 체임벌린은 이 복잡한 국제 관계를 마치 '버밍엄 시의 비즈니스 협상'처럼 접근했다.

그는 독재자들도 결국은 '합리적인 인간'이며, 그들이 원하는 바(Grievances)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양보를 해준다면 대규모 전쟁이라는 파국은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훗날 그를 파멸로 이끈 유화 정책(Appeasement)의 근간이 된다. 그는 총리 취임 직후 사석에서 "내가 직접 히틀러와 대화한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지도층이 공유하던 집단적 낙관론이자 동시에 체임벌린 특유의 오만함이 섞인 발언이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기억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런던의 지식인들부터 지방의 노동자들까지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1930년대 중반의 영국은 사실상 평화주의(Pacifism)가 국가 이데올로기화된 상태였으며, 야당인 노동당은 정부의 소규모 재군비 예산안에도 "전쟁광들의 짓"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리가 된 체임벌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군비 증강을 서두르자니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고 국민적 반발에 부딪힐 것이 뻔했고, 가만히 있자니 독일의 팽창을 방관하는 꼴이 되었다. 그는 결국 '시간을 벌면서 서서히 무장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위험한 줄타기를 선택했다. 취임 초기 그가 보여준 행보는 결코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현재 국력과 여론을 냉정하게 계산한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취임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했다. 윈스턴 처칠을 필두로 한 보수당 내 강경파들은 체임벌린이 국제 정치를 지나치게 상업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히틀러는 거래를 하러 온 상인이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러 온 약탈자"라는 경고였으나, 당시 체임벌린의 압도적인 당내 장악력과 행정적 성과 앞에 처칠의 목소리는 광야의 외침에 불과했다.

체임벌린은 자신의 명민함과 성실함을 과신한 나머지, 인간의 악의가 논리와 타협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60대 후반의 나이에 영국 최고의 권좌에 올라,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도박판에 '이성'이라는 패를 들고 뛰어든 셈이었다.

네빌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기에 앞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지점이 바로 1930년대 영국 사회를 지배했던 '집단적 트라우마'다. 불과 20년 전,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적 재앙을 겪으며 한 세대의 청년들을 참호 속에서 잃어버렸다. 솜 전투와 파스샹달 전투에서 발생한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 피해는 영국인들의 뇌리에 "전쟁 = 문명의 종말"이라는 공식을 각인시켰다.[ 당시 영국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Lost Generation'이라 불리는 전사자 명단이 적힌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이는 대중에게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 영국인들에게 히틀러의 부상은 '타도해야 할 악'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달래서 잠재워야 할 시한폭탄'에 가까웠다. 체임벌린 역시 이러한 대중 정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 자신이 누구보다 전쟁을 혐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어렵게 회복 중인 영국 경제가 파탄 나고, 대영제국의 해체로 이어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3.10. 평화주의 운동의 확산과 정치적 압박[편집]

당시 영국의 평화주의(Pacifism)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토론 동아리인 옥스퍼드 유니언은 "이 집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임을 결의한다"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당시 지식인 계층과 청년들 사이에서 애국심보다 반전주의가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국제연맹 연합(League of Nations Union)이 주도한 이 민간 투표에는 무려 1,100만 명 이상의 영국 시민이 참여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응답자의 대다수가 국제적인 무기 감축과 집단 안보를 지지했으며, 이는 정권이 군비 증강을 서두를 경우 선거에서 참패할 것임을 예고하는 경고장과 같았다.

체임벌린이 총리에 취임했을 때, 그는 이러한 민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 역시 재군비 예산안에 대해 "전쟁광들의 책동"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기에, 체임벌린으로서는 유화 정책이 단순한 선택이 아닌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적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또 하나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했던 공포는 전략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당시 군사 전문가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폭격기는 언제나 목표에 도달한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는 격언이 상식처럼 통용되었다.[19]

레이더 기술이 완성되기 전이었고, 방공망의 효율성이 검증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런던 시민들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하늘에서 독가스와 폭탄이 쏟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당시 정부 보고서는 전쟁 발발 첫 주에만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러한 공포는 체임벌린에게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명감을 부여했다.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은 그의 독단적인 고집이 아니라 영국 국민 전체의 간절한 평화 갈망과 군사적 비관론이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대중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대변자였으며, 뮌헨 협정 직후 그가 받은 유례없는 환호는 당시 영국인들이 얼마나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는지를 증명하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3.11. 외교 노선의 변화[편집]

체임벌린은 전임자 스탠리 볼드윈과는 판이하게 다른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볼드윈이 외교 문제를 전문가(외무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자신은 국내 정치의 조정자 역할에 집중했다면, 체임벌린은 "내각의 모든 업무는 총리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특히 그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과 나치즘의 파고를 관료주의적인 외무부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체임벌린이 보기에 외무부 관료들은 지나치게 교조적이었으며, 프랑스와의 동맹에만 집착하여 유연성이 부족했다. 그는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외교에 대입했다. 즉, 상대가 독재자일지라도 그들이 원하는 '합리적인 대가'를 지불한다면 전쟁이라는 최악의 파산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총리의 독단적인 행보가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앤서니 이든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앤서니 이든은 당시 영국 정계의 떠오르는 스타였으며,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원칙을 준수하고 독재자들에게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반면 체임벌린은 국제연맹이 이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막지 못한 시점에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보았다.

둘의 결정적인 균열은 대(對) 이탈리아 정책에서 발생했다. 체임벌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결속(베를린-로마 추축)을 막기 위해 무솔리니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든을 건너뛰고 자신의 비공식 외교 라인을 가동하여 이탈리아 측과 접촉했다.[20]

이든은 독재자에게 먼저 양보를 제안하는 것은 영국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며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외무부는 사사건건 안 된다는 말만 한다"며 이든을 노골적으로 불신하기 시작했다. 체임벌린의 입장에서 이든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였고, 이든의 입장에서 체임벌린은 '외교의ABC도 모르는 아마추어 독재자'였다.

1938년 1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럽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국제 회의를 제안했을 때 갈등은 폭발했다. 당시 휴가 중이었던 이든을 대신해 보고를 받은 체임벌린은 이든과 상의도 없이 루스벨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미국이 유럽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추진하던 독일·이탈리아와의 개별 협상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든은 격노했다. 영미 협력의 기회를 발로 차버린 총리의 독단에 이든은 사표를 던졌고, 1938년 2월 20일 정식으로 내각을 떠났다. 이는 단순한 장관 한 명의 사퇴가 아니었다. 영국 정부 내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든이 떠난 후, 외무장관 자리는 체임벌린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온건파 핼리팩스 백작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실질적인 외교 사령탑은 총리 관저의 수석 고문이었던 호러스 윌슨이었다. 윌슨은 외교관 출신이 아닌 노동 행정 전문가였으나 체임벌린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며 사실상의 '그림자 외무장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써 체임벌린은 의회나 외무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유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구조를 완성했다. 그는 "내가 직접 히틀러를 만나 설득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위험한 자신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뮌헨 협정이라는 거대한 도박으로 이어지는 전초전이었으며,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한 독자 외교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3.12. 재군비 프로그램의 가동[편집]

체임벌린을 향한 대중적인 오해 중 하나는 그가 단순히 히틀러의 선의를 믿고 영국의 무장을 해제한 채 방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체임벌린은 총리 취임 이전인 재무장관 시절부터 영국의 군사적 무력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유화(Appeasement)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영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재군비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다.

그가 채택한 전략은 이른바 '이중 트랙(Double Track)' 전략이었다. 한편으로는 외교적 타협을 통해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지연시키거나 회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벌어들인 시간 동안 무너진 영국의 군수 산업 체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는 체임벌린이 평화주의에 취한 몽상가가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계산적인 '행정가형 정치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체임벌린이 재군비에 신중했던 이유는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 붕괴야말로 전쟁에서 패배하는 지름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영국의 경제는 대공황의 직격탄에서 겨우 회복 중이었고, 무리한 군비 확장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거나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를 폭락시켜 국가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는 국방비를 '네 번째 군종(The Fourth Arm of Defence)'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육·해·공군만큼이나 경제적 안정성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그는 무작정 군대를 늘리는 대신, 영국의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집중할지 철저하게 우선순위를 따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린 결론이 바로 '해군과 공군 우선주의'였다.[21]

체임벌린 행정부의 재군비 전략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은 '그림자 공장' 시스템이었다. 이는 평시에는 자동차나 민수용 부품을 생산하는 민간 공장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여, 전쟁 발생 시 즉각 항공기 엔진이나 기체 생산 라인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설비를 미리 갖춰놓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기업들이 이 계획에 참여하여 버밍엄과 코번트리 일대에 거대한 군수 생산 기지를 구축했다. 숙련공의 확보는 단순한 공장 건설을 넘어, 전시 생산 체제에 투입될 기술 인력을 평시에 미리 교육하고 확보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 시스템 덕분에 영국은 1938년 뮌헨 협정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 공군(Luftwaffe)에 압도당하고 있었으나,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시점에는 독일의 생산량을 추월하는 기적적인 역전극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실상 영국판 '경제 전시 동원령'의 기초를 체임벌린이 닦은 셈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영국 본토를 방어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에 예산을 집중했다. 그는 공격용 폭격기보다는 방어용 전투기 생산에 우선순위를 두었는데, 이는 도덕적 명분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방공망은 구식이었고, 런던이 폭격당할 경우 전쟁 수행 의지가 꺾일 것을 우려한 체임벌린은 레이더(Radar, 당시 명칭 RDF)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배정했다. 과학자 로버트 왓슨 와트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체인 홈(Chain Home)' 레이더망은 체임벌린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제때 완공되지 못했을 것이다.[22]

물론 이러한 재군비 노력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체임벌린은 재정 건전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육군의 전차 전력이나 대공포 보급에는 인색했다. 이로 인해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영국 원정군은 독일 기갑 부대에 처참하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재군비의 속도가 독일의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도 뼈아픈 실책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생각해보면, 만약 체임벌린이 1937년 취임 직후부터 무리하게 총력전 체제로 전환했다면, 영국의 경제는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파산했을 것이라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무장"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3.13. 안슐루스 사건[편집]

1938년 초, 유럽의 정세는 말 그대로 일촉즉발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라인란트 재무장을 통해 베르사유 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고, 그의 다음 타깃이 고향인 오스트리아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은 이 거대한 폭풍을 마주하며 자신의 외교적 신념인 '합리적 대화'가 통할 것인지 시험해야만 했다.

사실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어 했으나, 냉정하게 영국의 국력을 계산했을 때 오스트리아를 위해 독일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영국 참모본부는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 독일의 영향권 아래 있으며, 영국 육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앙 유럽으로 진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보고서를 올린 상태였다.[23]

1938년 2월, 오스트리아의 수상 쿠르트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압박에 못 이겨 베르히테스가덴으로 소환당한다. 그곳에서 히틀러는 온갖 폭언과 협박으로 오스트리아 내 나치당원들의 입각을 강요했다. 슈슈니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체임벌린의 반응은 냉담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우리는 중부 유럽의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이는 사실상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영향권으로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비겁함'으로 치부하기엔 당시 영국의 사정이 너무나 열악했다. 체임벌린은 당시 재무장관 시절부터 추진해온 공군력 강화 사업(특히 레이더망 구축과 허리케인/스핏파이어 전투기 양산)이 완료될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슈슈니크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강행하려 하자, 히틀러는 즉각 침공을 명령했다. 3월 12일 새벽, 독일 국방군이 국경을 넘었을 때 오스트리아인들은 총을 쏘는 대신 나치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다. 이 장면은 체임벌린에게 큰 충격과 동시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스스로가 저렇게 환영하는데, 남의 나라 군대가 가서 피를 흘릴 명분이 있느냐"는 논리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안슐루스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히틀러에게 "이것이 마지막 영토 요구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끝없는 탐욕을 오판한 것이었으며, 훗날 '늑대에게 양고기를 던져주고 굶주림이 멈추길 기대한 격'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 근거가 된다.

안슐루스 과정에서 체임벌린은 자신의 내각 내에서도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원칙주의자였던 외무장관 안소니 이든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한 끝없는 양보에 반대하며 사표를 던졌다. 이든의 사임은 체임벌린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할리팩스 경을 외무장관에 앉히며 '1인 외교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당시 영국의 여론은 양분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독일의 팽창을 당장 막아야 한다"는 처칠 등의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같은 참혹한 살육전을 다시 겪느니 오스트리아 하나 정도는 내주는 게 낫다"는 평화주의적 정서가 압도적이었다. 체임벌린은 후자의 정서를 대변하며,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도박판에 던지기 시작했다.

안슐루스는 베르사유 체제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은 사건이었다. 체임벌린은 이 사건을 통해 히틀러가 국제법이나 조약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경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패배뿐'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현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안슐루스 당시 영국의 대응을 두고 "체임벌린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당시 영국 본토 방공망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런던이 폭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안슐루스로 인해 독일의 국력과 자원은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이는 곧이어 벌어질 체코슬로바키아 위기(수데텐란트)에서 히틀러가 더욱 기고만장하게 행동하는 발판이 되었다.

3.14. 수데텐란트 위기[편집]

1938년 초, 오스트리아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유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음 타겟인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했다. 특히 체코와 독일의 접경지대인 수데텐란트(Sudetenland)는 그야말로 화약고였다. 이곳은 당시 약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이들이 체코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족 자결주의'라는 미명 하에 영토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수데텐란트는 단순한 영토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국경 방어의 핵심인 요새 지대와 주요 산업 시설이 밀집해 있는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곧 국가 방어망 전체가 무너짐을 의미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사주를 받은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과 수데텐 독일인당(SdP)은 끊임없이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며 체코 정부를 압박했고, 이는 곧 국제적인 위기로 번졌다.

당시 체임벌린은 이 사태를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영국 청년들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먼 나라의 분쟁 때문에 참호 속에서 죽어갈 수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24]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정치가'로 오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히틀러가 원하는 것이 오직 '독일인들의 통합'일 뿐이며, 수데텐란트 문제만 해결되면 유럽에 영구적인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이에 체임벌린은 근대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셔틀 외교'를 감행한다. 69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독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논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체코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상호 원조 조약을 근거로 항전을 준비했으나, 프랑스 역시 영국의 동의 없이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프랑스를 설득하여 체코 측에 "평화를 위해 영토를 할양하라"는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친구라고 믿었던 동맹국들이 강도(나치 독일)의 편을 들어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라고 강요하는 꼴이었다. 당시 체코 내부에서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거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작은 나라의 주권은 휴지조각처럼 취급받았다.

1938년 9월 내내 전 유럽은 동원령이 선포되는 등 전쟁 직전의 공포에 휩싸였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는 참호가 파졌고, 시민들에게는 방독면이 지급되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 했으나, 히틀러는 합의안이 나올 때마다 요구 조건을 높이며 체임벌린을 당혹케 했다.

히틀러의 목적은 단순히 영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동유럽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광기를 '이성적 양보'로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굶주린 늑대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어 습성을 고치려 하는 것과 같은 순진한 발상이었다.

3.15. 평화를 위한 도박의 시작[편집]

1938년 9월, 유럽은 사실상 1차 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 국면에 접어들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데텐란트 병합 요구는 단순한 외교적 마찰을 넘어, 베르사유 체제 자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폭탄이었다. 당시 영국 내각 내부에서도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강경론과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신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때 네빌 체임벌린이 꺼내 든 카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시도인 '플랜 Z(Plan Z)'였다.

이 계획의 핵심은 간단하면서도 무모했다. 영국의 총리가 직접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담판을 짓겠다는 것. 오늘날이야 국가 정상 간의 셔틀 외교가 일상적이지만, 당시로서는 총리가 타국 정상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직접 찾아가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파격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체임벌린의 나이는 69세의 고령이었고,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체임벌린이 런던 헤스턴 공항(Heston Aerodrome)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영국 시민들은 경악과 기대를 동시에 보냈다. 당시 비행 기술은 지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았고, 고령의 총리가 구름 위를 날아 적국의 수장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였다. 이 비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과 명예를 모두 걸겠다'는 체임벌린 특유의 독단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의지의 표명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체임벌린은 극심한 피로와 기압 차로 고생했으나, 그는 쉴 새 없이 서류를 검토하며 히틀러를 설득할 논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히틀러를 '말이 통하는 신사'로 가정하고, 독일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준다면 유럽의 평화가 영구히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치명적인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사실상 이 시점부터 체임벌린의 외교는 상대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평화 모델'에 상대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독일 뮌헨에 도착한 체임벌린은 다시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 접경지인 베르히테스가덴으로 향했다. 히틀러의 산상 별장인 베르크호프(Berghof)는 웅장한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을 맞이하며 겉으로는 예의를 갖췄으나,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특유의 광기 어린 연설과 협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결심했소. 350만 명의 수데텐 독일인들이 억압받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을 것이오. 만약 이것이 전쟁을 의미한다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소!"

히틀러의 이 불같은 일장연설 앞에서 체임벌린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는 오히려 "만약 당신이 이미 전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소?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마시오."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이러한 체임벌린의 태도는 히틀러에게 의외의 인상을 남겼는데, 히틀러는 훗날 사석에서 체임벌린을 "노련하고 끈질긴 여우 같은 노인네"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회담에서 체임벌린이 내놓은 핵심 양보는 '수데텐란트의 독일 병합을 원칙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드로 윌슨이 제창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히틀러의 요구에 적용했다. 즉,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 독일로 가겠다는 것을 막을 명분이 부족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당사자인 체코 대표는 회담장 근처에도 오지 못했고, 영국과 독일이라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영토를 놓고 흥정하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체임벌린은 이를 '부차적인 희생'으로 보았다. 유럽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것보다 영토 일부를 떼어주고 평화를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인도적'이라는 계산이었다.

첫 번째 회담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총리가 전쟁을 막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 거리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체임벌린의 모습은 평화의 화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안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양보를 선언하자마자 요구 사항을 더욱 늘렸고, 체임벌린은 자신이 히틀러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히틀러의 '시간 벌기' 전략에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무장관의 조언이나 내각의 우려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직관과 히틀러와의 '개인적인 유대'에 의존했다. 그는 히틀러를 직접 만나보니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일기에 적기까지 했다.[25]

3.16. 고데스베르크 회담[편집]

1938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독일 라인란트고데스베르크(Godesberg)에서 열린 네빌 체임벌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2차 정상회담을 다룬다. 1차 회담이었던 베르히테스가덴 회담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수데텐란트의 할양)를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돌아가 영국과 프랑스 내각,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설득해낸 직후에 열린 회담이다.

하지만 평화가 눈앞에 왔다고 믿었던 체임벌린의 기대와 달리, 히틀러는 이 회담에서 골대를 옮기는 식의 추가 요구를 던지며 유럽을 다시 한번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무위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체임벌린이 판을 다 짜오자 히틀러가 상을 엎어버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치력을 발휘했다. 당시 영국 내각 내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동맹국인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원조조약 때문에 난감한 처지였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영토 할양에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독일계 거주 지역의 자결권 인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프랑스를 압박했고, 결국 체코 정부에게 "영토를 떼어주지 않으면 영국과 프랑스는 너희를 돕지 않겠다"라는 최후통첩에 가까운 권고를 보내 승낙을 받아냈다. 체임벌린 입장에서는 히틀러가 요구한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상태에서 2차 회담장인 고데스베르크로 향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유럽의 평화를 구원한 영웅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9월 22일 오후, 고데스베르크의 라인호텔에서 열린 회담 분위기는 시작부터 차가웠다. 체임벌린은 기분 좋게 "당신이 요구한 대로 수데텐란트 할양에 대한 합의를 받아왔다. 이제 질서 있는 행정 절차만 논의하면 된다"라고 입을 뗐다. 하지만 히틀러의 반응은 체임벌린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었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것(베르히테스가덴의 합의안)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소(Es geht nicht mehr)."

히틀러는 돌연 태도를 바꿔 다음과 같은 추가 요구사항을 들이밀었다.
국제 위원회에 의한 완충기나 점진적 이양 따위는 집어치우고, 며칠 내로 독일군이 즉각 진주해야 한다.
당초 합의된 독일계 다수 지역뿐만 아니라, 체코의 핵심 방어선이 포함된 전략적 요충지까지 넘겨라.
헝가리와 폴란드의 영토 요구(테신, 슬로바키아 일부 등)도 이 기회에 모두 해결하라.

이것은 명백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체임벌린은 경악했다. 그는 "내가 당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내 정치적 생명까지 걸고 왔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냐"라며 이례적으로 격분했다. 회담은 결렬 위기에 처했고, 체임벌린은 항의의 표시로 호텔 방에 박혀 히틀러와 서면으로만 소통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9월 23일 밤부터 24일 새벽까지 이어진 마지막 회담에서 히틀러는 이른바 '고데스베르크 각서'를 건넸다. 9월 28일까지 체코군이 수데텐란트에서 전면 철수해야 하며, 이를 거부할 시 무력 행사에 들어가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체임벌린은 이 각서의 문구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당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문구를 조금 부드럽게 고쳐주겠다"라며 날짜를 10월 1일로 늦춰주는 척하는 '쇼'를 보여주었다.[26] 체임벌린은 결국 이 각서를 체코 정부에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고데스베르크 회담의 결과는 영국과 프랑스 여론을 급격히 냉각시켰다. "히틀러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라는 회의론이 대두되었고, 영국 해군은 동원령을 내렸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체임벌린 본인에게도 이 회담은 큰 트라우마였다. 그는 히틀러가 단순한 국수주의자가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도박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파국이 있었기에, 며칠 뒤 무솔리니의 중재로 열린 뮌헨 협정에서 히틀러가 아주 미세하게 양보하는 척했을 때 체임벌린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며 덥석 물게 되는 복선이 되기도 했다.

고데스베르크는 체임벌린의 '선의'가 히틀러의 '광기'에 완패한 지점이자, 유럽이 1차 대전 이후 가장 전쟁에 가까워졌던 48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7. 뮌헨 협정[편집]

1938년 9월 하순, 유럽은 말 그대로 '멸망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다. 히틀러가 요구한 수데텐란트 할양 기한인 10월 1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총동원령을 검토하며 런던 시내에는 방공호가 파이고 가스마스크가 배포되던 시점이었다. 이때 체임벌린이 무솔리니를 통해 극적으로 제안한 4개국 회담이 성사되면서, 세계의 시선은 바이에른의 심장부인 뮌헨으로 쏠리게 된다.

회담의 주체는 영국(체임벌린), 프랑스(에두아르 달라디에), 독일(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였다. 여기서 가장 기괴한 점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는 회담장 근처에도 못 가고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점이다.[27] "우리에 관한 것을 우리 없이 결정한다"는 체코인들의 비명 섞인 항의는 거물들의 정치적 계산 속에 철저히 묻혀버렸다.

9월 29일 오후 12시 45분, 뮌헨의 '푸러바우(Führerbau)'에서 시작된 회담은 초반부터 난항이었다. 히틀러는 이미 전쟁을 치를 준비가 끝났다는 듯 고함을 지르며 위협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수데텐란트의 즉각적인 점령과 체코 군대의 철수를 거칠게 요구했다. 반면 체임벌린은 특유의 꼼꼼함으로 조항 하나하나를 따져 물으며 "질서 있는 이주"와 "자산 가치 보존" 등을 논의하려 했다.

당시 현장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이러한 행정가적인 태도에 극도로 짜증을 냈다고 한다. 히틀러에게 이번 회담은 자신의 정복욕을 합법화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으나, 체임벌린에게는 이것이 문명 세계를 파멸에서 구할 마지막 동아줄이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이 과정에서 무솔리니가 중재안으로 내놓은 안건(사실상 독일 외무성이 작성한 초안)을 수용하는 결단(?)을 내린다. 사실상 독일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되, '국제 위원회'라는 허울 좋은 감시 기구를 두는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다.

자정을 넘긴 9월 30일 새벽 1시 30분, 마침내 4개국 정상은 협정서에 서명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영토의 1/3, 산업 시설의 50% 이상, 그리고 무엇보다 철통같았던 국경 요새선을 통째로 독일에 넘겨주게 되었다. 회담이 끝난 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면담을 요청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영독 공동 선언문'이 작성된다.
"우리는 어젯밤 서명한 협정과 영독 해군 협정을 양국 간의 평화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협의의 방식으로 해결할 것을 결의한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이 종이에 서명할 것을 권유했고, 히틀러는 귀찮다는 듯 흔쾌히 사인했다. 체임벌린은 이 종이가 히틀러라는 괴물을 신사적인 외교의 틀 안에 가두는 '철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이 선언문이 담긴 종이를 양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챙겨 넣고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1938년 9월 30일, 헤스턴 공항에 착륙한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여객기에서 네빌 체임벌린이 내렸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난이 아닌 광적인 수준의 환호였다. 당시 영국 국민들에게 체임벌린은 단순히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총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번 유럽을 덮치려던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괴물을 단신으로 막아낸 "평화의 사도" 그 자체였다.

체임벌린은 트랩 위에서 군중을 향해 히틀러와 공동으로 서명한 성명서, 즉 그 유명한 '종이 한 장'을 흔들어 보였다. 이 장면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담은 사진 중 하나로 남게 된다. 그는 공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독일의 총리 히틀러 씨와 제가 나눈 대화의 결과물인 이 종이는, 우리 두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사실 이 시점의 체임벌린은 스스로도 어느 정도 고양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라는 통제 불능의 독재자를 '이성적인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길들였다고 믿었으며, 이는 그의 일기나 서신에서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기만전술에 완전히 놀아난 꼴이 되었고, 훗날 처칠을 비롯한 강경파들에게 "명예와 전쟁 중 명예를 버리고 전쟁을 택했으나, 결국 전쟁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수를 맞는 계기가 된다.

공항에서의 환영을 뒤로하고 다우닝 가 10번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창가에 모여든 구름 떼 같은 군중을 향해 역사에 길이 남을(그리고 본인에게는 치욕이 될) 연설을 남긴다.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한 총리가 독일로부터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28]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십시오."

이 발언은 당시 전쟁의 공포에 떨던 런던 시민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췄고, 체임벌린의 이름은 평화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심지어 당시 국왕 조지 6세는 체임벌린을 버킹엄 궁전의 발코니로 불러내어 왕실 가족과 함께 군중의 환호를 받게 했다. 이는 전례 없는 파격적인 예우로, 당시 영국 지배층과 민중이 전쟁 회피에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이 "편히 주무십시오"라는 말은 불과 1년 뒤, 런던 상공에 독일 공군의 폭격기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가장 잔인한 조롱의 문구가 되고 만다. 사실 체임벌린 본인도 속으로는 이 평화가 영구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 그는 '평화를 가져온 영웅'의 배역을 완벽하게 수행해야만 했다.

당시 영국의 분위기가 모두 체임벌린을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하원의사당 내에서는 소수였지만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선봉에는 역시나 윈스턴 처칠이 있었다. 처칠은 뮌헨 협정을 가리켜 "완전하고 전면적인 패배"라고 규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동맹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수데텐란트)를 제물로 바쳤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영국의 신뢰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행위였다. 수데텐란트는 체코의 핵심 방어선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이곳을 넘겨줌으로써 체코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이는 이듬해 히틀러가 체코 전역을 집어삼키는 하이패스가 되었다. 체임벌린은 반공주의적 성향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소련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결국 스탈린이 서방 세력을 불신하게 만들어, 훗날 독소불가침조약이라는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체임벌린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리는 시간을 벌었으며, 만약 전쟁이 터지더라도 영국은 이제 도덕적인 우위에 서게 되었다"라고 변호했다. 실제로 뮌헨 협정 직후 영국의 재군비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며, 특히 공군력 강화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즉, 체임벌린의 '환호'는 한편으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쇼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준비를 위한 '위장된 평화'의 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체임벌린이 흔들었던 그 성명서는 현재도 남아 있으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히틀러가 서명한 문서 중 가장 가치 없는 종이"라고 불린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떠난 직후 측근들에게 "그 노인이 내 노획물을 가로챘다"며 짜증을 냈다고 전해진다. 히틀러에게 뮌헨 협정은 평화의 약속이 아니라, 단지 전쟁을 조금 미루는 귀찮은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극적인 환호의 순간은, 대영제국이 지탱해 온 19세기식 외교 질서가 종말을 고하는 장례식과도 같았다. 체임벌린은 평화를 들고 왔다고 믿었으나, 그가 들고 온 것은 사실 '전쟁의 초대장'을 잠시 담아둔 봉투였을 뿐이다.

오늘날 뮌헨 협정은 비겁한 양보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당시 체임벌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는 히틀러를 전적으로 신뢰해서가 아니라, 영국이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38년 당시 영국의 스핏파이어 전투기는 겨우 1개 대대만이 실전 배치된 상태였고, 레이더망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결국 이 '종이 한 장'으로 벌어들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국은 미친 듯이 전투기를 뽑아내고 방공망을 구축했다. 훗날 벌어질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의 승리는 사실상 이 굴욕적인 뮌헨 협정의 대가로 산 시간 덕분이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동맹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지로 몰아넣고 얻어낸 평화였다는 점은 체임벌린의 경력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가 되었다.

3.17.1. 협정 뒷이야기[편집]

뮌헨 협정이 체결되던 그 시각, 정작 영토를 떼어줘야 했던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회담장 안으로 발을 들이지도 못했다. 휘베르트 마사리크(Hubert Masaryk)를 비롯한 체코 대표단은 회담장 옆방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했으며, 자국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뒤에야 영국과 프랑스 측으로부터 "결정되었으니 서명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체코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기억 중 하나인 '뮌헨의 배신'으로 남게 된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강력한 국경 요새선과 현대화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독자적인 항전도 검토했으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발을 빼고 영국마저 독일의 손을 들어주자 절망에 빠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에게 뮌헨 협정은 단순한 영토 할양이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작은 민주 국가를 '인신공격적'으로 제물로 바친 사건이었다. 당시 체코 거리에는 "우리는 사자처럼 싸우려 했으나, 주인들이 우리를 개처럼 팔아넘겼다"는 울분 섞인 낙서가 가득했다.

영국과 함께 유화 정책의 한 축을 담당했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수상의 심정은 체임벌린과는 사뭇 달랐다. 체임벌린이 진심으로 '평화를 가져왔다'고 믿으며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자부심을 느꼈다면, 달라디에는 프랑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조차 "나는 비겁한 결정을 내렸다"며 괴로워했다. 실제로 파리 르 부르제 공항에 착륙했을 때,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를 보고 그는 비서에게 "저 바보들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자기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도 모른단 말인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달라디에는 체코와의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으나, 프랑스 내부의 극심한 분열과 제1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에 독자적인 전쟁을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프랑스 군부는 뮌헨 협정 이후 오히려 공포에 휩싸였다. 수데텐란트의 견고한 요새 지대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은 히틀러가 다음 타겟으로 프랑스를 노릴 것임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무력감은 단순히 외교적 실패를 넘어, 한때 유럽 최강을 자부하던 프랑스 육군이 독일의 팽창을 억제할 의지를 상실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꼴이 되었다.

이 사건의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 중 하나는 바로 소련(USSR)의 태도 변화였다. 스탈린은 서구 열강이 체코를 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독일의 칼끝을 동쪽(소련)으로 돌리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뮌헨 협정에 초대받지 못한 소련은 서방 국가들과의 집단 안보 체제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훗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독소불가침조약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체임벌린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기에 소련과의 연대를 고려하지 않았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양면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는 전략적 실책으로 이어졌다. "독재자를 달래면 멈출 것"이라는 체임벌린의 희망 회로와 달리, 히틀러는 이 협정을 통해 서방의 결속력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완벽하게 간파했다.

후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체임벌린의 '무력감' 뒤에 숨겨진 의도를 분석하기도 한다. 당시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은 독일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레이더망(Chain Home)은 겨우 구축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만약 1938년에 전쟁이 터졌다면, 영국 공군은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부터 런던을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3.18. 1939년 3월의 배신[편집]

1938년 9월, 뮌헨 협정을 마치고 런던 헤스턴 공항에 내린 네빌 체임벌린이 흔들었던 '종이 한 장'은 전 세계에 평화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환상은 채 6개월을 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먹어치운 것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뮌헨 협정은 히틀러에게 있어 '평화의 약속'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 없이 동유럽을 요리하기 위한 '시간 벌기용 기만책'에 불과했던 셈이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란트의 견고한 요새 지대를 상실하면서 국방력이 사실상 거세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이를 놓치지 않고 체코 내부의 민족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슬로바키아의 분리주의자들을 선동하여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나치식 '내부로부터의 붕괴' 전술이었다. 1939년 초부터 베를린의 선전 기구들은 "체코 정부가 독일계 소수 민족을 학대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이는 곧 무력 개입을 위한 명분 쌓기였다.

1939년 3월 14일 밤,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에밀 하하(Emil Hácha)[29]는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히틀러는 그를 새벽까지 대기시키며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뜨린 뒤, 괴링과 함께 "프라하를 폭격해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퍼부었다. 고령에 심장병까지 앓던 하하는 회담 도중 실신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보헤미아와 모라바의 운명을 총통의 손에 맡긴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만다.

이튿날인 3월 15일 새벽, 독일 국방군은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격했다. 총성 한 방 울리지 않은 점령이었다. 히틀러는 그날 저녁 프라하 성에 입성하여 "체코슬로바키아는 존재를 멈췄다"고 선언했다. 이는 뮌헨 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자, 독일계 거주 지역만을 합병하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행위였다. 이제 히틀러의 명분이었던 '민족 자결주의'는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그의 본질이 '유럽의 정복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프라하 점령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을 때, 체임벌린의 첫 반응은 의외로 신중했다. 그는 3월 15일 하원에서 "슬로바키아의 독립 선언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했으므로, 영국의 방위 보장 의무도 자동 소멸했다"는 다소 법률가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이는 비판자들에게 "또다시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거센 비난을 샀다. [30]

하지만 체임벌린 본인 내부에서도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라는 인물에게 완전히 기만당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3월 17일, 자신의 70세 생일을 앞두고 고향 버밍엄에서 행한 연설에서 체임벌린의 톤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것이 정말로 오래된 침략의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침략의 시작인가? 이것이 전 유럽을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시도의 단계인가?"

이 연설에서 그는 히틀러를 향한 배신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으며, 유화 정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시인했다. 평화를 향한 그의 진심 어린 노력이 독재자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프라하 점령은 영국 내의 모든 논쟁을 종결시켰다. "독일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주장하던 온건파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 전쟁이 터질 것인가'의 문제뿐이었다. 영국 신문들은 일제히 체임벌린의 실책을 비판하면서도, 이제는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사실상 이 시점을 계기로 영국의 국가는 '전시 체제'로의 전환을 가속화한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 이후 벌어두었던 시간을 이용해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 생산량을 극대화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레이더망(Chain Home)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화 정책의 상징인 그가, 영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재군비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된 것이다.

1939년 3월의 배신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국제 질서에서의 '신뢰'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체임벌린은 이제 히틀러와는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행정가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고독한 지도자로 변모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제 히틀러의 다음 타겟인 폴란드의 '단치히'로 향하게 된다.

독일의 프라하 점령은 체임벌린에게 '실패한 정치가'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동시에 영국 국민들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항전 의지를 일깨워준 불행한 각성제이기도 했다. 이제 유럽에 남은 것은 거대한 폭풍뿐이었다.

3.19. 폴란드 방위 보장[편집]

1939년 3월 15일, 나치 독일이 뮌헨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집어삼키자, 체임벌린의 외교 철학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히틀러도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인 정치인"이라고 믿었던 체임벌린의 신뢰는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영국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고, 의회에서는 "언제까지 저 미치광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종잇장이나 흔들 것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체임벌린은 그동안의 유화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극단적인 강경책으로 선회한다. 그것이 바로 1939년 3월 31일 발표된 '폴란드에 대한 일방적인 독립 보장'이었다. 이는 영국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영국과 지리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동유럽 국가의 안보를 위해 영국이 자동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정계 일각에서는 "우리가 폴란드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회의론이 있었으나,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팽창을 저지할 마지막 보루가 폴란드라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이 선언을 비웃었다. 그는 뮌헨에서의 체임벌린을 '우산이나 들고 다니는 유약한 노인네'로 저평가하고 있었으며, 영국이 실제로 폴란드를 위해 총을 들 배짱은 없다고 확신했다. 독일은 곧바로 '폴란드 회랑'과 '자유시 단치히'의 반환을 요구하며 폴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이러한 오판을 교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는 "이번에는 진심이다(This time, we mean it)"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냈으나, 역설적으로 그동안 쌓아온 유화주의자의 이미지가 발목을 잡았다. 히틀러는 "그들이 이번에도 짖기만 할 뿐 물지는 못할 것"이라며 폴란드 침공 계획인 '백색 상황(Fall Weiß)'의 작전 개시일에 서명했다.

사실 이 시기 체임벌린의 속내는 매우 복잡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건드리는 순간 대영제국의 모든 국력을 동원해 독일을 파멸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으며, 1937년부터 그가 꾸준히 밀어붙인 재군비 계획 덕분에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은 이미 독일을 추월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체임벌린의 전략에 가장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939년 8월 23일 발표된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었다. 체임벌린은 소련의 스탈린을 깊이 불신했고, 공산주의 세력과의 결탁을 꺼려왔다.[ 체임벌린은 일기에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도긴개긴(Six of one and half a dozen of the other)"이라며 양쪽 모두를 혐오하는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인해 히틀러는 배후(동부 전선)의 걱정 없이 폴란드를 칠 수 있게 되었고, 체임벌린이 구축하려던 '대독 포위망'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영국 내각은 패닉에 빠졌으나, 체임벌린은 오히려 침착했다. 그는 조약 체결 직후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러시아가 누구 편을 들든, 영국은 폴란드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최후통첩에 가까운 경고를 날렸다.

9월 1일 새벽,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자 체임벌린은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즉각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제2의 뮌헨을 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지만, 이는 프랑스와의 보조를 맞추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 때문이었다.

실제로 체임벌린은 9월 2일 밤, 천둥 번개가 치는 런던의 폭풍우 속에서 각료들을 소집해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히틀러가 폴란드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제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전쟁'이라는 수단 외에는 독일의 광기를 멈출 방법이 없음을 직시했다.

폴란드 방위 보장은 결과적으로 폴란드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실패로 기록된다. 영국은 폴란드에 실질적인 병력을 보낼 수 없었으며, 이는 후일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는 비아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볼 때, 이 챕터는 체임벌린이 '유화주의자'에서 '전쟁 지도자'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그는 폴란드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스스로 후퇴할 수 없는 배수진을 쳤고, 이는 훗날 윈스턴 처칠이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법적, 도덕적 명분을 제공했다.

만약 체임벌린이 여기서 폴란드를 외면했다면, 영국은 나치 독일의 부속 국가로 전락하거나 유럽 대륙 전체가 영원히 어둠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체임벌린은 비록 전쟁을 막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영국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치적 생명을 걸고 히틀러에게 최후의 '레드라인'을 그었던 것이다.

3.20. 히틀러에게 선전포고[편집]

1939년 9월 1일 새벽,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올랐을 때, 다우닝 가 10번지의 분위기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체임벌린은 마지막까지 히틀러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 믿었으나, 돌아온 것은 바르샤바에 떨어지는 폭탄 비명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원조 조약에 따라 즉각 개입해야 했지만, 내각 내부에서는 여전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외교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9월 2일 밤, 하원 의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의원들은 왜 즉각적인 선전포고가 이루어지지 않느냐며 체임벌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심지어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내일 아침까지 행동이 없다면 정부는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체임벌린은 결국 9월 3일 오전 9시를 기해 베를린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오전 11시까지 폴란드에서의 철군 약속이 없다면,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는 내용이었다.

11시 정각이 지났지만 베를린으로부터의 답변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히틀러가 답변을 거부했다.[31] 체임벌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우닝 가 10번지의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영국 전역으로 송출되는 BBC 라디오를 통해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오늘 아침 독일 정부에 9시까지 폴란드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으면 전쟁 상태가 될 것임을 통보했습니다. 지금 11시가 지났고, 아무런 답변도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들어갔음을 선포합니다."

이 연설은 체임벌린 개인에게도 비극이었다. 그는 평생을 평화주의자로 살았으며, 자신의 모든 정치적 자산을 전쟁을 막는 데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연설 도중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며, 이는 강인한 지도자의 포효라기보다는 자식이 사지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비탄에 가까웠다.

선전포고 직후 하원에 출석한 체임벌린은 역대 총리 중 가장 우울한 연설을 남겼다. 그는 "내가 일해 온 모든 것, 내가 희망해 온 모든 것, 그리고 성인 시절 내내 믿어왔던 모든 것이 폐허 속에 무너져 내렸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유화 정책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완전히 사망했음을 스스로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잘못 판단했음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총리로서 국가를 전시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 모순적인 책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9월 3일의 선전포고는 체임벌린 개인에게는 '정치적 자살'이었으나, 대영제국 입장에서는 '명분과 준비를 갖춘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다.

3.21. 가짜 전쟁[편집]

1939년 9월 3일, 영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올랐으나, 정작 전선에서는 기묘한 평화가 이어졌다.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전격전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동안, 서구 연합군인 영국과 프랑스는 국경 지대에서 수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영국에서는 '가짜 전쟁(Phoney War)', 독일에서는 '앉은뱅이 전쟁(Sitzkrieg)', 프랑스에서는 '이상한 전쟁(Drôle de guerre)'이라 부른다.

체임벌린 내각에게 이 시기는 유화 정책의 파탄을 수습하고, 그동안 부족했던 재군비를 서둘러 마쳐야 하는 '골든 타임'이자, 동시에 여론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에 방위 보장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폴란드를 돕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 행동은 거의 전무했다. 프랑스군이 사르 공세(Saar Offensive)를 통해 독일 국경을 잠시 넘기는 했으나, 이는 보여주기식 행보에 불과했다.

당시 연합군 수뇌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공격자가 압도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라 확신했다. 따라서 독일군이 먼저 마지노선을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전략을 채택했다.[32] 체임벌린은 폴란드의 함락을 지켜보며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그는 사석에서 "내가 평생을 바쳐 막으려 했던 재앙이 현실이 되었는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영국 공군(RAF)의 활동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에 가깝다. 폭탄 대신 독일 시민들의 반전 여론을 자극하기 위한 선전용 삐라(Leaflet)를 살포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독일 민중이 히틀러의 광기에서 깨어나 내부 폭동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나치당의 선전 선동 능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당시 영국 정부는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독일이 영국의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처칠이 해군 장관으로서 독일의 군수 공장을 폭격하자고 제안했을 때, 공군 장관 킹슬리 우드(Kingsley Wood)는 "그것은 사유 재산(공장)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독일을 자극할 뿐"이라며 반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체임벌린이 가짜 전쟁 기간 동안 가장 공을 들인 것은 해상 봉쇄를 통한 경제적 압박이었다. 그는 독일이 자원이 부족한 국가라는 점을 이용해,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독일 내부에서 경제적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 영국 해군을 동원해 북해대서양을 봉쇄하여 독일로 향하는 물자를 차단했다. 연합국인 프랑스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전쟁 물자를 공동 구매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1940년 초, 체임벌린은 하원 연설에서 "히틀러는 버스를 놓쳤다(Hitler has missed the bus)"는 유명한 망언(?)을 남긴다. 독일이 개전 초기 공격 기회를 놓쳤으므로 이제 연합군의 경제 봉쇄에 고사당할 일만 남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전선이 조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런던의 정치판은 폭풍전야였다. 해군 장관으로 복귀한 윈스턴 처칠은 독일에 대한 강력한 선제 공격을 주장하며 국민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체임벌린은 처칠을 통제하려 애썼으나, 전과(戰果)가 없는 상황에서 처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야당인 노동당은 체임벌린이 여전히 '위장된 유화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들은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막후 협상을 통해 비굴한 평화를 맺으려 한다고 공격했다.

가짜 전쟁은 1940년 4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과 5월 프랑스 전역의 시작으로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체임벌린에게 이 8개월은 재군비를 서두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연합군의 군사적 타성을 고착화시킨 독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영국은 레이더망(Chain Home)을 완성하고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의 생산량을 극대화했다. 이는 훗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반면 육군 전력의 현대화와 독일에 대한 선제 타격 기회를 상실한 점은 뼈아픈 실책으로 남았다.

3.22. 북유럽에서의 패배와 정치적 위기[편집]

1939년 9월 선전포고 이후, 서부 전선은 소강상태인 가짜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체임벌린 내각은 경제 봉쇄를 통해 독일의 자원줄을 말려 죽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전략의 핵심 고리 중 하나가 바로 스웨덴산 철광석이었다. 독일 전쟁 경제의 생명줄과도 같은 철광석은 겨울철 발트해가 얼어붙으면 노르웨이의 나르비크(Narvik) 항구를 통해 운송되었고, 이는 노르웨이의 영해인 '내항로'를 따라 독일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매설하여 이 통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체임벌린은 중립국인 노르웨이의 주권을 침해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했다.[33] 그러나 1940년 2월 발생한 '알트마르크호 사건'은 이러한 조심성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독일의 보급선 '알트마르크호'는 영국 상선에서 포로로 잡은 수백 명의 영국 선원들을 태우고 노르웨이 영해를 통해 귀환 중이었다. 처칠의 명령을 받은 영국 구축함 코사크호(HMS Cossack)는 노르웨이의 항의를 무시하고 노르웨이 영해 내의 요싱 피오르(Jøssingfjord)로 진입, 알트마르크호를 나포하고 포로들을 구출했다.

이 사건은 영국 대중에게는 "해군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나, 국제 정치적으로는 복잡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이 언제든 노르웨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먼저 점령하기 위한 '베저휘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수립을 가속화한다. 체임벌린은 여전히 신중했으나, 내각 내의 강경파와 여론의 압박에 밀려 결국 4월 초 노르웨이 연안 기뢰 매설(윌프레드 작전)을 승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독일보다 불과 하루 이틀 앞선,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체임벌린 정부는 즉각 해군과 육군 혼성 부대를 파견하여 대응했으나, 과정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해군성과 육군성, 그리고 현장 지휘관들 사이의 통신과 협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칠의 해군성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던 반면, 지상군은 장비 부족과 훈련 미달에 시달렸다. 노르웨이의 지형적 특성상 영국 공군(RAF)의 지원이 어려웠던 반면, 독일 루프트바페는 노르웨이 남부 비행장을 신속히 점령하여 영국 함대를 압박했다. 눈 덮인 노르웨이 산악 지대에 투입된 영국군에게 스키나 방한복조리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사실상 준비되지 않은 원정이었다.

영국군은 나르비크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독일의 압도적인 공군력과 전술 앞에 결국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체임벌린 내각에 결정타가 되었다. 대중은 "히틀러가 버스를 놓쳤다(Hitler has missed the bus)"라고 장담했던 체임벌린의 불과 며칠 전 발언을 조롱하며 그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에서의 참패는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임벌린이 강조해 온 '효율적인 행정'과 '신중한 전략'이 대규모 현대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의회 내에서는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반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레오 에머리(Leo Amery) 같은 중진 의원들이 체임벌린을 향해 크롬웰의 문구를 인용하며 "신의 이름으로 떠나시오!"라고 일갈한 사건은 체임벌린의 리더십이 완전히 파산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체임벌린은 끝까지 상황을 반전시키려 노력했으나, 이미 민심과 의회의 신뢰는 처칠 혹은 할리팩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유화 정책의 실패를 넘어 '전쟁 지도자'로서의 역량 부족이 증명된 지점이 바로 이 노르웨이 전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3.23. 노르웨이 토론[편집]

1940년 5월 7일부터 8일까지 이틀간 영국 하원에서 벌어진 이른바 '노르웨이 토론(Norway Debate)'은 영국 의회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겉으로는 북유럽 전역(노르웨이 캠페인)의 참담한 실패를 규탄하는 자리였으나, 실상은 네빌 체임벌린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치적 사형 집행'이나 다름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가짜 전쟁'의 정적을 깨고 터진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패배는, 그동안 유화 정책의 과오를 참고 지켜보던 의원들의 인내심을 폭발시켰다. 이 토론은 단순한 정책 비판을 넘어 "과연 이 인물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론에 종지부를 찍는 과정이었다.

독일군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전격 침공했을 때, 영국 해군은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육군 파병군은 보급과 전략의 부재로 인해 독일군에게 밀려 철수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해군장관으로서 이 작전을 주도했던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으나, 대중과 정치권의 화살은 작전의 실무자가 아닌 정권의 수장인 체임벌린에게 향했다.[34]

당시 체임벌린 내각은 선전포고 이후에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독일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린다"는 식의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야당인 노동당은 물론, 집권 여당인 보수당 내에서도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토론 첫날인 5월 7일, 체임벌린은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랐다. 그는 노르웨이에서의 철수가 전략적 판단이었음을 강변하며 의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정치 인생 최대의 실언을 하게 된다.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향해 "나는 아직 내 친구들(My friends)이 여기 있다고 믿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

이 발언은 즉각적인 역풍을 불러왔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국가적 단결이 아닌 '사적인 친분'과 '당파적 지지'에 호소하는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의석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고, 보수당 내 반대파(Anti-Chamberlainite)의 거두였던 레오 에이머리(Leo Amery)는 격분했다.

토론의 하이라이트는 보수당 중진 레오 에이머리의 연설이었다. 그는 체임벌린과 오랜 세월 함께 정치를 해온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설 마지막에 과거 올리버 크롬웰이 장기 의회를 해산하며 던졌던 서슬 퍼런 문구를 인용하며 체임벌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당신은 너무 오래 앉아 있었소. 당신이 한 일에 비하면 말이오. 이제 떠나시오. 내 말은, 신의 이름으로 떠나라는 것이오!(In the name of God, go!)"

이 문장이 하원에 울려 퍼지는 순간,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는 단순히 반대파의 공격이 아니라, 체임벌린 체제가 사실상 끝났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

둘째 날인 5월 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지팡이를 짚고 의회에 나타났다. 그는 체임벌린이 평소 "히틀러가 기회를 놓쳤다(Missed the bus)"고 호언장당했던 것을 조롱하며, "총리는 그가 준수했던 희생의 예시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즉, 직무를 내려놓는 희생 말이다"라고 몰아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그의 뒤를 잇게 되는 윈스턴 처칠은 끝까지 정부의 일원으로서 체임벌린을 방어했다는 것이다.[35] 처칠은 특유의 웅변으로 내각을 변호하려 애썼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였다. 오히려 처칠의 열정적인 방어는 의원들로 하여금 "저렇게 유능한 인물이 왜 무능한 총리 밑에서 방패막이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확신만 심어주었다.

결국 노동당의 요구로 내각 신임 투표가 진행되었다. 보수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점유하고 있었기에 산술적으로는 체임벌린의 승리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찬성(정부 지지)
281표
반대
200표

수치상으로는 81표 차이로 승리했으나, 평소 보수당의 압도적 과반수(약 200표 차이)를 생각하면 이는 사실상의 탄핵이었다. 보수당 의원 중 40여 명이 반대표를 던졌고, 60여 명은 기권했다. 자기 당 의원들조차 총리를 불신한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체임벌린은 투표 직후 하얗게 질린 얼굴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노르웨이 토론은 체임벌린이라는 정치인이 가진 '행정가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평소였다면 그는 유능한 예산 집행가이자 개혁가로 남았겠지만, 전시 지도자에게 필요한 '국민을 통합하는 카리스마'와 '과감한 결단력'에서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이 토론이 끝난 지 이틀 뒤인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며 대규모 서부 전선 공세를 시작했다. 국가 비상사태 속에서 노동당은 "체임벌린이 수장으로 있는 한 거국 내각(Coalition Government)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체임벌린은 사임을 결심하게 된다.

3.24. 총리 사임[편집]

1940년 5월 초, 영국 정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노르웨이 전역이 독일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그동안 유화 정책의 과오를 참고 견디던 의원들의 인내심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노르웨이 작전의 실질적인 설계자는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었으나, 정계의 화살은 조직의 수장인 체임벌린에게 집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칠은 자신의 실책으로 비춰질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체임벌린을 끝까지 변호하며 의리를 지켰다. 이는 훗날 체임벌린이 처칠을 후계자로 지지하는 정서적 배경이 된다.]

당시 하원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보수당 내의 반대파들뿐만 아니라 노동당과 자유당 등 야당 세력은 "더 이상 이 무능한 내각에 전쟁 수행을 맡길 수 없다"며 총사퇴를 압박했다. 특히 레오 에머리(Leo Amery) 의원이 크롬웰의 문구를 인용하며 던진 "그대들은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소. 이제 물러나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시오!"라는 일갈은 체임벌린의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선고와도 같았다.

1940년 5월 8일, 노르웨이 토론의 끝에서 진행된 신임 투표는 체임벌린에게 '승리했지만 패배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수치상으로는 281대 200으로 승리했으나, 평소 200석 이상의 압도적인 표차를 자랑하던 보수당 내각에서 40명 이상의 여당 의원이 반대표를 던지고 수십 명이 기권했다는 것은 사실상 내각의 장악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했다.

체임벌린은 투표 직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거국 내각(National Government)' 즉, 노동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비상 내각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5월 9일, 체임벌린은 노동당 지도부인 클레멘트 애틀리아서 그린우드를 초청해 거국 내각 참여를 타진했다. 하지만 노동당의 대답은 단호했다. "우리는 거국 내각에 참여할 용의가 있으나, 체임벌린 당신이 수장으로 있는 내각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사임이 불가피함을 깨닫고 후계자 구상에 들어간다. 당시 유력한 후보는 두 명이었다.
  • 에드워드 우드: 외무장관이자 보수당 주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인물. 체임벌린 본인이 가장 선호했던 '신사적인' 후계자였다.
  • 윈스턴 처칠: 야당과 대중의 지지는 높았으나, 보수당 내에서는 '변절자' 혹은 '무모한 전쟁광'이라는 불신이 강했던 인물.

당시 다우닝 가 10번지에서 열린 3자 회동(체임벌린, 핼리팩스, 처칠)은 영국 현대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순간이었다. 체임벌린은 핼리팩스가 총리직을 맡아주길 은근히 바랐으나, 핼리팩스 본인이 "귀족원 의원으로서 하원을 통제하며 전쟁을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스스로 고사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결국 체임벌린은 자신이 가장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투쟁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처칠을 국왕에게 추천하기로 결심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체임벌린이 사임 결단을 내린 5월 10일 새벽, 나치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를 향한 대규모 전격전을 개시했다. 국가 비상사태 속에서 체임벌린은 잠시 사임을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에 빠졌으나, 노동당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결국 그날 저녁, 체임벌린은 버킹엄 궁전을 방문해 조지 6세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전한 사임사에서 그는 비통하지만 초연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총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승리를 위해 제 모든 힘을 보탤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바친 정계의 최정상에서 내려오는 순간에도 자신이 만든 재군비 프로그램이 처칠의 손에서 꽃피우길 진심으로 바랐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체임벌린은 정계를 떠나지 않았다. 처칠은 체임벌린의 행정적 능력과 보수당 내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처칠은 그를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으로 임명하고 전시 내각의 핵심 멤버로 남겨두었다.

많은 이들이 처칠과 체임벌린이 사사건건 충돌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처칠은 수시로 체임벌린에게 조언을 구했고, 체임벌린은 처칠이 전쟁 지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후방의 복잡한 행정 업무와 당내 조율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당시 처칠은 사석에서 "네빌(체임벌린)만큼 충성스럽고 유능한 동료는 없다"며 극찬했을 정도였다.

1940년 5월 10일 노르웨이 전역의 실패와 노르웨이 토론으로 의회의 격렬한 지탄 끝에 네빌 체임벌린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 취임한 윈스턴 처칠은 세간의 예상과 달리 체임벌린을 내각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처칠은 누구보다 체임벌린의 행정적 유능함과 보수당 내의 막강한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총리 퇴임 직후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 겸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 잔류하게 된다.

사실 하야 직후 체임벌린은 정계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평화가 산산조각 났고, 국민적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가 느낀 무력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처칠은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이 거국 내각을 유지할 수 없다"며 간곡히 요청했고, 체임벌린은 이를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받아들였다.

그의 일기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총리직 사임 직후 그가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실망감을 넘어선 '국가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화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신이 재군비한 공군과 해군이 실제로 독일을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처칠의 불같은 성격을 다독이며 내각의 균형을 잡는 '정치적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하원 의원들은 여전히 처칠보다 체임벌린이 의회에 입장할 때 더 큰 박수를 보냈으나, 그는 결코 그 영향력을 이용해 처칠의 권위를 흔들지 않았다. 이는 대정치인 가문 출신으로서 그가 가진 마지막 품격이었다.

특히 1940년 5월 말, 프랑스가 항복 위기에 처하자 핼리팩스 등이 다시 한번 독일에 화평을 제안하자는 주장을 펼쳤을 때(1940년 영국 전시 내각 위기), 체임벌린은 처칠의 편에 서서 "히틀러와는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다"는 결사항전 의지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유화 정책의 상징이었던 그가 자신의 과거 실수를 완전히 인정하고 전쟁 수행의 화신으로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목에서 체임벌린의 지지가 없었다면 처칠은 보수당 내 주류 세력을 설득하지 못해 실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즉, 영국의 항전은 체임벌린의 '속죄'에 가까운 지지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던 셈이다.]

추밀원 의장으로서 전쟁 수행 지원에 매진하던 체임벌린에게 육체적 한계가 찾아온 것은 1940년 7월경이었다. 평소 위장 장애 정도로 생각했던 복부 통증이 심해졌고, 결국 정밀 검사 결과 장암(Bowel Cancer)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이미 암세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된 상태였다.

그는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으나, 주변에는 자신의 병명을 숨긴 채 업무에 복귀하려 애썼다. 런던 대공습(The Blitz)이 시작되어 폭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지팡이를 짚고 집무실에 나타나 처칠과 국방 계획을 논의했다. 처칠은 훗날 회고록에서 "체임벌린은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공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책임감을 보였다"며 경의를 표했을 정도였다.

1940년 9월, 더 이상 집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체임벌린은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다. 처칠은 그에게 가문의 영예를 기리는 작위(Knight of the Garter)를 수여하려 했으나, 체임벌린은 "나는 그냥 '네빌 체임벌린'으로 남고 싶다"며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36]

그는 햄프셔의 하이필드 파크(Highfield Park)로 거처를 옮겨 조용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은퇴 직후에도 그는 라디오를 통해 전황을 체크하고 처칠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등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는 자신이 유화 정책으로 벌어다 준 시간이 영국의 방공망을 구축하는 데 어떻게 쓰였는지를 확인하며, 자신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받고 싶어 했다.

3.25. 사망[편집]

처칠은 자신을 끝까지 밀어내려 했던 일부 의원들과 달리, 체임벌린의 행정적 능력과 보수당 내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핵심 고문으로 곁에 두었다. 하지만 총리 시절부터 누적된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는 이미 70세를 넘긴 그의 육체를 좀먹고 있었다.

사임 직후인 1940년 7월, 체임벌린은 심한 복통을 느껴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 공식 발표는 장 폐색에 의한 단순 수술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된 선암(Adenocarcinoma), 즉 대장암 말기 상태였다.[37] 수술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는 급격히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금욕적이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버텨온 그였지만, 암세포와 전쟁이라는 이중의 고통은 그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투병 중에도 체임벌린은 다우닝 가 10번지를 떠나 하이필드(Highfield)에 머물며 국무 서류를 검토했다. 처칠은 매일같이 그에게 전황 보고서를 보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네빌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묻곤 했다. 이는 단순히 전임자에 대한 예우를 넘어, 독일과의 전면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체임벌린이 가진 특유의 냉철한 분석력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9월, 런던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건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병마와 싸우던 그는 결국 9월 22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임서를 제출한다. 처칠은 그를 끝까지 붙잡고 싶어 했으나, "더 이상 국가에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체임벌린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은퇴 직후 그는 국왕 조지 6세로부터 가터 훈장과 백작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평범한 네빌 체임벌린으로 죽고 싶다"며 이마저도 정중히 거절했다.[38]

공직에서 물러난 체임벌린은 햄프셔의 하이크로프트(Highfield Park) 근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취미인 낚시와 조류 관찰을 하며 조용히 죽음을 준비했다. 비록 육체는 고통에 신음했으나, 정신만은 또렷하여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전황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 영국 공군이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자신이 총리 시절 비난을 감수하며 쏟아부었던 재군비 예산이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기에서 "내가 뮌헨에서 벌어온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쯤 런던은 나치 깃발 아래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고, '배신자', '겁쟁이'라는 낙인은 죽음을 앞둔 노정객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아내 앤(Anne)에게 "역사가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두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40년 11월 9일 오전, 네빌 체임벌린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1세.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시점은 영국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 하나였으며, 그가 그토록 막으려 했던 대전쟁은 이제 막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영국 사회에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2년 전, 뮌헨 협정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칠 때만 해도 전 국민적인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대전 발발 이후 그는 '히틀러에게 속은 무능한 노인'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정적이었던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은 그가 보여준 공복(公僕)으로서의 헌신과 품격을 기리며 진심 어린 애도를 표했다.

체임벌린의 장례식은 1940년 11월 14일, 런던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런던은 나치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대공습(The Blitz)이 연일 이어지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으나, 영국의 주요 정계 인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집결했다.

그의 운구에는 당시 전시 내각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를 필두로, 할리팩스 경, 에드워드 브릿지스, 그리고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등이 운구 위원을 맡았다. 이는 체임벌린이 비록 실각했으나, 보수당 내에서의 영향력과 정치적 무게감이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39]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남쪽 측랑에 안치되었다. 이는 영국 정치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그의 묘비 근처에는 그가 평소 존경했던 정치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장례식에서 윈스턴 처칠이 행한 추도사는 역사상 가장 품격 있는 정치적 헌사 중 하나로 꼽힌다. 평소 독설가로 유명했던 처칠이었으나, 이날만큼은 체임벌린의 진정성을 옹호하며 그를 향한 대중의 증오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역사의 심판은 세월이 흐른 뒤에 내려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완벽하지 못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체임벌린이 가졌던 '평화를 향한 갈망'만큼은 결코 정죄받을 수 없는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 윈스턴 처칠의 추도사 중 일부

처칠은 이 연설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상대하며 겪었을 고뇌를 '정직한 사람의 비극'으로 묘사했다. 이는 단순히 전임자에 대한 예우를 넘어, 전쟁 초기 패배의 책임을 체임벌린 한 명에게 몰아넣으려던 당시의 여론을 경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사이기도 했다.

체임벌린 사후,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주로 그의 가족과 일부 측근들에 의해 이어졌다. 특히 그의 부인인 앤 체임벌린은 남편이 남긴 일기와 서신을 정리하며 그가 단순한 유화주의자가 아니라, 영국의 재군비 시간을 벌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음을 입증하려 애썼다.

그가 정치적 기반을 닦았던 버밍엄에서는 여전히 '도시를 근대화한 행정가'로서 높게 평가받는다. 버밍엄 시청 근처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남아 있으며, 그가 설립에 기여한 시립 은행과 공공 주택 단지들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행정적 업적을 증명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전쟁 직후에는 마이클 풋 등이 저술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Guilty Men)》 등의 저서로 인해 '전쟁 범죄자'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으나, 1960년대 정부 기록물 공개 이후에는 "당시 영국의 국력으로는 전쟁이 불가능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대두되며 추모의 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고 난 뒤 영국은 더욱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이 벌어준 '시간'이 영국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죽음 직전까지 겪었던 고독한 투쟁이 없었다면 1940년의 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하곤 한다.[40]

4. 평가[편집]

체임벌린이 사망한 직후부터 약 20여 년간, 그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역사의 죄인' 수준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인들에게 체임벌린은 '전쟁을 막지도 못했으면서 적에게 굴복하여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비판의 포문을 연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후임자이자 동료였던 윈스턴 처칠이었다.

처칠은 자신의 방대한 회고록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뮌헨 협정을 가리켜 "불필요한 전쟁을 막으려다 더 끔찍한 전쟁을 초래한 완벽한 실패"로 규정했다. 승전국의 영웅인 처칠의 기록은 곧 정사가 되었고, 체임벌린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평화라는 환상에 매몰된 노정객'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갇히게 되었다.

1940년, '카토(Cato)'라는 필명으로 출간된 팜플렛 성격의 저서 《유죄인들(Guilty Men)》은 체임벌린에 대한 대중적 증오에 기름을 부었다. 이 책은 체임벌린을 포함한 유화주의자들이 독일의 재군비를 방관함으로써 영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주권 국가를 나치의 먹잇감으로 던져준 것은 대영제국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 행위라는 비판이다. 또한 1938년 당시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도박에 회의적이었고 독일의 전쟁 준비도 미비했으므로, 그때 전쟁을 시작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체임벌린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오히려 독일이 더 강해졌다는 논리다. 독재자의 호전성에 맞서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양보만 거듭하는 민주주의 리더십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로 꼽혔다.

전통적 학파들은 체임벌린이 뮌헨에서 가져온 서류 한 장(독일과의 불침략 선언서)을 흔들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친 장면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비판자들은 그가 히틀러의 본질, 즉 '대화가 불가능한 소시오패스적 정복자'라는 점을 완전히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난 후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기록한 일기는, 그가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는지(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 학계의 평가는 "악을 선의로 대하려 했던 어리석음이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당시 비판자들은 체임벌린 측의 "우리는 전쟁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는 변명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1938년의 독일군 전력보다 1939년의 독일군 전력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성장했음을 지적하며, 체임벌린이 벌어준 1년은 영국보다 독일에 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군과 체코군, 그리고 소련과의 연대를 통해 히틀러를 압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이 소련을 불신하여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비판도 거셌다.[41]

체임벌린의 리더십 스타일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내각의 장관들이나 외교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직접 외교'를 펼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외무장관 안소니 이든이 유화 정책에 반대하며 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자만심)에 빠져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통적 역사관에서 체임벌린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나쁜 시대에 너무나도 맞지 않았던 인물'로 결론지어진다. 그의 성실함과 평화에 대한 열망은 인정받았을지언정, 정치가로서 가장 중요한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결여되었다는 낙인은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4.1. 재평가[편집]

흔히 대중적인 역사 인식에서 1938년의 뮌헨 협정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비겁한 거래' 혹은 '독재자의 허풍에 속아 넘어간 노정객의 실책'으로 치부되곤 한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유명한 독설인 "당신은 전쟁과 치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치욕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신은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인식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공공기록물 보존 기한이 지나고 정부의 기밀 문서들이 해제되면서 역사학계에서는 이른바 '수정주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체임벌린이 손에 쥐고 있던 카드들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단순히 히틀러의 선의를 믿어서가 아니라, "지금 싸우면 무조건 진다"라는 군부의 절망적인 보고서가 그의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영국 군부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향후 10년간 큰 전쟁은 없다'는 이른바 10년 원칙(Ten Year Rule)에 따라 군비를 극도로 감축해온 상태였다.

1938년 당시 독일 루프트바페는 이미 스페인 내전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고, 최신형 전투기인 Bf 109를 실전 배치한 상태였다. 반면 영국 공군(RAF)의 주력은 여전히 구식 복엽기들이었으며, 전설적인 스핏파이어는 이제 막 양산 단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약 1938년에 전쟁이 터졌다면, 런던은 방공망도 없이 독일의 폭격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42]

영국 육군은 본토 방어군 수준에 불과했다. 프랑스 육군이 '유럽 최강'이라는 허명에 기대고 있었으나, 정작 영국이 대륙에 파견할 수 있는 원정군(BEF)의 규모는 고작 2개 사단 남짓이었다. 이는 수십 개 사단을 즉각 동원할 수 있었던 독일 국방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해군력은 여전히 세계 최강급이었으나, 대잠수함 전력과 대공 방어력이 취약했다. 무엇보다 지중해와 극동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유럽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기가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체임벌린이 뮌헨에서 벌어온 '1년의 시간' 동안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는 바로 전투기 사령부의 정비와 레이더망 구축이다.

1938년 9월 당시 영국의 레이더 기지는 단 몇 곳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39년 9월 전쟁이 실제로 터졌을 때는 영국의 동남부 해안을 따라 촘촘한 레이더 감시망인 '체인 홈(Chain Home)'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었다.

전투기 생산 가속화는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독일과의 수적 열세를 어느 정도 만회했다. 그리고 조종사 양성은 제국 훈련 계획을 통해 숙련된 조종사들을 확보할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방독면 배포, 대피소 구축 등 민간인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의 승리는 뮌헨 협정이 벌어준 '11개월의 유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현대 군사사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체임벌린이 전쟁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도덕적 명분'과 '동맹의 부재'였다.

당시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영연방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낯선 나라의 국경 분쟁 때문에 우리 청년들을 사지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1938년에 전쟁을 시작했다면 영국은 연방의 지원 없이 홀로 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39년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깨고 프라하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대화가 안 되는 광인"이라는 공감대가 연방 전체에 형성되었고, 이는 전쟁 발발 시 영연방이 일제히 영국 편에 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중립법에 묶여 유럽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명확했다. 체임벌린은 미국의 참전 없이는 독일을 이길 수 없음을 직시하고 있었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미국의 여론이 바뀌기를 기다려야 했다. 동맹국 프랑스는 내부 분열과 마지노선 뒤에 숨으려는 방어적 전략에 매몰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부는 영국에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물론 수정주의적 해석에 대한 재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른바 신수정주의(Post-Revisionism)적 시각이다.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고위 장성들은 히틀러가 뮌헨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경우 그를 체포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체임벌린이 협상을 통해 히틀러에게 승리를 안겨주자, 히틀러의 위망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고 쿠데타 모의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정예군과 견고한 요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세계적인 무기 공장인 '슈코다'를 가지고 있었다. 뮌헨 협정으로 이 자원들이 고스란히 독일의 손에 넘어간 것은 연합군 입장에서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사용한 전차 중 상당수가 체코제 38(t)였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결국 재평가의 핵심은 "체임벌린은 단순히 속은 것이 아니라, 영국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평화 구걸자'로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시간을 사는 도박을 한 셈이다.

그가 뮌헨에서 돌아와 비행기 트랩 위에서 흔들었던 그 종이 조각은 히틀러를 향한 믿음의 증표라기보다는, 아직 칼을 갈지 못한 기사가 방패를 들 시간을 벌기 위해 던진 기만책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대가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한 국가의 운명이었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영국이라는 국가의 총리"로서 그는 자국이 파멸하지 않을 최선의 타이밍을 골랐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4.2. 레이더와 스핏파이어 생산[편집]

보통 대중적인 역사 인식 속의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기만당해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종잇장이나 흔들던 유약한 노인네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실제 행정가로서의 체임벌린은 "전쟁은 피하되, 만약 터진다면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기 아래 영국의 방어력을 밑바닥부터 재설계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재무장관 시절부터 총리 재임기 초반까지 밀어붙인 공군력 강화 사업은 훗날 윈스턴 처칠이 거두게 되는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의 진정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영국의 국방 전략을 지배하던 문구는 스탠리 볼드윈이 남긴 "폭격기는 언제나 뚫고 들어온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였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고타 폭격기의 런던 공습을 경험한 영국인들에게 공포는 실존적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적 폭격기 대형을 미리 탐지하고 요격기가 제시간에 맞춰 이륙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단순히 "비행기를 많이 뽑자"는 식의 물량 공세가 아니라, 방어 체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것이 바로 당시에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 단계의 기술이었던 RDF(Radio Direction Finding), 즉 레이더(RADAR)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였다.

체임벌린 정부는 로버트 왓슨와트 경이 제안한 무선 탐지 기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영국 동부와 남부 해안을 따라 거대한 레이더 기지망인 '체인 홈'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장비 몇 대 설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탐지된 정보를 중앙 관제소로 모으고 이를 다시 각 비행단의 요격 관제소로 전달하는 전근대적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구축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역사학자들은 만약 체임벌린이 1938년 뮌헨 협정으로 1년의 시간을 벌지 못했다면, 이 레이더 망이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파상공세를 맞이했을 것이라 지적한다.[43] 체임벌린은 외교적으로는 유화를 말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독일의 창을 막아낼 방패를 벼리고 있었던 셈이다.

체임벌린은 정치인이었지만 과학자와 기술 관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행정가였다. 그는 헨리 티저드 경을 중심으로 한 '방공 과학 연구 위원회'를 적극 지원했다. 이 위원회는 레이더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무장 체계, 고옥탄가 연료의 도입 등을 주도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체임벌린이 공군의 우선순위를 '폭격'에서 '방어(요격)'로 과감히 전환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군 장성들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며 폭격기 생산을 주장했지만, 재무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체임벌린은 한정된 예산으로 본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성비가 높은 단발 엔진 요격기(전투기)가 핵심이라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호커 허리케인이 영국의 하늘을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은 체임벌린 정부의 '섀도 팩토리(Shadow Factory)' 정책 덕분이었다. 체임벌린은 전시 전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민간 자동차 공장(대표적으로 허버트 오스틴의 공장들)이 유사시에 즉각 비행기와 엔진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정부 자금을 투입해 설비를 미리 갖추게 했다.

이 정책은 당시 야당과 일부 언론으로부터 "세금을 낭비한다"거나 "전쟁 위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1940년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에 비해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보급 역량에서 앞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뮌헨 협정 직후 체임벌린은 "이제 우리는 재군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공군 예산을 이전보다 2배 이상 증액시키는 결단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처칠이 1940년의 영웅이라면, 체임벌린은 그 영웅이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준비해 준 병참장교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구축한 방공 시스템과 전투기 생산 라인이 없었다면, 처칠의 화려한 수사(Rhetoric)도 종잇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물론 육군 전력 강화에 소홀했다는 비판[44]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으나, 섬나라인 영국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할 때 '공군력 우선 집중'이라는 그의 선택은 전략적으로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결국 1940년 여름,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사투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기술적, 제도적 근간은 '유화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네빌 체임벌린의 손끝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5. 처칠과의 관계[편집]

처칠과 체임벌린은 당대 보수당을 지탱하던 두 기둥이었으나, 그 결은 완전히 달랐다. 체임벌린이 치밀한 계산과 행정적 효율성, 그리고 절제를 중시하는 '버밍엄의 신사'였다면, 처칠은 화려한 수사학, 저돌적인 추진력, 그리고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모험주의를 즐기는 '정치적 야생마'였다.

두 사람의 악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처칠의 변덕스러운 예산 운용에 대해 보건부 장관이었던 체임벌린은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으며, 사적인 편지에서 처칠을 가리켜 "판단력이 부족하고 자기 과시가 심한 인물"이라며 혹평하기도 했다. 처칠 역시 체임벌린의 꼼꼼함을 '소심함'으로 치부하며 그를 낮게 평가했다. 이들의 관계는 1930년대, 히틀러의 부상과 재군비 문제를 두고 처칠이 체임벌린 정부의 유화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처칠은 의회에서 체임벌린을 향해 "당신은 전쟁과 굴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굴욕을 선택했다. 이제 당신은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적인 독설을 남겼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체임벌린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처칠을 내각의 핵심 요직인 제1차 해군장관(First Lord of the Admiralty)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는 정적을 포용하여 거국적인 일치단결을 보여주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인 동시에, 처칠의 에너지가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체임벌린의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한 결과였다.

놀랍게도 처칠은 내각에 합류한 이후 체임벌린에게 대단히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처칠은 회의에서 체임벌린의 권위를 존중했으며, 밖에서는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으로부터 총리를 방어해 주었다. 체임벌린 또한 처칠의 넘치는 아이디어(물론 그 중 상당수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지만)를 경청하며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매일 정기적인 오찬을 함께하며 전쟁 상황을 공유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 년간 쌓였던 오해와 앙금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노르웨이 전역의 실패로 체임벌린의 입지가 좁아지고 '노르웨이 토론'이 벌어졌을 때, 처칠은 해군장관으로서 작전 실패의 책임을 통감하며 오히려 체임벌린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하지만 민심과 의회는 이미 체임벌린을 떠나 있었고, 결국 사임이 불가피해졌다.

이때 체임벌린은 후계자로 외무장관 핼리팩스 경을 선호했으나, 핼리팩스가 스스로 고사하자 주저 없이 처칠을 추천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체임벌린은 처칠 내각의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으로 남아 국정에 참여했다. 처칠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체임벌린은 사임한 뒤에도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동료 중 하나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체임벌린의 행정적 노하우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체임벌린이 암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거의 모든 중대 사안을 그와 상의했다.

1940년 여름, 체임벌린의 병세가 깊어지자 처칠은 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체임벌린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처칠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그가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11월, 체임벌린이 세상을 떠나자 처칠은 의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연설을 남겼다. 이 연설은 정적에 대한 단순한 예우를 넘어, 한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동료에 대한 처칠의 진심 어린 존경이었다. 처칠은 훗날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체임벌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성실함과 애국심만큼은 결코 폄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현대 정치에서도 '건전한 라이벌 관계'의 표본으로 자주 인용된다. 정책적으로는 극렬하게 대립했으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협력할 줄 아는 영국 의회 정치의 성숙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흔히 대중 매체에서는 처칠과 체임벌린을 불침번과 겁쟁이, 혹은 빛과 그림자 같은 대립 관계로 묘사하곤 하지만, 실상의 내각 운영 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처칠이 전쟁 수행의 거시적 전략과 대국민 연설, 군사적 영감을 주는 '리더'였다면, 체임벌린은 내각의 복잡한 행정 절차를 조율하고 보수당 의원들의 이탈을 막는 '조직 관리자'였다.

특히 1940년 5월 말, 프랑스 함락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전시 내각 회의(War Cabinet Crisis)에서 체임벌린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핼리팩스 경은 이탈리아를 중재자로 내세워 독일과 평화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처칠을 거세게 압박했다. 이때 체임벌린은 초기에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처칠의 '결사항전' 의지에 힘을 실어주며 핼리팩스의 제안을 무산시키는 데 일조했다.[45]

체임벌린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처칠은 바쁜 와중에도 그를 직접 방문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예우를 다했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정계의 라이벌이었지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국난 앞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동료가 되었다.

체임벌린은 임종 직전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을 남겼다.
"나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그 노력이 영국의 도덕적 명분과 전쟁 준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해 주었음을 믿는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훗날 처칠이 의회에서 행한 체임벌린 추도사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처칠은 그를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위대한 영국인"으로 치켜세우며, 그에 대한 세간의 가혹한 비난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6. 대중 매체에서[편집]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90년대까지 대중 매체에서 체임벌린은 주로 '악당에게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노인' 혹은 '처칠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묘사되었다. 전쟁의 참상이 너무나 컸기에, 그 원인을 제공한(것처럼 보이는) 유화 정책의 수장 체임벌린은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영화나 드라마에서 체임벌린은 대개 검은 우산을 들고 구부정한 자세로 등장하며, 히틀러의 고함 소리에 당황하거나 처칠의 일갈에 할 말을 잃는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특히 1980년대까지의 다큐멘터리나 전쟁 영화들(예: 《지상 최대의 작전》 등)에서 그는 직접적인 캐릭터보다는 '실패한 과거'를 상징하는 흑백 푸티지 속의 인물로 박제되곤 했다.

2000년대 이후, 역사학계의 수정주의적 평가가 대중 매체에도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묘사는 급격히 입체적으로 변했다. 단순히 무능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으로선 최선의 선택을 하려 했던 비극적 인물"로서의 면모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윈스턴 처칠의 뒤에서, 로널드 픽업이 연기한 네빌 체임벌린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로 그려진다. 암 투병 중인 노령의 몸으로 끝까지 자신의 신념(유화책)을 지키려 하면서도, 결국 처칠의 손을 들어주며 국운을 맡기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 그는 처칠의 단순한 적대자가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애국'을 고민했던 원로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2021)은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로, 대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체임벌린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 작품은 아예 체임벌린을 주인공 급으로 격상시켜, 뮌헨 협정이 사실은 영국이 재군비를 위해 벌인 필사적인 '시간 벌기'였다는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 속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사악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전쟁의 참화에서 단 1년이라도 더 늦게 밀어넣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기꺼이 시궁창에 던지는 고결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검은 우산은 대중 매체에서 유화 정책의 강력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전후 정치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우산은 '비겁한 타협'이나 '무능함'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현대 영미권의 정치 평론에서도 외교적 양보를 지나치게 하는 정치인을 비판할 때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체임벌린이 대중 문화에 남긴 가장 강력하고도 뼈아픈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IV(Hearts of Iron IV)에서는 영국 플레이어가 초반에 마주해야 할 '족쇄'이자 '기틀'로 등장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체임벌린을 일찍 실각시키고 처칠을 등용할 수도 있지만, 체임벌린의 내치 보너스를 활용해 재군비를 충실히 닦아놓는 전략적 선택도 가능하다.

만약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혹은 히틀러가 약속을 지켰다면? 등의 시나리오를 다루는 대체 역사 소설에서 그는 종종 '평화를 지켜낸 영웅' 혹은 '영국을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이라는 극단적인 두 얼굴로 묘사된다.

7. 여담[편집]

  • 의회 토론 중 상대방의 주장에 논리적 허점이 보이면 가차 없이 비웃는 습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료 의원들로부터 "지적으로 오만하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으나, 본인은 "무식한 소리를 듣고 있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다"며 응수했다고 한다.
  • 그는 보건부 장관 시절에도 매일 아침 버밍엄의 고향 집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지역구 민원을 챙겼다. 중앙 정계의 거물이 되어서도 자신의 뿌리가 '행정 도시 버밍엄'에 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언론은 그를 "독수리의 눈을 가진 회계사"라고 묘사하곤 했다. 날카로운 안목과 철저한 계산 능력을 동시에 비꼬는 별명이었지만, 체임벌린 본인은 오히려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후문이 있다.
  • 총리 취임 당시 그는 이미 낚시조류 관찰이라는 소박한 취미를 가진 노신사로 유명했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늘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고, 오타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는 꼼꼼함으로 비서들을 긴장시켰다.
  • 당시 영국 언론은 그를 '가장 믿음직한 선장'으로 묘사했다. 대공황의 파도를 넘게 해준 재무장관 시절의 신뢰가 총리 취임 초기까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3월 9일 선전포고 방송 직후, 런던에는 첫 공습 경보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방공호로 대피했으나, 알고 보니 이는 아군기를 오인한 오보였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해프닝이었던 셈.
  • 체임벌린은 연설 직후 처칠을 내각에 불러들여 해군장관(First Lord of the Admiralty) 자리를 맡겼다. 훗날 처칠이 "네빌은 나를 매우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고 회상했을 만큼, 그는 사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거국적인 결속을 꾀했다.
  • 당시 라디오를 듣던 영국인들은 체임벌린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는 훗날 윈스턴 처칠의 사자후 같은 연설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체임벌린이 '전쟁 지도자'로서 대중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심리적 기점이 되기도 했다.
  • 그의 장례식 당일에도 독일의 공습 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폭격이 발생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하늘이 그가 사랑했던 평화로운 마지막을 허락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체임벌린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뮌헨에서 가져온 그 '종이 한 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임종 직전 "내가 한 일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46]
  • 처칠은 평소 체임벌린의 '우유 마시는 습관'을 지루해했지만, 전쟁 중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하는 시간만큼은 매우 아꼈다고 한다.
  • 체임벌린은 처칠의 수사학적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때로는 "윈스턴은 자신의 문장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한다"며 걱정 섞인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 처칠은 체임벌린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국정 업무로 인해 직접 참여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1] 실제 네빌의 사적인 편지들을 보면 대단히 서정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했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유독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의 정서적 고립과 관련이 깊다.[2] 총리 재임 시절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런던 스턴 파크에서 새를 관찰하거나 낚시를 즐겼는데, 이는 럭비 스쿨 시절부터 이어진 취미였다.[3] 현재의 버밍엄 대학교의 전신이다.[4] 19세기 말 기준 5만 파운드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 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5] 당시 영국 지자체 중 이 정도로 체계적인 도시 계획 가이드라인을 가진 곳은 버밍엄이 유일했다.[6] 훗날 체임벌린은 일기에서 로이드 조지를 '도저히 함께 일할 수 없는 부도덕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7] 로이드 조지는 훗날 회고록에서 체임벌린을 가리켜 "그는 핀헤드(Pinhead, 멍청이)였다. 현미경으로 세상을 보느라 지평선을 보지 못했다"라고 가차 없이 깠다. 물론 체임벌린도 지지 않고 로이드 조지를 "정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라며 맞받아쳤다.[8] 흥미로운 점은, 이 시절 체임벌린을 몰아세웠던 로이드 조지 본인도 훗날 히틀러를 만나고 와서 "그는 독일의 조지 워싱턴"이라며 찬양하는 대형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유화 정책의 원조는 사실 로이드 조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9] 당장 그의 이복 형인 오스틴 체임벌린만 해도 29세에 의원이 되었고, 평생의 라이벌이자 동료가 될 윈스턴 처칠은 26세에 등원했다.[10] 당시 영국 보건부는 단순한 의료 업무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주택, 연금 등 내치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모두 관장하는 거대 부처였다.[11] 훗날 뮌헨 협정에서도 그는 히틀러의 광기 어린 연설보다는 자신이 직접 읽고 서명한 '문서'의 힘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게 된다.[12] 실제로 NHS의 탄생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의 이 개혁이 없었다면 1940년대의 급진적인 의료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13] 체임벌린은 이 법안을 통과시킨 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생애 가장 큰 일을 해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14] 당시 야당의 거물이었던 로이드 조지조차도 이 법안의 방대함과 치밀함에 경악하며 "체임벌린은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것 같다"고 촌평을 남겼다.[15] 이 과정에서 자유무역을 신봉하던 자유당 계열 각료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내각을 떠나는 정치적 풍파가 일기도 했으나, 체임벌린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이를 정면 돌파했다.[16] 실제로 체임벌린은 재무장관 시절 "공군력 증강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국가 재정을 파탄 낼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경제 우선주의'가 결과적으로 안보의 구멍을 만든 셈이다.[17] 볼드윈은 의회에서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체임벌린은 모든 부처의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오타까지 잡아내는 완벽주의자였다.[18] 특히 외무장관이었던 앤서니 이든과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체임벌린은 외무부의 정석적인 채널보다 자신의 개인 비서인 호러스 윌슨(Horace Wilson)을 통한 비공식 외교를 선호했다.[19] 스탠리 볼드윈 전 총리가 남긴 이 유명한 말은 런던이 단 몇 시간 만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확산시켰다.[20] 심지어 체임벌린은 자신의 여동생들을 통해 이탈리아 외교관들과 사적인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중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는 외무장관인 이든에게는 엄청난 굴욕이었다.[21] 당시 육군(BEF)의 현대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영국이 다시는 1차 대전 같은 참혹한 참호전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22] 후임 총리인 윈스턴 처칠이 이 레이더망 덕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체임벌린은 처칠에게 가장 강력한 방패를 넘겨준 셈이다.[23] 실제로 당시 영국의 지상군은 본토 방어조차 급급한 수준이었고, 프랑스 역시 정국 혼란으로 인해 독자적인 행동을 꺼리고 있었다.[24] 이는 훗날 그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발언 중 하나이지만, 당시 1차 대전의 트라우마가 생생했던 영국 대중의 정서를 정확히 관통하는 말이기도 했다.[25] 사실 체임벌린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의 중산층 대다수는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에 체임벌린의 행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처칠 같은 강경론자들은 의회에서 '미친놈' 취급을 받던 시기였다.[26] 이것이 히틀러 특유의 심리전이었다. 상대에게 파멸적인 조건을 제시한 뒤, 아주 사소한 양보를 해줌으로써 상대가 '협상의 성과'를 얻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수법이다.[27] 심지어 소련 역시 동유럽의 이해관계자였음에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는 훗날 스탈린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불신하고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선회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28] 1878년 베를린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체임벌린이 평소 디즈레일리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29] 베네시의 망명 이후 취임한 노령의 법학자 출신 대통령으로, 나치에 협력했다는 비판과 국가를 보존하려 했다는 동정론이 공존한다.[30] 윈스턴 처칠과 안소니 이든 등은 이 연설을 듣고 격분하여 체임벌린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다.[31] 당시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영국 대사를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통보를 받은 히틀러는 옆에 있던 리벤트로프를 매섭게 노려보며 "이제 어쩔 셈인가?(Was nun?)"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32] 이 판단은 훗날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는데, 당시 독일 서부 국경의 방어선인 지크프리트 선은 사실상 껍데기뿐이었기 때문이다.[33] 체임벌린은 도덕적 명분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중립국들을 추축국 편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를 하고 있었다.[34] 사실 작전 실패의 책임만 따지자면 처칠이 더 컸으나, 당시 의원들은 체임벌린의 '태도'와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다.[35] 처칠은 의리상, 그리고 자신도 노르웨이 작전의 책임이 있었기에 체임벌린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36] 그는 평생 동안 세습 작위나 훈장에 연연하지 않는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을 유지했다.[37] 당시 의료진은 체임벌린 본인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숨겼으나, 본인은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38] 그의 아버지 조셉 체임벌린 역시 평생 평민 정치가로 남기를 원했기에, 이는 가문의 전통을 지키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39] 실제로 처칠은 체임벌린이 살아있는 동안 그의 지지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극진히 예우했으며, 체임벌린 또한 사심 없이 처칠을 보좌하며 국론 분열을 막았다.[40] 실제로 1940년 5월 위기 당시 체임벌린이 끝까지 처칠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영국 내각은 할리팩스 경을 필두로 하는 강화파에 의해 조기에 항복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41] 실제로 체임벌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에 소련과의 동맹 체결을 주저했으며, 이는 훗날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42] 실제로 당시 영국 참모본부는 전쟁 발발 시 첫 주에만 런던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43] 실제로 1938년 당시 영국의 레이더 망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으며, 관제 요원들의 숙련도 또한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44] 이 때문에 프랑스 침공 당시 영국 원정군(BEF)은 장비 부족으로 고생하다가 덩케르크에서 몸만 빠져나오는 수모를 겪는다.[45] 만약 이때 보수당 당수 격이었던 체임벌린이 핼리팩스의 손을 들어줬다면 처칠 내각은 출범 한 달 만에 붕괴했을 가능성이 높다.[46] 물론 현대에 와서 히틀러의 야욕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주관적인 의도만큼은 진실했다는 것이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