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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국호: '동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편집]
지금도 서구권서는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보다는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표현이 해당 국가가 존속하던 당대에 사용된 적은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100년 이상 지난 155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역사집'이라는 저서를 편찬하면서 만들어낸 용어로, 동로마가 존속하던 당시에는 동로마인들 스스로는 물론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다투던 신성 로마 제국 측도 사용한 적 없는 신조어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100년 이상 지난 155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 역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역사집'이라는 저서를 편찬하면서 만들어낸 용어로, 동로마가 존속하던 당시에는 동로마인들 스스로는 물론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다투던 신성 로마 제국 측도 사용한 적 없는 신조어였다.
3.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이어진 연속성의 요소[편집]
4. 당대인들의 시각[편집]
4.1. 동로마인들의 인식[편집]
4.1.1. 동로마인들의 로마시에 대한 인식[편집]
4.2. 외국인들의 시각[편집]
4.2.1. 서방 기독교 세계의 시각[편집]
800년 카롤루스의 대관식 이전까지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데는 큰 이견이 없었다.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동로마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를 믿으며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았고 이는 해당 국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에서 동로마가 로마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것은 800년 카롤루스의 서방 황제 대관식이었는데, 그 대관식 역시 갑자기 서로마 황제위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게 아니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킨 이리니가 남성만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을 깨고 여제로 즉위한 상황을 황제위가 비어있는 공위 상태로 간주하고 벌인 일이었다.
물론 이리니가 폐위되고 동로마에서 남성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롤루스가 황제위를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동로마를 완전히 무시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니키포로스의 후계자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의 평화 조약에서 본인의 '황제' 지위는 인정받되 '로마 황제'는 동로마 황제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타협을 맺었다.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동로마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를 믿으며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도,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았고 이는 해당 국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에서 동로마가 로마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것은 800년 카롤루스의 서방 황제 대관식이었는데, 그 대관식 역시 갑자기 서로마 황제위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게 아니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킨 이리니가 남성만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을 깨고 여제로 즉위한 상황을 황제위가 비어있는 공위 상태로 간주하고 벌인 일이었다.
물론 이리니가 폐위되고 동로마에서 남성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롤루스가 황제위를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동로마를 완전히 무시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니키포로스의 후계자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의 평화 조약에서 본인의 '황제' 지위는 인정받되 '로마 황제'는 동로마 황제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타협을 맺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