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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키프로스
1. 개요2. 고대3. 중세
3.1. 동로마이슬람 제국의 지배3.2.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3.3. 3차 십자군3.4. 키프로스 왕국
4. 근세
4.1. 베네치아령 키프로스4.2. 오스만령 키프로스
5. 근현대
5.1. 영국령 사이프러스(영국령 키프로스)5.2. 키프로스 공화국의 독립5.3. 키프로스 전쟁5.4. 분단시대

1. 개요[편집]

키프로스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고대[편집]

상고시대 키프로스에는 계통 불명의 고대 키프로스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거주했으며, 이후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로 대체되었다.

키프로스는 기원전 4세기 이후 헬레니즘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 공화국의 키프로스 속주가 되었고, 이는 로마 제국 치하에서도 지속되었다.

3. 중세[편집]

3.1. 동로마이슬람 제국의 지배[편집]

중세 초기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키프로스는 7세기 이후 동로마와 이슬람 제국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두 제국은 8세기에 평화 협정을 맺어 섬을 분할했다가, 10세기 이후 중흥을 맞이한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 전체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3.2.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편집]

동로마의 중흥이 끝나고 다시 쇠락의 조짐이 보이던 콤니노스 왕조 말기, 방계 황족 출신의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가 키프로스에서 로마 황제를 참칭하고 자립했다.

이사키오스는 중앙정계에서 콤니노스 왕조가 앙겔로스 왕조로 교체된 이후에도 키프로스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운명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진짜 황제가 되든, 중앙정부에서 보낸 진압군에게 짓밟히든 둘 중 하나만이 기다리고 있는 듯 했으나 3차 십자군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그와 키프로스 섬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3.3. 3차 십자군[편집]

3차 십자군에 참여한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중간 보급을 위해 키프로스에 머물렀는데, 황제놀이에 심취한(...)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는 리처드를 환영하는 듯 하다가 돌변하여 그의 군대를 공격했고, 이를 리처드는 가뿐하게 격파하며 키프로스 섬 전체를 장악했다.

리처드는 어디까지나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얼떨결에 키프로스를 손에 넣었기에 장기간 지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예루살렘 일대에서 활동하던 성전 기사단에 짬처리기증했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은 정교회 신자가 다수인 키프로스에 가톨릭을 강요하다가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바람에 장기 통치에 실패했고, 결국 다시 리처드에게 섬을 반납하고 말았다.

3.4. 키프로스 왕국[편집]

성전 기사단에게 섬을 반납받은 리처드 1세는 여전히 키프로스를 영구히 지배할 생각이 없었기에 예루살렘 국왕이었다가 축출당한 기 드 뤼지냥에게 2차 짬처리선물하여 키프로스는 뤼지냥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기 드 뤼지냥의 동생 애므리 드 뤼지냥의 치세에 키프로스는 왕국으로 승격되어 키프로스 왕국이 성립되었는데, 키프로스 왕국은 성전 기사단과 달리 300여년간 소수의 가톨릭 신자가 다수의 정교회 신자들을 지배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4. 근세[편집]

4.1. 베네치아령 키프로스[편집]

15세기에 들어 키프로스 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당하고 내정간섭에 시달렸는데, 키프로스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카테리나 코르네르는 베네치아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베네치아에 합병되는 것을 승인하고 말았다.

이후 키프로스는 200여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베네치아의 불침항모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4.2. 오스만령 키프로스[편집]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키프로스는 16세기 셀림 2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제도를 통해 키프로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이고 섬에 잔류한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으나, 이슬람을 믿는 튀르크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훗날 그리스계와 튀르크계 간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

5. 근현대[편집]

5.1. 영국령 사이프러스(영국령 키프로스)[편집]

1878년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의 베를린 회의를 중재한 대가로 영국키프로스를 조차했는데,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 영토를 임대받는 형식이었으나 실질적 영유권은 영국이 행사했고, 1차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영국을 비롯한 협상국에 패한 이후에는 명목상으로도 완전히 영국령이 되었다.

그러나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과 튀르크계 주민들은 각각 키프로스가 그리스, 튀르키예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국에 저항했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세계 각지에서 탈식민화가 본격화되자 더욱 거세졌다.

5.2. 키프로스 공화국의 독립[편집]

1960년 영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그리스, 튀르키예, 그리고 키프로스 섬의 그리스계 및 튀르크계 대표들과 협상하여 키프로스를 그리스와 튀르키예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국으로 만들고, 영국군 기지가 있는 아크로티리 데켈리아는 계속 영국령으로 남겨둔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키프로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에는 각각 그리스계 인사[1]와 튀르크계 인사가 선출되고, 의회 의석 역시 두 민족이 나눠가지면서 권력 배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계와 키프로스계 둘 중 어느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그리스와 튀르키예 둘 중 한쪽으로의 귀속을 원하는 양측 민족주의자들의 소요가 잊을만하면 터져나왔다.

5.3. 키프로스 전쟁[편집]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의 배후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리스계 온건파였던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을 축출하자, 튀르키예군과 친튀르키예 민병대가 그리스군과 키프로스 정부군을 물리치고 키프로스 북부를 점령했다.

결국 그리스와 키프로스 양측의 군부 정권은 패전 책임론에 시달리다 붕괴하여,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문민내각이 들어서고, 키프로스에선 마카리오스 3세가 대통령직에 복귀했는데, 이들은 키프로스의 분단을 막기 위해 튀르키예와 협상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5.4. 분단시대[편집]

5.4.1. 키프로스 공화국(남키프로스)[편집]

마카리오스 3세는 분단 이후에도 3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다 사망했고, 이후 키프로스 공화국의 정계는 중도우파 성향의 민주집회당과, 공산주의 성향의 노동인민진보당, 그리고 중도 성향의 민주당의 3당 체제가 고착화되어 이들 정당이 여러번 정권을 주고받았다.

분단 이후의 역대 키프로스 공화국 정부들도 몇 차례에 걸쳐 북키프로스와 통일 협상을 진행했으나, 아직까지 유의미한 성과는 없이 분단이 고착화된 채 유지되고 있다.

5.4.2. 북키프로스[편집]

튀르키예의 점령하에서 북키프로스는 키프로스 공화국(남키프로스)에 연방제 통일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더이상의 통일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을 수립했다.
[1] 키프로스 교회 대주교 마카리오스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