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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메네이에서 넘어옴
알리 하메네이
Ali Khamenei
파일:khamenei.jpg
본명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
Sayyid Ali Hosseini Khamenei
출생
이란 제국 호라산주 마슈하드
(現 이란 호라산에라자비주 마슈하드)
사망
재임 기간
라흐바르
1989년 6월 4일 ~ 2026년 2월 28일 (37년)
대통령
1981년 10월 13일 ~ 1989년 8월 16일
최종 당적
1. 개요2. 가계3. 생애
3.1. 초기3.2. 마슈하드 신학교 시절3.3. 쿰에서의 운명적 만남3.4.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벨라야테 파키)의 맹아3.5. 15 코르다드 운동(15 Khordad)3.6. 지하 포교 활동3.7. 사바크와의 사투3.8. 1979년 이슬람 혁명3.9. 테헤란 금요 예배 법주3.10. 암살 미수와 신체적 장애3.11. 미르 호세인 무사비와의 갈등3.12. 외교적 고립 탈피3.13. 호메이니의 서거와 2대 라흐바르3.14. 최고지도자 권한 강화와 절대 권력의 제도화3.15. 연쇄 살인 사건과 언론 탄압3.16. 서구 문화에 대한 '소프트 워(Soft War)' 선포3.17. 9.11 테러와 악의 축3.18. 포퓰리즘 보수의 등장과 하메네이의 전략적 지지3.19. 2009년 이란 녹색 운동3.20. 역외 영향력의 확대와 비대칭 전략3.21.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3.22. 이란 핵 합의3.23. 트럼프의 탈퇴와 '최대 압박'3.24. 가셈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과 대미 복수의 서막3.25. 에브라힘 라이시 정부와 보수 일색화3.26. 마흐사 아미니 사망 사건과 '여성, 생명, 자유'와 체제의 실존적 위기3.27. 이후3.28. 최후
3.28.1. 반응
3.28.1.1. 대한민국
4. 평가5. 건강 이상설과 후계 구도

1. 개요[편집]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이자 정치인으로, 1989년부터 2026년까지 37년간 제2대 이란 최고지도자(Rahbar, Supreme Leader)로 재임 하였다. 그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이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혁명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최고지도자로서 군·정치·외교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이란의 내정과 대외 정책을 주도했으며, 혁명수비대(IRGC)와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국내 반대파를 억압하고 이란의 지역 영향력을 확대했다.

2. 가계[편집]

알리 하메네이의 성 풀네임은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Seyed Ali Hosseini Khamenei)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세예드(Sayyid)'라는 칭호이다. 이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 구체적으로는 제4대 칼리파 알리 빈 아비 탈리브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사이에서 태어난 3대 이맘 호세인 이븐 알리의 혈통을 잇는 가문임을 의미한다.[2]

그의 가문은 수 세대에 걸쳐 이슬람 법학자와 신학자를 배출한 전형적인 '학자 집안'이었다. 가문의 뿌리는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주의 '하메네(Khamaneh)'라는 작은 마을에 두고 있다. 하메네이의 증조부인 세예드 모함마드 호세이니 타프레시는 당대 명망 높은 성직자였으며, 조부인 아야톨라 세예드 호세인 하메네이 역시 이라크의 나자프와 이란의 타브리즈를 오가며 활동한 고위 성직자였다. 이러한 가문 내력은 알리 하메네이가 어린 시절부터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엄격한 종교적 규율과 학문적 성취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환경에서 자라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아야톨라 세예드 자바드 하메네이(1895~1986)는 아제르바이잔 주에서 태어나 나자프와 쿰, 마슈하드에서 수학한 정통파 성직자였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으며, 평생을 마슈하드의 성지 근처에서 기도와 교육에 전념하며 살았다. 하메네이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를 "세상적 욕심이 전혀 없으며, 오직 신의 뜻에 따라 검소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수행자"로 묘사했다. 실제로 자바드 하메네이는 아들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마슈하드의 낡은 집을 떠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지원을 거절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어머니인 카디제 미르다마디(1914~1989) 역시 명망 있는 성직자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슈하드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하셰메 미르다마디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와 쿠란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하며 정서적 지주 역할을 했다. 하메네이는 어머니로부터 문학적 감수성과 시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이란의 전통 시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는 계기가 된다.

3. 생애[편집]

3.1. 초기[편집]

1939년 4월 19일, 알리 하메네이는 이란 동북부의 종교 성지인 마슈하드의 빈민가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3] 하메네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집은 약 20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었으며, 침실과 거실의 구분이 모호한 단칸방 수준이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보리빵을 구워주셨고, 때로는 저녁 식사로 대추 몇 알과 빵 한 조각이 전부인 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신의 시험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알리 하메네이의 회고 중.

이러한 유년기의 '자발적 가난'과 '엄격한 도덕주의'는 훗날 하메네이가 팔라비 왕조의 사치와 부패를 공격하는 강력한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화려한 궁전 대신 흙먼지 날리는 성지의 골목길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혁명의 원동력'을 몸소 체험했다.

하메네이가 유년기를 보낸 1940년대와 50년대의 이란은 거대한 격동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소련영국의 군대가 이란에 주둔했고, 친서방 정책을 펴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 국왕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강력한 세속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히잡 착용을 금지하거나 종교 교육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는 하메네이 가문과 같은 보수적 성직자 계급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1953년 미국 CIA가 개입한 '아약스 작전'으로 모하마드 모사데크 수상이 실각하고 샤(Shah)의 전제 정치가 강화되자, 마슈하드의 종교계는 침묵 속에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어린 알리 하메네이는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드는 성직자들의 대화를 통해,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이슬람 가치의 훼손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갔다. 이는 그가 단순한 종교 학자를 넘어 '정치적 행동주의자'로 변모하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6세 무렵, 하메네이는 형인 세예드 모함마드와 함께 전통적인 초등 교육 기관인 '마크타브'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쿠란 암송을 배웠다. 영민했던 그는 또래보다 빠르게 학업을 마쳤고, 곧바로 마슈하드 신학교(Hawza)의 예비 과정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아랍어 문법과 수사학, 논리학 등 이슬람 학문의 기초를 닦았는데, 특히 아랍 문학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단순히 종교 경전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문맥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매일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았으며, 성지 이맘 레자 묘를 방문하며 시아파 신앙의 정수를 내면화했다.

3.2. 마슈하드 신학교 시절[편집]

하메네이가 본격적으로 이슬람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50년대 초반, 그의 고향이자 시아파 8대 이맘 레자의 성묘가 위치한 마슈하드에서였다. 당시 마슈하드는 과 더불어 이란 내 시아파 신학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수천 명의 탈레베(Talabeh, 신학생)들이 모여드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하메네이는 이곳에서 단순한 '성직자의 아들'을 넘어, 당대 석학들이 주목하는 '천재 신학생'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하메네이는 마슈하드의 슬레이만 칸(Suleiman Khan) 신학교와 나바브(Navvab) 신학교를 오가며 수학했다. 당시 이란의 신학교 교육 체계는 '사르프(Sarf, 형태론)'와 '나흐브(Nahv, 통사론)'라는 아랍어 문법 기초에서 시작해, 수사학인 '발라가(Balagha)'를 거쳐 이슬람 법학(Fiqh)과 법기원학(Usul al-Fiqh)으로 나아가는 엄격한 단계별 학습을 요구했다.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보통의 학생들이 2~3년 걸리는 기초 과정을 단 몇 개월 만에 독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부친인 아야톨라 자바드 하메네이는 아들의 명석함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자칫 오만해질까 봐 더욱 엄격하게 훈육했다. 하메네이는 훗날 "아버지는 내가 책 한 권을 떼면 곧바로 다음 단계의 가장 어려운 주석서를 내밀며 나를 긴장시키셨다"고 회고했다.

마슈하드 시절 하메네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 중 한 명은 아야톨라 하셰미 카즈비니(Hashemi Qazvini)였다. 카즈비니는 단순한 교조적 해석에 매몰되지 않고, 텍스트의 논리적 구조를 해체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강의로 유명했다. 하메네이는 그의 강의를 통해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길렀으며, 이는 훗날 그가 복잡한 정치 상황을 분석하는 기초 체력이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중반 마슈하드로 이주해 온 대아야톨라 세예드 모함마드 하디 밀라니(Seyed Mohammad Hadi Milani)와의 만남은 하메네이의 학문적 지평을 넓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밀라니는 나자프 학파의 정교한 논리 체계를 마슈하드에 전파한 인물로, 하메네이는 그의 문하에서 '사트(Sath, 중급 과정)'를 넘어 '다르세 카레즈(Dars-e Kharej, 최고급 자유 토론 과정)'에 입문하게 된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이미 동년배들 사이에서 '모즈타히드(Mujtahid, 독자적 법 해석 권한을 가진 학자)' 후보군으로 거론될 만큼 학술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신학교의 커리큘럼은 대단히 보수적이었으나, 청년 하메네이의 관심사는 담장 너머의 세상에도 닿아 있었다. 그는 신학 공부 틈틈이 이란의 고전 시와 현대 문학에 심취했다. 하피즈, 사디, 루미와 같은 거장들의 시집을 암송하는 것은 물론, 당시 유입되던 외국 문학의 번역본들도 몰래 탐독했다.

이러한 문학적 소양은 하메네이를 여타 딱딱한 성직자들과 차별화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는 설교할 때 유려한 문장과 적절한 시구를 인용하여 청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당시 마슈하드의 지식인 카페나 문학 모임에 종교 복장을 한 청년 하메네이가 나타나는 것은 꽤 이색적인 풍경이었으며, 그는 여기서 세속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현대 사회의 모순과 변혁의 필요성을 몸소 체감했다.

단순한 학자였던 하메네이를 정치적 행동주의자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1950년대 중반 마슈하드를 방문한 나바브 사파비(Navvab Safavi)와의 만남이었다. 사파비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단체인 '페다얀-에 이슬람(Feda'iyan-e Islam)'의 지도자로,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와 서구화에 정면으로 맞서던 인물이었다.

사파비는 마슈하드 신학교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토하며 "이슬람은 단순히 개인의 수양에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를 경영하고 불의를 타도하는 혁명의 종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강의실 뒷자리에서 이 연설을 듣던 하메네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훗날 "사파비의 목소리는 잠자던 내 영혼에 불을 지핀 불꽃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공부벌레 신학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1957년, 18세의 청년 하메네이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결정을 내린다. 바로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문적 성지이자, 제1대 이맘 알리 빈 아비 탈리브의 묘소가 있는 이라크의 나자프(Najaf)로 떠나는 것이었다. 당시 나자프는 단순한 종교 도시를 넘어, 전 세계 시아파 무슬림들의 지적 중심지이자 수천 명의 학자가 논쟁을 벌이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하메네이가 나자프로 떠난 것은 단순히 학위나 자격을 따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시 이란 내의 신학교(하우자) 교육도 훌륭했으나, 정통 시아파 법학의 깊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자프의 대가들에게 직접 사사하는 것이 필수 코스로 여겨졌다.

그는 아버지 아야톨라 세예드 자바드 하메네이의 축복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당시의 교통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으나, 젊은 하메네이에게는 그 고난마저도 신앙의 증명처럼 느껴졌다. 그는 바그다드를 거쳐 나자프에 입성했을 때, 도시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황금 돔과 수백 년 된 도서관들의 위용에 압도되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나자프 체류 기간은 비록 1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으나, 그가 만난 인물들은 현대 시아파 역사를 장식하는 거물들이었다.

아야톨라 세예드 모흐센 알-하킴은 당시 시아파 세계의 최고 권위자(Marja-e-Taqlid) 중 한 명으로, 하메네이는 그의 강의를 통해 법학의 실무적 적용과 종교적 행정의 기틀을 목격했다.

아야톨라 세예드 마무드 샤흐루디는 하메네이는 그의 문하에서 고등 법학 과정을 이수하며 논리적 사고력을 극대화했다. [4]

하메네이는 나자프의 교육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교수의 논리를 반박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바헤세(Mobaheseh)' 문화는 그의 비판적 사고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서적들과 씨름하며, 이슬람 법학(Fiqh)이 어떻게 현대 사회의 문제에 답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자프는 학문의 전당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침묵주의(Quietism)'가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 나자프의 주류 학자들은 성직자가 세속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들은 열두 번째 이맘인 '마흐디'가 재림하기 전까지 성직자는 오직 종교적 가르침과 개인의 윤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적 자각을 얻게 된다. 그는 나자프의 거대한 지적 자산이 현실의 억압받는 무슬림들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당시 이라크 내에서 확산되던 공산주의 세력과 세속적 민족주의 세력의 부흥을 목격하며, 이슬람이 단순한 기도가 아닌 '사회적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이라크의 위대한 사상가 모함마드 바키르 알-사드르(Mohammad Baqir al-Sadr)의 초기 사상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알-사드르는 훗날 이슬람 경제학과 정치 이론의 선구자가 되는 인물로, 하메네이의 후기 사상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메네이는 나자프에 더 머물며 대아야톨라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스승들은 하메네이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며 나자프에 남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1958년, 고향 마슈하드에서 들려온 소식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아버지인 아야톨라 자바드 하메네이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이었다. 하메네이는 학문적 야망과 자식으로서의 도리 사이에서 고뇌했다. 결국 그는 "부모를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수행"이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이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나자프를 떠나는 것은 내 심장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생각에 지체할 수 없었다." - 하메네이의 자서전적 구술 중.

이 결정은 역설적으로 그를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운명적 스승에게로 인도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만약 그가 나자프에 계속 남았다면, 그는 평범한 고위 성직자로 남았을지 모르나 이란으로 돌아왔기에 혁명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1958년, 하메네이는 마슈하드에서의 학습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그는 더 넓은 세상, 즉 시아파 학문의 심장부인 으로 가서 당대 최고의 스승인 루홀라 호메이니아야톨라 보루제르디를 직접 대면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과 노쇠한 부친을 두고 떠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메네이는 수개월간 고민하며 기도한 끝에, 결국 학문적 완성만이 가문의 영광을 되찾고 이슬람을 수호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친의 허락을 받아낸 그는 단출한 짐가방과 몇 권의 책만을 챙긴 채, 테헤란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훗날 이란의 운명을 바꿀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마슈하드 신학교 시절은 하메네이에게 두 가지 핵심 자산을 남겼다. 첫째는 치밀한 논증 능력이다.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로서 복잡한 헌법적, 종교적 분쟁을 중재할 때 보여준 논리력은 이때 다져진 것이다. 둘째는 서사적 감수성이다. 민중의 언어로 소통하며 대중을 선동하거나 위로하는 그의 화법은 마슈하드의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났다.

그는 이제 마슈하드의 보호막을 벗어나, 혁명의 폭풍전야와도 같았던 쿰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3.3. 쿰에서의 운명적 만남[편집]

하메네이는 마슈하드에서의 초기 수학을 마치고 이란 시아파 신학의 심장부인 으로 향했다. 이는 단순한 진학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지적·정치적 중심부로 뛰어드는 일종의 '성인식'과도 같았다. 당시 쿰은 수천 명의 탈라베(Talabeh, 신학생)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학문의 용광로였으며, 그곳에서 하메네이는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란의 역사를 바꿀 스승, 루홀라 호메이니를 만나게 된다.

당시 쿰 신학교는 이란 내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0년대 아야톨라 압둘카림 하에리 야즈디에 의해 재건된 이후, 쿰은 나자프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의 분위기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한쪽에는 정치는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정교분리주의적' 원로 성직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팔라비 왕조의 급진적 세속화와 서구화에 위기감을 느끼는 소장파 성직자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하메네이가 쿰에 발을 들였을 때, 그는 이미 마슈하드에서 다져진 탄탄한 아랍어 실력과 논리학 기초 덕분에 상급 과정인 '하레즈(Kharej)' 강의를 들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아야톨라 브루제르디, 아야톨라 모르테자 모타하리 등과 교류하며 지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그 어떤 학자도 하메네이의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정치적 야성'을 깨우지는 못했다.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강의를 처음 접한 것은 쿰의 파이지예(Faiziyeh) 학교에서였다. 당시 호메이니는 아직 '이맘'이라는 칭호를 얻기 전이었으나, 이미 신학생들 사이에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메네이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호메이니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울림은 강의실 벽을 뚫고 나갈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구절을 빌려 무너져가는 이슬람의 자존심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평생 따라야 할 길을 발견했습니다."

호메이니의 강의는 다른 아야톨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 세계의 부조리, 사회적 불평등, 외세의 간섭, 왕정의 독재를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매일같이 앞자리를 사수했고, 강의가 끝난 뒤에도 스승의 뒤를 따르며 질문을 던지는 열혈 제자가 되었다.

이 시기 하메네이가 호메이니로부터 전수받은 핵심 사상은 훗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적 근간이 되는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의 초기 모델이었다.[5]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가르침을 통해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는 순간, 종교는 박물관의 박제와 다름없게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스승의 입에서 나오는 '독재(Taghut)'라는 단어와 '압제받는 자(Mustaz'afun)'라는 개념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는 하메네이가 단순한 신학 연구자에서 '정치 투사'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사상적 거름이 되었다.

쿰에서의 생활은 고독한 공부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하메네이는 이곳에서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이 될 인물들을 만났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혁명 이데올로그 모르테자 모타하리, 사법부 수장이 되는 모함마드 베헤시티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메이니의 문하에서 비밀 결사 조직과 같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들은 밤마다 모여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과 이란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으며, 호메이니의 설교문을 등사기(mimeograph)로 밀어 전국으로 배포하는 비밀 활동을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이 중에서도 특히 문장력이 뛰어나고 아랍어 번역에 능통하여, 이슬람 운동의 이론적 선전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팔라비 국왕의 '백색 혁명'이 구체화되자, 쿰의 긴장감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호메이니는 공개적으로 샤(Shah)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하메네이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마슈하드와 테헤란을 오가며 혁명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연락책 역할을 자원했다.

당시 하메네이의 부친인 아야톨라 자바드 하메네이는 아들이 위험한 정치 활동에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여 마슈하드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스승님이 계신 쿰이야말로 이슬람의 미래가 결정될 전쟁터"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3.4.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벨라야테 파키)의 맹아[편집]

하메네이의 사상적 궤적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은 그가 평생을 바쳐 수호하게 될 정치 철학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이다. 당시 의 신학교는 표면적으로는 고요한 학문의 전당이었으나, 그 이면에서는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시아파의 '정치적 침묵주의'와 새로운 '혁명적 행동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거대한 사상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스승 루홀라 호메이니의 이론을 가장 앞장서서 흡수하고 체계화한 인물 중 하나였다.

본래 시아파 이슬람의 정통적인 입장은 제12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마디가 은둔(Ghaybah) 중인 상태에서 지상의 모든 정치 권력은 불완전하며, 진정한 이슬람 정부는 이맘이 재림할 때까지 유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다림의 신학'이라 부르는데, 이로 인해 대다수의 고위 성직자(아야톨라)들은 세속 정치와 거리를 두는 '침묵주의(Quietism)'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쿰에서 수학하며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에 강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악(惡)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의 대리인들이 침묵하는 것이 과연 경건함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직면했다. 이때 호메이니가 던진 화두는 충격적이었다. "이슬람은 단순히 기도와 금식의 종교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정치 체제 그 자체이다."라는 선언이었다. 하메네이는 이 파격적인 해석에 매료되었고, 신의 법(Sharia)을 가장 잘 아는 이슬람 법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게 되었다.[6]

하메네이가 정립한 초기 '벨라야테 파키'의 핵심은 '사회 정의의 실현'에 있었다. 그는 당시 이란을 지배하던 팔라비 왕조를 단순히 '독재 정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영혼을 판 '타구트(Taghut, 우상/폭군)'로 규정했다.

그의 사상 체계에서 법학자의 통치는 권위주의적 지배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약자(모스타자핀)를 보호하고 강자의 횡포를 막기 위한 신성한 의무였다. 하메네이는 쿠란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불의를 보고도 저항하지 않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자와 같다"는 논리를 전파했다. 이러한 저항 정신은 훗날 그가 '저항의 축'이라는 국제적 연대 기구를 이끄는 사상적 기반이 된다. 그는 법학자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신의 완벽한 법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집행할 공정한 권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세속 정부는 이익을 쫓지만, 종교 정부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목적을 둔다.

신에게만 복종하는 성직자만이 외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호메이니가 거시적인 이론을 세웠다면, 하메네이는 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조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쿰의 젊은 학생들을 모아 소모임을 결성하고, 호메이니의 강의록을 비밀리에 복사하여 전국으로 유포했다.

특히 그는 이슬람 사상을 당대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자유주의와 비교 분석하며, 청년 지식인들에게 "이슬람이야말로 진정한 제3의 길"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구 문학, 특히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같은 작품을 읽으며 사회 모순을 통찰했고, 이를 이슬람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러한 '지성적 혁명가'의 면모는 그가 다른 보수적 성직자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여러 편의 논문과 번역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특히 이집트의 사상가 세이드 쿠틉(Sayyid Qutb)의 저작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며 '이슬람의 사회적 정의'에 대한 깊은 고찰을 이어갔다.[7]

그는 이슬람 정부가 들어선다면 단순히 술과 도박을 금지하는 수준을 넘어, 토지 개혁을 통해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 경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훗날 이란 혁명 이후 그가 국가 정책을 수립할 때 중요한 밑그림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생각은 당시 마슈하드와 쿰의 원로 성직자들로부터 "종교를 정치의 도구로 타락시킨다"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메네이는 이러한 내부의 비판에 맞서며 고독한 투쟁을 이어갔고, 이는 그를 더욱 강인한 투사로 단련시켰다.

1962년, 팔라비 국왕이 이른바 '지방 의회 선거법 개정안'을 발표하며 성서(쿠란) 대신 각자의 경전에 선서할 수 있게 하고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려 하자, 쿰의 신학교는 폭발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근대화 조치였으나, 성직자들에게는 이슬람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음모로 비춰졌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호메이니의 특사 자격으로 각 도시를 돌며 성직자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그는 단순히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이란을 미국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수작이다"라고 본질을 꿰뚫는 연설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호메이니의 '오른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5. 15 코르다드 운동(15 Khordad)[편집]

1963년은 이란 현대사에서 거대한 분수령이 된 해이다.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단행한 이른바 '백색 혁명'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토지 개혁을 통한 전통적 지주 계층의 몰락과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을 앞세워 이슬람 성직자 계층의 사회적 영향력을 거세하려는 정치적 공세였다.

당시 쿰에서 수학하던 젊은 하메네이는 스승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호메이니는 백색 혁명을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고 이란을 미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음모"라고 규정하며 강력한 투쟁을 선포했다. 하메네이는 스승의 이러한 강직한 태도에 깊이 감명받았으며, 단순한 이론적 지지를 넘어 실질적인 행동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1963년 이슬람의 애도 기간인 '무하람(Muharram)'이 다가오자, 호메이니는 제자들에게 각 지방으로 흩어져 국왕의 실정을 폭로하고 혁명의 정당성을 알리라는 밀명을 내린다. 하메네이가 배정받은 지역은 이란 동부의 보수적인 도시 비르잔드였다.

그는 비르잔드의 사원과 종교 집회장을 돌며 거침없는 설교를 이어갔다. 당시 하메네이의 설교는 기존의 고루한 종교 해석에서 벗어나, 현실 정치의 부조리와 경제적 불평등을 이슬람의 정의관에 빗대어 비판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변화를 갈망하던 민중들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도만 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께서 불의한 폭군에 맞서 싸우셨듯, 우리 또한 이 땅의 우상을 타파해야 합니다." - 당시 하메네이의 설교 요지.

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비밀경찰 사바크의 감시망에 걸려 있었다. 사바크는 하메네이를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선동가'로 분류하고 검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1963년 6월 5일(이란력으로 3월 15일, 즉 15 Khordad), 호메이니가 쿰에서 전격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란 전역은 분노로 들끓었다. 테헤란, 쿰, 마슈하드 등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메네이는 비르잔드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려 했으나, 체포 영장을 들고 들이닥친 경찰과 사바크 요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기록된 첫 번째 공식 체포였다. 그는 비르잔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며칠 뒤 테헤란의 군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이 사건(15 코르다드 운동)은 팔라비 정권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정신적 원점'이 되었다. 하메네이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스승 호메이니의 체포 소식과 동료들의 희생 소식을 들으며, 더 이상 펜과 책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첫 번째 투옥 기간은 약 두 달 정도였으나, 하메네이에게 준 충격은 상당했다. 그는 당시 신체적인 고문보다도 '신성한 성직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정권의 태도에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회고한다.[8]

하지만 감옥은 그에게 또 다른 학교였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전국의 혁명가들을 만났으며, 조직적인 저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좁은 감방 안에서도 쿠란을 암송하고 기도하며 정신력을 유지했고, 함께 수감된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이슬람 사상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정치적 이슬람'에 완전히 경도되었다. 그는 단순히 국왕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근본 구조 자체를 이슬람 법학자가 통치하는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호메이니의 이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석방 이후 하메네이는 마슈하드로 돌아왔으나, 그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사바크는 그를 상시 감시 대상자로 지정했고, 그의 설교와 강의는 사사건건 검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마슈하드의 신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모아 '비밀 스터디'를 조직하고, 호메이니의 사상을 전파하는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다.

당시 그가 강의하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역사와 해석학이었으나, 그 안에는 '압제에 저항하는 시아파의 투쟁 정신'이라는 메시지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는 알리 이맘과 호세인 이맘의 순교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현재의 팔라비 정권을 고대의 폭군 야지드 1세에 비유하곤 했다. 이러한 은유적 설교는 대중의 심장을 관통했고, 그는 마슈하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훗날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매년 15 코르다드 기념일마다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 날을 "신앙이 정치를 만나 혁명의 불꽃으로 타오른 날"로 정의한다.

그에게 1963년의 시련은 '철부지 신학생'에서 '강단 있는 혁명가'로 탈바꿈하는 통과의례였다. 만약 15 코르다드 운동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첫 번째 투옥의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강경하고 타협 없는 하메네이의 정치 스타일은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6. 지하 포교 활동[편집]

1964년 루홀라 호메이니터키를 거쳐 이라크나자프로 강제 추방당한 사건은 이란 내 이슬람 반정부 운동에 있어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구심점을 잃은 혁명 세력이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젊은 알리 하메네이는 스승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본격적인 '지하 포교 및 조직망 구축'에 뛰어든다. 이 시기 하메네이의 활동은 단순한 종교 설교를 넘어, 현대 이란의 통치 이념인 벨라야테 파키를 대중화하고 팔라비 왕조의 감시망을 무력화하는 정교한 정치 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호메이니가 나자프에서 녹음테이프와 서신을 통해 혁명의 메시지를 전달하면, 이를 이란 국내로 들여와 복제하고 배포하는 위험천만한 작업이 필요했다.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마슈하드와 쿰, 그리고 테헤란을 잇는 비밀 연락망을 가동했다.

당시 사바크는 호메이니의 이름만 언급해도 체포할 정도로 서슬 퍼런 감시를 이어갔으나, 하메네이는 은유와 상징을 섞은 설교를 통해 당국의 감시를 교묘히 피했다. 그는 쿠란의 구절 중 '폭군에 대항하는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은연중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고대의 폭군에 비유했고, 이는 청년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9]

하메네이가 특히 공을 들인 곳은 테헤란의 헤다야트 모스크(Hedayat Mosque)였다. 이곳은 현대 이슬람 사상가 마무드 탈레가니가 활동하던 곳으로, 세속적 대학생들과 종교적 청년들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하메네이는 이곳에서 정기적인 강연을 열며 당시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할 '이슬람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단순히 "서구화는 나쁘다"라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슬람이 어떻게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빈부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토대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모르테자 모타하리, 모함마드 베헤스티와 같은 혁명 1세대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훗날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이 될 '이슬람 지식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마슈하드에서 그가 진행한 금요 예배 설교는 지역 민중들을 각성시키는 기폭제였다. 사바크의 기록에 따르면, 하메네이의 설교가 있는 날이면 마슈하드의 시장(Bazaar) 상인들과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는 설교 도중 갑자기 침묵을 지키거나, 특정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방식으로 군중과 암호를 주고받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그는 수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심문관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심문관에게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려 드는 대범함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단순한 '활동가'에서 '영웅적 지도자'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하메네이는 글쓰기에도 능했다. 그는 호메이니의 사상을 정리한 책자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역사적 승리를 다룬 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직접 집필하여 지하 통로로 유포했다. 특히 그는 이집트의 사상가 세이드 쿠틉(Sayyid Qutb)의 저작들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며 '이슬람적 자각'을 촉구했다.

이 시기 그가 강조한 것은 "종교는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도구"라는 점이었다. 이는 당시 정교분리를 지향하던 정통파 성직자들과 궤를 달리하는 급진적인 주장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성직자' 그룹이 혁명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하메네이의 지하 활동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사바크는 그를 '가장 위험한 선동가' 중 한 명으로 분류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총 6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체포되었는데, 각 체포 사건은 그의 혁명적 연대기에 훈장처럼 남았다.

1967년 체포는 테헤란에서의 비밀 집회 주도 혐의로 수개월간 독방에 갇혀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1970년 체포는 호메이니의 메시지를 전파하던 중 검거. 이 시기 그는 감옥 안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을 포교하며 '감옥 안의 신학교'를 운영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방될 때마다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러한 끈질긴 생명력은 팔라비 정권에게는 공포를, 혁명 세력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

'지하 포교 활동' 시기는 하메네이가 대중의 심리를 파악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사상적 무장을 완료한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며 단순한 '아야톨라의 제자'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하나의 '혁명 아이콘'이 되었다. 그가 구축한 지하 네트워크는 훗날 1979년 혁명 당시 전국의 모스크가 일제히 봉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신경망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3.7. 사바크와의 사투[편집]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알리 하메네이의 삶은 '감옥과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기였다. 당시 팔라비 왕조의 중앙정보보안기구인 사바크는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미국의 CIA로부터 전수받은 고도의 고문 기법과 감시망을 동원해 반체제 인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총 6차례에 걸쳐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며,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정신적 투쟁을 이어갔다.

사바크는 하메네이를 단순한 성직자가 아닌, 루홀라 호메이니의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위험한 선동가'로 분류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도청되었고, 그가 마슈하드와 쿰을 오갈 때마다 비밀 요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자신의 집 서재에 금지된 정치 서적과 호메이니의 격문을 숨기기 위해 이중 벽면을 만들거나, 제자들의 옷 속에 마이크로필름을 숨겨 전달하는 등 고도의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

하메네이의 투쟁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1974년 1월에 발생한 6번째 체포였다. 그는 테헤란의 '공동 반테러 위원회'(일명 코미테 수용소)로 압송되었다.[10] 이곳은 창문 하나 없는 지하 감방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고문실로 악명이 높았다.

하메네이는 이곳에서 '아폴로'라 불리는 고문 기구(피고문자를 의자에 묶고 머리에 철제 헬멧을 씌운 뒤 구타하여 소리가 증폭되게 하는 장치)와 채찍질, 전기 고문을 견뎌야 했다. 당시 사바크 요원들은 그에게 호메이니와의 연락망을 불라고 강요했으나, 하메네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훗날 하메네이는 이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육체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쿠란의 구절을 암송하며 정신을 육체로부터 분리하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초인적인 인내심은 감옥 동료들 사이에서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각인시켰고, 훗날 그가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칭호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사바크의 감옥은 혁명가들의 '사관학교'가 되었다. 하메네이는 감옥 안에서 마무드 탈레가니,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 등 훗날 혁명 정부의 핵심이 될 인물들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그들은 좁은 감방 안에서 이슬람 경제학, 정치철학, 그리고 포스트 팔라비 시대의 국가 건설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했다. 하메네이는 특히 젊은 수감자들에게 아랍어와 이슬람 법학을 가르치며 그들의 사상적 중심추 역할을 했다. 사바크는 이들을 격리하려 애썼으나, 수감자들은 식사 시간이나 운동 시간을 이용해 암호화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조직력을 키워나갔다.

하메네이는 투옥 기간 중에도 정신적 타락을 경계하기 위해 독서에 매진했다. 그는 이슬람 서적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작품들까지 섭렵했다.[11]

이러한 폭넓은 독서는 그가 서구의 사상적 모순을 파악하고, 이슬람이라는 틀 안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감옥 벽에 손톱으로 시를 새기거나, 검열을 피해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1년간의 혹독한 구금 끝에 1975년 말 하메네이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닌 '거대한 감옥'으로의 복귀였다. 사바크는 그에게 공공장소에서의 설교와 강의를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굴하지 않고 마슈하드의 자택에서 소규모 그룹을 대상으로 '가정 예배' 형식을 빌려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폭풍 전의 고요함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며 제자들에게 때를 기다릴 것을 주문했다. 이 시기 그는 팔라비 왕조의 화려한 '페르시아 제국 2500년 축제'와 같은 사치 행태를 민중의 가난과 대비시키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민심을 파고들었다.

사바크는 육체적 고문이 하메네이와 같은 성직자들을 굴복시킬 것이라 믿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고문은 오히려 그의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투쟁심'으로 승화시켰고, 그를 단순한 학자에서 전략가로 진화시켰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사바크의 심리전 기법을 역이용하는 법을 배웠으며, 적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패한 관료 조직, 민중과의 괴리 등)를 정확히 꿰뚫어 보게 되었다.

1977년 말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이란 남동부 시스탄-발루치스탄 주의 이란샤흐르(Iranshahr) 유배 생활은 알리 하메네이의 투쟁사에서 가장 고립되었으나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로 기록된다.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 [사바크]는 테헤란과 마슈하드에서 끊임없이 혁명의 불씨를 지피는 이 젊은 성직자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하기 위해, 이란에서 가장 척박하고 낙후된 오지로 그를 추방했다. 그러나 사바크의 계산과 달리, 이 유배는 하메네이에게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그가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하는 도덕적 자산이 되었다.

1977년 하반기, 이란 전역은 이미 폭발 직전의 압력솥과 같았다. 스승 루홀라 호메이니의 아들인 모스타파 호메이니의 의문사는 혁명에 불을 지폈고, 하메네이는 마슈하드에서 대규모 추모 집회를 주도하며 체제 전복의 선봉에 섰다. 사바크는 하메네이를 '교화 불가능한 위험인물'로 분류했고, 1977년 12월 그를 다시 체포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투옥이 아니었다. 법원은 그에게 3년의 유배형을 선고했다. 목적지는 테헤란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란샤흐르. 이곳은 당시 이란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수니파 블로치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시아파 성직자인 하메네이가 발붙이기 힘들 것이라는 사바크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었다.

하메네이가 도착한 이란샤흐르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여름 기온이 50°C를 상회하는 살인적인 더위와 끝없이 휘몰아치는 흙먼지 폭풍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전기도 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낡은 진흙 집이 그의 거처였다. 하메네이는 "그곳의 더위는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매일 오전과 오후, 그는 현지 경찰서에 출석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사바크 요원들은 그의 집 근처에 상주하며 누구와 접촉하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사바크가 기대했던 '종파 간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메네이는 특유의 친화력과 해박한 신학 지식을 바탕으로 현지 수니파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을 '혁명가'이기 이전에 '신의 종'으로 소개하며 주민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현지 수니파 성직자들과 쿠란의 해석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며, 가난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쪼개어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정부의 성직자들은 거만하지만, 하메네이는 우리와 같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훗날 이슬람 공화국이 표방한 '이슬람 단결(Islamic Unity)' 정책의 실무적 모태가 되었다.[12]

1978년 여름, 이란샤흐르에 기록적인 폭우와 함께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다. 흙으로 지어진 집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으나, 중앙 정부의 구호 손길은 느리기만 했다. 이때 하메네이는 유배 중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구호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마슈하드와 테헤란의 동료 성직자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여 구호 물자와 자금을 요청했다. 직접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주민들을 구조하고 음식을 배급했다. 당시 이란샤흐르 주민들은 제복 입은 경찰보다 검은 터번을 쓴 하메네이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팔라비 정권의 무능함과 하메네이의 헌신적인 지도력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사바크는 당황하여 그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 했으나 이미 민심은 하메네이에게 기울어 있었다.

고립된 유배 생활 속에서도 하메네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감시를 피해 스승 호메이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혁명의 다음 단계를 논의했다. 또한, 이 시기에 수많은 이슬람 고전들을 탐독하며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 철학을 정립해 나갔다.

그는 당시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곳의 태양은 뜨겁지만, 내 가슴 속의 혁명의 불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곧 테헤란의 거리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될 것이다."

1978년 하반기, 이란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당황한 정권은 유배자들에 대한 통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하메네이는 3년의 형기를 다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이란샤흐르를 떠나 마슈하드로 복귀했다.

그가 복귀했을 때, 이미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의 거대한 파도 속에 있었다.

3.8. 1979년 이슬람 혁명[편집]

1979년은 15년 넘게 이어진 투쟁과 망명, 투옥의 세월 끝에 루홀라 호메이니가 귀환하고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단순히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시위자가 아니었다. 그는 호메이니의 '입'이자 '눈'이었으며, 혁명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의 뼈대를 세우는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1978년 말, 이란 전역은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하메네이는 당시 이란 남동부의 오지인 이란샤흐르(Iranshahr)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이었으나, 혁명의 열기는 그 먼 곳까지 뻗쳐 있었다. 1978년 하반기,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로 인해 샤(Shah)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하메네이는 유배지를 탈출하듯 떠나 성지 마슈하드로 복귀했다.

마슈하드에서 그는 즉각적으로 반정부 시위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금요 예배와 대중 집회에서 "우리의 이맘(호메이니)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다"며 대중을 선동했고, 서구화된 왕정의 종말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이미 사바크의 요주의 인물이었으나, 군과 경찰조차 거대한 민중의 파도 앞에서는 그를 다시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79년 1월, 프랑스 파리 인근 노플르샤토에 머물던 호메이니는 귀국 후 국가를 운영할 비밀 조직인 '혁명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직접적인 지명을 받아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된다.[13]

그는 테헤란으로 급히 이동하여 모르테자 모타하리, 모함마드 베헤슈티,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등 혁명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메네이의 역할은 주로 혁명 세력 간의 의견 조율과 대중 동원 전략 수립이었다. 특히 그는 세속적 자유주의 세력(국민전선 등)과 좌파 세력이 혁명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오직 '이슬람에 의한 통치'라는 단일 대오를 유지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1979년 2월 1일 오전, 에어프랑스 특별기가 테헤란 메흐라바드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15년 만의 호메이니 귀환이었다. 하메네이는 공항 영접 위원회의 핵심 멤버로서 스승을 맞이했다. 호메이니가 공항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베헤슈트-에 자하라(Behesht-e Zahra) 공동묘지에서 행한 전설적인 연설까지, 하메네이는 지척에서 이 역사적 장면을 보좌했다.

이 시기 하메네이의 활동은 초인적이었다. 그는 낮에는 혁명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밤에는 무장한 시민군(당시 혁명수비대의 전신)의 조직화를 도왔다. 특히 2월 11일,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고 왕정이 공식적으로 붕괴하던 날, 하메네이는 라디오 방송국과 주요 정부 청사를 점거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했다.

왕정이 무너진 직후 이란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구체제의 관료들은 처형되거나 도주했고, 거리에는 무장한 다양한 정파의 민병대가 넘쳐났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이슬람의 질서'를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메네이는 혁명 직후인 2월 18일, 베헤슈트 등과 함께 이슬람공화당을 창당했다. 이는 신정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하나의 정당으로 묶어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혁명 직후, 호메이니를 정점으로 하는 성직자 그룹(Ulama)은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현대적인 정당 조직이나 행정 시스템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반면, 이란 투데당(공무원 및 노동자 기반의 공산당)이나 무자헤딘 에 할크(MEK, 이슬람 사회주의 무장단체)는 수십 년간 지하 조직을 운영해온 베테랑들이었다.

하메네이는 이 점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다. 그는 모함마드 베헤스티,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등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계급이 정치적 구심점이 될 정당을 만들지 못하면, 혁명의 과실은 조직력이 강한 좌익이나 세속주의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1979년 2월 18일, 혁명이 성공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이슬람공화당이 공식 출범한 배경이다.[14]

이슬람공화당은 이른바 '5인의 창당 멤버'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훗날 이란 정계를 수십 년간 주무르는 거물들이 된다.
  • 모함마드 베헤스티: 당의 실질적인 브레인이자 초대 총비서. 서구적 행정 체계와 이슬람 법학을 결합한 인물.
  • 알리 하메네이: 당의 이데올로기 선전 및 조직 관리를 담당. 대중 설득에 능한 연설가로 활약.
  • 압둘카림 무사비 아르데빌리: 사법 체계의 이슬람화를 주도한 법학자.
  • 모함마드 자바드 바호나르: 교육과 문화 정책의 틀을 잡은 인물.

하메네이는 이 조직 내에서 특히 '당의 소리' 역할을 맡았다. 그는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돌며 "이슬람공화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니라, 이맘 호메이니의 노선을 수호하는 성벽"이라고 역설하며 수백만 명의 당원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하메네이는 당의 공식 기관지인 『조무리 에 에슬라미』(Jomhuri-ye Eslami, 이슬람 공화국)의 발행과 편집 방향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이 매체를 통해 자유주의적 임시정부(메흐디 바자르간 내각)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이란 사회 전반에 '철저한 이슬람화'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의 전략은 명확했다.

하메네이는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청빈함의 이미지를 활용해, 도시 빈민층이 이슬람공화당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학 내 좌익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학생 조직을 당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하고, 교육 커리큘럼의 개편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초기 [혁명수비대]가 당의 무력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인사와 군수 보급 면에서 막후 조율사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하메네이와 이슬람공화당의 최대 적수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메흐디 바자르간 임시정부였다. 바자르간은 온건한 민족주의자로, 서구식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공존을 바랐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이를 "혁명을 배신하는 나약한 타협"으로 규정했다.

하메네이는 당 회의에서 "행정권은 전문가들에게 있을지 몰라도, 국가의 영혼과 방향성은 성직자 위원회(이슬람공화당)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사건건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던 바자르간의 시도를 '친미적 작태'로 몰아세우는 데 하메네이의 논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훗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임시정부가 붕괴하고 성직자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다.

이슬람공화당이 권력을 독점해 나가자, 이에 반발하는 무장 조직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특히 MEK는 이슬람공화당 간부들을 겨냥한 테러를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당의 중진으로서 항상 암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오히려 이를 "순교의 기회"라며 정면 돌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체제 인물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때, 그는 법학적 자문을 제공하며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즉결 처형은 훗날 인권 침해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그는 구 왕정 군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따라서 호메이니의 지시에 따라 기존 군대를 감시하고 보완할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기틀을 잡는 업무에 깊숙이 관여했다.

1979년 말, 호메이니는 하메네이를 테헤란 금요 예배의 '이맘(법주)'으로 임명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함의를 갖는다. 매주 금요일 수십만 명의 군중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국가의 공식적인 가이드라인을 전파하는 대변인이 되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특유의 달변과 논리적인 설교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이슬람만이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시기 그가 보여준 선동 능력과 카리스마는 훗날 그가 라프산자니나 베헤슈트 같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1979년의 하메네이는 '준비된 혁명가'였다. 그는 감옥에서 갈고닦은 투쟁심과 신학교에서 다진 이론적 무장을 결합하여, 혁명의 혼란을 '신정 체제의 공고화'로 바꾸어 놓았다. 당시 그는 서구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이란 내부에서는 이미 호메이니의 가장 신뢰받는 심복이자 차세대 리더로 각인되고 있었다.

3.9. 테헤란 금요 예배 법주[편집]

1980년 1월 18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당시 혁명 수비대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하메네이를 테헤란의 금요 예배 법주(Imam Juma)로 임명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보직 임명이 아니었다. 이슬람 공화국 체제에서 '테헤란 금요 예배'는 국가의 공식 가이드라인이 선포되는 정치적 제단이자,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스피커였다. 하메네이는 이 직책을 통해 대중 선동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포스트 호메이니 시대의 강력한 후계 후보군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본래 테헤란의 금요 예배는 혁명의 원로이자 민중적 인망이 높았던 마무드 탈레가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9월 탈레가니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후임이었던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가 쿰(Qom)의 학술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하면서 공석이 발생했다. 호메이니는 이 중책을 누구에게 맡길지 고심했다. 당시 테헤란은 좌익 세력, 자유주의파, 그리고 강경 이슬람주의자들이 뒤섞여 매일같이 시위와 유혈 충돌이 벌어지는 화약고였다.

호메이니의 선택은 40세의 젊은 하메네이였다. 호메이니는 임명장애서 그를 "웅변에 능하고, 학문적 깊이가 있으며, 혁명에 헌신적인 인물"로 평했다. 이는 하메네이가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이데올로그'로서 체제의 정당성을 설파할 적임자임을 공인받은 사건이었다.

하메네이의 설교 스타일은 이전의 노회한 성직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한 손에는 쿠란을, 다른 한 손에는 소총(주로 SVD 드라구노프나 AK-47)을 든 채 단상에 올랐다.[15]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문장 구성은 극도로 논리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주로 다음과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며 대중의 의식을 개조해 나갔다.

당시 진행 중이던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을 '제2의 혁명'으로 규정하며, 반미주의를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못 박았다.

자유주의 성향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대통령이나 와 같은 좌익 무장 단체를 '위선자'이자 '서구의 앞잡이'로 몰아세우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맘 호세인의 카르발라 투쟁을 현재의 혁명 상황과 치밀하게 연결해, 민중들에게 체제를 위한 희생을 종교적 의무로 각인시켰다.

하메네이는 금요 예배를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닌 '주간 정치 브리핑' 현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매주 금요일 테헤란 대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수십만 명의 군중 앞에서 그 주의 주요 국내외 이슈를 정리해 주었다. 정보가 제한적이었던 당시 시민들에게 하메네이의 설교는 세상을 보는 창(窓)이었으며, 여기서 나온 발언들은 곧바로 관영 매체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그는 '글로벌 오만(Global Arrogance)'이라는 용어를 대중화하며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서방 세계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담론 정치를 펼쳤다. 이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이란 외교 정책의 근간이 되는 '저항의 경제'와 '저항의 축' 사상의 원형이 되었다.

하메네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반대파의 증오도 깊어졌다. 1981년 6월 27일, 테헤란의 아부자르 사원에서 설교하던 중 녹음기 속에 숨겨진 폭탄이 터지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팔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장애를 입게 된다.[16]

3.10. 암살 미수와 신체적 장애[편집]

1981년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해로 기록된다. 혁명 직후의 혼란,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그리고 내부적인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실각하고 혁명 세력 내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반체제 무장 조직인 의 테러 공세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 혼돈의 중심에서 알리 하메네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결정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1981년 6월 27일 토요일, 당시 테헤란의 금요 예배 법주이자 혁명수비대의 핵심 지도자였던 알리 하메네이는 테헤란 남부의 '아부자르 사원(Abuzar Mosque)'을 방문했다. 그는 평소처럼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있었고, 연단 위에는 설교를 위한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석에 있던 한 청년이 카세트 녹음기 하나를 연단 위 하메네이 바로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보안 검색이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녹음기 안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녹음기가 놓인 직후, 하메네이가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사원 전체가 진동했습니다. 연단은 산산조각 났고, 하메네이는 뒤로 튕겨 나가며 피범벅이 된 채 쓰러졌습니다." - 당시 현장 목격자의 증언.

폭탄 내부에는 "이것은 신의 적들에 대한 보복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 조각이 들어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테러는 MEK의 소관으로 추정되었으며, 혁명의 핵심 브레인들을 제거하려는 조직적 음모의 시작이었다.

폭발 직후 하메네이는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폭탄 파편이 그의 가슴과 목, 그리고 오른팔에 집중적으로 박혔다. 특히 폐와 심장 근처를 관통한 파편은 치명적이었으며, 과다출혈로 인해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당시 의료진은 하메네이의 생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주요 동맥을 비껴간 파편 덕분에 간신히 지혈에 성공했고, 몇 차례의 대수술 끝에 그는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그의 오른팔 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이 사고로 하메네이는 평생 오른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신체적 장애를 입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바로 다음 날인 6월 28일, 이슬람공화당 본부에서 대규모 폭탄 테러(하프트 에 티르 테러)가 발생하여 당수였던 모함마드 베헤스티를 포함한 72명의 고위 인사가 몰살당했다는 점이다. 만약 하메네이가 전날 암살 미수로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 당 본부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고 이란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17]

하메네이는 병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불편한 오른팔을 훈장처럼 여기며 대중 앞에 섰다. 시아파 이슬람에서 '잔바즈(Janbaz, 신을 위해 몸을 바친 자)'라는 개념은 매우 숭고하게 여겨진다. 그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직후 발표한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보잘것없는 육신과 반쪽짜리 팔을 신께 바쳤습니다. 적들은 나를 죽이려 했으나, 신께서는 나에게 이슬람을 위해 더 헌신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메네이의 대중적 위상은 단순한 '정치 성직자'에서 '성스러운 희생자'로 격상되었다. 그의 마비된 오른팔은 그가 혁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는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되었고, 이는 훗날 그가 군부와 강경파의 절대적인 충성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도덕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장애는 그의 일상뿐만 아니라 통치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항상 왼쪽 손만을 사용하거나, 오른팔을 가사(Caba) 안으로 숨기는 독특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그에게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으며, 대중들은 그의 불편한 거동을 볼 때마다 혁명 초기의 고난을 상기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이후 하메네이는 보안과 신변 보호에 극도로 민감해졌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철저한 인적 장벽을 쌓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그가 '이너 서클'을 통해서만 국정을 운영하는 폐쇄적인 통치 구조를 만드는 심리적 배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적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이는 정보기관과 혁명수비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인 정치인에게 장애는 약점이 될 수 있지만, 신정 일치 국가인 이란에서 이는 '이맘 호세인의 고난을 계승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1981년 10월 2일, 이란 전역에서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하메네이는 95%라는 경이적인 득표율로 당선된다. 물론 이는 반대 세력이 철저히 탄압받거나 해외로 도피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라는 한계가 있었으나, 전쟁과 테러에 지친 이란 민중들이 '강력하고 안정적인 종교적 지도자'를 원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당선 소감에서 "이 자리는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이슬람 혁명의 가치를 수호하고 침략자 사담 후세인을 격퇴하기 위한 복무의 자리"임을 강조했다. 이로써 이란 역사상 최초의 '성직자 출신 대통령'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는 후대 대통령인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모하마드 하타미, 하산 로하니, 에브라힘 라이시로 이어지는 성직자 집권의 전례가 되었다.

하메네이가 취임했을 때 이란의 상황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MEK를 비롯한 반체제 조직과의 시가전이 계속되었고, 경제는 전쟁 비용으로 인해 파탄 직전이었다. 하메네이는 우선 파괴된 행정 조직을 복구하기 위해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혁명 동지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총리로 지명했다.[18]

이라크 군은 이란 남서부 호람샤르를 점령하고 있었고, 서방 국가들은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어 고립시키고 있었다. 하메네이는 대통령으로서 국방위원회를 주도하며 혁명수비대(IRGC)와 정규군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전선으로 결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충직한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모든 사안에서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하메네이는 비교적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행정력을 집행하려 했으나, 원리주의를 고수하는 총리 무사비와 자주 충돌했다. 이때마다 호메이니는 주로 무사비 총리의 손을 들어주며 하메네이의 권한을 견제하기도 했는데, 이는 하메네이에게 "최고지도자의 권한이 대통령보다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대통령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복을 입고 전선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야전 사령관'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이론가나 설교자가 아니라, 실제 국가 위기 상황에서 물리적 위협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지도자임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하메네이의 대통령 당선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혁명의 혼돈'을 끝내고 '체제의 제도화'로 접어드는 분수령이었다. 그는 암살 위협 속에서도 권력의 공백을 메웠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를 지탱해냈다. 하지만 이 시기 그가 보여준 강경한 반대파 탄압과 이슬람 원리주의 강화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 보여줄 통치 스타일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3.11. 미르 호세인 무사비와의 갈등[편집]

1981년 하메네이가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극치였다. 외부로는 이라크와의 전면전이 치열했고, 내부로는 의 테러로 주요 각료들이 폭사하는 대혼란기였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운명적인 라이벌이자 훗날 2009년 이란 녹색 운동의 주역이 되는 미르 호세인 무사비 총리와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된다.

당시 이란 헌법은 대통령이 국가 원수였지만, 실질적인 행정 집행권은 총리에게 집중된 구조였다. 하메네이는 대통령 당선 직후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보수적, 시장 친화적 이슬람 경제)을 공유할 인물을 총리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는 처음에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Ali Akbar Velayati)를 추천했으나, 당시 의회(마즐리스)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공화당 내 좌파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루홀라 호메이니의 중재와 좌파 세력의 압박으로 인해, 하메네이는 마음에 들지 않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비는 당시 '이슬람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경제 정책을 주장했으며, 국가가 모든 자원을 통제하여 전쟁 수행과 빈민 구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하메네이는 바자르(전통 상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사유 재산권 보호와 부분적인 시장 경제 도입을 주장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부터 '기름과 물'의 조합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정책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무사비 총리는 전시 상황임을 내세워 생필품 배급제와 수입 규제를 강화했는데, 하메네이는 이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를 정체시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맹비난했다.[19]

특히 외환 보유고 사용처와 정부 예산 편성권을 놓고 두 사람은 국무회의 때마다 설전을 벌였다. 무사비는 군수 산업과 공공 복지에 예산을 쏟아부으려 했고, 하메네이는 민간 경제 활성화를 위한 통로를 열어두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행정 집행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 수 없는 헌법적 한계에 절망감을 느꼈다.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뒤 '총리직 폐지'*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한 것은 이때의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5년 하메네이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뒤, 그는 다시 한번 무사비 총리를 교체하려 시도했다. "전쟁 중이라도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나와 뜻이 맞는 총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무사비는 이미 군부와 좌파 학생 세력, 그리고 무엇보다 호메이니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전쟁 중에 내각을 교체하는 것은 적(이라크)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무사비의 유임을 명령했다. 하메네이는 스승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회 투표 과정에서 하메네이의 측근인 보수파 의원 99명이 무사비 임명에 반표 또는 기표를 던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이란 정치사에서는 '99인의 반란'이라 부른다. 이는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절대 권위에 간접적으로 저항한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로 인해 하메네이는 한동안 호메이니의 눈밖에 나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무사비와의 갈등 속에서 하메네이의 대통령 임기 후반전은 사실상 '의전용 대통령'에 가까웠다. 실권은 무사비 총리와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에게 쏠려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 주로 전선을 시찰하거나 금요 예배에서 설교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쌓는 데 주력했으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나는 국가의 수반이지만, 시장의 설탕 가격 하나 내 마음대로 조정할 권한이 없다."

이러한 울분은 하메네이로 하여금 '권력은 반드시 한곳으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무사비와의 대립은 단순히 두 정치인의 성격 차이가 아니라,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초기의 '좌파 이슬람주의'와 '우파 성직자 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 거대한 이념 전쟁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히 1980년대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20여 년이 흐른 2009년, 최고지도자가 된 하메네이는 대선 후보로 복귀한 무사비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80년대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고, 하메네이는 무사비의 '녹색 운동'을 가차 없이 진압하며 그를 가택 연금에 처한다. 1980년대 총리에게 밀려 고개를 숙여야 했던 대통령 하메네이가, 2009년 최고지도자가 되어 총리 무사비의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린 셈이다.

3.12. 외교적 고립 탈피[편집]

이란-이라크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던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외교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세계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었고, 주변 아랍 국가들은 시아파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하며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이슬람권 내부에서도 이란은 고립된 섬과 같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메네이는 혁명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외교적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난제에 봉착했다.

하메네이는 서방의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 북쪽의 거대 이웃인 소련에 주목했다. 비록 이슬람 근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으나, '적의 적은 친구'라는 현실 정치가 작동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동쪽도 서쪽도 아닌(Neither East nor West)"이라는 슬로건을 유지하면서도, 소련과의 경제 및 군사적 협력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며 소련의 대외 정책이 유연해지자 하메네이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소련이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억제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카스피해를 통한 무역로 확보에 주력했다. 이는 훗날 호메이니가 고르바초프에게 "공산주의는 박물관으로 갈 것"이라는 유명한 편지를 보내는 종교적 오만함과는 별개로, 하메네이의 행정부가 실질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방과 동구권 사이에서 갈등하던 하메네이는 소위 '제3세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비동맹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방문했다.

하메네이는 리비아, 알제리, 앙골라 등을 방문하며 반제국주의 전선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는 연설마다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를 강조하며, 이란 혁명이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라 전 세계 약소국들의 해방 모델임을 역설했다.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에도 공을 들였다. 비록 파키스탄이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나, 하메네이는 종교적 유대감을 강조하며 국경 안보와 경제 교류를 유지했다. 이는 이란이 동쪽으로의 퇴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전쟁 중 무기 금수 조치로 고통받던 이란에게 중국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메네이는 중국과의 외교 채널을 가동하여 '실크로드의 현대적 복원'이라는 명분 아래 군사 협력을 끌어냈다. 당시 중국은 이란에 실크웜 미사일 등 주요 중화기를 공급했으며, 이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 해군 및 이라크 유조선과 맞설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되었다.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중국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높게 평가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친중 노선을 유지하는 심리적 기반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의 막후 접촉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이다. 레건 행정부는 레바논 내 미국인 인질 석방을 대가로 이란에 무기를 비밀리에 판매했는데, 하메네이는 이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 보고를 받으며 실리적 판단을 내렸다.

비록 이 사건은 훗날 이란 내 강경파들에 의해 "미국과 내통했다"는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으나, 하메네이는 전쟁 승리를 위해 '악마의 무기'라도 사와야 한다는 절박함을 대변했다. 그는 겉으로는 "미국 타도"를 외치면서도,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고도의 정보전과 이면 계약을 주도할 수 있는 냉철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하메네이의 이러한 노력은 이란이 완전히 고립되어 무너지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는 명확했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버티고 있는 한, 이란의 외교는 언제나 '종교적 원칙'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서방 언론은 하메네이를 "호메이니의 입술" 정도로 치부했고, 그의 외교적 수사(Rhetoric)는 종종 이란 내 강경파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국제 사회에서 '명분'과 '실리'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몸소 체험했으며, 특히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목격하며 강력한 '반서방 불신론'을 체계화했다. 이는 훗날 그가 최고지도자가 되어 핵 협상이나 대미 정책을 결정할 때 "미국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거듭 강조하는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존중하는 자들과 손을 잡을 뿐이다. 제국주의의 포위망은 우리의 신앙으로 뚫릴 것이다." - 1986년 테헤란 외교관 회의 연설 중.

3.13. 호메이니의 서거와 2대 라흐바르[편집]

1989년 6월 3일 밤 10시 20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의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국가 지도자의 죽음을 넘어, 신정 일치 국가인 이란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초대형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메네이에게 이 시기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을 잃은 슬픔과 동시에, 거대한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운명적 시험대였다.

호메이니의 건강 이상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80대 고령인 그가 소화기 계통의 지병과 심장 질환으로 쇠약해지자, 이란 지도부 내부에서는 '포스트 호메이니'에 대한 논의가 수면 아래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원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가 실각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몬타제리는 혁명 정부의 인권 탄압과 과도한 보수성을 비판하다가 호메이니의 눈 밖에 났고, 서거 불과 몇 달 전인 1989년 3월에 공식적으로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최고권력자의 임종을 앞두고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메네이는 라프산자니와 함께 이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6월 4일 아침, 국영 방송을 통해 호메이니의 서거 소식이 공식 발표되자 이란 전역은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몰려나와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일부 지지자들은 실신하거나 자해를 할 정도로 광기 어린 슬픔을 보였다.[20]

하메네이는 서거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의 심장이 멈췄고, 우리 시대의 등불이 꺼졌다"며 극도의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헌법에 규정된 최고지도자의 공백은 국가 마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장 이튿날 아침, 최고지도자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가 긴급 소집되었다.

1989년 6월 4일 오전, 80여 명의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가 비공개로 열렸다. 초기 논의는 1인이 아닌 3인 또는 5인의 '지도 위원회' 체제로 가자는 쪽이 우세했다. 하메네이 본인조차도 단독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종교적 서열(당시 호잣톨에슬람[21])이 낮다는 점을 들어 고사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였다. 라프산자니는 회의장에서 "호메이니 전하께서 생전에 '하메네이 정도면 지도자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이른바 '구두 유언'을 공개했다.[22]

하메네이는 회의장에서 발언대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있습니다. 나보다 학식이 깊은 아야톨라들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내리는 종교적 판결(파투아)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라프산자니와 혁명수비대, 그리고 보수파 세력은 강력하게 그를 밀어붙였다. 결국 투표 결과, 재석 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알리 하메네이가 제2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는 이란 역사상 가장 빠른 권력 승계 중 하나로 기록된다.

하메네이의 선출은 즉각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란 헌법상 최고지도자는 '마르자 타클리드'(최고의 종교적 모범) 수준의 권위를 가진 아야톨라여야 했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정치적 경력은 화려했으나 학문적으로는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란 지도부는 속전속결로 움직였다.

최고지도자의 자격 요건에서 '최고 종교 권위자' 조항을 삭제하고 '정치적 식견과 통치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진행했다.

하메네이가 선출되자마자 관영 매체들은 그를 '아야톨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적 수행을 통한 승급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한 '특진'에 가까웠다.

이 사건은 이란 내 전통적인 종교 학자들과 하메네이 사이의 깊은 앙금을 남겼다. 쿰의 원로 학자들은 하메네이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는 훗날 하메네이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보 기관과 혁명수비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6월 5일,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친필 유언장을 대중 앞에서 낭독했다. 유언장에는 미국을 '대사탄'으로 규정하고,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며 외세에 타협하지 말라는 강경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하메네이는 이 유언장을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고, 자신이 호메이니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로써 이란은 1인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혁명 1세대'의 시대가 저물고, 보다 조직적이고 관료화된 '하메네이 체제'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메네이는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종교적 정당성을 메우기 위해 더욱 철저한 반서방 노선과 내부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3.14. 최고지도자 권한 강화와 절대 권력의 제도화[편집]

1989년은 이란 현대사에서 단순히 지도자가 바뀐 해가 아니라, '신정 체제 2.0'이 설계된 해이다. 루홀라 호메이니의 서거 직전과 직후에 긴박하게 진행된 헌법 개정은, 당시 종교적 권위(마르자 에 타클리드)가 부족했던 하메네이가 어떻게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고 서방의 '독재' 비판 속에서도 30년 넘는 장기 집권을 가능케 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열쇠다.

본래 1979년 제정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최고지도자는 반드시 '마르자 에 타클리드'(Marja-e Taqlid, 에뮬레이션의 원천)라 불리는 최고위급 신학자여야 했다. 이는 시아파 신자들이 종교적으로 따를 수 있는 '살아있는 법전'과 같은 권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세인 알리 몬타제리가 숙청되면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하메네이는 종교적 위계상 '호자톨레슬람'(Hojjatoleslam)에 불과했으며, 최고위 등급인 '아야톨라'나 '마르자'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에 호메이니는 사망 전인 1989년 4월, 헌법 개정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핵심은 "최고지도자의 자격에서 '마르자' 요건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즉, 종교적 깊이보다는 '정치적 식견'과 '통치 능력'을 우선시하도록 법적 토대를 바꾼 것이다. 이는 하메네이라는 특정 인물을 최고지도자로 안착시키기 위한 이른바 '맞춤형 개헌'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23]

개정 헌법의 가장 무시무시한 지점은 제57조와 제110조의 변화였다. 기존 헌법에서도 최고지도자의 권한은 막강했지만, 1989년 개헌을 통해 '벨라야테 모틀라케예 파키'(Velayat-e Motlaqe-ye Faqih), 즉 '절대적 법학자 통치론'이 명문화되었다.

"입법, 행정, 사법부의 권력은 최고지도자의 감독하에 운영된다"는 문구에 '절대적(Absolute)'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이는 최고지도자가 헌법에 명시된 권한 외에도 국가의 안위나 이슬람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개헌을 통해 최고지도자는 이란군혁명수비대의 총사령관직은 물론, 사법부 수장 임명권, 국영 방송국(IRIB) 사장 임명권, 그리고 주요 종교 재단(Bonyad)의 관리권까지 완벽하게 손에 넣게 되었다. 사실상 이란 내의 '돈과 칼과 펜'을 모두 거머쥐게 된 셈이다.

1989년 개헌의 또 다른 특징은 '총리직 폐지'였다. 이전까지 이란은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이원집정부제적 요소를 띄고 있었으나, 하메네이와 당시 총리였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체제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개헌을 통해 총리직이 사라지고 그 권한은 대통령에게 이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대통령의 권한이 강해진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행정부 내의 견제 세력을 없애는 대신, 대통령을 최고지도자의 직속 '집행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구조적 장치였기 때문이다. 이제 최고지도자는 행정부 내부의 복잡한 절차에 간섭받지 않고,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국가 운영 전반에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마즐리스)와 헌법수호위원회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로 존재했던 국정조정위원회가 헌법 기관으로 격상되었다. 이 기구의 구성원은 전적으로 최고지도자가 임명한다. 이는 최고지도자가 입법 과정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중재 도구'를 공식적으로 보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위원회는 '국가 일반 정책의 결정'이라는 막강한 자문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하메네이가 장기적인 국가 전략(예: 핵 개발, 지역 패권 전략 등)을 수립할 때 관료 조직을 우회하여 자신의 측근들과 직접 소통하며 정책을 수립하는 루트가 되었다.

이 개헌안은 1989년 7월 28일, 국민투표를 통해 97%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수치는 혁명 직후의 열기와 호메이니 서거에 따른 애도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었으며, 실제 내용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은 부족했다는 지적이 많다.[24]

특히 하메네이의 라이벌이었던 몬타제리는 "지도자의 자격을 낮추고 권한만 늘리는 것은 이슬람 법학의 기본 원칙에도 어긋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메네이는 이 시기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종교적 정당성 결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기구를 동원해 자신을 '아야톨라 알 우즈마'(Grand Ayatollah)로 격상시키는 대대적인 선전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헌법 개정은 알리 하메네이라는 인물을 단순한 호메이니의 계승자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정 체제의 화신'으로 만든 제도적 대관식이었다. 이 촘촘한 그물망 같은 권력 구조 덕분에 그는 이후 수많은 시위와 경제 제재, 내부 파벌 싸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3.15. 연쇄 살인 사건과 언론 탄압[편집]

1990년대 후반, 모하마드 하타미의 당선으로 촉발된 '이란의 봄'은 하메네이와 보수 기득권층에게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시민 사회의 분출과 표현의 자유 요구가 거세지자, 하메네이는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이면에서는 정보기관과 사법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동해 개혁 동력을 물리적으로 거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발생한 '지식인 연쇄 살인 사건(Chain Murders of Iran)'은 하메네이 체제의 잔혹성과 생존 본능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1998년 말, 테헤란에서는 기괴하고도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개혁파 성향의 작가, 정치 활동가, 지식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이란 국가당의 지도자였던 다리우시 포루하르와 그의 아내 파르바네 포루하르는 테헤란 자택에서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이는 단순 강도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경고'였다.

함마드 모크타리, 모함마드 자파르 푸얀데 등 비판적 지식인들이 잇따라 실종된 뒤 교외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에 보수 언론은 이를 "외세의 이간질" 혹은 "개인적 원한"으로 치부하려 했으나, 하타미 정부가 구성한 특별 조사위원회의 수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범인들이 다름 아닌 이란 정보부(MOIS) 소속의 요원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국가 기관이 최고지도자의 체제 수호를 명분으로 자국민을 학살한 국가 테러리즘이었다.

사건의 배후가 정보부임이 드러나자 민심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하메네이는 위기를 직감하고 신속하게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이 사건을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범죄"라고 비난하며 엄정 수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이었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보부 고위 간부 사에드 아마미(Saeed Emami)는 감옥에서 조사를 받던 중 제모제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석연치 않은 발표와 함께 입을 다물게 되었다.[ 당시 이란 여론은 아마미가 윗선(하메네이 또는 보수 고위층)의 개입을 발설할 것을 우려한 세력에 의해 '당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메네이는 이 사건을 정보부 내 '불순 분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하며 본인의 책임론을 차단하는 동시에, 오히려 정보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연쇄 살인 사건 이후 개혁파 신문들이 정보부의 비리를 파헤치며 공세를 높이자, 하메네이는 2000년 4월 이른바 '언론의 대도살'이라 불리는 초강수를 둔다. 그는 금요 예배 설교에서 일부 언론을 향해 "적들의 기지(Basics of the Enemy)"라고 규정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어떤 신문들은 이슬람 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외세의 이념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사법부는 이러한 독버섯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 2000년 4월, 하메네이의 설교 중.

최고지도자의 가이드라인이 떨어지자마자 보수파가 장악한 사법부는 단 몇 주 만에 20개 이상의 개혁파 일간지와 잡지를 강제 폐간시켰다. '자메(Jame'eh)', '투스(Tous)', '네샤트(Neshat)' 등 하타미 정부의 입 역할을 하던 매체들이 단칼에 사라졌고, 수십 명의 기자가 투옥되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처분이 아니라, 개혁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공론장' 자체를 파괴해 버린 사건이었다.

1999년 7월, 개혁파 신문 '사브(Salam)'의 폐간에 항의하며 시작된 테헤란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하메네이 통치기 최대의 위기 중 하나였다. 경찰과 사복 체제 수호 부대인 안사르-에 헤즈볼라가 기숙사를 습격해 학생들을 창밖으로 던지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메네이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공포'와 '통합'이라는 양면전술을 구사했다. 그는 시위대를 "외세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몰아세우는 한편, 혁명수비대 장성들을 동원해 하타미 대통령에게 "시위를 진압하지 않으면 군이 직접 나서겠다"는 최후통첩성 서한을 보내게 했다. 결국 하타미가 굴복하며 시위는 유혈 진압되었고, 하메네이는 이 사건을 통해 "결국 결정권은 총구를 쥔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고히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하메네이는 이른바 '나르드(Narm)', 즉 연성 전쟁(Soft War) 이론을 체계화한다. 그는 서구 열강이 군사적 침공 대신 문화, 언론, 인터넷을 통해 이슬람 가치관을 붕괴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이후 20년 동안 이란 내 모든 반대파 탄압의 '만능 치트키'가 되었다. 비판적인 기사는 '문화적 침투'가 되었고, 인권 운동가는 '서구의 스파이'가 되었으며, 인터넷 검열은 '도덕적 방어벽'으로 포장되었다. 하메네이는 이 피의 숙청과 언론 탄압을 통해, 하타미라는 '개혁의 파도'를 방파제처럼 막아내는 데 성공하며 절대 권력자로의 지위를 굳혔다.

3.16. 서구 문화에 대한 '소프트 워(Soft War)' 선포[편집]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알리 하메네이의 통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나토(NATO)의 문화적 침공'과 '소프트 워(Soft War, Jang-e Narm)'였다. 그는 소련의 붕괴를 목격하며 군사적 충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부로부터의 가치관 붕괴임을 직시했다. 하메네이는 서구의 영화, 음악, 위성 방송, 그리고 초기 인터넷이 이란 젊은 세대의 이슬람적 정체성을 파괴하고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공포에 가까운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1992년 공식 연설에서 '문화적 공습(Cultural Onslaught)'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며 국가적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는 서방 세계가 미사일 대신 '할리우드'와 '팝 음악'을 앞세워 이란의 가정집 안방으로 침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적들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기도하는 대신 춤을 추고, 순교의 가치 대신 쾌락을 쫓기를 원한다. 이것은 총칼 없는 전쟁이며,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총칼로 진 전쟁보다 훨씬 더 처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 하메네이의 연설 중 발췌.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보수주의적 태도를 넘어 정치적 생존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그는 서구 문화의 유입이 필연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화 요구'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차단하기 위해 교육과 미디어 전반에 걸쳐 강력한 검열 체계를 구축했다.

1990년대 중반, 이란 전역에는 서구 방송을 수신하려는 위성 안테나가 우후죽순으로 퍼져 나갔다. 하메네이는 이를 '악마의 뿔'이라 규정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지시했다. 경찰과 바시지 민병대가 아파트 옥상을 급습하여 안테나를 파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25]

하메네이는 단순히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영 방송인 IRIB(Islamic Republic of Iran Broadcasting)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이슬람 가치를 담은 대안 콘텐츠를 생산하도록 독려했다. 그는 직접 드라마 제작 현장을 방문하거나 작가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이슬람 역사를 소재로 한 대작을 만들어 서구 영화에 대항하라"고 주문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란 영화의 황금기 이면에는, 이러한 체제 수호적 목적의 지원과 검열이라는 양면성이 존재했다.

하메네이는 대학을 '소프트 워의 전선'으로 간주했다. 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서구의 철학(특히 칸트, 헤겔, 마르크스주의 등)이 이슬람적 가치관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학교수들에게 이슬람 중심의 학문 체계를 세울 것을 강요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은 강단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되었다.

이 시기 하메네이가 주도한 '이슬람 학문의 토착화' 운동은 교육 과정 전반을 뒤흔들었다. 사회학은 이슬람 사회학으로, 심리학은 이슬람 심리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는 지식인 계층의 대규모 해외 유출(Brain Drain)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았으나, 하메네이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지식인은 필요 없다"는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1997년 제7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하메네이의 통치 인생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변곡점이었다. 당시 최고지도자와 보수파 기득권층이 밀어주던 후보는 국회의장이었던 알리 아크바르 나테그누리였다. 관영 매체와 성직자 집단은 사실상 나테그누리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으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온건 개혁파 후보 모하마드 하타미가 69%라는 압도적인 투표율로 당선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란에서는 '2nd of Khordad(이란력 3월 2일)'이라 부르며, 하메네이에게는 권위의 위기를, 민중에게는 변화의 희망을 상징하게 된다. 하메네이는 겉으로는 "이슬람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축하를 건넸지만, 속으로는 체제의 근간인 벨라야테 파키가 투표라는 세속적 절차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타미가 내건 '시민사회(Madineh-tan-Nabi)', '법치', '문화적 다원주의'는 하메네이가 고수해온 원리주의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하타미의 집권 초기, 하메네이는 전략적 인내를 선택했다. 하타미의 대중적 인기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정면충돌은 자칫 체제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하타미의 손발을 묶기 위한 정교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란 헌법상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지만, 군사, 사법, 국영 방송, 그리고 최종 의결권은 모두 최고지도자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점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하메네이는 자신의 측근인 강경파 성직자들을 사법부 수장에 앉혀, 하타미를 지지하는 언론사와 시민단체를 '이슬람 가치 훼손'이라는 명목으로 폐간시키고 활동가를 구속했다.

공식적인 국정 운영은 하타미 내각이 맡았으나, 실제 예산과 권력의 핵심은 하메네이 직속의 '최고지도자실(Beyt-e Rahbari)'과 혁명수비대가 통제했다.

하메네이는 하타미의 '이슬람 민주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를 이란에 이식하려는 '부드러운 전복(Soft Overthrow)'의 시도라고 규정했다. 그는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이슬람의 틀을 벗어난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배교와 다름없다"고 경고하며 보수 결집을 유도했다.

하메네이와 개혁파의 갈등이 폭발한 결정적 사건은 1999년 7월에 발생한 '테헤란 대학교 기숙사 습격 사건'이다. 개혁 성향의 신문인 <살람(Salam)>지가 폐간되자 이에 항의하던 학생들을 경찰과 보수 민병대인 바시지가 잔혹하게 진압하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1979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당시 학생들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메네이의 사진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하메네이는 일시적으로 당황했으나, 곧바로 강력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이 시위는 외세(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규정했고, 며칠 뒤 관제 시위를 조직하여 수십만 명의 보수 지지자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하타미 대통령은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군권이 없는 대통령의 한계를 절감하며 결국 시위대에게 귀가를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하메네이가 '거리의 정치'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사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타미의 8년 임기는 하메네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하타미는 끊임없이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하메네이는 사법권과 거부권(Guardian Council)을 동원해 국회에서 통과된 모든 개혁 법안을 무력화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하메네이는 이 개념을 더욱 정교화하여 '소프트 워(Soft War)'라는 공식 독트린을 완성했다. 그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미국의 심리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2009년 이란 녹색 운동 당시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시위 조직의 핵심 도구로 쓰이자, 그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는 사이버 사령부를 창설하고 '할랄 인터넷(National Information Network)' 구축을 지시했다. 이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국가가 통제하는 폐쇄형 네트워크 안에서만 정보를 유통하려는 시도였다. 하메네이에게 디지털 공간은 소통의 장이 아니라, 적의 침투를 막아내야 할 '사이버 영토'였다.

문화적 침투 방어의 가장 시각적인 지점은 여성의 복장이었다. 하메네이는 히잡을 단순히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혁명의 깃발'이자 '반서방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하는 것을 '문화적 항복'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단속하기 위해 도덕 경찰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이러한 강경 노선은 이란 사회 내부에 거대한 긴장을 조성했다. 도시의 젊은 층은 서구식 패션과 문화를 향유하려 했고, 하메네이가 지휘하는 공권력은 이를 억누르려 했다. 이 시기에 쌓인 불만은 훗날 마흐사 아미니 시위와 같은 거대한 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하메네이는 이란이 경제적으로는 개방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서구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는 이란 현대사에서 보수주의 세력을 결집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이란 대중의 실제 삶과 통치 이념 사이의 괴리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7. 9.11 테러와 악의 축[편집]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사건은 테헤란의 최고지도자 관저에도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다. 알리 하메네이에게 9.11 테러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이란의 외교 노선을 극단적인 반미(反美)와 핵무장 지상주의로 급선회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챕터에서는 하메네이가 테러 직후 보인 이례적인 반응부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 이후 굳어진 그의 대미 불신론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9.11 테러 발생 직후, 하메네이는 평소의 강경한 어조와 달리 민간인 희생에 대해 공식적인 유감을 표명했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었다.[26] 하메네이는 "이슬람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를 원천적으로 금지한다"며 알카이다탈레반의 근본주의를 비판했다.

사실 하메네이에게 탈레반은 주적(主敵)에 가까웠다. 1998년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이란 외교관들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하메네이는 전면전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했을 때, 하메네이는 물밑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허용했다. 이른바 '본(Bonn) 회의' 과정에서 이란은 북부동맹을 지원하며 미국의 아프간 점령을 도왔다. 당시 하메네이는 이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 혹은 적어도 '체제 보장'이라는 반대급부를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하메네이의 기대는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 한 방으로 산산조각 났다. 부시는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아프간에서 협력했던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은 이 발언은 하메네이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미국은 결코 믿을 수 없는 늑대와 같다. 그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물어뜯는 자들이다." - 2002년 하메네이의 설교 중.

이 사건은 하메네이의 대미관을 '조건부 협력'에서 '절대적 불신'으로 완전히 고착화시켰다. 그는 개혁파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가 추진하던 '문명 간의 대화'가 결국 실패했음을 선언하고, 보수 강경파를 결집하기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미국이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를 침공할 것이며, 그 최종 목적지는 결국 테헤란(이란 체제 전복)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악의 축' 발언 이후 하메네이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미국을 막을 수 없으며, 비대칭 전력인 핵만이 체제를 보장한다"는 논리였다. 2002년 8월, 이란의 반정부 단체에 의해 나탄즈(Natanz)의 비밀 농축 시설이 폭로되면서 이른바 '1차 핵 위기'가 발발했다.

하메네이는 대외적으로는 "우리는 종교적 신념(파투아)에 따라 대량살상무기를 원치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원심분리기 가동과 우라늄 농축 기술 확보를 독려했다.[27] 그는 핵 기술을 국가의 자존심이자 근대화의 상징으로 포장하여 민족주의 열기를 고취시켰다. 이는 훗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라는 강경파 인물이 부상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하메네이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안겨주었다. 숙적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은 환영할 일이었으나, 이란의 동쪽(아프간)과 서쪽(이라크) 모두에 미군 기지가 들어서는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었다.

하메네이는 여기서 고도의 지연 전술과 대리전 전략을 구사했다.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하여 미군을 수렁에 빠뜨리는 한편, 이라크 정치권에 친이란 인사를 심어 미국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중동 전역을 '미국에 저항하는 전장'으로 변모시켰다.

9.11 테러부터 악의 축 선언에 이르는 이 짧은 기간은 하메네이의 통치 철학을 '생존형 강경주의'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나 개방이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소프트 워(Soft War)'의 일환이라고 규정했으며, 군사력과 핵 억지력만이 이슬람 혁명의 유산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3.18. 포퓰리즘 보수의 등장과 하메네이의 전략적 지지[편집]

2005년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중요한 선거 중 하나였다. 모하마드 하타미의 8년 개혁 정권이 서구와의 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악의 축' 발언이라는 냉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자, 이란 민심은 실망감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찼다. 이때 하메네이의 시선은 세련된 양복을 입은 테크노크라트나 온건한 성직자가 아닌, 낡은 점퍼를 입고 길거리를 누비는 한 사내에게 머물게 된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당시 테헤란 시장이었으나 중앙 정치권에서는 변방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를 '국민의 종'이라 칭하며, 이란 혁명 이후 권력을 독점해온 '성직자 귀족층'과 '부패한 기득권'을 정조준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조준한 기득권층에 하메네이의 오랜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라프산자니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메네이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마디네자드의 포퓰리즘 노선을 방치 혹은 장려했다. 이는 하메네이가 직면했던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 첫째, 개혁파의 궤멸: 하타미로 대변되는 시민사회 중심의 개혁 담론을 '배부른 자들의 유희'로 몰아세우고, 하층민의 경제적 결핍을 자극해 지지 기반을 뒤흔드는 것.
  • 둘째, 원로 세력의 견제: 혁명 1세대인 라프산자니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하메네이에게,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적 불도저'는 구악을 일소할 유용한 도구였다.

2005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아마디네자드가 라프산자니를 꺾고 당선되자, 하메네이는 이례적으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을 "이슬람 혁명의 가치로의 회귀"라고 선언했다. 하메네이가 보기에 아마디네자드는 서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단 있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시를 행동으로 옮길 '실행가'였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에게 파격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마디네자드가 국제무대에서 홀로코스트 부인 발언을 쏟아내고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극언을 퍼부을 때도, 하메네이는 이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당당한 목소리"라며 두둔했다. 이는 하메네이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외교적 부담이 큰 발언들을 대리인을 통해 배설함으로써, 이슬람권 내부의 강경파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28]

아마디네자드 1기 내내 하메네이는 경제 정책에서도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고유가 덕분에 이란으로 흘러 들어온 막대한 오일머니는 아마디네자드의 지방 순회사업과 저소득층 보조금 지급에 투입되었다. 하메네이는 이를 '이슬람적 정의의 실현'이라 칭송했으나, 실상은 체계적인 경제 발전 전략 없는 선심성 예산 집행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묵인했는데, 바로 의 경제 장악이다. 아마디네자드는 민간 기업들이 하던 국가 기간산업과 건설 프로젝트를 대거 혁명수비대 산하 기업(카탐 알 안비아 등)에 넘겨주었다. 이는 하메네이에게 충성하는 군부 엘리트들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란 경제는 점차 '군부 독점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하메네이와 아마디네자드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권력의 맛을 보자 점차 자신을 '숨겨진 이맘(마흐디)'과 직접 소통하는 인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최고지도자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행보였다. 또한 아마디네자드가 자신의 측근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에이를 중용하며 '성직자 없는 이슬람 주의(이란 민족주의)'를 내세우자, 하메네이는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는 2009년 재선을 앞둔 아마디네자드를 버릴 수 없었다. 이미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가 구축한 '신성한 보수 연합'의 얼굴이 되어 있었고, 그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메네이 자신의 안목과 권위를 부정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 결합'은 결국 이란 현대사 최악의 비극인 2009년 이란 녹색 운동이라는 폭발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아마디네자드의 등장은 하메네이 통치기에 있어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개혁파를 초토화하고 보수 지지층을 열광시켰으나, 동시에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이란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찢어놓았다.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라는 괴물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그 대가로 이란의 국가 시스템은 정상적인 관료 정치에서 벗어나 군부와 포퓰리즘이 결탁한 기형적인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3.19. 2009년 이란 녹색 운동[편집]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알리 하메네이가 직면한 가장 거대하고 직접적인 내부의 위협을 꼽으라면 단연 2009년 6월의 대선 부정 의혹 사건과 그로 촉발된 '녹색 운동'일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선거 불복을 넘어, 하메네이가 구축해온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과 '신정 체제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지점이었다.

2009년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의 강력한 신임 아래 포퓰리즘 정책과 반서방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경제 실책과 고립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도시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에 맞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하메네이의 과거 정적(政敵)이자 혁명 초기 총리를 지냈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였다.

무사비는 상징색으로 '초록색'을 채택하며 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세력을 결집시켰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란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으며, 하메네이는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속으로는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메네이 입장에서 무사비의 귀환은 곧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혁파의 재집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선거 당일 저녁, 투표함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국영 통신사는 아마디네자드가 62.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무사비의 득표율은 고작 33.7%에 불과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무사비의 고향인 아제르바이잔 주에서도 아마디네자드가 압승했다는 통계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외쳤다. "내 표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my vote?)" 이것이 바로 녹색 운동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였으나, 정부가 인터넷을 차단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구호는 점차 급진적으로 변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테헤란의 밤하늘을 메우기 시작했고, 그 '독재자'의 대상은 아마디네자드가 아닌, 그 뒤에 선 알리 하메네이를 향하고 있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하메네이는 6월 19일 테헤란 대학교에서 열린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이 설교는 하메네이 통치 스타일의 정수이자, 가장 잔혹한 선언 중 하나로 기록된다.
"거리의 소요 사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유혈 사태의 책임은 시위 지도부에게 있을 것입니다." - 2009년 6월 19일 하메네이의 설교 중.

이 선언은 사실상 와 민병대 조직인 바시지에게 '무력 진압 승인'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메네이는 시위대와의 타협이 곧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느꼈고, 이를 '외세(특히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벨벳 혁명 시도'라고 규정하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하메네이의 가이드라인이 내려진 직후, 진압은 잔혹해졌다. 6월 20일, 젊은 여성 네다 아가-솔탄이 거리에서 바시지 민병대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죽음은 녹색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나, 동시에 하메네이 정권이 얼마나 단호하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공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당시 개혁파 정치인, 기자, 학생 운동가들이 수천 명 단위로 체포되었다.

악명 높은 에빈 교도소와 카흐리자크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과 성범죄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쇼 재판'을 통해 시위 주동자들이 외세와 결탁했다는 자백을 강요하고 이를 국영 방송으로 송출했다.

결국 2009년 말에 이르러 녹색 운동은 물리적 진압에 의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무사비와 카루비 등 지도부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하메네이는 권좌를 지켜냈다. 하지만 이 승리는 흉터뿐인 영광이었다.

과거 '민중의 지도자'였던 하메네이는 이제 '총칼로 권력을 유지하는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재선 이후 하메네이의 통제를 벗어나려 시도하며 오히려 하메네이의 골칫덩이가 되었고, 이는 훗날 보수 진영 내의 극심한 분열로 이어진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 대화 분위기는 이 진압 사태로 인해 급격히 냉각되었으며, 이는 강력한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되었다.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메네이는 2009년의 위기를 소련의 붕괴 과정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서방의 요구에 굴복하여 개혁(페레스토로이카)을 단행했기 때문에 제국이 무너졌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단 한 걸음의 양보가 전체 댐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유혈 진압을 정당화했다. 이는 훗날 2019년 유가 인상 시위와 2022년 히잡 시위에서도 반복되는 하메네이 특유의 '철권 통치 알고리즘'으로 굳어지게 된다.

3.20. 역외 영향력의 확대와 비대칭 전략[편집]

하메네이의 통치기 중 2010년대는 그가 구상해온 '이슬람 혁명의 수출'이 가장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로 가시화된 시기이다. 이른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جبهه مقاومت)'이라 불리는 이 네트워크는 이란을 중심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팔레스타인을 잇는 거대한 시아파 및 반서방 벨트를 의미한다. 하메네이는 이를 통해 미군과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적대 세력에 맞서 직접적인 전면전 대신 '대리전(Proxy War)'과 '비대칭 전력'을 활용한 정교한 체스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메네이가 주창하는 '저항'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다.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이슬람 세계를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있어 저항은 이슬람의 정체성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지하드)이자, 강대국의 패권주의(헤게모니)에 맞서 약소국들이 연대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하메네이는 이스라엘을 '암세포'로 지칭하며, 무력 저항만이 팔레스타인을 해방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하메네이가 가장 공을 들인 조직은 단연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이다. 1980년대 창설 당시부터 이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시대에 들어 단순한 민병대를 넘어 '국가 안의 국가'로 성장했다.

하메네이는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와 부자 관계에 가까운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하메네이는 매년 수억 달러의 자금과 정밀 유도 미사일 기술을 헤즈볼라에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헤즈볼라는 이란의 대외 정책을 대행하는 강력한 '창' 역할을 수행했다.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에서 헤즈볼라가 선전하자, 하메네이는 이를 "이슬람의 승리"라 칭송하며 자신의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했다.[29]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자, 하메네이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이란의 주적이었던 후세인이 사라진 자리에 하메네이는 친이란 성향의 시아파 정치 세력과 민병대를 대거 심어 놓았다.

특히 2014년 이슬람 국가(IS)가 발흥하자, 하메네이는 "성지를 수호하라"는 칙령에 가까운 지침을 내렸고, 이는 인민동원군(PMF)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하메네이는 자신의 오른팔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 현지로 보내 이들 민병대를 직접 지휘하게 했으며, 사실상 이라크의 군사 및 정치적 실권을 이란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이는 이란 본토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시야파 초승달(Shia Crescent)'의 허리를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하메네이의 전략은 아라비아반도 남단 예멘까지 뻗어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턱밑에 위치한 후티(Houthi)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이란은 숙적인 사우디를 견제하는 동시에 전 세계 물류의 동맥인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하메네이는 공식적으로는 후티에 대한 무기 지원을 부인하고 있으나, 후티가 사용하는 탄도 미사일과 드론의 기술적 뿌리가 이란의 '샤하브' 시리즈라는 것은 국제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30]

이러한 하메네이의 역외 팽창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이란 내부 경제가 국제 제재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메네이가 매년 수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해외 대리 세력에 쏟아붓는 것에 대해 이란 젊은 층의 불만이 폭발했다.

하메네이의 시아파 벨트 강화는 수니파 국가들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했으며, 이는 중동 전체를 끝없는 종교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저항의 축을 강화할수록 서방 국가들의 제재 수위는 높아졌고, 이는 하메네이가 통치하는 이란의 정상적인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저항의 축'은 하메네이라는 인물이 가진 독특한 세계관 "서구 세력은 믿을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무장한 동맹만이 생존을 보장한다"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이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로 '늪지대 전략'을 구사하며, 본인의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로 삼고 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닌, 실질적인 군사 정보와 자금 흐름을 통제하는 '중동의 대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영향력의 이면에는 굶주리는 이란 국민과 파괴된 인접국들의 비극이 교차하고 있었다는 점이 하메네이 통치의 가장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3.21.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편집]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의 불길이 중동 전역을 휩쓸었을 때, 테헤란의 최고지도자 관저에 머물던 알리 하메네이는 이를 단순한 민주화 운동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이슬람의 각성(Islamic Awakening)'이라 명명하며, 서구의 꼭두각시였던 독재자들이 타도되고 이슬람 가치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불길이 이란의 핵심 혈맹인 시리아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으로 번지자, 하메네이의 전략적 판단은 '지지'에서 '생존을 위한 개입'으로 급격히 선회하게 된다.

초기 하메네이는 이집트호스니 무바라크가 축출될 때만 해도 이를 1979년 이란 혁명의 연장선상으로 치켜세웠다. 그는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아랍 민중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일어났다"고 찬사했다. 하지만 시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논조는 180도 달라졌다. 하메네이는 시리아의 혼란을 "시온주의자(이스라엘)와 미 제국주의가 조작한 가짜 혁명"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이중잣대라는 비판 속에서도 하메네이가 시리아에 집착한 이유는 명확했다. 시리아는 이란이 헤즈볼라에 무기를 공급하는 유일한 육로 보급로이자,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의 핵심 고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혹은 수니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란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하메네이는 국가 안전 보장 회의를 소집하여 "시리아는 이란의 35번째 주(州)와 같다"는 논리로 전격적인 개입을 지시한다.

하메네이는 군사적 개입의 총책임자로 자신의 오른팔인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을 임명했다. 당시 이란 내부에서도 경제 제재로 힘든 와중에 남의 나라 내전에 돈과 피를 쏟아부어야 하느냐는 회의론이 대두되었으나, 하메네이는 특유의 '통찰력'을 강조하며 반대파를 압박했다.

하메네이는 군사 개입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시리아에 있는 제1대 이맘 알리의 딸, 자이납의 묘역을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이란 청년들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시아파 의용군을 조직하여 '성지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투입했다.[31]

서방의 제재로 이란 리알화 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도, 하메네이는 시리아 정권에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차관과 석유를 공급하도록 승인했다. 이는 사실상 이란의 국부를 아사드 정권의 생명 연장에 쏟아붓는 도박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2015년경, 아사드 정권이 멸망 직전까지 몰리자 하메네이는 직접 외교에 나선다. 그는 가셈 솔레이마니를 모스크바로 보내 블라디미르 푸틴을 설득하게 했고, 결국 러시아 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하메네이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미국 없는 중동'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이는 훗날 이란-러시아 밀착 관계의 초석이 되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대내적으로도 "우리가 다마스쿠스에서 싸우지 않는다면, 테헤란과 하메단에서 적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라며 안보 위기론을 설파했다. 이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IL의 발흥과 맞물려 이란 대중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전 개입에 대한 내부 불만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 개입은 하메네이에게 심각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슬람 세계의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던 그의 이미지는, 자국민을 학살하는 독재자를 돕는 '시아파 패권주의자'로 전락했다.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되었으며, 이란 내 개혁파 지지자들은 "가자와 레바논 대신 이란을 위해 돈을 써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또한,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의 정예 요원들이 수없이 전사했고, 이는 국가적 손실로 이어졌다. 하메네이는 승리를 선언했으나, 그것은 파괴된 시리아의 폐허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저항하면 승리한다"는 자신의 확신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이는 이후 대미 외교 및 핵 협상 과정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강경 노선이 되었다.

3.22. 이란 핵 합의[편집]

2010년대 초반, 이란은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적 고립에 직면해 있었다. 유엔 안보리의 잇따른 제재와 미국의 금융 봉쇄는 이란의 생명줄인 원유 수출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렸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2013년 온건 중도파인 하산 루하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필생의 숙적인 미국과의 직접 협상이라는 '도박'을 승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를 뒤흔든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의 시작이다.

하메네이는 협상 시작 전,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영웅적 유연성'이라는 교리를 발표했다. 이는 "레슬러가 기술을 걸기 위해 잠시 몸을 굽히는 것과 같다"는 비유로, 원칙(이슬람 혁명 정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해 전술적인 후퇴를 할 수 있다는 명분을 세운 것이다.

하메네이는 "우리는 결코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죄악(Fatwa)"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민간 핵 기술의 권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배수진을 쳤다.

그는 협상팀인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에게 매우 까다로운 레드라인을 설정해 주었다. "협상은 하되, 미국의 본질적인 적대감을 잊지 말라"는 이중적인 메시지는 협상 기간 내내 서방 외교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최종 합의가 임박했을 때 하메네이는 테헤란에서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으며 세부 조항을 점검했다. 특히 핵 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 범위와 제재 해제 시점을 두고 피 말리는 접전이 이어졌다.

당시 하메네이는 국영 방송 연설을 통해 "모든 제재는 합의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고 압박하며, 협상장에 앉아 있는 자리프 장관의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는 미국 측 협상가인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이란 협상팀 뒤에는 더 완고한 결권자가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어, 이란이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전략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마침내 2015년 7월 14일, 역사적인 핵 합의가 타결되었다. 이란은 농축 우라늄 재고의 98%를 제거하고 원심분리기 숫자를 대폭 줄이는 대신,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를 해제받기로 했다.

테헤란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춤을 추며 환호했지만, 하메네이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는 루하니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수고했다"는 짧은 치하와 함께 "미국은 언제든 약속을 어길 수 있는 사탄의 무리임을 명심하라"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이 합의를 '서방과의 화해'가 아닌, '강요된 필요에 의한 일시적 휴전'으로 정의한 것이다.

협상 타결 이후 이란 내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혁명수비대와 보수 신학자들은 "하메네이가 서구 세력에게 안보의 핵심을 팔아넘겼다"며 은밀히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 하메네이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합의를 지지하면서도, 뒤로는 혁명수비대의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를 승인하고 반미 구호를 강화했다. 이는 핵 합의로 인해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내부 단속이었다.
"우리는 핵 문제에 대해서만 대화했을 뿐, 다른 어떤 지역적 이슈나 양자 관계에 대해서도 미국과 협상하지 않을 것이다." - 2015년 9월 하메네이의 연설 중.

핵 합의 이후 동결되었던 자금이 풀리고 해외 자본이 유입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미국의 금융 시스템 제한은 여전했다. 하메네이는 서구 자본에 의존하는 루하니 정부의 경제 모델을 비판하며 '저항 경제(Economy of Resistance)'를 주창했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 생산력을 극대화하여 제재에 견딜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같은 서구 브랜드의 진입을 철저히 차단하며 '문화적 침투'를 경계했다. 그는 JCPOA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이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는 훗날 트럼프 행정부의 합의 파기 이후 그가 "내 말이 맞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근거가 되었다.

3.23. 트럼프의 탈퇴와 '최대 압박'[편집]

2015년 JCPOA 타결 당시 하메네이가 보였던 "미국은 믿을 수 없는 사탄"이라는 회의론은 불과 3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2018년 5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핵 합의 탈퇴를 공식 선언하고 이란에 대한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정책을 재가동하자, 하메네이는 이를 자신의 예지력이 증명된 사건으로 규정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트럼프의 탈퇴 선언 직후, 하메네이는 공식 연설에서 평소의 절제된 톤을 버리고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를 쏟아냈다. 그는 트럼프를 향해 "당신은 실수했다. 당신은 이란 민중을 해칠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이 죽어 육신이 쥐와 뱀의 먹이가 된 후에도 이슬람 공화국은 건재할 것"이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하메네이는 루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외무장관 등 협상을 주도한 온건파들을 향해 "내가 뭐라고 했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정치적 우위를 점했다. 이는 이란 내 개혁파의 입지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이 떠난 자리를 메우려던 유럽연합에게도 냉소적이었다. 그는 "유럽 역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시간만 끌 뿐"이라며, 핵 합의 유지를 위한 실질적인 경제적 보상이 없다면 이란도 합의 이행을 단계적으로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메네이는 미국의 경제적 목죄기에 맞서 '최대 저항'이라는 대항마를 내세웠다. 이는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도 비용을 지불하게 만드는 공세적 방어 전략이었다.

하메네이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 농도를 4.5%에서 20%, 나아가 60%까지 끌어올리도록 승인했다. 이는 핵무기 제조 직전 단계까지 기술력을 과시함으로써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려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유조선 나포 및 무인기 격추 사건이 빈번해졌다. 하메네이는 "우리 기름이 나가지 못한다면, 누구의 기름도 나갈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예멘 내전의 후티 반군, 이라크 내 친이란 밀리샤를 통한 비대칭 전력을 강화했다. 이는 미국이 직접적인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중동 내 자산이 위협받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이란 리알화의 가치는 폭락했고, 인플레이션은 40%를 상회했다. 하메네이는 이 위기를 '자립의 기회'로 포장했다. 그는 "우리가 국산품을 쓰고, 밀수와 부패를 근절한다면 제재는 오히려 이란 산업을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설파했다.[32]

이 과정에서 발생한 2019년 유가 인상 반대 시위(소위 '피의 11월') 당시, 하메네이는 시위대를 '폭도'와 '외세의 끄나풀'로 규정하며 무자비한 진압을 승인했다. 그는 체제의 안정이 그 어떤 경제적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2019년 6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트럼프의 메시지를 들고 테헤란을 방문했을 때, 하메네이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베를 면박 주었다. 그는 아베 앞에서 "나는 트럼프를 메시지를 주고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대답할 것이 없으며, 대답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하메네이 특유의 '자존심 외교'의 정점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고통받을지언정, 종교 지도자로서 제국주의 세력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 장면은 이란 내 보수층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서방 세계에는 소통 불가능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하메네이는 트럼프의 재선 여부가 이란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전략적 인내'를 주문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극에 달할수록 그는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국제 질서를 파괴하는 미국"이라며 시간을 벌었다.

이 기간 동안 하메네이는 중국과의 25년 전략적 파트너십 협정을 추진하며 '동방 정책(Look to the East)'으로의 외교 축 이동을 본격화했다. 이는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다극 체제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24. 가셈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과 대미 복수의 서막[편집]

2020년 1월 3일 새벽,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 인근에서 발생한 미국의 드론 공습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심장을 직격했다. 이란 외역 작전의 총책임자이자 하메네이가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부르며 아들처럼 아꼈던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가 사망한 것이다.

암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하메네이는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솔레이마니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하메네이의 '저항의 축' 전략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설계자였으며, 하메네이가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서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다.

테헤란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하메네이는 솔레이마니의 관 앞에서 직접 장례 기도를 집전했다. 이때 하메네이가 목이 메어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는데, 이는 냉혹한 통치자로 각인되었던 그가 보여준 보기 드문 감정적 노출이었다.[33]

하메네이는 연설을 통해 "솔레이마니는 학교(School) 그 자체였다"고 평하며, 그의 죽음을 비극이 아닌 이슬람 혁명 정신의 완성으로 정의했다.

하메네이는 사건 직후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미국을 향해 "가혹한 보복"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최고지도자가 직접 '보복'을 명시한 이상, 이란군은 반드시 실력 행사를 보여줘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노련한 전략가답게 전면전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정교한 보복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1월 8일,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인 '아인 알 아사드'를 향해 수십 발의 지대지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메네이는 미군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라크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격 시간을 흘리는 등 고도의 수위 조절을 단행했다. 이는 미국의 재보복 명분을 차단하면서도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솔레이마니 암살에 따른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이란 혁명수비대의 치명적인 실책이 발생했다. 미군의 반격에 대비해 방공망을 가동하던 중, 테헤란에서 이륙한 민항기를 미군 순항 미사일로 오인해 격추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176명 전원이 사망하자 이란 내부의 여론은 급격히 냉각되었다. 초기에는 "기체 결함"이라며 발랔하던 정부가 하메네이의 지시에 따라 결국 과실을 인정했다.

하메네이는 "진실을 밝히라"고 지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솔레이마니 추모 열기로 결집했던 민심은 다시금 정권의 무능과 은폐 시도에 분노하며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하메네이에게는 솔레이마니의 죽음보다 더 뼈아픈 정치적 타격이었다.

하메네이는 슬픔에 잠겨 있을 여유가 없었다. 솔레이마니라는 거물급 조정자가 사라진 중동의 공백을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에스마일 가아니를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들을 테헤란으로 불러 결속을 다졌다.

그는 "솔레이마니는 죽었지만 그의 길은 계속될 것"이라며, 중동에서 미군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복이라는 중장기적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 이란의 외교 정책이 협상보다는 '대리 세력을 통한 항전'으로 더욱 경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25. 에브라힘 라이시 정부와 보수 일색화[편집]

2021년 제13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알리 하메네이의 통치 철학이 '공화국'이라는 외피를 완전히 벗겨내고 '신정(Theocracy)'의 순수성을 추구하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하메네이는 개혁파와 온건파가 번갈아 집권하며 체제의 정당성을 보완하던 기존의 '느슨한 균형' 전략을 폐기하고,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모두 강경 보수파로 채우는 이른바 '보수 일색화(Uniformity of Power)'를 단행했다. 이는 하메네이의 말년 권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차기 최고지도자 승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고도의 포석이었다.

하메네이는 대선 전부터 자신이 직접 임명하는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 후보 자격 심사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과거에는 체제 내 비판 세력인 개혁파 후보도 일부 허용했으나, 이번에는 중도파의 거두인 알리 라리자니 전 국회의장마저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사실상 하메네이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에브라힘 라이시를 당선시키기 위한 판짜기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메네이는 투표율 하락(48.8%로 역대 최저)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확실한 내 편'을 선택했다. 그는 "투표는 이슬람에 대한 의무"라고 강조하면서도, 민심의 이반보다는 권력의 일사불란한 집행을 우선시했다.

라이시는 1988년 정치범 대량 처형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골수 강경파이자 하메네이의 애제자였다. 하메네이는 그를 사법부 수장에서 행정부 수반으로 옮겨 앉힘으로써, 자신의 명령이 행정 말단까지 저항 없이 전달되는 체계를 완성했다.

라이시 정부 출범 이후 이란의 국정 운영은 하메네이의 직속 기구인 혁명수비대와 보수 성직자 집단의 완벽한 통제 아래 놓였다. 하메네이는 이를 통해 그동안 루하니 정부 시절 겪었던 행정부와의 마찰을 원천 차단했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의회는 정부의 예산안과 법안을 군말 없이 통과시켰다. 특히 인터넷 통제를 강화하는 '사용자 권리 보호법' 등은 하메네이가 강조한 '소프트 워' 대응의 핵심이었다.

사법부는 하메네이의 의중에 따라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형 집행과 중형 선고를 가속화했다. 이는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에게 보내는 하메네이식 '공포의 메시지'였다.

라이시 내각의 주요 요직은 혁명수비대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 하메네이는 국가 운영을 효율적인 '군사 작전'처럼 수행하기를 원했으며, 이는 곧 국가 전체의 병영화를 의미했다.

하메네이는 체제 내부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에크-다스트-사지(Yek-dast-sazi, 하나로 만들기)'라고 명명했다. 이는 단순히 개혁파를 배제하는 수준을 넘어, 보수 진영 내에서도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거나 서방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실용주의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을 포함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학교수, 예술가, 언론인이 현장에서 퇴출당했다. 하메네이는 교육 현장의 '이슬람화'를 재차 강조하며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고, 대학 내 보안 요원을 배치하여 지식인 사회의 입을 막았다. 그는 "지식은 이슬람의 가치에 봉사해야 하며, 서구식 자유주의는 독극물과 같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의 사상적 통제권을 사회 전반으로 확장했다.

하메네이는 라이시 정부에 '핵 합의(JCPOA) 복원에 목매지 말 것'을 주문했다. 대신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동방 정책(Look to the East)'을 가속화했다. 그는 "미국이 제재를 가해도 우리는 아시아의 우방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며 경제적 자급자족을 독려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보수 일색화 이후 관료 사회의 무능과 부패가 심화되었고, 인플레이션은 40~50%를 상회했다. 하메네이는 경제난의 원인을 서방의 음모와 전임 정부의 실정으로 돌렸으나, 민중의 삶은 라이시 정부 들어 더욱 고달파졌다. 하메네이는 "어려움은 신께서 주시는 시험"이라며 인내를 요구했지만, 이는 훗날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폭발하는 거대한 분노의 기저가 되었다.

3.26. 마흐사 아미니 사망 사건과 '여성, 생명, 자유'와 체제의 실존적 위기[편집]

2022년 9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격렬한 내부 저항에 직면했다. 이른바 '히잡 의문사 사건'으로 촉발된 이 시위는 단순한 복장 규제에 대한 불만을 넘어, 알리 하메네이가 30년 넘게 공고히 다져온 '신정 체제' 자체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하메네이는 이 위기를 단순한 소요 사태가 아닌, 서방 세력이 기획한 '복합전(Hybrid War)'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쿠르드족 출신의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복장 불량(히잡 미착용)을 이유로 도덕 경찰(가슈테 에르샤드)에 체포되었다가 의문사하자, 민심은 폭발했다. 초기 시위가 발생했을 때 하메네이는 약 2주간 공식 석상에서 침묵을 지켰다. 이 기간 동안 "지도자의 건강 이상설"과 "체제의 분열"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으나, 이는 폭풍 전의 고요에 불과했다.

마침내 10월 3일, 군 사관학교 졸업식에 모습을 드러낸 하메네이는 지팡이를 짚은 채 단상에 올라 이번 시위의 배후로 미국이스라엘을 지목했다. 그는 "이 사건은 평범한 시위가 아니라, 강성해지는 이란을 저지하려는 적들의 기획된 음모"라고 단언했다. 이는 시위대와의 타협은 없으며, 오직 '진압'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

시위대의 슬로건인 '여성, 생명, 자유'는 하메네이가 평생 수호해온 이슬람적 가치관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하메네이는 여성의 히잡 착용을 단순한 옷차림이 아니라, 서구의 퇴폐적 문화로부터 이슬람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겼다.

그는 연설을 통해 "히잡은 이란 여성의 존엄이며, 이를 거부하는 것은 서구 식민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위대를 향해 '속아 넘어간 젊은이들'과 '적에게 고용된 테러리스트'를 철저히 분리하는 전략을 취했다.

하메네이는 과거 '저항 경제'와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세대를 이끌어왔으나, 스마트폰과 SNS로 무장한 'Z세대' 이란인들의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 교실에서 하메네이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손가락 욕설을 하는 여학생들의 사진은 그가 쌓아온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위가 격화되자 하메네이는 자신의 직속 부대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와 민병대 조직인 '바시즈(Basij)'를 전면에 내세웠다. 바시즈 대원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누비며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했고, 하메네이는 이들을 "나라를 지키는 무고한 꽃들"이라며 격려했다.

특히 하메네이는 사법부에 "신에 대항한 죄(Moharebeh)"를 적용해 시위 참여자들을 신속히 처형할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2022년 말부터 시작된 공개 교수형은 공포 정치를 통해 시위의 동력을 꺾으려는 하메네이식 위기 관리의 전형이었다. 그는 "자비는 국가의 기강을 흔든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판단 아래,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걸음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이번 시위가 과거와 달랐던 점은, 하메네이의 지지 기반이었던 종교계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부 고위 성직자(아야톨라)들은 "강압적인 히잡 착용은 이슬람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하메네이의 강권 통치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쿰(Qom)의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며 이러한 내부 균열을 정면 돌파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성직자들을 '적들의 나팔수'로 몰아세웠고, 오직 자신을 추종하는 강경파 인사들로 주변을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는 '대중의 지도자'에서 '특정 정파와 군부의 수장'으로 그 권력 기반이 좁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론적으로 시위는 무력에 의해 억제되었으나, 이란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테헤란의 거리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일상화되었고, 하메네이 체제는 이들을 완전히 통제할 행정 능력을 상실했다.

하메네이는 시위 진압 후 "적들의 음모를 물리쳤다"고 자축했으나, 이는 인구의 절반 이상인 젊은 세대와의 심리적 단절을 대가로 얻은 '피의 승리'였다. 그는 80대의 고령에 접어들며 자신의 사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마주하게 되었다. 시위 기간 중 불거진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는 하메네이 평생의 업적인 이슬람 공화국이 마주한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3.27. 이후[편집]

2025년 말 경제적 고통에서 촉발된 시위는 2026년 1월을 기점으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산되었다. 하메네이는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진압을 명령했다.

1월 8일과 10일, 테헤란을 비롯한 100여 개 도시에서 보안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메네이는 직접 "질서 회복을 위해 주저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으며, 인터넷을 완전히 차단하는 등 정보 통제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약 36,0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하메네이는 생애 최악의 도덕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의 적들을 징벌하는 것은 성스러운 의무"라며 끝까지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내부 혼란을 틈타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박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2기)는 이란의 핵 개발과 탄도 미사일 위협을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규정하고, 하메네이의 핵심 지지 기반인 혁명수비대를 궤멸시키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다.

하메네이는 2월 초 오만 마스카트에서 열린 비공식 핵 협상에서 '영웅적 유연성'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시간을 벌려 시도했으나, 이미 서방의 결심을 돌리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그는 2월 중순 공식 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에도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짧고 단호한 메시지를 남기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3.28.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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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이란 공습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미국과 이스라엘 측은 하메네이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란 정부는 그의 죽음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시간대 기준 3월 1일 오전 10시 30분, 이란 국영방송에서 하메네이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 #

사망이 발표되자 이란 정부는 7일의 임시 공휴일과 40일 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

3.28.1. 반응[편집]

3.28.1.1. 대한민국[편집]
  • 조국혁신당에서는 하메네이의 죽음에 대해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

4. 평가[편집]

2026년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격적인 공동 공습으로 테헤란의 지하 벙커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알리 하메네이는 3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절대적인 정점에 서 있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통치자의 퇴장을 넘어, 1979년 혁명 이후 유지되어 온 '법학자 통치 체제(벨라야테 파키)'가 맞이한 최대의 존망 위기로 평가받는다.

그는 시각(주로 MZ세대와 국제 사회의 시각)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과거의 교리에 매몰되어 국가의 미래를 망친 독재자로 규정된다.

2009년 이란 녹색 운동,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 그리고 2026년 초 발생한 대규모 민중 봉기에 이르기까지, 하메네이는 대화 대신 유혈 진압을 선택했다. 히잡 착용 강요와 도덕 경찰을 앞세운 사회 통제는 이란 청년층으로부터 "우리 세대의 꿈을 앗아간 노인"이라는 증오 섞인 평가를 받게 했다.

핵 합의(JCPOA)의 파기와 재결렬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완고한 태도는 이란 경제를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2025년 하반기 기준 이란의 물가 상승률은 60%를 상회했으며, 이는 그가 강조하던 '혁명 정신'이 배고픈 민중들에게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2026년 초,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제 타격과 이에 따른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시작된 이른바 '12일 전쟁'은 그의 리더십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메네이는 끝까지 "미국과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정교한 AI 기반 핀셋 타격으로 인해 본인의 거처에서 사망하며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신이 보호하는 지도자'라는 그의 신비주의적 카리스마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아들인 모즈타바 하메네이에게 권력을 승계하려 한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으나,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급사했다. 이로 인해 2026년 3월 현재, 이란은 알리 라리자니 등 원로 정치인들과 혁명수비대(IRGC) 간의 극심한 권력 투쟁 속에서 내전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결론적으로 하메네이는 20세기 혁명의 유산을 21세기까지 억지로 끌고 온 인물이었다. 그는 체제 수호를 위해서는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했으나,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이라는 세속적 가치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했다.
"그는 호메이니가 세운 집을 지키기 위해 담장을 높게 쌓았지만, 그 집 안에서 굶주리고 매맞는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란의 한 시대가 끝났으며, 이제 남겨진 이란인들은 그가 쌓아 올린 거대한 '저항의 성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지, 아니면 더 깊은 혼돈 속으로 침잠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5. 건강 이상설과 후계 구도[편집]

하메네이가 80대를 훌쩍 넘기면서 이란 내외의 모든 시선은 그의 '건강'과 '다음'으로 쏠리고 있었다. 1인 독재 체제나 다름없는 신정 일치 국가에서 최고지도자의 유고는 곧 체제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수십 년간 자신에 대한 건강 이상설을 비웃듯 건재를 과시해 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승계 문제는 이란 정계의 가장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가고 있다.

하메네이는 1981년 테러로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입은 이후 줄곧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그의 건강에 대한 구체적인 루머들이 서방 언론과 정보기관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014년 전립선암 수술 당시 이란 국영 매체는 이례적으로 하메네이가 수술을 받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지도자의 투명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으나, 역설적으로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님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SNS와 반정부 매체를 중심으로 "하메네이가 코마 상태에 빠졌다"거나 "이미 사망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특히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 당시 그가 며칠간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후계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나, 그는 다시 보란 듯이 군중 앞에 나타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엄격한 식단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령에 따른 자연적인 쇠약함은 숨길 수 없으며, 최근 연설에서는 목소리가 쉬거나 거동이 다소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한다.

이란 헌법상 차기 최고지도자를 선출할 권한은 88명의 성직자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에 있다. 이들은 하메네이의 유고 시 즉각 회의를 소집하여 후임자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회의의 실질적인 운영은 하메네이 본인과 그를 보좌하는 소수의 측근 그룹, 그리고 [혁명수비대]의 입김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메네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강경 보수파 인물들로 전문가 회의를 채워 넣음으로써, 자신이 사후에도 자신의 노선이 유지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전문가 회의 내부에서도 계파 간의 암투는 치열하며, 특히 '누가 하메네이의 사후 혼란을 수습할 것인가'를 두고 물밑 협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4년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단연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하메네이의 충직한 제자이자 사법부 수장을 지낸 강경파 중의 강경파로, 하메네이가 걷어준 길을 그대로 따라온 인물이었다. 전문가 회의 부의장직까지 맡으며 사실상 '황태자'로 낙점된 상태였다.

그러나 2024년 5월 발생한 헬기 추락 사고로 라이시가 급사하면서 이란의 후계 구도는 완전히 뒤엉키게 되었다. 라이시의 사망은 하메네이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수년간 공들여 설계해 놓은 '안정적인 승계 시나리오'가 자연재해(혹은 사고) 한 번에 백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후계 경쟁은 다시금 안개 정국으로 빠져들었다.

라이시의 부재 속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인물은 하메네이의 둘째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이다. 그는 공식적인 직함은 없으나 하메네이실(Beyt-e Rahbari)의 실무를 총괄하며 혁명수비대 지도부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슬람 혁명은 본래 팔라비 왕조의 세습 전제 정치를 타도하며 일어났다. 만약 하메네이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면, 이는 혁명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테헤란의 권력 심장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될 때마다 국정 운영의 상당 부분을 대리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보수파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호자톨에슬람' 직위를 '아야톨라'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최고지도자 승계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전문가 회의가 아니라 혁명수비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의 경제와 국방을 장악한 이 거대 집단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을 원한다.

혁명수비대는 하메네이 사후 집단 지도 체제를 선호할 수도 있고, 혹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쉬운 꼭두각시 지도자를 세울 수도 있다. 만약 승계 과정에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질 경우, 혁명수비대가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며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메네이는 생전 이들과의 밀월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로 차기 지도자가 혁명수비대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하메네이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이란이 '이슬람 원리주의'의 길을 걷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시스템은 지나치게 그 개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2026년 이스라엘 미국 공습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 고위 관료들이 모두 사망하는 최후를 맞이하여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1] 대통령 시절 소속 정당은 이슬람 공화당전투적 성직자회였다.[2] 이 혈통적 배경은 시아파 사회에서 엄청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며, 하메네이가 공식 석상에서 검은색 터번을 착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성직자는 흰색 터번을 쓴다.[3] 당시 이란은 레자 샤 팔라비의 강권 통치 아래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으나, 지방의 종교 가문들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4] 훗날 이란 혁명 이후 사법부 수장이 되는 마무드 하셰미 샤흐루디와는 친척 관계 혹은 사제 관계의 인연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5] 비록 호메이니가 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발표한 것은 1970년대 나자프 유배 시절이지만, 1950년대 후반 쿰에서의 강의에는 이미 '이슬람 법학자가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는 강력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6] 훗날 하메네이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호메이니의 강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깨우는 혁명의 종소리였다"고 서술했다.[7] 세이드 쿠틉은 수니파 사상가였으나, 하메네이는 종파를 초월하여 반제국주의적 이슬람 혁명 정신을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다.[8] 당시 하메네이는 취조 과정에서 자신의 종교적 직위나 학문적 성취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며, 사바크 요원들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다.[9] 이 방식은 훗날 이란 혁명 특유의 '상징 정치'로 발전하게 된다. 직접적인 비판보다 종교적 서사를 빌린 비판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10] 현재는 '이슬람 혁명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당시의 고문 기구들을 전시하고 있다.[11] 그는 지금도 '레 미제라블'을 세계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꼽으며,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는 필독서라고 강조한다.[12] 하메네이는 유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공통 분모를 찾는 '이슬람 단결 주간'을 제안하기도 했다.[13] 이는 당시 하메네이가 종교적 위계(아야톨라급)는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무 능력과 충성심이 호메이니에게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14] 하메네이는 창당 선언문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하며 '이슬람적 가치'와 '공화제'의 결합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15] 이는 이슬람 전통에서 법주가 지팡이나 칼을 짚고 설교하던 관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한 무장 투쟁'을 상징한다.[16] 이 사건은 그에게 '살아있는 순교자(Jan-baz)'라는 신성한 타이틀을 안겨주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권위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격상되었다.[17] 이를 두고 이란 보수파들은 "신이 하메네이를 살려 장차 최고지도자로 쓰기 위해 미리 피신시킨 것"이라며 종교적 서사를 부여한다.[18] 이 지명은 훗날 2009년 대선에서 두 사람이 정적으로 만나게 되는 기막힌 운명의 서막이었다.[19] 하메네이는 당시 성직자 중심의 보수파를 대변하며, 종교적 법 테두리 내에서의 상업 활동 자유를 강조했다. 이는 훗날 그가 '경제적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군부 자본(IRGC)을 육성하는 모순적 행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20] 실제 장례식 운구 과정에서 인파가 너무 몰려 호메이니의 시신을 담은 관이 부서지고 수의 조각이 찢겨 나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서방 언론에 중동의 '광신적 신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21] 아야톨라보다 낮은 단계의 성직 계급[22] 이 증언의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도 이란 정치사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문서로 남겨진 유언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프산자니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인 하메네이를 밀어주기 위해 조작하거나 부풀렸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된다.[23] 실제로 훗날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라프산자니 등 당시 실권자들이 호메이니의 유지를 인용하며 하메네이의 자격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적 거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24] 개헌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이슬람 공화국(Republic)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이슬람 제국(Imamate)으로 회귀하는 조치"라며 맹비난했다.[25] 물론 이러한 물리적 단속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에 부딪혔다. 이란인들은 단속이 지나가면 다시 안테나를 설치하는 식으로 저항했고, 이는 하메네이에게 '기술적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26] 당시 테헤란 거리에서는 이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 추모 집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는 하메네이의 묵인 혹은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27] 이 '핵 금지 파투아'의 실체에 대해서는 서방 정보기관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전략적 기만술이라는 평가와 실제 교리적 선언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28] 실제로 이 시기 하메네이의 대외 메시지는 아마디네자드의 입을 통해 더욱 거칠어졌으며, 이는 이란의 핵 개발 강행과 맞물려 국제 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29] 실제로 이때부터 하메네이는 이란 본토를 공격당하지 않고도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억제력'을 확보하게 되었다.[30] 후티 반군은 하메네이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며, 사우디 본토의 석유 시설을 타격할 때마다 이란의 비대칭 전술의 효용성을 입증해주고 있다.[31] 이들은 훗날 '파티미윤 여단' 등으로 조직화되어 시리아 내전의 핵심 보병 전력이 된다.[32] 그러나 실제로는 혁명수비대 계열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일반 서민들만 의약품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33] 이 눈물은 이란 내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강력한 감성적 동인이 되었으며, 솔레이마니를 성인(Saint)의 반열에 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