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드 아마디네자드 Mahmoud Ahmadinejad | |
출생 | 1956년 10월 28일 (69세) 이란 제국 셈난주 아라단 |
국적 | |
신체 | 157cm |
직업 | 정치인 |
정당 | |
파벌 | |
배우자 | 아잠 파라히 |
자녀 | 파테메흐 아흐마디네자드 알리레자 아흐마디네자드 메흐디 아흐마디네자드 |
1. 개요2. 생애
2.1. 아라단에서의 유년기2.2. 혁명의 소용돌이와 학생 운동2.3. 이란-이라크 전쟁과 혁명수비대 복무2.4. 학문적 성취와 박사 학위 취득2.5. 행정가로서의 첫걸음, 마쿠와 코이 시장2.6. 아르다빌 주지사 임명2.7. 개혁파 하타미 정권과의 갈등2.8. 테헤란 시장 당선2.9. 2005년 대선 출마와 '제3의 혁명'2.10. 대통령 취임과 제1기 정권
3. 평가4. 아마디네자드즘(Ahmadinejadism)2.10.1. 종교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밀월 관계2.10.2. 오일 머니와 분배 정책의 명암2.10.3. 홀로코스트 부정과 국제적 고립2.10.4. 핵 개발 강행과 UN 제재2.10.5. 서방과의 외교 전쟁, '악의 축' 낙인2.10.6. 남남 협력과 반미 연대 구축2.10.7. 2009년 대선 직전의 국내 정세
2.11. 2009년 대선과 부정 선거 의혹2.12. 취임식 강행과 제2기 정권의 출범2.12.1. 녹색 운동'과 흔들리는 권력2.12.2. 하메네이와의 균열, '11일간의 칩거'2.12.3. 측근 비리와 부패 스캔들2.12.4. 의회와의 갈등2.12.5. 외교적 고립의 심화와 핵 협상의 교착
2.13. 퇴임 이후2.14. 2017년 대선 복귀 시도와 출마 금지2.15. 2021년 대선 재도전과 연이은 낙마2.16. 라이시 사후의 행보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아라단에서의 유년기[편집]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1956년 10월 28일, 이란 중앙부에 위치한 셈난 주의 소도시 아라단(Aradan)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이란 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었는데, 1953년 모사데크 정권이 무너지고 팔레비 2세의 친서방 전제 군주제가 공고해지던 시점이었다. 아마디네자드의 가문은 대대로 이 척박한 사막 지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평범한 서민층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숙련된 대장장이였다.
아마디네자드의 출생 당시 성씨는 아마디네자드가 아니라 사보르지안(Sabourjian)이었다.[1]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한 뒤, 반대파들은 이 성씨가 유대인 계통의 성씨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이란의 전통적인 노동계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곱 자녀를 건사하기 위해 뜨거운 화덕 앞에서 쇠를 두드리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러한 유년기의 기억은 훗날 아마디네자드가 '기득권층에 맞서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정치적 서사를 구축하는 데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 그의 가족은 더 나은 삶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수도 테헤란으로 이주했다. 당시 이란은 국왕의 '백색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유입되던 이촌향도 현상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아마디네자드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테헤란 동남부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인 나르마크(Narmak)였다. 이곳은 부유한 북부 테헤란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신실한 이슬람 신앙을 가진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테헤란 정착 직후, 그의 아버지는 가족의 성씨를 '아마디네자드'로 개명했다.[2] 어린 아마디네자드는 화려한 궁전과 서구식 카페가 들어서는 테헤란의 이면에서, 땀 냄새 나는 시장통과 엄격한 율법이 지배하는 모스크를 오가며 성장했다. 그는 일찍이 사회의 양극화를 목격했으며, 서구화된 상류층에 대한 이질감과 적대감을 무의식중에 체득하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의 부친은 매우 독실하고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세속적인 성공보다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와 검소함을 강조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새벽 기도를 나갔으며, 꾸란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낡은 양복과 검소한 식단을 고집하며 '성자(聖者) 정치인'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종교적 열광주의자에 그치지 않았다. 아마디네자드는 학업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암기력과 논리적 사고력이 탁월했으며, 특히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역 내에서 '천재 소년'으로 통하며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사교육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팔레비 정권하의 교육 시스템은 엘리트 양성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는 서민층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기득권 자제들과 경쟁하여 압도적인 성취를 거두었다.
그의 청소년기인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이란은 이른바 '백색 혁명'이라 불리는 급격한 근대화의 파고 속에 있었다. 여성의 참정권 부여,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운동 등이 전개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관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특히 1963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다 추방당하는 사건은 어린 아마디네자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동네 모스크에서 배포되는 호메이니의 비밀 전단지와 녹음테이프를 접하며, 국왕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규정하는 급진적 이슬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서구화는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이란의 영혼을 파는 행위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그가 대외 정책에서 보여준 강력한 반미(反美) 및 반제국주의 노선의 뿌리가 된다.
1976년,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국가 대입 시험(Konkur)에서 전국 132위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었다.[3] 그는 이 성적을 바탕으로 이란 최고의 공과대학 중 하나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막 마을의 소년이자 대장장이의 아들이 수도의 지적 중심지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공학 기술만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교는 반정부 운동의 거점이었고, 아마디네자드는 그곳에서 자신의 공학적 재능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적 본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학생 운동 단체에 가입했으며, 호메이니의 사상을 전파하는 핵심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가 맺은 인맥과 경험은 훗날 이란 혁명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유년기는 그렇게 '혁명의 전야'와 맞물리며 막을 내린다.
아마디네자드의 출생 당시 성씨는 아마디네자드가 아니라 사보르지안(Sabourjian)이었다.[1]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한 뒤, 반대파들은 이 성씨가 유대인 계통의 성씨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이란의 전통적인 노동계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곱 자녀를 건사하기 위해 뜨거운 화덕 앞에서 쇠를 두드리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러한 유년기의 기억은 훗날 아마디네자드가 '기득권층에 맞서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정치적 서사를 구축하는 데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 그의 가족은 더 나은 삶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수도 테헤란으로 이주했다. 당시 이란은 국왕의 '백색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유입되던 이촌향도 현상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아마디네자드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테헤란 동남부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인 나르마크(Narmak)였다. 이곳은 부유한 북부 테헤란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신실한 이슬람 신앙을 가진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테헤란 정착 직후, 그의 아버지는 가족의 성씨를 '아마디네자드'로 개명했다.[2] 어린 아마디네자드는 화려한 궁전과 서구식 카페가 들어서는 테헤란의 이면에서, 땀 냄새 나는 시장통과 엄격한 율법이 지배하는 모스크를 오가며 성장했다. 그는 일찍이 사회의 양극화를 목격했으며, 서구화된 상류층에 대한 이질감과 적대감을 무의식중에 체득하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의 부친은 매우 독실하고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세속적인 성공보다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와 검소함을 강조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새벽 기도를 나갔으며, 꾸란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낡은 양복과 검소한 식단을 고집하며 '성자(聖者) 정치인'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종교적 열광주의자에 그치지 않았다. 아마디네자드는 학업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암기력과 논리적 사고력이 탁월했으며, 특히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역 내에서 '천재 소년'으로 통하며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사교육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팔레비 정권하의 교육 시스템은 엘리트 양성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는 서민층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기득권 자제들과 경쟁하여 압도적인 성취를 거두었다.
그의 청소년기인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이란은 이른바 '백색 혁명'이라 불리는 급격한 근대화의 파고 속에 있었다. 여성의 참정권 부여,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운동 등이 전개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관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특히 1963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다 추방당하는 사건은 어린 아마디네자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동네 모스크에서 배포되는 호메이니의 비밀 전단지와 녹음테이프를 접하며, 국왕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규정하는 급진적 이슬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서구화는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이란의 영혼을 파는 행위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그가 대외 정책에서 보여준 강력한 반미(反美) 및 반제국주의 노선의 뿌리가 된다.
1976년,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국가 대입 시험(Konkur)에서 전국 132위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었다.[3] 그는 이 성적을 바탕으로 이란 최고의 공과대학 중 하나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막 마을의 소년이자 대장장이의 아들이 수도의 지적 중심지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공학 기술만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교는 반정부 운동의 거점이었고, 아마디네자드는 그곳에서 자신의 공학적 재능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적 본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학생 운동 단체에 가입했으며, 호메이니의 사상을 전파하는 핵심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가 맺은 인맥과 경험은 훗날 이란 혁명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유년기는 그렇게 '혁명의 전야'와 맞물리며 막을 내린다.
2.2. 혁명의 소용돌이와 학생 운동[편집]
아마디네자드가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0년대 후반은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당시 팔레비 왕조의 '백색 혁명'으로 대변되는 급격한 서구화와 세속화 정책은 도시 빈민층과 보수적 종교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대학교는 이러한 저항 정신이 분출되는 용광로와 같았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시기 단순히 학업에 열중하는 공학도에 머물지 않고, 이슬람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정부 학생 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다.
그는 대학 내 이슬람 학생회(Anjuman-e Eslami)에서 활동하며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당시 이란의 학생 운동권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적 성향을 경계하며 철저하게 이슬람 근본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는 이슬람이야말로 제국주의적 서구 세력과 부패한 왕정을 동시에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1979년 1월, 샤(Shah)가 국외로 망명하고 호메이니가 귀국하며 이란 혁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생 혁명 수호 세력의 핵심 간부로서 체제 전복과 새로운 공화국 수립에 앞장섰다.
이 장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은 1979년 11월에 발생한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아마디네자드의 연관성이다. 혁명 직후,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학생들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인을 444일 동안 인질로 잡았다. 이 사건은 이란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완전히 파탄 냈으며, 이란 내 강경파의 입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5년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인질이었던 척 스콧(Chuck Scott)과 데이비드 로더(David Roeder) 등은 그를 인질범 중 한 명으로 지목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4]
그러나 아마디네자드 본인과 이란 정부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실상 당시의 기록과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대사관 점거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에는 참석했으나 실행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미국 대사관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소련 대사관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결국 그는 대사관 점거 세력인 '이맘의 노선'이 아닌, 좀 더 체제 내적인 학생 연합체인 '이슬람 학생 연합(Office for Strengthening Unity, OSU)'의 창립과 조직 관리에 힘을 쏟았다.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이른바 '문화 혁명'의 기수 역할을 수행했다. 호메이니는 대학교 내의 서구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대학을 일시 폐쇄하고 교육 과정을 이슬람 원리에 맞게 재편하는 문화 혁명을 선포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에서 대학 내 '반혁명' 교수들과 학생들을 식별하고 숙청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세속주의를 몰아내고 신권 정치의 이념적 토대를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이 시기 보여준 추진력과 충성심은 훗날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이 시기 혁명수비대(IRGC)의 전신이 되는 무장 조직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단순한 학생 활동가를 넘어 준군사적 조직의 운영 원리를 익혔다. 그는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거리에서 '도덕 경찰'과 유사한 활동을 전개하며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감시 활동에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대통령 재임 시기 보여준 도덕적 엄격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이란 내 내부 반대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질 당시에도 그는 체제의 수호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대학 내 이슬람 학생회(Anjuman-e Eslami)에서 활동하며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당시 이란의 학생 운동권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적 성향을 경계하며 철저하게 이슬람 근본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는 이슬람이야말로 제국주의적 서구 세력과 부패한 왕정을 동시에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1979년 1월, 샤(Shah)가 국외로 망명하고 호메이니가 귀국하며 이란 혁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생 혁명 수호 세력의 핵심 간부로서 체제 전복과 새로운 공화국 수립에 앞장섰다.
이 장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은 1979년 11월에 발생한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아마디네자드의 연관성이다. 혁명 직후,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학생들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인을 444일 동안 인질로 잡았다. 이 사건은 이란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완전히 파탄 냈으며, 이란 내 강경파의 입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5년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인질이었던 척 스콧(Chuck Scott)과 데이비드 로더(David Roeder) 등은 그를 인질범 중 한 명으로 지목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4]
그러나 아마디네자드 본인과 이란 정부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실상 당시의 기록과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대사관 점거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에는 참석했으나 실행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미국 대사관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소련 대사관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결국 그는 대사관 점거 세력인 '이맘의 노선'이 아닌, 좀 더 체제 내적인 학생 연합체인 '이슬람 학생 연합(Office for Strengthening Unity, OSU)'의 창립과 조직 관리에 힘을 쏟았다.
혁명 직후의 혼란 속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이른바 '문화 혁명'의 기수 역할을 수행했다. 호메이니는 대학교 내의 서구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대학을 일시 폐쇄하고 교육 과정을 이슬람 원리에 맞게 재편하는 문화 혁명을 선포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에서 대학 내 '반혁명' 교수들과 학생들을 식별하고 숙청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세속주의를 몰아내고 신권 정치의 이념적 토대를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이 시기 보여준 추진력과 충성심은 훗날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이 시기 혁명수비대(IRGC)의 전신이 되는 무장 조직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단순한 학생 활동가를 넘어 준군사적 조직의 운영 원리를 익혔다. 그는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거리에서 '도덕 경찰'과 유사한 활동을 전개하며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감시 활동에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대통령 재임 시기 보여준 도덕적 엄격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이란 내 내부 반대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질 당시에도 그는 체제의 수호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2.3. 이란-이라크 전쟁과 혁명수비대 복무[편집]
1980년 9월 22일,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길었던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당시 24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이 전란의 시기를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과 세계관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았다. 그는 대학 졸업 직후 혁명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자원입대하였으며, 이는 훗날 그가 보수 강경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데 있어 '충성심'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훈장이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혁명 수비대에 소속되어 주로 공병 장교로 활동했다. 그의 전공이었던 토목공학은 전장에서 매우 유용한 기술적 자산이었다. 그는 전선의 최전방에서 보급로를 건설하고, 적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요새와 참호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이란의 험준한 서부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들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공학적 설계와 물류 지원의 싸움이었으며, 아마디네자드는 이곳에서 실무적인 행정 능력과 조직 관리 능력을 동시에 배양했다.
전쟁 중 그가 보여준 행보는 전형적인 '혁명적 전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흙바닥에서 잠을 자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훗날 대통령 시절 보여주었던 서민적이고 검소한 스타일의 원형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당시 이란군은 열악한 장비와 고립된 국제적 상황 속에서 '인파 작전(Human Wave Tactics)'이라 불리는 희생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광기 어린 신앙심과 국가적 헌신이 뒤섞인 현장을 목격하며 서방의 합리주의와 대치되는 이슬람식 순교 정신의 위력을 체감했다.[6]
특히 그는 혁명수비대 내에서도 특수 작전을 담당하던 '라마잔 기지(Ramazan Headquarters)'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이라크 내부의 쿠르드족 반군과 협력하여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하거나 정보 수집을 담당하던 핵심 요충지였다. 비록 본인은 퇴임 후에도 구체적인 작전 내용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나, 정보 관계자들은 그가 이 시기 정보전과 게릴라전의 생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라 분석한다. 이러한 군사적 배경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을 수 있는 '군부의 뒷배'와 '개인적 담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은 아마디네자드에게 서방 세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불신을 심어주었다.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국제법상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이라크에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국제 정의'란 강자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각인시켰다.[7] 그에게 있어 이란-이라크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이슬람 혁명의 불꽃을 지켜내기 위한 거룩한 방어전이었다.
8년간의 전쟁이 끝난 1988년, 아마디네자드는 소령 계급으로 예편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순수한 학생 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혁명수비대라는 거대한 파워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전우애로 맺어진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축적된 '강경 보수'라는 정치적 자산은 그가 민간 행정가로 변신한 이후에도 그의 모든 정책 결정의 저변에 깔리게 된다. 그에게 평화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며, 국가의 생존은 오직 자급자족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변치 않는 신앙심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얻은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2005년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전쟁의 가치를 잊지 않은 지도자"라는 슬로건으로 부활했다. 그는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대신 전쟁 시절의 작업복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점퍼를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났는데, 이는 전후 경제난에 허덕이던 이란 서민들에게 '진정한 혁명의 계승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혁명 수비대에 소속되어 주로 공병 장교로 활동했다. 그의 전공이었던 토목공학은 전장에서 매우 유용한 기술적 자산이었다. 그는 전선의 최전방에서 보급로를 건설하고, 적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요새와 참호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이란의 험준한 서부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들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공학적 설계와 물류 지원의 싸움이었으며, 아마디네자드는 이곳에서 실무적인 행정 능력과 조직 관리 능력을 동시에 배양했다.
전쟁 중 그가 보여준 행보는 전형적인 '혁명적 전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흙바닥에서 잠을 자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훗날 대통령 시절 보여주었던 서민적이고 검소한 스타일의 원형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당시 이란군은 열악한 장비와 고립된 국제적 상황 속에서 '인파 작전(Human Wave Tactics)'이라 불리는 희생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광기 어린 신앙심과 국가적 헌신이 뒤섞인 현장을 목격하며 서방의 합리주의와 대치되는 이슬람식 순교 정신의 위력을 체감했다.[6]
특히 그는 혁명수비대 내에서도 특수 작전을 담당하던 '라마잔 기지(Ramazan Headquarters)'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이라크 내부의 쿠르드족 반군과 협력하여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하거나 정보 수집을 담당하던 핵심 요충지였다. 비록 본인은 퇴임 후에도 구체적인 작전 내용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나, 정보 관계자들은 그가 이 시기 정보전과 게릴라전의 생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라 분석한다. 이러한 군사적 배경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을 수 있는 '군부의 뒷배'와 '개인적 담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은 아마디네자드에게 서방 세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불신을 심어주었다.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국제법상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이라크에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국제 정의'란 강자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각인시켰다.[7] 그에게 있어 이란-이라크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이슬람 혁명의 불꽃을 지켜내기 위한 거룩한 방어전이었다.
8년간의 전쟁이 끝난 1988년, 아마디네자드는 소령 계급으로 예편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순수한 학생 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혁명수비대라는 거대한 파워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전우애로 맺어진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축적된 '강경 보수'라는 정치적 자산은 그가 민간 행정가로 변신한 이후에도 그의 모든 정책 결정의 저변에 깔리게 된다. 그에게 평화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며, 국가의 생존은 오직 자급자족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변치 않는 신앙심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얻은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2005년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전쟁의 가치를 잊지 않은 지도자"라는 슬로건으로 부활했다. 그는 정장에 넥타이를 매는 대신 전쟁 시절의 작업복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점퍼를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났는데, 이는 전후 경제난에 허덕이던 이란 서민들에게 '진정한 혁명의 계승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2.4. 학문적 성취와 박사 학위 취득[편집]
아마디네자드의 생애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의 '기술 관료(Technocrat)'적 정체성이 완성되는 시기이다. 흔히 그를 거친 언사를 쏟아내는 단순한 종교 근본주의자로 치부하기 쉬우나, 사실 그는 공학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이 시기 그가 집중한 학문적 성취는 훗날 그가 행정가로서 '현장 중심적 정책'을 펼치는 근거가 되었으며, 동시에 보수 세력 내에서 '준비된 전문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들던 1986년, 아마디네자드는 전장에서 쌓은 실무적 공학 지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모교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의 전공은 토목공학 중에서도 현대 도시의 혈관이라 불리는 '교통공학 및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몸살을 앓던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 대도시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했던 전문 지식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는 초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낮에는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전방의 보급로를 설계하고 요새화 작업을 감독했으며, 밤에는 도시 교통 시스템의 최적화 이론을 연구했다. 이러한 '현장과 이론의 결합'은 그가 훗날 행정가로서 보여준 특유의 불도저식 추진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수치 계산에 그치지 않고, 도로망의 확충이 하층민의 물류 이동과 삶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사회공학적 관점을 견지했다.
1989년, 전쟁이 종결된 후 그는 곧바로 박사 과정에 진입했다. 그의 연구 주제는 '도시 교통 시스템의 효율적 통제 및 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교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매우 치밀하고 분석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복잡한 수식과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교통 흐름을 예측하는 모델링에 능숙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테헤란 시장 시절 대대적인 교통 체계 개편을 단행할 때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이란 내에서도 상당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8] 그는 1997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명실상부한 '교통공학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는 당시 이란 정계의 주류였던 성직자 계급이나 순수 정통 정치인들과는 차별화되는 그만의 독보적인 무기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가 얻은 것은 박사 학위라는 증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이들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내각의 실무진으로 합류하는 '아마디네자드 인맥'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공학적 사고방식을 정치에 대입했다. 즉,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설계 결함'으로 보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구조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학적 사고는 약점도 안겨주었다. 모든 사회 현상을 효율과 설계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나머지, 정치적 타협이나 복잡한 이해관계의 조정보다는 '정답'이라고 믿는 노선을 밀어붙이는 독단적인 성향이 강화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교통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이는 훗날 시장 시절 전문 관료들과의 잦은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고도의 과학 기술을 공부하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은 이슬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그 기저에 깔린 자유주의나 세속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이른바 '이슬람적 근대화'의 전형적인 모델이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는 대학 내에서도 기도 시간을 엄격히 지켰으며, 학생들에게도 기술적 전문성 못지않은 혁명 정신을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적인 이란 대중에게 "현대적인 지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들던 1986년, 아마디네자드는 전장에서 쌓은 실무적 공학 지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모교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의 전공은 토목공학 중에서도 현대 도시의 혈관이라 불리는 '교통공학 및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몸살을 앓던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 대도시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했던 전문 지식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는 초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낮에는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전방의 보급로를 설계하고 요새화 작업을 감독했으며, 밤에는 도시 교통 시스템의 최적화 이론을 연구했다. 이러한 '현장과 이론의 결합'은 그가 훗날 행정가로서 보여준 특유의 불도저식 추진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수치 계산에 그치지 않고, 도로망의 확충이 하층민의 물류 이동과 삶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사회공학적 관점을 견지했다.
1989년, 전쟁이 종결된 후 그는 곧바로 박사 과정에 진입했다. 그의 연구 주제는 '도시 교통 시스템의 효율적 통제 및 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교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매우 치밀하고 분석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복잡한 수식과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교통 흐름을 예측하는 모델링에 능숙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테헤란 시장 시절 대대적인 교통 체계 개편을 단행할 때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이란 내에서도 상당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8] 그는 1997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명실상부한 '교통공학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는 당시 이란 정계의 주류였던 성직자 계급이나 순수 정통 정치인들과는 차별화되는 그만의 독보적인 무기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가 얻은 것은 박사 학위라는 증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이들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내각의 실무진으로 합류하는 '아마디네자드 인맥'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공학적 사고방식을 정치에 대입했다. 즉,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설계 결함'으로 보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구조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학적 사고는 약점도 안겨주었다. 모든 사회 현상을 효율과 설계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나머지, 정치적 타협이나 복잡한 이해관계의 조정보다는 '정답'이라고 믿는 노선을 밀어붙이는 독단적인 성향이 강화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교통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이는 훗날 시장 시절 전문 관료들과의 잦은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고도의 과학 기술을 공부하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은 이슬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그 기저에 깔린 자유주의나 세속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이른바 '이슬람적 근대화'의 전형적인 모델이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는 대학 내에서도 기도 시간을 엄격히 지켰으며, 학생들에게도 기술적 전문성 못지않은 혁명 정신을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적인 이란 대중에게 "현대적인 지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2.5. 행정가로서의 첫걸음, 마쿠와 코이 시장[편집]
1980년대 중반,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혁명수비대에서의 군 복무와 학업을 병행하며 정치적·행정적 역량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1986년, 그는 서아제르바이잔 주의 접경 도시인 마쿠의 시장으로 임명되며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관직 임용을 넘어, 혁명 1세대 대학생들이 국가 운영의 실무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마쿠는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험준한 산악 지형의 도시다. 지리적 특성상 밀수와 국경 분쟁이 잦았으며,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소외된 지역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중앙 정부의 관료적 태도를 버리고 '현장 밀착형' 행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는 대신, 직접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을 누비며 주민들의 고충을 들었다. 당시 마쿠는 기반 시설이 매우 열악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토목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전공 지식을 살려 도로 정비와 하수도 시설 확충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예산 부족을 핑계 대기보다 혁명수비대 시절 익힌 '돌파력'을 발휘하여 자원을 동원했고, 이는 주민들에게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이 아니라 일하는 기술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9]
마쿠에서의 성공적인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인근의 더 큰 도시인 코이의 시장으로 영전한다. 코이 시장 재임 시절,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행정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 곳곳에 이슬람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상징물들을 설치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자선 활동을 시청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그는 '부패 척결'을 행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공무원들의 뇌물 수수를 엄격히 금지하고,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던 각종 인허가 절차를 투명화(혹은 보수 세력 위주로 재편)했다. 그는 시장으로서의 판공비를 최소화하고 집무실의 화려한 가구를 치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대선에서 활용할 '서민 프레임'의 원형이 되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단순한 시장을 넘어 서아제르바이잔 주와 인근 지역 보수파 인사들과의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알리 아크바르 타하니와(Ali Akbar Tahaee) 등과의 교류는 그가 훗날 아르다빌 주지사로 승진하고 테헤란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교두보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지방 행정을 통해 이란 사회의 심각한 지역 불균형과 빈부격차를 목격했다. 테헤란의 엘리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지방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피부로 느낀 그는, "중앙의 부를 지방과 서민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포퓰리즘적 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그에게 마쿠와 코이는 단순한 부임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 철학을 검증하고 다듬는 공간과도 같았다.
1980년대 후반, 이란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시장으로서 배급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암시장을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 가족들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혁명 수호 세력 내부에서 그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10]
당시 아마디네자드를 지켜본 이들은 그를 '매우 꼼꼼한 엔지니어'이자 '지나치게 원칙적인 혁명가'로 기억한다. 그는 도로 건설의 시멘트 배합 비율까지 직접 체크할 정도로 기술적 디테일에 집착하면서도, 모든 행정의 결론은 "이것이 이슬람 혁명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로 귀결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대해 행정 전문가들은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는 시장 개인의 카리스마와 활동력에 의존하는 '1인 행정'의 전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비춰진 그의 모습은 '부패한 중앙 관료와 달리 현장에서 직접 뛰는 정직한 일꾼'이었다.
마쿠는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험준한 산악 지형의 도시다. 지리적 특성상 밀수와 국경 분쟁이 잦았으며,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소외된 지역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중앙 정부의 관료적 태도를 버리고 '현장 밀착형' 행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는 대신, 직접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을 누비며 주민들의 고충을 들었다. 당시 마쿠는 기반 시설이 매우 열악했는데, 아마디네자드는 토목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전공 지식을 살려 도로 정비와 하수도 시설 확충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예산 부족을 핑계 대기보다 혁명수비대 시절 익힌 '돌파력'을 발휘하여 자원을 동원했고, 이는 주민들에게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이 아니라 일하는 기술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9]
마쿠에서의 성공적인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인근의 더 큰 도시인 코이의 시장으로 영전한다. 코이 시장 재임 시절,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행정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 곳곳에 이슬람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상징물들을 설치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자선 활동을 시청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그는 '부패 척결'을 행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공무원들의 뇌물 수수를 엄격히 금지하고,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던 각종 인허가 절차를 투명화(혹은 보수 세력 위주로 재편)했다. 그는 시장으로서의 판공비를 최소화하고 집무실의 화려한 가구를 치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대선에서 활용할 '서민 프레임'의 원형이 되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단순한 시장을 넘어 서아제르바이잔 주와 인근 지역 보수파 인사들과의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알리 아크바르 타하니와(Ali Akbar Tahaee) 등과의 교류는 그가 훗날 아르다빌 주지사로 승진하고 테헤란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교두보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지방 행정을 통해 이란 사회의 심각한 지역 불균형과 빈부격차를 목격했다. 테헤란의 엘리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지방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피부로 느낀 그는, "중앙의 부를 지방과 서민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포퓰리즘적 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그에게 마쿠와 코이는 단순한 부임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 철학을 검증하고 다듬는 공간과도 같았다.
1980년대 후반, 이란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시장으로서 배급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암시장을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 가족들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혁명 수호 세력 내부에서 그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10]
당시 아마디네자드를 지켜본 이들은 그를 '매우 꼼꼼한 엔지니어'이자 '지나치게 원칙적인 혁명가'로 기억한다. 그는 도로 건설의 시멘트 배합 비율까지 직접 체크할 정도로 기술적 디테일에 집착하면서도, 모든 행정의 결론은 "이것이 이슬람 혁명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로 귀결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대해 행정 전문가들은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는 시장 개인의 카리스마와 활동력에 의존하는 '1인 행정'의 전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비춰진 그의 모습은 '부패한 중앙 관료와 달리 현장에서 직접 뛰는 정직한 일꾼'이었다.
2.6. 아르다빌 주지사 임명[편집]
1993년, 당시 이란 내무부는 아제르바이잔 접경 지역인 이스트 아제르바이잔 주에서 분리 신설된 아르다빌 주의 초대 주지사로 그를 전격 발탁했다. 이는 그가 마쿠와 코이 시장 시절 보여준 성실함과 혁명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중앙 정부의 보수 세력에게 높게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아르다빌 주는 신설 당시 행정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 한 척박한 상태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주지사 취임 직후 특유의 '현장 중심 행정'을 펼쳤다. 그는 주지사 관저에 앉아 보고를 받기보다, 매일같이 공사 현장을 누비며 도로, 교량, 하수도 등 기초 인프라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공학 박사 출신답게 토목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집착했다. 당시 아르다빌의 추운 기후를 고려하여 겨울철 공사 공법을 직접 지시하거나,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자재 조달 과정을 꼼꼼히 검토하는 등 '기술자 출신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러한 행보는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던 기존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는 "일 잘하는 젊은 주지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
주지사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시련은 1997년에 발생한 아르다빌 대지진이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이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지진 발생 직후 피해 현장에 상주하며 구조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특히 텐트 보급과 식량 배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부패를 차단하기 위해 군과 경찰을 효율적으로 통제했으며, 중앙 정부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 주 정부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피해 복구에 나섰다. 당시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중앙 관료들은 그의 위기 대처 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그가 단순한 기술 관료를 넘어 대규모 조직을 이끌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아르다빌 주지사 시절은 아마디네자드가 이란 내 강경 보수파 엘리트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공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측근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시켰다. 특히 혁명수비대(IRGC) 인맥을 행정직에 대거 기용하며, 훗날 자신의 정치적 근위대가 될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태동하던 보수 청년 정치 결사체인 '이슬람 개발 이란 연합(Etelaf-e Abadgaran-e Iran-e Eslami, 약칭 아바드 가란)'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12] 아마디네자드는 이 조직의 이론적 토대인 '혁명 정신으로의 회귀'와 '기술 관료적 효율성'을 몸소 실천하는 모델 케이스였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행정가 경력은 1997년 대선에서 개혁파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중단된다. 하타미 정권의 내무부는 보수 색채가 짙고 강경한 아마디네자드를 주지사직에서 해임했다. 이는 그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 진영 내에서는 '개혁파의 탄압을 받는 순교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했다.
야인이 된 아마디네자드는 모교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강단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아르다빌 주지사 시절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보수 진영의 재결집을 도모했다. 특히 하타미 정부의 개혁 정책이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자, 그는 "혁명의 가치를 저버린 지식인들이 서민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주지사 시절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테헤란이라는 거대한 전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비록 주지사직에서는 물러났으나, 그가 아르다빌의 척박한 땅에 심어놓은 인적·정치적 자산은 훗날 그가 '테헤란 시장'이라는 직함을 거쳐 대통령궁으로 입성하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아르다빌 주는 신설 당시 행정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 한 척박한 상태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주지사 취임 직후 특유의 '현장 중심 행정'을 펼쳤다. 그는 주지사 관저에 앉아 보고를 받기보다, 매일같이 공사 현장을 누비며 도로, 교량, 하수도 등 기초 인프라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공학 박사 출신답게 토목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집착했다. 당시 아르다빌의 추운 기후를 고려하여 겨울철 공사 공법을 직접 지시하거나,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자재 조달 과정을 꼼꼼히 검토하는 등 '기술자 출신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러한 행보는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던 기존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는 "일 잘하는 젊은 주지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
주지사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시련은 1997년에 발생한 아르다빌 대지진이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이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지진 발생 직후 피해 현장에 상주하며 구조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특히 텐트 보급과 식량 배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부패를 차단하기 위해 군과 경찰을 효율적으로 통제했으며, 중앙 정부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 주 정부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피해 복구에 나섰다. 당시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중앙 관료들은 그의 위기 대처 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그가 단순한 기술 관료를 넘어 대규모 조직을 이끌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아르다빌 주지사 시절은 아마디네자드가 이란 내 강경 보수파 엘리트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공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측근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시켰다. 특히 혁명수비대(IRGC) 인맥을 행정직에 대거 기용하며, 훗날 자신의 정치적 근위대가 될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태동하던 보수 청년 정치 결사체인 '이슬람 개발 이란 연합(Etelaf-e Abadgaran-e Iran-e Eslami, 약칭 아바드 가란)'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12] 아마디네자드는 이 조직의 이론적 토대인 '혁명 정신으로의 회귀'와 '기술 관료적 효율성'을 몸소 실천하는 모델 케이스였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행정가 경력은 1997년 대선에서 개혁파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중단된다. 하타미 정권의 내무부는 보수 색채가 짙고 강경한 아마디네자드를 주지사직에서 해임했다. 이는 그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 진영 내에서는 '개혁파의 탄압을 받는 순교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했다.
야인이 된 아마디네자드는 모교인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강단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아르다빌 주지사 시절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보수 진영의 재결집을 도모했다. 특히 하타미 정부의 개혁 정책이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자, 그는 "혁명의 가치를 저버린 지식인들이 서민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주지사 시절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테헤란이라는 거대한 전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비록 주지사직에서는 물러났으나, 그가 아르다빌의 척박한 땅에 심어놓은 인적·정치적 자산은 훗날 그가 '테헤란 시장'이라는 직함을 거쳐 대통령궁으로 입성하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2.7. 개혁파 하타미 정권과의 갈등[편집]
1997년, 이란 정계에는 이른바 '테헤란의 봄'이라 불리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온건 개혁파 성향의 모함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란 사회는 표현의 자유 확대, 여성 인권 신장, 서방과의 대화 시도라는 유례없는 개혁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혁명 수호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던 보수 강경파 세력에게는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도발로 비춰졌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중앙 정계의 변방에서 개혁파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보수 세력의 차세대 리더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하타미 대통령이 주창한 '문명 간의 대화(Dialogue Among Civilizations)'는 이란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를 포함한 강경파들에게 이는 '서구 문화에 대한 굴복'이자 '이슬람 혁명 정신의 변절'이었다. 당시 아르다빌 주지사 직에서 물러나 대학 교수로 복직해 있던 아마디네자드는 강단과 비공식 정치 모임을 오가며 하타미 정권의 자유주의적 행보를 맹비난했다.
그는 하타미의 개혁이 서구의 '문화적 침투(Cultural Invasion)'를 허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학가 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자유주의 물결과 팔레비 왕조 시대에 대한 향수, 이슬람 복장 규정(히잡)에 대한 완화 움직임은 그에게 있어 반드시 척결해야 할 '내부의 적'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의 직속 세력과 교감을 넓히며, 개혁파에 대항할 조직적인 보수 결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00년대 초반, 보수파는 선거 연합체인 이슬람 이란 개발자 연합(Etelāf-e Ābādgarān-e Īrān-e Eslāmī), 약칭 '아바드 가란'을 창설한다. 이 조직은 기존의 고루한 노년층 보수 정치인들과 달리, 아마디네자드와 같은 40~50대의 '혁명수비대 출신 기술 관료'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연합의 핵심 전략가이자 행동대장이었다. 그들은 하타미 정권이 거대 담론인 '민주주의'와 '인권'에 매몰된 사이, 실질적인 서민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배부른 지식인들의 말잔치보다 서민들의 밥상이 중요하다"는 논리는 테헤란 남부의 빈민층과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강점인 '청렴함'과 '공학적 실행력'을 강조하며, 개혁파를 '무능하고 부패한 엘리트 집단'으로 프레이밍하는 데 성공했다.[13]
갈등의 정점은 2003년 제2차 지방의회 선거에서 찍혔다. 개혁파 정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대거 투표를 포기했고, 조직력을 앞세운 아바드 가란은 테헤란 시의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승리는 아마디네자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시의회를 장악한 보수파는 곧바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를 테헤란 시장으로 지명했다.
당시 개혁파 내각은 아마디네자드의 시장 임명을 저지하기 위해 행정적 압박을 가했으나, 그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의 묵시적 지지를 바탕으로 시장직 취임을 강행했다. 이는 하타미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란 내 권력의 추가 다시 강경 보수파로 기울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하타미 정권과의 투쟁을 단순한 정권 다툼이 아닌 '종교적 성전'으로 규정했다. 그는 하타미가 강조한 '시민 사회'라는 개념이 이슬람적 '움마(Ummah, 신앙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심취했던 12이맘파 시아파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맘 마흐디(Mahdi, 숨겨진 이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이란 공화국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주장하며, 세속적인 개혁론자들을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하는 반역자로 몰아세웠. 이러한 원리주의적 태도는 합리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나, 역설적으로 변화에 공포를 느끼던 전통적 보수층과 혁명수비대 하급 대원들에게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작용했다.[14]
하타미 정권 기간 동안 이란은 거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으나, 부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테헤란 시내의 호화로운 개발 사업을 중단시키고, 그 예산을 빈민가의 무료 배식과 저금리 대출에 쏟아부었다.
그는 하타미의 외교적 성과를 "서방에 구걸하여 얻은 굴욕적 결과"라고 폄하하는 동시에, 국가의 자원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억압받는 자(Mustazafin)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실행한 '현금 보조금 정책'의 프로토타입이었으며, 개혁파의 '정치적 자유'를 '배부른 소리'로 전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타미 대통령이 주창한 '문명 간의 대화(Dialogue Among Civilizations)'는 이란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를 포함한 강경파들에게 이는 '서구 문화에 대한 굴복'이자 '이슬람 혁명 정신의 변절'이었다. 당시 아르다빌 주지사 직에서 물러나 대학 교수로 복직해 있던 아마디네자드는 강단과 비공식 정치 모임을 오가며 하타미 정권의 자유주의적 행보를 맹비난했다.
그는 하타미의 개혁이 서구의 '문화적 침투(Cultural Invasion)'를 허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학가 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자유주의 물결과 팔레비 왕조 시대에 대한 향수, 이슬람 복장 규정(히잡)에 대한 완화 움직임은 그에게 있어 반드시 척결해야 할 '내부의 적'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의 직속 세력과 교감을 넓히며, 개혁파에 대항할 조직적인 보수 결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00년대 초반, 보수파는 선거 연합체인 이슬람 이란 개발자 연합(Etelāf-e Ābādgarān-e Īrān-e Eslāmī), 약칭 '아바드 가란'을 창설한다. 이 조직은 기존의 고루한 노년층 보수 정치인들과 달리, 아마디네자드와 같은 40~50대의 '혁명수비대 출신 기술 관료'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연합의 핵심 전략가이자 행동대장이었다. 그들은 하타미 정권이 거대 담론인 '민주주의'와 '인권'에 매몰된 사이, 실질적인 서민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배부른 지식인들의 말잔치보다 서민들의 밥상이 중요하다"는 논리는 테헤란 남부의 빈민층과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강점인 '청렴함'과 '공학적 실행력'을 강조하며, 개혁파를 '무능하고 부패한 엘리트 집단'으로 프레이밍하는 데 성공했다.[13]
갈등의 정점은 2003년 제2차 지방의회 선거에서 찍혔다. 개혁파 정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대거 투표를 포기했고, 조직력을 앞세운 아바드 가란은 테헤란 시의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승리는 아마디네자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시의회를 장악한 보수파는 곧바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를 테헤란 시장으로 지명했다.
당시 개혁파 내각은 아마디네자드의 시장 임명을 저지하기 위해 행정적 압박을 가했으나, 그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의 묵시적 지지를 바탕으로 시장직 취임을 강행했다. 이는 하타미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란 내 권력의 추가 다시 강경 보수파로 기울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하타미 정권과의 투쟁을 단순한 정권 다툼이 아닌 '종교적 성전'으로 규정했다. 그는 하타미가 강조한 '시민 사회'라는 개념이 이슬람적 '움마(Ummah, 신앙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심취했던 12이맘파 시아파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맘 마흐디(Mahdi, 숨겨진 이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이란 공화국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주장하며, 세속적인 개혁론자들을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하는 반역자로 몰아세웠. 이러한 원리주의적 태도는 합리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나, 역설적으로 변화에 공포를 느끼던 전통적 보수층과 혁명수비대 하급 대원들에게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작용했다.[14]
하타미 정권 기간 동안 이란은 거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으나, 부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테헤란 시내의 호화로운 개발 사업을 중단시키고, 그 예산을 빈민가의 무료 배식과 저금리 대출에 쏟아부었다.
그는 하타미의 외교적 성과를 "서방에 구걸하여 얻은 굴욕적 결과"라고 폄하하는 동시에, 국가의 자원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억압받는 자(Mustazafin)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실행한 '현금 보조금 정책'의 프로토타입이었으며, 개혁파의 '정치적 자유'를 '배부른 소리'로 전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8. 테헤란 시장 당선[편집]
1997년 모함마드 하타미 대통령의 당선 이후 6년간 이어진 개혁파의 독주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강경 보수파는 재집결을 시도했다. 이 반격의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였다.
2003년 2월 실시된 제2회 이란 지방선거는 개혁파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하타미 정부는 언론의 자유 확대와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보수적인 사법부와 헌법수호위원회의 조직적인 방해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난이 지속되면서 개혁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청년층과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는 "말만 번지르르할 뿐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라는 회의론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간파한 강경 보수파는 '이슬람 개발자 연합'(Etelaf-e Abadgaran-e Iran-e Eslami, 약칭 아바드 가란)이라는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기존 보수파의 노회하고 부패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실용주의적 기술 관료'와 '청렴한 혁명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연합의 핵심 전략가이자 간판 모델로 활동하며, 철저하게 '민생'과 '이슬람 가치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개혁파 지지자들이 투표를 보이콧하거나 대거 기권하면서 투표율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그 결과 보수파인 아바드 가란이 테헤란 시의회 15석 전체를 싹쓸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 시의회는 2003년 5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를 제24대 테헤란 시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테헤란 시장에 취임한 아마디네자드는 기존 시장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취임 직후 시장실의 호화로운 가구들을 치우고, 자신이 시장이 되기 전 살던 나르마크의 낡은 아파트에서 계속 출퇴근하며 서민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으며, 소박한 면직 점퍼(훗날 '아마디네자드 재킷'이라 불리게 됨)를 즐겨 입었다. 이는 화려한 예복을 입던 기득권 정치인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하층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또한 매일 새벽 테헤란 곳곳의 청소 현장이나 공사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시장이 직접 거리의 쓰레기를 줍거나 노동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은 국영 방송을 통해 연일 보도되었고, 이는 그를 '일하는 시장'으로 각인시켰다.
시장 직속의 자선 기금을 대폭 확충하여 저소득층의 결혼 비용을 지원하거나 생필품을 배부하는 등 직접적인 시혜성 정책을 펼쳤다. 이는 훗날 대선에서 그의 강력한 표밭이 되는 '종교적 빈민층'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의 행정은 효율적이었으나, 동시에 개혁파가 일구어놓은 문화적 자산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전임 시장들이 조성했던 문화 센터(Culture Houses)들이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이슬람 전통을 해친다"고 비판하며, 이들을 종교 교육 시설이나 기도실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고가도로 건설과 도로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토목공학 박사라는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복잡한 테헤란의 교통 체증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이 과정에서 녹지 공간이 훼손된다는 환경론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남녀 분리 정책을 공공장소에 엄격히 적용하려 시도하는 등, 사회 전반에 보수적 기풍을 불어넣으려 했다.
특히 엘리베이터 내 남녀 분리 탑승 권고나 시청 공무원들의 복장 규제 강화는 테헤란의 개명된 중산층으로부터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을 샀지만, 역설적으로 지방과 위성 도시의 보수층에게는 "드디어 제대로 된 무슬림 지도자가 나타났다"는 환호를 받았다.
아마디네자드는 시장이라는 직함을 발판 삼아 당시 대통령이었던 모함마드 하타미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는 중앙 정부가 테헤란 시에 할당된 예산을 정치적 이유로 지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자신을 '기득권에 탄압받는 투사'로 묘사했다.
한번은 하타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그를 초대하지 않자, 그는 이를 "테헤란 시민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쳤다. 이러한 갈등은 그를 단순히 한 도시의 행정가가 아니라, 차기 보수파의 대권 주자라는 체급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중앙 정부의 관료주의를 공격하며 "나는 국민을 위해 일할 뿐,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프레임을 구축했다.
시장 재임 2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테헤란이라는 거대 도시를 자신의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는 포퓰리즘적 복지, 강경한 이슬람주의, 그리고 실천력 있는 기술 관료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하나로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란의 실권자였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역시 이 패기 넘치는 젊은 시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부패 의혹이 끊이지 않던 기존 보수파 거물들에 비해, 아마디네자드는 청렴함과 충성심을 동시에 갖춘 매력적인 카드였다. 2005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시장직을 사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임무는 테헤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란 전체를 혁명의 정신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선언은 훗날 국제 사회를 뒤흔들 '아마디네자드 시대'의 서막이었다.[15]
2003년 2월 실시된 제2회 이란 지방선거는 개혁파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하타미 정부는 언론의 자유 확대와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보수적인 사법부와 헌법수호위원회의 조직적인 방해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난이 지속되면서 개혁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청년층과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는 "말만 번지르르할 뿐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라는 회의론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간파한 강경 보수파는 '이슬람 개발자 연합'(Etelaf-e Abadgaran-e Iran-e Eslami, 약칭 아바드 가란)이라는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기존 보수파의 노회하고 부패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실용주의적 기술 관료'와 '청렴한 혁명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연합의 핵심 전략가이자 간판 모델로 활동하며, 철저하게 '민생'과 '이슬람 가치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개혁파 지지자들이 투표를 보이콧하거나 대거 기권하면서 투표율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그 결과 보수파인 아바드 가란이 테헤란 시의회 15석 전체를 싹쓸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 시의회는 2003년 5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를 제24대 테헤란 시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테헤란 시장에 취임한 아마디네자드는 기존 시장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취임 직후 시장실의 호화로운 가구들을 치우고, 자신이 시장이 되기 전 살던 나르마크의 낡은 아파트에서 계속 출퇴근하며 서민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으며, 소박한 면직 점퍼(훗날 '아마디네자드 재킷'이라 불리게 됨)를 즐겨 입었다. 이는 화려한 예복을 입던 기득권 정치인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하층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또한 매일 새벽 테헤란 곳곳의 청소 현장이나 공사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시장이 직접 거리의 쓰레기를 줍거나 노동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은 국영 방송을 통해 연일 보도되었고, 이는 그를 '일하는 시장'으로 각인시켰다.
시장 직속의 자선 기금을 대폭 확충하여 저소득층의 결혼 비용을 지원하거나 생필품을 배부하는 등 직접적인 시혜성 정책을 펼쳤다. 이는 훗날 대선에서 그의 강력한 표밭이 되는 '종교적 빈민층'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의 행정은 효율적이었으나, 동시에 개혁파가 일구어놓은 문화적 자산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전임 시장들이 조성했던 문화 센터(Culture Houses)들이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이슬람 전통을 해친다"고 비판하며, 이들을 종교 교육 시설이나 기도실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고가도로 건설과 도로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토목공학 박사라는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복잡한 테헤란의 교통 체증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이 과정에서 녹지 공간이 훼손된다는 환경론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남녀 분리 정책을 공공장소에 엄격히 적용하려 시도하는 등, 사회 전반에 보수적 기풍을 불어넣으려 했다.
특히 엘리베이터 내 남녀 분리 탑승 권고나 시청 공무원들의 복장 규제 강화는 테헤란의 개명된 중산층으로부터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을 샀지만, 역설적으로 지방과 위성 도시의 보수층에게는 "드디어 제대로 된 무슬림 지도자가 나타났다"는 환호를 받았다.
아마디네자드는 시장이라는 직함을 발판 삼아 당시 대통령이었던 모함마드 하타미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는 중앙 정부가 테헤란 시에 할당된 예산을 정치적 이유로 지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자신을 '기득권에 탄압받는 투사'로 묘사했다.
한번은 하타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그를 초대하지 않자, 그는 이를 "테헤란 시민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쳤다. 이러한 갈등은 그를 단순히 한 도시의 행정가가 아니라, 차기 보수파의 대권 주자라는 체급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중앙 정부의 관료주의를 공격하며 "나는 국민을 위해 일할 뿐,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프레임을 구축했다.
시장 재임 2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테헤란이라는 거대 도시를 자신의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는 포퓰리즘적 복지, 강경한 이슬람주의, 그리고 실천력 있는 기술 관료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하나로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란의 실권자였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역시 이 패기 넘치는 젊은 시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부패 의혹이 끊이지 않던 기존 보수파 거물들에 비해, 아마디네자드는 청렴함과 충성심을 동시에 갖춘 매력적인 카드였다. 2005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시장직을 사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임무는 테헤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란 전체를 혁명의 정신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선언은 훗날 국제 사회를 뒤흔들 '아마디네자드 시대'의 서막이었다.[15]
2.9. 2005년 대선 출마와 '제3의 혁명'[편집]
2005년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역사상 가장 예측 불가능한 분수령이었다. 8년간의 개혁파 하타미 정권이 가져온 서구적 자유화와 경제적 불평등에 지친 민심은 새로운 대안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때 낡은 점퍼를 입고 나타난 테헤란 시장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을 '국민의 하인'이라 자처하며 이란 정계를 정조준했다.
2005년 초, 아마디네자드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중앙 정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대선 판도는 '정치 거물'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귀환과 개혁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요약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전국적인 인지도가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그가 가진 자산은 오직 테헤란 시장으로서 보여준 '서민 행보'뿐이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는 영리했다. 그는 화려한 정책 공약 대신 감성을 파고드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Mishavad va Mitavanim)"는 구호 아래, 그는 부패한 '석유 마피아'를 척결하고 석유 수익을 국민의 식탁으로 직접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하타미 정권 하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지역 빈민들과 도시 노동자층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자신을 '혁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수호자'로 포지셔닝하며, 당시 지식인 중심의 개혁 운동을 '배부른 자들의 유희'로 규정했다.
아마디네자드의 캠프는 자신의 당선을 '제3의 혁명'이라 명명했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이 제1의 혁명,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제2의 혁명이라면, 부패한 내부 기득권을 몰아내는 이번 대선이야말로 혁명의 완성이라는 논리였다. 이 담론은 특히 이란의 준군사 조직인 바시즈와 이란 혁명 수비대 내 젊은 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바시즈 대원들은 자발적으로 전단지를 뿌리고 벽보를 붙이며 아마디네자드의 수족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냄새를 맡았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닌, 전장을 누볐던 공학도 출신의 '진짜 혁명가'라는 이미지는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그는 줄곧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렀으나, 바닥 민심은 이미 거대한 해일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선 기간 내내 아마디네자드가 보여준 모습은 기존 정치인들과는 판이했다. 그는 비싼 양복 대신 시장에서 파는 저렴한 미색 점퍼를 입고 유세 현장에 나타났다. 고위 관료들이 최고급 승용차를 탈 때 그는 낡은 페이칸을 고집했으며, 호화로운 만찬 대신 빵과 치즈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노출했다.
이러한 행보는 상대 후보였던 라프산자니의 '부유한 귀족'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라프산자니는 이란 내 최대 부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고, 국민들에게는 '실용주의자'인 동시에 '기득권의 정점'으로 인식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놓치지 않고 "나는 여러분과 같은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임을 강조하며 계급적 투쟁심을 자극했다. 그는 TV 토론에서도 세련된 논리보다는 투박하지만 진정성 있는 어조로 서민의 언어를 사용했다.
2005년 6월 17일 실시된 제1차 투표 결과는 전 세계를 경악게 했다. 압도적 1위가 예상되었던 라프산자니가 21%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마디네자드가 19.4%를 득표하며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한 것이다.[16]
이 결과는 이란 정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개혁파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라프산자니를 지지하며 결집하려 했으나, 이미 기세는 아마디네자드에게 기울어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진정한 혁명 세력과 부패한 자본가 사이의 전쟁"이라며 결선 투표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아마디네자드의 부상은 단순히 개인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타미 정권 8년 동안 이란은 문화적 개방을 이룩했으나, 정작 서민들의 삶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실업률은 치솟았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다. 이때 등장한 아마디네자드의 '분배'와 '정의' 메시지는 종교적 신념을 넘어 생존의 욕구와 맞닿아 있었다.
또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현대적인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는 핵 개발을 "이란의 자존심"으로 묘사하며, 서방에 저항하는 강인한 지도자상을 구축했다. 이는 굴욕적인 외교를 거부하는 젊은 층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했다.
6월 24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아마디네자드는 61.6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라프산자니(35.93%)를 침몰시켰다. 이 승리는 1979년 이란 혁명에 이은 '제3의 혁명'이라 불릴 만큼 이란 정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투표율은 60%에 달했으며, 특히 보수적인 종교인들과 혁명수비대, 바시지(Basij) 민병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당선 확정 후 아마디네자드는 "오늘의 승리는 억압받는 자들의 승리이며, 이맘 호메이니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신의 뜻으로 돌렸으며, 이는 향후 8년간 이란을 지배할 강경 보수주의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서방 언론은 이 결과에 대해 "이란이 다시 암흑기로 돌아갔다"며 우려 섞인 보도를 쏟아냈지만, 이란의 남부 거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는 단순히 개인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타미 정권은 정치적 자유와 담론에는 집중했으나, 정작 서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물가 문제와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배고픈 민중에게 '문명 간의 대화'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혁명 1세대인 라프산자니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전후 세대(War Generation)를 대표하는 아마디네자드는 새로운 에너지를 상징했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으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라프산자니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다루기 쉽고 충성스러운 '젊은 사자' 아마디네자드가 라프산자니를 견제해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17]
결국 이 선거 결과는 이란의 대내외 정책을 180도 바꿔놓았다. 유화적이었던 대미 외교는 적대적으로 변했고, 잠잠했던 핵 문제는 다시금 국제 사회의 화약고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란 내부적으로는 '포퓰리즘'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어떻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승리 직후 테헤란 시장 직무를 마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란의 자원은 이제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이는 기득권층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향후 그가 펼칠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국정 운영의 예고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르마크의 가난한 소년이 아니라, 7,000만 국민의 운명을 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2005년 초, 아마디네자드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중앙 정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대선 판도는 '정치 거물'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귀환과 개혁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요약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전국적인 인지도가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그가 가진 자산은 오직 테헤란 시장으로서 보여준 '서민 행보'뿐이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는 영리했다. 그는 화려한 정책 공약 대신 감성을 파고드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Mishavad va Mitavanim)"는 구호 아래, 그는 부패한 '석유 마피아'를 척결하고 석유 수익을 국민의 식탁으로 직접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하타미 정권 하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지역 빈민들과 도시 노동자층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자신을 '혁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수호자'로 포지셔닝하며, 당시 지식인 중심의 개혁 운동을 '배부른 자들의 유희'로 규정했다.
아마디네자드의 캠프는 자신의 당선을 '제3의 혁명'이라 명명했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이 제1의 혁명,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제2의 혁명이라면, 부패한 내부 기득권을 몰아내는 이번 대선이야말로 혁명의 완성이라는 논리였다. 이 담론은 특히 이란의 준군사 조직인 바시즈와 이란 혁명 수비대 내 젊은 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바시즈 대원들은 자발적으로 전단지를 뿌리고 벽보를 붙이며 아마디네자드의 수족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냄새를 맡았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닌, 전장을 누볐던 공학도 출신의 '진짜 혁명가'라는 이미지는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그는 줄곧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렀으나, 바닥 민심은 이미 거대한 해일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선 기간 내내 아마디네자드가 보여준 모습은 기존 정치인들과는 판이했다. 그는 비싼 양복 대신 시장에서 파는 저렴한 미색 점퍼를 입고 유세 현장에 나타났다. 고위 관료들이 최고급 승용차를 탈 때 그는 낡은 페이칸을 고집했으며, 호화로운 만찬 대신 빵과 치즈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노출했다.
이러한 행보는 상대 후보였던 라프산자니의 '부유한 귀족'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라프산자니는 이란 내 최대 부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고, 국민들에게는 '실용주의자'인 동시에 '기득권의 정점'으로 인식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놓치지 않고 "나는 여러분과 같은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임을 강조하며 계급적 투쟁심을 자극했다. 그는 TV 토론에서도 세련된 논리보다는 투박하지만 진정성 있는 어조로 서민의 언어를 사용했다.
2005년 6월 17일 실시된 제1차 투표 결과는 전 세계를 경악게 했다. 압도적 1위가 예상되었던 라프산자니가 21%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마디네자드가 19.4%를 득표하며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한 것이다.[16]
이 결과는 이란 정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개혁파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라프산자니를 지지하며 결집하려 했으나, 이미 기세는 아마디네자드에게 기울어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진정한 혁명 세력과 부패한 자본가 사이의 전쟁"이라며 결선 투표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아마디네자드의 부상은 단순히 개인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타미 정권 8년 동안 이란은 문화적 개방을 이룩했으나, 정작 서민들의 삶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실업률은 치솟았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다. 이때 등장한 아마디네자드의 '분배'와 '정의' 메시지는 종교적 신념을 넘어 생존의 욕구와 맞닿아 있었다.
또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현대적인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는 핵 개발을 "이란의 자존심"으로 묘사하며, 서방에 저항하는 강인한 지도자상을 구축했다. 이는 굴욕적인 외교를 거부하는 젊은 층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했다.
6월 24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아마디네자드는 61.6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라프산자니(35.93%)를 침몰시켰다. 이 승리는 1979년 이란 혁명에 이은 '제3의 혁명'이라 불릴 만큼 이란 정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투표율은 60%에 달했으며, 특히 보수적인 종교인들과 혁명수비대, 바시지(Basij) 민병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당선 확정 후 아마디네자드는 "오늘의 승리는 억압받는 자들의 승리이며, 이맘 호메이니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신의 뜻으로 돌렸으며, 이는 향후 8년간 이란을 지배할 강경 보수주의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서방 언론은 이 결과에 대해 "이란이 다시 암흑기로 돌아갔다"며 우려 섞인 보도를 쏟아냈지만, 이란의 남부 거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는 단순히 개인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타미 정권은 정치적 자유와 담론에는 집중했으나, 정작 서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물가 문제와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배고픈 민중에게 '문명 간의 대화'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혁명 1세대인 라프산자니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전후 세대(War Generation)를 대표하는 아마디네자드는 새로운 에너지를 상징했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으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라프산자니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다루기 쉽고 충성스러운 '젊은 사자' 아마디네자드가 라프산자니를 견제해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17]
결국 이 선거 결과는 이란의 대내외 정책을 180도 바꿔놓았다. 유화적이었던 대미 외교는 적대적으로 변했고, 잠잠했던 핵 문제는 다시금 국제 사회의 화약고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란 내부적으로는 '포퓰리즘'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어떻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승리 직후 테헤란 시장 직무를 마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란의 자원은 이제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이는 기득권층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향후 그가 펼칠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국정 운영의 예고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르마크의 가난한 소년이 아니라, 7,000만 국민의 운명을 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2.10. 대통령 취임과 제1기 정권[편집]
2005년 8월,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면서 이란 정계는 유례없는 지각변동을 맞이했다. 전임 모하마드 하타미 정부의 개혁파 인사들이 물러난 자리에,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강경 보수 진영과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 인물들을 대거 전면에 배치했다. 이는 단순히 정권 교체를 넘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권력 구조 자체를 '기술 관료' 중심에서 '신념적 군사 관료'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아마디네자드는 내각 인선의 제1원칙으로 '도덕적 청렴성'과 '혁명적 가치에 대한 충성'을 내세웠다. 그는 취임사에서 "부패한 기득권층의 손을 자르고, 혁명의 자산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기존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 대신, 상대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디네자드와 뜻을 같이했던 소장파 학자들과 군 출신 인사들이 발탁되었다.
특히 그는 테헤란 시장 시절 자신의 손과 발이 되었던 이른바 '나르마크 인맥'을 중용했다. 이는 기존의 보수 주류 세력이었던 '전통적 보수파(Bazaari)'조차 당혹스럽게 만든 파격이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내각은 국정 운영의 파트너라기보다 자신의 혁명적 의지를 관철할 '행동대'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행정 경험이 전무한 인사들이 대거 입성하면서, 초기 국정 운영의 효율성보다는 이념적 선명성이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1기 내각 구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 수비대 출신들의 약진이었다. 아마디네자드 본인부터가 혁명 수비대 장교 출신이었기에, 그는 군대식 조직 문화와 충성심을 행정 조직에 이식하려 했다. 국방부, 내무부, 정보부 등 국가의 핵심 사정기관과 안보 부처의 장관들이 줄줄이 수비대 출신으로 채워졌다.[18]
이러한 인선은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내부적으로는 경찰과 정보력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효율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대외적으로는 서방 국가들에게 "타협 없는 강경 노선"을 걷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혁명 수비대는 단순히 안보 부처에만 머물지 않고, 건설, 에너지, 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 분야에도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에게 대규모 국책 사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친위대로 삼았으며, 이는 훗날 '군부의 거대 경제 집단화'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러나 내각 구성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비록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던 이란 의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디네자드가 추천한 일부 각료 후보자들의 자질 문제는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석유부 장관 후보자들이 전문성 부족과 경력 미달로 인해 연달아 부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19]
의원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예스맨'들로만 채워진 내각이 국정의 전문성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회의 비판을 '기득권의 저항'으로 규정하며 여론을 선동했고, 결국 자신의 의중을 상당 부분 관철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아마디네자드와 의회 간의 긴장 관계는 그의 임기 8년 내내 반복되는 정치적 갈등의 서막이었다.
의회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인 골람-호세인 모흐세니-에제이(정보부 장관)는 강경파 성직자 출신으로, 사법부와 정보부 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통했다. 그는 아마디네자드 초기에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언론 검열을 주도했다.
무스타파 모함마드-나자르(국방부 장관)는 혁명 수비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군사적 자립과 핵 프로그램 가속화를 뒷받침했다.
마누체르 모타키(외무부 장관)는 상대적으로 직업 외교관 출신의 면모를 가졌으나, 아마디네자드의 강경한 대외 발언을 국제 사회에 변호하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모두 '서구적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교 신권 정치'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인물들이었으며, 아마디네자드의 "이슬람 세계의 부흥"이라는 원대한(혹은 무모한) 계획의 조력자들이었다.
경제 부처 역시 아마디네자드의 철학에 충실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는 시장 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배제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분배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른바 '정의의 주식(Justice Shares)' 배분과 '이맘 레자 보조금 펀드' 설립 등 파격적인 포퓰리즘 정책들이 이 시기 기획되었다.
이러한 경제 내각의 구성은 단기적으로는 빈곤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란 경제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문적인 거시 경제 분석보다는 대통령의 '의지'와 '자비'가 우선시되는 구조 속에서 인플레이션 수치는 서서히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는 내각 인선의 제1원칙으로 '도덕적 청렴성'과 '혁명적 가치에 대한 충성'을 내세웠다. 그는 취임사에서 "부패한 기득권층의 손을 자르고, 혁명의 자산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기존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 대신, 상대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디네자드와 뜻을 같이했던 소장파 학자들과 군 출신 인사들이 발탁되었다.
특히 그는 테헤란 시장 시절 자신의 손과 발이 되었던 이른바 '나르마크 인맥'을 중용했다. 이는 기존의 보수 주류 세력이었던 '전통적 보수파(Bazaari)'조차 당혹스럽게 만든 파격이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내각은 국정 운영의 파트너라기보다 자신의 혁명적 의지를 관철할 '행동대'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행정 경험이 전무한 인사들이 대거 입성하면서, 초기 국정 운영의 효율성보다는 이념적 선명성이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1기 내각 구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 수비대 출신들의 약진이었다. 아마디네자드 본인부터가 혁명 수비대 장교 출신이었기에, 그는 군대식 조직 문화와 충성심을 행정 조직에 이식하려 했다. 국방부, 내무부, 정보부 등 국가의 핵심 사정기관과 안보 부처의 장관들이 줄줄이 수비대 출신으로 채워졌다.[18]
이러한 인선은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내부적으로는 경찰과 정보력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효율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대외적으로는 서방 국가들에게 "타협 없는 강경 노선"을 걷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혁명 수비대는 단순히 안보 부처에만 머물지 않고, 건설, 에너지, 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 분야에도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에게 대규모 국책 사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친위대로 삼았으며, 이는 훗날 '군부의 거대 경제 집단화'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러나 내각 구성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비록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던 이란 의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디네자드가 추천한 일부 각료 후보자들의 자질 문제는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석유부 장관 후보자들이 전문성 부족과 경력 미달로 인해 연달아 부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19]
의원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예스맨'들로만 채워진 내각이 국정의 전문성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회의 비판을 '기득권의 저항'으로 규정하며 여론을 선동했고, 결국 자신의 의중을 상당 부분 관철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아마디네자드와 의회 간의 긴장 관계는 그의 임기 8년 내내 반복되는 정치적 갈등의 서막이었다.
의회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인 골람-호세인 모흐세니-에제이(정보부 장관)는 강경파 성직자 출신으로, 사법부와 정보부 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통했다. 그는 아마디네자드 초기에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언론 검열을 주도했다.
무스타파 모함마드-나자르(국방부 장관)는 혁명 수비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군사적 자립과 핵 프로그램 가속화를 뒷받침했다.
마누체르 모타키(외무부 장관)는 상대적으로 직업 외교관 출신의 면모를 가졌으나, 아마디네자드의 강경한 대외 발언을 국제 사회에 변호하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모두 '서구적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교 신권 정치'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인물들이었으며, 아마디네자드의 "이슬람 세계의 부흥"이라는 원대한(혹은 무모한) 계획의 조력자들이었다.
경제 부처 역시 아마디네자드의 철학에 충실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는 시장 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배제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분배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른바 '정의의 주식(Justice Shares)' 배분과 '이맘 레자 보조금 펀드' 설립 등 파격적인 포퓰리즘 정책들이 이 시기 기획되었다.
이러한 경제 내각의 구성은 단기적으로는 빈곤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란 경제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문적인 거시 경제 분석보다는 대통령의 '의지'와 '자비'가 우선시되는 구조 속에서 인플레이션 수치는 서서히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2.10.1. 종교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밀월 관계[편집]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2005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 중 하나는 이란의 절대 권력자인 최고 지도자(라흐바르),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의 암묵적 지원이었다. 하메네이는 전임자 무함마드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 개방 정책이 신정 체제의 근간을 흔든다고 판단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혁명의 가치'에 충실한 젊고 강경한 인물을 원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그 요구에 완벽히 부합하는 카드였다.
이란 헌법상 최고 지도자는 군 통수권, 사법권, 국가 주요 정책 결정권을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존재다. 대통령은 행정 수반으로서 실무를 담당하지만, 최고 지도자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중대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아마디네자드는 취임 초기부터 자신을 "최고 지도자의 충실한 병사"로 자처하며 하메네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하메네이 역시 아마디네자드를 각별히 아꼈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검소한 생활 방식과 서구에 대한 타협 없는 태도를 "혁명 정신의 부활"이라며 치하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테헤란 시장 시절부터 보여준 포퓰리즘적 행보는 하메네이가 강조하던 '빈곤 퇴치' 및 '사회 정의' 슬로건과 궤를 같이했다. 하메네이는 공식 석상에서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보수층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이란 정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하메네이의 비호 아래 아마디네자드는 행정부 내의 개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하고, 그 자리를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이나 강경 보수 성향의 기술 관료들로 채웠다. 이는 하메네이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순수 이슬람 정부'의 실현이기도 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를 방패 삼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대통령이 국제 사회에서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핵 개발 강행 등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시선을 끄는 동안, 하메네이는 내부적으로 사법부와 헌법수호위원회를 동원해 야권의 씨를 말렸다.[20] 두 사람의 공조는 핵 문제에 있어서도 빛을 발했다. 하메네이는 핵 개발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규정했고,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실행에 옮기며 서방과의 협상 거부를 천명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종교적 신비주의를 덧입혔는데, 이는 하메네이와의 관계를 단순한 정치적 동맹 이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시아파의 숨어 있는 이맘인 '마디'가 곧 재림할 것이며, 자신의 정부가 그 길을 닦고 있다고 주장했다.[21]
하메네이는 이러한 아마디네자드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최고 지도자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온다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의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를 "서방의 문화적 침공에 맞서 싸우는 이슬람의 기사"로 묘사하며, 그에 대한 비판을 곧 이슬람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밀월 관계의 실질적인 수혜자는 이란 혁명 수비대였다. 하메네이의 축복 속에 아마디네자드는 국가 기간산업 건설 사업권을 혁명수비대 산하 기업인 '카탐 알 안비아(Khatam al-Anbiya)' 등에 몰아주었다.[22]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의 경제적 자문 기구와 긴밀히 협조하며 '석유 수익을 인민의 식탁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막대한 보조금을 살포했다. 하메네이는 이러한 분배 정치를 '이슬람식 복지'로 승인했으며, 이는 지방 빈민층이 아마디네자드를 '성자'처럼 추앙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최고 지도자의 정치적 권위와 대통령의 포퓰리즘적 실행력이 결합하여, 이란은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보수 독점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완벽해 보이던 동맹에도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단순히 하메네이의 대리인이 아니라, 마디와 직접 소통하는 선택받은 지도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 계급 전체를 '부패한 기득권'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직자 통치(벨라야테 파키)를 근간으로 하는 이란 체제의 정점에 있는 하메네이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의 최측근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샤이는 "이란의 이슬람성보다 이란의 민족성이 우선한다"는 민족주의적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범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하메네이의 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하메네이는 마샤이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처음으로 "아니오"라고 답하며 항거의 기미를 보였다.[23]
이란 헌법상 최고 지도자는 군 통수권, 사법권, 국가 주요 정책 결정권을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존재다. 대통령은 행정 수반으로서 실무를 담당하지만, 최고 지도자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중대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아마디네자드는 취임 초기부터 자신을 "최고 지도자의 충실한 병사"로 자처하며 하메네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하메네이 역시 아마디네자드를 각별히 아꼈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검소한 생활 방식과 서구에 대한 타협 없는 태도를 "혁명 정신의 부활"이라며 치하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테헤란 시장 시절부터 보여준 포퓰리즘적 행보는 하메네이가 강조하던 '빈곤 퇴치' 및 '사회 정의' 슬로건과 궤를 같이했다. 하메네이는 공식 석상에서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보수층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이란 정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하메네이의 비호 아래 아마디네자드는 행정부 내의 개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하고, 그 자리를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이나 강경 보수 성향의 기술 관료들로 채웠다. 이는 하메네이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순수 이슬람 정부'의 실현이기도 했다.
이 시기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를 방패 삼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대통령이 국제 사회에서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핵 개발 강행 등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시선을 끄는 동안, 하메네이는 내부적으로 사법부와 헌법수호위원회를 동원해 야권의 씨를 말렸다.[20] 두 사람의 공조는 핵 문제에 있어서도 빛을 발했다. 하메네이는 핵 개발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규정했고,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실행에 옮기며 서방과의 협상 거부를 천명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종교적 신비주의를 덧입혔는데, 이는 하메네이와의 관계를 단순한 정치적 동맹 이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시아파의 숨어 있는 이맘인 '마디'가 곧 재림할 것이며, 자신의 정부가 그 길을 닦고 있다고 주장했다.[21]
하메네이는 이러한 아마디네자드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최고 지도자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온다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의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를 "서방의 문화적 침공에 맞서 싸우는 이슬람의 기사"로 묘사하며, 그에 대한 비판을 곧 이슬람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밀월 관계의 실질적인 수혜자는 이란 혁명 수비대였다. 하메네이의 축복 속에 아마디네자드는 국가 기간산업 건설 사업권을 혁명수비대 산하 기업인 '카탐 알 안비아(Khatam al-Anbiya)' 등에 몰아주었다.[22]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의 경제적 자문 기구와 긴밀히 협조하며 '석유 수익을 인민의 식탁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막대한 보조금을 살포했다. 하메네이는 이러한 분배 정치를 '이슬람식 복지'로 승인했으며, 이는 지방 빈민층이 아마디네자드를 '성자'처럼 추앙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최고 지도자의 정치적 권위와 대통령의 포퓰리즘적 실행력이 결합하여, 이란은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보수 독점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완벽해 보이던 동맹에도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단순히 하메네이의 대리인이 아니라, 마디와 직접 소통하는 선택받은 지도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 계급 전체를 '부패한 기득권'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직자 통치(벨라야테 파키)를 근간으로 하는 이란 체제의 정점에 있는 하메네이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의 최측근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샤이는 "이란의 이슬람성보다 이란의 민족성이 우선한다"는 민족주의적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범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하메네이의 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하메네이는 마샤이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처음으로 "아니오"라고 답하며 항거의 기미를 보였다.[23]
2.10.2. 오일 머니와 분배 정책의 명암[편집]
2005년 집권 초기, 아마디네자드에게는 천운에 가까운 경제적 배경이 주어졌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상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막대한 외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소외 계층과 농촌 지역을 겨냥한 급진적인 소득 재분배 정책을 펼쳤다. 그는 "석유 수입을 국민의 식탁 위로 가져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가 주도의 포퓰리즘 경제 모델을 가동했다.
아마디네자드 경제 정책의 상징은 '레자 사랑의 자비 펀드(Reza Love Compassion Fund)'였다. 그는 대통령 직속으로 거액의 기금을 조성하여 청년들의 결혼 자금, 주택 마련 비용, 창업 자금을 저리로 대출해주었다. 이는 당시 고실업과 주거난에 허덕이던 청년층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지방 순회 국무회의'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테헤란의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는 대신, 전국의 낙후된 마을을 직접 찾아가 현장에서 예산을 집행했다. 도로나 병원이 필요한 마을에 즉석에서 수백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하는 방식은 민중들에게 "드디어 우리를 돌보는 지도자가 나타났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24]
이란은 전통적으로 에너지와 식료품에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투입하여 물가를 낮게 유지해왔다. 아마디네자드는 2010년, 이 비효율적인 간접 보조금을 폐지하고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현금을 입금해주는 '보조금 합리화 계획'을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였으나, 실제 결과는 참혹했다. 보조금이 사라지자마자 전기료, 가스비, 휘발유 가격이 수백 퍼센트씩 폭등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현금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시장에 풀린 막대한 통화량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특히 이란 리알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수입 물가가 치솟자, 중산층은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가 추진한 또 다른 야심작은 무주택자를 위한 대규모 공공 주택 사업인 '메흐르(Mehr) 주택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국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저리 대출을 끌어와 수백만 채의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급하게 지어진 아파트들은 도시 외곽의 인프라가 전혀 없는 황무지에 세워졌고, 부실 공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25] 더욱이 이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어내면서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재임 기간 중 유입된 약 7,000억 달러 이상의 석유 수입은 이란 경제의 체질 개선이 아닌, 일시적인 소모성 비용으로 탕진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산업 구조의 다변화나 기술 혁신 대신, 수입 완제품을 시장에 풀어 물가를 억제하려 했다. 이는 국내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 저렴한 중국산 수입품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이란 내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국가 경제는 오직 석유 수출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심화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전형적인 '네덜란드 병'의 사례로 꼽는다. 자원 수출로 통화 가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고 외화가 유입되지만, 정작 국내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물가는 오르는 현상이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 합리성보다 정치적 지지율을 우선시했으며, 그 결과는 부유한 국가의 가난한 국민들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나타났다.
강경한 대외 정책으로 인해 UN과 서방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자,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경로를 활용했다. 특히 이란 혁명 수비대에 국가 주요 건설 사업과 항만 운영권을 넘겨주며 제재를 우회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IRGC는 이란 경제의 약 30~40%를 장악하는 거대 경제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득권의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외치며 집권한 아마디네자드가 역설적으로 새로운 군부 특권층을 만들어낸 셈이다. 공식적인 회계 감사조차 받지 않는 이들의 거대 자본은 이란 경제의 투명성을 완전히 파괴했고, 이는 훗날 이란 경제가 제재 압박에 더욱 취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 발언 논란 =====
2005년 10월 26일, 테헤란에서 열린 '유대인 국가 없는 세상(World Without Zionism)' 회의에 참석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연설을 내뱉었다. 그는 시아파의 혁명적 수사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 점령 정권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지도 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선언했다.[26]
이 발언은 아마디네자드 개인의 돌발적인 실언이 아니었다. 이는 1979년 이란 혁명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창했던 '반(反)시오니즘' 사상의 충실한 계승이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스라엘은 단순히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라, 이슬람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슬림들을 억압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자 '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하타미 전임 정권이 추구했던 '문명 간의 대화'를 완전히 폐기하고 '혁명적 가치로의 회귀'를 선포했다. 그는 이란 내 보수 강경파와 혁명수비대(IRGC)의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자극적인 언어를 선택했다. 그에게 이스라엘 비난은 국내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발언의 파장은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은 이란을 UN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를 이란의 위협적인 핵 개발 의지와 결부시켜 '악의 축'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유럽 연합(EU) 역시 대사를 소환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특히 이 발언은 당시 진행 중이던 이란 핵 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방 국가들은 "지도를 지워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경제적, 외교적 비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당당한 외침'으로 포장하며 지지층을 자극했다.
아마디네자드의 강경 발언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가자 지구의 하마스 등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들에게는 강력한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다. 이란은 이들을 향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노골화했고, 이는 곧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과 암묵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아랍의 민중(The Arab Street)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왕정 국가들에게는 이란의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 확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중동 내에서 이란의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주변국들을 서방과 밀착시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발언 이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이스라엘의 만행을 부각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하고, 매주 금요일 예배(Jumu'ah) 시간마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도록 독려했다.
그는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거나, "왜 유럽인들이 지은 죄(홀로코스트)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펴며 논점을 흐렸다. 이러한 방식은 이슬람 세계의 일부 반서방 정서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으나, 합리적인 외교 무대에서 이란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는 문구는 아마디네자드 정권 8년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문구가 되었다. 이는 훗날 그가 퇴임한 이후에도 이란의 외교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후임자인 하산 로하니가 핵 협상(JCPOA)을 체결하려 할 때마다 이스라엘과 미국 내 강경파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이 발언을 인용하며 이란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연설은 자신의 '혁명적 정통성'을 증명하는 정점이었으나, 이란 국민에게는 국제적 제재와 고립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한 시작점이었다. 그는 이 발언을 통해 이란을 '고립된 요새'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아마디네자드 경제 정책의 상징은 '레자 사랑의 자비 펀드(Reza Love Compassion Fund)'였다. 그는 대통령 직속으로 거액의 기금을 조성하여 청년들의 결혼 자금, 주택 마련 비용, 창업 자금을 저리로 대출해주었다. 이는 당시 고실업과 주거난에 허덕이던 청년층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지방 순회 국무회의'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테헤란의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는 대신, 전국의 낙후된 마을을 직접 찾아가 현장에서 예산을 집행했다. 도로나 병원이 필요한 마을에 즉석에서 수백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하는 방식은 민중들에게 "드디어 우리를 돌보는 지도자가 나타났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24]
이란은 전통적으로 에너지와 식료품에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투입하여 물가를 낮게 유지해왔다. 아마디네자드는 2010년, 이 비효율적인 간접 보조금을 폐지하고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현금을 입금해주는 '보조금 합리화 계획'을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였으나, 실제 결과는 참혹했다. 보조금이 사라지자마자 전기료, 가스비, 휘발유 가격이 수백 퍼센트씩 폭등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현금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시장에 풀린 막대한 통화량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특히 이란 리알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수입 물가가 치솟자, 중산층은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가 추진한 또 다른 야심작은 무주택자를 위한 대규모 공공 주택 사업인 '메흐르(Mehr) 주택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국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저리 대출을 끌어와 수백만 채의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급하게 지어진 아파트들은 도시 외곽의 인프라가 전혀 없는 황무지에 세워졌고, 부실 공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25] 더욱이 이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어내면서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재임 기간 중 유입된 약 7,000억 달러 이상의 석유 수입은 이란 경제의 체질 개선이 아닌, 일시적인 소모성 비용으로 탕진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산업 구조의 다변화나 기술 혁신 대신, 수입 완제품을 시장에 풀어 물가를 억제하려 했다. 이는 국내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 저렴한 중국산 수입품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이란 내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국가 경제는 오직 석유 수출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심화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전형적인 '네덜란드 병'의 사례로 꼽는다. 자원 수출로 통화 가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고 외화가 유입되지만, 정작 국내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물가는 오르는 현상이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 합리성보다 정치적 지지율을 우선시했으며, 그 결과는 부유한 국가의 가난한 국민들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나타났다.
강경한 대외 정책으로 인해 UN과 서방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자,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경로를 활용했다. 특히 이란 혁명 수비대에 국가 주요 건설 사업과 항만 운영권을 넘겨주며 제재를 우회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IRGC는 이란 경제의 약 30~40%를 장악하는 거대 경제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득권의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외치며 집권한 아마디네자드가 역설적으로 새로운 군부 특권층을 만들어낸 셈이다. 공식적인 회계 감사조차 받지 않는 이들의 거대 자본은 이란 경제의 투명성을 완전히 파괴했고, 이는 훗날 이란 경제가 제재 압박에 더욱 취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 발언 논란 =====
2005년 10월 26일, 테헤란에서 열린 '유대인 국가 없는 세상(World Without Zionism)' 회의에 참석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연설을 내뱉었다. 그는 시아파의 혁명적 수사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 점령 정권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지도 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선언했다.[26]
이 발언은 아마디네자드 개인의 돌발적인 실언이 아니었다. 이는 1979년 이란 혁명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창했던 '반(反)시오니즘' 사상의 충실한 계승이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스라엘은 단순히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라, 이슬람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슬림들을 억압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자 '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하타미 전임 정권이 추구했던 '문명 간의 대화'를 완전히 폐기하고 '혁명적 가치로의 회귀'를 선포했다. 그는 이란 내 보수 강경파와 혁명수비대(IRGC)의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자극적인 언어를 선택했다. 그에게 이스라엘 비난은 국내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발언의 파장은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은 이란을 UN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를 이란의 위협적인 핵 개발 의지와 결부시켜 '악의 축'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유럽 연합(EU) 역시 대사를 소환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특히 이 발언은 당시 진행 중이던 이란 핵 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방 국가들은 "지도를 지워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경제적, 외교적 비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당당한 외침'으로 포장하며 지지층을 자극했다.
아마디네자드의 강경 발언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가자 지구의 하마스 등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들에게는 강력한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다. 이란은 이들을 향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노골화했고, 이는 곧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과 암묵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아랍의 민중(The Arab Street)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왕정 국가들에게는 이란의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 확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중동 내에서 이란의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주변국들을 서방과 밀착시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발언 이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이스라엘의 만행을 부각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하고, 매주 금요일 예배(Jumu'ah) 시간마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도록 독려했다.
그는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거나, "왜 유럽인들이 지은 죄(홀로코스트)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펴며 논점을 흐렸다. 이러한 방식은 이슬람 세계의 일부 반서방 정서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으나, 합리적인 외교 무대에서 이란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는 문구는 아마디네자드 정권 8년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문구가 되었다. 이는 훗날 그가 퇴임한 이후에도 이란의 외교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후임자인 하산 로하니가 핵 협상(JCPOA)을 체결하려 할 때마다 이스라엘과 미국 내 강경파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이 발언을 인용하며 이란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연설은 자신의 '혁명적 정통성'을 증명하는 정점이었으나, 이란 국민에게는 국제적 제재와 고립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한 시작점이었다. 그는 이 발언을 통해 이란을 '고립된 요새'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2.10.3. 홀로코스트 부정과 국제적 고립[편집]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취임 초기부터 서방 세계와의 전면전을 불사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에서도 2005년 말부터 본격화된 홀로코스트 부정(Holocaust Denial) 발언은 단순한 외교적 마찰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의 도덕적 근간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이란을 국제 사회에서 '대화 불가능한 국가'로 낙인찍히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05년 12월 14일, 자헤단(Zahedan)에서 열린 대중 연설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근거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27]
그는 "유럽인들이 유대인을 살해했다면, 왜 그 대가를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펼쳤다. 만약 홀로코스트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이 있는 유럽(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땅 일부를 떼어주어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해야지, 왜 중동의 심장부에 그들을 박아 넣었느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발언은 이란 내 강경 보수파와 일부 반서방 정서가 강한 이슬람권 대중들에게는 '서구의 위선을 찌르는 통쾌한 일침'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서방 국가들에게는 인류 최악의 비극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절대 금기'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다.
단순한 발언에 그치지 않고, 아마디네자드 정부는 2006년 12월 테헤란에서 '홀로코스트 검토를 위한 국제 회의'를 개최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 회의에는 전 세계에서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백인 우월주의자, 그리고 극단적 반시온주의 유대인 랍비들이 초청되었다.
초청 인사로 데이비드 듀크(전 KKK 지도자), 로베르 포리송(프랑스의 홀로코스트 부정 학자) 등이 참석하여 학술적 형식을 빌린 '부정론'을 펼쳤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회의가 "서구의 사상의 자유를 시험하는 장"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이 범죄로 처벌받는데, 왜 이란에서 이를 학문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간섭하느냐는 논리였다.
회의 결과는 예상대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 학살 증거가 부족하다는 식의 결론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UN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극심한 분노를 자아냈다. 유엔 총회는 즉각 홀로코스트 부정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마디네자드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히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란 혁명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반이스라엘' 정서를 극대화하여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인 수호자로 포지셔닝하려 했다. 서방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왜 홀로코스트 문제 앞에서만 멈추는지 비판함으로써, 서구 주도 국제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려 했다. 이는 특히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일정 부분 호소력을 가졌다.
당시 핵 개발 문제로 인해 가해지는 경제 제재와 국내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외부의 적(시온주의와 미국)'에 대한 투쟁으로 덮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이란에 막대한 외교적 비용을 치르게 했다.
이란과의 대화를 중시하던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연합(EU) 국가들조차 아마디네자드의 발언 이후 등을 돌렸다. 특히 나치즘의 역사적 과오를 짊어진 독일은 이 발언을 "독일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이자 문명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국제 사회에서 이란을 지지해주던 국가들이 줄어들면서, 핵 문제와 관련된 UN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이 훨씬 수월하게 통과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마디네자드의 발언을 "이란이 핵을 보유하게 될 경우 실제로 제2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의지가 있다는 증거"로 활용하며, 국제 사회에 대이란 선제 타격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했다.
이란 내부에서도 아마디네자드의 발언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강경파는 "서방의 성역을 파괴한 용기 있는 지도자"라며 그를 추앙했다. 사원과 바자르(전통 시장)의 보수층은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 환호했다.
모함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 등 개혁파 인사들은 "이란을 국제적 외톨이로 만들고 국익을 훼손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28] 심지어 보수 진영 내에서도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들은 그의 발언이 가져올 경제적 여파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의 홀로코스트 부정은 그를 전 세계에서 가장 가장 비난받는 정치인 중 한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발언을 통해 이슬람권의 '스트롱맨'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란 국민들은 그 대가로 더욱 강력해진 경제 제재와 외교적 냉대를 감내해야 했다. 이는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게 되는 경제적 위기의 씨앗이 되었으며,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통렬한 외교적 실책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2005년 12월 14일, 자헤단(Zahedan)에서 열린 대중 연설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근거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27]
그는 "유럽인들이 유대인을 살해했다면, 왜 그 대가를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펼쳤다. 만약 홀로코스트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이 있는 유럽(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땅 일부를 떼어주어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해야지, 왜 중동의 심장부에 그들을 박아 넣었느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발언은 이란 내 강경 보수파와 일부 반서방 정서가 강한 이슬람권 대중들에게는 '서구의 위선을 찌르는 통쾌한 일침'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서방 국가들에게는 인류 최악의 비극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절대 금기'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다.
단순한 발언에 그치지 않고, 아마디네자드 정부는 2006년 12월 테헤란에서 '홀로코스트 검토를 위한 국제 회의'를 개최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 회의에는 전 세계에서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백인 우월주의자, 그리고 극단적 반시온주의 유대인 랍비들이 초청되었다.
초청 인사로 데이비드 듀크(전 KKK 지도자), 로베르 포리송(프랑스의 홀로코스트 부정 학자) 등이 참석하여 학술적 형식을 빌린 '부정론'을 펼쳤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회의가 "서구의 사상의 자유를 시험하는 장"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이 범죄로 처벌받는데, 왜 이란에서 이를 학문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간섭하느냐는 논리였다.
회의 결과는 예상대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 학살 증거가 부족하다는 식의 결론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UN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극심한 분노를 자아냈다. 유엔 총회는 즉각 홀로코스트 부정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마디네자드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히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란 혁명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반이스라엘' 정서를 극대화하여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인 수호자로 포지셔닝하려 했다. 서방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왜 홀로코스트 문제 앞에서만 멈추는지 비판함으로써, 서구 주도 국제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려 했다. 이는 특히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일정 부분 호소력을 가졌다.
당시 핵 개발 문제로 인해 가해지는 경제 제재와 국내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외부의 적(시온주의와 미국)'에 대한 투쟁으로 덮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이란에 막대한 외교적 비용을 치르게 했다.
이란과의 대화를 중시하던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연합(EU) 국가들조차 아마디네자드의 발언 이후 등을 돌렸다. 특히 나치즘의 역사적 과오를 짊어진 독일은 이 발언을 "독일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이자 문명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국제 사회에서 이란을 지지해주던 국가들이 줄어들면서, 핵 문제와 관련된 UN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이 훨씬 수월하게 통과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마디네자드의 발언을 "이란이 핵을 보유하게 될 경우 실제로 제2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의지가 있다는 증거"로 활용하며, 국제 사회에 대이란 선제 타격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했다.
이란 내부에서도 아마디네자드의 발언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강경파는 "서방의 성역을 파괴한 용기 있는 지도자"라며 그를 추앙했다. 사원과 바자르(전통 시장)의 보수층은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 환호했다.
모함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 등 개혁파 인사들은 "이란을 국제적 외톨이로 만들고 국익을 훼손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28] 심지어 보수 진영 내에서도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들은 그의 발언이 가져올 경제적 여파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아마디네자드의 홀로코스트 부정은 그를 전 세계에서 가장 가장 비난받는 정치인 중 한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발언을 통해 이슬람권의 '스트롱맨'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란 국민들은 그 대가로 더욱 강력해진 경제 제재와 외교적 냉대를 감내해야 했다. 이는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게 되는 경제적 위기의 씨앗이 되었으며,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통렬한 외교적 실책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2.10.4. 핵 개발 강행과 UN 제재[편집]
전임 하타미 정권이 서방과의 협상을 위해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우라늄 농축 활동을 아마디네자드는 취임과 동시에 전격 재개했다. 그에게 핵 에너지는 단순한 기술적 과제가 아니라, 이란의 주권과 민족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성역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핵 기술 보유는 이란 인민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고 선언하며 국제 사회를 긴장시켰다. 그는 서방 국가들이 이란의 핵 개발을 막으려는 이유가 핵무기 확산 방지라는 명분 뒤에 이란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고 에너지 종속을 꾀하려는 '신식민주의적 음모'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2006년 1월, 이란은 IAEA의 봉인을 해제하고 나탄즈(Natanz) 핵 시설의 우라늄 농축 연구를 재개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을 국영 방송을 통해 생중계하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그해 4월, 그는 이란이 3.5% 농도의 저농축 우라늄 생산에 성공하여 "핵 클럽"에 가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이 날을 '국가 핵 기술의 날'로 지정하고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는데, 이는 이란 내부의 민족주의 결집에는 효과적이었으나 국제 사회에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이란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IAEA 이사회는 이란을 '불이행 상태'로 규정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이란의 핵 활동이 평화적 목적임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시온주의 세력의 압박에 굴복한 정치적 판단"이라며 맹비난했다.
결국 2006년 초, 이란 핵 문제는 IAEA의 손을 떠나 UN 안전보장이사회로 회부되었다. 이는 이란에 대한 경제적, 외교적 제재가 본격화됨을 의미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종이 조각(제재 결의안) 한 장에 굴복하지 않는다"며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오히려 농축 원심분리기의 대수를 수천 대 단위로 늘리겠다고 발표하며 국제 사회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대응했다.
2006년 12월 23일, UN 안보리는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모든 물자와 기술의 이전을 금지하는 결의안 1737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29]
이후 2007년 결의안 1747호, 2008년 결의안 1803호가 연이어 채택되면서 이란의 금융 시스템과 무역 전반에 제약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이 시기를 '자급자족의 기회'로 포장했다. 그는 외무부 내의 온건파 협상가들을 대거 교체하고, 자신의 측근인 사이드 잘릴리(Saeed Jalili)를 핵 협상 수석대표로 임명하여 협상 테이블을 사실상의 '이념 선전장'으로 변모시켰다. 잘릴리는 협상장에서 구체적인 핵 현안 대신 인류의 도덕성과 서방의 이중잣대를 논하는 강의를 일삼았고, 이는 협상을 교착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마디네자드의 핵 강행 노선은 이란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라프산자니와 같은 실용 보수파들은 국제적 고립이 이란 경제에 미칠 치명적인 영향을 우려했다. 실제로 서방의 금융 제재가 강화되면서 이란의 원유 수출 자금 결제가 어려워졌고, 생필품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30]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내부 비판을 "적과 내통하는 배신 행위"로 몰아세웠다. 그는 핵 기술 보유가 장기적으로 이란의 에너지 독립을 보장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부셰르(Bushehr) 원자력 발전소 완공을 서두르며 러시아를 압박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적 도박을 감행했다. 그에게 핵은 단순한 전력이 아니라, 이란이 중동의 맹주로서 미국과 대등하게 마주 서기 위한 최소한의 '입장권'이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 하에서 이란은 제재를 피하기 위한 '암시장 경제'와 '우회 무역'에 능숙해졌다. 그는 제재가 오히려 이란의 국내 기술력을 향상시킨다고 주장하며, 국산 원심분리기 개발 성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향해 "당신들은 핵무기를 수천 개씩 쌓아놓고 있으면서, 평화적 에너지를 쓰려는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논리는 이란 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으며 그를 '반서방의 기수'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2008년 말에 이르러, 이란의 경제 지표는 심각한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핵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가려졌던 경제적 모순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2009년 대선 정국에서 거대한 정치적 폭풍으로 돌변하게 된다.
아마디네자드는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핵 기술 보유는 이란 인민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고 선언하며 국제 사회를 긴장시켰다. 그는 서방 국가들이 이란의 핵 개발을 막으려는 이유가 핵무기 확산 방지라는 명분 뒤에 이란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고 에너지 종속을 꾀하려는 '신식민주의적 음모'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2006년 1월, 이란은 IAEA의 봉인을 해제하고 나탄즈(Natanz) 핵 시설의 우라늄 농축 연구를 재개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과정을 국영 방송을 통해 생중계하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그해 4월, 그는 이란이 3.5% 농도의 저농축 우라늄 생산에 성공하여 "핵 클럽"에 가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이 날을 '국가 핵 기술의 날'로 지정하고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는데, 이는 이란 내부의 민족주의 결집에는 효과적이었으나 국제 사회에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이란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IAEA 이사회는 이란을 '불이행 상태'로 규정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이란의 핵 활동이 평화적 목적임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시온주의 세력의 압박에 굴복한 정치적 판단"이라며 맹비난했다.
결국 2006년 초, 이란 핵 문제는 IAEA의 손을 떠나 UN 안전보장이사회로 회부되었다. 이는 이란에 대한 경제적, 외교적 제재가 본격화됨을 의미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종이 조각(제재 결의안) 한 장에 굴복하지 않는다"며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오히려 농축 원심분리기의 대수를 수천 대 단위로 늘리겠다고 발표하며 국제 사회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대응했다.
2006년 12월 23일, UN 안보리는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모든 물자와 기술의 이전을 금지하는 결의안 1737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29]
이후 2007년 결의안 1747호, 2008년 결의안 1803호가 연이어 채택되면서 이란의 금융 시스템과 무역 전반에 제약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이 시기를 '자급자족의 기회'로 포장했다. 그는 외무부 내의 온건파 협상가들을 대거 교체하고, 자신의 측근인 사이드 잘릴리(Saeed Jalili)를 핵 협상 수석대표로 임명하여 협상 테이블을 사실상의 '이념 선전장'으로 변모시켰다. 잘릴리는 협상장에서 구체적인 핵 현안 대신 인류의 도덕성과 서방의 이중잣대를 논하는 강의를 일삼았고, 이는 협상을 교착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마디네자드의 핵 강행 노선은 이란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라프산자니와 같은 실용 보수파들은 국제적 고립이 이란 경제에 미칠 치명적인 영향을 우려했다. 실제로 서방의 금융 제재가 강화되면서 이란의 원유 수출 자금 결제가 어려워졌고, 생필품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30]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내부 비판을 "적과 내통하는 배신 행위"로 몰아세웠다. 그는 핵 기술 보유가 장기적으로 이란의 에너지 독립을 보장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부셰르(Bushehr) 원자력 발전소 완공을 서두르며 러시아를 압박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적 도박을 감행했다. 그에게 핵은 단순한 전력이 아니라, 이란이 중동의 맹주로서 미국과 대등하게 마주 서기 위한 최소한의 '입장권'이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 하에서 이란은 제재를 피하기 위한 '암시장 경제'와 '우회 무역'에 능숙해졌다. 그는 제재가 오히려 이란의 국내 기술력을 향상시킨다고 주장하며, 국산 원심분리기 개발 성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향해 "당신들은 핵무기를 수천 개씩 쌓아놓고 있으면서, 평화적 에너지를 쓰려는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논리는 이란 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으며 그를 '반서방의 기수'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2008년 말에 이르러, 이란의 경제 지표는 심각한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핵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가려졌던 경제적 모순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2009년 대선 정국에서 거대한 정치적 폭풍으로 돌변하게 된다.
2.10.5. 서방과의 외교 전쟁, '악의 축' 낙인[편집]
아마디네자드 취임 이후 이란의 대외 관계는 이전의 하타미 정권이 추구하던 '문명 간의 대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서방, 특히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국제 질서를 '부패하고 불공정하며 일방적인 체제'로 규정했다. 그에게 외교란 상호 호혜적인 타협의 장이 아니라, 이슬람 혁명의 가치를 수호하고 서구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형태의 성전(Jihad)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W. 부시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이란을 북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의 일원으로 규정한 상태였다.[31]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더욱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언사로 맞받아쳤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1979년 혁명 이후 이란 지도자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최초의 서신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외교적 제안이 아닌,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이슬람적 가치관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는 전도사적 훈계에 가까웠다. 백악관은 이를 "답장할 가치가 없는 선전 공세"라며 일축했고, 양국의 대화 채널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미국은 '오만한 강대국(The Arrogant Power)'일 뿐이었으며, 그는 서방이 주도하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마디네자드는 매년 뉴욕에서 열리는 UN 총회에 참석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총회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강하게 비판했다. "왜 특정 국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이란의 평화적 핵 이용은 금지하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일정 부분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9.11 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서방 외교관들의 집단 퇴장을 유도했다.
그는 UN의 제재 결의안을 향해 "그저 찢어진 종이 조각(Torn paper)에 불과하다"며 조롱했다.[32] 그는 서방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적으로는 반미 성향이 강한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서방 언론은 아마디네자드를 '중동의 히틀러' 또는 '미친 대통령'으로 묘사하며 악마화했다. 특히 그의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과 이스라엘 말살 발언은 유럽 국가들조차 이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이란과 경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연합(EU) 주요국들은 미국의 제재 기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란은 국제 금융망인 SWIFT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고, 주요 기업들은 이란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에 대응하여 이른바 '동방 정책(Look to the East)'을 추진하며 중국과 러시아에 밀착했으나, 이들 국가 역시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UN 제재안에 찬성하거나 기권하며 이란을 외교적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외교를 단순히 국가 간의 협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소외된 계층을 향한 선전전으로 활용했다. 그는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남미를 방문하여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 반미 성향 지도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사'로 포장하며 중동과 아프리카의 반서방 여론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정작 이란 국익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화려한 수사학 뒤에 남은 것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고립이었다. 테헤란의 지식인 계층은 "아마디네자드의 입이 이란 국민의 밥상을 걷어차고 있다"며 개탄했다. 그는 서방과의 외교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이란을 국제 사회의 외딴섬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W. 부시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이란을 북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의 일원으로 규정한 상태였다.[31]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더욱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언사로 맞받아쳤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1979년 혁명 이후 이란 지도자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최초의 서신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외교적 제안이 아닌,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이슬람적 가치관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는 전도사적 훈계에 가까웠다. 백악관은 이를 "답장할 가치가 없는 선전 공세"라며 일축했고, 양국의 대화 채널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아마디네자드에게 미국은 '오만한 강대국(The Arrogant Power)'일 뿐이었으며, 그는 서방이 주도하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마디네자드는 매년 뉴욕에서 열리는 UN 총회에 참석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총회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강하게 비판했다. "왜 특정 국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이란의 평화적 핵 이용은 금지하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일정 부분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9.11 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서방 외교관들의 집단 퇴장을 유도했다.
그는 UN의 제재 결의안을 향해 "그저 찢어진 종이 조각(Torn paper)에 불과하다"며 조롱했다.[32] 그는 서방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적으로는 반미 성향이 강한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서방 언론은 아마디네자드를 '중동의 히틀러' 또는 '미친 대통령'으로 묘사하며 악마화했다. 특히 그의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과 이스라엘 말살 발언은 유럽 국가들조차 이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이란과 경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연합(EU) 주요국들은 미국의 제재 기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란은 국제 금융망인 SWIFT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고, 주요 기업들은 이란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에 대응하여 이른바 '동방 정책(Look to the East)'을 추진하며 중국과 러시아에 밀착했으나, 이들 국가 역시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UN 제재안에 찬성하거나 기권하며 이란을 외교적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외교를 단순히 국가 간의 협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소외된 계층을 향한 선전전으로 활용했다. 그는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남미를 방문하여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 반미 성향 지도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사'로 포장하며 중동과 아프리카의 반서방 여론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정작 이란 국익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화려한 수사학 뒤에 남은 것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고립이었다. 테헤란의 지식인 계층은 "아마디네자드의 입이 이란 국민의 밥상을 걷어차고 있다"며 개탄했다. 그는 서방과의 외교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이란을 국제 사회의 외딴섬으로 만들고 있었다.
2.10.6. 남남 협력과 반미 연대 구축[편집]
2000년대 중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 소위 '소외된 국가들의 연합'을 구상했다. 그는 서구 열강을 '오만하고 부패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위한 교류를 넘어,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뒷마당'에 반미의 깃발을 꽂으려는 고도로 계산된 지정학적 전략이었다.
아마디네자드의 외교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구 반대편 라틴아메리카로의 적극적인 진출이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핑크 타이드(Pink Tide)'라 불리는 좌파 정권의 득세가 정점에 달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있었다.
아마디네자드와 차베스는 '반미'라는 공통의 분모 아래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지도자는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수십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는 단순한 외교 수사 이상의 실질적인 협력으로 이어졌다.[33]
이들의 협력은 에너지, 건설, 군사 분야를 망라했다. 이란은 베네수엘라에 자동차 조립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건설해주었고, 베네수엘라는 이란의 핵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보냈다. 특히 2007년 아마디네자드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등과 잇따라 접촉하며 '반미 전선'을 중남미 전역으로 확대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앞마당에서 적대 세력이 활보하는 것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외교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아마디네자드의 외교 수사학은 철저히 '피억압 민중'과 '제국주의 타도'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UN 총회 등 국제 무대에서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맹렬히 비난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에게 "서방의 원조는 예속을 위한 사슬"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같은 독재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서방으로부터 인권 탄압국으로 낙인찍힌 국가들에게 이란은 '제재 속에서도 자립한 모델'로 비춰졌고,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에게 원유 공급과 기술 지원을 약속하며 환심을 샀다. 이러한 행보는 국제 연합(UN) 내에서 이란에 대한 제재 표결이 있을 때마다 상당수 제3세계 국가가 기권하거나 반대하게 만드는 정치적 방어막 역할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탈달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이란산 원유 결제 대금으로 달러 대신 유로나 엔화, 심지어 금을 받는 방식을 제안했다.[34]
그는 또한 이웃 국가들과의 가스관 연결 사업을 추진하며 지역 맹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평화 가스관'으로 불린 이란-파키스탄-인도 연결 사업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마디네자드가 끈질기게 밀어붙인 프로젝트였다. 그는 에너지를 안보의 무기로 활용하며 서방의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단순히 정치적 연대뿐만 아니라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남미 곳곳에 이슬람 문화 센터를 건립하고 장학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우리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정의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원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했던 제3세계 민중들에게 일종의 해방 신학적 매력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방 언론은 이를 '테러 지원국의 영향력 확대'로 규정하며 극도로 경계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의 남남 협력은 이란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실익이 크지 않은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해 막대한 원유 수익을 쏟아붓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이란 내부의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와중에 베네수엘라에 수천 세대의 주택을 지어주거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행위는 국내 보수파들조차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손을 잡은 지도자들의 면면이 무가베, 차베스, 카스트로 등 국제 사회의 논란 중심에 선 인물들이었다는 점은 이란을 '불량 국가들의 우두머리'로 각인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 외교 정책은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고 갔으며, 이란을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아마디네자드의 외교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구 반대편 라틴아메리카로의 적극적인 진출이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핑크 타이드(Pink Tide)'라 불리는 좌파 정권의 득세가 정점에 달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있었다.
아마디네자드와 차베스는 '반미'라는 공통의 분모 아래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지도자는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수십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는 단순한 외교 수사 이상의 실질적인 협력으로 이어졌다.[33]
이들의 협력은 에너지, 건설, 군사 분야를 망라했다. 이란은 베네수엘라에 자동차 조립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건설해주었고, 베네수엘라는 이란의 핵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보냈다. 특히 2007년 아마디네자드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등과 잇따라 접촉하며 '반미 전선'을 중남미 전역으로 확대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앞마당에서 적대 세력이 활보하는 것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외교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아마디네자드의 외교 수사학은 철저히 '피억압 민중'과 '제국주의 타도'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UN 총회 등 국제 무대에서 서방 국가들의 이중잣대를 맹렬히 비난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에게 "서방의 원조는 예속을 위한 사슬"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같은 독재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서방으로부터 인권 탄압국으로 낙인찍힌 국가들에게 이란은 '제재 속에서도 자립한 모델'로 비춰졌고,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에게 원유 공급과 기술 지원을 약속하며 환심을 샀다. 이러한 행보는 국제 연합(UN) 내에서 이란에 대한 제재 표결이 있을 때마다 상당수 제3세계 국가가 기권하거나 반대하게 만드는 정치적 방어막 역할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탈달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이란산 원유 결제 대금으로 달러 대신 유로나 엔화, 심지어 금을 받는 방식을 제안했다.[34]
그는 또한 이웃 국가들과의 가스관 연결 사업을 추진하며 지역 맹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평화 가스관'으로 불린 이란-파키스탄-인도 연결 사업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마디네자드가 끈질기게 밀어붙인 프로젝트였다. 그는 에너지를 안보의 무기로 활용하며 서방의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단순히 정치적 연대뿐만 아니라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남미 곳곳에 이슬람 문화 센터를 건립하고 장학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우리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정의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원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했던 제3세계 민중들에게 일종의 해방 신학적 매력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방 언론은 이를 '테러 지원국의 영향력 확대'로 규정하며 극도로 경계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의 남남 협력은 이란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실익이 크지 않은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해 막대한 원유 수익을 쏟아붓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이란 내부의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와중에 베네수엘라에 수천 세대의 주택을 지어주거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행위는 국내 보수파들조차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손을 잡은 지도자들의 면면이 무가베, 차베스, 카스트로 등 국제 사회의 논란 중심에 선 인물들이었다는 점은 이란을 '불량 국가들의 우두머리'로 각인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 외교 정책은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고 갔으며, 이란을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2.10.7. 2009년 대선 직전의 국내 정세[편집]
2009년 이란은 거대한 폭풍 전야와 같았다. 아마디네자드의 임기 4년은 이란 사회를 극명한 찬반의 양극단으로 갈라놓았으며, 국제 사회와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임기 말에 접어든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재선 성공을 통해 자신의 '제3의 혁명'을 완성하려 했으나, 그를 둘러싼 안팎의 도전은 유례없이 거셌다.
아마디네자드 1기 정권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역설적이게도 경제였다. 재임 기간 중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돌파하는 등 사상 초유의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실물 경제는 무분별한 통화 팽창과 선심성 복지 정책으로 인해 골병이 들고 있었다.
그는 '석유 수입을 국민의 식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막대한 현금을 저소득층에 직접 살포했다. 이른바 '이맘 레자 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집행된 이 예산은 단기적으로는 농촌과 빈민층의 지지를 결집했으나, 장기적으로는 통화량 급증을 초래하여 물가 상승률을 20~30%대까지 끌어올렸다.[35]
특히 아마디네자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저금리 정책을 강요했으며, 이는 자산 거품과 부패한 대출 관행을 낳았다. 2009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 후보들은 이 점을 집중 공략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가 국가의 미래 자산인 석유 기금을 당장의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예산으로 탕진했다고 비판하며, 수치로 증명되는 경제적 실책을 대중에게 폭로하기 시작했다.
문화·사회적으로도 이란은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디네자드 취임 이후 하타미 정권 시절 누렸던 완화된 사회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이드 패트롤(Guidance Patrol)', 즉 도덕 경찰의 활동이 대폭 강화되면서 거리에서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은 여성들이 체포되거나 억류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대학가에 대한 탄압도 거세졌다.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을 '서구 사상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수많은 진보적 교수들을 강제로 퇴직시키거나 휴직 처리했다. 학생 운동가들에 대한 검거 열풍이 불면서 교정에는 자유로운 토론 대신 침묵과 감시가 자리 잡았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는 특히 도시 지역의 젊은 층과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 "이대로는 4년을 더 견딜 수 없다"라는 절박한 위기감을 형성했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 아마디네자드의 강경 노선은 이란을 외교적 섬으로 만들었다. 핵 개발 강행에 따른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잇따른 제재는 이란의 대외 무역과 금융 결제 망을 조여왔다. 아마디네자드는 "UN 결의안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라며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으나, 실질적인 경제 타격은 가시화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물러나고 '변화'를 내건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취임 초기 이란과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이마저도 이란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서방의 술수라고 치부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층에게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실용적인 국익을 중시하는 세력에게는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가는 무모한 도박으로 보였다.
2009년 대선을 앞두고 흩어져 있던 개혁파와 온건파 세력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혁명 초기 총리를 지냈으나 20년간 정계를 떠나 있었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있었다. 무사비는 깨끗한 이미지와 정통성을 바탕으로 아마디네자드의 실정을 비판하며 급부상했다.
무사비의 상징색인 '초록색'은 희망과 이슬람의 정통성을 동시에 의미하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녹색 물결(Green Wave)'의 서막이었다. 무사비 외에도 전 국회의장인 메흐디 카루비가 가세하며 야권은 두터운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특히 이들은 이란 대선 역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토론회를 통해 아마디네자드와 직접 맞붙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상대 후보의 가족사나 사생활까지 공격하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으로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36]
흥미로운 점은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회 의장 알리 라리자니를 비롯한 전통 보수파들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듯한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최종적으로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메네이에게 아마디네자드는 비록 통제하기 어렵지만, 서방의 압력에 맞서 혁명의 가치를 수호할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기 때문이다. 최고 지도자의 묵시적인 지지 속에 아마디네자드는 행정 조직과 국영 매체를 총동원하여 재선 가도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2009년 대선 직전의 이란은 "아마디네자드 4년의 지속인가, 아니면 녹색의 변화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도시와 농촌, 청년과 노년, 빈곤층과 중산층이 이토록 선명하게 갈라선 적은 없었다.
아마디네자드 1기 정권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역설적이게도 경제였다. 재임 기간 중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돌파하는 등 사상 초유의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실물 경제는 무분별한 통화 팽창과 선심성 복지 정책으로 인해 골병이 들고 있었다.
그는 '석유 수입을 국민의 식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막대한 현금을 저소득층에 직접 살포했다. 이른바 '이맘 레자 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집행된 이 예산은 단기적으로는 농촌과 빈민층의 지지를 결집했으나, 장기적으로는 통화량 급증을 초래하여 물가 상승률을 20~30%대까지 끌어올렸다.[35]
특히 아마디네자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저금리 정책을 강요했으며, 이는 자산 거품과 부패한 대출 관행을 낳았다. 2009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 후보들은 이 점을 집중 공략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가 국가의 미래 자산인 석유 기금을 당장의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예산으로 탕진했다고 비판하며, 수치로 증명되는 경제적 실책을 대중에게 폭로하기 시작했다.
문화·사회적으로도 이란은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디네자드 취임 이후 하타미 정권 시절 누렸던 완화된 사회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이드 패트롤(Guidance Patrol)', 즉 도덕 경찰의 활동이 대폭 강화되면서 거리에서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은 여성들이 체포되거나 억류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대학가에 대한 탄압도 거세졌다.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을 '서구 사상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수많은 진보적 교수들을 강제로 퇴직시키거나 휴직 처리했다. 학생 운동가들에 대한 검거 열풍이 불면서 교정에는 자유로운 토론 대신 침묵과 감시가 자리 잡았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는 특히 도시 지역의 젊은 층과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 "이대로는 4년을 더 견딜 수 없다"라는 절박한 위기감을 형성했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 아마디네자드의 강경 노선은 이란을 외교적 섬으로 만들었다. 핵 개발 강행에 따른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잇따른 제재는 이란의 대외 무역과 금융 결제 망을 조여왔다. 아마디네자드는 "UN 결의안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라며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으나, 실질적인 경제 타격은 가시화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물러나고 '변화'를 내건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취임 초기 이란과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이마저도 이란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서방의 술수라고 치부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층에게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실용적인 국익을 중시하는 세력에게는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가는 무모한 도박으로 보였다.
2009년 대선을 앞두고 흩어져 있던 개혁파와 온건파 세력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혁명 초기 총리를 지냈으나 20년간 정계를 떠나 있었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있었다. 무사비는 깨끗한 이미지와 정통성을 바탕으로 아마디네자드의 실정을 비판하며 급부상했다.
무사비의 상징색인 '초록색'은 희망과 이슬람의 정통성을 동시에 의미하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녹색 물결(Green Wave)'의 서막이었다. 무사비 외에도 전 국회의장인 메흐디 카루비가 가세하며 야권은 두터운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특히 이들은 이란 대선 역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토론회를 통해 아마디네자드와 직접 맞붙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상대 후보의 가족사나 사생활까지 공격하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으로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36]
흥미로운 점은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회 의장 알리 라리자니를 비롯한 전통 보수파들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듯한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하메네이는 최종적으로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메네이에게 아마디네자드는 비록 통제하기 어렵지만, 서방의 압력에 맞서 혁명의 가치를 수호할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기 때문이다. 최고 지도자의 묵시적인 지지 속에 아마디네자드는 행정 조직과 국영 매체를 총동원하여 재선 가도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2009년 대선 직전의 이란은 "아마디네자드 4년의 지속인가, 아니면 녹색의 변화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도시와 농촌, 청년과 노년, 빈곤층과 중산층이 이토록 선명하게 갈라선 적은 없었다.
2.11. 2009년 대선과 부정 선거 의혹[편집]
2009년 6월 12일 실시된 이란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권 재창출 여부를 넘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재선에 도전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 맞서 개혁파와 중도파는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단일 후보급으로 내세워 결집했다. 당시 이란 사회는 아마디네자드 1기 치하의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국제적 고립에 지쳐 있었고, 변화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선거전은 이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격렬했다. 특히 TV 토론회는 국가 전체를 마비시킬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공격적인 화법으로 무사비와 그의 후원자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을 '부패한 기득권층'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토론 도중 무사비의 아내인 자흐라 라나바르드의 학위 문제를 거론하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독설을 퍼부었으며, 이는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거센 분노를 샀다.
무사비는 이에 맞서 '녹색'을 상징색으로 채택했다. 녹색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상징하는 색인 동시에 희망과 변화를 의미했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수십만 명의 시민이 녹색 띠를 두르고 "아마디네자드에게 죽음을", "무사비에게 승리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외신들은 이를 '녹색 파도(Green Wave)'라 부르며 1979년 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의 전조라고 보도했다.
투표 당일, 투표소에는 기록적인 인파가 몰려 투표 시간이 수차례 연장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개표 초기, 무사비 캠프는 자체 조사 결과 승리를 확신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투표 종료 직후 관영 매체를 통해 발표된 공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마디네자드가 62.6%*의 득표율로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 지었다는 내용이었다.[37]
시민들은 경악했다. 투표 전 각종 여론조사와 현장의 열기는 무사비의 우세나 최소한 결선 투표 행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함이 열리기도 전에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로부터 나온 점, 투표 당일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차단되고 개혁파 신문사가 폐쇄된 점 등 부정 선거를 의심케 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발표 이튿날인 6월 13일, 테헤란 시내는 침묵 대신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무사비를 상징하는 초록색 스카프, 팔찌, 깃발을 든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38]
시위대는 단순히 야당 후보의 당선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선거 결과의 투명성을 묻는 "내 표는 어디에 있는가?(Ray-e man kojast?)"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30년 만에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대규모 저항이었다. 초기에는 중산층과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마디네자드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 계층 일부도 시위에 가담하며 운동은 범국민적 양상으로 번졌다.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졌음에도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독설과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6월 14일, 그는 테헤란 발리아스르 광장에서 열린 당선 축하 집회에서 시위대를 향해 "축구 경기에서 진 뒤 화풀이하는 패배자들"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먼지이자 쓰레기(Khas-o-khashak)"라고 지칭했다.[39]
그는 이번 시위가 이란 내부의 자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서방 세력—특히 미국과 영국—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부드러운 혁명(Velvet Revolution)'의 시도라고 규정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관영 매체를 동원해 외세의 개입 음모론을 유포하는 한편, 보안군과 혁명수비대 산하 민병대인 바시즈를 전면에 내세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녹색 운동은 '트위터 혁명'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새로운 통신 수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하고 신문사를 폐쇄하자, 시위대들은 휴대전화로 찍은 현장 영상을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인터넷 속도를 고의로 늦추고 주요 SNS 접속을 차단했으나, 이란의 젊은 세대는 프록시 서버와 VPN을 이용해 검열을 뚫어냈다. 그들은 실시간으로 진압군의 위치를 공유하고 시위 장소를 공지하며 정부의 정보 통제력을 무력화시켰다. 이는 아마디네자드가 구축하려 했던 '폐쇄적이고 경건한 이슬람 공화국'의 외벽에 큰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했다.
시위가 며칠째 이어지자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본격적인 물리력 행사에 나섰다. 제복을 입지 않은 괴한들로 구성된 바시즈 민병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실탄을 발사했다. 6월 15일, 아자디 광장 인근에서 시위대 7명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평화적 시위는 유혈 사태로 변질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진압을 "질서 확립을 위한 정당한 법 집행"으로 옹호했다. 그는 정보부를 통해 시위 주동자들을 족집게식으로 체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투옥되었다. 특히 '에빈 교도소'로 끌려간 구금자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 행위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인권 유린의 주범으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게 되었다.
녹색 운동은 아마디네자드에게 단기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그의 권력 기반을 침식시켰다. 첫째, 그는 더 이상 '모든 이란인의 대통령'이 아닌 '강경파와 민병대의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둘째, 시위 진압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통령의 권위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의 자비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상태가 되었다.
내무부와 헌법수호위원회는 시위대의 재투표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나 개표 과정에서의 논리적 모순은 계속해서 드러났다. 약 50개 도시에서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훨씬 많게 집계된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는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였다.[40]
또한 통계학자들은 개표 수치의 숫지 배열이 베네포드 법칙(Benford's Law)을 따르지 않는 등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이 역력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를 앞세워 물리적 진압을 준비했다. 하메네이 역시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거리의 시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주동자들에게 있다"고 경고하며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중립적 중재자'였던 최고 지도자가 특정 정파의 수장으로 전락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2009년 이란 대선 시위는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집단 행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세계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당국이 전통적인 언론 보도를 통제하자, 시위대와 시민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란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해시태그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국제 사회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폭력성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당시 미 국무부가 트위터 측에 점검 시간을 늦춰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마디네자드는 정보의 흐름을 막기 위해 인터넷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고 주요 사이트를 차단했으나, 이란의 젊은 세대는 프록시 서버와 우회 접속을 통해 저항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향후 4년 동안 마주해야 할 가장 강력하고도 통제 불가능한 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서막이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혁명수비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정부 요직의 군사화로 이어졌다. 그는 시위로 인한 국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더욱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핵 문제와 맞물려 이란을 국제적 고립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녹색 운동은 비록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으나,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적 자산이 가진 '대중적 매력'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선언한 마침표와도 같았다.
선거전은 이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격렬했다. 특히 TV 토론회는 국가 전체를 마비시킬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공격적인 화법으로 무사비와 그의 후원자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을 '부패한 기득권층'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토론 도중 무사비의 아내인 자흐라 라나바르드의 학위 문제를 거론하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독설을 퍼부었으며, 이는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거센 분노를 샀다.
무사비는 이에 맞서 '녹색'을 상징색으로 채택했다. 녹색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상징하는 색인 동시에 희망과 변화를 의미했다. 테헤란의 거리에는 수십만 명의 시민이 녹색 띠를 두르고 "아마디네자드에게 죽음을", "무사비에게 승리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외신들은 이를 '녹색 파도(Green Wave)'라 부르며 1979년 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의 전조라고 보도했다.
투표 당일, 투표소에는 기록적인 인파가 몰려 투표 시간이 수차례 연장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개표 초기, 무사비 캠프는 자체 조사 결과 승리를 확신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투표 종료 직후 관영 매체를 통해 발표된 공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마디네자드가 62.6%*의 득표율로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 지었다는 내용이었다.[37]
시민들은 경악했다. 투표 전 각종 여론조사와 현장의 열기는 무사비의 우세나 최소한 결선 투표 행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함이 열리기도 전에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로부터 나온 점, 투표 당일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차단되고 개혁파 신문사가 폐쇄된 점 등 부정 선거를 의심케 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발표 이튿날인 6월 13일, 테헤란 시내는 침묵 대신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무사비를 상징하는 초록색 스카프, 팔찌, 깃발을 든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38]
시위대는 단순히 야당 후보의 당선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선거 결과의 투명성을 묻는 "내 표는 어디에 있는가?(Ray-e man kojast?)"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30년 만에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대규모 저항이었다. 초기에는 중산층과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마디네자드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 계층 일부도 시위에 가담하며 운동은 범국민적 양상으로 번졌다.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졌음에도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독설과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6월 14일, 그는 테헤란 발리아스르 광장에서 열린 당선 축하 집회에서 시위대를 향해 "축구 경기에서 진 뒤 화풀이하는 패배자들"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먼지이자 쓰레기(Khas-o-khashak)"라고 지칭했다.[39]
그는 이번 시위가 이란 내부의 자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서방 세력—특히 미국과 영국—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부드러운 혁명(Velvet Revolution)'의 시도라고 규정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관영 매체를 동원해 외세의 개입 음모론을 유포하는 한편, 보안군과 혁명수비대 산하 민병대인 바시즈를 전면에 내세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녹색 운동은 '트위터 혁명'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새로운 통신 수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하고 신문사를 폐쇄하자, 시위대들은 휴대전화로 찍은 현장 영상을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인터넷 속도를 고의로 늦추고 주요 SNS 접속을 차단했으나, 이란의 젊은 세대는 프록시 서버와 VPN을 이용해 검열을 뚫어냈다. 그들은 실시간으로 진압군의 위치를 공유하고 시위 장소를 공지하며 정부의 정보 통제력을 무력화시켰다. 이는 아마디네자드가 구축하려 했던 '폐쇄적이고 경건한 이슬람 공화국'의 외벽에 큰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했다.
시위가 며칠째 이어지자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본격적인 물리력 행사에 나섰다. 제복을 입지 않은 괴한들로 구성된 바시즈 민병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실탄을 발사했다. 6월 15일, 아자디 광장 인근에서 시위대 7명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평화적 시위는 유혈 사태로 변질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진압을 "질서 확립을 위한 정당한 법 집행"으로 옹호했다. 그는 정보부를 통해 시위 주동자들을 족집게식으로 체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투옥되었다. 특히 '에빈 교도소'로 끌려간 구금자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 행위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인권 유린의 주범으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게 되었다.
녹색 운동은 아마디네자드에게 단기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그의 권력 기반을 침식시켰다. 첫째, 그는 더 이상 '모든 이란인의 대통령'이 아닌 '강경파와 민병대의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둘째, 시위 진압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통령의 권위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의 자비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상태가 되었다.
내무부와 헌법수호위원회는 시위대의 재투표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나 개표 과정에서의 논리적 모순은 계속해서 드러났다. 약 50개 도시에서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훨씬 많게 집계된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는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였다.[40]
또한 통계학자들은 개표 수치의 숫지 배열이 베네포드 법칙(Benford's Law)을 따르지 않는 등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이 역력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를 앞세워 물리적 진압을 준비했다. 하메네이 역시 금요 예배 설교를 통해 "거리의 시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주동자들에게 있다"고 경고하며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중립적 중재자'였던 최고 지도자가 특정 정파의 수장으로 전락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2009년 이란 대선 시위는 소셜 미디어가 정치적 집단 행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세계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당국이 전통적인 언론 보도를 통제하자, 시위대와 시민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란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해시태그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국제 사회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폭력성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당시 미 국무부가 트위터 측에 점검 시간을 늦춰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마디네자드는 정보의 흐름을 막기 위해 인터넷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고 주요 사이트를 차단했으나, 이란의 젊은 세대는 프록시 서버와 우회 접속을 통해 저항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향후 4년 동안 마주해야 할 가장 강력하고도 통제 불가능한 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서막이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혁명수비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정부 요직의 군사화로 이어졌다. 그는 시위로 인한 국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더욱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핵 문제와 맞물려 이란을 국제적 고립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녹색 운동은 비록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으나,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적 자산이 가진 '대중적 매력'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선언한 마침표와도 같았다.
2.12. 취임식 강행과 제2기 정권의 출범[편집]
2009년 8월 5일, 테헤란의 이슬람 의회(마즐리스) 의사당 주변은 삼엄한 경계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국을 휩쓴 부정 선거 규탄 시위인 '녹색 운동'이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남아있던 시기였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수천 명의 경찰과 혁명수비대가 의사당 주변을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10대 대통령(연임)으로서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식을 강행했다.
취임식은 겉으로 보기엔 격식을 갖춘 행사였으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처한 고립과 위기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란의 전통적인 권력 서열상 대통령 취임식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개혁파의 거두인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과 온건 보수파를 대표하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취임식 불참을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행찰(行札) 거부가 아니라,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당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거부권의 행사였다. 의회 내에서도 개혁파 의원 수십 명이 자리를 비웠으며, 외교 사절단 역시 서방 주요 국가 대사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국제적인 냉대를 면치 못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단상에 오른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취임 선서를 마쳤다.
그는 이란의 선거 결과를 비판한 서방 국가들을 향해 "이란 인민은 외세의 간섭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판을 '오만함의 극치'로 규정하며, 핵 개발을 포함한 기존의 강경 노선을 굽히지 않겠음을 분명히 했다.
자신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종'으로 묘사하며, 제2기 임기 동안에는 부의 재분배와 부패 척결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선거 직후 터져 나온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분노를 '기득권의 저항'으로 치부하고, 하층민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녹색 운동을 '외세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하며,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고수할 것임을 강조했다.[41]
아마디네자드가 의사당 안에서 헌법 수호를 맹세하던 순간, 의사당 밖의 테헤란 거리에서는 다시 한번 시민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취임식에 맞춰 기획된 대규모 거리 시위는 경찰의 선제적 무력 진압에 막혀 산발적인 게릴라식 시위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옥상에 올라가 "독재자에게 죽음을(Marg bar diktator)"을 외쳤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취임식 당일 테헤란 시내의 휴대전화 통신과 인터넷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주요 지하철역은 폐쇄되었다. 정권은 취임식이라는 '국가적 경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도 전체를 거대한 감옥처럼 통제했다.
취임 직후 아마디네자드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는 내각 구성이었다. 그는 제1기 임기 당시 자신과 마찰을 빚었던 온건파 관료들을 대거 축출하고, 그 자리를 자신의 충성파와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들로 채웠다.
특히 내무부, 정보부, 국방부 등 핵심 요직에 군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면서, 이란 정치는 급격히 민군 복합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혁명수비대가 보여준 헌신에 대한 보상이자, 향후 발생할지 모를 추가 소요 사태를 물리적으로 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 인사'는 의회 내 보수파들 사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의회의 심의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제2기 임기의 시작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고립된 상태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대선 결과를 두고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취임 축하 메시지 발송을 거부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취임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대외적 고립은 아마디네자드에게 오히려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는 서방의 압박을 '혁명에 대한 도전'으로 프레임을 전환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경제 지표는 냉혹했다. 취임식 강행 이후 국제 사회의 추가 제재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란 내의 외국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리알화 가치는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아마디네자드가 약속했던 '식탁 위의 석유 자금'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서민들의 목을 조여왔다.
그는 대통령 연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공식적인 권좌에 앉았으나, 그 권좌 아래에는 수백만 명의 분노와 유혈 진압의 상흔이 깔려 있었다.
취임식을 마친 아마디네자드 앞에는 단순히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가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붕괴된 사회적 합의를 재건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가 놓여 있었다.
취임식은 겉으로 보기엔 격식을 갖춘 행사였으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처한 고립과 위기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란의 전통적인 권력 서열상 대통령 취임식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개혁파의 거두인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과 온건 보수파를 대표하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취임식 불참을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행찰(行札) 거부가 아니라,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당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거부권의 행사였다. 의회 내에서도 개혁파 의원 수십 명이 자리를 비웠으며, 외교 사절단 역시 서방 주요 국가 대사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국제적인 냉대를 면치 못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단상에 오른 아마디네자드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취임 선서를 마쳤다.
그는 이란의 선거 결과를 비판한 서방 국가들을 향해 "이란 인민은 외세의 간섭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판을 '오만함의 극치'로 규정하며, 핵 개발을 포함한 기존의 강경 노선을 굽히지 않겠음을 분명히 했다.
자신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종'으로 묘사하며, 제2기 임기 동안에는 부의 재분배와 부패 척결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선거 직후 터져 나온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분노를 '기득권의 저항'으로 치부하고, 하층민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녹색 운동을 '외세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하며,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고수할 것임을 강조했다.[41]
아마디네자드가 의사당 안에서 헌법 수호를 맹세하던 순간, 의사당 밖의 테헤란 거리에서는 다시 한번 시민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취임식에 맞춰 기획된 대규모 거리 시위는 경찰의 선제적 무력 진압에 막혀 산발적인 게릴라식 시위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옥상에 올라가 "독재자에게 죽음을(Marg bar diktator)"을 외쳤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취임식 당일 테헤란 시내의 휴대전화 통신과 인터넷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주요 지하철역은 폐쇄되었다. 정권은 취임식이라는 '국가적 경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도 전체를 거대한 감옥처럼 통제했다.
취임 직후 아마디네자드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는 내각 구성이었다. 그는 제1기 임기 당시 자신과 마찰을 빚었던 온건파 관료들을 대거 축출하고, 그 자리를 자신의 충성파와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들로 채웠다.
특히 내무부, 정보부, 국방부 등 핵심 요직에 군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면서, 이란 정치는 급격히 민군 복합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혁명수비대가 보여준 헌신에 대한 보상이자, 향후 발생할지 모를 추가 소요 사태를 물리적으로 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코드 인사'는 의회 내 보수파들 사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의회의 심의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제2기 임기의 시작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고립된 상태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대선 결과를 두고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취임 축하 메시지 발송을 거부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취임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대외적 고립은 아마디네자드에게 오히려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는 서방의 압박을 '혁명에 대한 도전'으로 프레임을 전환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경제 지표는 냉혹했다. 취임식 강행 이후 국제 사회의 추가 제재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란 내의 외국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리알화 가치는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아마디네자드가 약속했던 '식탁 위의 석유 자금'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서민들의 목을 조여왔다.
그는 대통령 연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공식적인 권좌에 앉았으나, 그 권좌 아래에는 수백만 명의 분노와 유혈 진압의 상흔이 깔려 있었다.
취임식을 마친 아마디네자드 앞에는 단순히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가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붕괴된 사회적 합의를 재건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가 놓여 있었다.
2.12.1. 녹색 운동'과 흔들리는 권력[편집]
2010년대를 기점으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행정부는 대내외적인 사면초가 상태에 빠져들었다. 2009년 대선 부정 의혹으로 불거진 '녹색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국제적 명분을 잃은 상태에서, 아마디네자드가 고수해온 핵 개발 강행 정책은 서방 국가들에게 이란의 돈줄을 완전히 죄어버릴 명분을 제공했다.
2010년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1929호를 채택했다. 이는 이전의 제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과거의 제재가 특정 개인이나 기업, 무기 관련 품목에 한정되었다면, 1929호는 이란의 금융 시스템 전체를 조준했다. 특히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포괄적 이란 제재, 배상 및 투자 철회법(CISADA)'을 통해 이란의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금융기관까지 제재하는 이른바 '2차 제재(Secondary Boycott)'를 발동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국제 금융 결제망인 SWIFT에서 퇴출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석유를 팔아도 대금을 달러나 유로로 받을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아마디네자드는 초기에는 "제재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며 특유의 호기를 부렸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국가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원유 수출길이 막히자 국가 재정은 순식간에 파탄 위기로 몰렸다.
제재의 공포는 외환 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이란의 화폐 단위인 리알화의 가치는 그야말로 종잇조각 수준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2011년 말 달러당 10,000리알 내외였던 암시장 환율은 불과 몇 달 만에 30,000리알을 돌파하며 세 배 이상 폭등했다.[42]
아마디네자드 정부의 대응은 무능했다. 그는 환율 폭등의 원인을 '투기꾼들의 농단'이나 '서방의 심리전'으로 치부하며 경제 논리를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환율을 고정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시장은 정부의 통제를 비웃듯 반응했다.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기초 생필품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었고, 이는 곧 이란 서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환율 폭락은 곧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환원되었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육류, 설탕, 식용유, 의약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2012년 당시 이란의 공식 물가 상승률은 30%를 상회했으나, 시민들이 체감하는 생활 물가는 100%가 넘는 수준이었다.[43]
아마디네자드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저소득층(Mostazafan)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매우 뼈아픈 대목이었다. "서민의 밥상을 책임지겠다"던 그의 공약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고, 대중의 분노는 조용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보조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급하는 '보조금 개편안'을 시행하며 민심을 달래려 했으나, 시중에 풀린 현금은 다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제재는 소비재뿐만 아니라 이란의 기간산업까지 마비시켰다. 이란의 자랑이었던 자동차 산업은 부품 수입이 끊기며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원유 채굴을 위한 최신 장비와 기술 도입이 막히면서 노후화된 유전의 생산량도 급감했다. 기업들은 도산했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고학력 청년층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이 가속화되었으며, 이는 이란의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자급자족할 수 있다", "경제 저항(Resistance Economy)을 실천하자"고 주장했으나, 구체적인 대안 없는 구호는 국민들에게 고통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경제 실패의 책임을 두고 의회 및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측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보수파 의원들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경제 운영과 통계 조작을 비난하며 그를 탄핵하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경제 정책 실패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감싸고 돌면서, 기존 보수 집권 세력 내에서도 그를 '위험 분자'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경제 제재는 단순한 외부의 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내부 모순을 폭발시키는 기폭제였으며, 그가 구축해온 '무적의 혁명가' 이미지를 '무능한 행정가'로 격하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 인생 중 가장 어두운 터널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2010년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1929호를 채택했다. 이는 이전의 제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과거의 제재가 특정 개인이나 기업, 무기 관련 품목에 한정되었다면, 1929호는 이란의 금융 시스템 전체를 조준했다. 특히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포괄적 이란 제재, 배상 및 투자 철회법(CISADA)'을 통해 이란의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금융기관까지 제재하는 이른바 '2차 제재(Secondary Boycott)'를 발동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국제 금융 결제망인 SWIFT에서 퇴출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석유를 팔아도 대금을 달러나 유로로 받을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아마디네자드는 초기에는 "제재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며 특유의 호기를 부렸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국가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원유 수출길이 막히자 국가 재정은 순식간에 파탄 위기로 몰렸다.
제재의 공포는 외환 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이란의 화폐 단위인 리알화의 가치는 그야말로 종잇조각 수준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2011년 말 달러당 10,000리알 내외였던 암시장 환율은 불과 몇 달 만에 30,000리알을 돌파하며 세 배 이상 폭등했다.[42]
아마디네자드 정부의 대응은 무능했다. 그는 환율 폭등의 원인을 '투기꾼들의 농단'이나 '서방의 심리전'으로 치부하며 경제 논리를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환율을 고정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시장은 정부의 통제를 비웃듯 반응했다.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기초 생필품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었고, 이는 곧 이란 서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환율 폭락은 곧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환원되었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육류, 설탕, 식용유, 의약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2012년 당시 이란의 공식 물가 상승률은 30%를 상회했으나, 시민들이 체감하는 생활 물가는 100%가 넘는 수준이었다.[43]
아마디네자드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저소득층(Mostazafan)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매우 뼈아픈 대목이었다. "서민의 밥상을 책임지겠다"던 그의 공약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고, 대중의 분노는 조용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보조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급하는 '보조금 개편안'을 시행하며 민심을 달래려 했으나, 시중에 풀린 현금은 다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제재는 소비재뿐만 아니라 이란의 기간산업까지 마비시켰다. 이란의 자랑이었던 자동차 산업은 부품 수입이 끊기며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원유 채굴을 위한 최신 장비와 기술 도입이 막히면서 노후화된 유전의 생산량도 급감했다. 기업들은 도산했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고학력 청년층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이 가속화되었으며, 이는 이란의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자급자족할 수 있다", "경제 저항(Resistance Economy)을 실천하자"고 주장했으나, 구체적인 대안 없는 구호는 국민들에게 고통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경제 실패의 책임을 두고 의회 및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측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보수파 의원들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경제 운영과 통계 조작을 비난하며 그를 탄핵하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경제 정책 실패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감싸고 돌면서, 기존 보수 집권 세력 내에서도 그를 '위험 분자'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경제 제재는 단순한 외부의 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내부 모순을 폭발시키는 기폭제였으며, 그가 구축해온 '무적의 혁명가' 이미지를 '무능한 행정가'로 격하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 인생 중 가장 어두운 터널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2.12.2. 하메네이와의 균열, '11일간의 칩거'[편집]
2011년 4월, 이란 정계는 유례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2005년 취임 이후 줄곧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총아'로 불렸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체제의 정점인 하메네이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인사권 갈등을 넘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핵심 통치 원리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갈등의 도화선은 이란의 막강한 정보 기관인 정보부(Ministry of Intelligence, MOIS)의 수장, 헤이다르 모슬레히(Heidar Moslehi) 장관의 거취 문제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국정 운영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독자적인 정보 보고 체계를 가진 모슬레히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특히 아마디네자드의 최측근이자 사돈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를 둘러싼 정보부의 내사가 강화되자, 아마디네자드는 2011년 4월 17일 모슬레히의 사표를 강제로 수리했다.
그러나 사표 수리 소식이 전해진 지 몇 시간 만에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를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모슬레히의 복직을 명령했다.[44] 이는 아마디네자드에게 커다란 정치적 모욕이었으며, 그동안 쌓여온 두 권력 핵심 간의 긴장감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메네이의 결정에 반발한 아마디네자드는 전례 없는 방식의 시위를 선택했다. 그는 대통령 궁으로 출근하지 않고 자신의 자택에 머물며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했다. 이른바 '11일간의 칩거'가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불참하고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자 이란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 기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내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고 지도자의 권위 아래 숨은 '비선 실세'들과 보수 성직자 집단이 자신의 개혁 정책과 국정 운영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신권 통치 체제인 이란에서 '신성 모독'에 가까운 반항으로 비쳐졌다. 보수파 언론과 성직자들은 일제히 아마디네자드를 향해 "반혁명적 행위"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메네이 측과 보수 강경파들이 아마디네자드를 공격하기 위해 고안한 프레임은 '일탈 세력(Jaryan-e Enherafi)'이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측근인 마샤이가 이슬람교의 가치를 훼손하고 '이란 민족주의'를 앞세워 성직자들의 권위를 부정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마샤이는 "이란은 이슬람보다 더 오래된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미국, 이스라엘 국민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파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는데, 이는 근본주의 성직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이단적 사상이었다. 보수파들은 아마디네자드가 마샤이의 '주술'이나 '최면'에 걸려 최고 지도자에게 대항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유포하며 그를 압박했다.[45]
결국 11일간의 버티기는 아마디네자드의 패배로 끝났다. 혁명수비대와 의회, 성직자 집단이 모두 하메네이의 편에 서서 "계속 고집을 피울 경우 탄핵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1일, 아마디네자드는 마지못해 국무회의에 참석하며 업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복귀 이후의 아마디네자드는 과거의 강력한 통치력을 상실한 '레임덕' 상태에 빠졌다. 하메네이는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의회는 대통령의 모든 정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특히 2012년 3월, 이란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의회에 소환되어 의원들의 혹독한 질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특유의 화법으로 의원들을 조롱하며 맞섰으나, 이는 오히려 보수파와의 감정적 골을 깊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 사건은 아마디네자드 개인의 몰락을 넘어 이란 체제 전체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첫째, '최고 지도자와 대통령은 일심동체'라는 신화가 깨졌다.
둘째, 보수 세력 내부에 '친(親)아마디네자드'와 '친(親)하메네이'파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분열이 발생했다.
셋째, 아마디네자드가 구축하려 했던 '포퓰리즘적 민족주의'가 체제 수호 세력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을 '기득권 성직자 집단에 맞서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다 희생된 투사'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퇴임 이후에도 꾸준히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나, 동시에 하메네이 체제 내에서는 영원한 '불온 분자'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갈등의 도화선은 이란의 막강한 정보 기관인 정보부(Ministry of Intelligence, MOIS)의 수장, 헤이다르 모슬레히(Heidar Moslehi) 장관의 거취 문제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국정 운영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독자적인 정보 보고 체계를 가진 모슬레히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특히 아마디네자드의 최측근이자 사돈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를 둘러싼 정보부의 내사가 강화되자, 아마디네자드는 2011년 4월 17일 모슬레히의 사표를 강제로 수리했다.
그러나 사표 수리 소식이 전해진 지 몇 시간 만에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를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모슬레히의 복직을 명령했다.[44] 이는 아마디네자드에게 커다란 정치적 모욕이었으며, 그동안 쌓여온 두 권력 핵심 간의 긴장감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메네이의 결정에 반발한 아마디네자드는 전례 없는 방식의 시위를 선택했다. 그는 대통령 궁으로 출근하지 않고 자신의 자택에 머물며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했다. 이른바 '11일간의 칩거'가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불참하고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자 이란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 기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내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고 지도자의 권위 아래 숨은 '비선 실세'들과 보수 성직자 집단이 자신의 개혁 정책과 국정 운영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신권 통치 체제인 이란에서 '신성 모독'에 가까운 반항으로 비쳐졌다. 보수파 언론과 성직자들은 일제히 아마디네자드를 향해 "반혁명적 행위"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메네이 측과 보수 강경파들이 아마디네자드를 공격하기 위해 고안한 프레임은 '일탈 세력(Jaryan-e Enherafi)'이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측근인 마샤이가 이슬람교의 가치를 훼손하고 '이란 민족주의'를 앞세워 성직자들의 권위를 부정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마샤이는 "이란은 이슬람보다 더 오래된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미국, 이스라엘 국민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파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는데, 이는 근본주의 성직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이단적 사상이었다. 보수파들은 아마디네자드가 마샤이의 '주술'이나 '최면'에 걸려 최고 지도자에게 대항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유포하며 그를 압박했다.[45]
결국 11일간의 버티기는 아마디네자드의 패배로 끝났다. 혁명수비대와 의회, 성직자 집단이 모두 하메네이의 편에 서서 "계속 고집을 피울 경우 탄핵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1일, 아마디네자드는 마지못해 국무회의에 참석하며 업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복귀 이후의 아마디네자드는 과거의 강력한 통치력을 상실한 '레임덕' 상태에 빠졌다. 하메네이는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의회는 대통령의 모든 정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특히 2012년 3월, 이란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의회에 소환되어 의원들의 혹독한 질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특유의 화법으로 의원들을 조롱하며 맞섰으나, 이는 오히려 보수파와의 감정적 골을 깊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 사건은 아마디네자드 개인의 몰락을 넘어 이란 체제 전체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첫째, '최고 지도자와 대통령은 일심동체'라는 신화가 깨졌다.
둘째, 보수 세력 내부에 '친(親)아마디네자드'와 '친(親)하메네이'파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분열이 발생했다.
셋째, 아마디네자드가 구축하려 했던 '포퓰리즘적 민족주의'가 체제 수호 세력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을 '기득권 성직자 집단에 맞서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다 희생된 투사'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퇴임 이후에도 꾸준히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나, 동시에 하메네이 체제 내에서는 영원한 '불온 분자'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2.12.3. 측근 비리와 부패 스캔들[편집]
아마디네자드 제2기 정부는 시작부터 부정 선거 의혹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했으나, 정작 정권의 내부를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시위가 아닌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부패 스캔들이었다. 특히 "청렴한 서민 대통령"을 자처하며 기득권의 부패를 타파하겠다고 선언했던 그였기에, 측근들이 연루된 거대 금융 사기 사건은 지지층에게도 막대한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후반기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단연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였다. 마샤이는 아마디네자드의 사돈이자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 정무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마샤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일탈적 흐름(Deviant Current, Jaryane Monharef)'의 수괴라는 공격을 받았다.
마샤이는 "이란은 이슬람의 대변자가 아니라, 이란적 가치를 통해 이슬람을 해석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발언을 쏟아냈다.[46] 아마디네자드가 이러한 마샤이를 끝까지 비호하자, 그를 지지하던 보수적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는 아마디네자드가 "마법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거나 "비선 실세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있다"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사상 투쟁을 넘어, 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로 번졌다.
2011년, 이란 사회를 뒤흔든 '3조 리알(약 26억 달러) 규모의 은행 사기 사건'이 폭로되었다. 위조 신용장을 이용해 7개 국영 및 민영 은행에서 거액을 편취한 이 사건의 배후에 아마디네자드의 측근들이 연루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특히 마샤이가 이 사건의 주동자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마디네자드는 "나와 내 각료들은 결백하며, 이는 정적들의 정치 공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법부를 장악한 보수파는 대통령의 측근들을 차례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아마디네자드가 내세웠던 '청렴'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그가 비난했던 '마피아적 기득권'과 그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보수파 의원들은 이를 빌미로 아마디네자드를 의회에 소환하여 청문회를 열었고, 이는 이란 역사상 대통령이 국회에 불려 나가 수치를 당한 첫 사례가 되었다.
스캔들의 정점은 제1부통령 모함마드 레자 라히미(Mohammad Reza Rahimi)였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오른팔로서 정부의 행정을 총괄했으나, 거대 보험 사기 및 뇌물 수수 혐의로 퇴임 후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47]
이러한 측근들의 잇따른 몰락은 아마디네자드 통치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소수의 충성파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켰고,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았다. 서민을 위해 쓰여야 할 오일 머니가 측근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나르마크의 빈민가에서 그를 연호하던 지지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 이란은 핵 개발로 인한 국제 사회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제재는 부패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가 공식적인 경로로 석유를 팔 수 없게 되자, 아마디네자드 정부는 측근들이나 혁명수비대와 연계된 중간상인들을 통해 밀무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바바크 잔자니(Babak Zanjani)와 같은 신흥 재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가를 대신해 석유를 판매한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자금을 주무르며 수수료를 챙겼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정치권으로 유입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제재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실제로는 제재를 틈타 자라난 부패의 곰팡이가 정권의 도덕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리알화 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치는데, 권력 주변부에서는 유례없는 돈잔치가 벌어지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하메네이와의 갈등, 측근들의 비리, 경제난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보수 진영에서조차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법부와 의회를 향해 "내가 가진 비리 파일을 공개하겠다"며 협박조의 발언을 이어갔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정치적 품격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후반기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단연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Esfandiar Rahim Mashaei)였다. 마샤이는 아마디네자드의 사돈이자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 정무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마샤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일탈적 흐름(Deviant Current, Jaryane Monharef)'의 수괴라는 공격을 받았다.
마샤이는 "이란은 이슬람의 대변자가 아니라, 이란적 가치를 통해 이슬람을 해석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발언을 쏟아냈다.[46] 아마디네자드가 이러한 마샤이를 끝까지 비호하자, 그를 지지하던 보수적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는 아마디네자드가 "마법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거나 "비선 실세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있다"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사상 투쟁을 넘어, 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로 번졌다.
2011년, 이란 사회를 뒤흔든 '3조 리알(약 26억 달러) 규모의 은행 사기 사건'이 폭로되었다. 위조 신용장을 이용해 7개 국영 및 민영 은행에서 거액을 편취한 이 사건의 배후에 아마디네자드의 측근들이 연루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특히 마샤이가 이 사건의 주동자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마디네자드는 "나와 내 각료들은 결백하며, 이는 정적들의 정치 공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법부를 장악한 보수파는 대통령의 측근들을 차례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아마디네자드가 내세웠던 '청렴'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그가 비난했던 '마피아적 기득권'과 그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보수파 의원들은 이를 빌미로 아마디네자드를 의회에 소환하여 청문회를 열었고, 이는 이란 역사상 대통령이 국회에 불려 나가 수치를 당한 첫 사례가 되었다.
스캔들의 정점은 제1부통령 모함마드 레자 라히미(Mohammad Reza Rahimi)였다. 그는 아마디네자드의 오른팔로서 정부의 행정을 총괄했으나, 거대 보험 사기 및 뇌물 수수 혐의로 퇴임 후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47]
이러한 측근들의 잇따른 몰락은 아마디네자드 통치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소수의 충성파에게만 권력을 집중시켰고,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았다. 서민을 위해 쓰여야 할 오일 머니가 측근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나르마크의 빈민가에서 그를 연호하던 지지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 이란은 핵 개발로 인한 국제 사회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제재는 부패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가 공식적인 경로로 석유를 팔 수 없게 되자, 아마디네자드 정부는 측근들이나 혁명수비대와 연계된 중간상인들을 통해 밀무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바바크 잔자니(Babak Zanjani)와 같은 신흥 재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가를 대신해 석유를 판매한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자금을 주무르며 수수료를 챙겼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정치권으로 유입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제재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실제로는 제재를 틈타 자라난 부패의 곰팡이가 정권의 도덕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리알화 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치는데, 권력 주변부에서는 유례없는 돈잔치가 벌어지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하메네이와의 갈등, 측근들의 비리, 경제난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보수 진영에서조차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법부와 의회를 향해 "내가 가진 비리 파일을 공개하겠다"며 협박조의 발언을 이어갔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정치적 품격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2.12.4. 의회와의 갈등[편집]
2012년에 접어들며 아마디네자드와 이란 의회(메즐리스)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2005년 취임 당시만 해도 보수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는, 임기 말에 이르러 오히려 보수 진영 내부의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다. 이는 단순히 정책적 이견을 넘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핵심 권력 구조인 '성직자 통치 체제(벨라야테 파키)'와 대통령의 행정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였다.
아마디네자드를 권좌에 올렸던 보수 연합체 '아바드 가란'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의회 의장인 알리 라리자니를 필두로 한 합리적 보수파와 전통적 성직자 세력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 방식을 '독재적 행태'로 규정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은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를 중심으로 한 '일탈파(Deviant Current)' 세력의 부상은 보수파를 경악하게 했다.[48]
의회는 아마디네자드가 예산 집행 과정에서 의회의 승인을 무시하고, 법률적 근거가 희박한 보조금 개편안을 강행하는 등 헌법을 경시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아마디네자드는 "의회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기득권 집단"이라며 맞불을 놓았고, 양측의 감정적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2012년 3월 14일, 이란 현대사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 의회가 헌법 제88조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직접 소환해 신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1979년 혁명 이후 대통령이 의회에 불려 나와 의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첫 번째 사례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의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면서도 특유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의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는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질문이 너무 수준 낮아서 대답할 가치가 없다"거나 "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며, 의회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조롱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갈등의 정점은 2013년 초, 이른바 '의회 난투극' 사건으로 불리는 폭로전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의회 의장 알리 라리자니의 형제인 파젤 라리자니가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 했다는 내용이 담긴 몰래카메라 영상을 의회에서 직접 상영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49]
이에 알리 라리자니 의장은 즉각 반격했다. 그는 "대통령의 행태는 마피아의 수법과 다를 바 없다"고 일갈하며, 대통령이 국가 기밀과 정보 기관을 사적인 복수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의 입법부와 행정부는 사실상 협치가 불가능한 '정치적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국민들은 최고 권력층의 추잡한 진흙탕 싸움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극심한 정치 혐오에 빠져들었다.
의회는 아마디네자드의 손발을 묶기 위해 강력한 입법권을 행사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여 대통령이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지 못하게 막았고, 대통령이 추진하던 2단계 보조금 개편안을 부결시켰다. 당시 이란은 서방의 강력한 경제 제재로 인해 원유 수출이 반토막 나고 물가가 폭등하던 시기였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 실패의 모든 책임을 의회의 비협조와 외세의 압력으로 돌렸다. 반면 의회는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이 국가 재정을 파탄 냈다고 주장했다. 특히 70여 명의 의원이 서명한 '대통령 탄핵안'이 수차례 거론될 정도로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권력층 간의 분열은 적(서방)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직접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대립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지속되었다.
아마디네자드를 권좌에 올렸던 보수 연합체 '아바드 가란'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의회 의장인 알리 라리자니를 필두로 한 합리적 보수파와 전통적 성직자 세력은 아마디네자드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 방식을 '독재적 행태'로 규정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은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를 중심으로 한 '일탈파(Deviant Current)' 세력의 부상은 보수파를 경악하게 했다.[48]
의회는 아마디네자드가 예산 집행 과정에서 의회의 승인을 무시하고, 법률적 근거가 희박한 보조금 개편안을 강행하는 등 헌법을 경시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아마디네자드는 "의회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기득권 집단"이라며 맞불을 놓았고, 양측의 감정적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2012년 3월 14일, 이란 현대사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 의회가 헌법 제88조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직접 소환해 신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1979년 혁명 이후 대통령이 의회에 불려 나와 의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첫 번째 사례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의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면서도 특유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의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는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질문이 너무 수준 낮아서 대답할 가치가 없다"거나 "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며, 의회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조롱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갈등의 정점은 2013년 초, 이른바 '의회 난투극' 사건으로 불리는 폭로전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의회 의장 알리 라리자니의 형제인 파젤 라리자니가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 했다는 내용이 담긴 몰래카메라 영상을 의회에서 직접 상영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49]
이에 알리 라리자니 의장은 즉각 반격했다. 그는 "대통령의 행태는 마피아의 수법과 다를 바 없다"고 일갈하며, 대통령이 국가 기밀과 정보 기관을 사적인 복수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의 입법부와 행정부는 사실상 협치가 불가능한 '정치적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국민들은 최고 권력층의 추잡한 진흙탕 싸움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극심한 정치 혐오에 빠져들었다.
의회는 아마디네자드의 손발을 묶기 위해 강력한 입법권을 행사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여 대통령이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지 못하게 막았고, 대통령이 추진하던 2단계 보조금 개편안을 부결시켰다. 당시 이란은 서방의 강력한 경제 제재로 인해 원유 수출이 반토막 나고 물가가 폭등하던 시기였다.
아마디네자드는 경제적 실패의 모든 책임을 의회의 비협조와 외세의 압력으로 돌렸다. 반면 의회는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이 국가 재정을 파탄 냈다고 주장했다. 특히 70여 명의 의원이 서명한 '대통령 탄핵안'이 수차례 거론될 정도로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권력층 간의 분열은 적(서방)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직접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대립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지속되었다.
2.12.5. 외교적 고립의 심화와 핵 협상의 교착[편집]
2012년부터 2013년 초까지의 아마디네자드 정부 2기 후반부는 사실상 '사면초가'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2005년 취임 당시 "서방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이란"을 표방하며 시작된 그의 외교 노선은, 임기 말에 이르러 국제 사회의 전례 없는 경제 제재와 핵 문제의 완전한 교착 상태라는 참담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임기 말까지도 핵 개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듭된 결의안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탄즈와 포르도의 농축 시설을 가동하며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서방 국가들,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핵무기 제조 직전 단계"라는 강력한 경고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및 독일로 구성된 P5+1과의 협상은 공전을 거듭했다.[50] 아마디네자드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을 제한하며 핵 주권을 외쳤으나, 이는 도리어 유럽 연합(EU)마저 이란산 원유 수입을 전면 중단하게 만드는 자충수가 되었다.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자 아마디네자드 정부와 혁명 수비대는 최후의 카드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전략적 요충지를 폐쇄하겠다는 위협은 국제 유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만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 해군 제5함대와 이란 혁명 수비대의 고속정들이 해상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스라엘의 이란 핵 시설 정밀 타격설이 구체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해 "우리는 적의 어떤 공격도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역설했으나, 실제 이란의 내부 경제는 전쟁 위협보다 더 무거운 제재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2012년 8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16차 비동맹 운동(NAM) 정상회의는 아마디네자드 외교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는 120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 회의를 통해 "이란은 고립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굴욕은 이어졌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은 이란의 동맹국인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아마디네자드를 당혹케 했고,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역시 이란의 핵 계획과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는 아마디네자드가 추진했던 '남남 협력(South-South Cooperation)'과 반미 연대가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구호에 불과했으며,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도 이란의 강경 노선이 지지받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임기 말 아마디네자드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닌, 현실화된 '금융 및 에너지 제재'였다. 미국은 이란 중앙은행을 국제 금융 통신망(SWIFT)에서 퇴출시키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원유를 팔아도 대금을 받을 길이 막혔으며, 생필품과 의약품 수입조치 난항을 겪게 되었다.
나르마크의 시장 바닥에서 "물가는 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던 아마디네자드의 호언장담은 휴지조각이 된 리알화 가치 앞에 무너졌다. 테헤란의 환전소 앞에는 연일 장사진이 펼쳐졌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공식 통계로만 30~40%를 상회했다.[51]
아마디네자드는 이 모든 고난을 "서방의 경제 전쟁" 탓으로 돌리며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제재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라리자니 국회의장 등 보수파 인사들과 추잡한 폭로전을 이어가며 체제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는 사실상 통치력을 상실한 기간이었다. 하메네이는 이미 아마디네자드를 대체할 차기 지도자를 고심하고 있었고, 국제 사회는 그를 '대화가 불가능한 지도자'로 낙인찍고 다음 대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가 꿈꿨던 "이란의 위대한 재건"은 국제적 미아(International Pariah)가 된 국가의 모습으로 퇴색되어 갔다.
아마디네자드는 임기 말까지도 핵 개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듭된 결의안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탄즈와 포르도의 농축 시설을 가동하며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서방 국가들,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핵무기 제조 직전 단계"라는 강력한 경고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및 독일로 구성된 P5+1과의 협상은 공전을 거듭했다.[50] 아마디네자드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을 제한하며 핵 주권을 외쳤으나, 이는 도리어 유럽 연합(EU)마저 이란산 원유 수입을 전면 중단하게 만드는 자충수가 되었다.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자 아마디네자드 정부와 혁명 수비대는 최후의 카드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전략적 요충지를 폐쇄하겠다는 위협은 국제 유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시기 페르시아만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 해군 제5함대와 이란 혁명 수비대의 고속정들이 해상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스라엘의 이란 핵 시설 정밀 타격설이 구체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해 "우리는 적의 어떤 공격도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역설했으나, 실제 이란의 내부 경제는 전쟁 위협보다 더 무거운 제재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2012년 8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16차 비동맹 운동(NAM) 정상회의는 아마디네자드 외교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는 120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 회의를 통해 "이란은 고립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굴욕은 이어졌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은 이란의 동맹국인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아마디네자드를 당혹케 했고,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역시 이란의 핵 계획과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는 아마디네자드가 추진했던 '남남 협력(South-South Cooperation)'과 반미 연대가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구호에 불과했으며,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도 이란의 강경 노선이 지지받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임기 말 아마디네자드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닌, 현실화된 '금융 및 에너지 제재'였다. 미국은 이란 중앙은행을 국제 금융 통신망(SWIFT)에서 퇴출시키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원유를 팔아도 대금을 받을 길이 막혔으며, 생필품과 의약품 수입조치 난항을 겪게 되었다.
나르마크의 시장 바닥에서 "물가는 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던 아마디네자드의 호언장담은 휴지조각이 된 리알화 가치 앞에 무너졌다. 테헤란의 환전소 앞에는 연일 장사진이 펼쳐졌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공식 통계로만 30~40%를 상회했다.[51]
아마디네자드는 이 모든 고난을 "서방의 경제 전쟁" 탓으로 돌리며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제재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라리자니 국회의장 등 보수파 인사들과 추잡한 폭로전을 이어가며 체제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는 사실상 통치력을 상실한 기간이었다. 하메네이는 이미 아마디네자드를 대체할 차기 지도자를 고심하고 있었고, 국제 사회는 그를 '대화가 불가능한 지도자'로 낙인찍고 다음 대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가 꿈꿨던 "이란의 위대한 재건"은 국제적 미아(International Pariah)가 된 국가의 모습으로 퇴색되어 갔다.
2.13. 퇴임 이후[편집]
2013년 8월 3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제6대 대통령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2005년 '제3의 혁명'을 부르짖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8년 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국제적 고립, 그리고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라는 무거운 짐을 남긴 채 테헤란 나르마크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2013년 이란 대선은 아마디네자드에게는 굴욕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후보 등록 현장까지 동행했으나, 헌법수호위원회는 마샤이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며 아마디네자드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결국 대선에서는 온건 개혁파로 분류되는 하산 로하니가 당선되었다.
로하니는 당선 직후부터 아마디네자드 정부의 실책을 정조준했다. 퇴임식 당일, 아마디네자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로하니에게 대통령 인장을 넘겨주었으나, 그 이면에는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로하니는 취임사에서 "지난 8년 동안 이란의 경제는 파탄 났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고 선언하며 사실상 아마디네자드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52]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아마디네자드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테헤란 동부의 나르마크(Narmak)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도 "임기가 끝나면 살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해 왔으며, 실제로 그는 퇴임 후 경호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자신의 옛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퇴임 당일, 나르마크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그를 환영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점퍼 차림으로 주민들과 악수를 나누며 "나는 대통령직을 떠난 것이지, 국민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했다. 이러한 행보는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강력한 '포퓰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겠다는 계산된 의도였다. 그는 자신을 '기득권층에게 쫓겨난 서민의 대변자'로 포지셔닝하며, 향후 정치적 재기를 위한 대중적 토대를 유지하고자 했다. 퇴임 초기 그의 일상은 매우 단조로웠다. 동네 사원에서 기도를 드리고, 동네 시장에서 직접 식재료를 사는 모습이 시민들의 SNS를 통해 공유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경제 실정으로 그를 비판하던 반대파들에게조차 "최소한 개인적인 청렴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묘한 평가를 끌어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삶 이면에는 여전히 강력한 지지층인 '무스타자핀(Mostazafin,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의 퇴임이 순탄치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의 파탄 난 관계였다. 임기 후반기, 그는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고, 이는 이란 보수 진영 내에서 그를 '이탈 세력(Deviant Current)'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퇴임 직후 그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법 처리가 시작되었다. 제1부통령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라히미는 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샤이 역시 수사 선상에 올랐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을 옹호하며 사법부를 비판했으나, 이는 오히려 체제 전체와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더 이상 보수파의 영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체제에 위협이 되는 '통제 불능의 야심가'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퇴임 시점에서 아마디네자드 정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경제적으로는 최악에 가까웠다. 서방의 제재와 방만한 통화 정책이 맞물리며 물가 상승률은 40%를 상회했고, 리알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53]
그러나 지방의 빈곤층과 농민들에게 그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그가 추진한 '마스크란(Mehr)' 주택 보급 사업과 직접 보조금 지급 제도는 많은 서민에게 생애 첫 집과 현금을 쥐여주었다. 비록 이 정책들이 국가 재정을 파탄 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수혜를 입은 하층민들에게 아마디네자드는 "우리를 위해 싸워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었다. 이러한 계층별 평가의 극단적인 분열은 퇴임 후에도 아마디네자드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자, 이란 사회의 깊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퇴임 후 정치적 야망을 학술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테헤란 공학 및 기술 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했다. 일명 '아마디네자드 대학교'로 불린 이 프로젝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보수 지식인 그룹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로하니 정부는 허가 절차의 부적절함을 이유로 자금을 동결하고 설립을 무산시켰다.
정치적 휴식기를 갖던 아마디네자드는 2013년 9월, 자신의 모교이자 교수로 재직했던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Iran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토목공학과로 공식 복직했다. 국가 원수에서 대학교수로의 복귀는 이란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교수직을 휴직 상태로 유지했으며, 퇴임 후 곧바로 강단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복직 첫날, 그는 직접 버스를 타고 학교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54] 그는 학교 내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에게 '교통 공학'과 '도시 계획'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어제의 대통령이 칠판 앞에서 판서하는 모습에 생경함을 느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학문적 토론에서만큼은 매우 정교하고 집요한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복직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하니 행정부 산하의 교육부는 전직 대통령의 학내 활동이 학생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그가 강의하는 강의실 주변에는 항상 수많은 학생과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내 개혁파 학생들은 그가 재임 시절 단행했던 대학 내 보수화 작업과 교수 숙청을 거론하며 그의 복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갈등에 굴하지 않고 학술 논문을 발표하거나 국제 학술 대회에 참석하는 등 교수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나는 정치를 하기 위해 학교에 온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인 기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실은 사실상 전직 참모들이 드나드는 '나르마크 캠프'의 전초기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퇴임 후 약 2~3년간 아마디네자드는 공식적인 정치 발언을 극도로 자제했다. 이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관계 악화를 복원하고, 차기 대권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로하니 정부는 아마디네자드 정권 시절의 부패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하며 그를 압박했다.
특히 그의 최측근이었던 모함마드 레자 라히미(전 제1부통령)와 하미드 바가이(전 부통령)가 부패 혐의로 구속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마디네자드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55] 그는 자신의 연구실과 자택에서 은밀히 지지 그룹을 조직하며 재기를 노렸다.
야인 시절에도 그는 국제적인 감각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영어를 독학하며 트위터(현 X) 계정을 개설하고 영어로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의 폐쇄적인 정치 구조를 넘어 국제 사회에 직접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시도였다. 그는 미국의 프로농구(NBA) 경기나 팝 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등 대통령 시절의 딱딱하고 공격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친화적인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페르소나를 구축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이란 내 보수파들에게 "서구 문화에 물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개혁파들에게는 "기회주의적 변신"이라는 조롱을 샀다.
2013년 이란 대선은 아마디네자드에게는 굴욕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후보 등록 현장까지 동행했으나, 헌법수호위원회는 마샤이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며 아마디네자드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결국 대선에서는 온건 개혁파로 분류되는 하산 로하니가 당선되었다.
로하니는 당선 직후부터 아마디네자드 정부의 실책을 정조준했다. 퇴임식 당일, 아마디네자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로하니에게 대통령 인장을 넘겨주었으나, 그 이면에는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로하니는 취임사에서 "지난 8년 동안 이란의 경제는 파탄 났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고 선언하며 사실상 아마디네자드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52]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아마디네자드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테헤란 동부의 나르마크(Narmak)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도 "임기가 끝나면 살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해 왔으며, 실제로 그는 퇴임 후 경호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자신의 옛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퇴임 당일, 나르마크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그를 환영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점퍼 차림으로 주민들과 악수를 나누며 "나는 대통령직을 떠난 것이지, 국민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했다. 이러한 행보는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강력한 '포퓰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겠다는 계산된 의도였다. 그는 자신을 '기득권층에게 쫓겨난 서민의 대변자'로 포지셔닝하며, 향후 정치적 재기를 위한 대중적 토대를 유지하고자 했다. 퇴임 초기 그의 일상은 매우 단조로웠다. 동네 사원에서 기도를 드리고, 동네 시장에서 직접 식재료를 사는 모습이 시민들의 SNS를 통해 공유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경제 실정으로 그를 비판하던 반대파들에게조차 "최소한 개인적인 청렴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묘한 평가를 끌어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삶 이면에는 여전히 강력한 지지층인 '무스타자핀(Mostazafin,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의 퇴임이 순탄치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의 파탄 난 관계였다. 임기 후반기, 그는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고, 이는 이란 보수 진영 내에서 그를 '이탈 세력(Deviant Current)'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퇴임 직후 그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법 처리가 시작되었다. 제1부통령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라히미는 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샤이 역시 수사 선상에 올랐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들을 옹호하며 사법부를 비판했으나, 이는 오히려 체제 전체와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더 이상 보수파의 영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체제에 위협이 되는 '통제 불능의 야심가'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퇴임 시점에서 아마디네자드 정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경제적으로는 최악에 가까웠다. 서방의 제재와 방만한 통화 정책이 맞물리며 물가 상승률은 40%를 상회했고, 리알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53]
그러나 지방의 빈곤층과 농민들에게 그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그가 추진한 '마스크란(Mehr)' 주택 보급 사업과 직접 보조금 지급 제도는 많은 서민에게 생애 첫 집과 현금을 쥐여주었다. 비록 이 정책들이 국가 재정을 파탄 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수혜를 입은 하층민들에게 아마디네자드는 "우리를 위해 싸워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었다. 이러한 계층별 평가의 극단적인 분열은 퇴임 후에도 아마디네자드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자, 이란 사회의 깊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퇴임 후 정치적 야망을 학술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테헤란 공학 및 기술 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했다. 일명 '아마디네자드 대학교'로 불린 이 프로젝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보수 지식인 그룹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로하니 정부는 허가 절차의 부적절함을 이유로 자금을 동결하고 설립을 무산시켰다.
정치적 휴식기를 갖던 아마디네자드는 2013년 9월, 자신의 모교이자 교수로 재직했던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Iran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토목공학과로 공식 복직했다. 국가 원수에서 대학교수로의 복귀는 이란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교수직을 휴직 상태로 유지했으며, 퇴임 후 곧바로 강단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복직 첫날, 그는 직접 버스를 타고 학교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54] 그는 학교 내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에게 '교통 공학'과 '도시 계획'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어제의 대통령이 칠판 앞에서 판서하는 모습에 생경함을 느꼈으나, 아마디네자드는 학문적 토론에서만큼은 매우 정교하고 집요한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복직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하니 행정부 산하의 교육부는 전직 대통령의 학내 활동이 학생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그가 강의하는 강의실 주변에는 항상 수많은 학생과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내 개혁파 학생들은 그가 재임 시절 단행했던 대학 내 보수화 작업과 교수 숙청을 거론하며 그의 복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갈등에 굴하지 않고 학술 논문을 발표하거나 국제 학술 대회에 참석하는 등 교수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나는 정치를 하기 위해 학교에 온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인 기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실은 사실상 전직 참모들이 드나드는 '나르마크 캠프'의 전초기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퇴임 후 약 2~3년간 아마디네자드는 공식적인 정치 발언을 극도로 자제했다. 이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의 관계 악화를 복원하고, 차기 대권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로하니 정부는 아마디네자드 정권 시절의 부패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하며 그를 압박했다.
특히 그의 최측근이었던 모함마드 레자 라히미(전 제1부통령)와 하미드 바가이(전 부통령)가 부패 혐의로 구속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마디네자드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55] 그는 자신의 연구실과 자택에서 은밀히 지지 그룹을 조직하며 재기를 노렸다.
야인 시절에도 그는 국제적인 감각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영어를 독학하며 트위터(현 X) 계정을 개설하고 영어로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의 폐쇄적인 정치 구조를 넘어 국제 사회에 직접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시도였다. 그는 미국의 프로농구(NBA) 경기나 팝 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등 대통령 시절의 딱딱하고 공격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친화적인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페르소나를 구축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이란 내 보수파들에게 "서구 문화에 물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개혁파들에게는 "기회주의적 변신"이라는 조롱을 샀다.
2.14. 2017년 대선 복귀 시도와 출마 금지[편집]
2017년 제12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아마디네자드는 다시금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이란 정계를 뒤흔들었다.
퇴임 후 아마디네자드는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학술 활동에 전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셜 미디어와 개인 웹사이트를 통해 서민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그의 언사가 과거의 '강경 보수'에서 '반기득권 포퓰리즘'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직 로하니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동시에,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냈던 사법부와 보수 기득권층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를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으로 재정의하며, 국가 자산이 특정 소수 권력층에게 독점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권위에 대한 간접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과거의 경직된 종교적 색채보다는 '이란 민족주의'와 '정의'를 강조하며 젊은 층과 저소득층의 향수를 자극했다.
2016년 하반기, 아마디네자드가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례적으로 공개적인 경고를 보냈다. 하메네이는 "특정 인물의 출마가 국가를 양극화(Bipolarity)로 몰아넣을 수 있다"며 사실상 아마디네자드에게 불출마를 권고했다.[56]
당초 아마디네자드는 지도자의 뜻을 받들겠다며 불출마를 시사하는 듯했으나, 2017년 4월 12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내무부를 방문해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다. 그는 현장에서 "지도자의 권고는 명령이 아닌 조언이었을 뿐"이라며 정면 돌파 의지를 천명했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 원칙에 대한 실질적인 항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디네자드의 후보 등록은 이란 정계에 핵폭탄급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곧바로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이란의 모든 공직 후보자를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Guardian Council)는 2017년 4월 20일, 아마디네자드의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재임 시절 저지른 경제 실책, 최고 지도자와의 갈등, 그리고 그의 측근들이 연루된 각종 부패 스캔들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함께 후보 등록을 했던 그의 최측근 하미드 바카이(Hamid Baghaei) 역시 자격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체제가 아마디네자드를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완전히 배제했음을 의미했다.
후보 자격이 박탈된 직후, 아마디네자드는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위원회의 결정이 부당하며 이란 국민의 선택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로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사법부 수장인 라리자니 형제를 "부패한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의 행보는 매우 독특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탄압했던 '녹색 운동'의 구호와 유사하게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개혁파들은 그를 "권력을 잃은 뒤에야 민주주의를 찾는 기회주의자"라며 냉소했고, 보수파들은 그를 "체제를 배신한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좌우 양측 모두에게 버림받은 '정치적 고아' 신세가 되었다.
2017년의 출마 시도와 좌절은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인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는 대중 동원 능력과 카리스마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란의 신권 통치 체제 내에서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거스르고 생존할 수 있는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마디네자드는 '보수주의자'의 탈을 완전히 벗고,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포퓰리스트 투사'로의 변신을 완료했다. 그는 훗날 2021년 대선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2017년의 실패는 그 반복되는 비극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퇴임 후 아마디네자드는 테헤란 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학술 활동에 전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셜 미디어와 개인 웹사이트를 통해 서민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그의 언사가 과거의 '강경 보수'에서 '반기득권 포퓰리즘'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직 로하니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동시에,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냈던 사법부와 보수 기득권층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를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으로 재정의하며, 국가 자산이 특정 소수 권력층에게 독점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권위에 대한 간접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과거의 경직된 종교적 색채보다는 '이란 민족주의'와 '정의'를 강조하며 젊은 층과 저소득층의 향수를 자극했다.
2016년 하반기, 아마디네자드가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례적으로 공개적인 경고를 보냈다. 하메네이는 "특정 인물의 출마가 국가를 양극화(Bipolarity)로 몰아넣을 수 있다"며 사실상 아마디네자드에게 불출마를 권고했다.[56]
당초 아마디네자드는 지도자의 뜻을 받들겠다며 불출마를 시사하는 듯했으나, 2017년 4월 12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내무부를 방문해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다. 그는 현장에서 "지도자의 권고는 명령이 아닌 조언이었을 뿐"이라며 정면 돌파 의지를 천명했다.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 원칙에 대한 실질적인 항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디네자드의 후보 등록은 이란 정계에 핵폭탄급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곧바로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이란의 모든 공직 후보자를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Guardian Council)는 2017년 4월 20일, 아마디네자드의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재임 시절 저지른 경제 실책, 최고 지도자와의 갈등, 그리고 그의 측근들이 연루된 각종 부패 스캔들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함께 후보 등록을 했던 그의 최측근 하미드 바카이(Hamid Baghaei) 역시 자격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체제가 아마디네자드를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완전히 배제했음을 의미했다.
후보 자격이 박탈된 직후, 아마디네자드는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위원회의 결정이 부당하며 이란 국민의 선택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로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사법부 수장인 라리자니 형제를 "부패한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의 행보는 매우 독특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탄압했던 '녹색 운동'의 구호와 유사하게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개혁파들은 그를 "권력을 잃은 뒤에야 민주주의를 찾는 기회주의자"라며 냉소했고, 보수파들은 그를 "체제를 배신한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좌우 양측 모두에게 버림받은 '정치적 고아' 신세가 되었다.
2017년의 출마 시도와 좌절은 아마디네자드라는 정치인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는 대중 동원 능력과 카리스마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란의 신권 통치 체제 내에서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거스르고 생존할 수 있는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마디네자드는 '보수주의자'의 탈을 완전히 벗고,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포퓰리스트 투사'로의 변신을 완료했다. 그는 훗날 2021년 대선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2017년의 실패는 그 반복되는 비극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2.15. 2021년 대선 재도전과 연이은 낙마[편집]
2021년은 중도 개혁파 하산 로하니 정권이 미국과의 핵 합의(JCPOA) 파기 및 경제 제재 재개로 인해 사실상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면서, 민심은 다시금 강력한 리더십과 서민 경제 회복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서민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화려한 복귀를 꿈꾸게 된다.
2021년 대선 국면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마디네자드는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과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강경 보수 진영(심지어 그를 키워준 하메네이 세력까지)을 향해 서슴지 않고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현 체제는 부패했으며,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특히 그는 텔레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젊은 층과 소외 계층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다. 과거 대통령 시절 '검소한 점퍼' 차림으로 서민들을 만났던 이미지를 '체제에 저항하는 야권 지도자'의 이미지로 덧칠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나르마크 지역에 모여든 지지자들 앞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설 것"이라며 대권 도전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21년 5월, 아마디네자드는 수많은 지지자를 대동하고 내무부를 방문해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다. 이 과정은 거의 시위에 가까웠다. 그는 등록 직후 기자회견에서 "만약 나의 후보 자격이 박탈된다면, 나는 이번 선거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투표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례 없는 초강수를 두었다.[57]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란의 모든 후보자를 검증하는 최고 권위 기구인 헌법수호위원회는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부적격 처리)했다. 위원회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재임 후반기에 보여준 하메네이와의 갈등, 그리고 퇴임 후 보여준 돌출 행동들이 체제의 안정성을 해친다고 판단한 것이 명백했다.
당시 선거 판도는 이미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낙점한 것으로 알려진 에브라힘 라이시 당시 사법부 수장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 체제 입장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럭비공 같은 아마디네자드보다는, 충성심이 검증된 라이시를 통해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격 박탈 이후 약속대로 투표 보이콧을 시사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번 선거는 국민의 선택권을 박탈한 무효 선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과거 '녹색 운동' 당시와 같은 대규모 거리 시위로 번지지는 못했다. 이미 이란 국민은 반복되는 경제난과 탄압에 지쳐 있었고, 아마디네자드 역시 '과거의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지지층들은 여전히 그를 "기득권층인 '물라(Mullah, 성직자)'들에 맞서 서민을 대변하는 유일한 투사"로 여겼다. 특히 농촌 지역과 도시 빈민층 사이에서는 그가 시행했던 현금 보조금 정책에 대한 향수가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그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몸담았던 체제를 부정하는 기회주의자"로 보았다. 개혁파들은 2009년 부정 선거의 주역인 그가 민주주의와 투표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고 비난했다.[58]
결국 2021년 대선은 라이시의 압승으로 끝났고, 아마디네자드는 다시 한번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란 보수 진영 내부가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는 비록 후보 자격은 얻지 못했지만, 그가 던진 '반부패'와 '기득권 타파'라는 메시지는 라이시 정권 내내 유령처럼 떠돌았다.
아마디네자드는 낙마 이후에도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국정 자문 기구인 '국정조정위원회(Expediency Council)' 위원직을 유지하며 체제 내부에 한 발을 걸친 채, 외부에서는 체제를 공격하는 포지션을 고수했다.
2021년 대선 국면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마디네자드는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과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강경 보수 진영(심지어 그를 키워준 하메네이 세력까지)을 향해 서슴지 않고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현 체제는 부패했으며,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특히 그는 텔레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젊은 층과 소외 계층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다. 과거 대통령 시절 '검소한 점퍼' 차림으로 서민들을 만났던 이미지를 '체제에 저항하는 야권 지도자'의 이미지로 덧칠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나르마크 지역에 모여든 지지자들 앞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설 것"이라며 대권 도전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21년 5월, 아마디네자드는 수많은 지지자를 대동하고 내무부를 방문해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다. 이 과정은 거의 시위에 가까웠다. 그는 등록 직후 기자회견에서 "만약 나의 후보 자격이 박탈된다면, 나는 이번 선거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투표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례 없는 초강수를 두었다.[57]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란의 모든 후보자를 검증하는 최고 권위 기구인 헌법수호위원회는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부적격 처리)했다. 위원회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재임 후반기에 보여준 하메네이와의 갈등, 그리고 퇴임 후 보여준 돌출 행동들이 체제의 안정성을 해친다고 판단한 것이 명백했다.
당시 선거 판도는 이미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낙점한 것으로 알려진 에브라힘 라이시 당시 사법부 수장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 체제 입장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럭비공 같은 아마디네자드보다는, 충성심이 검증된 라이시를 통해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자격 박탈 이후 약속대로 투표 보이콧을 시사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번 선거는 국민의 선택권을 박탈한 무효 선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과거 '녹색 운동' 당시와 같은 대규모 거리 시위로 번지지는 못했다. 이미 이란 국민은 반복되는 경제난과 탄압에 지쳐 있었고, 아마디네자드 역시 '과거의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지지층들은 여전히 그를 "기득권층인 '물라(Mullah, 성직자)'들에 맞서 서민을 대변하는 유일한 투사"로 여겼다. 특히 농촌 지역과 도시 빈민층 사이에서는 그가 시행했던 현금 보조금 정책에 대한 향수가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그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몸담았던 체제를 부정하는 기회주의자"로 보았다. 개혁파들은 2009년 부정 선거의 주역인 그가 민주주의와 투표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고 비난했다.[58]
결국 2021년 대선은 라이시의 압승으로 끝났고, 아마디네자드는 다시 한번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란 보수 진영 내부가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는 비록 후보 자격은 얻지 못했지만, 그가 던진 '반부패'와 '기득권 타파'라는 메시지는 라이시 정권 내내 유령처럼 떠돌았다.
아마디네자드는 낙마 이후에도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국정 자문 기구인 '국정조정위원회(Expediency Council)' 위원직을 유지하며 체제 내부에 한 발을 걸친 채, 외부에서는 체제를 공격하는 포지션을 고수했다.
2.16. 라이시 사후의 행보[편집]
2024년 5월 19일, 이란 정계는 유례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보수 강경파의 차세대 리더이자 차기 최고 지도자 후보로 거론되던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아제르바이잔 접경 지역에서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행정부 수반의 공백을 넘어,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후의 권력 승계 구도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도발적으로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였다.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 직후 이란 헌법에 따라 50일 이내에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아마디네자드는 이미 두 차례나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며 정치적 생명이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이시의 장례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테헤란의 선거관리위원회를 직접 방문하여 후보 등록을 마쳤다.
등록 현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과거 대통령 시절과 다름없었다. 특유의 점퍼 차림과 대중을 향한 승리의 'V'자 포즈는 건재했다. 그는 현장에서 "국민의 삶이 어렵고,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며 현 체제의 무능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59]
이란의 선거 시스템에서 후보자의 최종 자격은 12명의 성직자와 법학자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가 결정한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위원회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그는 이미 하메네이와 척을 진 상태였으며, 체제 내부에서는 그를 '일탈한 세력(Deviant Current)'의 우두머리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후보 등록 이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여론전을 펼쳤다. 만약 자신이 다시 한번 자격을 박탈당한다면, 이는 이란 민주주의의 사망 선언이라며 위원회를 압박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헌법수호위원회는 그를 포함한 주요 강경파 및 개혁파 인사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이는 체제가 아마디네자드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탈락 직후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며 선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라이시 대통령의 헬기 추락 사고를 둘러싸고 이란 내부에서는 수많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악천후로 인한 단순 사고라는 정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개입설이나 내부 권력 투쟁에 의한 암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아마디네자드의 행보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라이시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애도를 표하면서도, 사고의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날 선 의구심을 드러내는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고 이후 이란 안보 기구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외국 정보기관이 우리 핵심부까지 침투해 있다"는 과거의 발언을 재조명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라이시의 죽음을 이용해 현 안보 라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과거 강경한 대외 정보 정책이 옳았음을 강변하는 수였다.
라이시 사후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하층민들 사이에서 불어온 '아마디네자드 향수'였다. 라이시 정부 시절 가속화된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은 서민들에게 아마디네자드 시절의 파격적인 현금 보조금 정책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 정책이 현재 경제 위기의 시발점 중 하나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있었으나, 당장 내일의 빵값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아마디네자드는 '우리를 위해 돈을 풀었던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민심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시장을 방문하거나 거리에서 시민들과 찍은 사진을 지속적으로 업로드하며, 자신이 여전히 '거리의 대통령'임을 과시했다. 그는 제도권 정치에서는 축출되었을지언정, 대중적 기반(Populist Base)만큼은 여전히 이란 내 어떤 정치인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2024년 정국에서 아마디네자드의 위치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는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체제 안에서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지만, 현재는 그 체제의 근간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야당 인사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아마디네자드를 완전히 숙청하자니 그의 지지층이 일으킬 소요가 두렵고, 그렇다고 권력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엔 그의 통제 불가능한 성향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7월 24일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후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지 않다가 2026년 이란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격에 당해 사망설이 퍼지기도 했으나 튀르키예의 야나돌루 통신에서 그가 살이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생존이 확인되었다.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 직후 이란 헌법에 따라 50일 이내에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아마디네자드는 이미 두 차례나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며 정치적 생명이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이시의 장례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테헤란의 선거관리위원회를 직접 방문하여 후보 등록을 마쳤다.
등록 현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과거 대통령 시절과 다름없었다. 특유의 점퍼 차림과 대중을 향한 승리의 'V'자 포즈는 건재했다. 그는 현장에서 "국민의 삶이 어렵고,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며 현 체제의 무능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59]
이란의 선거 시스템에서 후보자의 최종 자격은 12명의 성직자와 법학자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가 결정한다. 아마디네자드에게 이 위원회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그는 이미 하메네이와 척을 진 상태였으며, 체제 내부에서는 그를 '일탈한 세력(Deviant Current)'의 우두머리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후보 등록 이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여론전을 펼쳤다. 만약 자신이 다시 한번 자격을 박탈당한다면, 이는 이란 민주주의의 사망 선언이라며 위원회를 압박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헌법수호위원회는 그를 포함한 주요 강경파 및 개혁파 인사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이는 체제가 아마디네자드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탈락 직후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며 선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라이시 대통령의 헬기 추락 사고를 둘러싸고 이란 내부에서는 수많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악천후로 인한 단순 사고라는 정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개입설이나 내부 권력 투쟁에 의한 암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아마디네자드의 행보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라이시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애도를 표하면서도, 사고의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날 선 의구심을 드러내는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고 이후 이란 안보 기구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외국 정보기관이 우리 핵심부까지 침투해 있다"는 과거의 발언을 재조명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라이시의 죽음을 이용해 현 안보 라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과거 강경한 대외 정보 정책이 옳았음을 강변하는 수였다.
라이시 사후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하층민들 사이에서 불어온 '아마디네자드 향수'였다. 라이시 정부 시절 가속화된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은 서민들에게 아마디네자드 시절의 파격적인 현금 보조금 정책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 정책이 현재 경제 위기의 시발점 중 하나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있었으나, 당장 내일의 빵값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아마디네자드는 '우리를 위해 돈을 풀었던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이러한 민심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시장을 방문하거나 거리에서 시민들과 찍은 사진을 지속적으로 업로드하며, 자신이 여전히 '거리의 대통령'임을 과시했다. 그는 제도권 정치에서는 축출되었을지언정, 대중적 기반(Populist Base)만큼은 여전히 이란 내 어떤 정치인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2024년 정국에서 아마디네자드의 위치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는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체제 안에서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지만, 현재는 그 체제의 근간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야당 인사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아마디네자드를 완전히 숙청하자니 그의 지지층이 일으킬 소요가 두렵고, 그렇다고 권력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엔 그의 통제 불가능한 성향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7월 24일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후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지 않다가 2026년 이란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격에 당해 사망설이 퍼지기도 했으나 튀르키예의 야나돌루 통신에서 그가 살이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생존이 확인되었다.
3. 평가[편집]
아마디네자드의 8년 재임 기간은 역동적이면서도 소란스러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기득권의 부패에 맞선 '빈자의 영웅'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국가를 고립시키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무모한 포퓰리스트'였다.
또한 테헤란의 세련된 중산층과 지방의 보수적 빈곤층 사이의 깊은 골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이란의 탄도 미사일 및 핵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끈 토대를 마련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 국민을 수십 년간 지속될 경제 제재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퇴임 후에도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타진하며 이란 체제 내부의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뒤 오히려 체제 비판자로 변모한 그의 모습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가 단순히 '체제 수호'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권력 의지'였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또한 테헤란의 세련된 중산층과 지방의 보수적 빈곤층 사이의 깊은 골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이란의 탄도 미사일 및 핵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끈 토대를 마련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 국민을 수십 년간 지속될 경제 제재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퇴임 후에도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타진하며 이란 체제 내부의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뒤 오히려 체제 비판자로 변모한 그의 모습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가 단순히 '체제 수호'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권력 의지'였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3.1. 긍정적 평가[편집]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가 이란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기득권 중심의 권력 구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테헤란 북부의 호화 관저 대신 자신이 살던 나르마크의 평범한 주택에 머물기를 선호했다. 지방 순방 시에는 수만 통의 민원 편지를 직접 수거하여 처리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는 팔레비 왕조 이후 고착화된 '멀고 높은 통치자'의 이미지를 '옆집 아저씨 같은 지도자'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60]
서방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핵 개발을 강행한 것은 많은 이란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는 핵 에너지를 단순히 무기 체계가 아닌, 서구의 기술 독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학적 해방'으로 규정했다. 이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 시절 느꼈던 굴욕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었다.
'메흐르 주택(Mehr Housing)' 프로젝트를 통해 무주택 서민들에게 저가 주택을 대량 공급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비록 부실 공사와 인플레이션 유발이라는 비판이 따랐으나, 국가가 가난한 자의 주거권에 관심을 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테헤란 북부의 호화 관저 대신 자신이 살던 나르마크의 평범한 주택에 머물기를 선호했다. 지방 순방 시에는 수만 통의 민원 편지를 직접 수거하여 처리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는 팔레비 왕조 이후 고착화된 '멀고 높은 통치자'의 이미지를 '옆집 아저씨 같은 지도자'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60]
서방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핵 개발을 강행한 것은 많은 이란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는 핵 에너지를 단순히 무기 체계가 아닌, 서구의 기술 독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학적 해방'으로 규정했다. 이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 시절 느꼈던 굴욕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었다.
'메흐르 주택(Mehr Housing)' 프로젝트를 통해 무주택 서민들에게 저가 주택을 대량 공급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비록 부실 공사와 인플레이션 유발이라는 비판이 따랐으나, 국가가 가난한 자의 주거권에 관심을 둔 상징적 사건이었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아마디네자드는 유가 상승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를 생산적 투자 대신 현금성 보조금 지급에 쏟아부었다. 이는 단기적인 지지율 상승에는 기여했으나, 통화량 급증으로 인한 리알화 가치 폭락과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포퓰리즘의 교과서적 실패'라고 비판한다.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과 이스라엘 절멸 선언은 이란을 '국제 사회의 불량 국가'로 낙인찍게 했다. 이러한 발언은 실질적인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국제 제재를 자초하여, 이란의 금융과 무역망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09년 대선 당시의 부정 의혹과 이어진 녹색 운동 진압은 그의 민주적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평화적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언론을 통제한 행위는 그를 '혁명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화신'으로 보이게 했다.
이란을 단순한 국가가 아닌 '이슬람 문명의 중심'으로 상정하고,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UN 등)를 불공정의 산물로 규정하여 정면 도발했다.
홀로코스트 부정 발언과 이스라엘 절멸 선언은 이란을 '국제 사회의 불량 국가'로 낙인찍게 했다. 이러한 발언은 실질적인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국제 제재를 자초하여, 이란의 금융과 무역망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09년 대선 당시의 부정 의혹과 이어진 녹색 운동 진압은 그의 민주적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평화적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언론을 통제한 행위는 그를 '혁명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화신'으로 보이게 했다.
이란을 단순한 국가가 아닌 '이슬람 문명의 중심'으로 상정하고,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UN 등)를 불공정의 산물로 규정하여 정면 도발했다.
4. 아마디네자드즘(Ahmadinejadism)[편집]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현대사에 '아마디네자드즘'이라 불리는 정치·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이는 이슬람 원리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그리고 하층민의 욕망을 건드리는 포퓰리즘이 기묘하게 결합한 형태이다. 그가 권좌에서 내려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계에서 여전히 그가 소환되는 이유는, 그가 구축한 이 사상적 토대가 이란 사회의 특정 계층에게 강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마디네자드즘의 가장 강력한 기둥은 경제적 포퓰리즘이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석유 자산의 혜택을 국민의 식탁 위로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팔레비 왕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료주의적 분배 방식이나, 라프산자니 시절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지친 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실제로 정부 보조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급하는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경제학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다. 매달 통장에 찍히는 현금은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 유권자들에게 아마디네자드를 '자신들을 챙겨주는 유일한 지도자'로 각인시켰다. 각주[61]
아마디네자드즘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강렬한 메시아적 종교관이다. 그는 시아파의 12번째 이맘인 '마흐디(Mahdi)'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었으며, 자신의 정책이 그의 재림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UN 총회 연설 당시 자신의 머리 위로 후광이 비쳤다는 발언이나, 각료 회의에서 마흐디를 위한 빈자리를 마련했다는 일화는 그의 사상이 단순한 정치를 넘어 종교적 광기 혹은 신비주의와 결합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적인 성직자 계급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통적인 시아파 신학에서는 성직자가 이맘의 대리인 역할을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이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 내부의 권력 구조를 '기득권 마피아' 대 '억압받는 민중'으로 치환했다. 특히 전임 대통령인 라프산자니 가문을 부패한 기득권의 상징으로 공격하며 자신을 그들에 맞서는 투사로 포지셔닝했다. 이는 이란 내부에 존재하던 빈부 격차와 권력 독점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의 어법은 정제되지 않았으며, 때로는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바닥의 언어'는 엘리트들의 세련된 수사에 신물이 난 기층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디네자드즘에서 '말투'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도구였다.
국제 관계에서 아마디네자드즘은 타협 없는 민족주의로 나타났다. 그는 핵 개발을 이란의 자부심과 동일시했다. 서방의 제재를 "찢어진 종잇조각"이라고 비하하며 강행군을 이어간 것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지만 동시에 이란인들의 굴절된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했다.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이스라엘 말살 발언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서방 세계가 금기시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타격함으로써 자신이 이슬람 세계의 진정한 리더임을 증명하려 했다. 이는 중동 내 아랍 민중들 사이에서도 한때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게 만든 동력이 되었다.[62]
결국 아마디네자드즘은 지속 가능한 통치 철학이라기보다는 위기의 시대가 낳은 정치적 돌연변이에 가깝다. 경제적 실책과 외교적 고립은 이란 국민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가 부르짖던 '정의'는 측근 비리로 얼룩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이란 정치에서 '민중의 욕망'을 조직화하는 법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며, 성직자 중심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평신도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 오늘날 이란의 강경 보수파 내에서도 아마디네자드의 지지층을 흡수하기 위해 그의 수법을 모방하는 정치인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아마디네자드즘은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이란 현대사가 처한 모순, 근대화와 전통, 종교와 정치, 민중과 기득권이 아마디네자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어 나타난 강력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아마디네자드즘의 가장 강력한 기둥은 경제적 포퓰리즘이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석유 자산의 혜택을 국민의 식탁 위로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팔레비 왕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료주의적 분배 방식이나, 라프산자니 시절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지친 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실제로 정부 보조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급하는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경제학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다. 매달 통장에 찍히는 현금은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 유권자들에게 아마디네자드를 '자신들을 챙겨주는 유일한 지도자'로 각인시켰다. 각주[61]
아마디네자드즘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강렬한 메시아적 종교관이다. 그는 시아파의 12번째 이맘인 '마흐디(Mahdi)'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었으며, 자신의 정책이 그의 재림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UN 총회 연설 당시 자신의 머리 위로 후광이 비쳤다는 발언이나, 각료 회의에서 마흐디를 위한 빈자리를 마련했다는 일화는 그의 사상이 단순한 정치를 넘어 종교적 광기 혹은 신비주의와 결합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적인 성직자 계급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통적인 시아파 신학에서는 성직자가 이맘의 대리인 역할을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이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 내부의 권력 구조를 '기득권 마피아' 대 '억압받는 민중'으로 치환했다. 특히 전임 대통령인 라프산자니 가문을 부패한 기득권의 상징으로 공격하며 자신을 그들에 맞서는 투사로 포지셔닝했다. 이는 이란 내부에 존재하던 빈부 격차와 권력 독점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의 어법은 정제되지 않았으며, 때로는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바닥의 언어'는 엘리트들의 세련된 수사에 신물이 난 기층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디네자드즘에서 '말투'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도구였다.
국제 관계에서 아마디네자드즘은 타협 없는 민족주의로 나타났다. 그는 핵 개발을 이란의 자부심과 동일시했다. 서방의 제재를 "찢어진 종잇조각"이라고 비하하며 강행군을 이어간 것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지만 동시에 이란인들의 굴절된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했다.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이스라엘 말살 발언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서방 세계가 금기시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타격함으로써 자신이 이슬람 세계의 진정한 리더임을 증명하려 했다. 이는 중동 내 아랍 민중들 사이에서도 한때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게 만든 동력이 되었다.[62]
결국 아마디네자드즘은 지속 가능한 통치 철학이라기보다는 위기의 시대가 낳은 정치적 돌연변이에 가깝다. 경제적 실책과 외교적 고립은 이란 국민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가 부르짖던 '정의'는 측근 비리로 얼룩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이란 정치에서 '민중의 욕망'을 조직화하는 법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며, 성직자 중심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평신도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 오늘날 이란의 강경 보수파 내에서도 아마디네자드의 지지층을 흡수하기 위해 그의 수법을 모방하는 정치인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아마디네자드즘은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이란 현대사가 처한 모순, 근대화와 전통, 종교와 정치, 민중과 기득권이 아마디네자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어 나타난 강력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1] '사보르(Sabour)'는 이란어로 '실 짜는 사람' 혹은 '염색업자'를 의미하며, '지안'은 '~의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그의 가문이 전통적으로 수공업이나 노동계급에 종사했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성씨였다.[2] '아마드(Ahmad)'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별칭 중 하나이며, '네자드(Nejad)'는 '혈통' 혹은 '종족'을 뜻한다. 즉, '아마드(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꾀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도시 생활에서 종교적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선택이었다.[3] 당시 응시생이 수십만 명에 달했음을 고려할 때, 이는 상위 0.01% 안에 드는 성적으로 그가 지적으로 매우 우수한 엘리트였다.[4] 이들은 당시 아마디네자드가 인질들을 신문하고 '사탄의 앞잡이'라며 폭언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가 당시 점거를 주도한 학생 단체인 '이맘의 노선을 따르는 학생들(Muslim Student Followers of the Imam's Line)'의 지도부였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되었다.[5] 그는 마르크스주의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슬람주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에만 집중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이 점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공산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모두를 경계하는 독자적인 강경 보수 노선을 걷고 있었음을 시사한다.[6] 당시 이란의 소년병들이 '천국으로 가는 열쇠'라고 적힌 플라스틱 목걸이를 걸고 지뢰밭으로 뛰어들던 광경은 아마디네자드와 같은 강경파들에게는 비극이 아닌 숭고한 성전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7] 이란 서부 사르다슈트(Sardasht) 지역에 투하된 화학탄으로 고통받는 민간인들을 목격한 경험은 그가 훗날 핵 개발을 '주권의 문제'로 규정하며 국제 사회의 제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8] 그의 학위 논문 제목은 '교통 제어 알고리즘의 최적화'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과정에서 보여준 분석적 접근은 그가 단순한 선동가가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행정가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였다.[9] 이 시기 그가 보여준 저돌적인 추진력은 훗날 그가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는 관료적 절차를 건너뛰고 직접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효율적이었으나 동시에 독단적이라는 비판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10] 그는 "전쟁에서 피 흘린 이들이 국가의 주인이며, 이들이 행정의 최우선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참전 용사 우대' 정책은 훗날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했다.[11] 그는 주지사 시절에도 고급 관용차 대신 낡은 페이칸을 타고 다녔으며, 수행원 없이 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차를 마시는 등 서민적 행보를 이어갔다. 이는 훗날 그가 대선에서 내세운 '서민의 대변자' 이미지가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랜 생활 습관에서 기인했음을 보여준다.[12] 아바드 가란은 '이란 건설자 연합'이라는 뜻으로, 기존 보수 세력이 노쇠했다는 비판 속에 등장한 젊고 기술적인 강경 보수 그룹이다. 이들은 종교적 원칙주의와 기술적 전문성을 결합한 '뉴 라이트' 성격을 띠었다.[13] 당시 아바드 가란은 정치적 구호보다는 '행정적 효율성'과 '도시 개발'을 앞세워 유권자들에게 접근했다. 이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중도층을 흡수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14] 이 시기 그는 테헤란 시장으로서 개혁파가 설치했던 문화 센터들을 폐쇄하고, 이를 종교 교육 시설이나 자선 단체 본부로 전환하는 등의 급진적인 '문화 역행' 정책을 펼쳤다.[15] 당시 정치 전문가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무모한 도전으로 여겼다. 지지율 조사에서 그는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는 시장 시절 다져놓은 바시지(Basij) 민병대 네트워크와 저소득층의 잠재적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16] 당시 개혁파 후보였던 모스타파 모인과 보수파 거물 알리 라리자니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아마디네자드는 투표 당일 도시 외곽과 농촌 지역에서 폭발적인 투표율을 기록하며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가게 했다.[17] 훗날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까지,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다.[18] 당시 내각 21명 중 최소 9명이 혁명 수비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이란 현대사에서 군부 출신이 행정부를 이토록 광범위하게 장악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19] 이란 경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 산업의 수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측근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세 차례나 의회의 거부를 당했다. 이는 그가 보수 진영 내에서도 독단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20] 당시 서방 언론은 아마디네자드를 이란의 실권자로 묘사했으나, 실제로는 하메네이가 설계한 거대한 전략 속에서 아마디네자드가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21] 2005년 UN 총회 연설 당시 자신의 머리 위로 후광(Halo)이 비쳤으며, 청중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연설에 집중했다고 주장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하메네이 등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다소 과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초기에는 보수적인 민중을 선동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22] 이 시기 혁명수비대는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에너지, 건설, 통신, 금융을 장악한 거대 경제 카르텔로 성장했다. 이는 훗날 아마디네자드가 하메네이와 갈등을 빚을 때, 하메네이가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23] 이 갈등은 2009년 재선 이후 '11일간의 칩거 사건'으로 폭발하게 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24] 이러한 현장 집행 방식은 관료 체제를 무력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아마디네자드는 이를 '혁명적 효율성'이라 부르며 강행했다.[25] 훗날 발생한 이란 지진 당시 메흐르 주택들이 힘없이 무너지며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내자, 이 프로젝트는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상징하는 사례로 전락했다.[26] 이 발언의 원문인 'Mahv-shavad az safheh-ye ruzgar'를 두고 번역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직역하면 '시대의 페이지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뜻으로, 물리적 파괴보다는 정권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으나, 국제 사회는 이를 명백한 '국가 말살 위협'으로 받아들였다.[27] 당시 발언 원문: "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의 신화를 만들어냈고, 이를 하느님, 종교, 예언자보다 더 높은 가치로 두었다." 이 발언은 즉시 전 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28] 하타미는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이란의 도덕적 위상을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직격탄을 날렸다.[29] 이 결의안은 이란의 핵 관련 자산 동결과 주요 인사에 대한 여행 금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아마디네자드 정부에게 큰 외교적 타격이었으나, 그는 겉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30] 당시 테헤란의 인플레이션은 공식 발표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으며,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는 아마디네자드의 외교적 고집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31]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 표현을 처음 사용했으나, 아마디네자드 취임 이후 이 용어는 양국 관계를 정의하는 실질적인 외교적 가이드라인이 되었다.[32] 이 발언은 훗날 이란 경제가 실제 제재로 인해 파탄에 이르게 되자 국내 반대파들로부터 '현실 감각 없는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는 근거가 되었다.[33] 아마디네자드는 재임 중 베네수엘라를 6번이나 방문했으며, 차베스 역시 이란을 9번 방문했다. 이들은 테헤란과 카라카스를 잇는 직항 노선을 개설했는데, 서방 정보기관은 이 노선이 무기나 핵 관련 물질을 운송하는 통로로 활용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34] 2007년 이란은 모든 원유 수출 대금 결제에서 달러화 사용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의 금융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했으나,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상징적 행위로 국제 금융 시장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35] 당시 테헤란의 집값과 식료품 가격은 하룻밤 사이에도 수 퍼센트씩 급등했으며, 중산층 사이에서는 "석유가 식탁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 식탁의 음식을 다 태워버리고 있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36] 당시 토론회에서 아마디네자드는 무사비의 부인 자흐라 라흐나바르드의 학위 문제를 거론하며 사진을 흔들어 보였는데, 이는 이란 대중에게 신사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비치며 개혁파의 결집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37] 무사비의 득표율은 33.7%에 불과했다. 심지어 무사비의 고향인 아제르바이잔 지역과 개혁파 지지세가 압도적인 테헤란에서도 아마디네자드가 압승을 거둔 것으로 발표되자 의구심은 극에 달했다.[38] 초록색은 이슬람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이자, 무사비 후보가 내세운 개혁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 색깔이 시위의 상징이 되면서 이 운동은 '녹색 운동(Jonbesh-e Sabz)'으로 불리게 되었다.[39] 이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평범한 시민을 '쓰레기'로 치부한 대통령의 태도에 분노한 중도파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게 만든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받는다.[40] 이에 대해 당국은 타 지역 투표자가 포함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으나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41] 이 시기 아마디네자드는 취임사에서 '화합'이나 '치유'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정복', '승리', '응징'과 같은 강한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반대 세력과의 대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42] 당시 테헤란의 환전소 앞에는 아침마다 자산을 달러나 금으로 바꾸려는 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사법 경찰을 동원해 암시장 거래업자들을 체포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으나 효과는 미미했다.[43] 테헤란의 일부 정육점에서는 닭고기 가격이 폭등하자 닭고기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당시 이란 경찰청장은 TV에 출연해 "드라마에서 닭고기를 먹는 장면을 내보내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보고 분노할 수 있다"는 황당한 권고를 하기도 했다.[44] 이란 헌법상 장관 임면권은 대통령에게 있으나, 정보부·국방부·외무부 등 핵심 부처의 장관직은 관례상 최고 지도자의 묵시적 승인이 필수적이다. 하메네이의 복직 명령은 아마디네자드의 권한에 대한 공개적인 '질책'이었다.[45] 심지어 마샤이와 가까운 인사들이 귀신을 부리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국정에 개입한다는 황당한 혐의로 체포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이는 아마디네자드의 정치적 고립을 심화시키기 위한 고도의 여론전이었다.[46] 이는 성직자 중심의 통치 체제인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의 통치)'를 근간으로 하는 이란 공화국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47] 라히미는 재판 과정에서 "내가 받은 돈은 선거 자금으로 사용되었으며,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폭로전을 벌였으나, 아마디네자드는 그와의 선을 긋기에 급급했다.[48] 마샤이는 "이란은 이슬람보다 이란 자체의 정체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식의 민족주의적 발언을 쏟아냈는데, 이는 신권 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이란의 지배층에게는 체제 전복적인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49] 이 영상은 아마디네자드의 측근인 모르테자 모타헤디가 비밀리에 촬영한 것으로, 라리자니 가문의 부패를 폭로하여 의회의 공격을 무력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50] 아마디네자드는 협상 테이블에서 이란의 권리를 주장하는 '전사'의 이미지를 고수했으나, 실질적으로 협상의 전권을 쥐고 있던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 보수파는 아마디네자드의 돌발적인 외교적 언사(홀로코스트 부정 등)가 협상의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51] 실제 체감 물가는 100% 이상 상승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수입에 의존하던 식료품과 가전제품 가격이 폭등하면서 중산층은 붕괴했고, 그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서민층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52] 로하니 정부는 출범 직후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남긴 국가 부채 규모가 당초 보고된 것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하며 대대적인 조사를 예고했다. 이는 아마디네자드의 지지 기반이었던 서민층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53] 2012년부터 2013년 사이 리알화의 가치는 약 3배 가까이 하락했으며, 이는 수입에 의존하는 중산층의 붕괴를 가져왔다.[54] 당시 이란 언론들은 그가 경호 차량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는 장면을 집중 보도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여전한 쇼맨십"이라 비난했으나,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권위주의를 타파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비쳐졌다.[55] 라히미의 구속 당시 아마디네자드는 강력히 반발하며 "정치적 보복"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그가 점차 체제 내부의 비판자로 변모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56] 이란의 정치 구조상 최고 지도자의 '권고'는 사실상의 '명령'으로 통용된다. 하메네이는 아마디네자드 재임 후반기 그와 겪었던 극심한 갈등을 잊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권력을 잡을 경우 체제의 안정성이 위협받을 것이라 판단했다.[57] 이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 내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반체제적 발언이었다. 최고 지도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58] 2009년 당시 그는 시위대를 향해 '먼지와 쓰레기'라고 비하했으나, 2021년에는 본인이 직접 체제의 불투명성을 공격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59] 아마디네자드는 퇴임 이후 줄곧 현직 대통령들이나 사법부의 부패를 공격하며 자신을 '국민의 편에 선 유일한 저항자'로 포지셔닝해 왔다. 이는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의 권위에 대한 우회적인 도전으로 해석되었다.[60] 실제 그는 재임 중 수백만 통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소액 대출을 주선했으며, 이는 농촌 지역과 도시 빈민층 사이에서 그를 종교적 성자(Saint)에 가까운 반열로 올려놓았다.[61] 이 보조금 정책은 훗날 이란 리알화의 가치 폭락과 연간 30%가 넘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그러나 수혜자들에게는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직접 책임진다는 강력한 인식을 심어주었다.[62] 2000년대 중반, 수니파 국가인 이집트나 요르단의 거리에서도 아마디네자드의 초상화를 든 민중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종파를 넘어선 '반미·반서방의 아이콘'이 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