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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캄보디아
1. 개요2. 고대
2.1. 푸난(부남)2.2. 첸라(진랍)2.3. 크메르 제국(앙코르 왕조)
3. 고전후 시대: 후기 크메르 왕국4. 근현대
4.1. 프랑스령 캄보디아4.2. 일제의 캄보디아 점령4.3. 프랑스의 귀환과 재독립4.4. 캄보디아 제1왕국4.5. 크메르 공화국4.6.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주 정권)4.7.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4.8. 캄보디아국4.9. UNTAC4.10. 캄보디아 제2왕국
4.10.1. 라나리드-훈 센 연립내각4.10.2. 훈 센의 장기집권4.10.3. 훈 센-훈 마넷 부자 세습

1. 개요[편집]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캄보디아의 주류 민족은 크메르인으로, 캄보디아의 역사는 곧 크메르인의 역사라 볼 수 있다.

2. 고대[편집]

2.1. 푸난(부남)[편집]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존재했던 캄보디아 최초의 국가.
프놈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 역사서에는 부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푸난은 인도 출신 브라만 남성과 나가(naga)족[1] 여왕이 결혼하여 세웠다는 건국 신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캄보디아가 역사 시대 초기부터 인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2. 첸라(진랍)[편집]

6세기에 등장하여 푸난을 멸망시키고 9세기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한 국가.
전근대 중국 역사서에는 진랍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첸라(진랍)은 해안지대에 위치한 수첸라(수진랍)과 내륙에 위치한 육첸라(육진랍)으로 나뉘었는데, 수첸라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위치한 마타람 왕국을 자극했다가 마타람 군대에 정벌당해 속국으로 전락했다.

2.3. 크메르 제국(앙코르 왕조)[편집]

802년에 수첸라(수진랍)의 왕으로 즉위한 자야바르만 2세는 수첸라의 내정에 간섭하던 마타람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확보한 후, 중앙집권화를 달성하고 육첸라(육진랍)까지 정복하여 캄보디아의 통일을 달성했는데 이로써 캄보디아 역사상 최전성기인 크메르 제국이 시작되었다.

크메르 제국은 앙코르를 수도로 삼아서 앙코르 와트라는 사원을 건설하여 앙코르 왕조라고도 불렸다.
초기 크메르 제국은 힌두 제국이었고 앙코르 와트 역시 힌두교 사원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앙코르 와트 역시 불교 사원이 되었다.

전성기의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나라였으나, 13세기 원나라의 침공을 겪은 이후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여 1431년 수코타이 왕국(지금의 태국) 군대에 의해 수도 앙코르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3. 고전후 시대: 후기 크메르 왕국[편집]

1431년 앙코르 함락 이후에도 크메르 왕실은 지방 도시로 천도하여 왕통 자체는 계속 이어졌으나, 과거 동남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고, 베트남시암(지금의 태국) 등 주변국들의 침략과 내정간섭에 시달리는 암흑기가 이어졌다.

19세기에 이르러선 아예 베트남과 시암이 캄보디아를 분할 점령하여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두 나라는 캄보디아를 직접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압적인 동화 정책을 실시하여 크메르인(캄보디아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려 했으나, 1863년에 노로돔 왕이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하고 프랑스군이 개입하여 베트남군과 시암군을 축출하면서 민족 말살 시도 자체는 무산되었다.

4. 근현대[편집]

4.1. 프랑스령 캄보디아[편집]

1863년 프랑스의 개입으로 캄보디아베트남시암에 의한 민족 말살은 피할 수 있었고, 캄보디아 왕실도 보존되었으나, 그 대신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사권을 상실했으며, 프랑스는 베트남과 라오스까지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묶어 통치했다.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했던 노로돔 왕은 1904년까지 재위하다가 사망했는데, 프랑스 식민당국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 이복동생인 시소와스를 왕위에 앉혔고, 이로써 단일 왕통으로 이어지던 캄보디아 왕실은 노로돔 왕조시소와스 왕조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었다.

시소와스 왕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시소와스 모니봉이 왕위를 승계하여 시소와스 왕조가 이어지다가, 1941년에 노로돔 왕의 증손자인 18살의 노로돔 시아누크가 왕위를 계승하여 다시 노로돔 왕조에 왕위가 돌아갔는데, 시아누크 왕은 시소와스 모니봉 왕의 외손자였기에 모계로는 시소와스 왕조의 혈통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4.2. 일제의 캄보디아 점령[편집]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본래 캄보디아의 지배국이던 프랑스는 1년 전인 1940년에 일제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국이 들어선 상태였기에 일본군의 캄보디아 점령을 묵인했다.

일제 점령 초기에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관료들이 계속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면서 일제와 비시 프랑스의 이중 통치 구조가 형성되었으나, 1944년에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 프랑스 본토 탈환에 성공하여 다시 프랑스가 연합국에 합류하면서, 캄보디아의 프랑스인들이 일제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생겼고, 결국 1945년에 일본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령 캄보디아 총독부를 전복시키고 캄보디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괴뢰국을 수립했다.

캄보디아 왕국은 프랑스령 시대부터 명목상 국왕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에게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여 공식적으로는 괴뢰국이 아닌 독립국이라 주장했으나, 같은 해 8월 15일에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멸망했다.

4.3. 프랑스의 귀환과 재독립[편집]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옛 지배국인 프랑스가 돌아와 캄보디아를 재식민화했다.

프랑스는 재식민화에 저항하는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인도차이나 전쟁을 수행했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가장 큰 식민지인 베트남에 집중하기 위해 1953년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물러갔는데, 정작 그렇게 선택과 집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만인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 인민군에 패하면서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체를 상실하게 되었다.

4.4. 캄보디아 제1왕국[편집]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왕국을 다시 선포했는데, 괴뢰국 시기의 캄보디아 왕국은 흑역사 취급하므로 독립 이후에 성립된 캄보디아 왕국을 캄보디아 제1왕국이라 한다.

이 당시 캄보디아의 왕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군주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1955년에 자신의 아버지인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2], 인민 사회주의 공동체(약칭 상쿰)을 창당하여 총선에서 승리하고 총리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시아누크는 국내에선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제1세계와 제2세계 중 어느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외교를 추구했으나, 베트남 전쟁에서는 북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를 통과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을 지원하는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묵인하는 행보를 보였고, 결국 1970년에 미국이 지원한 론 놀(Lon Nol)의 쿠데타로 캄보디아 제1왕국은 붕괴되었다.

4.5. 크메르 공화국[편집]

1970년 쿠데타로 캄보디아 왕국을 타도한 론 놀(Lon Nol)은 크메르 공화국을 선포하고 친미 반공 외교를 펼치며, 자국 영토에 들어온 베트남 인민군과 베트콩, 그리고 국내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주[3]를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크메르 공화국은 남베트남 못지 않게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해 공산세력을 토벌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1975년에 남베트남과 함께 패망하여 수도 프놈펜에 크메르 루주가 입성하면서 멸망했다.

4.6.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주 정권)[편집]

1975년 프놈펜을 함락시킨 크메르 루주민주 캄푸치아를 건국하여 캄푸치아 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를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캄푸치아 공산당 서기장 폴 포트와 국가주석 키우 삼판이라는 크메르 루주 정권 투톱의 주도하에 킬링 필드라 불리는 대학살이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참극은 크메르 루주가 같은 공산주의 국가베트남을 상대로 도발했다가 1979년 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4.7.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편집]

1979년 프놈펜을 함락시킨 베트남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고, 크메르 루주에서 친베트남파로 전향한 인사들이 창당한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에 의한 일당독재 국가를 만들었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킬링 필드를 종식시키긴 했으나 베트남의 괴뢰정부라는 점 때문에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국제법상 캄보디아의 합법정부라는 지위를 갖고 있던 크메르 루주는 노로돔 시아누크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 손 산(Son Sann) 전 총리가 이끄는 반공 무장단체인 크메르 인민자유전선(KPNLF)와 연합하여 반베트남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4.8. 캄보디아국[편집]

1989년에 베트남 인민군이 철군하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국호를 캄보디아국으로 변경한 후 반베트남 반군들과 협상을 진행했고, 캄푸치아 인민혁명당 역시 1991년에 당명을 캄보디아 인민당으로 변경하며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4.9. UNTAC[편집]

1992년에 캄보디아국과 푼신펙, 크메르 인민자유전선(KPNLF) 간의 3자 협상 결과 유엔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하면서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가 들어섰는데, 이때 크메르 루주는 협상을 거부하고 반정부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4.10. 캄보디아 제2왕국[편집]

4.10.1. 라나리드-훈 센 연립내각[편집]

1993년에 캄보디아 주요 정파 간에 노로돔 시아누크를 복위시키되 실권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의 왕정복고가 합의되면서, 캄보디아 왕국이 부활했다.

캄보디아 제2왕국 체제의 첫 총선인 1993년 총선에서는 시아누크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가 이끄는 푼신펙이 원내1당이 되고 캄보디아국의 여당이었던 캄보디아 인민당은 원내2당으로 전락했으나, 군부는 여전히 인민당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라나리드를 제1총리로 하고 인민당의 훈 센(Hun Sen)을 제2총리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

4.10.2. 훈 센의 장기집권[편집]

1997년에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켜 라니리드를 축출하고 단독 총리가 되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권위주의적 독재 국가로 퇴행했다.

훈 센은 집권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경제를 성장시키고 크메르 루주 전범들을 처벌하여 고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독재를 강화하여 2018년에는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까지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4.10.3. 훈 센-훈 마넷 부자 세습[편집]

2024년 총선을 이후 훈 센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인 훈 마넷이 총리직을 승계하여 부자세습에 성공했는데, 이후에도 훈 센은 캄보디아 상원의장을 역임하며 상왕 정치를 시전하고 있다.

2025년에는 캄보디아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국력을 가진 태국과의 국경 분쟁이 발발하여 전면전 위기로 치달았으나 협상으로 분쟁을 일단락지었다.

2025년 10월부터는 캄보디아 정부와 유착한다는 의혹이 있는 중국계 범죄조직들이 만든 캄보디아 범죄단지가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었다.
[1]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의 형상을 한 종족으로, 불교동아시아에 전해진 후에는 용과 동일시되기도 했다.[2] 수라마리트는 1960년에 사망하여 그 이후부터는 그의 아내이자 시아누크의 모친인 시소와스 코사막이 섭정을 맡아 명목상 군주의 역할을 대행했다.[3] 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