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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근대
2.1. 고대 베트남
2.1.1. 반랑(문랑)2.1.2. 어우락(구낙)2.1.3. 남비엣(남월)2.1.4. 북속기
2.2. 응오 왕조2.3. 다이꼬비엣(대구월)
2.3.1. 딘 왕조(정가)2.3.2. 전 레 왕조(전여가)
2.4. 다이비엣(대월)
2.4.1. 리 왕조(이가)2.4.2. 쩐 왕조(진가)2.4.3. 다이응우(호 왕조)2.4.4. 후 쩐 왕조(후진가)와 명나라의 지배2.4.5. 후 레 왕조(후여가)2.4.6. 남북조시대
2.4.6.1. 북조: 막 왕조(막가)2.4.6.2. 남조: 중흥 레 왕조(중흥여가)
2.4.7. 남북국시대
2.4.7.1. 북부
2.4.7.1.1. 중앙: 찐씨 정권(정주)2.4.7.1.2. 막 왕조 잔당(까오방 정권)2.4.7.1.3. 부씨 정권(무주)
2.4.7.2. 남부: 응우옌씨 정권(완주)
2.4.8. 떠이선 왕조(서산가)
3. 근대
3.1. 응우옌 왕조(완가)의 대남국3.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3.3. 베트남 제국
4. 현대
4.1. 베트남 8월 혁명4.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4.3. 남북분단 및 베트남 전쟁4.4.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1. 개요[편집]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베트남은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받아들였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체적인 기록을 남긴 나라이며, 따라서 역사 기록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독보적으로 풍부하게 남아있다.

2. 전근대[편집]

베트남의 주류 민족은 비엣족(월족) 또는 킨족(경족)이라 하는데, 전근대 베트남의 역사는 북쪽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남쪽으로는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인 참족의 나라 참파를 밀어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1] 전개되었다.

2.1. 고대 베트남[편집]

2.1.1. 반랑(문랑)[편집]

문헌에 등장하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로, 홍브엉(홍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들이 다스렸다고 한다.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북 등의 유물을 통해 해당 시기에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는 고고학적으로 인정박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신화고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인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2.1.2. 어우락(구낙)[편집]

기원전 3세기경 안즈엉브엉(안양왕) 툭판(촉반)이라는 인물이 반랑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

툭판은 그 이름 때문에 전근대 역사서에는 중국의 촉 지방[2] 출신으로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역사학계를 제외하면 단순 음차 표기일 뿐 실제 촉 지방과는 상관 없다는 설이 유력하다.

툭판 본인이 살아있을 때 후술할 남월에 정복당했기에 1대만에 끝난 단명 국가였다.

2.1.3. 남비엣(남월)[편집]

진나라 무관 출신 찌에우다(조타)가 세운 나라로, 중심지는 중국 광둥성(광동성) 광저우시 일대였으나 어우락을 정복하고 베트남 북부 일대까지 지배하여 베트남이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었다.

남월은 조타 본인의 치세에는 황제를 칭했으나, 이후에는 한나라의 눈치를 보며 으로 칭호를 낮추었는데, 마지막 군주 조건덕의 치세에 한무제가 파견한 한나라 군대에 정복당했다.

2.1.4. 북속기[편집]

한나라 이래 중원 왕조들이 베트남을 지배한 시대를 베트남에서는 북방 국가에 속했던 시기라 하여 '북속기'라 한다.

이 시대에도 쯩 자매, 전 리 왕조 등이 사실상의 독립 정권을 세운 시대가 있긴 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해어 10세기 오대십국시대 중반까지 중국의 지배가 장기간 이어졌다.

2.2. 응오 왕조[편집]

응오꾸옌(오권)이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남한(南漢)[3] 군대를 물리치면서, 길었던 북속기가 종식되고 베트남 독립 왕조가 형성되었다.

응오 왕조(오가)는 안남이라는 국호를 채택하고 을 칭하며 다스렸는데, 응오꾸옌 사후에 십이사군시대라 불리는 군벌 난립 시대로 돌입하며 왕권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딘보린(정부령)의 역성혁명으로 무너졌다.

2.3. 다이꼬비엣(대구월)[편집]

응오 왕조(오가)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딘 왕조(정가)는 대구월이라는 국호를 채택했는데, 이는 후대 왕조인 전 레 왕조(전여가) 및 리 왕조(이가) 초기까지 이어졌다.

2.3.1. 딘 왕조(정가)[편집]

딘보린(정부령)이 응오 왕조(오가)를 멸망시키고 세운 왕조로, 본격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외왕내제 체제를 구축했다.

2.3.2. 전 레 왕조(전여가)[편집]

레호안(여환)이 딘 왕조(정가)를 멸하고 세운 왕조.

2.4. 다이비엣(대월)[편집]

베트남은 리 왕조(이가) 시대에 이르러 다이비엣(대월)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4.1. 리 왕조(이가)[편집]

리꽁우언(이공운)이 전 레 왕조(전여가)를 멸망시키고 세운 왕조.

내부적으로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송나라의 침공을 저지하는 업적을 세웠는데, 수십년짜리 단기 왕조에 그친 이전 왕조들과 달리 200여년을 존속한 장기 왕조였다.

2.4.2. 쩐 왕조(진가)[편집]

리 왕조(이가) 말기의 외척 쩐투도(진수도)가 자신의 조카 쩐까인(진경)을 황제로 옹립하면서 성립된 왕조.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베트남 침공을 저지했고, 14세기에는 참파의 명군 포 비나수오르의 침공을 막아냈다.

2.4.3. 다이응우(호 왕조)[편집]

호꾸이리(호계리)가 쩐 왕조를 멸하고 세운 호 왕조는 대월 대신 다이응우(대우)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했다.

호꾸이리는 초대 황제로서 통치하다가 아들 호한트엉(호한창)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는데, 호한트엉이 재위기에 쩐 왕조의 황족과 유신들을 앞세운 명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여 호씨 부자는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2.4.4. 후 쩐 왕조(후진가)와 명나라의 지배[편집]

명나라는 초기에는 쩐 왕조(진가) 황족을 으로 책봉하는 듯 했으나, 곧 쩐씨 황족들을 제거하고 교지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도했다.

그러자 레러이(여리)라는 인물이 쩐씨 황족이라 주장하는 쩐까오(진고)를 황제로 옹립하며 람썬 기의를 일으켰고, 람썬 기의군이 명나라 군대를 축출함으로써 대월은 다시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레레이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쩐까오를 제거한 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후 레 왕조(후여가)를 세웠다.

2.4.5. 후 레 왕조(후여가)[편집]

후 레 왕조(후여가) 시대에 이르러 과거제가 정기화되었고, 오랫동안 대월의 숙적이었던 참파 역시 굴복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2.4.6. 남북조시대[편집]

막당중(막등용)이 후 레 왕조(후여가)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막 왕조(막가)를 세우자, 이에 반대하는 레씨의 신하들이 봉기하여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2.4.6.1. 북조: 막 왕조(막가)[편집]
막당중(막등용)과 그 후손들의 막 왕조는 중앙정부 장악에는 성공했으나, 지방의 레씨 충성파들을 제압하는데는 실패했고, 결국 레씨 황제를 옹립한 찐씨 정권(정주)의 북벌에 의해 멸망했다.
2.4.6.2. 남조: 중흥 레 왕조(중흥여가)[편집]
찐씨(정씨)와 꽝남 응우옌씨(광남 완씨)가 연합하여 레씨 황제를 옹립함으로써 중흥 레 왕조(중흥여가)가 성립되었는데, 본래 중흥여가 조정은 응우옌씨가 주도했으나 찐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고, 찐씨 정권(정주)는 북벌을 단행하여 막 왕조(막가)를 타도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권력 뿐만 아니라 명분에 있어서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2.4.7. 남북국시대[편집]

막 왕조 멸망 이후 대월은 명목상 중흥 레 왕조(중흥여가)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중앙정부를 장악한 찐씨 정권(정주)와 남부에서 사실상의 독립정권을 수립한 응우옌씨 정권(완주)로 다시 분열되었다.
2.4.7.1. 북부[편집]
2.4.7.1.1. 중앙: 찐씨 정권(정주)[편집]
찐씨 정권은 명목상 레씨 황제를 옹립하고 을 칭하며 중앙정부를 장악했는데, 남쪽의 꽝남 응우옌씨(광남 완씨)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기에 제위를 찬탈하지는 않고 일본 막부 시대의 쇼군 같은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2.4.7.1.2. 막 왕조 잔당(까오방 정권)[편집]
찐씨 정권(정주) 초기까지는 까오방(고평) 일대에서 막 왕조 잔존 세력이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연명하고 있었으나, 결국 찐씨의 북벌에 무너졌다.
2.4.7.1.3. 부씨 정권(무주)[편집]
부씨(무씨) 가문은 남부에서 일어나 막씨를 타도한 찐씨와 달리 처음부터 북부에서 막 왕조에 맞서 항쟁을 벌이던 레씨 충성파 가문이었는데, 이들은 찐씨에 의해 옹립된 레씨 황제들에게 칭신했으나, 말기에는 찐씨 정권과 대립하다가 멸망했다.
2.4.7.2. 남부: 응우옌씨 정권(완주)[편집]
중흥 레 왕조(중흥여가) 조정의 권력투쟁에 밀려난 꽝남 응우옌씨(광남 완씨) 일가는 참파와 가까운 남부 지방을 근거지로 삼아 꽝남국(광남국)이라는 사실상의 독립정권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찐씨와 대립했지만 레씨 황제들에게는 계속 충성을 맹세했기에 황제가 아닌 을 칭했다.

응우옌씨는 자신들이 상대하기 버거운 찐씨와는 교착상태를 유지하면서, 강약약강만만한 참파를 두들겨패며(...)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하여 베트남의 현재 영토를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2.4.8. 떠이선 왕조(서산가)[편집]

응우옌씨가 지배하던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인 떠이선당(서산당)은 응우옌씨 정권은 물론이고 북부의 중흥 레 왕조와 찐씨 정권마저 갈아버리며 대월을 재통일하고 떠이선 왕조(서산가)를 개창했다.

떠이선 왕조는 마지막 레씨 황제였던 레 민제를 앞세우며 쳐들어온 청나라 군대까지 격파하는 위업을 세웠으나,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어 응우옌씨 왕족인 응우옌푹아인(완복영)의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3. 근대[편집]

3.1. 응우옌 왕조(완가)의 대남국[편집]

세조 자롱 황제(가륭제) 응우옌푹아인(완복영)은 전통적 국호인 대월 대신 비엣남(베트남)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채택했고, 수도 역시 북부에 위치한 대월의 수도 탕롱(지금의 하노이) 대신 중부의 응우옌씨 거점인 후에로 옮겼다.

그 뒤를 이은 민망 황제(명명제)는 국호를 대남국으로 개칭하고 참파를 완전히 병합했으며,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직접 지배를 시도하는 등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인 프랑스의 등장으로 인해 대남국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고, 남부 코친차이나 지방과 북부 통킹 지방을 차례로 내준 후, 1884년 청불전쟁을 겪고 나서 1885년 중부 안남 지방마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며 베트남 전체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3.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편집]

프랑스 치하에서도 대남국이라는 국호와 명목상의 응우옌씨 황제는 유지되었는데, 수도 후에가 있는 중부 안남과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 통킹은 보호령이었고, 남부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직할령이었다.

프랑스 치하에서의 독립운동은 초기에는 황실에 충성하는 유학자들이 주도하다가, 1920년대부터는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고, 1930년대부터는 호찌민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비시 프랑스에 충성했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방침에 따라 별다른 저항 없이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했다.

3.3. 베트남 제국[편집]

1944년 비시 프랑스가 연합국에 의해 멸망하자 일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연합국으로 돌아설 것을 우려하여, 1945년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인들을 감금하고 응우옌 왕조(완가)의 황제 바오다이를 국가원수로 하는 벧즈남 제국을 선포했다.

4. 현대[편집]

4.1. 베트남 8월 혁명[편집]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하자 공산당 계열 무장단체인 베트남 독립동맹회가 일제히 봉기하여 베트남 제국을 전복시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4.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소련을 제외한 연합국들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권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고, 중화민국 국민정부 군대(국민혁명군)과 영국군이 각각 베트남 북부와 남부에 주둔했다.

이들 가운데 국민혁명군은 자국에서 일어난 국공내전 때문에 철수하여 그들이 주둔하던 북부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접수했으나, 영국군은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 프랑스군에게 남부 주둔지를 넘겨줘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초기에는 베트남을 재식민화하려 했으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군대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자, 1949년에는 방침을 바꿔서 명목상의 독립국인 베트남국을 세웠다.

베트남국은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국가원수(국장)으로 추대했으나, 이는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계속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군(베트남 인민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종식되었다.

4.3. 남북분단 및 베트남 전쟁[편집]

1954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식되면서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남부의 베트남국에서는 공산정권(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 양측 모두를 비판하던 우익 성향 독립운동가 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장악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에게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제안했으나, 응오딘지엠은 이를 거절했고 1955년에 독자적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바오다이를 폐위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했고, 이로써 베트남의 남북 분단시대,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분단시대 초기에 북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은 주로 국지교전을 반복했으나,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고 대한민국, 태국, 호주 등 다른 친미 국가들까지 참전하면서 본격적인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전, 그리고 반전운동에 질린 미국이 1973년 파리 조약을 통해 휴전을 체결한 후 미국과 친미 국가들이 철수하면서 평화가 자리잡는 듯 했으나,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기습적으로 공세를 재개했고, 결국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당하며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베트남 남부는 명목상 베트콩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가 지배하다가, 1976년에 북베트남과 정식으로 통일하면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4.4.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편집]

1976년에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으나, 수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이 공산화를 피해 해상으로 탈출하여 보트피플이 되었다.

1979년에는 캄보디아의 공산정권인 크메르 루주 정권(민주 캄푸치아)가 베트남을 상대로 도발하여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주 군대를 밀어붙이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여 중일전쟁을 벌였다가 철수하기도 했다.

베트남 인민군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으며, 크메르 루주를 섬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캄보디아 동부 국경을 넘어 태국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1986년에 이르러 베트남 공산당은 기존 공산주의 경제 정책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본주의를 수용하른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추진했고, 1989년에는 캄보디아에서도 철군하면서 10년에 걸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시진핑 정권과 같은 일인독재로는 흐르지 않는 집단지도체제가 지속되었고, 경제적으로느 지속적인 고도 성장을 보이면서 신흥공업국으로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1] 참파라는 국가는 이미 멸망했지만, 참족은 지금도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서 명맥을 잇고 있다.[2] 지금의 쓰촨성(사천성) 및 윈난성(운남성).[3] 현대 대한민국의 별명인 남한(南韓)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