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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기 운영진 선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분류
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주석
시진핑
/ (습근평)[1]/Xi Jinping
파일:시진핑.png
출생
재임 기간
제8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서명
링크
[ 펼치기 · 접기 ]
본관
샹양 시씨 ()[3][4]
원적
조부모
증조부 시융성()
조부 시쭝더()
조모 차이차이화()
부모
부친 시중쉰()
모친 치신()[5]
형제자매
이복형 시정닝(),
이복누나 시허핑()[6], 시첸핑()
누나 치차오차오(), 치안안()
남동생 시위안핑()
배우자
전처 커링링() (이혼)[7]
배우자 펑리위안()[8]
자녀
학력
베이징베이하이유치원 (수료)
베이징81학교 초등부 (졸업)
베이징101중등학교 (졸업)
칭화대학 (화학공학 / 학사)[10]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법학 / 박사)[11]
종교
신체
180cm[12] | 65kg 이상[13] | B형
소속 정당

1. 개요

1. 개요[편집]

중국 인민은 또한 어떤 외세도 우리를 괴롭히고, 억압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것들을 망상한다면, 14억 중국 인민이 피와 살로 쌓은 강철같은 장성에 반드시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2021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 연설 中[14] #

중국의 제7대 주석이자 독재자.
[1] 연변,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습근평이라고 표기한다. 시진핑이 저술한 서적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출판된 저서가 '시진핑 국정 운영을 말하다'인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습근평 국정 운영을 론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도 한국 한자음으로 뉴스에서 습근평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2010년대 초반 한때 중국 인·지명을 중국식 발음으로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정착에 실패한 적이 있다.)[2] 진핑()이라는 이름도 베이핑(, 베이징의 중화민국 시절 이름) 가까이()에서 태어났다는 뜻. 베이핑에서 베이징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시진핑이 태어나기 전인 1949년이나, 1953년 당시에도 경로의존성 때문에 베이징을 여전히 베이핑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었다.[3] 덩저우파() 18세손 정○(○)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형 시정닝()은 항렬자를 썼다.[4] 습정습착치로 알려진 성씨이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인들은 전통적 항렬을 쓰지 않고 훙치(), 거밍(), 젠궈() 등 사상과 이념을 중심으로 이름을 짓는 편이다.[5] 1926년 11월 3일생으로, 2025년 현재도 생존 중이다.[6]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한 후 자살하였다.[7] 1979년 - 1982년[8] 1987년 - [9] 1992년 6월 27일 출생. 후처 펑리위안 소생.[10] 문화대혁명의 열기가 잦아들던 1975년 '공농병(工农兵) 추천 청강생' 전형으로 22세에 무시험 입학해 1979년 초 졸업하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중학교 시절 학업을 소홀히 해 중졸 시점에도 초등학생 학력 수준에 머물렀고, 문화대혁명 시기엔 농촌으로 하방돼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과정을 아예 건너뛰어 대학 과정을 소화할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시진핑은 이과보단 문과에 가까운 성향인지라 간단한 화학반응식조차 알지 못해, 대학 입학 초기에 중학교 단계의 수학·물리·화학 기초 지식을 공부했다고 한다.# 시진핑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전공 수업 중 15%를 마오쩌둥 사상 교육에, 5%를 농촌활동에 할애해야 했다. 이 당시 칭화대학에는 시진핑처럼 문혁 기간 중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당 간부 자제들이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칭화대학 당 책임자가 덩샤오핑에게 "신입생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보고하자 덩이 "칭화대는 무슨 칭화대냐. 그냥 칭화중학, 칭화초등학교라고 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시진핑의 태자당 내 라이벌이었던 보시라이, 시진핑 휘하에서 10년간 근무한 前 국무원 총리 리커창은 문혁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1977학년도 입시를 뚫어내 베이징대학에 입학했고, 시진핑의 전임 주석들인 장쩌민후진타오 또한 높은 경쟁률을 뚫고 각각 상하이교통대학칭화대학에 입학한 것과는 대조되는 점이다.[11] 푸젠성에서 간부로 근무하던 1998년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이후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해 4년만인 2002년 마르크스주의 이론 및 사상·정치교육 전공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중국농촌시장화연구)》. 다만, 칭화대학의 규정에 따르면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선 석사 학위가 요구됨에도 시진핑은 학사 학위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 논문 주제가 전공인 법학과 관련성이 낮다는 점, 시진핑이 근무하던 푸젠성은 칭화대학이 위치한 베이징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학업 병행이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일각에선 이 학위가 정당하게 수여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12] 젊은 시절에는 180cm였지만 175cm인 아베 신조보다 약간 크고 178cm인 윤석열과 거의 비슷한 것을 보면 현재는 177 ~ 178cm 정도다. 파일:시진핑-아베.jpg[13] 첨부 기사[14] 이 연설에서 시진핑은 “중화민족당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서방에선 시진핑이 패권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신냉전의 시작을 알린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두파혈류'( :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림)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도 큰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