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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 ||
일시 | ||
지역 | ||
원인 | ||
목적 | ||
참여 인원 | 약 300만 명 (주최 측 추산 누적 인원) 약 40만 명 (경찰 추산 순간 최대 집결 인원) | |
참가 세력 | ||
1. 개요2. 규모3. 배경4. 집회 중계
4.1. 주요 시위 장소
5. 참가 인원6. 전개6.1. 2024년
7. 지역 시위6.1.1. 12월 7일6.1.2. 12월 8일6.1.3. 12월 9일6.1.4. 12월 13일6.1.5. 12월 14일6.1.6. 12월 21일6.1.7. 12월 22일
6.2. 2025년6.1.7.1. 남태령 집회
6.1.8. 12월 28일7.1. 부산광역시7.2. 인천광역시7.3. 대구광역시7.4. 광주광역시7.5. 대전광역시7.6. 세종특별자치시7.7. 충청북도7.8. 충청남도
8. 시위 문화7.8.1. 천안시
7.9. 경상북도7.9.1. 포항시
7.10. 경상남도7.10.1. 창원시
7.11. 강원특별자치도7.12. 전북특별자치도7.13. 제주특별자치도8.1. 과거 시위들과 비교되는 이번 시위의 차별점
9. 사건 사고10. 기타1. 개요[편집]
내란 수괴 윤석열을 체포/탄핵하라!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종료된 직후인 2024년 12월 4일부터 전국에서 시작된 윤석열 퇴진 범국민운동.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한다.
2. 규모[편집]
3. 배경[편집]
2024년 12월 3일 오후 11시경 대통령 윤석열이 전국 단위의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그에 따른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계엄군을 동원했다. 아울러 계엄사 포고령 제1호를 통해 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등 전 국민의 정치적·사회적 기본권의 핵심 영역을 전격 박탈하는 통제 조치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항의성 시위가 다발적으로 촉발되었고, 탄핵 표결을 앞두고 군중들이 대규모 운집하며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항의성 시위가 다발적으로 촉발되었고, 탄핵 표결을 앞두고 군중들이 대규모 운집하며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4. 집회 중계[편집]
4.1. 주요 시위 장소[편집]
5. 참가 인원[편집]
6. 전개[편집]
6.1. 2024년[편집]
6.1.1. 12월 7일[편집]
- 2024년 12월 7일 오후 3시경부터 국회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시작되는 15시 주최 측 추산 30만여 명에서 시작해 국민의힘이 본격적으로 표결을 보이콧하기 시작하자 20시 즈음에는 주최 측 추산 약 100만 명, 경찰 추산 16만 명 규모의 시위대가 운집하였다.[4]
- 광화문, 여의도 일대에서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다. #
- 광화문 일대에서는 "탄핵에 반대한다"며 보수단체가 윤석열 탄핵 반대 맞불시위를 벌였다.
- 17시부터 9호선 국회의사당역 전 출구가 폐쇄될 예정이라는 속보가 보도되었다. #
- 17시부터 5호선 여의도역을 무정차했으나, 17분부터 정차가 재개되었다.
- 21시 20분경에 탄핵 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폐기되자, 시민 대표들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집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월요일부터 매일 밤 촛불집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다.
- 여의도 탄핵 집회에서는 20대 여성이 참가 인원의 18.9%를 차지해 모든 성별/연령대별 집단 중 가장 많았다. #
6.1.2. 12월 8일[편집]
- 촛불행동은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매일 저녁 7시에 촛불 집회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6.1.3. 12월 9일[편집]
- 주최 측 추산 3만 명, 경찰 비공식 추산 5,500명이 집회에 참여하였다.
- 저녁 6시, 국회의사당역 5번 출구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탄핵 촛불집회가 있었다.
6.1.4. 12월 13일[편집]
- 탄핵 시위에 동참하는 의미로 약 45분간 무료 공연의 의미를 담아 여의도 현장에서 PR과 몇 곡의 히트곡을 개사해서 콘서트를 진행 했다. 그리고 시위주최 측에 천만원을 쾌척했다. 그 날이 이승환 자신의 생일인데, 윤석열이 자신보다 5살 밖에 안 많다고 존대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한데서 압권. 시민들은 그것을 듣고 폭소했다.
6.1.5. 12월 14일[편집]
- 1차 탄핵소추 표결 당시와 마찬가지로 2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정됨에 따라 국회의사당 근처 여의도와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탄핵소추 통과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 이날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오후 4시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오후 3시에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촛불대행진"과 오후 6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 두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
- 집회에 대비하여 여의도행 5호선 지하철, 9호선 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증차되었다. #
- 이날 대규모 집회가 예정됨에 따라 여의도 근방 카페와 식당에 선결제가 계속되고 있다. 12월 12일 자녀 입시비리와 관련된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12월 16일 법정 구속될 예정인 조국 전 대표는 "작은 이별 선물"이라며 음료 333잔을 선결제하였다고 밝혔다. #
- 14시 55분 경, 지하철 9호선이 여의도역과 국회의사당역을 무정차통과하기 시작했다. #
- 15시 3분 경, 지하철 5호선도 여의도역을 무정차통과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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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12월 21일[편집]
6.1.7. 12월 22일[편집]
6.1.7.1. 남태령 집회[편집]
6.1.8. 12월 28일[편집]
6.2. 2025년[편집]
6.2.1. 1월 4일[편집]
6.2.1.1. 한남동 집회[편집]
체포영장 1차 집행이 실패하면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에서 큰 집회를 열었다. 1월 3일부터 집회 참가자들이 도로 한쪽을 점거하면서 남산으로 향하는 상행선이 막히며 교통 혼잡이 일어났다. 이날 집회는 1박 2일로 철야 집회를 치른 뒤 다음날 1월 4일에는 더 많은 집회참가자들이 모이면서 본격적으로 집회에 들어섰고, 오후 4시경부터 도로 양방향이 모두 막히며 양방향 통제가 되었다. 저녁부터는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등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하던 집회 참석자들이 한남동 일대에 합류하였다. 이 날도 역시 철야 집회로 진행되었으며 다음날 1월 5일도 계속 집회를 이어가면서 철야 집회로 이어졌다. 1월 3일부터 1월 6일까지 3박 4일간 집회가 진행중이다.
집회 당시 눈이 내리고 있어서 참석자들은 눈과 추위를 막기 위해 '은박 담요'로 알려진 스페이스 블랭킷을 덮어 몸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이 모습이 마치 허쉬 키세스 초콜릿과 닮았다고 해서 이른바 '키세스 시위'로 불리기도 했다.#
집회 당시 눈이 내리고 있어서 참석자들은 눈과 추위를 막기 위해 '은박 담요'로 알려진 스페이스 블랭킷을 덮어 몸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이 모습이 마치 허쉬 키세스 초콜릿과 닮았다고 해서 이른바 '키세스 시위'로 불리기도 했다.#
7. 지역 시위[편집]
7.1. 부산광역시[편집]
12월 7일 17시 서면 쥬디스 옆 대로에서 부산촛불행동의 주최로 집회를 열기로 했다. 뉴스1
12월 7일 기준으로 주최 측은 3천여명의 인파를 예상해서 진행하려 했지만, 주최 측 추산 약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모였기 때문에 시가 행진은 않고 비교적 일찍 (19시) 해산하였다.[8] 하지만 시민들이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계속 "윤석열을 체포하라" 구호를 외치자 약 1시간 가량의 뒤풀이 자유발언을 추가로 진행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8일은 증가한 인파를 감안해 시가 행진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하였으며, 동천로에서 양쪽이 만나 집회를 마무리했다.
12월 9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 일자 대로에서 20시 기준으로 인파가 약 420m 길이로 모여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같은 시간에 옆 쥬디스 태화 정면에 경찰 기동대가 약 50명 가량 대기 중이었다.
12월 14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에서 17시 시작하기로 기존에 공지가 올라왔었지만, 시작 전에 부산촛불행동은 전포대로에서 15시부터 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집회를 열였다. 연합뉴스 35m 폭의 전포대로 약 400m 길이의 대열로 꽉 찬 인원이 모여서 집회 측 집계 기준 7만 명의 시민이 모여[9] 퇴진 및 탄핵 촉구 시위를 진행했다.[10] 집회는 17시 경 윤석열 탄핵 가결로 절정에 이르고, 이후 약 1시간 동안 집회를 한 후 18시를 기준으로 해산했다. SBS 윤석열 탄핵 국면 이후로 부산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시위였다.
부산촛불행동은 추후 매일 평일에는 19시, 주말에는 17시에 집회를 열기로 했다. 오마이뉴스 국회 탄핵이 가결된 이후로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판결을 내리는 날 까지 집회를 계속 열기로 했고, 이 날 참가한 시민들에게 주말에는 가급적이면 참가해 줄 것을 호소했다.
12월 28일 부산 남구 국회의원인 박수영 의원실에서 지역구 주민 상담에 찾아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입장을 요구한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장시간 이어졌으며, 집회와 행진 등을 마친 시민들이 박수영 의원실 앞에 집결하여 항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2월 7일 기준으로 주최 측은 3천여명의 인파를 예상해서 진행하려 했지만, 주최 측 추산 약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모였기 때문에 시가 행진은 않고 비교적 일찍 (19시) 해산하였다.[8] 하지만 시민들이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계속 "윤석열을 체포하라" 구호를 외치자 약 1시간 가량의 뒤풀이 자유발언을 추가로 진행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8일은 증가한 인파를 감안해 시가 행진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하였으며, 동천로에서 양쪽이 만나 집회를 마무리했다.
12월 9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 일자 대로에서 20시 기준으로 인파가 약 420m 길이로 모여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같은 시간에 옆 쥬디스 태화 정면에 경찰 기동대가 약 50명 가량 대기 중이었다.
12월 14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에서 17시 시작하기로 기존에 공지가 올라왔었지만, 시작 전에 부산촛불행동은 전포대로에서 15시부터 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집회를 열였다. 연합뉴스 35m 폭의 전포대로 약 400m 길이의 대열로 꽉 찬 인원이 모여서 집회 측 집계 기준 7만 명의 시민이 모여[9] 퇴진 및 탄핵 촉구 시위를 진행했다.[10] 집회는 17시 경 윤석열 탄핵 가결로 절정에 이르고, 이후 약 1시간 동안 집회를 한 후 18시를 기준으로 해산했다. SBS 윤석열 탄핵 국면 이후로 부산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시위였다.
부산촛불행동은 추후 매일 평일에는 19시, 주말에는 17시에 집회를 열기로 했다. 오마이뉴스 국회 탄핵이 가결된 이후로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판결을 내리는 날 까지 집회를 계속 열기로 했고, 이 날 참가한 시민들에게 주말에는 가급적이면 참가해 줄 것을 호소했다.
12월 28일 부산 남구 국회의원인 박수영 의원실에서 지역구 주민 상담에 찾아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입장을 요구한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장시간 이어졌으며, 집회와 행진 등을 마친 시민들이 박수영 의원실 앞에 집결하여 항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7.2. 인천광역시[편집]
7.2.1. 남동구[편집]
7.2.2. 부평구[편집]
7.2.3. 중구[편집]
7.3. 대구광역시[편집]
7.4. 광주광역시[편집]
12월 4일 오후 7시부터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99개 단체로 구성된 '윤석열 정권 퇴진 광주비상행동' 주관으로 13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후 5.18 민주광장에서 매일 집회가 열리고 있다.
7.5. 대전광역시[편집]
12월 4일 오후 8시부터 서구 둔산동 은하수 네거리 일대에서 윤석열정권퇴진대전운동본부를 중심으로 31개 지역 시민단체, 70여 명이 운집했다. 이날부터 19시마다 이들 주도로 퇴진 시위가 열렸다. 12월 4일 기준, 경찰 측에 둔산동 은하수 네거리에 1500여 명이 집결할 것으로 신고된 가운데, 안전 관리를 위해 경력 150명이 동원됐다. 중도일보
7.6. 세종특별자치시[편집]
7.7. 충청북도[편집]
7.8. 충청남도[편집]
7.8.1. 천안시[편집]
7.9. 경상북도[편집]
7.9.1. 포항시[편집]
7.10. 경상남도[편집]
7.10.1. 창원시[편집]
7.11. 강원특별자치도[편집]
7.11.1. 춘천시[편집]
12월 4일부터 거의 매일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 거두사거리 일대에서 정례집회가 열렸다.
또한 한기호 국회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 을)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또한 한기호 국회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 을)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7.11.2. 강릉시[편집]
12월 4일부터 월화거리에서 정례집회가 열렸다.
7.12. 전북특별자치도[편집]
7.12.1. 전주시[편집]
12월 6일부터 전주 객사길에서 윤석열퇴진전북운동본부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이후 평일 오후 6시, 토요일 오후 4시마다 집회가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 이후에는 평일 집회를 그만두고 토요일마다 집회를 연다.
7.12.2. 익산시[편집]
12월 11일과 13일 윤석열퇴진 익산운동본부는 영등2동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윤석열 퇴진,구속 익산시민 촛불문화재가 진행 됐다.
7.13. 제주특별자치도[편집]
7.13.1. 제주시[편집]
7.13.2. 서귀포시[편집]
서귀포시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으로 구성된 ‘서귀포 시민행동’은 12월 11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옛 초원다방 사거리에서 윤석열 탄핵, 국민의힘 해체를 촉구하는 촛불 집회를 개최했다. #
8. 시위 문화[편집]
-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 때부터 등장한 장수풍뎅이 연구회, 전국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연합, 민주묘총 같은 이색 깃발이 이번 시위에서도 과체중 고양이 연합회,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우리나라 정상영업합니다 등 새로운 깃발들과 함께 대거 등장하였다. 이외에도 걸을 때 휴대폰 안 보기 운동본부 등 공익 운동을 하는 시위 깃발도 나왔다. (YTN, 뉴스1)
- 촛불, LED 촛불봉이[19] 많았던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과 비교했을 때 인기 K-POP 아이돌 응원봉이 시위현장에 등장한 점을 주목하고 시위 문화의 변화라고 해석하는 언론 기사가 다수 작성되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한국경제)
- 여러 아이돌 그룹의 응원봉이 등장했으며 god, 소녀시대, BIGBANG, SHINee, 방탄소년단, BLACKPINK, EXO, 아이유, TWICE, NCT, NewJeans, IVE, NMIXX, tripleS, aespa 등 1세대 아이돌부터 4세대 아이돌의 팬덤이 모두 모여 각 팀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와 주목을 받았다.[20] (스포츠경향/한국일보) 이는 아이돌 팬덤 문화를 향유하는 10~30대가 시위에 참여하는 비중이 상당했다는 걸 보여주었다.[21][22] 특히 여성 외에도 남성 아이돌 팬들도 응원봉을 들고 참석하거나[23] 자녀의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부모도 있었던 데다,[24] 반대로 젊은 세대가 기존의 민중가요를 배우는 모습도 보여주며 세대의 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가 많다.[25] 광범위한 세대가 참석한 만큼 시위 초반에는 젊은 층이 민중가요를, 중장년층이 아이돌 음악을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주최 측에서 이를 수용하고 시위 전에 플레이리스트를 미리 공유하는 문화도 생겼다. 덧붙여서 애니메이션 오타쿠가 애니메이션 응원봉을 가지고 오타게를 추며 윤석열 퇴진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도 종종 연출되었다. 참고 자료
- 그 와중에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어떤 사람이 집회에 쓸 응원봉을 사려고 글을 올렸는데 디자인이 예쁜 응원봉을 단돈 3,000원에 판다는 글에 솔깃해 샀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김호중의 응원봉이어서 씁쓸해 했다는 후문이 있다. 판매자는 마침 김호중의 음주 뺑소니 사건 이후 응원봉이 처치곤란이던 차에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하고 팔아넘긴 것으로 보인다. #
- 시위 장소에서 민중가요 외에도 다시 만난 세계, 삐딱하게, 내가 제일 잘 나가, 파이팅 해야지, Next Level, Candy,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를 포함한 여러 K-POP 음악이 불려졌으며,[26]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APT.[27], 심지어 우리의 꿈이나 Butter-Fly, 질풍가도 등의 애니메이션 주제가도 나오며 한국의 이색 시위 문화에 대한 해외의 주목도 많았다.(서울경제, 연합뉴스, 국민일보, YTN KBS)
- 2024년에 관객수 1,000만명을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KBO 리그의 응원도구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 등 공식 응원봉이 존재하는 구단은 응원봉을 가져왔으며, 응원봉이 없는 구단들은 응원 배트 등의 도구 안에 LED 조명을 넣거나 감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집회 음악으로 서울에는 두산 베어스의 공통 안타송과 키움 히어로즈의 견제송이 나왔으며, 광주에서는 KIA 타이거즈 응원가(소크라테스 응원가, 광주의 함성), 부산에서는 롯데 자이언츠 응원가(영광의 순간, 승전가)[28], 대구에서는 삼성 라이온즈 응원가(엘도라도) 등 지역 연고에 맞게 스포츠 응원 문화와 아이돌 응원 문화가 융합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
8.1. 과거 시위들과 비교되는 이번 시위의 차별점[편집]
이번 시위는 과거의 시위들과 비교하여 여러 차별점이 있다. 이번과 비교 대상이 되는 대중 확장성이 큰 시위는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 때와 비교하면 그 당시보다 SNS와 유튜브 등이 훨씬 활성화된 사회로 바뀌었고, 그 사이 젋은 여성들의 정치적 진보 성향 비율 약진[29]이라는 현상이 추가되었다. 또한 시민들의 시위 자발성[30] 증명을 위해 다양한 취미와 공유 성격들을 마치 해시태그처럼 깃발을 내걸고 참여하는 일이 더 광범위하게 활성화되었다는 특징이 읽히고 있다.
- X(구 트위터)나 인스타를 위시한 SNS와 유튜브가 메인 정보 공유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 사실 2008년 촛불 집회나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도 20대[31] 한정으론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1.5배 정도 높아서[32], 다른 세대에선 엇비슷하더라도[33] 전체적으론 여성이 남성보다 근소하게 앞섰는데, 이번엔 20대에선 무려 5배 정도[34], 30대에서도 2배 정도로[35] 여성이 많이 나와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10%p 이상 앞섰다, 특히 20대 여성인 경우는 17.8%가 참여하며, 50대 이상 남성(23.3%)에 이어서 2번째로, 실질적으론 가장 많이 나온 세대/성별이 되었다. #
- 한편 2030대 남성의 참여율이 저조한 이유로 전문가들마다 분석이 다르다.
- 신진욱 교수는 "2008년부터 20대 내에서 일관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런 경향이 "성별로 다른 세대 문화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야광봉이나 방석 패딩 등으로 대변되는 콘서트 문화가 야간 옥외 집회의 문화적인 성격들과 굉장히 싱크로율이 높다"고 지적했다.
- 연령, 성, 지역 등 다양한 변수에 따른 국내 유권자들의 정치성향을 연구해온 정치학자 서복경 더 가능연구소 대표도 '온라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군대'라는 변수에 주목했다. 서 대표는 그런데 "여성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여러 커뮤니티 생활을 이어가며 23~24세 정도 되면 관계맺고 있는 커뮤니티의 수가 늘어나"는 반면 "20대 초반에 군대에 가는 남성들은 이런 점에서 2년여의 공백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 과거 시위들에서는 소개와 간단한 전달사항을 말하고 -> 구호 외침 선창 -> 연설 인원들의 연설, 초청 가수나 사물놀이 패 무대 -> 구호 외침 선창 -> 자리에서 일어나 시가 행진의 과정을 대동소이 하게 거쳤다. 거기에 비해 이번에는 구호 외침 선창 사이 사이에 가요나 운동권 노래나 K 팝을 틀고 시민들은 춤이나 아이돌 무대 응원 단체 액션과 같은 단체 움직임을 하고, 마지막 마무리도 시가 행진 대신에 앞서 말한 단체 움직임을 반복하다가 주변 장소에 각기 중소 집단으로 군데군데 모여 자발적 시위의 시간을 가지는 식으로 양상이 약간 바뀌었다.
- 선결제 문화가 있다. 물리적인 이유로 시위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비해 훨씬 발달한 IT 기술, 그 중에서 온라인 결제, 기프티콘, SNS 공유 기능들을 활용해서 지원해주는 문화는 이번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추후 시위가 발전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공유하고 묶는 IT 기기들을 활용한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몇몇에선 이런 현상을 과거 80년대에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던 문화가 현대화하여 다시 나타난 거라 보고 있다.
- 상술했듯이 시위에 사용한 도구가 이전에는 실제 촛불과 촛불 형태의 LED등이었는데, 이번에는 응원봉이 사용되고 있다. K팝 팬들의 응원봉은 물론, '윤석열 탄핵'이란 문구를 새겨넣은 응원봉도 시위 현장에서 판매가 되면서, 사실상 촛불을 대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응원봉 문서 사회운동으로의 변용 문단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
9. 사건 사고[편집]
- 12월 7일, 한 호텔 인근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이 무단으로 계속 호텔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호텔 측에서 외부인 화장실 이용을 막자, 시위대들에 의해 그 호텔에 별점 테러가 쏟아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추후 보도에 대한 입장문을 냈는데 원래 개방의무가 없었지만 이용하게 했는데 시위로 인해 인파가 몰렸고 이에 그날 결혼식이었던 하객과 신랑 신부가 고립된데다가 시위대끼리 난투극을 벌여서 숙박객을 보호 하려고 이용을 막았다고 한다.
- 2024년 12월 9일, 울산 시위에서 10대 남성이 집회 참가한 여성 2명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인물을 배부하는 조합원들을 향해 "시끄럽다"며 소리치며, 집회 참가자인 20대 여성과 40대 여성을 폭행한 혐의로 체포해 조사중이다. 뉴스1 비슷한 건으로 촛불행동 12월 14일 유튜브 커뮤니티 공지를 올리는데,# "탄핵반대' 구호를 걸고 지하철에서부터 사람들을 함부로 밀치며 다니는 수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도가 오늘 기어코 사고를 치겠다는 태도입니다. 모두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드립니다. 과한 행동을 보이면 주변의 경찰에게 신고 부탁합니다." 라고 전철 문에 매달린 남자 사진을 공유했다. 실제로 8년 전 박근혜 퇴진 운동 때도 시위의 과격화를 유도하는 몇몇이 주위 시민들의 제지를 받은 사례 영상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9.1. 대한민국 연예계 입국금지 요구 CIA 집단민원 사태[편집]
10. 기타[편집]
- 반대파 및 친윤계 지지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 국민대회를 열어 계엄과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고 있다.
[1] 여의도에서만 14.9만 명[2] 여의도에서만 20.8만 명[3] 첫 번째는 2016년 12월 3일 진행한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집회이다. 집회 추산 232만 명이 모였다.[4] 여의도 기준 14.9만 명[5]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탄핵 전문 가수'라고 소개해서 시민들에게 웃음을 줬다.[6] 여의도 기준 순간최대인원은 20.8만 명[7] 공교롭게도 이들이 국회에서 시국선언을 한 당일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는데, 분노한 이들은 계엄해제 이후 동이 트자마자 대통령실 앞에 몰려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8] 서면 쥬디스 옆 대로는 만 단위의 인파를 수용할 만한 공간은 아니며, 주최 측이 앰프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바람에 골목 뒤쪽 인원에게 주최 측의 공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했다.[9] 5만명으로 추산한 보도도 있다 오마이뉴스 오후 4시 기준으로 5만으로 추산했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7만 추산 기사는 6시 해산까지 기준을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10] 페르미 기법으로 군중 수를 추산하면 약 4만 2천 이상의 인파였다. 물론 중간에 돌아가거나, 혹은 시간 공지를 못 보고 늦게 유입된 인원들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늘어난다[11] 포드코리아 인천전시장이 있는 곳 6층에 위치해 있다.[12] 해당 건물 1층 유리문 및 주변 벽에는 국민의 짐/내란 동조당 해체, 인천 지역 국회의원인 윤상현, 배준영에 대한 심판이 적인 종이가 붙었고 당사 옆 벽에는 '국민의짐 인천시당 (내란공범)'이 붙게 되었다.[13] 여담으로, 시민들이 유영빌딩에 도착한 시간대에 포드코리아 전시장의 불이 바로 꺼졌다. 도착 시간이 아마도 오후 8시 정도였을 듯.[14]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첫 주인 12월 4~6일은 평일에도 오후 5시부터 시작했었다.[15] 올리브영 세종도담점을 검색하면 나오는 앞에 있는 공터[16] 18시 30분에는 거리공연 및 발언을, 19시에는 도담동 광장에서 국민의힘 세종시당까지 거리 행진을 진행한다.[17] X(트위터) 사례 (#1 #2 #3 #4 #5 #6)[18] 정확히는 5.18 당시에는 경제 사정이 열악해서 그 정도였지만 선진국 반열에 오르고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만큼 스케일이 커졌다는 것, 그리고 많은 우리 국민들의 해외 진출로 인하여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를 메우고자 재외 동포들의 선결제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19] 김진태가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망언을 내뱉은 게 계기였다.[20] X에서는 연말 가요 시상식을 방불케 한다는 의미를 담아 국회 앞에서 MAMA가 개최되었다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21] 참고로 아이돌판의 경우는 타돌 사이에 연합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몇몇 그룹 팬덤끼리는 사이가 매우 안 좋기도 한데, 윤석열이 말 그대로 팬덤 대통합을 이뤄낸 것이다.[22] 12.7 여의도 탄핵집회 참석자 최소 28만명, 20대 여성이 가장 많았다[23] 주로 IZ*ONE, LE SSERAFIM, 프로미스나인 등의 남초 팬덤[24] 주로 IVE, NMIXX 등 청소년층이 다수인 팬덤과 여자친구처럼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팬덤[25] 실제로 한 중장년층이 KPOP 공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댓글을 달자 그 아래에 청년층이 본인들은 민중가요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밝히면서 함께 시위에서 즐겁게 노래를 불러보자고 하는 답글이 달려 훈훈함을 자아냈다.[26] 주최 측에서 응원봉을 들고 나온 청년들을 보고 과감하게 기존의 민중가요 뿐만 아니라 아이돌 히트곡까지 선곡해서 재생했다. #[27] 항목에도 나오듯이 윤수일의 아파트와 매시업을 해서 재생하기도 했다. #[28] 12월 8일 집회 발언 도중 롯데 우승보다 계엄령을 먼저 봤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29] 물론 그 당시에도 20대 여성은 민주진보 성향 압도우위이다. 일례로 18대 대선에서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20대 여성에서 69% 정도 득표하였다.[30] 근래 많은 시위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비교적 대중 확장성이 작은 시위들에서는 아무래도 시위의 주제와 연관된 사회단체, 또는 정치와 한 다리 걸쳐 있는 주최 측의 의향이 크게 작용한 시위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시위를 주최하는 단체의 조직에 의존하기보다는 성별, 연령, 정치성향 가리지 않고 범국민적인 사유로 모였다는 자기 증명을 말한다.[31] 2008년 기준 1979~1988년생, 2016년 기준 1987~1996년생[32] 2008년 23.8 vs 13.7, 2016년 19.3 vs 12.3[33] 특히 40대는 2008년부터 2024년까지 엇비슷했다.[34] 17.8 vs 3.3[35] 9.8 vs 5.3[36]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까지 감안해도 대규모 인파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37] 물론 주최 측에서도 이를 고려해서 거점마다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는 등 여러 준비를 했지만, 100만이 넘는 인파 모두에게 화면을 송출하는 건 무리였고, 대신 참여자들이 현장에서 주최 측 유튜브 생중계를 시청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38] 반대로 광화문광장은 탄핵 반대 집회 쪽에 차지하게 된다. 박근혜 퇴진 시위 때는 국회 탄핵 가결 후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탄핵 반대 시위대들이 모였다. 탄핵 가결 전에는 230만명까지 모였기 때문에 광화문광장뿐만이 아닌 주변 안국, 종로, 을지로, 서울광장, 서대문 방면 광화문 도로 등등 시위대 인파가 그 일대를 장악했는데, 국회 탄핵 가결 후에는 광화문광장을 거점으로 한 박근혜 퇴진 시위의 규모가 상당히 줄어서 인접한 두 시위 장소 간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39] 그러나 탄핵 가결 이후 집회부터는 헌법재판소가 핵심이므로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헌법재판소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40] 중국 대륙의 간체자가 아닌 대만과 홍콩 등에서 쓰이는 번체자로 쓰여 있다. 대만은 엄연히 중국과 대립하는 민주주의 친서방 진영이다. 그런데도 중국어=중국 대륙으로 일체화하는 것.[41] https://archive.vn/z1B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