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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영국에서 벌어진 내전
1.1. 개요1.2. 이름의 유래1.3. 배경1.4. 결과와 후일담(꼽추 리처드 3세), 그리고 튜더 왕조
2.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의 배경이 되는 전쟁3.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4. 더비 매치의 하나5. 학교대사전의 용어6.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유통한 TPS 게임7. 장미칼 업계(?)의 용어(?)8. 장미전쟁(보드게임)

1. 중세 영국에서 벌어진 내전[편집]

1.1. 개요[편집]

장미전쟁
날짜
1455년 ~ 1485년
장소
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전지역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지휘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
잉글랜드의 헨리 6세
웨일스 대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앙주의 마거릿[1]
병력
불명
불명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랭커스터 왕가의 승리
기타

Wars of the Roses
1455년 ~ 1485년.

중세 영국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벌어진, 왕위계승권 획득을 위한 내전. 30년짜리지만 사실상 본격 내전은 1461년, 혹은 1471년까지로 10여년 내외이며 단지 1483년~1485년 간의 왕위쟁탈전이 포함될 뿐이다.

1.2. 이름의 유래[편집]

이 내전이 장미전쟁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가문 모두 상징이 장미, 즉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백장미이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용어가 아니라 아이반호의 저자인 19세기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만들어낸 것으로 1829년에 그가 집필한 글에 처음 나온다. 스콧이 이런 용어를 쓴 모티브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서 나온다고 한다.[2]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1/War_of_Roses_White.png
VS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d/War_of_Roses_Red.png

즉, 요크 가문의 문장은 백장미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색[3] 장미이긴 한데 둘 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것.[4] 흔히 생각하는 겹꽃 장미는 그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겹꽃 장미는 훗날 18세기중국에서 월계화 품종과 저 위의 분홍색 장미를 교배시키면서 나온 것이다.[5] 참고로 저 문장은 현재도 요크셔 주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히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는 영주들의 찬탈극 같지만 사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전대 영국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이다.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14세기 중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이 플랜태저넷 가문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개창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갈라져 나온지 100년도 안 되는 셈이니 왕위를 두고 다툰 사람들의 촌수는 대부분 8촌 이내였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왕가의 집안 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 그래서 튜더 왕가 이전엔 모두 한 왕조로 친다.

1.3. 배경[편집]

백년전쟁(1337~1453) 중 약 1370년 쯤에 잉글랜드를 잘 다스리던 군주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이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중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긴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는 따로 있었다. 후계자는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에드워드 왕세자(흑태자)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세자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차기 후력자는 에드워드 왕세자의 아들 리처드 2세였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지휘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섭정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에드워드 왕세자가 먼저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에드워드 왕세자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곤트의 존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된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가난한 평민들에게는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와트 타일러의 난). 다행히 어떻게 이 난을 진압했고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에서 위세가 추락한다[6]. 그리고 존은 얼마뒤에 아내의 친정인 카스티야 왕가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지자 그 곳에서 왕을 해보겠다고 잉글랜드를 비운다.

병맛같았던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했던 것인지 리처드 2세의 첫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존의 섭정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였고, 결국 내전이 작게나마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7]가 득세한 의회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에서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이 둘을 중재시키고 내전을 종결시킨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결국 잉글랜드 국왕 자리보다 더 노른자위 작위라고 불리우는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는다. 하지만 존은 전쟁중인 와중에 더 이상 아키텐의 가치가 예전같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용히 충성파들의 세력을 단결시킨 리처드가 청원파들을 숙청시키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낸다. 심지어 리처드 2세가 자신의 막내 남동생인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살해하는 것도 지켜본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이로서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찾았으나 왕권은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곤트의 존이 부재했을때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과 의심이 많았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 등지에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되려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급하게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사로잡아버렸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1399).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8].

이게 왕위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9]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인 클래런스의 공작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다[10].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다. 리처드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11].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 에드워드 왕자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겐트의 존이 후계이며, 겐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린다.[12]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고[13], 사람들의 반응은 "왕이 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정도 였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한다[14].

이를 정리한 후 헨리 4세는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1413).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캐바른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헨리 5세의 자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만인 1422년 8월에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15]

하지만 헨리 6세는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했는지[16] 영국은 잔 다르크먼치킨들이 등장한 프랑스에 점점 캐발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1453년 영국의 프랑스 내 마지막 보루였던 보르도가 함락당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다.[17]

그렇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자 헨리 6세의 귄위는 땅에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섭정을 맡던 요크 가문과 헨리 6세의 중신, 왕비 간에 갈등의 골까지 깊어지자[18] 요크 가문은 '우리도 한 번 뒤집어봐?' 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우리도 못할 게 뭐냐" 는 생각에 따라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랭커스터 가문과 전쟁을 시작했다. 카스티용 전투로 백년전쟁이 끝난 지 고작 2년 뒤였다.

이 논리에도 나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된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가 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에드먼드 모티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와 결혼하는 자나 그 둘의 아들이 왕위 계승자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 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4남인 랭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다[19]. 따라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4세와 그의 후손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이 앤 모티머의 아들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20].

1455년, 세인트 올 번스 전투를 시작으로 각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는데 요크 공작 리처드는 1459년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승리해 왕위를 목전에 두었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해버렸다(...)

이러자 난을 일으킨 요크 가에 한때 위기가 찾아왔지만 리처드의 적자 에드워드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동생들과 함께 랭커스터파를 격파하면서 결국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1461년). 그리고 헨리 6세는 잠깐이지만 다시 왕위를 되찾지만(1470)[21] 1년도 안되어 에드워드의 반격으로 다시 폐위(1471)된 뒤에 유배되어 사망한다[22].

1.4. 결과와 후일담(꼽추 리처드 3세), 그리고 튜더 왕조[편집]

민간에서 대규모의 자원을 동원하기보다는 순전히 귀족(그것도 왕가와 연계된 많은 귀족들) 간의 용병 싸움이었기 때문에 영국 내 귀족의 수가 크게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백년전쟁 등 이전의 전쟁에서는 귀족들끼리 서로를 포로로 잡아 몸값을 뜯어내려고 했지만 장미전쟁부터는 귀족이던 평민이던 적으로 만나면 죽이고 포로로 잡더라도 목을 날려버리는 전멸전 양상으로 변하면서 피해가 더 커진 탓도 있다. 전쟁이 종료되어 헨리 튜더(헨리 7세)가 국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살아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 전의 3할에 불과했다고. 게다가 덕분에 왕가의 손도 상당히 귀해졌다...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4세(1461년 즉위, 헨리의 반격(1470년) 이후 1471년 재즉위)가 되는데 13년 후인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닥?) 그의 형제인 라이온킹스카 필나는 꼽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온갖 악당짓, 수양대군 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인 리처드 3세의 이야기다. 희곡도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다.[23]

이 이후에는 헨리 튜더[24]가 리처드를 죽이고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헨리 7세튜더 왕조를 세운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부족한 귀족의 수를 메우기 위해 요먼, 젠트리와 같은 평민 출신의 실력자(제 3계급)를 많이 등용하게 됨으로써 산업혁명시민혁명의 바탕이 되고 왕가 역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의 혁명을 피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왕 목이 날아간 건 차이 없지

스티븐 리의 블로그에서 장미전쟁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주고 있다. #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25]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및 이후 영국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명시적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국왕에게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랭커스터 공작령(Duchy of Lancaster)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어있고, 관행적으로 국왕/여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있다. 특히 랭커스터에서...[26] 반면 랭커스터 가문의 맞수였던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Duke of York) 칭호는 용도가 바뀌어서 주로 잉글랜드·영국 국왕의 둘째 아들에게 부여하는 칭호가 되었다. 요크 가문이 망했어요... 이 관행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요크 공작의 칭호를 쓰고 있다.

조지 RR 마틴얼음과 불의 노래다섯 왕의 전쟁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전쟁이라고 한다.

2.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의 배경이 되는 전쟁[편집]

1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건.

팬드래건 왕국의 성왕 라시드 팬드래건 사후, 당시 태자였던 헨리가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로빈의 혈통 문제, 그리고 우드스톡의 실종에서 비롯된 첫째 왕자가 아닌 둘째 왕자의 왕위 계승 등으로 인해 올리비아에게서 태어난 왕자 및 그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이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전쟁.[27]

로빈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콘웰파는 붉은 장미를, 올리비아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버몬트파는 백장미를 사용하여 장미전쟁이란 명칭이 붙었다.

전쟁 초반 헨리가 버몬트파의 장남 조지를 살해하면서 콘웰파가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버몬트의 차남 윌리엄, 그리고 삼남 리처드가 어머니의 고국인 비프로스트로 도망쳐서 이 나라의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와 반격하여 결국 헨리가 윌리엄에게 살해당하고 콘웰성이 함락당하면서[28] 버몬트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윌리엄이 새로운 팬드래건의 왕위에 오르며 장미전쟁은 일단 종결된다. 그리고, 이 일 때문인지 차후 왕이 된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도 받았고 비프로스트에 좋지않은 감정도 있었는지 차후 제국이 비프로스트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고 잔당토벌에도 도움을 주게 된다.

한편, 우드스톡의 아들로 본래 콘웰파였으나, 한족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모두에게 배척받았던 클라우제비츠만이 콘웰파 왕족의 남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국으로 망명한다. 클레어 팬드래건은 행방불명이고 켈리 팬드래건은 아예 언급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윌리엄이 죽고, 리처드가 그의 장자인 필립을 몰아내고 국왕에 즉위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기가 팬드래건의 국왕이 되면 버몬트파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발언을 한다. 또한 리처드 역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한다.[29] 이에 엘리자베스는 장미의 전쟁을 종식시킬 열쇠로 여겨져 장미의 신부로 불리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과 지방 영주들을 설득해 리처드에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장미전쟁의 승리자가 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장미전쟁은 진정한 종결을 맞게 된다.

다만, 이 때 귀족들이 콘웰파와 버몬트파로 나뉘어 싸운 것이 차후 버몬트 대공과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의 내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전3 메뉴얼의 내용에 따르면 버몬트에게는 구 콘웰파 귀족들이, 헤이스팅스 공작에게는 구 버몬트파 귀족들과 리처드 잔당들이 가세했다고 한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 공작과 언쟁할 때 버몬트와 친분이 있는 한 여성귀족이 대공을 비호하자 헤이스팅스 옆에 있던 귀족이 '흥! 이래서 콘웰파는 어쩔 수 없다니까!'고 말한 것을 보면 서로 앙금이 상당히 오래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버몬트 대공이 내전이 끝난후 헤이스팅스편에 섰던[30] 귀족들은 사피 알 딘이 살라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줄을 잘못 선 버몬트파 귀족들은 망했어요.[31] 다만, 이 결과는 왕국과 안타리아 동부의 장래에 있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는데, 버몬트 대공이 추진한 투르 원정은 표면적으로는 아스타니아에서의 복수를 내걸었지만 진짜 의도는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게 목적이었고, 아스타니아 멸망은 어차피 남의 나라 일인데다 실버에로우 동맹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국익의 관점에서도 득이 안되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군수산업 종사자인 크리사오르 영지의 케이트 호크도 '우리도 막대한 이익을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겠지만 무의미하게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습니다'하고 반대한 바 있었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를 처형한 후, 커티스를 멸망시키고[32] 투르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력이 소비되었고, 버몬트 대공도 백치가 되어버린 결과를 보면 헤이스팅스가 반대한 것에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33]

1에서 모티브를 따온 만큼 겹치는 설정과 인물이 많은 편. 실제 역사상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랭커스터 가문 - 콘웰파
요크 가문 - 버몬트파
헨리 4세 ~ 헨리 6세 - 헨리 팬드래건
에드워드 4세 - 윌리엄 팬드래건
리처드 3세 - 리처드 팬드래건
에드워드 5세 - 필립 팬드래건
요크 공 리처드[34] - 존 팬드래건
헨리 7세 - 클라우제비츠 팬드래건
요크의 엘리자베스[35] - 엘리자베스 팬드래건

3.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편집]

1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내에서 사냥을 다니거나 나라를 새워 왕노릇을 하거나 타 유저의 나라에 들어가 정치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

4. 더비 매치의 하나[편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리즈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일컫는 말. 이름의 출처는 1번.

맨유의 연고지인 맨체스터시가 랭커셔주에 위치해 있으며 리즈의 연고지인 리즈시가 요크셔주에 위치해 있다. 거기다 맨유의 홈 유니폼은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를 상징하는 붉은색, 리즈의 홈 유니폼은 요크 가문의 하얀 장미를 상징하는 흰색이다. 지역감정에서 시작된 더비 매치인지라 과격하기로 유명하며, 툭하면 훌리건이 출동해 난동부리고 경찰을 부른다.

국내에 맨유vs리버풀의 레즈더비를 장미전쟁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지식. 정확히 말하면 무지한 스포츠 기자들이 이것저것 가져다 붙인 것이다. 심지어 한국 위키에도 장미전쟁이라고 적어놨다. 장미전쟁이 아니라고 하자 '붉은 장미전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맨유vs리버풀 경기는 그냥 '북서부더비'라고 부른다. 이전 버전에선 '레즈더비'라고 불리운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이는 한국에서만 불리는 명칭이다. 실제 맨유와 리버풀은 리그 내에서 우승권을 다툼으로 인해 생겨난 라이벌 매치라 맨유vs리즈의 지역감정적 라이벌이랑은 다른 위치에 있다.

5. 학교대사전의 용어[편집]

학교대사전에서 교사들끼리 서로를 증오하여 벌이는 사투를 일컫는 말. 이들은 수업시간에 서로를 욕하는데 학생들은 이들 선생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한다. 유래는 1.

비슷한 말로는 영역싸움[36]이 있다.

6.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유통한 TPS 게임[편집]

7. 장미칼 업계(?)의 용어(?)[편집]

2013년 화제가 되고 있는 장미칼 업계에서 쓰는 용어. 각종 장미칼들이 서로를 짝퉁이네, 국적불명의 정체불명의 칼이네라고 디스하면서 '자기 장미칼이 킹왕짱이니 장미전쟁은 끝났다'라고 외치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선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라는 느낌일 듯

8. 장미전쟁(보드게임)[편집]

항목 참조.

[1] 헨리 6세의 아내.[2]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는 왕궁의 정원에서 요크가의 수장 요크 공작과 랭커스터의 주요 인물인 서머셋 공작이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요크 공작이 흰 장미를 꺾어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규합을 요구하고, 서머셋 공작은 붉은 장미를 꺾어 이에 대응하는 장면이 나온다.[3] 실제 꽃 색깔은 연분홍색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보이듯 문장 색깔은 새빨갛게 했기 때문에 붉은 장미란 말이 돈 것이다.[4] 어떻게 보면 해당화찔레꽃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5] 여기에 대해서는 장미 항목을 참고바람.[6] 참고로 와트 타일러의 난때 존은 프랑스에 갔었는데 화가 난 시위대가 존의 거주지였던 성을 불태웠다.[7] 청원파가 왕권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원파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리처드와 헨리의 막내 숙부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필두로 한 왕의 친척들이 대세였다. 왕권이 약화되면 왕과의 혈연이 권력 기반인 그들의 권위도 낮아질 테니 이들은 도리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이 방계 왕족을 못 살게 구는 것을 견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 권신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파벌이었다.[8] 매우 간단히 줄이면 왕이 태클 걸던 사촌형을 추방시키고, 사촌형의 아버지(이자 왕의 숙부)가 죽자 상속받을 유산마저 몰수했다. 근데 사촌형이 돌아와서 왕을 사로잡고 자신이 새로운 왕이 된 거다.[9] 참고로 할아버지인 제3대 마치 백작의 이름도 에드먼드였고, 숙부의 이름도 에드먼드였다.[10] 이 사람도 오래는 못 살고 29살 때 요절했다.[11] 참고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삼남인 겐트의 존의 장남이다.[12] 이론적으로 완전 부정은 아니나 사실상 부정이나 다름없다. 실제 이 규칙이 적용된 프랑스 왕실에서는 천 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13] 당장 살리카법은 외손자의 왕위 계승은 인정한다.[14] 다행히도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이자 보호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왕위 즉위에 찬성했고, 이 덕분에 잡음은 많았을 망정 직접적인 반대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5] 이때 샤를 6세10월에 잇따라 죽었지만 아들 샤를 7세가 조약을 깨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사실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자기보다 훨씬 일찍 죽을 것 같아서 맺은 조약이었는데...[16] 사서에 따르면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다.[17] 다만 칼레는 남아있었다.[18] 제 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아버지인 캐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헨리 5세에게 반역을 들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등, 헨리 5세 때 나빠진 관계를 헨리 6세가 더 악화시킨 셈이다.[19] 정확히 보면 랭리의 에드먼드의 둘째 아들인 캐임브릿지 백작 리처드의 장남이다. 랭리의 에드먼드의 첫째 아들인 에드워드 제2대 요크 공작은 자식 없이 죽었고, 그의 직위는 조카인 리처드가 계승했다.[20] 참고로 앤 모티머와 캐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6촌 친척이다. 앤 모티머는 친척 할아버지뻘에게 시집간 셈이다. 실제 나이 차이는 많이 안 나서 리처드가 15살 가량 연상이었다.[21]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에드워드쪽에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의 동생 조지가 왕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헨리 측에 붙었다.[22] 이걸 극도로 줄이면 8촌 형님을 왕위에서 몰아낸 8촌 동생이다. 그리고 원래 왕이었던 8촌 형은 잠깐이나마 왕위 탈환에 성공했다가 광속으로 8촌 동생에게 다시 뺏긴다.[23] 하지만 리처드 3세를 지나치게 추남에 악마화한 것은 내전의 승자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인 헨리 튜더를 띄우기 위한 것이었다.[24] 어머니 혈통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파인 보퍼트 가문이긴 하지만 보퍼트 가문이 존 오브 곤트와 그의 정부인 캐서린 스윈포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들로 이루어진 집안이다. 나중에 존과 캐서린은 정식 결혼을 하였고 이로써 사생아들도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헨리 4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등 정상적으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25] 여성 공작일 경우에도 그냥 Duke를 쓴다. 여성형인 Duchess으로 쓸 경우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남성형을 쓰는 것.[26] 랭커스터에서는 종종 God Save the Queen 1절 첫 부분 "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에서 noble Queen을 noble Duke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가사 내의 모든 Queen을 다 Duke로 바꾸는 건 아니고 딱 저 부분만.[27] 원래 팬드래건 왕국의 기존 귀족들은 이올린 왕녀가 게이시르 제국 원정을 갔다가 상당수가 갈려 나갔고 그 공백을 메꾼 것이 바로 그레이 스케빈저가 이끌던 용병 기사단이다. 즉, 버몬트 파는 기존 귀족 세력이 많고 콘웰 파는 용병 기사단에서 공을 세운 신흥 세력이다. 로빈 왕비 역시 용병 기사단 출신이지만 사실은 사일러스에서 제국군에게 도적질하다 튄 기사이다. 반대로 올리비아 왕비는 비프로스트의 왕녀다. 다만, 이 전쟁의 도화선 및 1차적인 명분은 라시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헨리 팬드래건이 투르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28] 템페스트 시점에서 콘웰성에 가면 폐허가 되어있다.[29] 이 부분이 템페스트의 시작 부분이다.[30] 물론, 버몬트 대공은 헤이스팅스 공작과의 최종결전전에 싸움에서 빠지거나 항복한 자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헤이스팅스와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은 도망친 그리피스를 빼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31] 물론 케이트 호크처럼 줄을 갈아타서 살아남은 버몬트파 귀족들도 많다.[32] 이 일 이후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던 실버에로우는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33] 물론, 버몬트 대공은 그 이전부터 록슬리와 함께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는지라, 그점에 있어서 헤이스팅스파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있긴 했었다.[34] 에드워드 5세의 동생으로 리처드 3세에 의해서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35]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의 누이. 후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헨리 튜터와 결혼하면서 장미전쟁이 끝나게 된다.[36] 육식 동물들이 자신의 고유 영역을 지키듯 수업시간에는 교실이 교권 신수설에 의해 그 선생의 것이다. 이를 다른 선생이 침범하면...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이면 신경전이 더더욱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