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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오하이오 센트럴 대학교 (B.A.) |
경력 | |
재임 기간 | 제29대 대통령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
배우자 | 플로렌스 하딩(1860 ~ 1924, 1891년 결혼) |
자녀 | 서녀 엘리자베스 앤 블레이징(1919 ~ 2005)[1] 의붓아들 마셜 하딩(1880 ~ 1915) |
1. 개요[편집]
나는 이 직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2] - 워런 G. 하딩(Warren G. Harding)
미국의 정치인이자 제29대 대통령.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적 비극 직후, 혼란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정상 상태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라는 매력적인 슬로건을 던지며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미국사에서 '실패한 대통령'의 대명사이자, 후임자들에게 "주변 관리를 못 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미국 역사학계에서 실시하는 대통령 업적 평가에서 그는 수십 년간 부동의 꼴찌 또는 최하위권을 기록해 왔다.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천상계에서 노닌다면, 하딩은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과 함께 지옥의 밑바닥에서 순위 다툼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무능한 악당'으로 치부하기에는 그가 가진 인간적 매력과 시대적 한계, 그리고 최근 재조명받는 정책적 성과들이 얽혀 있어 매우 복합적인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하딩이 당선될 당시의 인기는 가히 현대의 아이돌이나 톱스타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이었으며,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와 타인을 무장해제 시키는 부드러운 화법을 지녔다.
당시 미국은 우드로 윌슨의 고집스러운 국제주의와 전쟁의 피로감에 지쳐 있었다. 윌슨이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자"며 피곤한 도덕주의를 강요할 때, 하딩은 "이제 우리 좀 쉽시다, 옛날의 평화로웠던 미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속삭였다. 대중은 이 잘생기고 친절한 오하이오 출신 신사에게 열광했고, 그는 1920년 대선에서 무려 60.3%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이는 여성 참정권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첫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들이 하딩의 외모와 온화함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결과이기도 했다.
그의 몰락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최대 장점이었던 '사람 좋은 성격'에서 기인했다. 하딩은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었고, 자신의 친구나 고향 지인들을 요직에 앉히는 '정치적 보은'에 지나치게 충실했다. 이들이 바로 미국 정치사에서 악명 높은 오하이오 갱*이다.
그는 사적인 포커 모임에서 나랏일을 논하기도 했으며, 그가 믿었던 '친구'들은 대통령의 뒤에서 국가 자산을 팔아치우고 뇌물을 수수하는 등 전방위적인 부패 저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딩 본인이 직접적인 부정부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희박하지만, 관리자로서의 직무 유기와 통찰력 부재는 그를 '부패의 방조자'라는 프레임에 가둬버렸다.
21세기에 들어서며 하딩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꼴찌'에서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그가 남긴 업적들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터진 티팟 돔 스캔들을 비롯한 측근들의 대형 비리, 그리고 임기 중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터져 나온 수많은 불륜설과 사생활 논란은 그의 모든 정책적 성과를 덮어버렸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요구하는 고도의 결단력과 의심, 그리고 도덕적 엄격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생애는 화려한 조명 아래 시작되어 음습한 스캔들 속에서 끝났으며, 사후에는 '독살설'이나 '자살설' 같은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하딩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곧 1920년대 미국의 화려한 황금기와 그 이면에 숨겨진 부패의 그늘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내 조상 중 한 명이 담장 위를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3]
워런 G. 하딩의 초기 생애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서막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인종적 낙인'과 '신분 상승의 열망'이 뒤섞여 있다.
1865년 11월 2일, 오하이오 주 모로 카운티의 작은 마을인 블루밍 그로브(Blooming Grove)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트라이언 하딩(George Tryon Harding)은 남북전쟁 참전 용사이자 독학으로 의술을 익힌 동네 의사였고, 어머니 피비 딕슨(Phoebe Dickerson)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이자 산파였다.
집안 형편은 찢어지게 가난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코 넉넉하지도 않은 전형적인 개척지 중산층의 하단부에 위치했다. 아버지는 의사 외에도 농사, 부동산 투기 등 여러 부업을 전전하며 자식들을 부양하려 애썼고, 이러한 아버지의 '잡식성' 경제 활동은 훗날 하딩이 신문사 운영과 정치판에서 보여준 수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딩의 생애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흑인 혈통설'이다. 이는 단순히 가십거리를 넘어, 당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사회에서 하딩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놓을 수 있는 핵폭탄급 이슈였다.
소문의 근원은 하딩의 증조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블루밍 그로브의 이웃들은 하딩 가문의 외모가 다소 어둡고 특징적이라는 이유로 "하딩의 조상 중 흑인이 섞여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특히 하딩의 아버지가 이웃과 토지 분쟁을 벌일 때마다 상대방은 어김없이 이 카드를 꺼내 들어 하딩 가문을 모욕했다.
이 낙인은 하딩이 학교에 다닐 때도 따라다녔다. 동급생들은 그를 향해 인종차별적 멸칭을 내뱉기 일쑤였고, 하딩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친절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연기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모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강박'이 훗날 그의 최대 강점인 '친화력'을 완성시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흑인 피가 섞였다는 게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당시 미국은 짐 크로우 법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한 방울의 법칙(One-drop rule)'에 따라 흑인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그는 대통령은커녕 투표권조차 위협받는 처지였다. 훗날 2015년 DNA 검사를 통해 하딩 가문에 아프리카계 혈통이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으나, 하딩은 평생을 이 유령과 싸워야 했다.[4]
신체적으로 하딩은 또래보다 건장하고 발달이 빨랐다. 그는 시골 소년답게 농사일을 돕고, 시냇가에서 수영을 하며, 마을 밴드에서 코넷(Cornet)을 연주하는 등 평범하지만 활기찬 유년기를 보냈다. 특히 악기 연주는 그가 평생 즐겼던 취미로, 훗날 대통령 선거 운동 때도 직접 악기를 들고 연주하며 대중의 호감을 사는 '서민 코스프레'의 원조 격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공부에 아주 특출난 천재는 아니었으나, 말재주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교 토론 시간에 보여준 그의 유려한 언변은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아버지 조지는 아들의 이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정계 진출의 가능성을 점쳤다.
하딩이 자라난 19세기 후반의 오하이오는 미국 정치의 화약고이자 '대통령의 요람'이었다. 당시 오하이오는 농업 중심의 구시대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신시대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으며,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파와 진보파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곳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하딩은 자연스럽게 '중재와 타협'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어느 한쪽의 극단적인 주장에 서기보다는, 양쪽 모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법을 배웠다. 이는 훗날 그가 '오하이오 머신'이라는 부패한 정치 조직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다.
10대 후반의 하딩은 시골 마을 블루밍 그로브가 자신의 야망을 담기에는 너무 작다고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이사한 매리언(Marion) 시로 거처를 옮기며 본격적인 사회 진출을 준비한다. 이 시기 그는 교사, 법률 학도, 보험 판매원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지만,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신문사 아르바이트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활자 냄새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신문사의 분위기는 하딩의 적성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그는 여기서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정보를 가공하여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깨달았다.
결국 하딩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에 목매는 성격으로 자라났고, 이는 훗날 대통령직이라는 엄중한 자리에서도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비극의 씨앗이 된다.
2.2. 오하이오 센트럴 칼리지 시절[편집]
"그는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교정의 모든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워런 G. 하딩의 10대 후반은 그의 평생을 지배하게 될 두 가지 재능, 즉 '사람을 매홀리는 목소리'와 '갈등을 무마하는 사교성'이 완성된 시기였다. 1879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입학한 오하이오 센트럴 칼리지(Ohio Central College)에서의 경험은 그를 단순한 시골 청년에서 장차 미 대륙을 호령할 정치인으로 탈바꿈시킨 용광로였다.
당시 오하이오 센트럴 칼리지는 오늘날의 종합대학교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일종의 고등 교육 기관과 초기 대학 과정이 혼합된 형태였다. 하딩은 14세라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된 듯한 풍채와 저음의 목소리 덕분에 선배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당시 미국 중서부의 대학들은 남북전쟁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미국의 가치를 정립하려던 시기였다. 하딩은 여기서 고전 수사학, 역사, 그리고 기초적인 법학 지식을 섭취했는데, 정작 본인은 전공 서적보다는 대학 내 소모임과 토론 클럽에서 더 큰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훗날 그가 '정책에는 무지하지만 정무에는 밝은' 정치인이 되는 결정적인 복선이 된다.
하딩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토론 소모임(Literary Societies) 활동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정치권에서 웅변술은 현대의 SNS나 미디어 홍보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이었다. 하딩은 이 클럽에서 상대방을 논리로 압도하기보다는, '풍성한 어휘와 부드러운 화법으로 청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법'*을 익혔다.
그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이는 훗날 그가 만들어낸 'Normalcy(정상 상태)'라는 신조어처럼, 학문적으로는 틀렸을지언정 대중의 심장에는 직격하는 화법의 원천이 되었다.
하딩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 톤을 조절했으며, 특히 갈등이 고조되는 토론 현장에서 특유의 허허실실 화법으로 장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능했다.
대학 시절 하딩의 별명 중 하나는 '해결사'였다.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부터 교수와의 갈등까지, 하딩은 항상 그 중심에서 양측의 손을 맞잡게 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는 단순히 착해서가 아니라, 그가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적 기제'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5]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도 기어이 함께 포커를 치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가 되었는데, 이러한 '팔방미인'적 기질은 오하이오 정계의 거물들이 그를 눈여겨보게 만든 가장 큰 자산이었다.
하딩의 언론인으로서의 커리어도 이 대학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학생 잡지인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편집을 도우며 기사 작성과 인쇄 공정을 익혔다.
그는 어려운 논설보다는 학생들의 가십이나 지역 사회의 훈훈한 미담을 싣는 것을 선호했다.
신문을 만들며 그는 '어떤 단어가 사람들을 움직이는지', '어떤 제목이 분노를 가라앉히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학생 잡지의 광고를 직접 따러 다니며 협상력을 키웠는데, 이는 졸업 후 그가 망해가던 <매리언 스타>를 인수해 성공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1882년, 하딩은 센트럴 칼리지를 졸업하며 사회로 나간다. 당시 졸업식에서 그는 학생 대표로 연설을 맡았는데, 그 연설의 주제는 놀랍게도 "미국 국민의 화합과 번영"이었다. 이미 10대 후반에 그의 머릿속에는 '정상(Normal)'과 '화합'이라는 키워드가 깊게 박혀 있었던 셈이다.
졸업 당시 하딩의 성적은 특출나지 않았으나, 그가 남긴 인맥과 평판은 동기들 중 독보적이었다. 그는 졸업장보다 더 소중한 '하딩을 좋아하는 오하이오의 인물들'이라는 네트워크를 들고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하딩의 대학 시절을 복기해보면, 그가 훗날 대통령으로서 보인 행보들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콘텐츠가 없어도 패키징으로 승부할 수 있는 능력'을 대학에서 완성했다.
동시대의 비판가들은 하딩의 연설을 두고 "아이디어를 찾는 단어들의 행진"이라고 혹평했다. 즉, 단어는 화려하나 그 안에 구체적인 정책이나 철학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그 화려한 단어들의 행진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하딩은 '인싸' 중의 '인싸'였으며, 토론 배틀에서 논리로 이기기보다 상대방과 끝나고 술 한잔하며 형 동생 사이가 되는 법을 택한 인물이다. 조직의 중간 관리자로서는 최적의 인재였을지 모르나, 국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는 이때부터 이미 불길한 징조가 보였던 셈이다.
청년 시절의 하딩은 수려한 외모 덕분에 대학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그는 여러 명의 여성과 동시에 썸을 타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연애 감정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방치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우유부단한 여성 관계는 훗날 백악관 시절의 대형 스캔들로 이어지는 슬픈 전조가 된다.
또한 대학 시절 그를 괴롭혔던 '혈통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는 특유의 허허실실 전법으로 대처했다. "우리 가문은 정직한 개척자 가문입니다"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위기를 넘기는 방식은 평생 그가 정적들을 대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2.3. 부스터(Booster)' 정신과 매리언 시의 명사로 등극[편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 중서부의 소도시들은 각자의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하딩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매리언(Marion)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투영하고 정치적 자본을 축적하는 거대한 장소와도 같았다.
하딩이 인수했던 <매리언 스타>는 단순한 뉴스 전달 매체를 넘어섰다. 그는 신문의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매리언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당시 미국 중서부에서 유행하던 '타운 부스팅(Town Boosting)' 문화의 전형이었다. 하딩은 지역 상공회의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철도 노선을 유치하고 공장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단순히 펜대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딩은 매리언의 모든 행사, 장례식, 결혼식, 교회 모임에 얼굴을 비췄다. 그의 뛰어난 외모와 온화한 미소, 그리고 상대방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해내는 비범한 기억력은 매리언 시민들에게 그를 '우리 워런(Our Warren)'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6]
그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으며, 지역 내의 갈등이 발생하면 특유의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강력한 고정 지지층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딩의 사회적 영향력은 공식적인 자리보다 비공식적인 사교 모임에서 더 빛을 발했다. 그는 미국판 친목 단체인 '베네벌런트 앤 프로텍티브 오더 오브 엘크스(BPOE, 엘크스 클럽)'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또한 프리메이슨 등 다양한 비밀 결사와 사교 클럽에 가입하여 지역의 유지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하딩의 평생 습관인 '포커(Poker)'가 등장한다. 그는 매주 토요일 밤이면 지역의 은행가, 변호사, 사업가들과 모여 밤새도록 포커를 즐겼다. 단순히 도박을 즐긴 것이 아니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오가는 은밀한 정보와 인맥이야말로 하딩이 구축한 '오하이오 머신'의 실질적인 동력이었다.
훗날 백악관에서도 이 포커 판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하딩이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친분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핵심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매리언 시절의 그에게 포커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네트워킹 수단이었다. "포커 판에서의 약속은 법보다 엄격하다"는 그의 신념은 훗날 무능한 친구들을 요직에 앉히는 비극적 의리로 변질되고 만다.
하딩이 신봉했던 '부스터' 정신의 핵심은 무조건적인 낙관주의였다. 그는 비판적인 보도나 어두운 사회 문제를 들춰내는 것을 '비애국적'이거나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매리언 스타>는 철저하게 긍정적인 뉴스, 발전하는 지표, 화목한 이웃들의 이야기만을 담았다.
이러한 태도는 하딩을 매리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만들었으나, 동시에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거세해버렸다. 그는 세상의 모든 갈등이 좋은 술 한 잔과 부드러운 대화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딩이 대통령이 된 후 겪은 수많은 스캔들은 사실 매리언 시절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그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논리로 주변 인물들의 결점을 덮어주었고, 이는 소도시 매리언에서는 '덕망'으로 칭송받았으나 거대 국가 미국에서는 '직무유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하딩은 단순한 언론인을 넘어 오하이오주 전체가 주목하는 '블루칩'으로 성장했다. 그는 매리언 시의 교육 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각종 기부금 모금을 주도하며 지역의 영웅이 되었다. 하딩의 연설은 그 내용의 깊이보다 울림 있는 저음과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그는 이제 매리언이라는 작은 어항을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역 유지들은 그를 주 의회로 보내기 위해 자금을 모았고, 하딩 본인도 "정치야말로 가장 큰 부스팅(Boosting)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딩이 매리언에서 구축한 '완벽한 신사' 이미지는 오하이오 정계의 거물들에게 "대중에게 먹히는 상품"으로 각인되었고, 이는 곧 해리 도허티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진다.
당시 하딩이 탔던 마차(후에 자동차)는 매리언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시민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또한 하딩은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거나 가난한 이웃의 신문 구독료를 대신 내주는 등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의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하딩이 인수했던 <매리언 스타>는 단순한 뉴스 전달 매체를 넘어섰다. 그는 신문의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매리언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당시 미국 중서부에서 유행하던 '타운 부스팅(Town Boosting)' 문화의 전형이었다. 하딩은 지역 상공회의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철도 노선을 유치하고 공장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단순히 펜대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딩은 매리언의 모든 행사, 장례식, 결혼식, 교회 모임에 얼굴을 비췄다. 그의 뛰어난 외모와 온화한 미소, 그리고 상대방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해내는 비범한 기억력은 매리언 시민들에게 그를 '우리 워런(Our Warren)'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6]
그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으며, 지역 내의 갈등이 발생하면 특유의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강력한 고정 지지층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딩의 사회적 영향력은 공식적인 자리보다 비공식적인 사교 모임에서 더 빛을 발했다. 그는 미국판 친목 단체인 '베네벌런트 앤 프로텍티브 오더 오브 엘크스(BPOE, 엘크스 클럽)'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또한 프리메이슨 등 다양한 비밀 결사와 사교 클럽에 가입하여 지역의 유지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하딩의 평생 습관인 '포커(Poker)'가 등장한다. 그는 매주 토요일 밤이면 지역의 은행가, 변호사, 사업가들과 모여 밤새도록 포커를 즐겼다. 단순히 도박을 즐긴 것이 아니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오가는 은밀한 정보와 인맥이야말로 하딩이 구축한 '오하이오 머신'의 실질적인 동력이었다.
훗날 백악관에서도 이 포커 판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하딩이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친분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핵심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매리언 시절의 그에게 포커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네트워킹 수단이었다. "포커 판에서의 약속은 법보다 엄격하다"는 그의 신념은 훗날 무능한 친구들을 요직에 앉히는 비극적 의리로 변질되고 만다.
하딩이 신봉했던 '부스터' 정신의 핵심은 무조건적인 낙관주의였다. 그는 비판적인 보도나 어두운 사회 문제를 들춰내는 것을 '비애국적'이거나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매리언 스타>는 철저하게 긍정적인 뉴스, 발전하는 지표, 화목한 이웃들의 이야기만을 담았다.
이러한 태도는 하딩을 매리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만들었으나, 동시에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거세해버렸다. 그는 세상의 모든 갈등이 좋은 술 한 잔과 부드러운 대화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딩이 대통령이 된 후 겪은 수많은 스캔들은 사실 매리언 시절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그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논리로 주변 인물들의 결점을 덮어주었고, 이는 소도시 매리언에서는 '덕망'으로 칭송받았으나 거대 국가 미국에서는 '직무유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하딩은 단순한 언론인을 넘어 오하이오주 전체가 주목하는 '블루칩'으로 성장했다. 그는 매리언 시의 교육 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각종 기부금 모금을 주도하며 지역의 영웅이 되었다. 하딩의 연설은 그 내용의 깊이보다 울림 있는 저음과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그는 이제 매리언이라는 작은 어항을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역 유지들은 그를 주 의회로 보내기 위해 자금을 모았고, 하딩 본인도 "정치야말로 가장 큰 부스팅(Boosting)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딩이 매리언에서 구축한 '완벽한 신사' 이미지는 오하이오 정계의 거물들에게 "대중에게 먹히는 상품"으로 각인되었고, 이는 곧 해리 도허티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진다.
당시 하딩이 탔던 마차(후에 자동차)는 매리언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시민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또한 하딩은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거나 가난한 이웃의 신문 구독료를 대신 내주는 등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의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2.4. 초기 정치 행보[편집]
하딩의 정치적 자산은 그가 운영하던 신문사 <매리언 스타>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를 중앙 무대로 밀어 올린 엔진은 당대 미국 정치의 어두운 단면이자 효율적인 통치 체계였던 '정치 기계(Political Machine)'였다. 특히 그가 활동했던 오하이오는 공화당 내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강력한 당 조직을 보유한 주였으며, 하딩은 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정치는 이른바 '머신'이라 불리는 정당 조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권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지역 복지를 책임지는 대신 표를 몰아받았고, 당의 수뇌부(Boss)들은 이 표를 바탕으로 후보 지명권과 각종 이권을 통제했다.
하딩은 <매리언 스타>의 발행인으로서 지역 여론을 주도하며 공화당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친화력과 준수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말을 잘 듣는 유능한 대변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당시 오하이오 공화당의 거물이었던 마크 해나(Mark Hanna)[7]와 조지프 포레이커(Joseph B. Foraker) 사이의 계파 갈등 속에서, 하딩은 어느 쪽과도 척을 지지 않으면서 양측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특유의 처세술을 발휘했다.
1899년, 하딩은 마침내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공직 생활의 시작이었다.
주 상원의원으로서 하딩의 활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조화(Harmony)'였다. 그는 결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거나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임무는 당내 분열을 막고 파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하딩의 정치적 스타일이 확립되었는데, 그는 복잡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듣기 좋은 수사법과 화려한 문장을 동원하여 모두를 만족시키는 연설을 즐겼다. 동료 의원들은 그를 '빅 워런(Big Warren)'이라 부르며 따랐고, 그는 의사당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 시기의 하딩은 '알맹이 없는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금주법이나 노동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기보다, 양측의 비위를 맞추며 결정을 미루는 방식을 취했다.[8]
하딩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1899년 어느 날, 오하이오 주의 한 호텔 뒤뜰에서 일어났다. 당시 공화당의 로비스트이자 선거 전략가였던 해리 도허티(Harry M. Daugherty)는 하딩을 처음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정치는 이른바 '머신'이라 불리는 정당 조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권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지역 복지를 책임지는 대신 표를 몰아받았고, 당의 수뇌부(Boss)들은 이 표를 바탕으로 후보 지명권과 각종 이권을 통제했다.
하딩은 <매리언 스타>의 발행인으로서 지역 여론을 주도하며 공화당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친화력과 준수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말을 잘 듣는 유능한 대변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당시 오하이오 공화당의 거물이었던 마크 해나(Mark Hanna)[7]와 조지프 포레이커(Joseph B. Foraker) 사이의 계파 갈등 속에서, 하딩은 어느 쪽과도 척을 지지 않으면서 양측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특유의 처세술을 발휘했다.
1899년, 하딩은 마침내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공직 생활의 시작이었다.
주 상원의원으로서 하딩의 활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조화(Harmony)'였다. 그는 결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거나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임무는 당내 분열을 막고 파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하딩의 정치적 스타일이 확립되었는데, 그는 복잡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듣기 좋은 수사법과 화려한 문장을 동원하여 모두를 만족시키는 연설을 즐겼다. 동료 의원들은 그를 '빅 워런(Big Warren)'이라 부르며 따랐고, 그는 의사당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 시기의 하딩은 '알맹이 없는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금주법이나 노동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기보다, 양측의 비위를 맞추며 결정을 미루는 방식을 취했다.[8]
하딩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1899년 어느 날, 오하이오 주의 한 호텔 뒤뜰에서 일어났다. 당시 공화당의 로비스트이자 선거 전략가였던 해리 도허티(Harry M. Daugherty)는 하딩을 처음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나는 저 남자를 본 순간, 그가 대통령이 될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한 외모와 목소리를 가졌고, 무엇보다 내가 조종하기에 아주 적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을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는 하딩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주 전역의 당원들을 포섭하며, 하딩의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감독' 역할을 자처했다. 하딩 역시 도허티의 영악한 정치 감각을 신뢰하며 그에게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상당 부분 의지하게 된다. 이들의 결탁은 하딩을 백악관으로 이끈 강력한 동력이었으나, 동시에 사후 하딩의 명성을 지옥 끝까지 추락시킨 오하이오 갱 부패의 씨앗이기도 했다.
당시 오하이오 공화당은 보수파인 포레이커 세력과 온건파인 해나 세력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하딩은 포레이커의 지지 아래 정치에 입문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나 측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01년 주 상원 다수당 리더가 되었을 때, 양쪽 계파의 인물들을 적절히 안배하여 주요 위원회 자리를 배분하는 등 탁월한 '나눠먹기'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치력 덕분에 하딩은 1903년, 오하이오 주 부지사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주 상원의원 당선 4년 만에 주 전체의 2인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하딩은 오하이오 주 부지사로 재임했다. 하지만 부지사라는 직책은 실권이 적었고, 하딩은 여전히 정책보다는 행사 참석과 연설, 그리고 당내 조직 관리에 치중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는 복잡한 행정 업무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포커를 치고 술을 마시는 사교 모임을 훨씬 좋아했다. 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의 이러한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끊임없이 그를 채찍질했다. 플로렌스는 하딩이 단순한 지역 정치인에 머물지 않고 더 큰 무대로 나가기를 원했고, 하딩은 아내의 야망에 이끌려 정치를 계속해 나가는 모양새였다.[9]
하딩의 정치 인생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1910년, 하딩은 공화당 후보로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전역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주도하는 진보주의 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머신'의 지원을 받는 보수적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결국 하딩은 민주당 후보인 주드슨 하먼에게 참패하고 만다. 이 패배는 하딩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한동안 매리언으로 돌아가 신문사 운영에 전념하며 정계를 떠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휴식은 오히려 그에게 득이 되었다. 그는 주지사로서의 행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졌고, 대신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기 위한 연설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당 조직에 의해 길러진 후보였으며,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고 봉합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러한 '무색무취함'이야말로 극심한 분열에 지친 당시 미국 정치권이 가장 필요로 했던 덕목이었고, 이는 훗날 그가 대선 후보로 지명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2.5. 부지사 당선과 좌절[편집]
"나는 승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세상은 아직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10]
그는 오하이오 부지사로서 행정 경험을 쌓았으나, 정작 본인의 정치적 야망이 정점에 달했던 주지사 선거에서는 처참하게 고배를 마셨다. 이 시기의 실패는 훗날 그가 '타협의 산물'로서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결정적인 복선이 된다.
1903년, 하딩은 오하이오 주 부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며 주 정부의 2인자 자리에 오른다. 당시 오하이오 정계는 공화당의 독무대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마크 해나(Mark Hanna)와 조셉 포레이커(Joseph B. Foraker)라는 두 거물이 이끄는 파벌 간의 내전이 치열했다.
하딩은 여기서 특유의 '양비론적 중립'을 지켰다. 그는 해나 파벌의 조직력을 인정하면서도 포레이커와의 개인적 친분을 유지했다. 부지사로서의 하딩은 행정적 결단력을 보여주기보다는, 주의회 상원의장으로서 회의를 원만하게 진행하고 각종 행사에서 유려한 연설을 뽐내는 '얼굴마담' 역할에 충실했다.[11]
그는 이 시기 오하이오 전역을 돌며 수많은 사교 클럽과 지역 단체에서 연설했는데, 이때 구축한 인맥이 훗날 그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오하이오 머신'의 실질적인 혈관이 되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그를 향해 "내용 없는 화려한 수사학의 달인"이라며 껍데기뿐인 정치를 한다고 맹비난했다.
1905년 부지사 임기를 마친 하딩은 의외의 선택을 한다. 재선에 도전하거나 더 높은 직급으로 나가는 대신, 고향 매리언으로 돌아가 본업인 신문사 운영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정계에서는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는 해석과 "더 큰 기회를 노리기 위한 전략적 후퇴"라는 분석이 엇갈렸다.
실제로 하딩은 약 4년 동안 정치 전면에서 물러나 <매리언 스타>를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은퇴가 아니었다. 그는 신문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고, 공화당의 주요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시기 하딩은 "정치인이 표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정치인을 불러내게 만들어야 한다"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마침내 하딩은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당시 공화당은 진보주의 바람을 타고 부상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파와 보수적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파로 쪼개져 최악의 내분을 겪고 있었다.
하딩은 이 갈등을 봉합할 적임자로 자처하며 후보 지명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본선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상대 후보는 민주당의 현직 주지사 주드 하먼(Judson Harmon)이었다. 하먼은 청렴하고 유능한 행정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반면, 하딩은 '부패한 오하이오 머신의 꼭두각시'라는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다.
결과는 하딩의 참패였다. 그는 10만 표 이상의 큰 격차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텃밭인 오하이오에서 매우 이례적인 대패였다. 특히 하딩의 고향인 매리언에서조차 압도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딩의 패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태프트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진보적 공화당원들은 하딩을 '구태 정치인'으로 간주하며 투표를 거부하거나 하먼에게 투표했다.
하딩의 킹메이커인 해리 도허티와 오하이오 머신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유권자들은 하딩이 당선되면 주 정부가 로비스트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딩은 "우리 모두 친하게 지내자"는 식의 화합만을 외쳤을 뿐, 당시 유권자들이 갈망하던 사회 개혁이나 경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딩은 '정치적 콘텐츠의 빈곤함'을 미소와 악수로 때우려다 실력파 행정가에게 처참하게 깨진 셈이다. 이 패배로 인해 하딩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패배는 그를 '주지사'라는 행정적 책임이 따르는 자리 대신, 말만 잘하면 되는 '상원의원'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1910년의 패배는 하딩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선동가나 혁명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2인자' 혹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최저낙찰가 같은 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또한 이 선거 과정에서 해리 도허티는 하딩의 잠재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딩의 연설에 감동한 청중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도허티는 하딩에게 "주지사 따위는 잊어라. 당신의 외모와 목소리는 워싱턴, 아니 백악관에 어울린다"며 그를 다독였다.[12]
당시 하딩을 공격했던 민주당 신문들은 그의 '흑인 혈통설'을 다시 끄집어내어 비열한 인종주의적 공격을 퍼부었다. 하딩은 이에 대해 정면 대응을 피하며 "나는 그저 미국인일 뿐이다"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고수했다.
2.6. 1912년 공화당 전당대회[편집]
1912년 공화당은 그야말로 '내전' 상태였다. 현직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전임 대통령이자 대중적 인기의 화신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했던 태프트의 보수적인 국정 운영에 실망하여 정계 복귀를 선언했고, 이는 공화당을 진보파(루스벨트)와 보수파(태프트)로 양분시켰다.
이 상황에서 하딩은 철저하게 보수파의 적자인 태프트 편에 섰다. 이는 하딩의 개인적인 성향이 보수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오하이오 머신'의 수장들이 당의 정통성을 쥔 태프트를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딩은 이 난장판 속에서 태프트의 후보 지명 연설자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태프트 측이 대의원 자격을 가로챘다며 야유를 퍼부었고, 대회장 곳곳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단상에 오른 하딩은 특유의 당당한 풍채와 금속성의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내용보다는 '형식과 전달력'에서 빛을 발했다. 하딩은 루스벨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당의 결속과 헌법적 가치를 강조하며 보수파 대의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태프트를 "헌법의 수호자"로 치켜세웠고, 루스벨트의 급진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비록 루스벨트 지지자들의 극심한 방해 공작이 있었으나, 하딩은 흔들림 없이 연설을 마쳤고 이는 당 지도부에게 "위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태프트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이에 불복한 루스벨트는 탈당하여 진보당(일명 불 무스 당)을 창당한다. 이로 인해 공화당의 표는 갈렸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하딩에게 이 참패는 오히려 기회였다. 당내 거물들이 분열과 패배의 책임론에 휩싸여 스러져갈 때, 하딩은 끝까지 당을 지킨 '충성파'로서의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그는 루스벨트를 추종해 탈당한 세력을 비난하면서도, 언젠가는 그들이 돌아와야 할 '집'으로서의 공화당을 강조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훗날 그가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형 후보'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전당대회를 통해 하딩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인 '목소리와 외모'가 전국적인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언론들은 하딩의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공허한 수사학의 나열"이라며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으나[ 하딩의 연설 스타일은 훗날 '하딩주의(Hardingese)'라고 불리며,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품격 있는 태도와 대중 흡입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 하딩은 해리 도허티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차기 대권이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도허티는 시카고의 혼란을 지켜보며 하딩에게 이렇게 속삭였다고 전해진다. "워런, 자네는 언젠가 이 당의 구원자가 될 걸세. 사람들은 싸움에 지쳤거든. 자네처럼 잘생기고 친절한 사람이 '평화'를 말하면 모두가 따를 거야."
이 상황에서 하딩은 철저하게 보수파의 적자인 태프트 편에 섰다. 이는 하딩의 개인적인 성향이 보수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오하이오 머신'의 수장들이 당의 정통성을 쥔 태프트를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딩은 이 난장판 속에서 태프트의 후보 지명 연설자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태프트 측이 대의원 자격을 가로챘다며 야유를 퍼부었고, 대회장 곳곳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단상에 오른 하딩은 특유의 당당한 풍채와 금속성의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내용보다는 '형식과 전달력'에서 빛을 발했다. 하딩은 루스벨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당의 결속과 헌법적 가치를 강조하며 보수파 대의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태프트를 "헌법의 수호자"로 치켜세웠고, 루스벨트의 급진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비록 루스벨트 지지자들의 극심한 방해 공작이 있었으나, 하딩은 흔들림 없이 연설을 마쳤고 이는 당 지도부에게 "위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태프트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이에 불복한 루스벨트는 탈당하여 진보당(일명 불 무스 당)을 창당한다. 이로 인해 공화당의 표는 갈렸고,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하딩에게 이 참패는 오히려 기회였다. 당내 거물들이 분열과 패배의 책임론에 휩싸여 스러져갈 때, 하딩은 끝까지 당을 지킨 '충성파'로서의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그는 루스벨트를 추종해 탈당한 세력을 비난하면서도, 언젠가는 그들이 돌아와야 할 '집'으로서의 공화당을 강조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훗날 그가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형 후보'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전당대회를 통해 하딩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인 '목소리와 외모'가 전국적인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언론들은 하딩의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공허한 수사학의 나열"이라며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으나[ 하딩의 연설 스타일은 훗날 '하딩주의(Hardingese)'라고 불리며,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품격 있는 태도와 대중 흡입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 하딩은 해리 도허티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차기 대권이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도허티는 시카고의 혼란을 지켜보며 하딩에게 이렇게 속삭였다고 전해진다. "워런, 자네는 언젠가 이 당의 구원자가 될 걸세. 사람들은 싸움에 지쳤거든. 자네처럼 잘생기고 친절한 사람이 '평화'를 말하면 모두가 따를 거야."
2.7. 연방 상원의원 당선[편집]
1914년은 미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수정 헌법 제17조에 의해 상원의원 선거가 주 의회 선출 방식에서 국민 직접 선거로 바뀐 첫 번째 선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외모가 수려하며 연설 능력이 뛰어난 하딩에게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었다.
하딩은 공화당 경선에서 자신의 옛 스승이자 정적이었던 조셉 포레이커(Joseph B. Foraker)와 맞붙었다. 포레이커는 노련한 정객이었으나 이미 낡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하딩은 "새로운 시대의 조화와 화합"을 내세우며 당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선에서 하딩은 민주당의 티모시 호건을 상대했다. 이때 하딩의 뒤에는 '킹메이커' 해리 도허티가 이끄는 오하이오 머신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을 "모든 미국인이 신뢰할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포장했다.
하딩은 1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승리했다. 이는 단순히 공화당의 승리가 아니라, 하딩이라는 개인의 '매력'이 대중 선거 체제에서 얼마나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한 사건이었다.
1915년 3월, 하딩은 마침내 연방 상원의원으로서 워싱턴 D.C.에 입성한다. 당시 워싱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긴장된 상태였으나, 하딩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워싱턴의 고급 사교 클럽들에 가입했다. 그에게 상원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신성한 전당이라기보다, **"전국에서 온 거물들과 포커를 치고 술을 마시며 친목을 다지는 거대한 사교장"**에 가까웠다. 하딩은 곧 '상원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의원', '가장 매너 좋은 신사'로 통하게 된다.
하딩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극도로 싫어했다. 윌슨은 고압적이고 학구적이며 도덕주의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는 하딩의 낙천적이고 세속적인 성격과 정반대 지점에 있었다. 하딩은 윌슨을 "미국을 유럽의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보수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하지만 이 대립조차 하딩이 논리적으로 윌슨을 압도했다기보다는, 대중이 느끼는 윌슨에 대한 피로감을 하딩이 적절히 대변해 준 것에 가까웠다. 하딩은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복잡한 국제 정세 공부보다는, 어떻게 하면 윌슨의 '국제연맹' 안을 부결시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끌 것인가에만 몰두했다.
해리 도허티는 하딩이 상원에서 빈둥거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았다. 도허티는 하딩을 만나는 사람마다 "하딩 의원이야말로 차기 대통령감이지 않나?"라며 바람을 잡았다.
하딩 본인은 처음에는 "나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으나, 상원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주변의 치켜세우기에 점차 취해갔다. 1914년 상원 입성 당시만 해도 평범한 지역 정객에 불과했던 그는, 192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내에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가장 안전한 대안"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하딩은 공화당 경선에서 자신의 옛 스승이자 정적이었던 조셉 포레이커(Joseph B. Foraker)와 맞붙었다. 포레이커는 노련한 정객이었으나 이미 낡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하딩은 "새로운 시대의 조화와 화합"을 내세우며 당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선에서 하딩은 민주당의 티모시 호건을 상대했다. 이때 하딩의 뒤에는 '킹메이커' 해리 도허티가 이끄는 오하이오 머신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을 "모든 미국인이 신뢰할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포장했다.
하딩은 1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승리했다. 이는 단순히 공화당의 승리가 아니라, 하딩이라는 개인의 '매력'이 대중 선거 체제에서 얼마나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한 사건이었다.
1915년 3월, 하딩은 마침내 연방 상원의원으로서 워싱턴 D.C.에 입성한다. 당시 워싱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긴장된 상태였으나, 하딩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워싱턴의 고급 사교 클럽들에 가입했다. 그에게 상원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신성한 전당이라기보다, **"전국에서 온 거물들과 포커를 치고 술을 마시며 친목을 다지는 거대한 사교장"**에 가까웠다. 하딩은 곧 '상원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의원', '가장 매너 좋은 신사'로 통하게 된다.
하딩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극도로 싫어했다. 윌슨은 고압적이고 학구적이며 도덕주의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는 하딩의 낙천적이고 세속적인 성격과 정반대 지점에 있었다. 하딩은 윌슨을 "미국을 유럽의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보수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하지만 이 대립조차 하딩이 논리적으로 윌슨을 압도했다기보다는, 대중이 느끼는 윌슨에 대한 피로감을 하딩이 적절히 대변해 준 것에 가까웠다. 하딩은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복잡한 국제 정세 공부보다는, 어떻게 하면 윌슨의 '국제연맹' 안을 부결시켜 공화당의 승리를 이끌 것인가에만 몰두했다.
해리 도허티는 하딩이 상원에서 빈둥거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았다. 도허티는 하딩을 만나는 사람마다 "하딩 의원이야말로 차기 대통령감이지 않나?"라며 바람을 잡았다.
하딩 본인은 처음에는 "나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으나, 상원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주변의 치켜세우기에 점차 취해갔다. 1914년 상원 입성 당시만 해도 평범한 지역 정객에 불과했던 그는, 192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내에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가장 안전한 대안"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2.8. 상원에서의 무위이식[편집]
보통 상원의원이라고 하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입법 활동에 매진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딩의 상원 생활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으며, 화려한 사교를 즐기되, 책임질 일은 하지 않는다"로 귀결된다. 이는 노자의 무위이식(無爲而治)[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다스린다는 뜻이나, 하딩의 경우는 긍정적인 통치 철학이라기보다 정치적 무색무취함에 가까웠다.]을 기묘한 방식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딩은 상원에 입성한 후 6년 동안 단 한 건의 주요 법안도 주도적으로 발의하거나 통과시키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그가 게을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는 이미지'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논쟁적인 법안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누군가와는 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극도로 꺼렸다.
당시 상원의 동료들은 그를 "매우 품위 있고 잘생긴, 하지만 내용물은 없는 신사"라고 평가했다. 그는 위원회 활동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그가 속했던 상원 외교위원회에서도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국제주의를 비판하는 공화당 주류의 목소리에 그저 조용히 표를 던질 뿐, 자신의 독자적인 외교 철학을 설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상원은 국가를 혁신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인맥을 전국구로 넓히는 거대한 사교 클럽에 가까웠다.
하딩의 '무색무취'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지점은 당시 미국의 거대한 시대적 과제였던 여성 참정권과 금주법 문제였다. 이 이슈들은 당시 정치인들에게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가는 반대파의 거센 공격을 받아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딩은 이 문제들에 대해 철저하게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뒤 다수당의 입장에 편승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대세가 찬성으로 기울자 비로소 목소리를 냈으며, 금주법 역시 개인적으로는 술을 매우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수정헌법 제18조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가 대선 후보가 되었을 때, 어느 파벌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최적의 타협 카드'가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13]
의정 활동에서의 빈약한 존재감과는 대조적으로, 하딩은 워싱턴 D.C.의 밤 문화와 사교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키가 크고 늠름한 체격에,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은발, 그리고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따뜻한 눈빛을 가진 '미중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동료 의원들과 포커를 치며 밤을 새우는 것을 즐겼고, 골프장에서는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어울리며 특유의 친화력을 뽐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의 사생활이 걷잡을 수 없이 문란해졌다는 점이다. 고향 매리언에서부터 이어져 온 캐리 필립스와의 불륜 관계는 워싱턴에서도 지속되었고, 심지어 친구의 딸인 난 브리튼(Nan Britton)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딩은 상원 의원실을 밀회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백악관 내 벽장을 밀회 장소로 썼다는 악명 높은 스캔들의 전초전이었다.
하딩이 상원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정치적 매니저'인 해리 도허티는 하딩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밑그림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의 상원 의원직을 하나의 '전시용 경력'으로 활용했다.
그는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하딩을 소개하며 "이 남자는 당신들의 말을 아주 잘 들을 준비가 된,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완벽한 대통령의 얼굴을 한 인물"임을 어필했다. 하딩 본인은 대통령직에 큰 야심이 없었으나, 도허티와 아내 플로렌스 하딩의 압박에 떠밀려 조금씩 권력의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하딩의 주변에는 고향 오하이오 출신의 수완가와 사기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 하딩 행정부를 파멸로 몰고 갈 '오하이오 갱'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하딩의 상원 시절은 '이미지 정치가 실질적인 능력보다 우선시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상원에서 그 어떤 정책적 성취도 이루지 못했으나, 단지 '사람이 좋다'는 이유와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강력한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도로 피로해진 미국인들이 복잡한 정책이나 강한 카리스마보다는, 그저 편안하고 익숙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지도자를 원했다는 시대적 결핍의 산물이기도 했다. 하딩은 상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높였다.
하딩은 상원에 입성한 후 6년 동안 단 한 건의 주요 법안도 주도적으로 발의하거나 통과시키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그가 게을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는 이미지'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논쟁적인 법안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누군가와는 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극도로 꺼렸다.
당시 상원의 동료들은 그를 "매우 품위 있고 잘생긴, 하지만 내용물은 없는 신사"라고 평가했다. 그는 위원회 활동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그가 속했던 상원 외교위원회에서도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국제주의를 비판하는 공화당 주류의 목소리에 그저 조용히 표를 던질 뿐, 자신의 독자적인 외교 철학을 설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상원은 국가를 혁신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인맥을 전국구로 넓히는 거대한 사교 클럽에 가까웠다.
하딩의 '무색무취'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지점은 당시 미국의 거대한 시대적 과제였던 여성 참정권과 금주법 문제였다. 이 이슈들은 당시 정치인들에게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가는 반대파의 거센 공격을 받아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딩은 이 문제들에 대해 철저하게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뒤 다수당의 입장에 편승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대세가 찬성으로 기울자 비로소 목소리를 냈으며, 금주법 역시 개인적으로는 술을 매우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수정헌법 제18조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가 대선 후보가 되었을 때, 어느 파벌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최적의 타협 카드'가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13]
의정 활동에서의 빈약한 존재감과는 대조적으로, 하딩은 워싱턴 D.C.의 밤 문화와 사교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키가 크고 늠름한 체격에,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은발, 그리고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따뜻한 눈빛을 가진 '미중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동료 의원들과 포커를 치며 밤을 새우는 것을 즐겼고, 골프장에서는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어울리며 특유의 친화력을 뽐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의 사생활이 걷잡을 수 없이 문란해졌다는 점이다. 고향 매리언에서부터 이어져 온 캐리 필립스와의 불륜 관계는 워싱턴에서도 지속되었고, 심지어 친구의 딸인 난 브리튼(Nan Britton)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딩은 상원 의원실을 밀회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백악관 내 벽장을 밀회 장소로 썼다는 악명 높은 스캔들의 전초전이었다.
하딩이 상원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정치적 매니저'인 해리 도허티는 하딩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밑그림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의 상원 의원직을 하나의 '전시용 경력'으로 활용했다.
그는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하딩을 소개하며 "이 남자는 당신들의 말을 아주 잘 들을 준비가 된,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완벽한 대통령의 얼굴을 한 인물"임을 어필했다. 하딩 본인은 대통령직에 큰 야심이 없었으나, 도허티와 아내 플로렌스 하딩의 압박에 떠밀려 조금씩 권력의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하딩의 주변에는 고향 오하이오 출신의 수완가와 사기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 하딩 행정부를 파멸로 몰고 갈 '오하이오 갱'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하딩의 상원 시절은 '이미지 정치가 실질적인 능력보다 우선시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상원에서 그 어떤 정책적 성취도 이루지 못했으나, 단지 '사람이 좋다'는 이유와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강력한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도로 피로해진 미국인들이 복잡한 정책이나 강한 카리스마보다는, 그저 편안하고 익숙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지도자를 원했다는 시대적 결핍의 산물이기도 했다. 하딩은 상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높였다.
2.9. 1920년 공화당 경선[편집]
"우리는 이 교착 상태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는 적이 없어야 하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바로 워런 하딩입니다."[14]
1920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비민주적'이라고 비판받는 밀실 합의의 현장이었다.
192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의 승리는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국제연맹 가입 실패 등으로 인해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개나 소나 공화당 후보로만 나가면 당선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기에, 공화당 내 경선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당시 유력한 후보는 세 명이었다.
- 레너드 우드(Leonard Wood) 장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절친이자 전쟁 영웅. 보수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지나치게 군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K프랭크 로든(Frank Lowden): 일리노이 주지사.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자금 출처와 관련된 스캔들 의혹이 발목을 잡았다.
- 하이어럼 존슨: 캘리포니아 출신의 진보파 상원의원. 강력한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으나 당내 주류(Old Guard)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다.
하딩은 당시만 해도 그는 '다크호스'조차 아닌 '아웃오브안중'에 가까웠다. 그의 전략가 해리 도허티만이 "결국 거물들이 서로 싸우다 지치면 하딩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며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6월 8일 시작된 투표는 예상대로 난항이었다. 우드와 로든이 1, 2위를 다퉜지만, 누구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투표가 거듭될수록 후보들 간의 감정 골은 깊어졌고, 대의원들은 시카고의 무더위와 피로에 지쳐갔다.
1차 투표: 우드 287.5표, 로든 211.5표, 존슨 133.5표... 하딩은 고작 65.5표에 불과했다.
4차 투표까지: 순위 변동은 거의 없었다. 하딩의 표수는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이때 하딩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그는 오하이오로 돌아가 상원의원 재선이나 준비하려 했으나, 도허티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연기 자욱한 방'이 열릴 시간이 왔다"며 그를 붙잡았다.
6월 11일 밤, 시카고의 블랙스톤 호텔 404호실. 공화당의 실세인 상원의원들과 당 지도부 '올드 가드(Old Guard)'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방 안은 그들이 피워대는 시가 연기로 가득 찼고, 여기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이 장면은 훗날 '밀실 정치'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된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우드와 로든은 서로 죽어도 양보 안 한다. 존슨은 너무 급진적이라 통제가 안 된다. 그렇다면 말 잘 듣고, 인물 좋고, 적당히 보수적이어서 우리가 다루기 쉬운 놈이 누구냐?"
그 결과 낙점된 인물이 바로 워런 하딩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았고, 외모만큼은 당대 최고였기에 유권자들에게 먹힐 '상품성'이 충분했다. 지도부는 하딩을 불러 마지막 검증을 했다. "자네의 과거에 우리가 모르는 치명적인 스캔들이 있나?" 하딩은 잠시 고민하더니 "없다"고 답했다.[15]
다음 날인 6월 12일, 9차 투표부터 기류가 급변했다. 당 지도부의 지령을 받은 대의원들이 일제히 하딩에게 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9차 투표: 하딩이 374표를 얻으며 단숨에 1위로 올라섰다.
10차 투표: 마침내 692.5표를 획득,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현장은 난리가 났다. 듣보잡에 가깝던 하딩이 후보가 되자 진보파 대의원들은 "의회 과두정치의 승리"라며 분노했다. 하지만 이미 판은 짜여 있었고, 부통령 후보로는 보수파의 구미에 맞는 캘빈 쿨리지가 지명되면서 '하딩-쿨리지' 조합이 완성되었다.
공화당 지도부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꼭두각시'를 원했다. 하딩은 그 역할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이 '연기 자욱한 방'에서의 결정은 하딩에게 백악관 열쇠를 쥐여주었지만, 동시에 그가 평생 '지도부의 꼭두각시' 혹은 '친구들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리더'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저주가 되었다. 또한, 이때 하딩이 숨겼던 사생활의 비밀들은 훗날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내내 시한폭탄처럼 그의 목을 조여오게 된다.
2.10. 대통령 시기[편집]
2.10.1. 내각 구성의 명암[편집]
하딩 행정부의 내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기묘한 조합 중 하나였다. 하딩은 당선 직후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불러 모으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일부 부처에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을 배치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오하이오에서 함께 포커를 치고 술을 마시던 '동네 형님'들을 요직에 박아 넣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이 극단적인 대조는 하딩 행정부를 번영의 주역인 동시에 부패의 온상으로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하딩이 임명한 인물들 중 일부는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유능한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하딩의 부족한 정책적 식견을 보완하며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황금기를 설계했다.
하딩이 임명한 인물들 중 일부는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유능한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하딩의 부족한 정책적 식견을 보완하며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황금기를 설계했다.
- 앤드루 멜런 (재무장관): 당대 미국 최고의 재벌 중 한 명이었던 멜런은 '멜런 계획'이라 불리는 급진적인 감세 정책을 추진했다. 고소득층의 세율을 낮추어 투자를 유도하는 낙수 효과의 시초 격인 인물로, 하딩 행정부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한다. 그는 하딩 사후에도 쿨리지, 후버 행정부까지 장관직을 유지하며 1920년대 미국의 경제 정책을 지배했다.
- 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 전직 대법관이자 1916년 대선 후보였던 거물급 정치인이다. 하딩은 외교 문외한이었기에 휴즈에게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했고, 휴즈는 '워싱턴 해군 군비 제한 회의'를 성공시키며 하딩에게 최대의 외교적 치적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하딩이 '능력'만큼이나 '의리'를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적인 공직을 사적인 친목의 보상으로 활용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하딩의 정치적 무덤이 되었다.
- 해리 도허티 (법무장관): 하딩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자 킹메이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뒷골목 정치꾼'이었다. 법을 수호해야 할 법무장관 자리에 앉아 뇌물을 받고 사면권을 남발하거나 금주법 위반자들을 뒤에서 봐주는 등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하딩은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측근들의 배신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는 적들과는 잘 싸울 수 있소. 하지만 나의 이 '빌어먹을 친구들'은 밤낮으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구려"라고 토로했다.
그는 내각을 구성할 때 인물의 도덕성보다는 자신과의 친밀도를 우선시했다. 유능한 인재들을 배치해놓고도, 정작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이들은 오하이오 출신의 부패한 측근들이었다. 이들은 하딩이 백악관 뒤뜰에서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칠 때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대통령의 권위를 갉아먹었다. 나무위키적으로 표현하자면, '유능한 팀원들을 뽑아놓고 빌런급 운영진에게 운영권을 맡겨 게임을 터뜨린' 꼴이다.
하딩 행정부의 내각 회의는 종종 공식적인 자리보다 사적인 포커 판에서 이루어졌다. 하딩은 '포커 캐비닛'이라 불리는 비공식 모임을 주도했는데, 여기서 국가의 중요 인사가 논의되기도 했다. 이는 윌슨 시절의 경직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으나,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상무장관 후버나 국무장관 휴즈 같은 '정통파' 관료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반면 도허티나 폴 같은 '오하이오 갱'들은 이 느슨한 틈을 타 국가 예산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옮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딩은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보다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그 유약함이 결국 행정부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
하딩의 내각 구성은 오늘날까지도 인사 행정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연구된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후버, 멜런)를 기용하더라도, 핵심 권력층에 부패한 인물(도허티, 폴)이 포진해 있다면 그 행정부의 성과는 퇴색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10.2. 임기 후반의 정신적 충격[편집]
역사상 수많은 미국 대통령들이 직무의 중압감을 토로해 왔지만, 워런 G. 하딩만큼 그 고통을 가감 없이,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낸 인물은 드물다. 임기 초반, 압도적인 지지율과 '미남 대통령'이라는 찬사 속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임기 2년 차에 접어들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국가 기구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버렸음을 직감했다. 이 챕터에서는 하딩이 느꼈던 지적 자괴감과 측근들의 배신으로 인한 심리적 붕괴 과정을 다룬다.
하딩은 본래 야심가라기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갈등을 혐오했으며, 모두와 친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매 순간 누군가의 적이 되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딩은 사석에서 친구들에게 "나는 이 직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중얼거렸다.[18]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복잡한 정책 결정 과정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재건과 관세 문제, 복잡한 국제 관계는 신문 발행인 출신인 그의 지적 역량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보좌관에게 "세상에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소. 관세 문제만 해도 그렇소. 한쪽 말을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반대쪽 말을 들으면 또 그게 맞는 것 같으니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하딩의 비극은 그가 신뢰했던 '친구'들이 그의 무능과 방임을 틈타 국가를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른바 '오하이오 갱'이라 불리는 그의 측근들은 백악관 근처 'K 스트리트의 집'에 모여 뇌물을 받고 이권을 팔아치웠다.
1923년 초, 티팟 돔 스캔들의 전말이 조금씩 드러나고 참전용사국장 찰스 포브스의 횡령이 발각되자 하딩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정적(政敵)들에게는 담담했지만,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에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임기 후반의 하딩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였다. 그는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이를 잊기 위해 더 많은 술과 포커 게임에 매달렸다. 금주법 시대였음에도 백악관 내에서 공공연히 술판이 벌어졌던 것은 하딩이 처한 심리적 도피처가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영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의 이러한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엄격하게 그를 통제하려 했고, 이는 하딩에게 또 다른 압박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사생활(불륜과 혼외자 문제)이 언론에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나나 브리튼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에 대한 양육비 문제와 캐리 필립스의 끊임없는 협박은 대통령으로서의 공적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소였다.
하딩이 내세운 '정상 상태(Normalcy)'는 국민에게는 평온을 약속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비정상적인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포진한 내각(허버트 후버, 찰스 에반스 휴즈 등) 사이에서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학자 출신인 전임자 우드로 윌슨과 비교되는 상황 역시 그를 위축시켰다. 윌슨이 고결한 이상주의로 비판받았다면, 하딩은 천박한 실용주의자로 매도당했다. 하딩은 대중 앞에서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해 연설했지만, 정작 그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른바 '하딩어(Hardingese)'라 불리는 모호한 화법)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지적 한계를 절감하며 괴로워했다.
하딩은 본래 야심가라기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갈등을 혐오했으며, 모두와 친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매 순간 누군가의 적이 되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딩은 사석에서 친구들에게 "나는 이 직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중얼거렸다.[18]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복잡한 정책 결정 과정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재건과 관세 문제, 복잡한 국제 관계는 신문 발행인 출신인 그의 지적 역량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보좌관에게 "세상에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소. 관세 문제만 해도 그렇소. 한쪽 말을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반대쪽 말을 들으면 또 그게 맞는 것 같으니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하딩의 비극은 그가 신뢰했던 '친구'들이 그의 무능과 방임을 틈타 국가를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른바 '오하이오 갱'이라 불리는 그의 측근들은 백악관 근처 'K 스트리트의 집'에 모여 뇌물을 받고 이권을 팔아치웠다.
1923년 초, 티팟 돔 스캔들의 전말이 조금씩 드러나고 참전용사국장 찰스 포브스의 횡령이 발각되자 하딩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정적(政敵)들에게는 담담했지만,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에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임기 후반의 하딩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였다. 그는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이를 잊기 위해 더 많은 술과 포커 게임에 매달렸다. 금주법 시대였음에도 백악관 내에서 공공연히 술판이 벌어졌던 것은 하딩이 처한 심리적 도피처가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영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의 이러한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엄격하게 그를 통제하려 했고, 이는 하딩에게 또 다른 압박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사생활(불륜과 혼외자 문제)이 언론에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나나 브리튼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에 대한 양육비 문제와 캐리 필립스의 끊임없는 협박은 대통령으로서의 공적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소였다.
하딩이 내세운 '정상 상태(Normalcy)'는 국민에게는 평온을 약속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비정상적인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포진한 내각(허버트 후버, 찰스 에반스 휴즈 등) 사이에서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학자 출신인 전임자 우드로 윌슨과 비교되는 상황 역시 그를 위축시켰다. 윌슨이 고결한 이상주의로 비판받았다면, 하딩은 천박한 실용주의자로 매도당했다. 하딩은 대중 앞에서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해 연설했지만, 정작 그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른바 '하딩어(Hardingese)'라 불리는 모호한 화법)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지적 한계를 절감하며 괴로워했다.
2.10.3. 운명의 서부 여행[편집]
1923년 초여름, 워런 G. 하딩의 정신과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측근들이 저지른 티팟 돔 스캔들의 구린내가 백악관 집무실까지 스며들고 있었고, 믿었던 친구들의 배신을 하나둘 확인하며 그는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나는 내 적들은 다룰 수 있지만, 내 친구들은 밤새도록 나를 걷게 만든다"는 그의 탄식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딩은 교착 상태에 빠진 정국을 타개하고, 하락하는 지지율을 회복하며, 다가올 1924년 대선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전국 순회 유세를 기획한다. 이름하여 '이해의 여행(Voyage of Understanding)'. 워싱턴 D.C.를 떠나 미 대륙을 가로질러 알래스카까지 다녀오는,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장거리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에게 정치적 부활이 아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는 '사망으로의 행진'이 되고 말았다.
1923년 6월 20일, 하딩 일행은 대통령 전용 열차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출발 직전 하딩은 평소답지 않게 매우 수척하고 안색이 어두웠다고 한다. 그는 유언장을 정리하고 재산을 신탁에 맡기는 등,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한 듯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아내 플로렌스 하딩은 만성 신장 질환으로 이미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들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곁을 지키겠다며 동행을 강행했다. 당시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 부부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일정을 축소할 것을 건의했으나, 하딩은 "국민들을 직접 만나 오해를 풀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19]
열차는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덴버, 솔트레이크시티를 차례로 통과했다. 가는 곳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하딩은 특유의 화려한 웅변술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겉으로는 화려한 환호의 연속이었지만, 열차 안에서의 실상은 처참했다.
하딩은 하루에만 7~8번의 연설을 소화해야 했으며, 뙤약볕 아래서 카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캔자스시티를 지날 무렵부터 하딩은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주치의였던 찰스 소이어(Charles E. Sawyer)[20]는 이를 단순한 '식중독'이나 '피로 누적'으로 오진하여 사태를 키웠다.
하딩은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도 쉬지 못했다. 그는 비서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특히 알래스카의 자원 개발과 행정 체계에 대해 집요하게 공부했다. 이는 단순히 유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워싱턴의 정치 스캔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7월 5일, 하딩은 해군 수송선 '헨더슨 호'를 타고 알래스카로 향했다.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알래스카 방문이었다. 그는 앵커리지와 페어뱅크스를 방문하며 주민들의 고충을 청취했고, 알래스카 철도 완공식에서 마지막 황금 대못을 박기도 했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서늘한 기후도 그의 타들어 가는 심장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하딩은 골프 채를 휘두를 기력조차 없었으며, 얼굴은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알래스카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허버트 후버(당시 상무장관)를 따로 불러 "자네라면 친구가 배신했을 때 어떻게 하겠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후버가 "즉시 폭로해야 한다"고 답하자, 하딩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1]
7월 말, 알래스카 일정을 마치고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하딩은 이미 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시애틀 연설 도중 그는 말을 더듬거나 연설 원고를 떨어뜨리는 등 평소의 그답지 않은 실수를 연발했다. 결국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되었고, 대통령 전용 열차는 황급히 남쪽인 샌프란시스코로 기수를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하딩은 교착 상태에 빠진 정국을 타개하고, 하락하는 지지율을 회복하며, 다가올 1924년 대선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전국 순회 유세를 기획한다. 이름하여 '이해의 여행(Voyage of Understanding)'. 워싱턴 D.C.를 떠나 미 대륙을 가로질러 알래스카까지 다녀오는,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장거리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에게 정치적 부활이 아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는 '사망으로의 행진'이 되고 말았다.
1923년 6월 20일, 하딩 일행은 대통령 전용 열차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출발 직전 하딩은 평소답지 않게 매우 수척하고 안색이 어두웠다고 한다. 그는 유언장을 정리하고 재산을 신탁에 맡기는 등,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한 듯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아내 플로렌스 하딩은 만성 신장 질환으로 이미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들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곁을 지키겠다며 동행을 강행했다. 당시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 부부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일정을 축소할 것을 건의했으나, 하딩은 "국민들을 직접 만나 오해를 풀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19]
열차는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덴버, 솔트레이크시티를 차례로 통과했다. 가는 곳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하딩은 특유의 화려한 웅변술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겉으로는 화려한 환호의 연속이었지만, 열차 안에서의 실상은 처참했다.
하딩은 하루에만 7~8번의 연설을 소화해야 했으며, 뙤약볕 아래서 카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캔자스시티를 지날 무렵부터 하딩은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주치의였던 찰스 소이어(Charles E. Sawyer)[20]는 이를 단순한 '식중독'이나 '피로 누적'으로 오진하여 사태를 키웠다.
하딩은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도 쉬지 못했다. 그는 비서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특히 알래스카의 자원 개발과 행정 체계에 대해 집요하게 공부했다. 이는 단순히 유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워싱턴의 정치 스캔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7월 5일, 하딩은 해군 수송선 '헨더슨 호'를 타고 알래스카로 향했다.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알래스카 방문이었다. 그는 앵커리지와 페어뱅크스를 방문하며 주민들의 고충을 청취했고, 알래스카 철도 완공식에서 마지막 황금 대못을 박기도 했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서늘한 기후도 그의 타들어 가는 심장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하딩은 골프 채를 휘두를 기력조차 없었으며, 얼굴은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알래스카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허버트 후버(당시 상무장관)를 따로 불러 "자네라면 친구가 배신했을 때 어떻게 하겠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후버가 "즉시 폭로해야 한다"고 답하자, 하딩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1]
7월 말, 알래스카 일정을 마치고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하딩은 이미 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시애틀 연설 도중 그는 말을 더듬거나 연설 원고를 떨어뜨리는 등 평소의 그답지 않은 실수를 연발했다. 결국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되었고, 대통령 전용 열차는 황급히 남쪽인 샌프란시스코로 기수를 돌렸다.
2.11.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급사[편집]
"그것 참 좋구려. 더 읽어주시오."[22]
--- 워런 G. 하딩의 마지막 말
1923년 8월 2일 저녁 7시 30분경,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 806호실. 미국 제29대 대통령 워런 G. 하딩은 재임 중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음모론을 양산한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서부 유세 여행인 '이해의 여행(Voyage of Understanding)' 도중 하딩의 건강은 이미 최악의 상태였다. 알래스카 방문 당시부터 그는 심한 피로감과 가슴 통증을 호소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의료진은 식중독이나 가벼운 유행성 독감이라고 발표하며 민심을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심각한 심혈관 질환이 진행 중이었다.
8월 2일 저녁, 상태가 호전되는 듯 보였던 하딩은 침대에 기대어 부인 플로렌스가 읽어주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기사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몸을 떨며 쓰러졌고, 의료진이 급히 달려왔으나 이미 심장은 멈춘 뒤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졸중(Apoplexy)으로 발표되었으나, 나중에는 심장마비로 정정되었다.
하딩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는 의혹은 장례식의 향불이 꺼지기도 전에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부검 거부는 가장 큰 의혹의 불씨였다. 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이 사망하자마자 부검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대통령의 급사라는 중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즉시 방부 처리되었고, 이는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하딩은 측근들의 부패(티팟 돔 스캔들 등)를 보고받고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일설에는 하딩이 워싱턴으로 돌아가면 비리 연루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측근들이 그를 제거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하딩의 주치의였던 찰스 소여(Charles E. Sawyer)는 전문적인 심장학 지식이 부족한 동종요법 의사였다. 그는 하딩의 심각한 심장 신호를 식중독으로 오진하여 치명적인 약물을 처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음모론을 대중화시킨 결정타는 1930년 가스톤 민스(Gaston Means)가 출간한 저서 《하딩의 기묘한 죽음(The Strange Death of President Harding)》이었다. 민스는 이 책에서 "플로렌스 하딩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민스의 주장에 따르면, 플로렌스는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와 혼외자 문제에 분노해 있었고, 남편이 탄핵당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23]
21세기 의학계는 하딩의 사인을 음모론이 아닌 '고혈압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으로 확신하는 분위기다. 하딩의 증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윌슨 시절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하딩은 무리한 유세 일정을 소화했다.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은 50대 중반의 심혈관 질환자에게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딩은 극심한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에 시달렸는데, 이는 심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요인이다. 당시 그는 잠잘 때 앉아서 자야 할 정도로 숨이 찼다고 전해진다.
친구들의 배신(부패 스캔들)은 하딩의 멘탈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는 여행 중에도 "내 적들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나를 밤새 잠 못 들게 한다"며 괴로워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쿨리지는 하딩과는 정반대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과 과묵함으로 하딩이 망쳐놓은 공화당의 이미지를 수습하게 된다.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이 죽은 뒤 하딩의 개인 서신과 일기 상당수를 소각해 버렸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불륜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설과, 정치적 비리를 덮으려 했다는 설 양쪽 모두의 근거가 된다.
하딩의 장례 열차는 서부에서 워싱턴까지 대륙을 횡단했는데,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선로 주변에 모여 통곡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은 그를 '순직한 성군'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훗날 스캔들이 터지며 이 애도는 분노와 조롱으로 변하게 된다.
1923년 8월 2일 저녁 7시 30분경,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 806호실. 미국 제29대 대통령 워런 G. 하딩은 재임 중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음모론을 양산한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서부 유세 여행인 '이해의 여행(Voyage of Understanding)' 도중 하딩의 건강은 이미 최악의 상태였다. 알래스카 방문 당시부터 그는 심한 피로감과 가슴 통증을 호소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의료진은 식중독이나 가벼운 유행성 독감이라고 발표하며 민심을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심각한 심혈관 질환이 진행 중이었다.
8월 2일 저녁, 상태가 호전되는 듯 보였던 하딩은 침대에 기대어 부인 플로렌스가 읽어주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기사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몸을 떨며 쓰러졌고, 의료진이 급히 달려왔으나 이미 심장은 멈춘 뒤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졸중(Apoplexy)으로 발표되었으나, 나중에는 심장마비로 정정되었다.
하딩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는 의혹은 장례식의 향불이 꺼지기도 전에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부검 거부는 가장 큰 의혹의 불씨였다. 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이 사망하자마자 부검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대통령의 급사라는 중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즉시 방부 처리되었고, 이는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하딩은 측근들의 부패(티팟 돔 스캔들 등)를 보고받고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일설에는 하딩이 워싱턴으로 돌아가면 비리 연루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측근들이 그를 제거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하딩의 주치의였던 찰스 소여(Charles E. Sawyer)는 전문적인 심장학 지식이 부족한 동종요법 의사였다. 그는 하딩의 심각한 심장 신호를 식중독으로 오진하여 치명적인 약물을 처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음모론을 대중화시킨 결정타는 1930년 가스톤 민스(Gaston Means)가 출간한 저서 《하딩의 기묘한 죽음(The Strange Death of President Harding)》이었다. 민스는 이 책에서 "플로렌스 하딩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민스의 주장에 따르면, 플로렌스는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와 혼외자 문제에 분노해 있었고, 남편이 탄핵당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23]
21세기 의학계는 하딩의 사인을 음모론이 아닌 '고혈압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으로 확신하는 분위기다. 하딩의 증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윌슨 시절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하딩은 무리한 유세 일정을 소화했다.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은 50대 중반의 심혈관 질환자에게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딩은 극심한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에 시달렸는데, 이는 심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요인이다. 당시 그는 잠잘 때 앉아서 자야 할 정도로 숨이 찼다고 전해진다.
친구들의 배신(부패 스캔들)은 하딩의 멘탈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는 여행 중에도 "내 적들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나를 밤새 잠 못 들게 한다"며 괴로워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쿨리지는 하딩과는 정반대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과 과묵함으로 하딩이 망쳐놓은 공화당의 이미지를 수습하게 된다.
플로렌스 하딩은 남편이 죽은 뒤 하딩의 개인 서신과 일기 상당수를 소각해 버렸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불륜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설과, 정치적 비리를 덮으려 했다는 설 양쪽 모두의 근거가 된다.
하딩의 장례 열차는 서부에서 워싱턴까지 대륙을 횡단했는데,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선로 주변에 모여 통곡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은 그를 '순직한 성군'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훗날 스캔들이 터지며 이 애도는 분노와 조롱으로 변하게 된다.
2.12. 사후[편집]
하딩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사했을 때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의 장례 열차가 대륙을 횡단할 때 연도에 모인 수백만 명의 시민은 "친절하고 따뜻했던 우리 대통령"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인 1924년부터, 백악관의 두꺼운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추잡하고 거대한 진실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몰락을 넘어, 미국 국민이 정부와 공직자에 대해 가졌던 근본적인 신뢰를 송두리째 뿌리 뽑은 대사건이었다.
가장 먼저 터진 것은 이른바 티팟 돔 스캔들이었다. 하딩이 가장 신임하여 내무장관으로 앉혔던 앨버트 폴(Albert Fall)이 해군 비축유 기지를 민간 석유 회사에 불법적으로 임대해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의회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미국 역사상 내각 각료가 최초로 감옥에 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설마 우리 대통령이 이런 도둑놈들과 한패였단 말인가?"라며 경악했다. 하딩 본인이 직접 돈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이 비리를 알고도 묵인했거나 혹은 무능해서 전혀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 미달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하딩의 사후, 그가 요직에 앉혔던 고향 친구들인 이른바 오하이오 갱의 행각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해리 도허티는 금주법 시대에 금지된 술을 빼돌려 팔거나, 사법권을 이용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찰스 포브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위해 책정된 막대한 예산을 횡령하고 병원 물자를 빼돌렸다. 하딩은 죽기 직전 포브스의 배신을 알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분노했다고 전해지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들은 밤마다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함께 포커를 치며 나랏일을 주무르는 '비선 실세' 노릇을 했음이 밝혀졌다.
정치적 스캔들보다 대중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하딩의 문란한 사생활이었다. 1927년, 하딩의 내연녀였던 난 브리튼(Nan Britton)이 《대통령의 딸(The President's Daughter)》이라는 폭로 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하딩과의 사이에서 혼외자를 낳았으며, 심지어 백악관의 좁은 옷장 안에서 대통령과 밀회를 즐겼다고 주장했다.[24]
여기에 또 다른 내연녀 캐리 필립스(Carrie Phillips)와의 15년에 걸친 불륜 행각과 그녀가 하딩을 협박해 입막음 비용을 뜯어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자상한 남편'이었던 하딩의 이미지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망 후 몇 년간 서점가는 하딩을 비난하거나 그의 추문을 폭로하는 책들로 도배되었다. 특히 가스톤 민스의 《하딩의 기묘한 죽음》은 "하딩 부인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자극적인 허구와 진실을 교묘히 섞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치권에서도 하딩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공화당은 하딩과의 선긋기에 급급했고, 후임자인 캘빈 쿨리지는 하딩과는 정반대의 결벽증적인 청렴함을 강조하며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한때 "링컨 이후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이었던 하딩은, 단 5년 만에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전락했다.
하딩의 평판이 유독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그가 가졌던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도덕적 타락을 치유해 줄 '정상화'의 기수로 믿었으나, 정작 본인이 가장 타락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나자 대중의 사랑은 증오로 변했다.
부인 플로렌스 하딩이 남편 사후에 서신들을 대량으로 소각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태울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저러느냐"는 의구심만 증폭시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들이 사실로 굳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몰락을 넘어, 미국 국민이 정부와 공직자에 대해 가졌던 근본적인 신뢰를 송두리째 뿌리 뽑은 대사건이었다.
가장 먼저 터진 것은 이른바 티팟 돔 스캔들이었다. 하딩이 가장 신임하여 내무장관으로 앉혔던 앨버트 폴(Albert Fall)이 해군 비축유 기지를 민간 석유 회사에 불법적으로 임대해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의회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미국 역사상 내각 각료가 최초로 감옥에 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설마 우리 대통령이 이런 도둑놈들과 한패였단 말인가?"라며 경악했다. 하딩 본인이 직접 돈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이 비리를 알고도 묵인했거나 혹은 무능해서 전혀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 미달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하딩의 사후, 그가 요직에 앉혔던 고향 친구들인 이른바 오하이오 갱의 행각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해리 도허티는 금주법 시대에 금지된 술을 빼돌려 팔거나, 사법권을 이용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찰스 포브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위해 책정된 막대한 예산을 횡령하고 병원 물자를 빼돌렸다. 하딩은 죽기 직전 포브스의 배신을 알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분노했다고 전해지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들은 밤마다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함께 포커를 치며 나랏일을 주무르는 '비선 실세' 노릇을 했음이 밝혀졌다.
정치적 스캔들보다 대중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하딩의 문란한 사생활이었다. 1927년, 하딩의 내연녀였던 난 브리튼(Nan Britton)이 《대통령의 딸(The President's Daughter)》이라는 폭로 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하딩과의 사이에서 혼외자를 낳았으며, 심지어 백악관의 좁은 옷장 안에서 대통령과 밀회를 즐겼다고 주장했다.[24]
여기에 또 다른 내연녀 캐리 필립스(Carrie Phillips)와의 15년에 걸친 불륜 행각과 그녀가 하딩을 협박해 입막음 비용을 뜯어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자상한 남편'이었던 하딩의 이미지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망 후 몇 년간 서점가는 하딩을 비난하거나 그의 추문을 폭로하는 책들로 도배되었다. 특히 가스톤 민스의 《하딩의 기묘한 죽음》은 "하딩 부인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자극적인 허구와 진실을 교묘히 섞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치권에서도 하딩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공화당은 하딩과의 선긋기에 급급했고, 후임자인 캘빈 쿨리지는 하딩과는 정반대의 결벽증적인 청렴함을 강조하며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한때 "링컨 이후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이었던 하딩은, 단 5년 만에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전락했다.
하딩의 평판이 유독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그가 가졌던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도덕적 타락을 치유해 줄 '정상화'의 기수로 믿었으나, 정작 본인이 가장 타락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나자 대중의 사랑은 증오로 변했다.
부인 플로렌스 하딩이 남편 사후에 서신들을 대량으로 소각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태울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저러느냐"는 의구심만 증폭시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들이 사실로 굳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3. 평가[편집]
하딩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평가의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당대에는 '링컨에 비견되는 자애로운 지도자'로 추앙받으며 눈물 속에 떠나보냈으나, 사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미국사 최악의 오점'으로 낙인찍혔다. 그의 평가는 "개인적인 선량함이 정치적 무능과 결합했을 때 국가에 어떤 재앙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로 인용된다.
"하딩은 최악의 대통령이었을지 모르나, 결코 최악의 정치가인 것은 아니었다." [25]
오랫동안 워런 G. 하딩은 미국 역사학계에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이자, 무능의 고유명사로 통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하딩의 사적인 서신들이 공개되고, 1920년대 경제 및 외교 정책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하딩을 무조건 '꼴찌'로 박아두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하딩 재평가론(Revisionism)의 등장이다.
하딩을 옹호하는 측에서 가장 먼저 내세우는 지표는 바로 경제다. 우드로 윌슨 임기 말기의 미국은 전후 불황과 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하딩은 취임 직후 앤드루 멜런을 재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과감한 감세와 정부 지출 삭감을 단행했다. 그 결과 1921년의 전후 공황은 짧게 끝났고, 미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기인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로 진입하게 된다.
이전까지 미국의 예산은 각 부처가 중구난방으로 요청하는 식이었으나, 하딩은 예산 및 회계법을 통과시켜 대통령 직속의 예산국(Bureau of the Budget)을 설치했다. 이는 현대 미국의 효율적인 예산 관리 체계를 만든 '신화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윌슨 행정부 시절 '간첩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던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Eugene V. Debs)를 사면한 것도 하딩이었다. 그는 "그가 믿는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를 감옥에 가둬두는 것은 미국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하딩이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는 통념과 달리, 그는 국제 평화 유지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전 세계 강대국들을 워싱턴으로 불러 모아 주력함의 비율을 강제로 제한한 이 회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군비 축소 사례다. 이를 통해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고 영미권의 군사적 마찰을 줄이는 등, 최소한 10년 이상의 평화를 강제로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하딩의 순위가 오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인사 관리의 대실패와 도덕적 신뢰의 붕괴 때문이다.
훌륭한 비전을 제시하고 유능한 인재(후버, 멜런 등)를 기용할 줄은 알았으나, 정작 본인의 친구들이 국가 기금을 빼돌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무위키식 비유를 들자면, '유능한 실무진을 앉혀놓고 본인은 뒷방에서 친구들과 도박하며 사고를 방치한 사장님'인 셈이다.
티팟 돔 스캔들이 워낙 거대했던 데다, 사후 터져 나온 난 브리튼과의 불륜 및 혼외자 논란이 '대통령'이라는 직위의 엄숙함을 완전히 파괴했다. 미국인들에게 대통령은 곧 국가의 도덕적 상징인데, 하딩은 그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최근의 역사적 통계(예: C-SPAN 대통령 평가)에서 하딩은 조금씩 최하위권을 벗어나고 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40위권 밖이었으나, 최근에는 30위 중반대까지 소폭 상승하기도 했다.
재평가의 핵심은 "하딩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특정 분야에서는 훌륭한 성과를 냈으나,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기에는 개인적인 기량과 주변 환경이 너무나 나약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악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위험한 친구들'과 함께 백악관에 들어간 비운의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딩은 '이웃집 아저씨로서는 최고였으나, 제국의 통치자로서는 최악이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타인의 호감을 사는 법을 알았고, 갈등을 중재하는 유연함을 갖췄지만, 거대한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거나 부패를 뿌리 뽑을 만큼의 강인한 의지는 없었다.
3.1. 경제 정책[편집]
"정부 내에 사업(Business)이 더 많이 필요하고, 사업 내에 정부(Government)는 더 적게 필요하다."[26]
하딩 행정부의 경제 정책은 한 마디로 '철저한 기업 친화적 보수주의'로 요약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은 전시 경제에서 평시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상승이라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하딩은 윌슨 행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높은 세금이 경제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경제 브레인들을 내각에 배치했다.
하딩은 경제 정책의 집행을 위해 두 명의 거물을 임명했다. 한 명은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이었고, 다른 한 명은 상무장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였다.
이들의 조합은 하딩의 '정상 상태로의 복귀'를 경제적 실체로 만드는 핵심 동력이었다.
1922년 제정된 이 법안은 하딩 경제 정책의 가장 상징적인 조치 중 하나였다. 하딩은 미국 농민들과 제조업자들을 해외 저가 제품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법을 통해 미국의 관세율은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는 단기적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전후 불황을 타개하는 데 기여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수출하여 전쟁 채무를 갚는 길을 막아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중에게 이 보호무역주의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실천으로 비치며 큰 환영을 받았다.
멜런 재무장관의 주도하에 하딩 행정부는 파격적인 감세 정책을 밀어붙였다. 최고 소득세율을 73%에서 25% 수준까지 단계적으로 낮추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실제로 기업 가의 자본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효과를 낳았다.
놀랍게도 세금은 낮아졌지만, 정부 지출을 극도로 억제한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불어났던 국가 부채는 매년 수십억 달러씩 감소했다. 하딩은 백악관의 소소한 비용조차 아끼라고 지시할 정도로 재정 건전성에 집착했는데, 이러한 '알뜰한 정부' 이미지는 전후 물가 상승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주었다.
하딩은 친기업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노동자들의 고통을 완전히 외면한 냉혈한은 아니었다. 당시 철강 산업을 비롯한 많은 공장에서는 여전히 일일 12시간 노동이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하딩은 철강업계 거물들을 직접 백악관으로 불러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1923년, 미국의 주요 철강사들이 8시간 노동제를 전격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하딩의 부드러운 중재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비록 강제적인 법 제정은 아니었으나, 대통령이 직접 기업을 압박해 노동 환경을 개선한 드문 사례로 꼽힌다.
산업계가 호황을 누리는 동안, 미국의 농민들은 오히려 생산 과잉과 가격 폭락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하딩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 관세법'을 통과시키고 농업 금융 시스템을 정비했으나, 도시의 화려한 번영에 비하면 농촌의 몰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시기 형성된 농촌의 불만은 훗날 하딩의 공화당이 겪게 될 정치적 진통의 씨앗이 된다. 하딩은 농민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임기 말 '서부 여행'을 기획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딩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GDP는 급성장했고, 실업률은 1%대까지 떨어졌다. 자동차, 라디오,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하딩의 시대였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전쟁의 후유증을 최단기간에 극복하고 미국을 세계 최대의 부국으로 안착시켰다. 멜런의 감세와 후버의 효율성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
비판적 측면은 규제 완화와 지나친 시장 방임은 훗날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자산 거품과 소득 불평등을 야기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보호무역주의는 국제 경제 질서를 교란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딩의 경제 정책은 당대 미국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선사했다. 그가 급사했을 때 전국이 비탄에 잠겼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우리를 잘 살게 해준 대통령"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비록 그 부의 기반이 측근들의 부패와 미래의 위기를 담보로 한 것이었을지라도, 하딩 재임기의 경제 지표만큼은 그 어느 대통령보다도 찬란했다.
3.2. 워싱턴 해군 군비 제한 회의[편집]
"오늘 이 회의를 통해 인류는 전쟁의 공포로부터 한 걸음 멀어질 것입니다." — 워런 G. 하딩, 개회 연설 중.
워런 G. 하딩의 평판은 대개 국내의 부패 스캔들로 점철되어 있으나, 외교사적 관점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군비 축소'를 이끌어낸 지도자라는 매우 독특한 지위를 점한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이 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붙기 시작한 전 세계적인 해군력 경쟁을 잠재우고, 이른바 '워싱턴 해군 체제'를 구축하여 약 10년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강들은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 미국, 일본 제국 간의 해군력 경쟁은 국가 예산을 파탄 낼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우드로 윌슨 시절 수립된 '대해군 계획'에 따라 엄청난 수의 전함을 건조 중이었고, 영국은 해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소위 '8·8함대' 계획을 세워 국력의 40% 이상을 해군에 쏟아붓고 있었다.[27]
하딩은 국내 경제 회복을 위해 정부 지출을 줄여야 했고,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고립주의와 평화주의 정서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스(Charles Evans Hughes)를 필두로 하여 전격적인 국제 회의를 소집한다.
1921년 11월 12일, 회의 첫날 국무장관 휴스는 전 세계 외교관들을 경악하게 만든 연설을 내뱉었다. 통상적인 외교적 수사 대신, 그는 "미국은 현재 건조 중인 30척의 전함을 즉각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 이제 영국과 일본도 당신들의 배를 부숴라"라는 식의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이 연설에 대해 당시 언론은 "휴스 장관이 15분 동안 쏟아낸 말들이 전 세계 해군이 수백 년간 쏜 포탄보다 더 많은 전함을 수장시켰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하딩은 뒤에서 이를 강력히 지지하며 각국 정상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회의의 핵심 결과물은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이 체결한 '5개국 해군 조약'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과 영국의 총 톤수를 5로 볼 때, 일본은 3,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75의 비율로 전함 보유량을 제한한다.[28] 향후 10년간 새로운 주력함의 건조를 전면 금지한다. 이미 건조 중이거나 노후화된 전함 수백만 톤을 실제로 고철로 만들어 수장한다. |
이 조약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승전국들이 스스로의 무기를 스스로 파괴하기로 약속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하딩은 단순히 배의 숫자만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지정학적 문제도 건드렸다.
- 4개국 조약: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이 태평양 지역의 현상을 유지하기로 약속하며, 기존의 영일동맹을 해체시켰다. 이는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고도의 전략적 승리였다.
- 9개국 조약: 중국의 주권 존중과 '문호 개방' 원칙을 공식화했다. 훗날 일본이 이 조약을 깨고 만주 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하는 법적 토대가 되었다.
흔히 하딩은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던 대통령"으로 묘사되지만, 워싱턴 회의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그는 휴스 장관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도, 상원에서 조약이 비준될 수 있도록 반대파 의원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노련한 정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 회의를 통해 미국이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에 가입하지 않고도 세계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윌슨의 '이상주의'가 실패한 자리에 하딩은 '실용적 평화주의'를 심어놓은 셈이다.
물론 이 회의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전함(주력함)은 제한했지만,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에 대한 제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훗날 각국이 '조약형 순양함'이라는 기형적인 군함을 만들어내며 다시 경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 내부의 강경파(함대파)는 5·5·3 비율을 '국치'로 받아들였으며, 이는 훗날 군부 정권이 들어서고 태평양 전쟁으로 치닫는 장기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상대방이 몰래 배를 만드는지 확인할 실질적인 감시 체계가 부족했다.
결국 이 회의의 성공으로 하딩의 지지율은 정점을 찍었다. 만약 그가 이때의 성과를 바탕으로 측근 비리를 단죄했다면, 역사는 그를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3.3. 예산 및 회계법 제정[편집]
"정부는 비즈니스처럼 운영되어야 합니다. 국민의 세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대통령이 책임지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29]
워런 G. 하딩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친구들에게 휘둘린 무능한 지도자'에 고정되어 있지만, 행정학이나 재무행정의 역사에서 하딩은 "현대적 예산 제도의 아버지"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1921년 6월 10일 제정된 예산 및 회계법(Budget and Accounting Act of 1921)은 미국 연방 정부가 탄생한 이래 130년 넘게 유지되어 온 주먹구구식 재정 운영을 완전히 끝내고, 대통령이 국가 예산의 주도권을 쥐는 '대통령 중심 예산제'를 확립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법이 생기기 전까지 미국의 예산 책정 방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각 부처(국방부, 농무부 등)는 대통령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의회에 예산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자기 내각의 부처들이 얼마를 쓰는지 통제할 권한도, 전체적인 예산 규모를 파악할 수단도 없었다.
의회 역시 각 상임위원회별로 자기 입맛에 맞는 예산을 따로따로 승인했기에, 국가 전체의 수입과 지출을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가 전무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방만한 재정 운영과 중복 지출, 그리고 정치적 이권에 따른 예산 낭비로 이어졌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연방 부채가 폭증하자, 이러한 구시대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하딩은 후보 시절부터 "정부에 더 많은 비즈니스를, 비즈니스에 더 적은 정부를(Less government in business and more business in government)"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기업인 출신답게 효율성을 중시했고, 대통령이 예산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법안 통과 후 하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초대 예산국장(Director of the Bureau of the Budget)으로 찰스 G. 도스(Charles G. Dawes)를 임명한 것이었다.[30]
하딩은 도스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도스는 각 부처 장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앞으로 대통령의 허락 없이 의회에 예산을 요구하는 자는 즉각 사표를 써야 할 것"이라며 호통을 쳤다. 하딩은 뒤에서 도스의 이러한 강경책을 묵묵히 지원하며,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이 포진한 '오하이오 갱'조차 예산 문제에서만큼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 법안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오늘날 미국의 재정 체계와 판박이다.
매년 대통령이 연방 정부 전체의 통합 예산안을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제 부처들은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안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대통령을 보좌하여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을 감시하는 직속 기구를 신설했다. 이는 훗날 '관리예산국(OMB)'으로 발전하며 백악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 중 하나가 된다.
의회 직속의 독립적인 감시 기구를 만들어, 정부가 예산을 법대로 썼는지 사후에 철저히 검증하도록 했다. 이는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하딩과 도스의 콤비 플레이는 즉각적인 성과를 냈다. 1921년 약 50억 달러였던 연방 지출은 1922년 33억 달러, 1923년에는 31억 달러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1차 대전으로 쌓였던 막대한 국가 부채는 하딩 임기 동안 매년 감소했으며, 정부 회계는 견고한 흑자로 돌아섰다.
이러한 재정적 안정은 하딩 행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감세 정책(멜런 플랜)과 맞물려,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번영인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하딩은 "돈을 잘 쓰는 법을 아는 것이 통치 능력의 핵심"임을 몸소 입증한 셈이다.
물론 비판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딩이 세운 이 효율적인 시스템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측근들이 저지른 부패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예산 편성 시스템은 근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예산을 집행하는 '사람'들(찰스 포브스, 앨버트 폴 등)은 시스템의 눈을 피해 뒷돈을 챙겼다. 하딩은 구조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들의 도덕성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일각에서는 하딩의 예산 절감이 사회 안전망이나 공공 서비스의 질을 저하시켰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퇴역 군인 지원 예산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훗날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31]
이 법안은 하딩 사후에도 살아남아 미국 정부 운영의 '성경'이 되었다. 훗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린든 B. 존슨이 '위대한 사회'를 설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딩이 닦아놓은 이 예산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딩이 이 법안에 서명할 때 사용한 펜을 찰스 도스에게 선물하며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하딩 스스로도 자신의 정치적 생명력보다 이 제도적 혁신이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가의 곳간을 정리하는 법을 알았고, 현대 국가가 갖추어야 할 재무적 골격을 완성했다. 비록 그의 이름은 스캔들로 얼룩졌지만, 그가 만든 예산국의 후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백악관에서 미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숫자를 다루고 있다.
3.4. 흑인 인권에 대한 파격 선언[편집]
"나는 인종 간의 사회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교육적 기회의 평등'입니다. 흑인에게도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32]
하딩은 인종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는 당대 어떤 정치인보다도, 심지어 진보적이라 칭송받던 우드로 윌슨보다도 훨씬 선구적이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이 챕터에서는 하딩 임기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1921년 앨라배마 주 버밍엄 연설과 그의 인권관을 심층 분석한다.
1920년대 초반 미국 남부는 그야말로 흑인들에게 지옥과 같았다. 이른바 짐 크로우 법으로 불리는 인종 분리 정책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고, 흑인들은 투표권을 박탈당한 채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의 테러 위협에 시탈리고 있었다.
직전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전형적인 남부 출신 인종주의자로, 연방 정부 공무원 체계 내에서조차 인종 분리를 심화시킨 인물이었다. 반면 하딩은 오하이오라는 북부의 자유로운 토양에서 자랐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과 가문이 '흑인 혼혈설'이라는 인종주의적 공격을 평생 받아왔기에 이 문제에 대해 본능적인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다.[33]
1921년 10월 26일, 하딩은 앨라배마 주 버밍엄 시 건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당시 현장에는 약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관중석은 철저하게 백인 구역과 흑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직 대통령이 남부 한복판에서, 그것도 인종 분리가 철저한 공공장소에서 연설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부 정치인들은 하딩이 그저 "남부의 발전을 축하한다"는 식의 통속적인 덕담이나 하고 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하딩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남부 백인들의 고막을 찢어놓는 폭탄 선언이었다.
하딩은 연설에서 흑인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을 위해 피를 흘렸음을 상기시키며 일갈했다.
하딩은 흑인들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으려는 남부의 각종 편법(문해력 테스트, 인두세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인이 교육받고 기술을 습득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당대의 한계상 '사회적 혼합(인종 간 결혼 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으나, 법 앞의 평등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을 분명히 했다.
연설 도중 백인 구역에서는 차가운 침묵과 야유가 흘러나왔으나, 저 멀리 격리된 흑인 구역에서는 눈물 섞인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역사학자들은 이 장면을 두고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서 울려 퍼진 가장 용기 있는 대통령의 음성"이라고 평가한다.
이 연설은 즉각적인 정치적 후폭풍을 불러왔다.
남부의 유력 정치인들은 "대통령이 인종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일부 신문은 하딩이 남부의 전통을 모욕했다는 사설을 1면에 실었다.
하딩의 연설은 역설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자극했고, 1920년대 중반 KKK가 세력을 확장하는 촉매제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하딩은 연설에 그치지 않고, 흑인에 대한 초법적 살인인 '린칭(Lynching)'을 연방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다이어 린칭 방지법(Dyer Anti-Lynching Bill)을 강력히 지지했다. 비록 남부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로 인해 법안 통과에는 실패했지만, 대통령이 직접 린칭 문제를 국정 과제로 삼은 것은 하딩이 처음이었다.
하딩의 인권 행보는 흔히 말하는 '정상 상태로의 복귀'라는 그의 보수적 슬로건과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딩에게 '정상'이란 헌법 정신이 올바르게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했고, 그 안에는 흑인 시민의 기본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하딩이 '최악의 대통령'으로 분류되면서 그의 버밍엄 연설 역시 묻혀버린 감이 크지만, 민권 운동의 대부인 W.E.B. 듀보이스조차 당시 하딩의 연설에 대해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진솔하고 담대한 발언이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을 정도였다.
만약 하딩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지 않고 임기를 마쳤거나, 혹은 그가 가진 정치적 자산을 이 문제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미국의 민권 운동 역사는 몇십 년 더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대 수정주의 사학자들의 견해다.[34][35]
하딩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공화당이 '리버럴'한 성향을 띠던 시절의 마지막 불꽃 중 하나로 기억된다.[36]
4. 인간관계[편집]
4.1. 플로렌스 하딩[편집]
"워런, 당신은 대통령이 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37]
플로렌스 클링(Florence Kling)은 하딩에게 단순한 아내를 넘어, 정치적 전략가, 홍보 전문가, 그리고 엄격한 매니저였다. 하딩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절반 이상은 그녀의 야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로렌스 마벨 클링은 1860년 오하이오 주 매리언에서 당시 지역 최고의 부호였던 에이머스 클링(Amos Kling)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에이머스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하고 권위적인 인물이었으며, 플로렌스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반항심과 독립심을 키우며 자랐다.
젊은 시절의 플로렌스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웃 청년인 헨리 드월프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듯 결혼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당시 보수적인 오하이오 시골 사회에서 '아이를 둔 이혼녀'라는 타이틀은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으나, 플로렌스는 굴하지 않고 피아노 레슨을 하며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움을 보여주었다.
하딩과 플로렌스가 처음 만난 것은 하딩이 운영하던 신문사 <매리언 스타>를 통해서였다. 하딩은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나긋나긋한 성격으로 이미 마을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고, 플로렌스는 그런 하딩에게서 '자신이 조종하여 거물로 키울 수 있는 원석'의 향기를 맡았다.
반면, 하딩은 처음에는 플로렌스에게 큰 호감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하딩보다 5살 연상이었고, 외모적으로도 하딩의 취향(주로 가녀리고 순종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플로렌스의 집요한 구애와 그녀가 가진 배경(비록 사이는 나빴지만 지역 최고 부호의 딸이라는 점)은 야심 있는 청년 하딩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1891년 7월 8일, 하딩이 직접 지은 새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 결혼은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플로렌스의 아버지 에이머스 클링은 하딩을 "흑인의 피가 섞인 보잘것없는 신문쟁이"라며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물론, 길거리에서 하딩을 마주쳐도 투명인간 취급을 하거나 대놓고 모욕을 주었다.
심지어 에이머스는 하딩의 신문사를 망하게 하려고 경쟁지를 지원하는 등 치졸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 갈등은 무려 10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하딩이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고 플로렌스가 신문사 경영을 성공적으로 이끌자 결국 에이머스가 백기를 들며 화해하게 된다.[38]
플로렌스는 결혼 직후부터 <매리언 스타>의 유통과 재무를 장악했다. 그녀는 하딩이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호형호제하는 동안, 신문사 뒷방에서 배달 소년들을 엄격히 관리하고 구독료 미납자들을 쫓아다니며 수금하는 '악역'을 자처했다. 하딩은 이런 아내를 '더 더치스(The Duchess, 공작부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별명에는 존경과 더불어 아내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플로렌스는 하딩의 식단, 옷차림, 심지어는 만나는 사람까지 일일이 체크했다. 하딩이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마다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남편을 등 떠밀어 정계로 보냈다. 하딩이 주 상원의원, 부지사,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는 "당신은 할 수 있다"며 채찍질을 멈추지 않은 플로렌스의 집념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정치적 동반자였으나, 두 사람의 내면은 곪아 있었다. 하딩은 아내의 과도한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여성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딩의 대표적인 불륜 상대인 캐리 필립스나 난 브리튼과의 관계는 플로렌스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고성방가와 갈등으로 이어지곤 했다.
플로렌스는 남편의 외도에 격분하면서도, 자신의 꿈인 '영부인'이 되기 위해 이를 철저히 은폐했다. 그녀는 하딩의 이미지를 위해 기자들을 매수하거나 소문을 잠재우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딩 역시 아내를 무서워하면서도, 그녀의 판단력과 추진력 없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기묘한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백악관에 입성한 후, 플로렌스는 단순한 안주인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백악관을 대중에게 개방하고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현대적 영부인의 시초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
특이한 점은 그녀가 점성술과 오컬트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담 마르시아'라는 점술가를 정기적으로 백악관으로 불러 국정 운영과 하딩의 건강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마담 마르시아는 "하딩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급사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남겼는데, 플로렌스는 이 예언에 집착하며 남편의 건강을 더욱 강박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플로렌스 하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채찍질해 최고 권좌에 올린 유능한 매니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고 참전 용사 복지에 힘쓴 적극적인 영부인이다.
부정적 측면에서는 하딩의 도덕적 결함과 주변의 부패를 알고서도 권력욕을 위해 방치하거나 은폐함. 남편 사후, 그에게 불리한 서류와 편지들을 대량으로 소각하여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그녀는 하딩이 죽고 1년 뒤인 1924년,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은 '야심 있는 여성이 시대적 한계 때문에 남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4.2. 난 브리튼[편집]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39]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사생활 면에서 가장 지저분한(?) 기록을 남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워런 G. 하딩이 첫손에 꼽힌다. 그중에서도 난 브리튼(Nan Britton)과의 관계는 단순한 불륜을 넘어,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혼외자' 존재를 공론화하며 사회적 금기를 깨부순 일대 사건이었다. 하딩 사후, 대중이 가졌던 '성군(聖君)'의 이미지를 단숨에 '파렴치한 호색한'으로 추락시킨 결정타이기도 하다.
난 브리튼은 하딩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매리언 출신의 여성이었다. 하딩과는 무려 31살 차이가 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하딩의 친구이기도 했다. 난 브리튼은 소녀 시절부터 지역 신문 발행인이자 정치 스타였던 하딩을 흠모했는데, 그녀의 방 벽이 하딩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7년, 하딩이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실업자였던 난 브리튼이 하딩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며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딩은 그녀를 뉴욕의 한 회사에 취직시켜 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밀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딩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이들의 관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해졌다. 하딩의 아내 플로렌스 하딩(별명 '공작부인')은 매우 눈치가 빠르고 질투심이 강한 인물이었기에, 두 사람은 백악관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난 브리튼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백악관 집무실 근처의 작은 옷장(Coat Closet)에서 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이 폭로는 "미국 대통령이 국사를 돌보는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라며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비밀 경호국(Secret Service) 요원들은 대통령의 이 은밀한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퍼스트 레이디가 접근하면 신호를 보내는 등 '방패'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대통령의 경호 인력이 국가 안보가 아닌 대통령의 불륜 뒷수습에 동원된 셈이다.
1919년 10월, 난 브리튼은 하딩의 딸인 엘리자베스 앤(Elizabeth Ann)을 출산한다. 하딩은 아이가 자신의 핏줄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대통령 당선 전후로 난 브리튼에게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송금했다.
하지만 하딩은 아이를 직접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정치적 파멸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친구들을 통해 돈을 전달하며 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하딩이 1923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비밀 송금은 끊기게 되었고, 경제적 곤란에 처한 난 브리튼은 결국 세상이 뒤집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1927년, 난 브리튼은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담은 회고록 <대통령의 딸(The President's Daughter)>을 출간한다. 이 책은 미국 출판 역사상 유례없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대중의 반응은 "고결한 하딩 대통령을 모욕하려는 미친 여자의 거짓말"이라는 비난과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으로 갈렸다.
공화당은 하딩의 지지자들과 공화당 측은 난 브리튼을 '정신 나간 꽃뱀'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하딩의 가문에서는 "하딩은 불임이었다"라는 주장까지 펼치며 그녀의 폭로를 원천 봉쇄하려 했다.
논란 덕분에 책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미국인들은 겉으로는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백악관 벽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이 책은 미국 정치사에서 대통령의 사생활을 폭로한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정치인의 도덕성 검증에 대한 사회적 잣대를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난 브리튼은 평생을 "내 딸은 하딩의 아이가 맞다"라고 주장하며 살았으나,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딩 가문은 완강했고,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점차 잊혔다.
그러나 반전은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난 2015년에 일어났다. 뉴욕 타임즈와 Ancestry.com이 주도하여 하딩의 후손들과 난 브리튼의 손자 사이의 DNA를 대조한 결과, 엘리자베스 앤이 하딩의 친딸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 검사 결과로 인해 난 브리튼의 회고록은 '망상에 빠진 여자의 거짓말'에서 '용기 있는 피해자의 증언'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하딩이 불임이라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오랜 가설도 폐기되었다.
하딩 가문의 일부 후손들은 결과를 수용하며 "이제야 진실이 밝혀졌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엘리자베스 앤의 후손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하딩과 난 브리튼의 관계는 단순히 한 남자의 외도로 치부하기엔 그 여파가 너무 컸다.
하딩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국가 기관(비밀 경호국)을 동원했고, 이는 공권력의 사적 유용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난 브리튼은 하딩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대가로 평생을 '사기꾼'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역시 평생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오늘날 '백악관의 옷장'은 하딩의 무능과 부도덕을 상징하는 은유로 자주 쓰인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정상 상태'를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옷장 안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하딩 행정부의 본질을 꿰뚫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딩은 여자와 포커, 그리고 친구들을 거절하지 못했다. 대통령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결국 난 브리튼 사건은 하딩이라는 인물이 가진 '나약함'이 개인의 불행을 넘어 한 국가의 품격을 어떻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4.3. 캐리 필립스[편집]
"나의 사랑하는 캐리... 당신은 나의 여왕이며,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40]
워런 G. 하딩의 수많은 여성 편력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길었으며, 가장 정치적인 치명타를 입혔던 사건이다. 난 브리튼(Nan Britton)과의 관계가 단순한 철없는 불륜이었다면, 캐리 필립스와의 관계는 간첩 의혹과 공갈 협박, 그리고 정계 은퇴 위기까지 몰고 갔던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캐리 필립스는 하딩의 고향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제임스 필립스(James Phillips)의 아내였다. 즉,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맞은 것이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는 1905년부터 시작되어 하딩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인 1920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매리언(Marion) 시에서 캐리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통했다. 하딩의 부인인 플로렌스 하딩이 엄격하고 신경질적인 '내조의 여왕' 타입이었다면, 캐리는 하딩에게 정서적 해방감과 육체적 쾌락을 동시에 제공하는 안식처였다. 하딩은 그녀에게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연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외설적이어서 훗날 이 편지가 공개되었을 때 미국 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41]
단순한 치정극이었던 이 관계가 '국가 안보 문제'로 비화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다. 캐리 필립스는 독일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전쟁 중 노골적인 친독파(Pro-German) 행보를 보였다.
당시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하딩은 군사 기밀이나 국가 정책을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미 정보 당국은 캐리 필립스가 독일의 스파이일 가능성을 의심하며 그녀를 감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원의원 하딩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덜미를 잡혔다. 하딩은 그녀의 친독 성향 때문에 자신의 정치 인생이 끝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딩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캐리 필립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하딩에게 "우리 관계를 폭로하겠다"며 거액의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침묵의 대가'를 요구하는 공갈 협박이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RNC)는 비상이 걸렸다. 만약 대선 직전에 후보의 15년 불륜과 친구 아내와의 간통 사실이 알려진다면 선거는 보나 마나 패배였다. 결국 공화당 측은 거액의 자금을 동원해 캐리 필립스를 매수했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정당 차원에서 후보의 불륜을 돈으로 입막음한 최초의 대형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하딩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캐리 필립스의 존재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다. 그녀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더 많은 돈과 특혜를 요구했다. 하딩은 집무실에서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한숨을 내쉬기 일쑤였고, 이는 그가 임기 중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훗날 하딩은 "나는 적들과는 잘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밤잠 못 이루게 하고 복도에서 서성이게 만드는 것은 나의 친구들(측근과 연인들)이다"라는 자조 섞인 말을 남겼는데, 여기서 '친구들'에는 오하이오 갱뿐만 아니라 캐리 필립스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명백하다.
이들의 관계는 하딩 사후 수십 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1960년대에 하딩이 쓴 연서들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낱낱이 공개되었다. 하딩 가문은 이 편지들의 공개를 막기 위해 법적 소송까지 불사했으나, 결국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 스캔들이 하딩에 대한 평가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사생활 문제로 인해 국가 안보와 당의 운명을 위협에 빠뜨렸다는 비판.
- 협박범에게 끌려다니며 국고나 당 자금을 유용하게 만든 근본적인 성격 결함 노출.
- '정상 상태(Normalcy)'와 '가정의 가치'를 내세웠던 그의 정치 슬로건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증명.
캐리 필립스는 하딩이 죽은 후에도 꽤 오래 살았으나, 말년에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간직했던 하딩의 편지들은 그녀가 죽기 직전 발견되어 하딩의 명예를 완전히 끝장내는 '사후의 복수'가 되었다.
하딩의 아내 플로렌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으나, 남편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철저히 침묵했다. 그녀는 남편의 사후 백악관의 수많은 서류를 소각했는데, 이때 캐리 필립스와 관련된 증거들도 상당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4.4. 해리 도허티[편집]
하딩과 해리 M. 도허티의 만남은 미국 정치사에서 기묘하고도 치명적인 결합 중 하나로 꼽힌다. 1900년경 오하이오주의 한 호텔 뒷마당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첫 만남은, 훗날 도허티의 회고에 따르면 "첫눈에 반한 정치적 연애"와 같았다.
당시 도허티는 이미 오하이오 공화당 내에서 잔뼈가 굵은 로비스트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사람의 됨됨이나 정책적 비전보다는 '상품성'을 알아보는 귀신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도허티의 눈에 들어온 하딩은 그야말로 '완벽한 피사체'였다. 도허티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도허티는 이미 오하이오 공화당 내에서 잔뼈가 굵은 로비스트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사람의 됨됨이나 정책적 비전보다는 '상품성'을 알아보는 귀신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도허티의 눈에 들어온 하딩은 그야말로 '완벽한 피사체'였다. 도허티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마치 대통령처럼 보였다. 큰 키, 잘생긴 얼굴, 위엄 있는 태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까지. 나는 그를 본 순간 그가 백악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 만남 이후 도허티는 하딩의 정치적 스승이자 마케팅 매니저, 그리고 훗날 하딩 행정부를 파멸로 몰아넣는 '오하이오 갱'의 수장이 된다.
도허티는 하딩이 가진 지적 능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딩은 복잡한 경제 수치를 이해하는 데 서툴렀고, 국제 정세에 대한 깊은 통찰력도 부족했다. 하지만 도허티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 잘 듣고 잘생긴 후보"는 도허티 같은 막후 실력자에게 최고의 재료였다.
도허티는 하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세밀한 정치적 가공을 시작한다.
하딩의 중후한 외모를 강조하기 위해 은발과 검은 눈썹의 대비를 부각하고, 맞춤 정장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의 연설은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기로 유명했다. 도허티는 이를 역이용하여, 어떤 파벌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찬성할 만한 '두루뭉술한 수사학'을 연마시켰다.[42]
도허티는 하딩에게 특정 현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는 훗날 전당대회에서 유력 후보들이 서로 싸우다 자멸할 때, 하딩이 '가장 무해한 대안'으로 부상하게 만드는 결정적 수법이 되었다.
도허티와의 결탁은 단순히 조언자를 얻은 수준이 아니었다. 도허티는 오하이오주의 정·재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로비 네트워크, 이른바 '오하이오 머신'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는 철도 회사, 은행, 그리고 각종 이권 단체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끌어모아 하딩의 금고를 채웠다.
이 과정에서 하딩은 도허티의 친구들, 즉 훗날 자신의 내각을 망쳐놓을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앨버트 폴, 제스 스미스 등 도허티의 수하들은 하딩의 포커 판 친구가 되어주며 그의 사생활을 관리하고 약점을 보완해주었다. 하딩은 이 "친구들"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찬사에 취해, 그들이 자신을 이용해 국가를 약탈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정작 하딩 본인은 대통령직에 대해 강한 야망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상원의원으로서 동료들과 어울리며 골프를 치고 밤새 포커를 즐기는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허티는 포기하지 않았다.
도허티는 하딩의 아내인 플로렌스 하딩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플로렌스는 남편보다 훨씬 야심이 컸고, 점성술사의 "남편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맹신하고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에게 "당신은 오하이오의 아들이자 공화당의 구원자"라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설득을 이어갔다. 결국 하딩은 "도허티가 하라고 하니 해보겠다"는 식의 수동적인 태도로 대권 가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당시 공화당에는 레오나드 우드 장군, 프랭크 로든 주지사 등 쟁쟁한 후보들이 있었다. 도허티는 하딩에게 "절대 1등으로 치고 나가지 마라. 1등들은 서로 공격하다가 피를 흘리게 되어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전국을 돌며 대의원들에게 하딩의 '친화력'을 홍보했고, 만약 전당대회가 교착 상태(Deadlock)에 빠질 경우 하딩이 가장 합리적인 타협점이 될 것임을 주입시켰다. 도허티는 심지어 경선 전 기자들에게 "대의원들이 지쳐서 호텔 방에 모여 연기를 피우며 고민할 때, 결국 하딩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발언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연기 자욱한 방(Smoke-filled room)'의 유래가 된다.
해리 도허티와의 결탁은 하딩에게 백악관 열쇠를 쥐여주었지만, 동시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독배가 되었다. 하딩은 도허티를 통해 '대통령의 형상'을 입었으나, 그 대가로 자신의 행정부를 도허티와 그의 부패한 동료들에게 내어주어야 했다.[43]
5. 논란과 비판[편집]
5.1. 티팟 돔 스캔들[편집]
"나는 적들보다 내 친구들이 더 걱정일세. 그 자식들이 밤새 나를 복도에서 서성이게 만드는군!"[44]
미국 정치사에서 부패의 대명사로 각인된 초대형 흑역사. 워런 G. 하딩 행정부의 무능과 방관이 낳은 결정체이며,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약 50년 동안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권력형 비리'라는 타이틀을 독점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딩의 사후 평판은 완전히 박살 났으며, 그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나 외교적 업적은 모두 스캔들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사건의 발단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해군은 함선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고 있었는데, 전시에 대비해 전략적으로 비축해둔 국유 유전 지대가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와이오밍 주의 '티팟 돔(Teapot Dome)'[45]과 캘리포니아 주의 엘크 힐스(Elk Hills)였다.
본래 이 유전들은 해군 장관의 관할하에 엄격히 관리되어야 했으나, 하딩이 임명한 내무 장관 앨버트 폴(Albert B. Fall)은 이 노다지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폴은 하딩의 오랜 친구이자 '오하이오 갱'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하딩이 개인적으로 매우 신뢰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하딩을 설득해 해군 관할이었던 유전 관리권을 내무부로 이관시키는 대통령령에 서명하게 만든다. 하딩은 친구의 청탁을 별 의심 없이 들어주었고, 이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관리권을 손에 쥔 앨버트 폴은 1922년부터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공개 입찰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친분이 있는 석유 업자들에게 유전 채굴권을 헐값에 넘겨주었다.
- 맘모스 오일(Mammoth Oil): 해리 싱클레어(Harry Sinclair)가 운영하던 회사로, 티팟 돔 유전의 독점 채굴권을 따냈다.
- 판 아메리칸 석유: 에드워드 도헤니(Edward L. Doheny)가 운영하던 회사로, 캘리포니아의 엘크 힐스 유전을 손에 넣었다.
물론 공짜는 없었다. 앨버트 폴은 그 대가로 싱클레어로부터 약 30만 달러의 현금과 채권을, 도헤니로부터는 '무이자 대출'을 빙자한 10만 달러의 뇌물을 챙겼다. 당시 가치로 40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대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폴은 이 돈으로 뉴멕시코에 있는 자신의 목장을 확장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영원할 것 같았던 비밀은 의외의 곳에서 새어 나왔다. 와이오밍의 소규모 석유업자들이 "왜 저 큰 회사들만 유전을 독점하느냐"며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1922년 4월 월스트리트 저널이 이를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토머스 월시(Thomas J. Walsh)는 끈질기게 이 사건을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앨버트 폴의 당당한 태도에 조사가 난항을 겪기도 했으나, 폴의 갑작스러운 재산 증식 과정을 추적한 끝에 결정적인 증거들이 확보되었다. 특히 도헤니가 보낸 '10만 달러가 든 가방'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정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조사가 시작되자 하딩은 처음엔 폴을 옹호했다. "내 친구 폴은 정직한 사람이다"라며 조사를 방해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리의 증거가 명백해지자 하딩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사적으로 "내 주변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며 괴로워했고, 이는 그의 급격한 건강 악화와 사망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딩이 유람 도중 사망했을 때, 세간에서는 "티팟 돔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 독살당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았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뇌물을 준 업자인 도헤니와 싱클레어는 유능한 변호인단을 고용해 '뇌물 공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만 싱클레어는 의회 모독죄 등으로 짧은 징역형을 살긴 했다. 유전 채굴권은 1927년 대법원 판결로 모두 무효화되어 국가로 환수되었다.
티팟 돔 스캔들은 단순히 한 장관의 비리로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친구들이 국가를 팔아먹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공화당 행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다. 후임인 캘빈 쿨리지가 극도의 청렴 결백을 강조하며 이미지 쇄신에 나서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 전략 자산에 대한 국가적 관리가 훨씬 엄격해졌으며, 정경유착을 감시하는 언론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하딩 본인은 뇌물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를 장관으로 앉히고 감시조차 안 한 놈이 대통령이냐"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실상 그의 역사적 평가를 '최하위'로 고정시킨 결정타였다.
하딩이 죽고 난 뒤인 1929년, 대법원은 앨버트 폴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직무와 관련하여 감옥에 간 최초의 내각 각료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46]
앨버트 폴은 감옥에 갈 때까지도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유전을 효율적으로 개발하려 했던 것이며, 받은 돈은 정당한 '선물'이나 '대출'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확장한 뉴멕시코의 목장은 오늘날 하딩 행정부 부패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5.2. 법무부와 참전용사국 부패[편집]
하딩 행정부의 도덕적 파산은 단순히 티팟 돔 스캔들 하나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팟 돔이 '국가 자산의 사유화'였다면, 법무부와 참전용사국(Veterans' Bureau)의 비리는 '공권력의 시장화'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딩은 자신의 고향 친구들을 이 요직들에 앉혔으나, 그들은 국가의 부름을 비즈니스 기회로 여겼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귀환한 수많은 상이군인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된 참전용사국은 하딩 행정부에서 가장 거대한 예산을 주무르는 부처 중 하나였다. 하딩은 이 자리에 하와이에서 만난 찰스 R. 포브스(Charles R. Forbes)를 임명했다. 포브스는 하딩의 신뢰를 등에 업고 전후 복구의 영웅이 되는 대신, 국가 예산을 합법적으로 털어먹는 도둑이 되었다.
포브스는 참전용사 병원을 건설하면서 특정 건설업체에 일감을 몰아주고 막대한 리베이트를 챙겼다. 이 과정에서 병원 부지는 엉뚱한 곳에 선정되었고, 정작 치료가 시급한 군인들은 시설 부족에 시달렸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페리 포인트(Perry Point)' 창고 사건이다. 포브스는 전쟁 직후 남은 방대한 의료 물자(거즈, 약품, 침구류 등)를 '폐기물'로 분류한 뒤, 자신의 결탁 업체에 시가의 10%도 안 되는 가격에 넘겼다. 그 대가로 포브스는 막대한 뒷돈을 챙겼다.
포브스의 법률 고문이었던 찰스 크래머는 비리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하딩의 자택 근처에서 권총 자살을 택했다. 이는 하딩 행정부 내부에서 터져 나온 첫 번째 비극적 신호탄이었다.[47]
결국 포브스는 2억 달러 이상의 공금을 횡령하거나 낭비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당시 미국 예산 규모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하딩의 킹메이커이자 법무장관이었던 해리 도허티는 법을 수호해야 할 부처를 거대한 로비 창구로 변질시켰다. 그는 워싱턴 K가(Street) 1625번지에 이른바 '리틀 그린 하우스(Little Green House)'라 불리는 사적 아지트를 운영했다.
이곳은 하딩의 최측근들인 '오하이오 갱'의 본거지였다. 여기서 이루어진 일들은 가히 '범죄 조직'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금주법 위반으로 잡혀온 밀매업자들이나 흉악범들이 도허티 측근들에게 뒷돈을 주면, 법무부가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여 풀어주는 비즈니스가 횡행했다.
수사관들이 압수한 고급 위스키와 와인들이 증거물 창고가 아닌 '리틀 그린 하우스'로 흘러 들어갔고, 이는 다시 정관계 고위 인사들의 파티용으로 팔려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압수한 독일 기업들의 자산을 반환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오갔다.
도허티 본인은 두 번의 재판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실형을 면했지만, 그의 보좌관이자 심복이었던 제스 스미스(Jess Smith)의 죽음은 법무부 비리의 결정판이었다. 스미스는 비리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도허티의 아파트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하딩은 자신의 친구들이 집무실 바로 옆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 즈음 하딩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내 적들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네. 하지만 나의 이 빌어먹을 친구들(Goddamn friends)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단 말이야!" 하딩은 인간적인 의리를 중시하는 정치인이었으나, 그 의리는 공사 구분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는 친구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그들을 엄벌하기보다는 조용히 사임시키거나 해외로 도피할 기회를 주려 했다. 이러한 하딩의 무른 태도는 결과적으로 부패를 키우는 온상이 되었고, 대중은 하딩 본인 역시 공범이거나 최소한 '직무 유기'를 저지른 무능한 지도자라고 낙인찍기에 이르렀다.
참전용사국의 비리는 특히 치명적이었다. 나랏돈을 훔친 것도 모자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청년들의 고통을 담보로 배를 불렸다는 사실은 하딩의 지지율을 폭락시켰다. 우드로 윌슨의 도덕주의에 지쳐 '편안한 이웃' 하딩을 선택했던 미국인들은, 그 편안함이 사실은 '무법천지'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귀환한 수많은 상이군인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된 참전용사국은 하딩 행정부에서 가장 거대한 예산을 주무르는 부처 중 하나였다. 하딩은 이 자리에 하와이에서 만난 찰스 R. 포브스(Charles R. Forbes)를 임명했다. 포브스는 하딩의 신뢰를 등에 업고 전후 복구의 영웅이 되는 대신, 국가 예산을 합법적으로 털어먹는 도둑이 되었다.
포브스는 참전용사 병원을 건설하면서 특정 건설업체에 일감을 몰아주고 막대한 리베이트를 챙겼다. 이 과정에서 병원 부지는 엉뚱한 곳에 선정되었고, 정작 치료가 시급한 군인들은 시설 부족에 시달렸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페리 포인트(Perry Point)' 창고 사건이다. 포브스는 전쟁 직후 남은 방대한 의료 물자(거즈, 약품, 침구류 등)를 '폐기물'로 분류한 뒤, 자신의 결탁 업체에 시가의 10%도 안 되는 가격에 넘겼다. 그 대가로 포브스는 막대한 뒷돈을 챙겼다.
포브스의 법률 고문이었던 찰스 크래머는 비리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하딩의 자택 근처에서 권총 자살을 택했다. 이는 하딩 행정부 내부에서 터져 나온 첫 번째 비극적 신호탄이었다.[47]
결국 포브스는 2억 달러 이상의 공금을 횡령하거나 낭비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당시 미국 예산 규모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하딩의 킹메이커이자 법무장관이었던 해리 도허티는 법을 수호해야 할 부처를 거대한 로비 창구로 변질시켰다. 그는 워싱턴 K가(Street) 1625번지에 이른바 '리틀 그린 하우스(Little Green House)'라 불리는 사적 아지트를 운영했다.
이곳은 하딩의 최측근들인 '오하이오 갱'의 본거지였다. 여기서 이루어진 일들은 가히 '범죄 조직'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금주법 위반으로 잡혀온 밀매업자들이나 흉악범들이 도허티 측근들에게 뒷돈을 주면, 법무부가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여 풀어주는 비즈니스가 횡행했다.
수사관들이 압수한 고급 위스키와 와인들이 증거물 창고가 아닌 '리틀 그린 하우스'로 흘러 들어갔고, 이는 다시 정관계 고위 인사들의 파티용으로 팔려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압수한 독일 기업들의 자산을 반환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오갔다.
도허티 본인은 두 번의 재판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실형을 면했지만, 그의 보좌관이자 심복이었던 제스 스미스(Jess Smith)의 죽음은 법무부 비리의 결정판이었다. 스미스는 비리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도허티의 아파트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하딩은 자신의 친구들이 집무실 바로 옆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 즈음 하딩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내 적들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네. 하지만 나의 이 빌어먹을 친구들(Goddamn friends)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단 말이야!" 하딩은 인간적인 의리를 중시하는 정치인이었으나, 그 의리는 공사 구분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는 친구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그들을 엄벌하기보다는 조용히 사임시키거나 해외로 도피할 기회를 주려 했다. 이러한 하딩의 무른 태도는 결과적으로 부패를 키우는 온상이 되었고, 대중은 하딩 본인 역시 공범이거나 최소한 '직무 유기'를 저지른 무능한 지도자라고 낙인찍기에 이르렀다.
참전용사국의 비리는 특히 치명적이었다. 나랏돈을 훔친 것도 모자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청년들의 고통을 담보로 배를 불렸다는 사실은 하딩의 지지율을 폭락시켰다. 우드로 윌슨의 도덕주의에 지쳐 '편안한 이웃' 하딩을 선택했던 미국인들은, 그 편안함이 사실은 '무법천지'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6. 기타[편집]
- 지독한 애견가였다. 그의 반려견인 에어데일 테리어 종인 '래디 보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언론의 집중 보도를 받은 '셀러브리티 퍼스트 독'이다. 래디 보 이는 백악관의 중요한 회의 때마다 하딩의 옆자리에 자신만의 수제 의자를 가지고 앉아 있었다. 심지어 하딩은 개를 위해 백악관 정원에 매일 아침 신선한 고기 파티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백악관은 래디 보이의 시점에서 쓴 '견생일기'를 언론에 배포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실 공식 SNS에 반려견 사진을 올리는 것의 원조 격이다. 하딩이 사망한 후, 신문 배달 소년들이 하딩을 추모하며 모은 동전들을 녹여 래디 보이의 동상을 만들었다. 이 동상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현대 영어 단어 하나를 대중화시킨 공로(?)가 있다. 바로 그의 슬로건이었던 Normalcy(정상 상태)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Normality'가 올바른 표현이었고, 'Normalcy'는 일종의 비문(非文)이나 사투리 취급을 받았다. 하딩이 연설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자 엘리트 지식인들은 "대통령이 영어도 제대로 못 한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하딩 특유의 구수한 이미지와 맞물려 이 단어는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국 당당히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 현재는 미국 정치권에서 '정상화'를 의미하는 표준적인 단어로 쓰인다.
-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손꼽히는 골프 매니아였다. 그는 국정 업무보다 골프장 예약에 더 신경을 쓴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하딩은 골프를 칠 때 내기를 즐겼는데, 실력은 그저 그랬다고 한다. 그가 골프를 치는 동안 비서들은 대통령이 공을 잃어버리지 않게 수풀 속을 뒤져야 했고, 하딩은 "대통령의 공은 항상 페어웨이에 있어야 한다"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 회의 기간 중 하딩은 각국 대표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는데, 금주법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외교관들에게는 술을 대접했다는 후문이 있다. 당시 일본 대표단이었던 가토 도모사부로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비는 재앙"이라며 조약을 수용했는데, 그는 귀국 후 일본의 영웅에서 '매국노'로 비난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 하딩이 사망한 팰리스 호텔 806호실은 현재도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 투숙객들 사이에서는 하딩의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이 돌기도 한다.
- 하딩 사후 평판이 얼마나 바닥을 쳤는지,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하딩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창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 하딩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매리언에 세워진 '하딩 메모리얼(묘역)'은 완공된 후에도 당시 대통령들이 참석을 꺼리는 바람에 정식 헌정식을 치르는 데 수년이 걸렸다.
- 라디오를 통해 연설을 중계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의 매력적인 저음은 라디오 매체와 찰떡궁합이었고, 이는 그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비결 중 하나였다.
- 백악관에 입성할 때 자동차를 타고 간 최초의 대통령이며, 직접 운전을 즐기기도 했다.
- 하딩은 신체 조건이 매우 좋았는데, 특히 발 크기가 14사이즈(한국 기준 약 320mm)에 달했다. 그를 위해 특수 제작된 신발들이 늘 백악관에 구비되어 있었다.
- 하딩은 영양가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설을 뜻하는 'Bloviate'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비평가들은 하딩의 연설을 비판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해 그를 공격했다.
6.1. 대중매체[편집]
워런, 당신은 그냥 가만히 서서 대통령처럼 보이기만 하면 돼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49]
미국 역사상 가장 '잘생긴' 대통령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힌 덕분에, 대중문화 속에서 워런 G. 하딩은 주로 "속 빈 강정", "부패한 측근들에게 휘둘리는 호인", 또는 "사생활이 문란한 정치인"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특히 1920년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하딩은 시대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부패의 상징으로 단골 등장한다.
하딩을 다룬 현대 대중매체 중 가장 비중 있고 입체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단연 HBO의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다.
이미지 메이킹의 희생양: 극 중 하딩은 본인의 정치적 야망보다는 해리 도허티와 부인 플로렌스 하딩의 압력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밀려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1920년 공화당 전당대회 뒷이야기를 다룰 때, 하딩은 호텔 방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며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뇌까리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내연녀 난 브리튼(Nan Britton)과의 백악관 벽장 밀회 장면이나, 금주법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술을 마시며 포커를 치는 모습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이는 하딩이 가진 '위선적 지도자'의 면모를 부각하는 장치다.
하딩 본인은 악의가 없을지언정, 그의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하딩의 권위를 빌려 이권을 챙기는지(티팟 돔 스캔들의 전조 등)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너키 톰슨과의 유착 관계 역시 하딩이 '정치적 결벽증'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딩 당대와 그 직후의 문학가들에게 그는 훌륭한 '조롱거리'였다.
- 에이치 엘 멩컨(H.L. Mencken): 당대 최고의 독설가였던 멩컨은 하딩의 문장력을 두고 "너무나 조잡해서 마치 개 짖는 소리 같다(Gamalielese)"며 비하했다. 멩컨의 수필과 칼럼에서 하딩은 '지적 능력이 결여된 시골 신문사 발행인'으로 철저히 난도질당했다.
- 싱클레어 루이스: 1920년대 미국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비판한 소설 《배빗(Babbitt)》 등에서 하딩은 그들이 우상숭배 하듯 떠받드는 '공허한 권위'의 상징으로 은유 된다.
- 난 브리튼의 회고록: 1927년 발간된 《대통령의 딸(The President's Daughter)》은 대중문화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사실상 '하딩 스캔들'이라는 장르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후 수많은 찌라시와 황색 언론들이 하딩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The Presidents" 노래에서 하딩은 "Teapot Dome scandal!"이라는 가사와 함께 짧고 굵게 스쳐 지나간다. 사실상 미국 초등학생들에게 하딩은 '부패한 아저씨'로 각인되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심슨 가족에서는 간혹 '역대 최악의 대통령' 리스트가 나올 때 하딩의 초상화가 슬쩍 지나가거나, 리사 심슨이 역사 과제를 할 때 "하딩보다는 잘했네" 같은 식의 비교 대상으로 소환되곤 한다.
대체 역사물에서는 하딩이 죽지 않고 임기를 마쳤을 경우를 가정하는 시나리오에서는 보통 미국의 부패가 임계점을 넘어 내전이 발생하거나, 대공황이 훨씬 일찍 터지는 '배드 엔딩'의 원흉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하딩을 연기한 배우들은 대개 하딩의 '눈썹'과 '중후한 외모'를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워낙 미남이었던 실물 때문에 미남 배우들이 주로 배역을 맡는데, 정작 극 중에서 하는 짓은 한심하게 묘사되는 괴리감이 백미.
2010년대 이후 일부 다큐멘터리에서는 그의 흑인 인권 연설 등을 조명하며 '그렇게까지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식의 재평가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이미 굳어진 '스캔들의 황제' 이미지를 깨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미국의 코미디 쇼인 SNL 등에서도 정치적 부패나 무능을 풍자할 때 '현대판 하딩'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6.2. 하딩 메모리얼[편집]
"이곳에 누워 있는 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비운의 대통령입니다."[50]
오하이오 주 매리언(Marion) 시 외곽에 위치한 워런 G. 하딩과 그의 부인 플로렌스 하딩의 합장묘이자 기념비. 정식 명칭은 '하딩 기념 묘역(Harding Memorial)'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장례식 중 하나를 치렀던 인물의 안식처치고는, 그 완공 과정과 봉헌식까지의 역사가 매우 기구하다. 하딩의 사후 스캔들이 터지면서 이 기념비는 '미국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대통령 묘역'이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1923년 하딩이 급사한 직후,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거웠다. '하딩 기념 협회(Harding Memorial Association)'가 결성되어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벌어졌고, 무려 50만 명 이상의 미국인(심지어 동전 보태기에 참여한 어린이들 포함)이 기부에 참여해 약 100만 달러에 가까운 거금이 모였다.
설계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였던 헨리 호른보스텔(Henry Hornbostel)과 에릭 피셔 우드가 맡았다. 건축 양식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스타일로 결정되었다.
구조는 지름 약 31m, 높이 약 16m의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다.
조지아주에서 공수한 백대리석을 사용하여 매우 우아하고 깨끗한 백색을 띠고 있다.
천장이 뚫려 있는 '오픈 에어(Open-air)' 방식이다. 이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처럼 내부 정원을 하늘에 노출시켜, 대통령의 영혼이 자연과 맞닿아 있음을 상징하려 했다. 하지만 후술할 스캔들 덕분에 대중에게는 "부패를 씻어내기 위해 비를 맞는 중"이라는 빈정거림을 듣기도 했다.
묘역 자체는 1927년에 이미 완공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딩 부부의 유해는 1931년까지 4년 동안이나 정식 묘역에 안치되지 못한 채 임시 보관소에 머물러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역대급 스캔들로 인해 현직 대통령들이 봉헌식 참석을 꺼렸기 때문이다.
하딩 사후 티팟 돔 스캔들이며 혼외자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자, 공화당 지도부는 하딩의 존재를 '지우고 싶은 흉터'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후임자인 캘빈 쿨리지는 봉헌식 참석을 차일피일 미루며 회피했고, 그 뒤를 이은 허버트 후버 역시 대공황 초기의 혼란 속에서 굳이 '실패한 대통령'의 기념비에 가서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아 했다.
결국 1931년이 되어서야 후버 대통령은 마지못해 매리언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때 후버가 남긴 추도사는 찬사가 아닌 "그는 친구들의 비행을 알고 고통받았으나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식의 공개 처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기념비 주변은 울창한 숲과 잘 가꾸어진 조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방문객들은 입구에서부터 웅장한 대리석 기둥들을 보며 압도당하지만, 정작 묘역 내부로 들어서면 천장이 뚫린 정원에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검은색 화강암 묘비를 마주하게 된다.
이 고요함과 고독함은 하딩의 생전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생전의 하딩은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포커판에서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 중심'의 인물이었으나, 죽어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들'과 '친구들' 때문에 평판이 바닥나 가장 조용하고 외로운 곳에 묻히게 된 셈이다.
현재 이곳은 미국 국립사적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매리언 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하지만,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이나 제퍼슨 기념관에 비하면 방문객 수는 매우 초라한 편이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역사 애호가들이거나, "대체 얼마나 정치를 못 했길래 꼴찌인가"를 확인하러 온 호기심 어린 관광객들이다.
묘역 내부의 나무들은 하딩 부부가 살아있을 때 좋아했던 품종들로 심어졌다.
밤에 이곳을 지나면 하딩이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억울함에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지역 괴담이 있다.[51]
인근에는 하딩이 살았던 집(Warren G. Harding Home)도 복원되어 있는데, 묘역과 집을 함께 방문하면 하딩의 황금기와 몰락을 한눈에 체감할 수 있다.
[1]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2] 임기 중 친구인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에게 토로한 고백. 본인의 무능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3] 훗날 인종차별적 공격에 시달리던 하딩이 사석에서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말. 당시 미국 사회의 경직된 인종관을 고려하면 대단히 쿨하면서도 위험한 발언이었다.[4] 이 때문에 하딩이 1921년 버밍엄에서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파격적인 연설을 한 것을 두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무의식적 동질감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학자들도 있다.[5] 역사학자 프랜시스 러셀은 하딩의 이러한 성격이 훗날 대통령으로서 결단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에 친구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6] 이러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는 훗날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현관 앞 유세(Front Porch Campaign)'를 펼칠 때 결정적인 자산이 된다.[7] 매킨리 대통령을 만든 킹메이커로 유명하다.[8] 이러한 태도는 훗날 대통령 시절에도 이어져, 중요한 결단의 순간마다 그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9] 하딩은 아내를 '공작부인(The Duchess)'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녀의 엄격함과 지배적인 성격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섞인 별명이었다.[10] 1910년 주지사 선거 패배 직후 지지자들에게 남긴 위로의 말.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이 드러난다.[11] 사실 미국의 주 부지사직은 실권이 거의 없는 명예직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는데, 하딩은 이 자리를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홍보의 장으로 완벽하게 활용했다.[12]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때 도허티가 하딩을 '가스라이팅' 수준으로 세뇌하여 대통령의 길로 떠밀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13] 이를 두고 훗날 사학자들은 "하딩은 신념이 없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14] 당시 공화당 지도부 내에서 오간 대화 중 일부.[15] 실제로는 당시 하딩은 유부녀 캐리 필립스와 15년째 불륜 중이었고, 내연녀 난 브리튼과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거짓말을 했다.[16] 하지만 후버는 하딩의 사생활과 오하이오 갱들의 천박한 태도를 매우 혐오했으며, 훗날 회고록에서 하딩의 통제력 부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17] 포브스의 비리가 드러나자 그의 부관이었던 찰스 크레이머는 자살을 선택했고, 이는 하딩의 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8] 이 발언은 훗날 그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인용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했던 인간적인 고뇌의 산물로도 해석된다.[19] 사실 하딩은 스캔들 폭로를 두려워해 도망치듯 워싱턴을 떠난 측면도 있었다. 그는 열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스캔들 관련 보고서를 읽으며 고통스러워했다.[20] 하딩의 고향 친구이자 동종요법 의사였다. 전문적인 심장 질환 진단 능력이 부족했음에도 하딩의 신뢰만으로 주치의 자리를 꿰찼다.[21] 이는 티팟 돔 스캔들의 핵심 주동자인 앨버트 폴과 해리 도허티에 대한 배신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22] 하딩이 죽기 직전, 침대 곁에서 부인 플로렌스가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잡지 기사를 읽어주는 것을 듣고 남긴 유언으로 알려져 있다.[23] 하지만 가스톤 민스는 희대의 사기꾼이자 협박범으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라, 현대 사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자극적인 스토리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24] 당시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를 '돈을 노린 사기극'이라며 몰아세웠으나, 2015년 DNA 검사 결과 난 브리튼의 딸은 진짜로 하딩의 자식임이 확인되었다. 하딩의 결백을 믿었던 지지자들에게는 사후 90년 만에 확인사살이 가해진 셈.[25] 21세기 수정주의 사학자들이 하딩의 정책적 성과를 분석하며 내놓는 공통적인 견해.[26] 하딩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주장해 온 핵심 경제 철학. 훗날 레이거노믹스의 원형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27]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으로 볼 때 이는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한 계획이었다.[28] 일본은 이 '3'이라는 수치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노예가 되라는 것이냐'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하딩 행정부의 강력한 압박과 내부적인 경제난으로 인해 결국 수용했다.[29] 1921년 법안 서명식 직후 하딩이 남긴 말. 그는 연방 정부의 방만한 지출을 억제하는 것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았다.[30] 도스는 훗날 부통령을 지내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거물이다. 그는 매우 다혈질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인물로, 하딩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예산 개혁을 밀어붙였다.[31] 다만 하딩 자신은 퇴역 군인국(Veterans Bureau) 신설을 지원하는 등 복지에도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앉힌 친구 찰스 포브스가 예산을 횡령했다는 점이다.[32] 1921년 10월 26일, 앨라배마 주 버밍엄 연설 중.[33] 하딩이 흑인 권익에 관심을 가진 것이 본인의 혈통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략적 행보였다는 시각도 있으나, 당시 남부의 살벌한 분위기를 고려하면 정략적 판단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위험한 도박이었다.[34] 연설 직후 하딩은 측근에게 "내가 오늘 남부의 친구들을 많이 잃은 것 같군"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고 한다.[35] 이 연설은 당시 라디오 방송 기술의 한계로 전국에 생중계되지는 못했으나, 신문 보도를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며 엄청난 찬반 논쟁을 일으켰다.[36] 이후 공화당은 1960년대 '남부 전략'을 택하며 남부 백인들의 표심을 공략하는 보수 정당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다.[37] 플로렌스가 남편 하딩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정계 진출을 종용하며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라고 전해진다.[38] 훗날 하딩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에이머스 클링은 "내 사위가 대통령이다!"라며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니 인간사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39] 난 브리튼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하딩과의 관계에 대한 소회.[40] 하딩이 캐리 필립스에게 보낸 수백 통의 연서(Love Letter) 중 일부. 이 편지들은 훗날 하딩의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핵폭탄이 되었다.[41] 하딩은 편지에서 자신의 성기를 '제리(Jerry)'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온갖 성적 판타지를 서술했다. 이는 점잖은 신사 이미지였던 하딩에게는 회생 불능의 타격이었다.[42] 훗날 민주당의 거물 윌리엄 깁스 매커두는 하딩의 연설을 두고 "의미의 숲을 지나가는 음절의 행진"이라고 비꼬았다.[43] 도허티는 훗날 하딩 사망 이후 터진 각종 비리 사건에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갔으며, 자신이 하딩을 대통령으로 만든 과정을 자화자찬하는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뻔뻔함의 극치.[44] 하딩이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측근들이 연루된 비리 보고를 받은 뒤 남긴 탄식.[45] 바위 모양이 찻주전자(Teapot)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46] 이전까지 정치적 책임으로 사퇴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뇌물수수로 실형을 산 장관은 폴이 처음이었다.[47] 하딩은 크래머의 자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포브스를 전적으로 불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였다.[48] 다만 이는 하딩을 깎아내리기 위한 정적들의 과장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무리 하딩이라도 국가 재산을 판돈으로 걸 만큼 개념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 물론 세금을 축낸 '오하이오 갱'들의 행태를 보면 아주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49] HBO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 중 해리 도허티의 대사. 하딩을 철저히 '이미지만 소비되는 꼭두각시'로 취급하는 극 중 연출을 잘 보여준다.[50] 1931년 봉헌식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남긴 추도사 중 일부. 하딩의 공적을 기리기보다는 그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확인사살한 연설로 유명하다.[51] 물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대리석 원형 구조 특성상 바람이 불면 특유의 휘파람 소리가 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