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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생애4. 평가5. 매킨리 산 명칭 논란6. 기타
6.1. 검소한 생활6.2. 취미

1. 개요[편집]

미국은 이제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 취임사 중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남북전쟁 참전 용사 출신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이며, 19세기 말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기인 이른바 '도금 시대(Gilded Age)'의 정점이자, 20세기 진보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던 정치가이다.

그는 흔히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자'이자 '현대적 선거 캠페인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특히 1896년 대선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는 단순히 한 명의 대통령을 선출한 것을 넘어, 미국 정치 지형을 공화당 우위의 시대로 재편한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또한 미국-스페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등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이 고립주의를 탈피하고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한 '제국 건설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재선 직후 무정부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지며,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암살당한 대통령이라는 비극적인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의 서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라는 불세출의 풍운아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매킨리 본인의 업적은 후임자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수정주의 사학계를 중심으로 매킨리가 구축한 '근대적 대통령제'의 권위와 행정적 기틀이 없었다면 루스벨트의 개혁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 상세[편집]

매킨리는 평생 '대통령'이라는 직함만큼이나 '소령(Major)'이라는 호칭을 애지중지했다. 이는 그가 남북전쟁 당시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전장의 참혹함을 몸소 겪으며 자수성가한 인물임을 상징한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기에 임기 초반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직전까지 최대한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던 '신중한 평화주의자'였으나, 일단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그 누구보다 단호하게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냉혹한 전략가로 변모했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강철의 손을 가진 벨벳 장갑'으로 비유되곤 한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신사적이며 남의 말을 경청하는 전형적인 오하이오 신사였으나, 배후에서는 '킹메이커' 마크 한나와 함께 치밀하게 여론을 조작하고 당내 파벌을 장악하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아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산업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당시 미국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낸 준비된 지도자였음을 시사한다.

그를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는 관세이다. 매킨리는 "외국 제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가 곧 미국 노동자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농민과 노동자 계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북부 산업 자본가들과 숙련 노동자들을 공화당의 깃발 아래 묶어세우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그가 제정했던 '매킨리 관세법'은 국제적으로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국내적으로는 미국 산업의 자립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1]

역사학자들은 매킨리의 당선을 '1896년의 체제(System of 1896)'라고 부른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지속되던 민주당과 공화당의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고, 공화당이 향후 30여 년간 미국 정치를 주도하게 된 사건을 의미한다. 매킨리는 남부의 농본주의에 기반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포퓰리즘에 맞서, 도시, 산업, 그리고 '금본위제'를 수호하는 보수적 가치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말 그대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시작되는 서막이었다. 서부 개척이 마무리되고 눈을 바다 너머로 돌리던 시기, 매킨리는 그 변화의 파도를 타고 미국을 세계 무대의 주연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암살되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면 미국의 진보주의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는 여전히 역사학계의 흥미로운 가상 시나리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3. 생애[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윌리엄 매킨리/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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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매킨리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극단적인 재해석을 거쳐왔다. 그가 서거한 직후에는 "미국을 세계 강대국으로 이끈 성군"이자 "순교한 지도자"로 추앙받았으나, 20세기 중반 진보주의 사관이 득세하면서 "마크 한나의 꼭두각시" 혹은 "기업 이익에 매몰된 수구주의자"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수정주의 사학자들은 매킨리를 '현대적 대통령제의 진정한 설계자'로 복권시키며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매킨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백악관의 위상을 의회 우위의 시대에서 대통령 우위의 시대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정치는 의회가 주도하고 대통령은 행정 집행자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으나, 매킨리는 미국-스페인 전쟁을 거치며 군 통수권자로서의 권한을 극대화했다. 그는 백악관에 '전쟁 상황실'을 최초로 설치하고 전선의 지휘관들과 직접 소통하며 전략을 구상했는데, 이는 훗날 20세기 강한 대통령들의 모델이 되었다.[2]

경제적 측면에서 매킨리는 '도금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미국의 산업 패권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금본위제와 보호관세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조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렸고, 1890년대의 극심한 경제 공황을 종식하며 20세기 초반의 번영(Pax Americana의 전초)을 견인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대기업의 독점 체제가 강화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나, 미국을 '농업국'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체질 개선을 완수한 공로는 부인하기 어렵다.

반면, 그의 대외 정책은 '제국주의'라는 꼬리표와 함께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필리핀 점령 과정에서 발생한 참혹한 전쟁과 원주민 탄압은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건국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비판론자들은 매킨리가 '신의 계시'를 운운하며 필리핀 병합을 결정한 것을 두고, 종교를 침략의 도구로 사용한 전형적인 서구 제국주의자의 오만이라고 지적한다.[3]

결론적으로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닫고 새로운 페이지를 연 '전환기의 지도자'였다. 그는 남북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구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동시에, 글로벌 경제와 국제 정치를 고민하기 시작한 신시대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온화한 성품 뒤에 숨겨진 냉철한 정치적 계산과 조직 장악력은 그를 단순히 '운 좋은 정치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의 항로를 근본적으로 바꾼 전략가로 평가하게 만든다.

비록 그의 이름은 오늘날 루스벨트나 링컨만큼 대중적이지 않을지 모르나, 우리가 아는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뼈대는 캔턴 출신의 이 온건한 소령(Major)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매킨리 산 명칭 논란[편집]

윌리엄 매킨리의 사후, 그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본인이 단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알래스카의 북미 최고봉에 새겨지며 100년 넘게 이어질 거대한 명칭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해발 6,190m에 달하는 이 거산의 이름이 '매킨리 산(Mount McKinley)'으로 명명된 것은 그의 재임 시절인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알래스카를 탐사하던 금광 탐사 가이드 윌리엄 디키(William Dickey)가 이 산을 발견한 뒤, 자신이 지지하던 공화당 대선 후보 매킨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 시초였다. 특별한 과학적 근거나 역사적 연원이 있는 명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 미국 연방 정부가 이를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면서 전 세계 지도에 '매킨리'라는 이름이 박제되었다.[4]

그러나 이 명칭은 태생부터 원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었다. 알래스카 토착민인 코유콘(Koyukon) 아타바스칸 족은 수천 년 전부터 이 산을 '위대한 것' 혹은 '높은 곳'이라는 뜻의 데날리라고 불러왔기 때문이다.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매킨리라는 이름은 제국주의적 오만함과 외지인에 의한 역사적 탈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5년부터 알래스카 주 정부는 연방 정부에 명칭 복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으나, 매킨리의 고향인 오하이오 출신 의원들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 논쟁은 21세기 들어 미국 내의 역사 정체성과 문화적 감수성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오하이오주 의원들은 "매킨리 대통령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주장했고, 알래스카 측은 "정치적 기념비가 지형의 고유한 정체성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이 해묵은 갈등은 2015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이르러서야 종지부를 찍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알래스카 방문을 앞두고 내무부 장관의 권한을 빌려 이 산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데날리'로 복원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오하이오 출신 공화당원들(당시 존 베이너 하원 의장 등)은 "헌법적 절차를 무시한 독단"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으나, 여론은 대체로 원주민의 권리와 지리적 진실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 명칭 변경 사건은 매킨리라는 인물이 현대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미국의 번영을 연 위대한 지도자'로서 거대한 산의 이름으로 추앙받았으나, 다원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이름은 '보편적 가치'보다는 '특정 시대의 산물'로 재평가받게 된 것이다.

비록 지도 위에서 매킨리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이 논란 자체가 역설적으로 매킨리가 미국 역사에서 차지했던 거대한 비중을 증명한다. 이름 하나를 놓고 주(州)와 주가 싸우고, 대통령이 직접 나설 만큼 매킨리는 여전히 미국 정치 지형의 뜨거운 상징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6. 기타[편집]

  •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애처가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아내인 이다 색스턴 매킨리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결혼 직후 두 딸을 연이어 잃고 친정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우울증뇌전증을 앓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아내의 병수발을 위해 매킨리는 사실상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백악관 공식 만찬 도중 아내의 얼굴에 경련이 오면,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아내의 얼굴을 살짝 덮어주는 방식으로 프라이버시를 지켜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원래 대통령의 좌석은 영부인과 마주 보는 형태여야 하는 의전 관례를 깨고 "내 아내는 내 옆에 있어야 한다"며 항상 옆자리에 앉혔다. 이 때문에 정적들로부터 "대통령이 국정보다 가정사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매킨리는 "나는 대통령이기 전에 남편이다"라는 간지 폭풍급 멘트로 응수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가 암살당했을 때, 총 맞은 직후 비서에게 건넨 첫마디가 "제발 내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알릴 때 조심해 주게(My wife, be careful, Cortelyou, how you tell her, oh, be careful)."였을 정도니 말 다 했다.[5]
  •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왼쪽 옷깃에 항상 꽂혀 있던 붉은 카네이션이었다. 매킨리 본인은 이 꽃을 자신의 '럭키 아이템'으로 굳게 믿고 있었으며, 지지자들이나 아이들을 만날 때 행운을 나눠준다는 의미로 이 꽃을 뽑아 선물하곤 했다. 그런데 이 습관이 결과적으로 그의 사망 플래그가 되고 말았다. 1901년 팬아메리카 박람회장에서 암살자 리언 촐고츠를 만나기 불과 몇 초 전, 매킨리는 자신을 보러 온 어린 소녀에게 "자, 나의 행운을 너에게 줄게"라며 옷깃의 카네이션을 선물했다. 즉, 총탄을 맞던 그 순간 매킨리의 몸에는 행운의 상징이 없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우연 때문에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훗날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는 매킨리를 기리기 위해 붉은 카네이션을 주화(州花)로 채택하게 된다.
  • 미국 대통령 중 사병으로 입대해 장교(소령)까지 올라간 유일한 인물이다.[6] 특히 안티에탐 전투 당시의 일화가 유명한데,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최전방 참호 속에서 굶주린 병사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식사를 직접 배달해 주는 기행(?)에 가까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상관이었던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내가 본 가장 용감한 젊은이"라며 매킨리를 극찬했고, 이때 쌓은 인맥과 '전쟁 영웅' 이미지는 훗날 그가 정치 거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대통령 재임 중 미서전쟁 발발 직전까지도 "나는 수천 명의 젊은이가 시체가 되는 것을 보았다. 전쟁만큼은 막아야 한다"며 비둘기파적인 면모를 보였다. 물론 여론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전쟁을 선포하긴 했지만...
  • 해나는 매킨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굿즈'를 제작해 뿌리기도 했다. 매킨리의 초상화가 그려진 단추나 깃발 등이 그것인데, 이게 워낙 잘 먹혀서 오늘날의 선거 마케팅의 시조새 격이 되었다. 매킨리가 해나를 부를 때 쓰던 애칭은 딱히 기록에 없지만, 해나는 사석에서 매킨리를 "The Major(소령님)"라고 부르며 남북전쟁 당시의 계급으로 예우하곤 했다.
  • 정작 해나는 본인이 대통령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조종하는(흔히 말하는 흑막) 것을 즐기는 타입이었기 때문. 진정한 흑막의 미학
  • 미국 대통령 중 종교적 독실함으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철저한 감리교 신자였다. 단순히 일요일에 교회만 나가는 수준이 아니라, 그의 삶 전반과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종교적 가치관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이는 그를 지지하던 개신교 세력에게는 '성자 같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으나, 반대로 제국주의 확장을 비판하던 이들에게는 '오만한 종교적 우월주의'라는 비판을 듣게 하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매킨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낸시 매킨리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보다 그가 교회 집사로 봉사할 때 더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으며, 바쁜 공무 중에도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특히 그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가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이었는데, 비극적이게도 이 곡은 훗날 그가 암살당한 직후 임종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읊조린 노래가 되었다. [ 이 곡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밴드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여러모로 비극적인 순간과 연이 깊은 노래.] 매킨리의 신앙심이 역사적으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이 된 사건은 바로 미서전쟁 이후 필리핀의 영유권을 결정할 때였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타국의 영토를 식민지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매킨리는 감리교 대표단과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남겨 후대 사학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었다.
"나는 백악관 복도를 밤새도록 서성이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마침내 나는 신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필리핀인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그들을 교육시키고, 품격을 높여주며,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7]

이 발언은 훗날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의 종교적 버전으로 해석되었으며, 미국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물론 현대의 수정주의 사학자들은 이 "신의 계시" 발언이 사실은 정치적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고도의 수사학적 장치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 그의 신앙은 특유의 온화한 성격 형성에도 큰 기여를 했다. 매킨리는 정적들에게도 결코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백악관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마치 성직자와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대중적 인기는 매우 높았으나, 결단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온화한 성품'의 기저에는 자신의 신념(혹은 신의 뜻)이 옳다는 확고하고도 고집스러운 믿음이 깔려 있었다.
  • 그의 장례식은 사실상 거대한 감리교 예배 형식으로 치러졌으며, 미국 전역의 감리교회는 그를 '순교한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대대적인 추모 열기를 보였다.
  • 재임 중 일요일에는 어떠한 공식 업무도 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일요일 아침만큼은 교회에 가는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다.
  • 훗날 그를 암살한 리언 촐고츠가 무신론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미국 교회 사회는 이 사건을 '악마가 성자를 공격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분노를 쏟아냈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프랭클린 D. 루스벨트처럼 라디오나 영상을 적극 활용한 세대는 아니었지만, 그는 오로지 육성과 풍채만으로 수만 명의 청중을 압도할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다. 매킨리의 목소리에 대한 당대 언론의 묘사는 한결같았다. "멀리서도 들리는 맑고 깊은 울림"이 그것이다. 현대처럼 마이크와 스피커가 없던 시절,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청중 앞에서 연설하려면 신체적인 발성 능력이 필수적이었는데, 매킨리는 이를 타고났다. [ 사실 그가 남북전쟁 당시 소령까지 진급하며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전장의 소음 속에서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성량 덕분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는데, 이는 그가 추구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일맥상통했다. 당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격정적인 사자후 스타일이었다면, 매킨리는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인,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스타일로 청중을 설득했다. 쉽게 말해 브라이언이 락커였다면 매킨리는 바리톤 가수에 가까웠다. 그의 연설 스타일이 가장 빛을 발한 순간은 1896년 대선 당시의 '현관 앞 선거 운동'이었다. 매킨리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대신 오하이오주 캔턴의 자택 현관(Porch)에서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연설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전략이었다.
  • 100년도 더 된 매킨리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매킨리는 자신의 연설 중 일부를 실린더(Cylinder)에 녹음했다. 녹음된 내용은 주로 그의 대표적인 공약이었던 '보호무역'과 '금본위제'에 대한 짧은 연설들이다. 초기 녹음본은 음질이 극악이었으나, 현대 기술로 복원된 파일들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정확한 발음(Enunciation)을 구사했는지 알 수 있다. 음절 하나하나를 씹어 뱉는 듯한 명확함은 그가 연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준다. 유튜브 등지에서 '매킨리의 마지막 연설'이라며 돌아다니는 파일 중 일부는 당시 성우가 재현한 것이거나 위조된 것이 섞여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 매킨리의 목소리는 훨씬 더 중후하고 차분한 편이다.
  • 연설문을 작성할 때 비서진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최종 수정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했다. 그는 특히 "우리의(Our)", "국민의(The People's)"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는 미국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수사였다. 또한 그는 연설 중간에 적절한 '침묵'을 활용할 줄 아는 연사였다. 중요한 대목을 말하기 직전, 그는 약 3~5초간 청중을 응시하며 정적을 만들었는데, 이 정적의 무게가 웬만한 고함보다 훨씬 컸다고 전해진다. [8]
  • 그는 연설 중 원고를 거의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암기력이 워낙 뛰어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
  • 1901년 암살당하기 전 팬아메리카 박람회에서 했던 마지막 공식 연설은 미국이 고립주의를 탈피하고 세계 무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연설은 후대 사학자들에게 매킨리의 '정치적 유언'으로 평가받는다.

6.1. 검소한 생활[편집]

미국 대통령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존 F. 케네디처럼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인물도 많지만, 매킨리는 오히려 '정치하다가 집안 기둥뿌리 뽑힐 뻔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고난 극복형 인물에 가깝다. 특히 주지사 시절 겪었던 파산 위기는 그의 정치 인생을 끝장낼 뻔했으나, 오히려 국민들에게 "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사건은 1893년, 매킨리가 오하이오 주지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터졌다. 당시 매킨리는 젊은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친구 로버트 워커(Robert Walker)의 빚보증을 서주었는데, 하필이면 1893년 경제 공황(Panic of 1893)이 터지면서 워커의 사업이 시원하게 말아먹게 된다. 당시 매킨리가 짊어지게 된 빚은 약 13만 달러였는데, 이를 현재 가치(2020년대 기준)로 환산하면 대략 400만 달러(한화 약 55억 원) 이상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9] 매킨리는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지만,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자신의 전 재산과 아내 이다가 상속받은 부동산까지 모두 처분해 빚을 갚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아내의 개인 재산까지 내놓으려 하자 주변에서 말릴 정도였는데, 매킨리는 "내 명예가 아내의 돈보다 중요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쯤 되면 공처가가 아니라 진정한 상남자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매킨리의 생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호사스러운 연회보다는 조용한 가족 식사를 즐겼으며, 백악관의 운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꼼꼼하게 장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는 항상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고수했는데, 옷이 해질 때까지 입는 경우가 많아 비서들이 몰래 새 옷으로 바꿔치기해야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대단한 미식가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소박하게 구운 스테이크와 감자, 그리고 아내 이다가 챙겨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었다. 그나마 돈이 드는 취미라고는 시가(Cigar)를 피우는 것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주변에서 선물 들어온 것을 주로 피웠지 본인이 비싼 걸 찾아 다니지는 않았다. 파산 위기 당시 매킨리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일시적으로 심장 질환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아내 이다 매킨리는 평소 사치스러운 보석을 좋아한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남편의 파산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다이아몬드 컬렉션을 가장 먼저 팔라고 내놓는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역시 끼리끼리 만난다는 건 진리다.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매킨리의 이런 '지나친 정직함'을 두고 "정치적 센스가 부족하다"고 비꼬기도 했으나, 정작 루스벨트 본인도 매킨리의 청렴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6.2. 취미[편집]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매킨리는 상당히 정적인 취미를 즐긴 인물로 꼽힌다. 후임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파리 사냥을 나가고 복싱을 하다 눈이 터지는(?) 익스트림한 생활을 즐겼다면, 매킨리는 전형적인 19세기 신사 스타일의 절제된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의 지독한 습관도 숨어 있었다.

매킨리의 가장 대표적인 기호품은 단연 시가였다. 그는 당시 정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헤비 스모커였는데, 하루에 최소 10개에서 20개 사이의 시가를 피웠다고 전해진다. [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수치냐면, 일반적인 시가 한 대를 피우는 데 보통 30분에서 1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입에 시가를 물고 있었다는 소리다.]

특이하게도 그는 대중 앞에 서거나 사진을 찍을 때는 절대로 시가를 입에 물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항상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본인의 철칙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아있는 매킨리의 사진 중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미지 관리의 화신

그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적들과 대화할 때 최고급 시가를 권하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방식을 애용했다. 마크 해나와 밀담을 나눌 때도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당연히 이 지독한 흡연 습관은 그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말년에는 만성적인 소화 불량과 심장 문제를 겪었는데, 주치의들이 흡연을 줄이라고 권고할 때마다 "이것마저 없으면 이 고된 직무를 어떻게 견디겠나"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매킨리는 화려한 프랑스식 코스 요리보다는 전형적인 미국식 식단을 선호했다. 오하이오 출신답게 소박하면서도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피격당했을 때 상처 회복을 더디게 만든 원인(비만 및 대사 질환)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는 아침 식사로 스테이크와 달걀, 그리고 다량의 감자 요리를 먹는 것을 즐겼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것은 '콘 비프 해시(Corned Beef Hash)'로, 짭짤하게 절인 쇠고기를 다져 감자와 볶아낸 요리였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에게 커피를 배달하며 '커피 소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만큼, 본인도 엄청난 커피 마니아였다. 식사 때마다 진하게 내린 블랙커피를 몇 잔씩 마셨으며, 이는 그의 불면증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매킨리는 술에 대해서는 매우 절제하는 편이었다. 공식 만찬에서 와인 한두 잔을 드는 것 외에는 폭음을 즐기지 않았는데, 이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영부인 이다 매킨리의 건강을 돌봐야 했던 가정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정적인 성격답게 그는 음악 감상을 즐겼다. 특히 복잡한 클래식보다는 단순하고 경건한 찬송가를 좋아했다.

Nearer, My God, to Thee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가로, 평소에도 흥얼거렸을 뿐만 아니라 암살당해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같은 노래가 되었다. [10]

대통령이 된 후 그는 마차를 타고 워싱턴 DC 근교를 천천히 도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그는 마차 안에서도 아내 이다의 손을 꼭 잡고 창밖 풍경을 설명해주곤 했는데, 이 모습이 시민들에게 자주 목격되어 '사랑꾼 대통령' 이미지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매킨리는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이는 문구류에 상당히 집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최고급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자신이 서명한 문서의 글씨체가 흐트러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의 친필 서명을 보면 굉장히 정교하고 일관된 필체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꼼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된 '붉은 카네이션'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거의 강박에 가까운 수집 취미였다. 매일 아침 신선한 카네이션이 공급되지 않으면 일과를 시작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1] 물론 이 과정에서 소비자 물가 상승이라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이는 훗날 공화당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2] 특히 그의 뒤를 이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화려한 업적들은 사실 매킨리가 닦아놓은 강력한 대통령제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3] 매킨리는 필리핀 병합을 고민하며 밤새 기도한 끝에 "그들을 기독교화하고 문명화하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회고했으나, 이미 필리핀인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였다.[4] 당시 매킨리의 고향인 오하이오 정치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들에게 매킨리 산은 위대한 대통령의 유산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와 같았다.[5] 다만 이 지독한 사랑이 오히려 아내의 의존증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6] 남북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대통령 세대에 속한다.[7] 정작 필리핀은 이미 수백 년간 스페인의 통치를 받으며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 국가였다(...). 개신교 중심의 사고방식이 낳은 전형적인 오류였던 셈.[8] 이를 두고 당시 정적들은 "매킨리의 침묵은 금본위제를 옹호하기 위한 금빛 정적"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다.[9] 당시 주지사 연봉이 고작 몇 천 달러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냥 인생 퇴장 버튼 누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10]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악단이 연주했다는 바로 그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