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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윌리엄 매킨리

1. 생애
1.1. 유년기1.2. 남북전쟁 참전1.3. 변호사 및 초기 정치 경력1.4. 결혼과 가정1.5. 연방 하원의원 시절1.6. 오하이오 주지사1.7.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1.8. 제25대 대통령 (1897-1901)
1.8.1. 취임 초기1.8.2. 미국-스페인 전쟁1.8.3. 필리핀 전쟁과 식민지 통치1.8.4. 하와이 병합1.8.5. 경제 정책
1.9. 1900년 미국 대통령 선거1.10. 암살

1. 생애[편집]

1.1. 유년기[편집]

1843년 1월 29일 오하이오 주 나일스에서 윌리엄 매킨리 시니어와 낸시 앨리슨 매킨리 사이의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매킨리 가문은 영국계 및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혈통으로 18세기에 서부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으며, 양가 모두 철강 생산을 가업으로 했다.

매킨리가 10세 때 가족은 몇 마일 떨어진 폴란드 빌리지로 이주하였다. 1852년 사립 학교인 폴란드 신학교에 입학하여 8년간 수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에버릿 도서관과 토론 사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모친은 어린 매킨리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가 감리교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매킨리는 모친의 엄격한 도덕 표준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17세에 펜실베이니아주 미드빌에 있는 앨러게니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질병에 걸려 중퇴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했으나 집안 재정 악화로 대학에 복학하지 못했다. 마운트 유니온 대학교에서도 잠시 공부했으며, 이후 우체국 서기와 학교 교사로 일했다.

1.2. 남북전쟁 참전[편집]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의 오하이오 의용병 제23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매킨리는 군인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여 고향 신문에 군대와 연방의 대의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62년 4월 상사로 진급했다.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 중 하나인 앤티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소위가 되었다. 앤티텀 전투에서 매킨리는 부대원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다가 심한 공격을 받았지만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부소위 임명장을 받았다.

훗날 19대 대통령러더퍼드 헤이스 대령의 부관으로 종사하여 1865년 23세에 소령을 달았다. 헤이스는 매킨리의 멘토가 되었으며, 1893년 헤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인연과 우정이 지속되었다. 의용군 사병이 일약 소령이 된 정말 대단한 군 경력으로, 이는 훗날 정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3. 변호사 및 초기 정치 경력[편집]

전쟁이 끝난 후 뉴욕 올버니의 로스쿨을 다녔고, 186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곧 미국 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869년에는 지방 검사가 되었다.

1.4. 결혼과 가정[편집]

1871년 아이다 섹스턴과 결혼했다. 두 딸을 두었으나 비극적인 가정사를 겪었다. 1873년 아이다의 어머니가 죽었고, 얼마 안 가 둘째 딸이 어린 나이에 숨졌으며, 장녀 케시도 4살 되던 해 병사했다.

연달아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아이다는 간질을 앓게 되었고 정신이 많이 쇠약해졌다. 매킨리는 헌신적인 애처가로 알려져 있다. 원래 백악관 행사 준비와 접객은 영부인이 했지만, 건강상 문제가 있던 영부인 아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손수 행사 준비를 진두지휘해야 했다. 공식 석상에서 부인이 간질로 발작을 하면 손수건을 부인의 얼굴 위에 덮어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1.5. 연방 하원의원 시절[편집]

7년 뒤인 1876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이후 6번(12년)이나 당선되는 등 계속 출세가도를 달렸다. 34세에 의회에 진출하여 인간적인 매력과 타의 모범이 되는 성품, 예리한 지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상승했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회 세입위원회에 소속되었다. 함께 의원생활을 했던 로버트 M. 폴레트 시니어는 매킨리가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견해들을 대변했고 중대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거의 국민 편에 섰고 사적 이익을 배격했다고 회고했다.

하원의원으로 보낸 14년 간 공화당 내에서 주도적인 관세문제 전문가로 위치를 굳혔다. 벤저민 해리슨 시절인 1890년에는 이른바 매킨리 관세법을 입안했는데, 이 법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크게 올려 가격을 높여서 가격 경쟁에서 미국 상품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

1.6. 오하이오 주지사[편집]

1891년 오하이오주 지사로 선출되었고, 2개의 기간을 지냈다. 주지사로서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18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선두 주자로 나섰다.

1.7.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자신의 가까운 친구이자 클리블랜드의 사업가인 마크 한나와 함께 전국적으로 지원을 동원했다. 한나는 매킨리를 '번영을 불러올 인물'로 추켜세우며 후보 지명을 보장했다.

민주당에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경쟁자로 나섰다. 매킨리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정권의 자유무역이 실패했다고 비판하며 보호무역과 금본위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브라이언은 은화자유주조제도를 핵심 공약으로 삼았다.

선거 자금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J. P. 모건,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3명이 매킨리에게 후원한 돈만 1,200만 달러를 넘었다. 1896년 대선에 사용한 매킨리의 총 정치자금은 1,500만 달러 수준이었고, 브라이언은 55만 달러만 선거자금으로 지출했다.

후원을 주도한 J.P. 모건은 자사 은행들의 거래처를 모조리 압박하여 거래처 임직원들을 매킨리 대선 유세장에 총동원했고, 일부 주에서는 모건 소속 임원들이 대놓고 선거 당일날 투표소 앞에서 유권자들을 겁박했다.

드물게 여행을 다닌 매킨리는 캔턴에 있는 저택으로부터 현관 캠페인(Front Porch Campaign)을 벌였다. 최종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271대 176으로 매킨리가 승리했다.

1.8. 제25대 대통령 (1897-1901)[편집]

1.8.1. 취임 초기[편집]

1897년 3월 4일 제2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무렵 1893년 대공황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은화 주조에 관한 극단적인 논쟁이 불붙고 있었다. 통화 논쟁에 대한 조치는 뒤로 미루고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율의 관세를 제정하기 위한 임시의회를 소집했다.

1.8.2. 미국-스페인 전쟁[편집]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벌인 미국-스페인 전쟁이 매킨리 정권 시절 최대의 사건이었다. 언론은 스페인 군과 쿠바 혁명세력 사이의 교착상태를 보도하면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조지프 퓰리처의 선정주의가 여론을 동요시켰다. 4월 11일 매킨리는 쿠바에 미군을 보내는 권리를 의회에 요청했다. 4월 19일 의회는 쿠바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의 철수를 요구하는 공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00일 동안 진행된 이 전쟁에서 미합중국은 쿠바 산티아고 항의 스페인 함대를 격침하고 필리핀 마닐라를 손에 넣었으며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다.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쿠바를 장악했고,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할양받았다.

1.8.3. 필리핀 전쟁과 식민지 통치[편집]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던 필리핀인들은 필리핀 제1공화국 정부를 세워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매킨리는 미국-필리핀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이를 제압했다. 새로 얻은 식민지 주민들에 대해 일부 공화당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매킨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필리핀 침공을 해방이라고 둔갑하며 신이 명령하셨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필리핀은 이미 320년에 이르는 스페인 지배 속에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가톨릭 지역은 다소 온건하게 다루었으나, 이슬람이 대다수인 민다나오 섬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미국의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은 초기에 매킨리를 지지했으나 필리핀 정책을 알고 나서는 매킨리를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이라고 평가했다.

1.8.4. 하와이 병합[편집]

1898년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하였고, 나라의 모든 거주자가 미국 국민이 되었다. 매킨리는 하와이 합병을 최우선 외교 정책 목표 중 하나로 추구했다.

1.8.5. 경제 정책[편집]

매킨리 행정부의 친기업적 분위기 아래 미국의 기업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속도로 성장했다. 언론은 매킨리를 독점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유모' 한나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어린 아이로 풍자했다. 하지만 매킨리는 한나의 영향력에 압도되지 않았으며, 독점 기업들을 겨냥하여 공공의 선을 위협하는 위험한 음모라고 공격했다.

1.9. 1900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1900년 대선에서 재출마했고, 부통령 가렛 호바트가 이미 사망했기에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삼아 재선을 노렸다. 민주당은 다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후보로 내세웠다.

매킨리는 292대 155의 투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1872년 대선 이래 일반투표에서 가장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1.10. 암살[편집]

1901년 9월 6일 버펄로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박람회에 참석한 동안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츠에 의해 총 2발을 맞았다.

암살 당시 아이다는 건강 상태가 나빠서 호텔에 있고 매킨리 혼자 행사장에 갔는데, 총에 맞은 후에도 "아내와 함께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코르텔유(비서), 내가 총에 맞은 걸 아이다가 충격을 받지 않게 해 주게"라고 했다. 총에 맞은 후 암살범이 땅바닥에 맞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그를 때리지 않도록 해라!"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매킨리는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고 다소 회복 증세도 보였지만 결국 8일 후인 1901년 9월 14일에 사망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 한 말은 "이제 나는 틀렸소. 목사를 불러 기도를 할 시간인 듯 합니다"였다고 한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도 '내가 죽으면 아내는 누가 보살피나' 하며 부인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암살자 레온 촐고츠는 재판을 받고 1901년 10월 29일 뉴욕 어번의 감옥에서 전기의자형으로 처형되었다. 매킨리의 후임은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승계했다.

아이다는 건강 때문에 매킨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매킨리 사망 후 아이다는 백악관을 떠나 고향 캔턴으로 돌아가 생활했는데, 몸이 더욱 나빠지는 와중에도 매일 매킨리의 묘지를 참배했다. 아이다는 매킨리 사망 6년 뒤인 1907년 5월 26일에 사망했으며, 매킨리와 두 딸이 묻힌 기념 묘지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