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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mes_Abram_Garfield,_photo_portrait_seated.jp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정치 입문2.3. 대통령 당선2.4. 암살 사건
3. 평가4. 여담

1. 개요[편집]

제임스 에이브러햄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재임 기간은 1881년 3월 4일부터 1881년 9월 19일까지로, 취임한 지 불과 200일도 채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에 이어 두 번째로 암살당한 미국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831년 11월 19일 오하이오 주 오렌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브럼 가필드가 그가 태어난 지 2년도 안 되어 사망하면서 극빈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 일라이자 발루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네 명의 자녀를 키웠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학구열이 대단했던 가필드는 운하 선원, 목수 등 각종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1849년 지가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851년 오하이오 주 하이람에 있는 웨스턴 리저브 이클렉틱 인스티튜트(하이람 칼리지의 전신)에 입학했다. 이후 매사추세츠 주의 윌리엄스 칼리지로 편입하여 1856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하이람 칼리지로 돌아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고, 1857년에는 26세의 나이로 이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1858년 루크레티아 루돌프와 결혼했다.

2.2. 정치 입문[편집]

1859년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공화당 소속이었으며 노예제 폐지를 강력히 지지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에 입대했다. 42연대를 조직하여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1862년 미들 크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준장으로 진급했다. 치카모가 전투에서도 참전했으며 소장까지 진급했다.

1863년 오하이오 주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군에서 사임한 뒤 의회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880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며 공화당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재건 시대에는 급진파 공화당원으로 활동했으며, 하원 세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3. 대통령 당선[편집]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원래는 율리시스 S. 그랜트의 3선을 지지하는 스톨워트파와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하는 하프브리드파가 팽팽히 맞섰다. 가필드는 오하이오 주 출신의 존 셔먼 재무장관을 지지했지만, 36차 투표 끝에 타협 후보로 전격 지명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스톨워트파의 체스터 A. 아서가 선택되었다.

본선에서는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 장군과 대결했다. 선거 결과는 매우 근소했는데, 일반 투표에서는 불과 0.1%포인트 차이로 승리했지만 선거인단에서는 214대 155로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2.4. 암살 사건[편집]

188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후에는 공직 임명을 둘러싸고 공화당 내 스톨워트파와 갈등을 빚었다. 특히 뉴욕 주의 공화당 보스였던 로스코 콩클링 상원의원과 심각하게 대립했다.

1881년 7월 2일, 워싱턴 D.C.의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기차역에서 찰스 J. 기토에게 총격을 당했다. 기토는 가필드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며 파리 영사직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실제로는 선거 운동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총알 한 발은 팔을 스쳤지만, 다른 한 발은 등에 박혔다. 당시 의료진은 손가락을 상처에 넣어 총알을 찾으려 했고, 소독하지 않은 기구를 사용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발명한 금속 탐지기로 총알을 찾으려 했지만 침대의 금속 스프링 때문에 실패했다.

가필드는 79일간 고통 속에서 투병했다.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뉴저지 주 롱브랜치로 옮겨졌지만, 1881년 9월 19일 패혈증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49세. 현대 의학자들은 총상 자체보다는 비위생적인 치료 과정에서 발생한 감염이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찰스 기토는 재판에서 자신은 무죄이며 의사들이 가필드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1882년 6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3. 평가[편집]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하원의원 시절의 경력으로 볼 때 유능한 정치인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암살은 미국 공직 제도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정실주의 시스템이 만연하여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공직자들이 교체되었다. 가필드의 뒤를 이은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1883년 펜들턴 공무원법을 서명하여 실적주의에 기반한 공무원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했다.

역사학자들의 대통령 순위 평가에서는 자료 부족으로 순위를 매기기 어려워 대체로 중하위권에 위치한다.

4. 여담[편집]

  • 양손잡이였으며, 동시에 양손으로 서로 다른 언어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손으로는 라틴어를, 다른 손으로는 그리스어를 동시에 쓸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 하원의원 시절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명확히 입증되지는 않았다.
  • 대통령 당선 당시 연방 하원의원, 상원의원 당선자, 대통령 당선자를 동시에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880년 선거에서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에도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취임으로 상원의원직은 포기했다.
  • 마지막으로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대통령이다.
  • 장례식은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장례식 중 하나였다.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 부인 루크레티아는 남편이 암살당하기 몇 달 전 말라리아에 걸렸었다. 가필드는 아내의 병 수발을 극진히 들었고, 이것이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 자녀는 7명을 두었으며, 이중 아들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 암살범 기토는 범행 전 가필드를 미행하며 여러 차례 암살 기회를 노렸다. 한 번은 가필드가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부인 앞에서는 차마 쏠 수 없다"며 범행을 포기했다고 한다.
  • 후임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는 스톨워트파였음에도 가필드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공무원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