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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9년 10월 5일 버몬트주 페어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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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2. 출생지에 관해[편집]
체스터 A. 아서는 미국 역사상 출생지의 적법성 문제로 가장 집요한 공격을 받은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이는 훗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겪었던 '버서(Birther)' 논란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루머 수준을 넘어 대선 정국에서 실제적인 정치적 위협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 논란의 핵심은 "아서가 사실은 미국 영토가 아닌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므로, 수정헌법 제2조에 명시된 '태생적 시민(Natural Born Citizen)'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은 민주당 측의 변호사였던 아서 P. 힌먼(Arthur P. Hinman)이었다. 그는 1880년 대선 당시 아서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아서 가문의 뒤를 샅샅이 캐기 시작했다. 힌먼은 아서의 부친인 윌리엄 아서 목사가 캐나다 퀘벡 주의 스탠스테드와 버먼트 주의 페어필드를 빈번하게 오가며 목회 활동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힌먼의 주장에 따르면, 아서는 1829년이 아니라 1828년에 캐나다의 스탠스테드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정치적 야망을 위해 동생의 출생 기록을 도용하거나 출생 연도를 조작해 버먼트 출생으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아서가 어린 시절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다는 증언들을 수집해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아서 본인은 이러한 공격에 대해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공식적인 반박 성명을 내는 대신 "나는 버먼트에서 태어났다"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고수했는데, 이는 오히려 대중의 의구심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서가 침묵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오가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실제로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서는 평소 자신이 1830년생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실제 기록상 그는 1829년생이었다. 젊은 시절 좀 더 젊어 보이고 싶은 허영심 혹은 단순한 착각으로 나이를 한 살 속여 말했던 것이, 출생지 논란과 맞물리면서 "나이를 속일 정도면 출생지도 속였을 것"이라는 논리로 번진 것이다.[1] 또한, 당시 국경 지대의 출생 기록이 워낙 부실했던 탓에 완벽한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한계도 존재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정밀한 조사 결과, 아서의 출생지는 버먼트 주 페어필드가 확실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윌리엄 아서 목사의 일기와 당시 교구의 기록을 대조해 본 결과, 아서가 태어날 무렵 가족은 이미 캐나다를 떠나 미국 영토 내에 정착해 있었다. 힌먼이 제시했던 증거들은 대부분 기억의 오류나 악의적인 왜곡에 기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이 아서에게 뼈아팠던 이유는,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자격 없는 자가 백악관을 점령했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가필드 암살범 기토가 아서를 찬양한 것과 맞물려, 출생지 의혹은 아서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아서는 임기 내내 이 '캐나다인'이라는 조롱 섞인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더더욱 완벽한 미국적 신사로서의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다.
아서의 출생지 논란은 미국 정치에서 '애국주의'와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초기 사례이다. 아서는 이 근거 없는 공격에 정면 대응하기보다 묵묵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결과로 증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훗날 그가 퇴임할 즈음에는 이 논란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가 보여준 탁월한 행정 능력과 품격이 "그가 어디서 태어났든 그는 진정한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서 개인에게 큰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사후에 자신의 개인 서신과 서류들을 대거 소각해 버린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사생활 침해와 왜곡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2]
이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은 민주당 측의 변호사였던 아서 P. 힌먼(Arthur P. Hinman)이었다. 그는 1880년 대선 당시 아서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아서 가문의 뒤를 샅샅이 캐기 시작했다. 힌먼은 아서의 부친인 윌리엄 아서 목사가 캐나다 퀘벡 주의 스탠스테드와 버먼트 주의 페어필드를 빈번하게 오가며 목회 활동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힌먼의 주장에 따르면, 아서는 1829년이 아니라 1828년에 캐나다의 스탠스테드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정치적 야망을 위해 동생의 출생 기록을 도용하거나 출생 연도를 조작해 버먼트 출생으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아서가 어린 시절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다는 증언들을 수집해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아서 본인은 이러한 공격에 대해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공식적인 반박 성명을 내는 대신 "나는 버먼트에서 태어났다"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고수했는데, 이는 오히려 대중의 의구심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서가 침묵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오가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실제로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서는 평소 자신이 1830년생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실제 기록상 그는 1829년생이었다. 젊은 시절 좀 더 젊어 보이고 싶은 허영심 혹은 단순한 착각으로 나이를 한 살 속여 말했던 것이, 출생지 논란과 맞물리면서 "나이를 속일 정도면 출생지도 속였을 것"이라는 논리로 번진 것이다.[1] 또한, 당시 국경 지대의 출생 기록이 워낙 부실했던 탓에 완벽한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한계도 존재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정밀한 조사 결과, 아서의 출생지는 버먼트 주 페어필드가 확실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윌리엄 아서 목사의 일기와 당시 교구의 기록을 대조해 본 결과, 아서가 태어날 무렵 가족은 이미 캐나다를 떠나 미국 영토 내에 정착해 있었다. 힌먼이 제시했던 증거들은 대부분 기억의 오류나 악의적인 왜곡에 기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이 아서에게 뼈아팠던 이유는,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자격 없는 자가 백악관을 점령했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가필드 암살범 기토가 아서를 찬양한 것과 맞물려, 출생지 의혹은 아서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아서는 임기 내내 이 '캐나다인'이라는 조롱 섞인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더더욱 완벽한 미국적 신사로서의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다.
아서의 출생지 논란은 미국 정치에서 '애국주의'와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초기 사례이다. 아서는 이 근거 없는 공격에 정면 대응하기보다 묵묵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결과로 증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훗날 그가 퇴임할 즈음에는 이 논란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가 보여준 탁월한 행정 능력과 품격이 "그가 어디서 태어났든 그는 진정한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서 개인에게 큰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사후에 자신의 개인 서신과 서류들을 대거 소각해 버린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사생활 침해와 왜곡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2]
3. 생애[편집]
3.1. 초기[편집]
체스터 A. 아서는 1829년 10월 5일 버몬트주 페어필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서의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큰 뿌리는 그의 아버지, 윌리엄 아서(William Arthur) 목사였다. 윌리엄 아서는 아일랜드 앤트림 주 출신의 이민자로, 전형적인 아일랜드인의 고집과 개신교적 결벽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온 뒤 침례교 목사가 되었는데, 당시 종교계에서도 손꼽히는 급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이러한 부친의 성향은 어린 체스터에게 두 가지 상반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강박적인 존중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친의 과격한 활동으로 인해 빈번하게 이사를 다녀야 했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윌리엄 아서는 설교 중에도 노예제를 강하게 비판하며 기득권층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아서 일가는 버몬트와 뉴욕 주 북부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는 '유목민적'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3]
어머니 말비나 스톤(Malvina Stone)은 뉴햄프셔 출신으로, 전형적인 뉴잉글랜드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공을 세운 기록이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애국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남편의 거친 배경을 보완해 주는 요소가 되었다. 말비나는 남편의 불같은 성격과 급진적인 활동 사이에서 9남매를 키워내며 가정의 중심을 잡았다.
체스터는 9남매 중 장남(전체적으로는 다섯째)이었는데, 위로 누나들만 넷이었던 환경 덕분에 일찍부터 세련된 매너와 여성에 대한 예의, 그리고 깔끔한 용모 관리법을 익히게 되었다. 훗날 그가 백악관에서 보여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교 술수와 '우아한 신사'로서의 면모는 바로 이 시기, 강한 아버지와 자애롭고 품위 있는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누나들 틈에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윌리엄 아서는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특히 '정직'과 '청결'을 강조했는데, 가난한 개척지 목사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스터는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유지해야 했다. 아서는 훗날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설교보다 내 구두의 광택에 더 엄격하셨다"고 농담 섞인 회상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아서가 목격한 부친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노예제 폐지론은 북부에서도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으며, 윌리엄 아서는 종종 폭도들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어린 체스터는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이는 훗날 아서가 변호사가 되었을 때 흑인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잠재적 동기가 된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의감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셈이다.
아서가 유년기를 보낸 뉴욕 북부 지역은 당시 개발이 덜 된 거친 황무지가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낚시와 사냥을 즐기며 호연지기를 길렀는데, 특히 낚시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유일하게 즐겼던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다. 그는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단순히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마을의 작은 학교들을 거쳐 15세의 나이에 유니언 칼리지에 입학할 준비를 마친다. 당시 그를 지켜본 이웃들은 "목사님의 아들은 말솜씨가 화려하고 옷 입는 품이 예사롭지 않아 분명 대도시에서 큰일을 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아서는 유년 시절의 가난과 빈번한 이사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성과 사교성을 잃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훗날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복잡한 정치 공학 속에서 살아남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서의 가계는 '이민자의 열정(아버지)'과 '전통적 가치(어머니)'가 결합된 형태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투쟁적이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의 원칙을 존중했고, 어머니처럼 조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우아함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배경은 그를 매우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즉, 하층민과 이민자들의 생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상류층의 세련미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 된 것이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가르쳤던 "신념을 위해 자리를 건다"는 가르침은 펜들턴법 통과라는 역사적 결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평소에는 세속적인 정치꾼처럼 보였던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목사의 아들'로서의 양심을 선택한 것은, 결국 유년 시절 골수까지 박혔던 아버지의 훈육 덕분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4]
이러한 부친의 성향은 어린 체스터에게 두 가지 상반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강박적인 존중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친의 과격한 활동으로 인해 빈번하게 이사를 다녀야 했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윌리엄 아서는 설교 중에도 노예제를 강하게 비판하며 기득권층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아서 일가는 버몬트와 뉴욕 주 북부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는 '유목민적'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3]
어머니 말비나 스톤(Malvina Stone)은 뉴햄프셔 출신으로, 전형적인 뉴잉글랜드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공을 세운 기록이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애국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남편의 거친 배경을 보완해 주는 요소가 되었다. 말비나는 남편의 불같은 성격과 급진적인 활동 사이에서 9남매를 키워내며 가정의 중심을 잡았다.
체스터는 9남매 중 장남(전체적으로는 다섯째)이었는데, 위로 누나들만 넷이었던 환경 덕분에 일찍부터 세련된 매너와 여성에 대한 예의, 그리고 깔끔한 용모 관리법을 익히게 되었다. 훗날 그가 백악관에서 보여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교 술수와 '우아한 신사'로서의 면모는 바로 이 시기, 강한 아버지와 자애롭고 품위 있는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누나들 틈에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윌리엄 아서는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특히 '정직'과 '청결'을 강조했는데, 가난한 개척지 목사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스터는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유지해야 했다. 아서는 훗날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설교보다 내 구두의 광택에 더 엄격하셨다"고 농담 섞인 회상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아서가 목격한 부친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노예제 폐지론은 북부에서도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으며, 윌리엄 아서는 종종 폭도들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어린 체스터는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이는 훗날 아서가 변호사가 되었을 때 흑인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잠재적 동기가 된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의감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셈이다.
아서가 유년기를 보낸 뉴욕 북부 지역은 당시 개발이 덜 된 거친 황무지가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낚시와 사냥을 즐기며 호연지기를 길렀는데, 특히 낚시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유일하게 즐겼던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다. 그는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단순히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마을의 작은 학교들을 거쳐 15세의 나이에 유니언 칼리지에 입학할 준비를 마친다. 당시 그를 지켜본 이웃들은 "목사님의 아들은 말솜씨가 화려하고 옷 입는 품이 예사롭지 않아 분명 대도시에서 큰일을 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아서는 유년 시절의 가난과 빈번한 이사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성과 사교성을 잃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훗날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복잡한 정치 공학 속에서 살아남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서의 가계는 '이민자의 열정(아버지)'과 '전통적 가치(어머니)'가 결합된 형태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투쟁적이지는 않았으나 아버지의 원칙을 존중했고, 어머니처럼 조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우아함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배경은 그를 매우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즉, 하층민과 이민자들의 생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상류층의 세련미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 된 것이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가르쳤던 "신념을 위해 자리를 건다"는 가르침은 펜들턴법 통과라는 역사적 결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평소에는 세속적인 정치꾼처럼 보였던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목사의 아들'로서의 양심을 선택한 것은, 결국 유년 시절 골수까지 박혔던 아버지의 훈육 덕분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4]
3.2. 학창 시절[편집]
1845년, 15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뉴욕 주 스키넥터디에 위치한 유니언 칼리지(Union College)에 입학했다. 당시 유니언 칼리지는 하버드나 예일 못지않은 명성을 구가하던 북부의 명문 사학이었으며, 특히 '미국 대학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엘리팔렛 포트(Eliphalet Nott) 총장의 지도 아래 자유로운 학풍과 토론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4년은 아서가 시골 목사의 아들이라는 딱지를 벗고, 도시적 세련미를 갖춘 정계의 재목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아서는 학업 성적도 우수했지만, 그보다 더 유명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사교성과 리더십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단정한 옷차림과 유머러스한 말투로 동료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는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친 사교 클럽(Fraternity) 열풍의 중심에 있었는데, 특히 '델타 웁실론(Delta Upsilon)'의 전신인 비밀 결사 반대 연합(Social Fraternity)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속한 단체가 '비밀주의'를 표방하는 다른 클럽들을 비판하며 '공정성'과 '개방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그가 비밀스러운 밀실 정치의 대명사인 '정치 기계'의 핵심이 되면서도, 결국에는 공직 개혁이라는 공정성을 선택하게 되는 기묘한 복선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 사회의 각종 소동과 논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으며, 선배와 후배를 아우르는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훗날 '뉴욕 정치 보스'로서 필요한 인간관계의 기초를 다졌다.
아서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840년대 후반은 미국 정계가 휘그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아서는 자연스럽게 부친의 노예제 폐지론적 가치관과 휘그당의 경제적 민족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는 대학 내 토론회에서 헨리 클레이와 대니얼 웹스터의 연설을 인용하며 뛰어난 웅변 실력을 뽐냈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48년 대선 당시, 그는 휘그당 후보였던 재커리 테일러를 열렬히 지지하며 캠퍼스 내에서 선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아서는 단순히 책 속에 파묻힌 모범생이라기보다는,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직접 뛰어들기를 즐기는 활동가적 기질이 다분한 청년이었다. 그는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그가 상아탑에 남지 않고 법조계와 정계로 진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1848년, 아서는 100명이 넘는 졸업생 중 상위권을 기록하며 유니언 칼리지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5]의 회원으로 선출될 만큼 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졸업 직후 바로 법조계로 진출하기에는 가문의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한 개척지 목사였고, 아래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의 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아서는 법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고향 근처인 버먼트 주의 노스 포낼(North Pownal)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서가 이곳에서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 밑에서 교사로 일했던 인물이 바로 훗날 그의 전임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A. 가필드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이다.[ 다만 두 사람의 근무 시기가 미묘하게 엇갈린다는 분석도 있어 역사적 확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두 사람이 같은 지역의 교육계에서 청년기를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얄궂은 운명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아서는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엄격한 훈육보다는 이해와 소통을 강조했다고 한다.
교사 생활은 아서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야망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법률 서적과 씨름하며 독학을 이어갔고, 결국 1853년 뉴욕 시로 이주하여 '에라스투스 컬버'의 법률 사무소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유니언 칼리지 시절 배운 '토론의 기술'과 교사 시절 익힌 '사람을 다루는 법'은 뉴욕이라는 거대 정글에서 아서가 살아남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법률 지식만을 갖춘 변호사가 아니라, 의뢰인의 마음을 사고 배심원을 매료시킬 줄 아는 세련된 전략가로 성장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훗날 아서는 자신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그곳에서의 4년이 나에게 준 것은 지식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우아하게 헤쳐 나가는 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6]
아서는 학업 성적도 우수했지만, 그보다 더 유명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사교성과 리더십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단정한 옷차림과 유머러스한 말투로 동료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는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친 사교 클럽(Fraternity) 열풍의 중심에 있었는데, 특히 '델타 웁실론(Delta Upsilon)'의 전신인 비밀 결사 반대 연합(Social Fraternity)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속한 단체가 '비밀주의'를 표방하는 다른 클럽들을 비판하며 '공정성'과 '개방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그가 비밀스러운 밀실 정치의 대명사인 '정치 기계'의 핵심이 되면서도, 결국에는 공직 개혁이라는 공정성을 선택하게 되는 기묘한 복선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 사회의 각종 소동과 논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으며, 선배와 후배를 아우르는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훗날 '뉴욕 정치 보스'로서 필요한 인간관계의 기초를 다졌다.
아서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840년대 후반은 미국 정계가 휘그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아서는 자연스럽게 부친의 노예제 폐지론적 가치관과 휘그당의 경제적 민족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는 대학 내 토론회에서 헨리 클레이와 대니얼 웹스터의 연설을 인용하며 뛰어난 웅변 실력을 뽐냈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48년 대선 당시, 그는 휘그당 후보였던 재커리 테일러를 열렬히 지지하며 캠퍼스 내에서 선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아서는 단순히 책 속에 파묻힌 모범생이라기보다는,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직접 뛰어들기를 즐기는 활동가적 기질이 다분한 청년이었다. 그는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그가 상아탑에 남지 않고 법조계와 정계로 진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1848년, 아서는 100명이 넘는 졸업생 중 상위권을 기록하며 유니언 칼리지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5]의 회원으로 선출될 만큼 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졸업 직후 바로 법조계로 진출하기에는 가문의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한 개척지 목사였고, 아래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의 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아서는 법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고향 근처인 버먼트 주의 노스 포낼(North Pownal)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서가 이곳에서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 밑에서 교사로 일했던 인물이 바로 훗날 그의 전임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A. 가필드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이다.[ 다만 두 사람의 근무 시기가 미묘하게 엇갈린다는 분석도 있어 역사적 확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두 사람이 같은 지역의 교육계에서 청년기를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얄궂은 운명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아서는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엄격한 훈육보다는 이해와 소통을 강조했다고 한다.
교사 생활은 아서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야망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법률 서적과 씨름하며 독학을 이어갔고, 결국 1853년 뉴욕 시로 이주하여 '에라스투스 컬버'의 법률 사무소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유니언 칼리지 시절 배운 '토론의 기술'과 교사 시절 익힌 '사람을 다루는 법'은 뉴욕이라는 거대 정글에서 아서가 살아남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법률 지식만을 갖춘 변호사가 아니라, 의뢰인의 마음을 사고 배심원을 매료시킬 줄 아는 세련된 전략가로 성장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훗날 아서는 자신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그곳에서의 4년이 나에게 준 것은 지식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우아하게 헤쳐 나가는 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6]
3.3. 법조계 입문[편집]
1853년, 아서는 낡은 가방 하나를 들고 뉴욕시에 입성했다. 당시의 뉴욕은 급격한 산업화와 이민자의 유입으로 인해 기회의 땅인 동시에 온갖 부패와 범죄가 들끓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아서는 고향 친구의 소개로 유능한 변호사이자 부친 윌리엄 아서 목사의 오랜 지기였던 에라스투스 컬버(Erastus D. Culver)의 법률 사무소에 서기로 들어갔다. 컬버는 단순한 변호사가 아니라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는데, 이는 아서가 법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정의로운 방향으로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법률 사무소에 들어간 지 불과 1년 만인 1854년,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곧바로 컬버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고, '컬버 앤 아서(Culver & Arthur)' 사무소는 인권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들을 주로 맡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아서는 법률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가 경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판사와 배심원을 사로잡는 특유의 '귀족적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하고 지저분한 소송이라도 논리 정연하고 품격 있게 정리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동료 변호사들은 그를 두고 "마치 대법관 같은 품위를 지닌 신출내기"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서는 이 시기 뉴욕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동시에 상대하며, 법이 권력자에게는 방패가 되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칼이 되는 현실을 뼈저리게 목격했다.
법조인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1856년, 아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앨런 루이스 허든(Ellen Lewis Herndon)을 만난다. 앨런은 버지니아 출신의 해군 장교 윌리엄 루이스 허든의 딸로, 남부의 전통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북부 출신의 야심가와 남부 출신의 귀공녀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아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꿈꾸던 완벽한 신부"라고 확신했고, 집요한 구애 끝에 1859년 결혼에 골인한다. 앨런과의 결혼은 아서에게 단순한 가정을 넘어, 뉴욕 사교계의 핵심 인맥으로 진입하는 통행증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훗날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남부 가문 출신인 아내의 정체성 때문에 아서가 정치적 고뇌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7]
아서는 변호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의복과 사교 활동에 투자했다. 그는 뉴욕의 저명한 클럽들에 가입하여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단순히 소송을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의뢰인에게 "품격 있는 승리"를 선사하는 변호사로 자신을 브랜딩했다.
그는 사무실 집기 하나하나부터 자신이 사용하는 만년필까지 최고급을 고집했는데, 이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이미지가 곧 권력이라는 뉴욕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아서의 세련된 외모와 매너에 신뢰를 보냈고, 그는 '신사 중의 신사'라는 평판을 얻으며 뉴욕 법조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러한 이미지는 훗날 그가 '부패한 정치꾼'이라는 공격을 받을 때도, 대중들이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만드는 묘한 방어막 역할을 하게 된다.
변호사 활동을 통해 쌓은 명성과 인맥은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구애로 이어졌다. 그는 특히 공화당의 전신인 조직들에서 법률 자문을 맡으며 당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뉴욕 공화당의 지도자들은 아서가 가진 '명석한 두뇌와 세련된 사교력'이 거친 정치판에서 보석처럼 쓰일 것임을 예견했다.
아서 역시 법정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판인 정계로의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법이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라면, 정치는 그 틀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을 위해 뉴욕에서 대대적인 지원 활동을 펼쳤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 주 정부의 요직으로 발탁될 준비를 마친다. 법조인 아서의 시대가 저물고, 행정가이자 정치가인 아서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8]
아서는 법률 사무소에 들어간 지 불과 1년 만인 1854년,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곧바로 컬버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고, '컬버 앤 아서(Culver & Arthur)' 사무소는 인권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들을 주로 맡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아서는 법률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가 경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판사와 배심원을 사로잡는 특유의 '귀족적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하고 지저분한 소송이라도 논리 정연하고 품격 있게 정리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동료 변호사들은 그를 두고 "마치 대법관 같은 품위를 지닌 신출내기"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서는 이 시기 뉴욕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동시에 상대하며, 법이 권력자에게는 방패가 되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칼이 되는 현실을 뼈저리게 목격했다.
법조인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1856년, 아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앨런 루이스 허든(Ellen Lewis Herndon)을 만난다. 앨런은 버지니아 출신의 해군 장교 윌리엄 루이스 허든의 딸로, 남부의 전통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북부 출신의 야심가와 남부 출신의 귀공녀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아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꿈꾸던 완벽한 신부"라고 확신했고, 집요한 구애 끝에 1859년 결혼에 골인한다. 앨런과의 결혼은 아서에게 단순한 가정을 넘어, 뉴욕 사교계의 핵심 인맥으로 진입하는 통행증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훗날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남부 가문 출신인 아내의 정체성 때문에 아서가 정치적 고뇌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7]
아서는 변호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의복과 사교 활동에 투자했다. 그는 뉴욕의 저명한 클럽들에 가입하여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단순히 소송을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의뢰인에게 "품격 있는 승리"를 선사하는 변호사로 자신을 브랜딩했다.
그는 사무실 집기 하나하나부터 자신이 사용하는 만년필까지 최고급을 고집했는데, 이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이미지가 곧 권력이라는 뉴욕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아서의 세련된 외모와 매너에 신뢰를 보냈고, 그는 '신사 중의 신사'라는 평판을 얻으며 뉴욕 법조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러한 이미지는 훗날 그가 '부패한 정치꾼'이라는 공격을 받을 때도, 대중들이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만드는 묘한 방어막 역할을 하게 된다.
변호사 활동을 통해 쌓은 명성과 인맥은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구애로 이어졌다. 그는 특히 공화당의 전신인 조직들에서 법률 자문을 맡으며 당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뉴욕 공화당의 지도자들은 아서가 가진 '명석한 두뇌와 세련된 사교력'이 거친 정치판에서 보석처럼 쓰일 것임을 예견했다.
아서 역시 법정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판인 정계로의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법이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라면, 정치는 그 틀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을 위해 뉴욕에서 대대적인 지원 활동을 펼쳤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 주 정부의 요직으로 발탁될 준비를 마친다. 법조인 아서의 시대가 저물고, 행정가이자 정치가인 아서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8]
3.4. 제닝스 사건[편집]
1854년 7월 16일, 뉴욕 법조계의 청년 변호사 체스터 A. 아서의 이름을 뉴욕 전역에 각인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훗날 '뉴욕의 로자 파크스'라고 불리게 될 흑인 여성 엘리자베스 제닝스 그레이엄(Elizabeth Jennings Graham)이 인종차별에 맞서 아서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승리를 넘어, 미국 인종차별 철폐 운동사에서 법률적 이정표가 된 사건이자, '정치꾼 아서' 이전에 '인권 변호사 아서'가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주일 학교 교사였던 제닝스는 교회로 가기 위해 뉴욕 제3가 노선(Third Avenue Railway Company)의 전차에 올라탔다. 당시 뉴욕의 전차는 흑인 전용 칸이 따로 있거나, 백인 승객이 없을 때만 흑인의 탑승을 마지못해 허용하는 등 극심한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마부와 차장은 제닝스에게 내릴 것을 명령했으나, 그녀는 정당한 요금을 지불했다며 거부했다. 결국 차장은 경찰을 동원해 그녀를 전차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제닝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뉴욕의 노예제 폐지론자 단체를 찾아갔고, 그들의 소개로 당시 24세의 신참 변호사였던 체스터 A. 아서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당시로서는 흑인이 거대 교통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아서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정의감과 법률가로서의 치밀함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다.
아서는 브루클린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논리적이고도 격정적인 변론을 펼쳤다. 그는 당시의 관습이 아닌 '운송업자의 법적 의무'에 집중했다. 아서는 "공공 운송 수단은 요금을 지불한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약상 의무가 있으며, 인종이나 피부색은 그 계약을 파기할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제닝스가 받은 신체적, 정신적 모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서는 법정에서 단순히 인종 문제를 건드리는 대신, '법치 국가에서 개인의 정당한 권리가 폭력에 의해 침해당했다'는 프레임을 씌워 보수적인 배심원들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훗날 아서의 정적들조차 이 당시의 변론만큼은 "완벽한 논리 앞에 편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고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9]
결과는 제닝스 측의 완승이었다. 법원은 제3가 노선 회사에 225달러의 배상금(현재 가치로 약 7,000~8,000달러)과 25달러의 재판 비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금액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판결의 내용이었다. 이 판결 이후 뉴욕의 모든 전차 회사는 흑인 승객의 탑승을 거부할 법적 명분을 잃게 되었고, 1860년대에 이르러 뉴욕 대중교통 내의 인종 분리 장벽은 완전히 철폐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아서는 뉴욕 내 흑인 사회와 노예제 폐지론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단순히 운이 좋은 변호사가 아니라, 체제 내부의 논리를 이용해 체제의 모순을 깨뜨릴 줄 아는 전략가임을 입증했다. 이 명성은 그가 훗날 공화당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으며, 그가 정치적 세파에 휩쓸려 '부패한 정치 보스'의 길을 걸을 때도 흑인 투표층이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만든 근간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은 아서의 인생에서 가장 '진보적'인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그가 '시스템'을 다루는 법을 배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법정에서의 승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 변화를 위해서는 강력한 법률적 배경과 인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제닝스 사건 이후 아서는 '인권 변호사'라는 칭송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발판 삼아 더 큰 권력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품격 있는 태도와 날카로운 법률 지식이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힘을 목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뉴욕의 주류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 펜들턴 공무원법을 통과시킬 때, 사람들은 "그 부패한 아서가 왜 저런 개혁을 하느냐"고 의아해했지만, 사실 그 씨앗은 1854년의 법정에서 이미 뿌려져 있었던 셈이다.[10]
제닝스 사건으로 명성을 얻은 아서는 1860년, 변호사 생애를 넘어 미국 헌법사에서 손꼽히는 중대 사건인 '레먼 노예 사건(Lemmon v. New York)'의 항소심 변론을 맡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노예제의 법적 지위'에 관한 정면 승부였으며, 아서는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법기술자가 아닌, 국가의 근간을 고민하는 전략적 법조인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1852년, 버지니아의 노예주였던 조너선 레먼 부부는 8명의 노예를 데리고 텍스트로 이동하기 위해 뉴욕 항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뉴욕은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자유 주'였고, 현지의 인권 운동가들은 레먼 부부의 노예들에 대해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을 신청했다. 뉴욕 법원은 "뉴욕 주법에 따라 이들은 뉴욕 땅을 밟는 순간 자유인이 된다"며 석방을 명령했으나, 이에 불복한 버지니아 주는 주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항소했다.
이 사건이 아서의 손에 들어온 시점은 1860년, 즉 남북전쟁 발발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 연방 대법원은 그 유명한 드레드 스콧 판결을 통해 "흑인은 시민이 아니며, 노예는 어디서든 재산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최악의 판결을 내린 상태였다. 아서는 이 거대한 연방 판결의 파고에 맞서 뉴욕 주의 '자유'를 수호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아서는 뉴욕 주 정부를 대리하는 특별 변호사로 임명되어 법정에 섰다. 그는 당시 남부의 논리였던 '재산권 보호'에 맞서 '주의 주권(States' Rights)'이라는 역발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보통 '주의 주권'은 남부 주들이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유하던 논리였으나, 아서는 이를 뒤집어 "뉴욕 주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면, 다른 주의 법이 뉴욕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련된 법률 용어를 구사하며, 노예를 '재산'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직 그 노예가 속한 주의 법 내에서만 유효하며, 주 경계를 넘는 순간 해당 지역의 법이 우선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는 드레드 스콧 판결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면서도 북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고도의 전략이었다.[11]
결국 뉴욕 항소법원은 아서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레먼의 노예들이 자유인임을 최종 확정했고, 이는 남부 노예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버지니아 주 정부는 즉각 연방 대법원에 상고하려 했으나, 그 직후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재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승소는 아서에게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 재판을 통해 뉴욕 공화당의 실세들뿐만 아니라 북부 정계 전체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세련된 멋쟁이 변호사가 법리 싸움에서도 남부의 노련한 정객들을 압도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노예제라는 괴물을 상대로, 가장 우아하고 치명적인 법률적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레먼 노예 사건의 승리는 아서를 '차세대 지도자' 반열에 올렸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에드윈 모건은 아서의 치밀한 행정 능력과 법률적 안목을 눈여겨보았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를 주 정부의 요직에 임명한다.
그는 흑인의 인권을 지켜냄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체급을 키웠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훗날 그가 엽관제의 늪에 빠져 "부패한 세관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을 때도, 그를 아는 오랜 친구들은 항상 1860년의 레먼 노예 사건을 언급하며 "아서의 본모습은 저 용감한 변호사"라고 변호해주곤 했다.[ 아서는 훗날 대통령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의 승리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주일 학교 교사였던 제닝스는 교회로 가기 위해 뉴욕 제3가 노선(Third Avenue Railway Company)의 전차에 올라탔다. 당시 뉴욕의 전차는 흑인 전용 칸이 따로 있거나, 백인 승객이 없을 때만 흑인의 탑승을 마지못해 허용하는 등 극심한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마부와 차장은 제닝스에게 내릴 것을 명령했으나, 그녀는 정당한 요금을 지불했다며 거부했다. 결국 차장은 경찰을 동원해 그녀를 전차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제닝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뉴욕의 노예제 폐지론자 단체를 찾아갔고, 그들의 소개로 당시 24세의 신참 변호사였던 체스터 A. 아서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당시로서는 흑인이 거대 교통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아서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정의감과 법률가로서의 치밀함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다.
아서는 브루클린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논리적이고도 격정적인 변론을 펼쳤다. 그는 당시의 관습이 아닌 '운송업자의 법적 의무'에 집중했다. 아서는 "공공 운송 수단은 요금을 지불한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약상 의무가 있으며, 인종이나 피부색은 그 계약을 파기할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제닝스가 받은 신체적, 정신적 모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서는 법정에서 단순히 인종 문제를 건드리는 대신, '법치 국가에서 개인의 정당한 권리가 폭력에 의해 침해당했다'는 프레임을 씌워 보수적인 배심원들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훗날 아서의 정적들조차 이 당시의 변론만큼은 "완벽한 논리 앞에 편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고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9]
결과는 제닝스 측의 완승이었다. 법원은 제3가 노선 회사에 225달러의 배상금(현재 가치로 약 7,000~8,000달러)과 25달러의 재판 비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금액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판결의 내용이었다. 이 판결 이후 뉴욕의 모든 전차 회사는 흑인 승객의 탑승을 거부할 법적 명분을 잃게 되었고, 1860년대에 이르러 뉴욕 대중교통 내의 인종 분리 장벽은 완전히 철폐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아서는 뉴욕 내 흑인 사회와 노예제 폐지론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단순히 운이 좋은 변호사가 아니라, 체제 내부의 논리를 이용해 체제의 모순을 깨뜨릴 줄 아는 전략가임을 입증했다. 이 명성은 그가 훗날 공화당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으며, 그가 정치적 세파에 휩쓸려 '부패한 정치 보스'의 길을 걸을 때도 흑인 투표층이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만든 근간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은 아서의 인생에서 가장 '진보적'인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그가 '시스템'을 다루는 법을 배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법정에서의 승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 변화를 위해서는 강력한 법률적 배경과 인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제닝스 사건 이후 아서는 '인권 변호사'라는 칭송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발판 삼아 더 큰 권력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품격 있는 태도와 날카로운 법률 지식이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힘을 목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뉴욕의 주류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 펜들턴 공무원법을 통과시킬 때, 사람들은 "그 부패한 아서가 왜 저런 개혁을 하느냐"고 의아해했지만, 사실 그 씨앗은 1854년의 법정에서 이미 뿌려져 있었던 셈이다.[10]
제닝스 사건으로 명성을 얻은 아서는 1860년, 변호사 생애를 넘어 미국 헌법사에서 손꼽히는 중대 사건인 '레먼 노예 사건(Lemmon v. New York)'의 항소심 변론을 맡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노예제의 법적 지위'에 관한 정면 승부였으며, 아서는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법기술자가 아닌, 국가의 근간을 고민하는 전략적 법조인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1852년, 버지니아의 노예주였던 조너선 레먼 부부는 8명의 노예를 데리고 텍스트로 이동하기 위해 뉴욕 항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뉴욕은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자유 주'였고, 현지의 인권 운동가들은 레먼 부부의 노예들에 대해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을 신청했다. 뉴욕 법원은 "뉴욕 주법에 따라 이들은 뉴욕 땅을 밟는 순간 자유인이 된다"며 석방을 명령했으나, 이에 불복한 버지니아 주는 주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항소했다.
이 사건이 아서의 손에 들어온 시점은 1860년, 즉 남북전쟁 발발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 연방 대법원은 그 유명한 드레드 스콧 판결을 통해 "흑인은 시민이 아니며, 노예는 어디서든 재산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최악의 판결을 내린 상태였다. 아서는 이 거대한 연방 판결의 파고에 맞서 뉴욕 주의 '자유'를 수호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아서는 뉴욕 주 정부를 대리하는 특별 변호사로 임명되어 법정에 섰다. 그는 당시 남부의 논리였던 '재산권 보호'에 맞서 '주의 주권(States' Rights)'이라는 역발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보통 '주의 주권'은 남부 주들이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유하던 논리였으나, 아서는 이를 뒤집어 "뉴욕 주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면, 다른 주의 법이 뉴욕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련된 법률 용어를 구사하며, 노예를 '재산'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직 그 노예가 속한 주의 법 내에서만 유효하며, 주 경계를 넘는 순간 해당 지역의 법이 우선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는 드레드 스콧 판결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면서도 북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고도의 전략이었다.[11]
결국 뉴욕 항소법원은 아서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레먼의 노예들이 자유인임을 최종 확정했고, 이는 남부 노예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버지니아 주 정부는 즉각 연방 대법원에 상고하려 했으나, 그 직후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재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승소는 아서에게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 재판을 통해 뉴욕 공화당의 실세들뿐만 아니라 북부 정계 전체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세련된 멋쟁이 변호사가 법리 싸움에서도 남부의 노련한 정객들을 압도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노예제라는 괴물을 상대로, 가장 우아하고 치명적인 법률적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레먼 노예 사건의 승리는 아서를 '차세대 지도자' 반열에 올렸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에드윈 모건은 아서의 치밀한 행정 능력과 법률적 안목을 눈여겨보았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를 주 정부의 요직에 임명한다.
그는 흑인의 인권을 지켜냄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체급을 키웠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훗날 그가 엽관제의 늪에 빠져 "부패한 세관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을 때도, 그를 아는 오랜 친구들은 항상 1860년의 레먼 노예 사건을 언급하며 "아서의 본모습은 저 용감한 변호사"라고 변호해주곤 했다.[ 아서는 훗날 대통령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의 승리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3.5. 남북전쟁[편집]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체아서는 변호사 가운을 벗고 군복을 입었다. 비록 그는 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는 야전 지휘관은 아니었으나, 뉴욕 주지사 에드윈 모건에 의해 뉴욕 주 병참감(Quartermaster General)으로 임명되어 북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 시기는 아서가 거대 조직을 관리하는 행정적 수완과 엄청난 액수의 예산을 다루는 법을 익힌 시기였으며, 동시에 그가 훗날 '정치 기계'로 불릴 수 있었던 조직 장악력의 기초를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 북군의 병참 상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갑작스럽게 징집된 수만 명의 의용군에게 지급할 군복, 식량, 무기, 천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그나마 조달된 물자들도 질이 낮거나 중간에 빼돌려지기 일쑤였다. 아서는 뉴욕 시에 본부를 두고 이 거대한 혼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미국 최대의 주였던 뉴욕이 조달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를 체계화했다. 그는 계약 과정을 투명하게(당시 기준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관리했으며, 불량 물자를 납품하는 업자들을 단호하게 퇴출시켰다. 아서의 지휘 아래 뉴욕 주는 단 몇 달 만에 수천 명의 군인을 무장시켜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고, 이는 전쟁 초기 연방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엽관제의 화신으로 불렸던 아서가 병참감 시절에는 놀라울 정도로 청렴하고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매일 수백 건의 계약서에 서명하고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집행하면서도, 단 1센트의 부정부패 의혹도 사지 않았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군수 물자의 질을 직접 점검했다. 군인들에게 지급될 식량의 신선도를 체크하고, 군복의 바느질 상태까지 확인하는 그의 꼼꼼함은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뉴욕 정계는 이 '멋쟁이 변호사'가 보여준 의외의 워커홀릭적인 모습에 경악했다. 아서는 이 시기에 "시스템이 정교하면 부패를 막을 수 있고, 효율은 배가된다"는 행정적 교훈을 얻었다. 이는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어 관료제를 개혁할 때 보여준 '행정적 결벽증'의 원형이 된다.[12]
아서의 성공적인 병참 업무는 1862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호레이쇼 시모어가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급제동이 걸린다. 시모어 주지사는 공화당원이었던 아서를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혔다. 아서는 자신이 닦아놓은 효율적인 시스템이 정당 정략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며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비록 관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 시기 그가 보여준 능력은 공화당 수뇌부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순한 변호사를 넘어 '큰 조직을 운영할 줄 아는 행정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또한, 전쟁 중 쌓은 군맥(軍脈)과 정계 인맥은 훗날 그가 뉴욕 정계의 보스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다. 그는 해임된 후 다시 변호사로 복귀했으나, 이미 그의 눈은 더 높은 곳, 즉 권력의 핵심부를 향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병참감 경력은 아서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고, 둘째는 권력이란 결국 '사람과 물자를 배분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현실 정치의 생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는 전쟁을 통해 애국심과 행정력을 동시에 입증했지만, 동시에 정권이 바뀌면 실력과 관계없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엽관제의 비정함도 몸소 체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그를 더욱 철저한 '정치 기계'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내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편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로스코 콩클링의 품으로 이끌었고,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논란 많은 '뉴욕 세관장' 시절로 이어지는 서막이 되었다.[13]
전쟁 초기, 북군의 병참 상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갑작스럽게 징집된 수만 명의 의용군에게 지급할 군복, 식량, 무기, 천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그나마 조달된 물자들도 질이 낮거나 중간에 빼돌려지기 일쑤였다. 아서는 뉴욕 시에 본부를 두고 이 거대한 혼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미국 최대의 주였던 뉴욕이 조달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를 체계화했다. 그는 계약 과정을 투명하게(당시 기준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관리했으며, 불량 물자를 납품하는 업자들을 단호하게 퇴출시켰다. 아서의 지휘 아래 뉴욕 주는 단 몇 달 만에 수천 명의 군인을 무장시켜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고, 이는 전쟁 초기 연방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엽관제의 화신으로 불렸던 아서가 병참감 시절에는 놀라울 정도로 청렴하고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매일 수백 건의 계약서에 서명하고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집행하면서도, 단 1센트의 부정부패 의혹도 사지 않았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군수 물자의 질을 직접 점검했다. 군인들에게 지급될 식량의 신선도를 체크하고, 군복의 바느질 상태까지 확인하는 그의 꼼꼼함은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뉴욕 정계는 이 '멋쟁이 변호사'가 보여준 의외의 워커홀릭적인 모습에 경악했다. 아서는 이 시기에 "시스템이 정교하면 부패를 막을 수 있고, 효율은 배가된다"는 행정적 교훈을 얻었다. 이는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어 관료제를 개혁할 때 보여준 '행정적 결벽증'의 원형이 된다.[12]
아서의 성공적인 병참 업무는 1862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호레이쇼 시모어가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급제동이 걸린다. 시모어 주지사는 공화당원이었던 아서를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혔다. 아서는 자신이 닦아놓은 효율적인 시스템이 정당 정략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며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비록 관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 시기 그가 보여준 능력은 공화당 수뇌부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순한 변호사를 넘어 '큰 조직을 운영할 줄 아는 행정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또한, 전쟁 중 쌓은 군맥(軍脈)과 정계 인맥은 훗날 그가 뉴욕 정계의 보스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다. 그는 해임된 후 다시 변호사로 복귀했으나, 이미 그의 눈은 더 높은 곳, 즉 권력의 핵심부를 향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병참감 경력은 아서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고, 둘째는 권력이란 결국 '사람과 물자를 배분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현실 정치의 생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는 전쟁을 통해 애국심과 행정력을 동시에 입증했지만, 동시에 정권이 바뀌면 실력과 관계없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엽관제의 비정함도 몸소 체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그를 더욱 철저한 '정치 기계'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내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편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로스코 콩클링의 품으로 이끌었고,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논란 많은 '뉴욕 세관장' 시절로 이어지는 서막이 되었다.[13]
3.6. 로스코 콩클링과의 조우[편집]
아서의 인생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로스코 콩클링이다. 1860년대 후반, 뉴욕 정계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아서와 이미 거물급 정치인으로 군림하던 콩클링의 만남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치명적인 '정치적 결탁'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상사와 부하를 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엽관제 시스템의 핵심 엔진이자 훗날 비극적인 절교로 치닫는 대서사시였다.
로스코 콩클링은 당시 뉴욕주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의 절대권력자였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압도적인 웅변술, 그리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파멸시킨다'는 식의 제왕적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었다. 콩클링은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우군이었으며, 그 대가로 뉴욕주의 모든 연방 관직 임명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시 콩클링에게는 자신의 복잡한 정치 자금을 관리하고, 뉴욕의 세련된 엘리트층과 연결고리가 되어줄 유능한 '살림꾼'이 필요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남북전쟁 당시 병참감으로서 탁월한 행정 수완을 보여준 체스터 A. 아서였다. 아서는 콩클링이 가지지 못한 부드러운 사교력과 치밀한 실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신사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즉각적인 시너지를 냈다. 콩클링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호령하며 거시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아서는 뉴욕 현장에서 관직을 배분하고 당원들을 관리하며 선거 자금을 모으는 미시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아서는 콩클링의 명령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수행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을 특유의 매너로 잠재웠다.
이들은 소위 '정치 기계(Political Machine)'라 불리는 조직적인 부패 구조를 완성했다. 공무원 자리를 주는 대가로 정치 헌금을 받고, 그 돈으로 다시 투표를 매수하는 방식이었다. 아서는 이 시스템 속에서 콩클링의 '오른팔'이자 '최고 전략가'로 자리매김했다. 콩클링은 아서를 진심으로 신뢰했으며, 사석에서는 그를 "친절한 테드(Chet)"라고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아서 역시 콩클링의 오만한 성격을 다 받아주며 그를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했다.[ 훗날 아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콩클링은 당연히 자신이 '상왕' 노릇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서는 콩클링과 함께하며 부와 권력의 정점에 다가갔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명성을 희생해야 했다. 언론은 아서를 가리켜 "콩클링의 화려한 앵무새", "부패한 보스의 수거책"이라며 조롱했다. 변호사 시절 인권과 정의를 외치던 아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당의 이익과 콩클링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정치가의 모습만 남게 된 것이다.
실제로 아서는 콩클링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 무리한 인사 압력을 행사했고, 이는 훗날 러더퍼드 B. 헤이스 행정부와의 정면충돌로 이어지는 불씨가 된다. 아서는 콩클링의 그늘 아래서 안전했지만, 그 그늘은 너무나 짙어 아서 개인의 빛을 모두 가려버렸다. 주변 친구들은 아서가 콩클링의 강압적인 성격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아서는 "정치란 결국 의리(Loyalty)의 예술"이라며 콩클링 곁을 지켰다.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배신의 전조였다. 아서는 콩클링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무소불위한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훗날 가필드 대통령이 암살되고 아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콩클링은 아서에게 과거처럼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아서는 그 순간 콩클링의 부하가 아닌 '미국의 대통령'을 선택했고, 이는 두 사람의 완전한 절교로 이어진다. 이들의 끈끈한 결탁은, 역설적으로 훗날 아서가 보여줄 '위대한 배신'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콩클링은 아서가 자신을 배신하자 "아서가 백악관에 들어가더니 신비주의에 빠져 미쳐버렸다"며 분노를 쏟아냈다.] 이들의 조우는 아서에게 권력을 주었으나, 동시에 그가 대통령으로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산이 되었다.
로스코 콩클링은 당시 뉴욕주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의 절대권력자였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압도적인 웅변술, 그리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파멸시킨다'는 식의 제왕적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었다. 콩클링은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우군이었으며, 그 대가로 뉴욕주의 모든 연방 관직 임명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시 콩클링에게는 자신의 복잡한 정치 자금을 관리하고, 뉴욕의 세련된 엘리트층과 연결고리가 되어줄 유능한 '살림꾼'이 필요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남북전쟁 당시 병참감으로서 탁월한 행정 수완을 보여준 체스터 A. 아서였다. 아서는 콩클링이 가지지 못한 부드러운 사교력과 치밀한 실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신사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즉각적인 시너지를 냈다. 콩클링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호령하며 거시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아서는 뉴욕 현장에서 관직을 배분하고 당원들을 관리하며 선거 자금을 모으는 미시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아서는 콩클링의 명령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수행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을 특유의 매너로 잠재웠다.
이들은 소위 '정치 기계(Political Machine)'라 불리는 조직적인 부패 구조를 완성했다. 공무원 자리를 주는 대가로 정치 헌금을 받고, 그 돈으로 다시 투표를 매수하는 방식이었다. 아서는 이 시스템 속에서 콩클링의 '오른팔'이자 '최고 전략가'로 자리매김했다. 콩클링은 아서를 진심으로 신뢰했으며, 사석에서는 그를 "친절한 테드(Chet)"라고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아서 역시 콩클링의 오만한 성격을 다 받아주며 그를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했다.[ 훗날 아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콩클링은 당연히 자신이 '상왕' 노릇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서는 콩클링과 함께하며 부와 권력의 정점에 다가갔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명성을 희생해야 했다. 언론은 아서를 가리켜 "콩클링의 화려한 앵무새", "부패한 보스의 수거책"이라며 조롱했다. 변호사 시절 인권과 정의를 외치던 아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당의 이익과 콩클링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정치가의 모습만 남게 된 것이다.
실제로 아서는 콩클링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 무리한 인사 압력을 행사했고, 이는 훗날 러더퍼드 B. 헤이스 행정부와의 정면충돌로 이어지는 불씨가 된다. 아서는 콩클링의 그늘 아래서 안전했지만, 그 그늘은 너무나 짙어 아서 개인의 빛을 모두 가려버렸다. 주변 친구들은 아서가 콩클링의 강압적인 성격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아서는 "정치란 결국 의리(Loyalty)의 예술"이라며 콩클링 곁을 지켰다.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배신의 전조였다. 아서는 콩클링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무소불위한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훗날 가필드 대통령이 암살되고 아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콩클링은 아서에게 과거처럼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아서는 그 순간 콩클링의 부하가 아닌 '미국의 대통령'을 선택했고, 이는 두 사람의 완전한 절교로 이어진다. 이들의 끈끈한 결탁은, 역설적으로 훗날 아서가 보여줄 '위대한 배신'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콩클링은 아서가 자신을 배신하자 "아서가 백악관에 들어가더니 신비주의에 빠져 미쳐버렸다"며 분노를 쏟아냈다.] 이들의 조우는 아서에게 권력을 주었으나, 동시에 그가 대통령으로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산이 되었다.
3.7. 스탈워츠의 핵심[편집]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 초반, 체스터 A. 아서는 단순히 뉴욕의 잘나가는 변호사를 넘어 공화당 내부의 가장 강력한 파벌인 스탈워츠(Stalwarts, 철혈파)의 '두뇌'이자 '금고지기'로 부상한다. 당시 공화당은 급진적인 재건 정책과 엽관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인 '스탈워츠'와, 부패 척결과 공무원 제도 개혁을 주장하던 온건파인 '하프 브리드(Half-Breeds, 잡종파)'로 나뉘어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다. 아서는 이 혼돈의 정치판에서 로스코 콩클링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제2인자로 군림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아서가 스탈워츠 내에서 맡은 역할은 매우 실무적이고도 치밀했다. 그는 이른바 '뉴욕 정치 기계'라 불리는 조직적인 선거 관리 시스템을 운영했다. 당시 스탈워츠의 철학은 명확했다. "승리한 자가 전리품을 챙긴다"는 엽관제의 원칙에 따라, 선거에서 승리하면 지지자들에게 관직을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정치 자금을 거두어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구조였다.
아서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행정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뉴욕 전역의 공화당원 명단을 관리하고, 누구에게 어떤 자리가 배분되어야 조직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갈지를 계산하는 '인사 전략가'였다. 그는 콩클링처럼 대중 앞에서 불같은 연설을 내뿜지는 않았지만, 커튼 뒤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모든 실무를 완벽하게 조율했다. 당시 정계에서는 "콩클링이 명령하면 아서가 실행하고, 아서가 실행하면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14]
스탈워츠의 권력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율리시스 S. 그랜트와의 끈끈한 관계에서 나왔다. 그랜트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으나 정무 감각은 다소 부족했고, 콩클링과 아서는 그런 그랜트의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그 대가로 그랜트 행정부의 수많은 관직 임명권이 콩클링 일파에게 넘어왔다.
아서는 그랜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뉴욕의 이권 사업을 관리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그랜트 역시 아서의 세련된 매너와 뒤처리가 깔끔한 일 처리 방식에 깊은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권력의 밀착은 아서가 훗날 '뉴욕 세관장'이라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임명직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아서의 이름 뒤에 '부패한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따라붙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아서가 스탈워츠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자금 조달 능력이었다. 그는 공직에 임명된 사람들에게 월급의 일정 비율을 강제로 징수하여 당의 운영비로 사용하는 '평가금(Assessment)' 제도를 체계화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관직 매매와 다를 바 없는 갈취"라고 비난했으나, 아서는 이를 "정당 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민주적인 기여"라고 포장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돈을 걷는 과정에서도 결코 고압적이지 않았으며, 특유의 부드러운 화법으로 기부자(혹은 피징수자)들이 마치 대단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모인 막대한 자금은 선거철마다 뉴욕의 유권자들을 매수하거나 대규모 홍보를 진행하는 데 사용되었고, 스탈워츠의 불패 신화를 지탱하는 동력이 되었다.[15]
체스터 A. 아서에게 스탈워츠는 단순한 정치 계파 이상이었다. 그것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지키고 공화당의 영광을 영속시키기 위한 '전우회'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그는 하프 브리드파의 개혁론을 "현실을 모르는 먹물들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했으며, 정치는 결국 사람과 돈, 그리고 조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서는 스탈워츠 내의 다른 무식한 행동대장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항상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고 프랑스 요리를 즐기며 고전 문학을 인용하는 '교양 있는 보스'였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위치는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과거의 동지들을 버리고 국가적 대의를 선택할 수 있었던 심리적 독립성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조직에 속해 있었으나 조직에 매몰되지 않았고, 기계의 일부였으나 스스로 생각하는 머리를 가진 기계였던 셈이다.[16]
아서가 스탈워츠 내에서 맡은 역할은 매우 실무적이고도 치밀했다. 그는 이른바 '뉴욕 정치 기계'라 불리는 조직적인 선거 관리 시스템을 운영했다. 당시 스탈워츠의 철학은 명확했다. "승리한 자가 전리품을 챙긴다"는 엽관제의 원칙에 따라, 선거에서 승리하면 지지자들에게 관직을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정치 자금을 거두어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구조였다.
아서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행정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뉴욕 전역의 공화당원 명단을 관리하고, 누구에게 어떤 자리가 배분되어야 조직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갈지를 계산하는 '인사 전략가'였다. 그는 콩클링처럼 대중 앞에서 불같은 연설을 내뿜지는 않았지만, 커튼 뒤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모든 실무를 완벽하게 조율했다. 당시 정계에서는 "콩클링이 명령하면 아서가 실행하고, 아서가 실행하면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14]
스탈워츠의 권력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율리시스 S. 그랜트와의 끈끈한 관계에서 나왔다. 그랜트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으나 정무 감각은 다소 부족했고, 콩클링과 아서는 그런 그랜트의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그 대가로 그랜트 행정부의 수많은 관직 임명권이 콩클링 일파에게 넘어왔다.
아서는 그랜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뉴욕의 이권 사업을 관리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그랜트 역시 아서의 세련된 매너와 뒤처리가 깔끔한 일 처리 방식에 깊은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권력의 밀착은 아서가 훗날 '뉴욕 세관장'이라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임명직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아서의 이름 뒤에 '부패한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따라붙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아서가 스탈워츠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자금 조달 능력이었다. 그는 공직에 임명된 사람들에게 월급의 일정 비율을 강제로 징수하여 당의 운영비로 사용하는 '평가금(Assessment)' 제도를 체계화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관직 매매와 다를 바 없는 갈취"라고 비난했으나, 아서는 이를 "정당 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민주적인 기여"라고 포장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돈을 걷는 과정에서도 결코 고압적이지 않았으며, 특유의 부드러운 화법으로 기부자(혹은 피징수자)들이 마치 대단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모인 막대한 자금은 선거철마다 뉴욕의 유권자들을 매수하거나 대규모 홍보를 진행하는 데 사용되었고, 스탈워츠의 불패 신화를 지탱하는 동력이 되었다.[15]
체스터 A. 아서에게 스탈워츠는 단순한 정치 계파 이상이었다. 그것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지키고 공화당의 영광을 영속시키기 위한 '전우회'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그는 하프 브리드파의 개혁론을 "현실을 모르는 먹물들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했으며, 정치는 결국 사람과 돈, 그리고 조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서는 스탈워츠 내의 다른 무식한 행동대장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항상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고 프랑스 요리를 즐기며 고전 문학을 인용하는 '교양 있는 보스'였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위치는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과거의 동지들을 버리고 국가적 대의를 선택할 수 있었던 심리적 독립성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조직에 속해 있었으나 조직에 매몰되지 않았고, 기계의 일부였으나 스스로 생각하는 머리를 가진 기계였던 셈이다.[16]
3.8. 뉴욕 세관장 임명[편집]
1871년 11월 20일,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은 체스터 A. 아서를 뉴욕 세관장(Collector of the Port of New York)으로 임명했다. 이 임명은 아서의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순간인 동시에, 훗날 그가 '부패한 정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뉴욕 세관은 단순히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이 아니라, 미국 전체의 재정과 정치 자금, 그리고 인사권을 뒤흔드는 '제국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당시 뉴욕 세관은 미국 전체 관세 수입의 약 75% 이상을 처리하던 거대 기구였다. 연방 정부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직원 수만 수천 명에 달했다. 엽관제가 판을 치던 시절, 세관장 자리는 단순한 공직이 아니라 수천 개의 일자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인사권의 화약고'**였다.
아서의 임명 배후에는 당연히 그의 정치적 후원자 로스코 콩클링이 있었다. 콩클링은 자신의 파벌인 '스탈워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장 믿을 만하고 행정 능력이 검증된 아서를 이 자리에 앉혔다. 아서는 연봉 12,000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대통령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고액 연봉이었으며, 각종 수수료 수입을 합치면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했다.[17]
아서는 세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특기인 행정 장악력을 발휘했다. 그는 세관을 철저하게 공화당 스탈워츠 파벌의 자금줄이자 인력 공급처로 변모시켰다. 세관 직원들은 월급의 일정 비율을 공화당 당비로 상납해야 했다. 이는 명목상 자발적 기부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고용 유지를 위한 '세금'이었다. 세관의 모든 보직은 선거에서 공화당을 위해 뛴 인물들에게 배분되었다. 또한 업무 능력보다는 당에 대한 충성심이 우선시되었다. 선거철이 되면 세관 직원들은 업무 대신 투표 독려와 선거 운동에 동원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서가 이 부패한 시스템을 운영하면서도 '개인적인 횡령'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시스템 전체가 당을 위해 굴러가게 만들었을 뿐,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뇌물을 직접 받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정당 정치의 정당한 운영 방식"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자신을 부패한 도둑이 아닌 '유능한 정치 관리자'로 정의했다.
아서가 지배하던 뉴욕 세관은 '커스텀 하우스'라 불리며 뉴욕 정계의 사교 클럽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서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출근하여 세련된 옷차림으로 집무실에 앉아 고급 시가를 피우며 찾아오는 정객들을 맞이했다. 그는 특유의 매너와 화술로 까다로운 상인들과 거친 정치인들을 모두 요리했으며, 세관 업무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당시 언론은 그를 "세관의 왕자(The Prince of Custom House)"라고 불렀다. 그는 매일 밤 뉴욕의 최고급 식당인 '델모니코스(Delmonico's)'에서 화려한 만찬을 즐겼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권력을 쫓는 무리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 이면에서는 엽관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서가 누리던 이 황금기는 역설적으로 미국 공무원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거센 폭풍의 전조였던 셈이다.
아서의 세관 운영은 효율적이었으나, 도덕적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187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자유공화당' 운동과 민주당의 공세는 세관의 부패를 정조준했다. 특히 1876년 대선 이후 취임한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공직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고, 그 첫 번째 타깃은 당연히 '엽관제의 상징'인 아서와 뉴욕 세관이었다.
아서는 헤이스의 개혁 요구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사권이 필수적이다"라는 논리로 저항했다. 이 갈등은 단순한 행정적 마찰을 넘어, 미국 정치의 근간을 두고 벌이는 거대 분파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훗날 아서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나는 그저 내 당과 내 보스(콩클링)에게 충성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역사는 그를 개혁의 대상이자 시대의 구습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18]
당시 뉴욕 세관은 미국 전체 관세 수입의 약 75% 이상을 처리하던 거대 기구였다. 연방 정부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직원 수만 수천 명에 달했다. 엽관제가 판을 치던 시절, 세관장 자리는 단순한 공직이 아니라 수천 개의 일자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인사권의 화약고'**였다.
아서의 임명 배후에는 당연히 그의 정치적 후원자 로스코 콩클링이 있었다. 콩클링은 자신의 파벌인 '스탈워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장 믿을 만하고 행정 능력이 검증된 아서를 이 자리에 앉혔다. 아서는 연봉 12,000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대통령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고액 연봉이었으며, 각종 수수료 수입을 합치면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했다.[17]
아서는 세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특기인 행정 장악력을 발휘했다. 그는 세관을 철저하게 공화당 스탈워츠 파벌의 자금줄이자 인력 공급처로 변모시켰다. 세관 직원들은 월급의 일정 비율을 공화당 당비로 상납해야 했다. 이는 명목상 자발적 기부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고용 유지를 위한 '세금'이었다. 세관의 모든 보직은 선거에서 공화당을 위해 뛴 인물들에게 배분되었다. 또한 업무 능력보다는 당에 대한 충성심이 우선시되었다. 선거철이 되면 세관 직원들은 업무 대신 투표 독려와 선거 운동에 동원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서가 이 부패한 시스템을 운영하면서도 '개인적인 횡령'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시스템 전체가 당을 위해 굴러가게 만들었을 뿐,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뇌물을 직접 받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정당 정치의 정당한 운영 방식"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자신을 부패한 도둑이 아닌 '유능한 정치 관리자'로 정의했다.
아서가 지배하던 뉴욕 세관은 '커스텀 하우스'라 불리며 뉴욕 정계의 사교 클럽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서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출근하여 세련된 옷차림으로 집무실에 앉아 고급 시가를 피우며 찾아오는 정객들을 맞이했다. 그는 특유의 매너와 화술로 까다로운 상인들과 거친 정치인들을 모두 요리했으며, 세관 업무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당시 언론은 그를 "세관의 왕자(The Prince of Custom House)"라고 불렀다. 그는 매일 밤 뉴욕의 최고급 식당인 '델모니코스(Delmonico's)'에서 화려한 만찬을 즐겼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권력을 쫓는 무리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 이면에서는 엽관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서가 누리던 이 황금기는 역설적으로 미국 공무원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거센 폭풍의 전조였던 셈이다.
아서의 세관 운영은 효율적이었으나, 도덕적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187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자유공화당' 운동과 민주당의 공세는 세관의 부패를 정조준했다. 특히 1876년 대선 이후 취임한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공직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고, 그 첫 번째 타깃은 당연히 '엽관제의 상징'인 아서와 뉴욕 세관이었다.
아서는 헤이스의 개혁 요구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사권이 필수적이다"라는 논리로 저항했다. 이 갈등은 단순한 행정적 마찰을 넘어, 미국 정치의 근간을 두고 벌이는 거대 분파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훗날 아서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나는 그저 내 당과 내 보스(콩클링)에게 충성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역사는 그를 개혁의 대상이자 시대의 구습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18]
3.9. 세관 부패 논란[편집]
체스터 A. 아서가 뉴욕 세관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뉴욕 세관(New York Custom House)은 단순히 관세를 징수하는 국가 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공화당 내 보수 파벌인 '스탈워츠'의 거대한 정치 자금 조달처이자 인사 창구였으며, 동시에 온갖 부패와 편법이 난무하는 '복마전'이었다. 아서는 이 거대 조직의 수장으로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했지만, 그 효율성 안에는 도덕적 해이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뉴욕 세관은 약 1,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채용 조건은 실력이 아닌 '당에 대한 충성도'와 '로스코 콩클링에 대한 헌신'이었다. 아서는 세관원들의 급여에서 일정 비율을 '정치 기부금(Assessments)' 명목으로 강제 징수하여 공화당의 선거 자금으로 전용했다.
또한 '과태료 분배 제도(Moiety System)'는 부패의 화룡점정이었다. 이는 수입업자가 관세를 포탈하다 적발될 경우, 압수한 물품이나 과태료의 일부를 적발한 세관원과 세관 간부들이 나눠 갖는 제도였다. 세관원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한 단속을 일삼았고, 수입업자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아서의 수하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했다. 아서는 이 과정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으나,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묵인하며 콩클링의 정치 기계에 기름을 쳤다.
당시 뉴욕의 개혁적 언론들과 에드윈 고드킨 같은 비판가들은 아서를 "부패한 시스템의 세련된 대리인"이라고 맹비난했다. 언론은 그가 밤마다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고 최고급 시가를 피우는 자금이 결국 세관원들의 쥐어짜인 월급과 상인들의 뇌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스타 루트(Star Route)' 스캔들과 연루된 인물들이 아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서의 이미지는 '정의로운 변호사'에서 '타락한 관료'로 급격히 추락했다. 하지만 아서는 이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정당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금과 조직은 필수적"이라는 현실주의적 논리로 자신의 행보를 정당화했다.[19]
1877년, 취임한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공직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뉴욕 세관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구성된 '존 제이 위원회(John Jay Commission)'는 아서가 운영하던 세관의 실태를 낱낱이 파헤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관 직원 중 상당수가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선거철마다 동원되는 '유령 직원'이었으며, 장부는 조작되어 있었다.
위원회는 "아서 세관장은 개인적으로 청렴할지 모르나, 그가 관리하는 조직은 국가의 암세포와 같다"는 파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서는 위원회의 질의에 대해 매우 논리적이고 세련된 답변으로 방어했으나, 이미 대세는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감사가 아니라, 개혁을 원하는 '하프 브리드(Half-Breeds)' 파벌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스탈워츠' 파벌 간의 정치적 전면전이었기 때문이다.
세관 부패 논란은 아서에게 평생 따라다닐 주홍글씨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끝까지 보호하려 애썼고, 콩클링의 지시에 따라 헤이즈 행정부의 사퇴 압박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서는 대중들에게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아서가 보여준 집요한 '시스템 수호' 의지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단행한 '시스템 파괴(펜들턴법 통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그의 인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세관장 시절의 그는 엽관제라는 괴물의 가장 유능한 사육사였으나, 동시에 그 괴물의 생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20]
당시 뉴욕 세관은 약 1,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채용 조건은 실력이 아닌 '당에 대한 충성도'와 '로스코 콩클링에 대한 헌신'이었다. 아서는 세관원들의 급여에서 일정 비율을 '정치 기부금(Assessments)' 명목으로 강제 징수하여 공화당의 선거 자금으로 전용했다.
또한 '과태료 분배 제도(Moiety System)'는 부패의 화룡점정이었다. 이는 수입업자가 관세를 포탈하다 적발될 경우, 압수한 물품이나 과태료의 일부를 적발한 세관원과 세관 간부들이 나눠 갖는 제도였다. 세관원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한 단속을 일삼았고, 수입업자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아서의 수하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했다. 아서는 이 과정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으나,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묵인하며 콩클링의 정치 기계에 기름을 쳤다.
당시 뉴욕의 개혁적 언론들과 에드윈 고드킨 같은 비판가들은 아서를 "부패한 시스템의 세련된 대리인"이라고 맹비난했다. 언론은 그가 밤마다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고 최고급 시가를 피우는 자금이 결국 세관원들의 쥐어짜인 월급과 상인들의 뇌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스타 루트(Star Route)' 스캔들과 연루된 인물들이 아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서의 이미지는 '정의로운 변호사'에서 '타락한 관료'로 급격히 추락했다. 하지만 아서는 이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정당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금과 조직은 필수적"이라는 현실주의적 논리로 자신의 행보를 정당화했다.[19]
1877년, 취임한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공직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뉴욕 세관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구성된 '존 제이 위원회(John Jay Commission)'는 아서가 운영하던 세관의 실태를 낱낱이 파헤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관 직원 중 상당수가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선거철마다 동원되는 '유령 직원'이었으며, 장부는 조작되어 있었다.
위원회는 "아서 세관장은 개인적으로 청렴할지 모르나, 그가 관리하는 조직은 국가의 암세포와 같다"는 파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서는 위원회의 질의에 대해 매우 논리적이고 세련된 답변으로 방어했으나, 이미 대세는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감사가 아니라, 개혁을 원하는 '하프 브리드(Half-Breeds)' 파벌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스탈워츠' 파벌 간의 정치적 전면전이었기 때문이다.
세관 부패 논란은 아서에게 평생 따라다닐 주홍글씨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끝까지 보호하려 애썼고, 콩클링의 지시에 따라 헤이즈 행정부의 사퇴 압박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서는 대중들에게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아서가 보여준 집요한 '시스템 수호' 의지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단행한 '시스템 파괴(펜들턴법 통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그의 인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세관장 시절의 그는 엽관제라는 괴물의 가장 유능한 사육사였으나, 동시에 그 괴물의 생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20]
3.10. 헤이즈 대통령과의 전쟁[편집]
체스터 A. 아서의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투쟁 중 하나는 바로 1877년부터 시작된 러더퍼드 B. 헤이스와의 대결이었다. 이 대결은 단순히 상급자와 하급자의 갈등이 아니라, 미국의 국정 운영 철학을 두고 벌어진 '엽관제(Spoils System) 사수파'와 '관료제 개혁파'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당시 뉴욕 세관장이었던 아서는 엽관제의 상징적 존재로서 개혁의 칼날을 든 헤이즈 행정부의 제1 타깃이 되었다.
헤이즈는 "정부 관직은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봉사의 직무"라고 선언하며, 모든 연방 공무원의 정치 활동 및 정당 기부금 강제 징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뉴욕 세관을 사실상 공화당의 '정치 자금 세탁소'이자 '선거 캠프'로 활용하던 로스코 콩클링과 아서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서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정당 정치의 승리가 정책의 실현을 가져오며, 이를 위해 헌신한 당원들에게 관직을 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당한 보상"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헤이스는 아서를 몰아내기 위해 존 제이(John Jay)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 뉴욕 세관을 샅샅이 뒤졌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세관 직원 중 상당수가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당의 선거 운동에만 매진하고 있었으며, 급여의 일부가 자동적으로 콩클링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당당했다. 그는 조사 위원회 앞에서 "세관의 업무 효율은 역대 최고 수준이며, 직원들의 정당 활동은 개인의 자유"라고 항변했다. 아서는 단순히 부패한 관료의 모습이 아니라, 시스템의 수호자로서 매우 정교한 법리적 방어막을 쳤다. 그는 헤이즈 대통령의 개혁안이 '행정부의 독단'이라며 의회, 특히 콩클링이 장악한 상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치했다.[21]
이 전쟁의 실질적인 사령관은 로스코 콩클링이었지만, 현장에서 헤이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낸 방패는 아서였다. 아서는 세관 직원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한편, 언론을 통해 헤이즈 대통령을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로 몰아세웠다.
당시 뉴욕의 '정치 기계'는 아서의 탁월한 행정력 덕분에 그 어떤 파상공세에도 무너지지 않는 요새처럼 보였다. 아서는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결백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당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막힌 줄타기를 이어갔다. 헤이즈는 아서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으며,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대통령과 특정 지역 보스 간의 가장 길고 지루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결국 1878년 7월, 헤이즈 대통령은 상회가 휴회 중인 틈을 타 아서를 세관장에서 직권 면직(Suspension)시키는 강수를 둔다. 아서는 이 조치에 대해 격분하며 "이것은 법치가 아닌 폭거"라고 비난하며 백악관을 성토했다.
이 사건은 아서를 엽관제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콩클링 파벌(스탈워츠) 내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전쟁은 아서에게 '관료제 개혁'이라는 화두를 뼈에 사무치게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시스템의 추악한 이면이 대중 앞에 낱낱이 공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서의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헤이즈가 그토록 원했던 공무원 제도 개혁법에 서명하게 된 것은, 이 치열했던 전쟁이 남긴 가장 기묘한 유산이었다.[22]
1878년 7월 11일, 체스터 A. 아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헤이스 대통령으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은 뉴욕 세관장직에서의 전격적인 해임 통보였다. 이는 단순히 한 공직자의 퇴진을 넘어, 당시 미국 정계를 지배하던 '정치 기계'와 '개혁 세력' 사이의 전면전이 폭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서는 이 사건을 통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적 굴욕을 맛보았으나, 역설적으로 이 시련은 그를 부통령 후보라는 더 큰 무대로 이끄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해임의 전초전은 헤이즈 대통령이 임명한 '존스 위원회(Jay Commission)'의 조사였다. 헤이즈는 취임 초기부터 "공직은 당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며 엽관제 타파를 선언했다. 조사 결과, 아서가 관리하던 뉴욕 세관은 "정치적 충성도가 업무 능력보다 우선시되는 거대한 사조직"으로 규정되었다.
위원회는 아서가 세관 직원들에게 공화당 선거 자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업무 시간 중에도 당원 모집 활동을 하게 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폭로했다. 아서는 "이것은 뉴욕의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개혁을 부르짖던 헤이즈에게 아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구시대의 상징'이었다. 대통령은 아서에게 자진 사퇴를 권고했으나, 아서는 이를 거부하며 정면 승부를 택했다. "내가 물러나는 것은 콩클링 상원의원과 뉴욕 공화당의 굴복을 의미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서의 해임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정치적 스승인 로스코 콩클링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콩클링은 상원에서 헤이즈 대통령의 인사권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보복에 나섰다. 그는 아서의 해임이 "뉴욕의 자치권에 대한 연방 정부의 침해"라고 주장하며, 아서의 후임자로 지명된 인물들의 인준을 상원에서 부결시키는 등 전례 없는 입법 정체를 유도했다.[23]
이 과정에서 아서는 콩클링의 가장 충직한 방패가 되었다. 그는 해임된 직후에도 세관 업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상원에 제출했고, 자신을 향한 부패 혐의가 근거 없음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비록 직위는 잃었지만, 아서는 이 싸움을 통해 스탈워츠 분파 내에서 '신의를 지킨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는 훗날 그가 당내 경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결정적인 명분이 된다.
세관장직에서 쫓겨난 후, 아서는 잠시 변호사 업무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미 뉴욕 정계의 거물이 된 그에게 일반적인 법률 상담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콩클링과 함께 '공화당 뉴욕 주 위원회'의 의장직을 수행하며, 1880년 대선을 준비하는 막후 조정자로 활동했다.
흥미로운 점은, 소득이 끊긴 실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뉴욕 최고의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고, 수백 달러짜리 맞춤 정장을 주문했다. 정적들은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며 비아냥거렸으나, 아서는 "신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법"이라며 여유롭게 응수했다. 이 시기 아서는 정치적 패배감에 젖어 있기보다,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할 기회를 노리며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아서의 해임은 당대에는 그의 몰락처럼 보였으나, 역사적으로는 그에게 '정치적 자유'를 선사한 사건이었다. 만약 그가 계속 세관장 자리에 머물렀다면, 그는 영원히 콩클링의 그림자 밑에 있는 '유능한 관리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해임 과정을 거치며 그는 국가 행정과 정치적 신의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목격했고, 대통령의 권한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자신을 해임했던 헤이스보다 더 강력한 공무원 개혁안을 밀어붙였을 때, 사람들은 1878년의 이 해임 사건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장 잘 알던 부패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낸 것은, 어쩌면 그 고리에 묶여 직접 고통받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4]
헤이즈는 "정부 관직은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봉사의 직무"라고 선언하며, 모든 연방 공무원의 정치 활동 및 정당 기부금 강제 징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뉴욕 세관을 사실상 공화당의 '정치 자금 세탁소'이자 '선거 캠프'로 활용하던 로스코 콩클링과 아서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서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정당 정치의 승리가 정책의 실현을 가져오며, 이를 위해 헌신한 당원들에게 관직을 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당한 보상"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헤이스는 아서를 몰아내기 위해 존 제이(John Jay)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 뉴욕 세관을 샅샅이 뒤졌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세관 직원 중 상당수가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당의 선거 운동에만 매진하고 있었으며, 급여의 일부가 자동적으로 콩클링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당당했다. 그는 조사 위원회 앞에서 "세관의 업무 효율은 역대 최고 수준이며, 직원들의 정당 활동은 개인의 자유"라고 항변했다. 아서는 단순히 부패한 관료의 모습이 아니라, 시스템의 수호자로서 매우 정교한 법리적 방어막을 쳤다. 그는 헤이즈 대통령의 개혁안이 '행정부의 독단'이라며 의회, 특히 콩클링이 장악한 상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치했다.[21]
이 전쟁의 실질적인 사령관은 로스코 콩클링이었지만, 현장에서 헤이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낸 방패는 아서였다. 아서는 세관 직원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한편, 언론을 통해 헤이즈 대통령을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로 몰아세웠다.
당시 뉴욕의 '정치 기계'는 아서의 탁월한 행정력 덕분에 그 어떤 파상공세에도 무너지지 않는 요새처럼 보였다. 아서는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결백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당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막힌 줄타기를 이어갔다. 헤이즈는 아서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으며,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대통령과 특정 지역 보스 간의 가장 길고 지루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결국 1878년 7월, 헤이즈 대통령은 상회가 휴회 중인 틈을 타 아서를 세관장에서 직권 면직(Suspension)시키는 강수를 둔다. 아서는 이 조치에 대해 격분하며 "이것은 법치가 아닌 폭거"라고 비난하며 백악관을 성토했다.
이 사건은 아서를 엽관제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콩클링 파벌(스탈워츠) 내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전쟁은 아서에게 '관료제 개혁'이라는 화두를 뼈에 사무치게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시스템의 추악한 이면이 대중 앞에 낱낱이 공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서의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헤이즈가 그토록 원했던 공무원 제도 개혁법에 서명하게 된 것은, 이 치열했던 전쟁이 남긴 가장 기묘한 유산이었다.[22]
1878년 7월 11일, 체스터 A. 아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헤이스 대통령으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은 뉴욕 세관장직에서의 전격적인 해임 통보였다. 이는 단순히 한 공직자의 퇴진을 넘어, 당시 미국 정계를 지배하던 '정치 기계'와 '개혁 세력' 사이의 전면전이 폭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서는 이 사건을 통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적 굴욕을 맛보았으나, 역설적으로 이 시련은 그를 부통령 후보라는 더 큰 무대로 이끄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해임의 전초전은 헤이즈 대통령이 임명한 '존스 위원회(Jay Commission)'의 조사였다. 헤이즈는 취임 초기부터 "공직은 당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며 엽관제 타파를 선언했다. 조사 결과, 아서가 관리하던 뉴욕 세관은 "정치적 충성도가 업무 능력보다 우선시되는 거대한 사조직"으로 규정되었다.
위원회는 아서가 세관 직원들에게 공화당 선거 자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업무 시간 중에도 당원 모집 활동을 하게 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폭로했다. 아서는 "이것은 뉴욕의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개혁을 부르짖던 헤이즈에게 아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구시대의 상징'이었다. 대통령은 아서에게 자진 사퇴를 권고했으나, 아서는 이를 거부하며 정면 승부를 택했다. "내가 물러나는 것은 콩클링 상원의원과 뉴욕 공화당의 굴복을 의미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서의 해임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정치적 스승인 로스코 콩클링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콩클링은 상원에서 헤이즈 대통령의 인사권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보복에 나섰다. 그는 아서의 해임이 "뉴욕의 자치권에 대한 연방 정부의 침해"라고 주장하며, 아서의 후임자로 지명된 인물들의 인준을 상원에서 부결시키는 등 전례 없는 입법 정체를 유도했다.[23]
이 과정에서 아서는 콩클링의 가장 충직한 방패가 되었다. 그는 해임된 직후에도 세관 업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상원에 제출했고, 자신을 향한 부패 혐의가 근거 없음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비록 직위는 잃었지만, 아서는 이 싸움을 통해 스탈워츠 분파 내에서 '신의를 지킨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는 훗날 그가 당내 경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결정적인 명분이 된다.
세관장직에서 쫓겨난 후, 아서는 잠시 변호사 업무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미 뉴욕 정계의 거물이 된 그에게 일반적인 법률 상담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콩클링과 함께 '공화당 뉴욕 주 위원회'의 의장직을 수행하며, 1880년 대선을 준비하는 막후 조정자로 활동했다.
흥미로운 점은, 소득이 끊긴 실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뉴욕 최고의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고, 수백 달러짜리 맞춤 정장을 주문했다. 정적들은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며 비아냥거렸으나, 아서는 "신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법"이라며 여유롭게 응수했다. 이 시기 아서는 정치적 패배감에 젖어 있기보다,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할 기회를 노리며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아서의 해임은 당대에는 그의 몰락처럼 보였으나, 역사적으로는 그에게 '정치적 자유'를 선사한 사건이었다. 만약 그가 계속 세관장 자리에 머물렀다면, 그는 영원히 콩클링의 그림자 밑에 있는 '유능한 관리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해임 과정을 거치며 그는 국가 행정과 정치적 신의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목격했고, 대통령의 권한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자신을 해임했던 헤이스보다 더 강력한 공무원 개혁안을 밀어붙였을 때, 사람들은 1878년의 이 해임 사건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장 잘 알던 부패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낸 것은, 어쩌면 그 고리에 묶여 직접 고통받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4]
3.11.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편집]
1880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미국 정치사상 가장 치열하고 추잡하며, 동시에 운명적인 대회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대회는 단순히 차기 대선 후보를 뽑는 자리를 넘어, 당의 주도권을 쥐려는 스탈워츠와 개혁을 표방하는 '하프브리드(Half-Breeds, 혼혈파)'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뉴욕의 '정치 기계'였던 체스터 A. 아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아서의 보스였던 로스코 콩클링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율리시스 S. 그랜트 전 대통령의 3선 추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콩클링은 그랜트를 다시 백악관에 앉힘으로써, 헤이즈 행정부 시절 잃어버렸던 엽관제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아서는 콩클링의 부관으로서 전당대회장의 물밑 작업과 대의원 관리를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상황은 콩클링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300명이 넘는 '그랜트 사수대'가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대항마인 제임스 G. 블레인과의 접전 끝에 전당대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36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양측의 타협안으로 전형적인 하프브리드 성향의 제임스 A. 가필드가 깜짝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는 콩클링과 아서에게 치욕적인 패배나 다름없었다.
가필드를 지명한 하프브리드 측은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부통령 후보 자리를 스탈워츠 측에 제안했다. 그들이 내민 카드가 바로 뉴욕 정계의 실무자였던 체스터 A. 아서였다. 가필드 측은 아서를 지명함으로써 뉴욕의 거대한 표밭과 콩클링의 자금력을 끌어오려 했던 것이다.
제안을 받은 아서가 콩클링을 찾아갔을 때, 콩클링은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 "체스터, 그 자리는 자네에게 모욕이네! 당장 거절하게. 가필드는 11월에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걸세!" 콩클링은 가필드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았고, 설령 승리하더라도 스탈워츠가 들러리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아서가 자신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순간, 평생 콩클링의 충실한 '사냥개' 노릇을 했던 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스의 명령을 거역했다. 아서는 콩클링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아서의 보스였던 로스코 콩클링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율리시스 S. 그랜트 전 대통령의 3선 추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콩클링은 그랜트를 다시 백악관에 앉힘으로써, 헤이즈 행정부 시절 잃어버렸던 엽관제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아서는 콩클링의 부관으로서 전당대회장의 물밑 작업과 대의원 관리를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상황은 콩클링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300명이 넘는 '그랜트 사수대'가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대항마인 제임스 G. 블레인과의 접전 끝에 전당대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36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양측의 타협안으로 전형적인 하프브리드 성향의 제임스 A. 가필드가 깜짝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는 콩클링과 아서에게 치욕적인 패배나 다름없었다.
가필드를 지명한 하프브리드 측은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부통령 후보 자리를 스탈워츠 측에 제안했다. 그들이 내민 카드가 바로 뉴욕 정계의 실무자였던 체스터 A. 아서였다. 가필드 측은 아서를 지명함으로써 뉴욕의 거대한 표밭과 콩클링의 자금력을 끌어오려 했던 것이다.
제안을 받은 아서가 콩클링을 찾아갔을 때, 콩클링은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 "체스터, 그 자리는 자네에게 모욕이네! 당장 거절하게. 가필드는 11월에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걸세!" 콩클링은 가필드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았고, 설령 승리하더라도 스탈워츠가 들러리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아서가 자신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순간, 평생 콩클링의 충실한 '사냥개' 노릇을 했던 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스의 명령을 거역했다. 아서는 콩클링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위원장님, 부통령직은 제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저는 이 제안을 수락할 생각입니다."[25]
격분한 콩클링은 "그 자리는 자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며 자리를 떴으나, 아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즉시 가필드의 러닝메이트 수락 서한을 작성했다. 이는 아서가 '정치 보스의 부속품'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아서의 합류로 공화당은 외견상 단합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직한 가필드와 부패한 아서의 결합"이라는 조롱이 쏟아졌고, 민주당은 아서의 뉴욕 세관장 시절 비리를 들춰내며 맹공을 퍼부었다. 아서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자신의 강점인 조직력과 자금 조달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특히 뉴욕의 기업가들로부터 막대한 선거 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결국 1880년 11월, 가필드와 아서는 민주당의 핸콕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아서는 미국의 제20대 부통령이 되었고, 뉴욕의 '정치꾼'은 마침내 연방 정부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승리는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아서는 자신이 부통령이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암살자의 총탄이 만든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백악관에 밀려 들어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26]
3.12. 가필드와의 불편한 동거[편집]
1881년 3월, 체스터 A. 아서는 미국의 제20대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의 취임은 영광이라기보다는 '가시방석'에 가까웠다.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와 부통령 아서는 같은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 기반과 정치적 철학이 완전히 상반된 정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가필드는 당내 개혁파인 '하프 브리드'의 지지를 받았고, 아서는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던 보수파 '스탈워츠(Stalwarts)'의 핵심 인물이었다. 백악관 내부에서 벌어진 이들의 기묘한 동거는 미국 정치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긴장감을 자아냈다.
가필드 행정부 초기, 가장 큰 갈등 폭발점은 역시 인사권이었다. 아서의 정치적 대부인 로스코 콩클링은 부통령 아서를 앞세워 뉴욕 세관장을 비롯한 핵심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앉히려 획책했다. 특히 아서는 부통령이라는 공직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의 수반인 가필드 대통령이 아닌 콩클링의 편에 서서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비난하는 초유의 행보를 보였다.
당시 가필드 대통령의 비서실과 내각은 아서를 사실상 '스탈워츠가 보낸 스파이' 혹은 '트로이의 목마'로 취급했다. 국무장관 제임스 G. 블레인은 아서를 극도로 혐오하며 대통령에게 그를 멀리할 것을 조언했고, 아서는 내각 회의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아서는 백악관 본관보다는 콩클링의 사무실이나 사교 클럽을 전전하며 가필드 행정부를 무너뜨릴 전략을 짜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 아서가 겪은 심적 갈등은 상당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가필드의 인품을 존중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콩클링에게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1881년 5월, 콩클링이 가필드와의 인사권 다툼 끝에 연방 상원의원직을 사퇴하며 승부수를 던졌을 때, 아서는 부통령 신분으로 올버니(뉴욕주 주도)까지 내려가 콩클링의 재선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 사건은 미국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부통령이 행정부의 안정을 해치며 당파 싸움의 선봉에 선 모습은 "공직의 엄중함을 모르는 처사"라는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아서를 향해 "부통령의 자격을 스스로 내던진 자"라고 맹비난했고, 가필드와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강을 건너게 된다. 아서는 백악관 내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원 의장으로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일뿐이었다.[27]
정치적 위기 속에서 아서의 고독을 심화시킨 것은 1년 전 사별한 아내 넬의 빈자리였다. 가필드 대통령과 영부인 루크레티아 가필드가 다정한 모습으로 국정을 돌보는 동안, 아서는 차가운 하숙집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어 고독을 잊으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부통령은 매일 술판을 벌인다"는 오해만 낳았다. 사실 아서는 가필드 행정부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으며, 콩클링의 무리한 요구와 가필드의 냉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친구에게 "부통령직은 내가 평생 했던 일 중 가장 공허한 자리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위태로운 대치는 1881년 7월 2일, 워싱턴 기차역에서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비극적인 국면으로 접어든다. 정신질환자 찰스 기토가 가필드를 저격하며 "나는 스탈워츠다! 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 한마디는 아서를 단순한 '정치적 라이벌'에서 '암살 공모자 혹은 배후'라는 의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범인 찰스 기토(Charles J. Guiteau)는 전형적인 '정치적 부적응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당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믿는 망상에 빠져 있었으며, 그 대가로 파리 영사직을 요구하며 수개월 동안 백악관과 국무부를 배회했다. 하지만 국무장관 제임스 블레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기토는 신이 자신에게 "대통령을 제거하여 공화당을 구하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믿기 시작했다.
기토의 논리는 명확하면서도 끔찍했다. 가필드가 죽고 '스탈워츠'의 핵심인 아서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을 포함한 동지들이 관직을 얻고 정계가 다시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거사를 위해 은색 손잡이가 달린 .44구경 영항력 있는 권총(British Bull Dog revolver)을 구입했는데, 그 이유는 "훗날 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더 멋있어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건 직후 아서는 뉴욕 자택에서 소식을 접하고 안색이 창백해진 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분노한 대중은 아서의 집 앞에 모여 "살인자!", "부패한 정치꾼의 하수작!"이라며 욕설을 퍼부었고, 일부 과격파는 아서의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당시 아서는 지인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그 총탄을 맞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며 극심한 심적 고통을 호소했다.
당시 여론은 아서를 단순한 부통령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기계'의 수장으로 보고 있었다. 기토의 외침은 아서가 가진 모든 정치적 정당성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서는 가필드가 사경을 헤매는 80일 동안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히 가필드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자신의 등장 자체가 국민적 분노를 자극할까 두려워한 자발적 가택 연금에 가까웠다.[28]
기토의 총탄은 가필드의 몸을 뚫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추악한 엽관제 시스템의 심장에도 구멍을 냈다. "관직 하나 얻지 못했다고 대통령을 쏘는 나라가 제정신인가"라는 자성이 북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토가 그토록 찬양했던 아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지한다는 살인마의 외침을 들으며, 아서는 자신이 평생 몸담아온 '정치 기계'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목격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가필드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이 날을 '정치꾼 아서가 죽고 대통령 아서가 태어난 날'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는 비난의 화살 속에서 침묵하며, 만약 자신이 권력을 이어받게 된다면 이 미친 시스템을 반드시 뜯어고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게 된다.[ 실제로 기토는 아서가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을 사면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으나, 아서는 단 한 번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고 기토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가필드가 사경을 헤매는 80일 동안, 아서는 백악관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뉴욕의 자택에 은신해야 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그의 집 앞에 모여 "살인자 아서"를 외쳤고,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문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가필드와의 불편한 동거는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으며, 아서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전 국민의 증오를 받는 채로 권력의 정점을 향해 등 떠밀리고 있었다.[29]
9월 19일, 가필드 대통령이 끝내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서는 오열했다. 그는 취임 선서를 하기 위해 판사를 집으로 불렀을 때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떨었다고 전해진다. 국민의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시작해야 하는 대통령직은 그에게 축복이 아닌 형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암살 배후설'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아서를 단련시켰다. 그는 더 이상 콩클링의 부하로 남을 수 없음을,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부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백악관으로 향하는 아서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의 '세련된 정치꾼'과는 다른 결연함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는 국민들에게 "행동"으로 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신분 세탁'이자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거듭남'의 시작이었다.
가필드 행정부 초기, 가장 큰 갈등 폭발점은 역시 인사권이었다. 아서의 정치적 대부인 로스코 콩클링은 부통령 아서를 앞세워 뉴욕 세관장을 비롯한 핵심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앉히려 획책했다. 특히 아서는 부통령이라는 공직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의 수반인 가필드 대통령이 아닌 콩클링의 편에 서서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비난하는 초유의 행보를 보였다.
당시 가필드 대통령의 비서실과 내각은 아서를 사실상 '스탈워츠가 보낸 스파이' 혹은 '트로이의 목마'로 취급했다. 국무장관 제임스 G. 블레인은 아서를 극도로 혐오하며 대통령에게 그를 멀리할 것을 조언했고, 아서는 내각 회의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아서는 백악관 본관보다는 콩클링의 사무실이나 사교 클럽을 전전하며 가필드 행정부를 무너뜨릴 전략을 짜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 아서가 겪은 심적 갈등은 상당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가필드의 인품을 존중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콩클링에게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1881년 5월, 콩클링이 가필드와의 인사권 다툼 끝에 연방 상원의원직을 사퇴하며 승부수를 던졌을 때, 아서는 부통령 신분으로 올버니(뉴욕주 주도)까지 내려가 콩클링의 재선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 사건은 미국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부통령이 행정부의 안정을 해치며 당파 싸움의 선봉에 선 모습은 "공직의 엄중함을 모르는 처사"라는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아서를 향해 "부통령의 자격을 스스로 내던진 자"라고 맹비난했고, 가필드와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강을 건너게 된다. 아서는 백악관 내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원 의장으로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일뿐이었다.[27]
정치적 위기 속에서 아서의 고독을 심화시킨 것은 1년 전 사별한 아내 넬의 빈자리였다. 가필드 대통령과 영부인 루크레티아 가필드가 다정한 모습으로 국정을 돌보는 동안, 아서는 차가운 하숙집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어 고독을 잊으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부통령은 매일 술판을 벌인다"는 오해만 낳았다. 사실 아서는 가필드 행정부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으며, 콩클링의 무리한 요구와 가필드의 냉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친구에게 "부통령직은 내가 평생 했던 일 중 가장 공허한 자리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위태로운 대치는 1881년 7월 2일, 워싱턴 기차역에서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비극적인 국면으로 접어든다. 정신질환자 찰스 기토가 가필드를 저격하며 "나는 스탈워츠다! 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 한마디는 아서를 단순한 '정치적 라이벌'에서 '암살 공모자 혹은 배후'라는 의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범인 찰스 기토(Charles J. Guiteau)는 전형적인 '정치적 부적응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당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믿는 망상에 빠져 있었으며, 그 대가로 파리 영사직을 요구하며 수개월 동안 백악관과 국무부를 배회했다. 하지만 국무장관 제임스 블레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기토는 신이 자신에게 "대통령을 제거하여 공화당을 구하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믿기 시작했다.
기토의 논리는 명확하면서도 끔찍했다. 가필드가 죽고 '스탈워츠'의 핵심인 아서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을 포함한 동지들이 관직을 얻고 정계가 다시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거사를 위해 은색 손잡이가 달린 .44구경 영항력 있는 권총(British Bull Dog revolver)을 구입했는데, 그 이유는 "훗날 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더 멋있어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건 직후 아서는 뉴욕 자택에서 소식을 접하고 안색이 창백해진 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분노한 대중은 아서의 집 앞에 모여 "살인자!", "부패한 정치꾼의 하수작!"이라며 욕설을 퍼부었고, 일부 과격파는 아서의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당시 아서는 지인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그 총탄을 맞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며 극심한 심적 고통을 호소했다.
당시 여론은 아서를 단순한 부통령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기계'의 수장으로 보고 있었다. 기토의 외침은 아서가 가진 모든 정치적 정당성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서는 가필드가 사경을 헤매는 80일 동안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히 가필드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자신의 등장 자체가 국민적 분노를 자극할까 두려워한 자발적 가택 연금에 가까웠다.[28]
기토의 총탄은 가필드의 몸을 뚫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추악한 엽관제 시스템의 심장에도 구멍을 냈다. "관직 하나 얻지 못했다고 대통령을 쏘는 나라가 제정신인가"라는 자성이 북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토가 그토록 찬양했던 아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지한다는 살인마의 외침을 들으며, 아서는 자신이 평생 몸담아온 '정치 기계'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목격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가필드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이 날을 '정치꾼 아서가 죽고 대통령 아서가 태어난 날'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는 비난의 화살 속에서 침묵하며, 만약 자신이 권력을 이어받게 된다면 이 미친 시스템을 반드시 뜯어고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게 된다.[ 실제로 기토는 아서가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을 사면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으나, 아서는 단 한 번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고 기토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가필드가 사경을 헤매는 80일 동안, 아서는 백악관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뉴욕의 자택에 은신해야 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그의 집 앞에 모여 "살인자 아서"를 외쳤고,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문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가필드와의 불편한 동거는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으며, 아서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전 국민의 증오를 받는 채로 권력의 정점을 향해 등 떠밀리고 있었다.[29]
9월 19일, 가필드 대통령이 끝내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서는 오열했다. 그는 취임 선서를 하기 위해 판사를 집으로 불렀을 때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떨었다고 전해진다. 국민의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시작해야 하는 대통령직은 그에게 축복이 아닌 형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암살 배후설'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아서를 단련시켰다. 그는 더 이상 콩클링의 부하로 남을 수 없음을,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부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백악관으로 향하는 아서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의 '세련된 정치꾼'과는 다른 결연함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는 국민들에게 "행동"으로 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신분 세탁'이자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거듭남'의 시작이었다.
3.13. 가필드의 서거와 취임[편집]
1881년 9월 19일 밤,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이 총격 부상에 따른 합병증으로 끝내 서거했다는 소식이 뉴욕의 아서 자택에 전달되었다. 당시 아서의 심경은 단순히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복잡했다. 그는 자신을 '살인 배격자'로 몰아세우는 대중의 증오 섞인 시선과, 대통령직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무게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필드의 서거 소식을 접한 아서는 그날 밤 자정 무렵, 뉴욕 시 렉싱턴가 123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에서 서둘러 취임 선서를 준비했다. 당시 워싱턴 D.C.로 이동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행정 공백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9월 20일 새벽 2시 15분, 뉴욕 주 대법원 판사 존 브래디의 주재 아래 아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제21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선서를 마쳤다.[30]
취임 선서를 마친 직후, 아서는 기쁨이나 권력욕을 내비치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곁에 있던 친구들에게 "나는 이 직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직의 무게를 누구보다 엄중하게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서가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을 때, 민심은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암살범 찰스 기토가 범행 직후 외쳤던 "이제 아서가 대통령이다!"라는 말은 마치 아서가 암살의 배후이거나 최소한 수혜자라는 낙인처럼 작용했다. 당시 언론들은 아서의 집권을 '정치 기계의 승리'이자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연일 보도했다.
아서는 자신이 콩클링의 '꼭두각시'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는 워싱턴으로 향하며 결심했다. 가필드가 생전에 추진하려 했던 개혁의 의지를 이어받는 것만이 자신이 국민적 불신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던 '신사 아서'의 면모를 잠시 내려놓고, 국가를 책임지는 '통치자 아서'로서의 자아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9월 22일, 워싱턴에 도착한 아서는 국회의사당에서 다시 한번 공식적인 취임식을 가졌고, 짧지만 강렬한 취임사를 발표했다. 그는 가필드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하며, 당파적 이익을 떠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마주한 백악관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가필드가 투병하는 동안 행정 업무는 마비되어 있었고, 사무실 곳곳에는 인사 청탁을 위해 몰려든 '스탈워츠' 동지들이 아서의 집권을 환호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콩클링을 비롯한 그의 옛 동료들은 이제 '우리들의 시대'가 왔다며 기세를 올렸으나, 아서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취임 첫날, 자신을 찾아온 정치 보스들의 면담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거나 뒤로 미루며 그들과의 '정치적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역사는 이 지점을 아서 인생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으로 기록한다. 엽관제의 정점에서 혜택을 누려온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신을 키워준 시스템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콩클링에게는 '배신'이었으나, 미국 시민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아서는 가필드의 내각을 즉각 교체하지 않고 당분간 유지하며 행정의 연속성을 꾀했다. 또한, 암살범 기토에 대한 엄정한 재판을 지시하며 자신과 암살범 사이에 어떠한 유대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대중은 서서히 아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뉴욕의 멋쟁이 정치꾼인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대통령다운 기 품과 결단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슬픔 속에 시작된 그의 임기는 이렇게 미국 정치사를 뒤바꿀 '위대한 반전'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31]
아서가 백악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권력에 대한 희열이 아니라 '경악'이었다. 평소 자타공인 최고의 미식가이자 패셔니스타였던 아서의 눈에 비친 당시의 백악관은 일국의 국가원수가 머무는 관저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저렴한 여관이나 남북전쟁 당시의 군 막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서는 취임 직후 "나는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며 백악관 입주를 거부하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완료될 때까지 지인의 집을 전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당시 백악관의 위생 상태는 참담했다. 남북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 유입과 관리 부실로 인해 카펫은 닳아 해졌고, 벽지는 곰팡이와 담배 연기로 변색되어 있었다. 심지어 쥐가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가구들은 전임 대통령들이 쓰던 낡은 것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서는 즉각 대청소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24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낡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32] 아서는 백악관 내부의 모든 먼지를 털어내고 소독을 실시했으며, 현대적인 배관 시설과 위생 설비를 도입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단순한 청소에 만족할 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보석 세공가였던 루이스 컴퍼니 티파니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아서는 티파니에게 백악관을 "미국의 품격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티파니는 아서의 미적 감각에 부응하여 백악관 내부를 화려한 '아르누보' 스타일로 장식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입구 홀에 설치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벽이었다. 붉은색, 흰색, 파란색이 절묘하게 조화된 이 유리벽은 낮에는 햇빛을 받아 백악관 내부를 환상적인 빛으로 채웠으며, 밤에는 가스등 불빛 아래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는 '도금 시대'의 정점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으며, 백악관을 방문하는 외교관들과 귀빈들을 압도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하드웨어가 갖춰지자 아서는 소프트웨어, 즉 '백악관의 사교 문화'를 혁신했다. 그는 매일 밤 화려한 만찬을 주최했는데, 식탁에는 항상 최고급 프랑스 요리와 희귀한 와인, 그리고 최고급 시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서는 직접 메뉴를 검토하고 와인 리스트를 작성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화려한 연회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었다. 아서는 가필드 암살 이후 분열된 정계를 치유하기 위해 '식탁 정치'를 활용했다. 그는 정적들을 만찬에 초대해 긴장을 완화시켰으며, 세련된 대화 매너로 상대를 매료시켰다. 사람들은 아서를 보며 "정치 기계의 부속품인 줄 알았더니, 타고난 군주와 같은 품격을 지녔다"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더 이상 딱딱한 관공서가 아니라, 세련된 문화와 정치가 공존하는 '미국 사교계의 심장'으로 거듭났다.
물론 이러한 아서의 행보에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호화로운 파티나 열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적들은 그를 '백악관의 댄디(The White House Dandy)'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아서의 백악관 리모델링은 미국 대통령직의 '권위와 품격'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미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그에 걸맞은 국가적 상징물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훗날 아서가 떠난 뒤, 그의 후임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아서가 꾸며놓은 화려한 장식들을 일부 철거하고 검소하게 되돌렸으나, 아서가 심어놓은 '품위 있는 국가 관저'로서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백악관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쉽게도 티파니가 설치했던 유리벽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백악관을 다시 리모델링하면서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가필드의 서거 소식을 접한 아서는 그날 밤 자정 무렵, 뉴욕 시 렉싱턴가 123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에서 서둘러 취임 선서를 준비했다. 당시 워싱턴 D.C.로 이동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행정 공백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9월 20일 새벽 2시 15분, 뉴욕 주 대법원 판사 존 브래디의 주재 아래 아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제21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선서를 마쳤다.[30]
취임 선서를 마친 직후, 아서는 기쁨이나 권력욕을 내비치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곁에 있던 친구들에게 "나는 이 직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직의 무게를 누구보다 엄중하게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서가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을 때, 민심은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암살범 찰스 기토가 범행 직후 외쳤던 "이제 아서가 대통령이다!"라는 말은 마치 아서가 암살의 배후이거나 최소한 수혜자라는 낙인처럼 작용했다. 당시 언론들은 아서의 집권을 '정치 기계의 승리'이자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연일 보도했다.
아서는 자신이 콩클링의 '꼭두각시'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는 워싱턴으로 향하며 결심했다. 가필드가 생전에 추진하려 했던 개혁의 의지를 이어받는 것만이 자신이 국민적 불신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던 '신사 아서'의 면모를 잠시 내려놓고, 국가를 책임지는 '통치자 아서'로서의 자아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9월 22일, 워싱턴에 도착한 아서는 국회의사당에서 다시 한번 공식적인 취임식을 가졌고, 짧지만 강렬한 취임사를 발표했다. 그는 가필드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하며, 당파적 이익을 떠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마주한 백악관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가필드가 투병하는 동안 행정 업무는 마비되어 있었고, 사무실 곳곳에는 인사 청탁을 위해 몰려든 '스탈워츠' 동지들이 아서의 집권을 환호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콩클링을 비롯한 그의 옛 동료들은 이제 '우리들의 시대'가 왔다며 기세를 올렸으나, 아서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취임 첫날, 자신을 찾아온 정치 보스들의 면담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거나 뒤로 미루며 그들과의 '정치적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역사는 이 지점을 아서 인생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으로 기록한다. 엽관제의 정점에서 혜택을 누려온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신을 키워준 시스템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콩클링에게는 '배신'이었으나, 미국 시민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아서는 가필드의 내각을 즉각 교체하지 않고 당분간 유지하며 행정의 연속성을 꾀했다. 또한, 암살범 기토에 대한 엄정한 재판을 지시하며 자신과 암살범 사이에 어떠한 유대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대중은 서서히 아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뉴욕의 멋쟁이 정치꾼인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대통령다운 기 품과 결단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슬픔 속에 시작된 그의 임기는 이렇게 미국 정치사를 뒤바꿀 '위대한 반전'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31]
아서가 백악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권력에 대한 희열이 아니라 '경악'이었다. 평소 자타공인 최고의 미식가이자 패셔니스타였던 아서의 눈에 비친 당시의 백악관은 일국의 국가원수가 머무는 관저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저렴한 여관이나 남북전쟁 당시의 군 막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서는 취임 직후 "나는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며 백악관 입주를 거부하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완료될 때까지 지인의 집을 전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당시 백악관의 위생 상태는 참담했다. 남북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 유입과 관리 부실로 인해 카펫은 닳아 해졌고, 벽지는 곰팡이와 담배 연기로 변색되어 있었다. 심지어 쥐가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가구들은 전임 대통령들이 쓰던 낡은 것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서는 즉각 대청소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24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낡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32] 아서는 백악관 내부의 모든 먼지를 털어내고 소독을 실시했으며, 현대적인 배관 시설과 위생 설비를 도입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단순한 청소에 만족할 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보석 세공가였던 루이스 컴퍼니 티파니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아서는 티파니에게 백악관을 "미국의 품격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티파니는 아서의 미적 감각에 부응하여 백악관 내부를 화려한 '아르누보' 스타일로 장식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입구 홀에 설치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벽이었다. 붉은색, 흰색, 파란색이 절묘하게 조화된 이 유리벽은 낮에는 햇빛을 받아 백악관 내부를 환상적인 빛으로 채웠으며, 밤에는 가스등 불빛 아래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는 '도금 시대'의 정점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으며, 백악관을 방문하는 외교관들과 귀빈들을 압도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하드웨어가 갖춰지자 아서는 소프트웨어, 즉 '백악관의 사교 문화'를 혁신했다. 그는 매일 밤 화려한 만찬을 주최했는데, 식탁에는 항상 최고급 프랑스 요리와 희귀한 와인, 그리고 최고급 시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서는 직접 메뉴를 검토하고 와인 리스트를 작성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화려한 연회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었다. 아서는 가필드 암살 이후 분열된 정계를 치유하기 위해 '식탁 정치'를 활용했다. 그는 정적들을 만찬에 초대해 긴장을 완화시켰으며, 세련된 대화 매너로 상대를 매료시켰다. 사람들은 아서를 보며 "정치 기계의 부속품인 줄 알았더니, 타고난 군주와 같은 품격을 지녔다"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더 이상 딱딱한 관공서가 아니라, 세련된 문화와 정치가 공존하는 '미국 사교계의 심장'으로 거듭났다.
물론 이러한 아서의 행보에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호화로운 파티나 열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적들은 그를 '백악관의 댄디(The White House Dandy)'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아서의 백악관 리모델링은 미국 대통령직의 '권위와 품격'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미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그에 걸맞은 국가적 상징물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훗날 아서가 떠난 뒤, 그의 후임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아서가 꾸며놓은 화려한 장식들을 일부 철거하고 검소하게 되돌렸으나, 아서가 심어놓은 '품위 있는 국가 관저'로서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백악관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쉽게도 티파니가 설치했던 유리벽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백악관을 다시 리모델링하면서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3.14. 인사권 행사[편집]
당시 공화당의 보수 파벌인 '스탈워츠'의 수장 로스코 콩클링은 자신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아서가 권좌에 오르자, 이제 정부 요직을 자신들의 파벌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며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백악관에 입성한 아서는 콩클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결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취임 초기, 콩클링은 마치 자신이 상왕(上王)이라도 된 듯 아서에게 노골적인 인사 압박을 가했다. 그는 가필드 행정부의 각료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앉힐 명단을 보냈으며, 특히 자신을 정계 은퇴 위기로 몰아넣었던 뉴욕 세관장 자리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
그러나 아서는 콩클링과의 첫 면담에서부터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콩클링에게 "나는 이제 뉴욕의 정객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선을 그었다. 아서는 가필드 대통령이 임명했던 각료들을 즉각 교체하지 않고 상당 기간 유임시켰으며, 공석이 생긴 자리에도 파벌의 이익보다는 행정적 능력을 우선시하여 인물을 낙점했다. 이는 콩클링에게는 "배신"이었고, 국민들에게는 "경이로운 반전"이었다.
물론 아서가 모든 '스탈워츠' 동지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 점진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콩클링의 '예스맨'들이 아니라, 독자적인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아서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블레인을 즉각 해임하지 않고 정중하게 예우하며 후임자를 물색했다. 후임으로 임명된 프레드릭 프렐링하이젠(Frederick T. Frelinghuysen)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아서의 외교 정책을 묵묵히 보좌했다. 또한 아서의 가장 신뢰받는 조력자였던 폴저는 뉴욕 출신의 법조인으로, 세무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는 아서가 '세관 부패'의 상징이었던 과거를 씻어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서는 인사를 단행할 때마다 해당 인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직접 검토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후보자들의 이력을 살폈으며, "대통령의 인사권은 당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33]
인사권을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한 것은 콩클링이 자신을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을 때였다. 아서는 고심 끝에 콩클링을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기는 했으나, 이는 콩클링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한 형식적인 조치에 가까웠다. 콩클링은 상원의 인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자신을 예전처럼 '보스'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임명을 거부했다.
이 사건 이후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났다. 콩클링은 사석에서 아서를 향해 "가장 비열한 배신자"라는 욕설을 퍼부었으나, 아서는 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콩클링과의 결별을 통해 '파벌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을 벗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아서는 자신의 옛 동지들을 잃는 대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국민적 신뢰를 얻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서의 인사 정책은 이후 그가 추진하게 될 펜들턴법(공무원 제도 개혁법)의 예고편과 같았다. 그는 관직을 전유물로 여기던 당시의 정치 문화를 정면으로 거부했으며, 이는 미국 행정부가 파벌 싸움의 장에서 전문 관료 사회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언론은 아서의 인사권을 두고 "정치적 자살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뚝심 있는 인사는 가필드 암살 이후 혼란에 빠졌던 미국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서는 사적인 정(情)과 공적인 의(義)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극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보여준 독립적인 인사권 행사는 훗날 부통령 승계 모델의 모범 사례로 남게 되었다.
취임 초기, 콩클링은 마치 자신이 상왕(上王)이라도 된 듯 아서에게 노골적인 인사 압박을 가했다. 그는 가필드 행정부의 각료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앉힐 명단을 보냈으며, 특히 자신을 정계 은퇴 위기로 몰아넣었던 뉴욕 세관장 자리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
그러나 아서는 콩클링과의 첫 면담에서부터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콩클링에게 "나는 이제 뉴욕의 정객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선을 그었다. 아서는 가필드 대통령이 임명했던 각료들을 즉각 교체하지 않고 상당 기간 유임시켰으며, 공석이 생긴 자리에도 파벌의 이익보다는 행정적 능력을 우선시하여 인물을 낙점했다. 이는 콩클링에게는 "배신"이었고, 국민들에게는 "경이로운 반전"이었다.
물론 아서가 모든 '스탈워츠' 동지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 점진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콩클링의 '예스맨'들이 아니라, 독자적인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아서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블레인을 즉각 해임하지 않고 정중하게 예우하며 후임자를 물색했다. 후임으로 임명된 프레드릭 프렐링하이젠(Frederick T. Frelinghuysen)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아서의 외교 정책을 묵묵히 보좌했다. 또한 아서의 가장 신뢰받는 조력자였던 폴저는 뉴욕 출신의 법조인으로, 세무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는 아서가 '세관 부패'의 상징이었던 과거를 씻어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서는 인사를 단행할 때마다 해당 인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직접 검토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후보자들의 이력을 살폈으며, "대통령의 인사권은 당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33]
인사권을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한 것은 콩클링이 자신을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을 때였다. 아서는 고심 끝에 콩클링을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기는 했으나, 이는 콩클링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한 형식적인 조치에 가까웠다. 콩클링은 상원의 인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자신을 예전처럼 '보스'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임명을 거부했다.
이 사건 이후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났다. 콩클링은 사석에서 아서를 향해 "가장 비열한 배신자"라는 욕설을 퍼부었으나, 아서는 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콩클링과의 결별을 통해 '파벌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을 벗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아서는 자신의 옛 동지들을 잃는 대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국민적 신뢰를 얻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서의 인사 정책은 이후 그가 추진하게 될 펜들턴법(공무원 제도 개혁법)의 예고편과 같았다. 그는 관직을 전유물로 여기던 당시의 정치 문화를 정면으로 거부했으며, 이는 미국 행정부가 파벌 싸움의 장에서 전문 관료 사회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언론은 아서의 인사권을 두고 "정치적 자살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뚝심 있는 인사는 가필드 암살 이후 혼란에 빠졌던 미국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서는 사적인 정(情)과 공적인 의(義)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극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보여준 독립적인 인사권 행사는 훗날 부통령 승계 모델의 모범 사례로 남게 되었다.
3.15. 브라이트병[편집]
아서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는 죽음과의 소리 없는 사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2년경, 아서는 당시 의학으로 완치가 불가능했던 만성 신장 질환인 '브라이트병(Bright's Disease)' 진단을 받는다. 이는 현대 의학으로 치면 만성 신부전 혹은 사구체신염에 해당하는 질환으로, 신체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고 극심한 피로와 부종, 고혈압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아서가 이 병을 얻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평소 즐기던 화려한 식습관과 고도의 정치적 스트레스, 그리고 아내를 잃은 뒤 급격히 무너진 건강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들은 그에게 휴식을 권고하며 "계속 일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서는 이 사실을 철저히 대중에게 숨겼다. 만약 대통령의 위중한 병세가 알려질 경우, 가필드 암살 이후 겨우 안정을 되찾은 미국 정계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울 앞에서 붓고 창백해진 얼굴을 화장과 세련된 의복으로 가렸으며,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면서도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외교 사절을 맞이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병세가 심각해질 때마다 아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낚시 여행을 떠나곤 했다. 1883년 플로리다 여행이 대표적인데, 언론에는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모습으로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 아서를 진료했던 주치의들은 "그가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신장 기능 저하로 인해 몸에 독소가 쌓이면서 그는 시시때때로 구역질과 두통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성격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국정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부패한 정치꾼'에서 '존경받는 국정 운영자'로 기억될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34]
많은 이들이 아서가 1884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을 두고 "정치적 기반이 약해서"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진실은 "자신이 임기를 마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4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백악관에서 죽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경선에 이름을 올리긴 했으나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고, 결국 제임스 G. 블레인에게 후보직이 돌아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는 권력에 눈먼 도금 시대의 다른 정치인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행보였다. 그는 권력을 탐하기보다 국가 시스템이 차기 대통령에게 평화롭게 이양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에게 재선 포기는 패배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생명을 국가를 위해 온전히 소진하겠다는 숭고한 결단이었다.
아서의 비밀 투병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은폐된 대통령의 질병 중 하나였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으며, 심지어 그의 자녀들조차 아버지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태였음을 퇴임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해군 현대화와 공무원 개혁을 완수했다. 이 시기 아서가 보여준 초인적인 인내심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신사도'의 정점이었다. 그는 품위 있게 퇴장하기 위해 고통마저도 우아하게 숨겼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는 죽음과 거래하며 미국의 미래를 샀다"고 언급하기도 한다.[35]
1884년 대통령 선거는 체스터 A. 아서에게 있어 인생에서 가장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보통 현직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아서의 상황은 복합적인 악재가 얽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스탈워츠' 분파로부터는 '배신자'로 찍혔고, 개혁파인 '머그웜프(Mugwumps)'로부터는 '과거가 불투명한 인물'이라는 의심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을 좀먹고 있던 브라이트병은 이미 그를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서는 재선에 도전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항상 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자신이 다시 4년의 임기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아서의 병세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얼굴은 눈에 띄게 부어올랐고,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으며, 밤마다 고열과 통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후보 지명전에 뛰어든 이유는 권력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중도에 포기할 경우, 자신의 업적인 공무원 제도 개혁이 다시 과거의 엽관제로 회귀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낙마한 대통령'이 아닌 '명예로운 경쟁자'로서 물러남으로써 자신의 행정부가 정당한 평가를 받길 원했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뉴욕 정계의 인맥을 가동해 지지 세력을 모았으나, 이전처럼 적극적인 유세나 막후 공작을 펼치기에는 체력이 따르지 않았다.[36]
1884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아서에게 잔인한 전쟁터였다.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은 공화당 내 '하프브리드(Half-Breeds)' 분파의 수장이자 당대 최고의 정치 스타였던 제임스 G. 블레인이었다. 블레인은 화려한 웅변술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아서는 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대의원 확보에서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전당대회 투표가 시작되자 아서는 초반에 2위 자리를 지키며 선전했으나, 회차가 거듭될수록 표심은 블레인에게 쏠렸다. 아서의 동지였던 콩클링과 스탈워츠 세력은 아서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블레인을 지지하거나 기권하는 등 아서의 등에 칼을 꽂았다. 결국 4차 투표에서 블레인이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고, 아서는 담담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대다수의 언론은 현직 대통령이 이토록 무기력하게 후보 지명에서 탈락한 것에 놀라워했으나, 아서 본인은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공화당 후보가 된 블레인은 본선에서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맞붙었다. 아서는 당의 결속을 위해 형식적으로는 블레인을 지지했으나,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는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블레인의 부패 의혹에 대해 아서가 개인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선거는 초박빙의 접전 끝에 공화당의 패배와 민주당의 정권 교체로 끝났다.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후 이어온 장기 집권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아서가 좀 더 강력하게 선거를 이끌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정책적 과업을 마무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정쟁보다 국가의 안정이 우선임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정권 이양 과정을 매우 우아하고 평화롭게 이끌었다.
1884년의 실패는 정치적으로는 종말이었으나, 인간 체스터 A. 아서에게는 명예로운 퇴장이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병을 속이거나 정당과 거래하지 않았다. 그는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원칙을 지켰고, 자신을 배신한 당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세운 관료제의 기틀이 유지되기를 기도했다.
당시 한 역사가는 "아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사람들과 달리, 대통령직을 품위 있게 내려놓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1885년 3월, 그는 후임 클리블랜드에게 백악관 열쇠를 넘겨주며 차분하게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방 안에는 재선 성공 통지서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시계와 자신이 지켜낸 개혁의 문서들이 담겨 있었다.[37]
아서가 이 병을 얻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평소 즐기던 화려한 식습관과 고도의 정치적 스트레스, 그리고 아내를 잃은 뒤 급격히 무너진 건강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들은 그에게 휴식을 권고하며 "계속 일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서는 이 사실을 철저히 대중에게 숨겼다. 만약 대통령의 위중한 병세가 알려질 경우, 가필드 암살 이후 겨우 안정을 되찾은 미국 정계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울 앞에서 붓고 창백해진 얼굴을 화장과 세련된 의복으로 가렸으며,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면서도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외교 사절을 맞이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병세가 심각해질 때마다 아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낚시 여행을 떠나곤 했다. 1883년 플로리다 여행이 대표적인데, 언론에는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모습으로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 아서를 진료했던 주치의들은 "그가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신장 기능 저하로 인해 몸에 독소가 쌓이면서 그는 시시때때로 구역질과 두통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성격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국정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부패한 정치꾼'에서 '존경받는 국정 운영자'로 기억될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34]
많은 이들이 아서가 1884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을 두고 "정치적 기반이 약해서"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진실은 "자신이 임기를 마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4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백악관에서 죽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경선에 이름을 올리긴 했으나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고, 결국 제임스 G. 블레인에게 후보직이 돌아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는 권력에 눈먼 도금 시대의 다른 정치인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행보였다. 그는 권력을 탐하기보다 국가 시스템이 차기 대통령에게 평화롭게 이양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에게 재선 포기는 패배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생명을 국가를 위해 온전히 소진하겠다는 숭고한 결단이었다.
아서의 비밀 투병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은폐된 대통령의 질병 중 하나였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으며, 심지어 그의 자녀들조차 아버지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태였음을 퇴임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해군 현대화와 공무원 개혁을 완수했다. 이 시기 아서가 보여준 초인적인 인내심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신사도'의 정점이었다. 그는 품위 있게 퇴장하기 위해 고통마저도 우아하게 숨겼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는 죽음과 거래하며 미국의 미래를 샀다"고 언급하기도 한다.[35]
1884년 대통령 선거는 체스터 A. 아서에게 있어 인생에서 가장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이었다. 보통 현직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아서의 상황은 복합적인 악재가 얽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스탈워츠' 분파로부터는 '배신자'로 찍혔고, 개혁파인 '머그웜프(Mugwumps)'로부터는 '과거가 불투명한 인물'이라는 의심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을 좀먹고 있던 브라이트병은 이미 그를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서는 재선에 도전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항상 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자신이 다시 4년의 임기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아서의 병세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얼굴은 눈에 띄게 부어올랐고,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으며, 밤마다 고열과 통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후보 지명전에 뛰어든 이유는 권력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중도에 포기할 경우, 자신의 업적인 공무원 제도 개혁이 다시 과거의 엽관제로 회귀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낙마한 대통령'이 아닌 '명예로운 경쟁자'로서 물러남으로써 자신의 행정부가 정당한 평가를 받길 원했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뉴욕 정계의 인맥을 가동해 지지 세력을 모았으나, 이전처럼 적극적인 유세나 막후 공작을 펼치기에는 체력이 따르지 않았다.[36]
1884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아서에게 잔인한 전쟁터였다.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은 공화당 내 '하프브리드(Half-Breeds)' 분파의 수장이자 당대 최고의 정치 스타였던 제임스 G. 블레인이었다. 블레인은 화려한 웅변술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아서는 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대의원 확보에서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전당대회 투표가 시작되자 아서는 초반에 2위 자리를 지키며 선전했으나, 회차가 거듭될수록 표심은 블레인에게 쏠렸다. 아서의 동지였던 콩클링과 스탈워츠 세력은 아서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블레인을 지지하거나 기권하는 등 아서의 등에 칼을 꽂았다. 결국 4차 투표에서 블레인이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고, 아서는 담담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대다수의 언론은 현직 대통령이 이토록 무기력하게 후보 지명에서 탈락한 것에 놀라워했으나, 아서 본인은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공화당 후보가 된 블레인은 본선에서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맞붙었다. 아서는 당의 결속을 위해 형식적으로는 블레인을 지지했으나,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는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블레인의 부패 의혹에 대해 아서가 개인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선거는 초박빙의 접전 끝에 공화당의 패배와 민주당의 정권 교체로 끝났다.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후 이어온 장기 집권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아서가 좀 더 강력하게 선거를 이끌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정책적 과업을 마무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정쟁보다 국가의 안정이 우선임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정권 이양 과정을 매우 우아하고 평화롭게 이끌었다.
1884년의 실패는 정치적으로는 종말이었으나, 인간 체스터 A. 아서에게는 명예로운 퇴장이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병을 속이거나 정당과 거래하지 않았다. 그는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원칙을 지켰고, 자신을 배신한 당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세운 관료제의 기틀이 유지되기를 기도했다.
당시 한 역사가는 "아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사람들과 달리, 대통령직을 품위 있게 내려놓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1885년 3월, 그는 후임 클리블랜드에게 백악관 열쇠를 넘겨주며 차분하게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방 안에는 재선 성공 통지서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시계와 자신이 지켜낸 개혁의 문서들이 담겨 있었다.[37]
3.16. 퇴임 이후[편집]
1855년 3월 4일,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한 체스터 A. 아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뉴욕시로 돌아왔다. 보통 퇴임한 대통령들은 회고록을 집필하거나 정계의 원로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지만, 아서의 퇴임 후 행보는 마치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조용하고도 쓸쓸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1년 8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서는 뉴욕 렉싱턴가 123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자신을 옥죄었던 브라이트병(만성 신장염)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대통령직은 나에게서 건강과 평온을 앗아갔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인 대외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는 퇴임 후 잠시 법조계로 복귀하여 '아서, 크리든 앤 넥서(Arthur, Knevals & Ransom)' 법률 사무소의 고문 변호사직을 맡기도 했으나, 실제로 법정에 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아내 넬의 사진이 걸린 방에서 조용히 사색하며 보냈다. 가끔 기력이 허락할 때면 평생의 취미였던 낚시를 하러 가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새벽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만찬은 더 이상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퇴임 직후 아서가 행한 가장 충격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자신의 모든 사적인 서신과 공식 문서를 소각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는 비서들에게 "이제 내 삶에서 비밀로 남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며 수천 장에 달하는 문서를 벽로에 던져 넣게 했다.
이 결정 때문에 훗날 역사학자들은 체스터 A. 아서를 연구하는 데 엄청난 애를 먹게 된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적들의 음모론(출생지 논란 등)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 혹은 엽관제 시절의 어두운 기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적인 대화가 대중의 구설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신사적 결벽증' 때문이라는 분석이 공존한다.[38]
1886년 가을에 접어들며 아서의 건강은 급격히 무너졌다. 신장 기능 저하로 인한 합병증은 그의 심장까지 위협했고, 한때 '우아한 아서'라 불리던 건장한 체구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는 자신의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문병을 온 지인들은 그의 안색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가곤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그의 곁을 지킨 것은 정계의 동료들이 아니라 여동생 매리 매켈로이와 그의 자녀들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녀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1886년 11월 16일, 그는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 비서에게 짧은 업무 지시를 내린 뒤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1886년 11월 18일 오전 5시 10분, 체스터 A. 아서는 57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의사는 "그는 마지막까지 신사답게 고통을 참아냈으며,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 정계는 물론 전 미국이 충격에 빠졌다.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그토록 비난했던 언론들조차 "우리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에게서 가장 고귀한 의무 이행을 보았다"며 추모 기사를 쏟아냈다. 아서는 유언으로 거창한 묘비명이나 훈장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아내 넬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장례식은 11월 22일, 뉴욕의 헤븐리 레스트 교회(Church of the Heavenly Rest)에서 거행되었다. 비록 아서 본인은 소박한 장례를 원했으나, 그를 기리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뉴욕 시내를 가득 메웠다.
장례식에는 현직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비롯하여, 전임 대통령이었던 러더퍼드 B. 헤이스, 그리고 아서의 최대 정적이었던 로스코 콩클링까지 참석했다.[39] 아서의 시신은 그가 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내 넬이 잠들어 있는 올버니의 올버니 시립 묘지로 운구되었다.
그의 묘소에는 웅장한 천사 조각상이 세워졌으며, 묘비에는 화려한 수식어 대신 그의 이름과 재임 기간만이 간결하게 새겨졌다. 아서는 죽기 직전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고, 이제 쉴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엽관제의 화신으로 태어나 개혁의 수호자로 죽은 그의 기묘한 생애는, 도금 시대 미국 정치가 가진 모순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장례식 다음 날, 한 일간지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통령다운 품격을 보여주었다."
아서는 뉴욕 렉싱턴가 123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자신을 옥죄었던 브라이트병(만성 신장염)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대통령직은 나에게서 건강과 평온을 앗아갔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인 대외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는 퇴임 후 잠시 법조계로 복귀하여 '아서, 크리든 앤 넥서(Arthur, Knevals & Ransom)' 법률 사무소의 고문 변호사직을 맡기도 했으나, 실제로 법정에 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아내 넬의 사진이 걸린 방에서 조용히 사색하며 보냈다. 가끔 기력이 허락할 때면 평생의 취미였던 낚시를 하러 가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새벽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만찬은 더 이상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퇴임 직후 아서가 행한 가장 충격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자신의 모든 사적인 서신과 공식 문서를 소각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는 비서들에게 "이제 내 삶에서 비밀로 남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며 수천 장에 달하는 문서를 벽로에 던져 넣게 했다.
이 결정 때문에 훗날 역사학자들은 체스터 A. 아서를 연구하는 데 엄청난 애를 먹게 된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적들의 음모론(출생지 논란 등)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 혹은 엽관제 시절의 어두운 기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적인 대화가 대중의 구설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신사적 결벽증' 때문이라는 분석이 공존한다.[38]
1886년 가을에 접어들며 아서의 건강은 급격히 무너졌다. 신장 기능 저하로 인한 합병증은 그의 심장까지 위협했고, 한때 '우아한 아서'라 불리던 건장한 체구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는 자신의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문병을 온 지인들은 그의 안색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가곤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그의 곁을 지킨 것은 정계의 동료들이 아니라 여동생 매리 매켈로이와 그의 자녀들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녀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1886년 11월 16일, 그는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 비서에게 짧은 업무 지시를 내린 뒤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1886년 11월 18일 오전 5시 10분, 체스터 A. 아서는 57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의사는 "그는 마지막까지 신사답게 고통을 참아냈으며,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 정계는 물론 전 미국이 충격에 빠졌다.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그토록 비난했던 언론들조차 "우리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에게서 가장 고귀한 의무 이행을 보았다"며 추모 기사를 쏟아냈다. 아서는 유언으로 거창한 묘비명이나 훈장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아내 넬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장례식은 11월 22일, 뉴욕의 헤븐리 레스트 교회(Church of the Heavenly Rest)에서 거행되었다. 비록 아서 본인은 소박한 장례를 원했으나, 그를 기리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뉴욕 시내를 가득 메웠다.
장례식에는 현직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비롯하여, 전임 대통령이었던 러더퍼드 B. 헤이스, 그리고 아서의 최대 정적이었던 로스코 콩클링까지 참석했다.[39] 아서의 시신은 그가 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내 넬이 잠들어 있는 올버니의 올버니 시립 묘지로 운구되었다.
그의 묘소에는 웅장한 천사 조각상이 세워졌으며, 묘비에는 화려한 수식어 대신 그의 이름과 재임 기간만이 간결하게 새겨졌다. 아서는 죽기 직전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고, 이제 쉴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엽관제의 화신으로 태어나 개혁의 수호자로 죽은 그의 기묘한 생애는, 도금 시대 미국 정치가 가진 모순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장례식 다음 날, 한 일간지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통령다운 품격을 보여주었다."
4. 평가[편집]
4.1. 펜들턴법[편집]
아서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가장 빛나는 성취이자, 미국 근대 관료제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 바로 1883년 펜들턴 공무원 제도 개혁법(Pendleton Civil Service Reform Act)의 통과이다. 이는 정치적 보상으로 관직을 나눠주던 수십 년령의 구습인 엽관제를 폐지하고, 시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공무원을 선발하는 실적주의를 도입한 혁명적인 조치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법을 서명하고 추진한 인물이 엽관제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뉴욕 세관장 출신' 아서였다는 점은 미국 정치사 최대의 반전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법안이 추진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전임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의 암살이 있었다. 범인 찰스 기토는 자신이 선거 운동에 기여했으니 영사직을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총격을 가했다. 이 비극은 미국 대중들에게 "엽관제가 대통령을 죽였다"라는 강력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공직 개혁에 대한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조류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서가 집권하자 개혁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서는 평생 로스코 콩클링 밑에서 "우리 편에게 자리를 주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임 후 아서는 예상과 달리 공직 개혁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첫 연례 메시지에서 국회에 공직 개혁 법안을 강력히 요청하며 정계를 경악시켰다. 이는 과거의 동지였던 '스탈워츠'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자, 국가 수반으로서의 고뇌 찬 결단이었다.[40]
오하이오 주의 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펜들턴이 발의한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핵심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이 추진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전임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의 암살이 있었다. 범인 찰스 기토는 자신이 선거 운동에 기여했으니 영사직을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총격을 가했다. 이 비극은 미국 대중들에게 "엽관제가 대통령을 죽였다"라는 강력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공직 개혁에 대한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조류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서가 집권하자 개혁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서는 평생 로스코 콩클링 밑에서 "우리 편에게 자리를 주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임 후 아서는 예상과 달리 공직 개혁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첫 연례 메시지에서 국회에 공직 개혁 법안을 강력히 요청하며 정계를 경악시켰다. 이는 과거의 동지였던 '스탈워츠'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자, 국가 수반으로서의 고뇌 찬 결단이었다.[40]
오하이오 주의 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펜들턴이 발의한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핵심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개 경쟁 채용: 연방 공무원 선발 시 정당에 대한 기여도가 아닌, 객관적인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한다. | ||
정치 기부금 강요 금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특정 정당을 위한 정치 자금을 내라고 강요하는 행위를 불법화한다. | 신분 보장: 정치적 이유로 공무원을 해고할 수 없도록 하여 관료 조직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 공무원 위원회 설치: 법 집행을 감시할 독립적인 연방 공무원 위원회(Civil Service Commission)를 창설한다. |
아서는 법안 통과 과정에서 단순히 서명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 당내 반대파들을 설득하고 압박했다. 그는 이 법이 공화당의 장기적인 집권과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마침내 1883년 1월 16일, 아서가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은 비로소 현대적인 전문 관료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펜들턴법의 통과는 아서 개인에게는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법으로 인해 아서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인사권'과 '정치 자금 동원력'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법이 시행되자마자 수천 개의 관직이 '실적주의' 적용 대상으로 묶였고, 아서는 더 이상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리를 약속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의 보스 콩클링은 아서를 향해 "가장 추악한 배신자"라며 독설을 퍼부었으나, 아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시 지식인들과 개혁파(머그웜프스, Mugwumps)들로부터 "사울이 바울이 된 것과 같은 기적"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41]
펜들턴법은 오늘날 미국 연방 정부 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이 법 덕분에 미국의 행정부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바뀌는 혼란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 전문성을 갖춘 관료들이 국가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서는 이 법을 통해 "엽관제의 아들이 엽관제의 숨통을 끊었다"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시스템의 폐해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도려냈으며, 이는 그가 '잊혀진 대통령'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백악관을 떠날 때 아서가 남긴 "나는 최선을 다했고,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 펜들턴법을 통한 자기 구원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펜들턴법 통과 이후 미국은 소위 '도금 시대'의 부패한 정치 문화에서 서서히 벗어나 전문 행정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4.2. 해군 현대화[편집]
아서의 업적 중 가장 가시적이고 장기적인 성과를 거둔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 해군의 현대화를 들 수 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해군은 급격한 쇠퇴기를 겪으며 사실상 '떠다니는 박물관'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으나, 아서는 집권 초기부터 강한 해군력이야말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미국의 필수 조건임을 직시했다. 그는 현대적 철갑선을 도입하고 해군 행정 체계를 혁신함으로써, 훗날 미국이 대양 해군으로 거듭나는 초석을 닦았다.
1880년대 초 미국의 해상 전력은 처참했다. 남북전쟁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함대를 보유했던 미국이었지만, 전쟁 종결 후 의회는 군비 절감을 위해 해군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목재 선체와 구식 돛을 단 함선들이 여전히 주력이었고, 유럽 강대국들은 물론이고 칠레나 브라질 같은 남미 국가들조차 미국보다 현대적인 철갑선을 보유한 실정이었다. 당시 미국 해군은 "세계의 웃음거리"라는 조롱을 받았으며, 해안 방어조차 불가능하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아서는 1881년 첫 연두교서에서 "해군의 무기력함은 국가적 수치"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대대적인 건함 사업을 제안했다. 그는 단순히 함선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소재부터 기술까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해군을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해군부 장관 윌리엄 챈들러(William E. Chandler)와 손잡고 해군 자문위원회(Naval Advisory Board)를 구성하여 현대적인 철제 함선 건조 계획을 수립했다.
아서 정부의 해군 현대화 정책이 낳은 가장 상징적인 결과물은 이른바 'ABCD 함대'로 불리는 4척의 철제 순양함이었다. 이는 함선의 앞 글자를 딴 애틀랜타(Atlanta), 보스턴(Boston), 시카고(Chicago), 그리고 통신선인 돌핀(Dolphin)을 의미한다.
이 함선들은 미국 해군 최초로 목재가 아닌 순수 철(Steel)을 사용하여 건조되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돛을 보조 수단으로 남겨두긴 했으나, 강력한 증기 기관을 주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속도와 기동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그리고 모든 함선과 장비를 미국 자본과 기술로 제작할 것을 고집했다. 이는 당시 유럽 기술에 의존하던 관행을 깨고 미국의 독자적인 방위 산업 역량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 ABCD 함대는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첨단은 아니었으나, 미국이 다시 해양 강국으로 복귀했다는 강력한 신호를 전 세계에 보낸 사건이었다.[42]
아서는 하드웨어인 함선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인 인적 자원과 행정 체계 개혁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해군 장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해군전쟁대학(Naval War College)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1884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세워진 이 대학은 훗날 해전 전략의 거두인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는 무대가 되었다.
또한 해군 내의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진급 시스템에 능력주의를 도입하려 노력했다. 엽관제의 수혜자였던 그가 해군만큼은 철저한 전문가 집단으로 육성하려 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고결한 행보였다. 그는 "바다 위에서는 당파적 충성심이 아니라 함포의 정확도가 승패를 결정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체스터 A. 아서는 오늘날 "현대 미국 해군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뿌린 씨앗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클트 대통령 시대의 '그레이트 화이트 플릿(Great White Fleet)'으로 만개하게 된다.
비록 아서 재임 기간에 건조된 배들이 당대 최강의 전함(Battleship) 수준은 아니었을지라도, 쇠락해가던 해군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고 국가적 관심을 돌린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대륙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마련해준 선구자였다.[43]
1880년대 초 미국의 해상 전력은 처참했다. 남북전쟁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함대를 보유했던 미국이었지만, 전쟁 종결 후 의회는 군비 절감을 위해 해군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목재 선체와 구식 돛을 단 함선들이 여전히 주력이었고, 유럽 강대국들은 물론이고 칠레나 브라질 같은 남미 국가들조차 미국보다 현대적인 철갑선을 보유한 실정이었다. 당시 미국 해군은 "세계의 웃음거리"라는 조롱을 받았으며, 해안 방어조차 불가능하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아서는 1881년 첫 연두교서에서 "해군의 무기력함은 국가적 수치"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대대적인 건함 사업을 제안했다. 그는 단순히 함선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소재부터 기술까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해군을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해군부 장관 윌리엄 챈들러(William E. Chandler)와 손잡고 해군 자문위원회(Naval Advisory Board)를 구성하여 현대적인 철제 함선 건조 계획을 수립했다.
아서 정부의 해군 현대화 정책이 낳은 가장 상징적인 결과물은 이른바 'ABCD 함대'로 불리는 4척의 철제 순양함이었다. 이는 함선의 앞 글자를 딴 애틀랜타(Atlanta), 보스턴(Boston), 시카고(Chicago), 그리고 통신선인 돌핀(Dolphin)을 의미한다.
이 함선들은 미국 해군 최초로 목재가 아닌 순수 철(Steel)을 사용하여 건조되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돛을 보조 수단으로 남겨두긴 했으나, 강력한 증기 기관을 주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속도와 기동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그리고 모든 함선과 장비를 미국 자본과 기술로 제작할 것을 고집했다. 이는 당시 유럽 기술에 의존하던 관행을 깨고 미국의 독자적인 방위 산업 역량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 ABCD 함대는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첨단은 아니었으나, 미국이 다시 해양 강국으로 복귀했다는 강력한 신호를 전 세계에 보낸 사건이었다.[42]
아서는 하드웨어인 함선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인 인적 자원과 행정 체계 개혁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해군 장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해군전쟁대학(Naval War College)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1884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세워진 이 대학은 훗날 해전 전략의 거두인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는 무대가 되었다.
또한 해군 내의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진급 시스템에 능력주의를 도입하려 노력했다. 엽관제의 수혜자였던 그가 해군만큼은 철저한 전문가 집단으로 육성하려 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고결한 행보였다. 그는 "바다 위에서는 당파적 충성심이 아니라 함포의 정확도가 승패를 결정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체스터 A. 아서는 오늘날 "현대 미국 해군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뿌린 씨앗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클트 대통령 시대의 '그레이트 화이트 플릿(Great White Fleet)'으로 만개하게 된다.
비록 아서 재임 기간에 건조된 배들이 당대 최강의 전함(Battleship) 수준은 아니었을지라도, 쇠락해가던 해군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고 국가적 관심을 돌린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대륙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마련해준 선구자였다.[43]
4.3. 스타 루트 스캔들[편집]
체스터 A. 아서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그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스타 루트(Star Route)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우정공사(Post Office Department) 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금 횡령 및 뇌물 사건으로, 공화당 내 핵심 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초대형 비리였다. 사람들은 아서가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이 사건을 적당히 덮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하며 자신의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미국 우편 시스템은 철도가 닿지 않는 서부 오지 지역에 우편을 배달하기 위해 민간 업자들과 계약을 맺었다. 우편 마차나 말을 이용해 배달하는 이 노선들을 공식 문서상에서 '별표(*)'로 표시했기에 '스타 루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제는 이 계약 과정에서 발생했다. 업자들은 우정공사 고위 관료들과 결탁하여, 실제 서비스 비용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청구하거나 허위로 노선을 늘려 막대한 보조금을 타냈다. 이렇게 횡령된 돈의 상당 부분은 공화당의 선거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중심에는 아서의 정치적 고향인 '스탈워츠' 계열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특히 공화당 전국위원회 비서였던 스티븐 도시(Stephen W. Dorsey) 등이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을 흔드는 뇌관이 되었다.
아서는 취임 직후 이 사건의 보고를 받고 고뇌에 빠졌다. 연루된 자들은 그가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발 벗고 뛰었던 동료들이자, 자신을 '뉴욕 세관장'으로 만들어준 시스템의 주역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서는 단호했다. 그는 특별 검사를 임명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누구든 죄가 있다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라"고 명령했다.[44]
그는 특히 자신의 친한 친구였던 스티븐 도시가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콩클링을 비롯한 과거 동지들에게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대중과 언론에게는 "아서가 변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이 수사를 통해 자신이 더 이상 특정 파벌의 보스가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셈이다.
수사 과정은 험난했다. 피고인들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들을 고용했고, 배심원 매수 의혹까지 불거졌다. 1882년에 열린 1차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주요 가담자들에게 무죄 혹은 불일치 판결을 내렸다. 언론은 다시금 "아서의 수사 의지가 부족한 것 아니냐"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서는 포기하지 않고 2차 재판을 강행했다. 그는 수사팀을 재정비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직위 해제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비록 최종적으로 주동자들이 실형을 사는 극적인 결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으나(당시의 허술한 증거법과 배심원 제도의 한계였다), 아서 정부는 이 과정을 통해 우정공사 내의 고질적인 부패 고리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정권 내부의 치부를 스스로 도려내려 했다는 점에서 아서의 도덕적 위상은 급격히 상승했다.
스타 루트 스캔들 처리 과정은 훗날 펜들턴법(공무원 제도 개혁법)이 통과될 수 있는 정치적 자양분이 되었다. 만약 아서가 이 사건을 유야무야 넘겼다면, 그는 평생 '정치 기계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공화당 내의 권력 지형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콩클링의 스탈워츠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아서는 당내 지지 기반을 잃는 대신 '국민적 신뢰'라는 더 큰 자산을 얻었다. 역사학자들은 스타 루트 수사를 두고 "아서가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대통령으로서 재탄생한 통과의례"라고 평가한다. 그는 친구를 잃었지만 국가의 기강을 세웠으며, 이는 도금 시대의 혼탁한 정치판에서 보기 드문 고결한 결단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아서는 "나는 백악관에 친구가 없다. 오직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쓸쓸하지만 당당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미국 우편 시스템은 철도가 닿지 않는 서부 오지 지역에 우편을 배달하기 위해 민간 업자들과 계약을 맺었다. 우편 마차나 말을 이용해 배달하는 이 노선들을 공식 문서상에서 '별표(*)'로 표시했기에 '스타 루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제는 이 계약 과정에서 발생했다. 업자들은 우정공사 고위 관료들과 결탁하여, 실제 서비스 비용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청구하거나 허위로 노선을 늘려 막대한 보조금을 타냈다. 이렇게 횡령된 돈의 상당 부분은 공화당의 선거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중심에는 아서의 정치적 고향인 '스탈워츠' 계열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특히 공화당 전국위원회 비서였던 스티븐 도시(Stephen W. Dorsey) 등이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을 흔드는 뇌관이 되었다.
아서는 취임 직후 이 사건의 보고를 받고 고뇌에 빠졌다. 연루된 자들은 그가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발 벗고 뛰었던 동료들이자, 자신을 '뉴욕 세관장'으로 만들어준 시스템의 주역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서는 단호했다. 그는 특별 검사를 임명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누구든 죄가 있다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라"고 명령했다.[44]
그는 특히 자신의 친한 친구였던 스티븐 도시가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콩클링을 비롯한 과거 동지들에게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대중과 언론에게는 "아서가 변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이 수사를 통해 자신이 더 이상 특정 파벌의 보스가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셈이다.
수사 과정은 험난했다. 피고인들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들을 고용했고, 배심원 매수 의혹까지 불거졌다. 1882년에 열린 1차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주요 가담자들에게 무죄 혹은 불일치 판결을 내렸다. 언론은 다시금 "아서의 수사 의지가 부족한 것 아니냐"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서는 포기하지 않고 2차 재판을 강행했다. 그는 수사팀을 재정비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직위 해제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비록 최종적으로 주동자들이 실형을 사는 극적인 결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으나(당시의 허술한 증거법과 배심원 제도의 한계였다), 아서 정부는 이 과정을 통해 우정공사 내의 고질적인 부패 고리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정권 내부의 치부를 스스로 도려내려 했다는 점에서 아서의 도덕적 위상은 급격히 상승했다.
스타 루트 스캔들 처리 과정은 훗날 펜들턴법(공무원 제도 개혁법)이 통과될 수 있는 정치적 자양분이 되었다. 만약 아서가 이 사건을 유야무야 넘겼다면, 그는 평생 '정치 기계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공화당 내의 권력 지형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콩클링의 스탈워츠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아서는 당내 지지 기반을 잃는 대신 '국민적 신뢰'라는 더 큰 자산을 얻었다. 역사학자들은 스타 루트 수사를 두고 "아서가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대통령으로서 재탄생한 통과의례"라고 평가한다. 그는 친구를 잃었지만 국가의 기강을 세웠으며, 이는 도금 시대의 혼탁한 정치판에서 보기 드문 고결한 결단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아서는 "나는 백악관에 친구가 없다. 오직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쓸쓸하지만 당당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4.4. 대외 정책[편집]
아서의 대외 정책은 흔히 '조용한 변혁'으로 불린다. 그는 내치(內治)에서의 공무원 제도 개혁만큼이나 외교에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는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탈피하여 현대적인 팽창주의와 통상 외교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남미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공을 들였으며, 이는 훗날 시어도어 루즈벨트 시대에 완성될 미국 패권주의의 초기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서는 취임 직후, 전임자 가필드가 임명했던 제임스 G. 블레인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프레드릭 T. 프렐링하이젠(Frederick T. Frelinghuysen)을 그 자리에 앉혔다. 블레인이 다소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외교 방식을 선호했다면, 프렐링하이젠은 아서의 성향과 맞게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실무 중심 외교'를 지향했다.
아서 행정부 외교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적 기회 확대'였다. 그는 군사적 정복보다는 통상 조약과 관세 협정을 통해 미국의 상품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길을 닦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생산 과잉 문제에 직면해 있던 미국 기업가들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서는 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멕시코, 스페인(쿠바 관련), 산토도밍고 등과 잇따라 호혜 관세 조약을 체결하려 시도했다. 비록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하던 의회의 반대로 상당수 좌절되기도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남미를 미국의 '경제적 뒷마당'으로 편입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니카라과 운하 건설 추진이다. 아서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운하가 미국의 해상 패권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1884년 니카라과와 '자발라-프렐링하이젠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 했다.[45]
한국(당시 조선) 역사에서 아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882년, 그의 재임 기간 중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조선을 단순한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일본 사이에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
그는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뉴욕에서 직접 접견했는데, 이때 아서가 보여준 세련된 환대는 조선 사절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서는 조선 측에 농업 기술 지원과 전등 설치 등을 약속하며 근대화를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 정세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46]
아서는 미국의 관심사를 전통적인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분쟁 등을 예의주시하며 정보력을 가동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콩고 자유국에 대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주권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이는 훗날 제국주의적 착취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아서의 관점에서는 미국이 국제 사회의 주요 플레이어로 인정받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는 "미국의 깃발이 날리는 곳에는 미국의 상업적 이익이 뒤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앞서 언급된 '해군 현대화(24번 챕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아서의 대외 정책은 '경제적 팽창을 위한 조용하고 세련된 포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전 지구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행정적, 외교적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도금 시대 미국의 부를 국제적인 권력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퇴임 직전 국정 연설에서 "우리는 이제 전 세계와 소통할 준비가 되었으며, 우리의 상선과 군함이 그 증거가 될 것"이라며 자신의 외교적 성과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아서는 취임 직후, 전임자 가필드가 임명했던 제임스 G. 블레인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프레드릭 T. 프렐링하이젠(Frederick T. Frelinghuysen)을 그 자리에 앉혔다. 블레인이 다소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외교 방식을 선호했다면, 프렐링하이젠은 아서의 성향과 맞게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실무 중심 외교'를 지향했다.
아서 행정부 외교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적 기회 확대'였다. 그는 군사적 정복보다는 통상 조약과 관세 협정을 통해 미국의 상품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길을 닦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생산 과잉 문제에 직면해 있던 미국 기업가들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서는 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멕시코, 스페인(쿠바 관련), 산토도밍고 등과 잇따라 호혜 관세 조약을 체결하려 시도했다. 비록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하던 의회의 반대로 상당수 좌절되기도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남미를 미국의 '경제적 뒷마당'으로 편입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니카라과 운하 건설 추진이다. 아서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운하가 미국의 해상 패권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1884년 니카라과와 '자발라-프렐링하이젠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 했다.[45]
한국(당시 조선) 역사에서 아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882년, 그의 재임 기간 중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조선을 단순한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일본 사이에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
그는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뉴욕에서 직접 접견했는데, 이때 아서가 보여준 세련된 환대는 조선 사절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서는 조선 측에 농업 기술 지원과 전등 설치 등을 약속하며 근대화를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 정세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46]
아서는 미국의 관심사를 전통적인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분쟁 등을 예의주시하며 정보력을 가동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콩고 자유국에 대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주권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이는 훗날 제국주의적 착취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아서의 관점에서는 미국이 국제 사회의 주요 플레이어로 인정받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는 "미국의 깃발이 날리는 곳에는 미국의 상업적 이익이 뒤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앞서 언급된 '해군 현대화(24번 챕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아서의 대외 정책은 '경제적 팽창을 위한 조용하고 세련된 포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전 지구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행정적, 외교적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도금 시대 미국의 부를 국제적인 권력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퇴임 직전 국정 연설에서 "우리는 이제 전 세계와 소통할 준비가 되었으며, 우리의 상선과 군함이 그 증거가 될 것"이라며 자신의 외교적 성과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4.5. 중국인 배척법[편집]
1882년, 아서는 자신의 임기 중 가장 논쟁적이며 역사적으로도 무거운 주제인 중국인 배척법 문제에 직면한다. 이는 19세기 후반 미국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휘몰아친 인종주의와 노동 분쟁이 결합된 결과물이었으며, 아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헌법적 원칙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균형 잡힌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미국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 이후 유입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니스 키어니'를 필두로 한 노동당 선동가들은 "중국인은 물러가야 한다(The Chinese must go!)"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고 도덕적 부패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서는 단순한 지역적 갈등을 넘어 워싱턴 정계를 압박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서부의 표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강력한 이민 제한법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의회는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20년 동안 전면 금지하고, 이미 체류 중인 중국인들에게도 사실상의 차별적 조치를 강요하는 극단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1882년 4월, 아서 대통령은 의회를 통과한 20년 금지안에 대해 과감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당시 미친 듯이 타오르던 반중 정서를 고려할 때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아서가 거부권을 행사한 명분은 명확했다. 바로 1880년에 청나라와 체결한 '엔젤 조약(Angell Treaty)'의 정신을 위배한다는 것이었다.
아서는 거부권 행사 메시지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특정 민족의 유입을 금지하는 것은 '일시적 중단'이 아니라 사실상의 '영구적 배제'이며, 이는 국제적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이 법안이 미국 동부의 상업적 이익(대중국 무역)을 해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서부에서는 아서의 인형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으나, 아서는 "법은 감정이 아니라 조약과 헌법에 근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47]
의회는 아서의 거부권에 당황했으나 곧바로 금지 기간을 10년으로 단축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아서는 여전히 이 법안이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나, 만약 이 수정안마저 거부할 경우 의회가 거부권을 무력화(Override)하고 더 극단적인 법안을 강행할 것임을 직시했다.
결국 1882년 5월 6일, 아서는 수정된 '중국인 배척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미국 역사상 특정 민족의 유입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최초의 연방 법률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아서가 서명한 이 법안은 노동자 계층의 중국인 입국을 10년간 금지하고, 비노동자(상인, 학생, 외교관)의 입국 시에도 까다로운 증명서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아서의 대응을 복합적으로 평가한다. 인권 측면에서 보면 결국 인종차별적 법안에 서명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나, 정치 공학적으로는 의회의 폭주를 잠시나마 멈춰 세우고 '20년'을 '10년'으로 줄이는 등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는 동정론도 존재한다.
특히 아서가 이 과정에서 보여준 '거부권의 미학'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중의 광기에 휘둘리지 않고 조약이라는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행정부의 목소리를 냈으며, 이후에도 중국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집행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 법의 통과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미국의 폐쇄적 이민 정책의 신호탄이 되었고, 아서는 자신이 수호하고자 했던 '신사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인종주의적 유산을 남기게 된 셈이다.[ 훗날 아서는 퇴임 직전 지인에게 "이 법안에 서명하던 날의 펜이 가장 무거웠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미국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 이후 유입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니스 키어니'를 필두로 한 노동당 선동가들은 "중국인은 물러가야 한다(The Chinese must go!)"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고 도덕적 부패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서는 단순한 지역적 갈등을 넘어 워싱턴 정계를 압박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서부의 표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강력한 이민 제한법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의회는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20년 동안 전면 금지하고, 이미 체류 중인 중국인들에게도 사실상의 차별적 조치를 강요하는 극단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1882년 4월, 아서 대통령은 의회를 통과한 20년 금지안에 대해 과감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당시 미친 듯이 타오르던 반중 정서를 고려할 때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아서가 거부권을 행사한 명분은 명확했다. 바로 1880년에 청나라와 체결한 '엔젤 조약(Angell Treaty)'의 정신을 위배한다는 것이었다.
아서는 거부권 행사 메시지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특정 민족의 유입을 금지하는 것은 '일시적 중단'이 아니라 사실상의 '영구적 배제'이며, 이는 국제적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이 법안이 미국 동부의 상업적 이익(대중국 무역)을 해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서부에서는 아서의 인형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으나, 아서는 "법은 감정이 아니라 조약과 헌법에 근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47]
의회는 아서의 거부권에 당황했으나 곧바로 금지 기간을 10년으로 단축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아서는 여전히 이 법안이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나, 만약 이 수정안마저 거부할 경우 의회가 거부권을 무력화(Override)하고 더 극단적인 법안을 강행할 것임을 직시했다.
결국 1882년 5월 6일, 아서는 수정된 '중국인 배척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미국 역사상 특정 민족의 유입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최초의 연방 법률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아서가 서명한 이 법안은 노동자 계층의 중국인 입국을 10년간 금지하고, 비노동자(상인, 학생, 외교관)의 입국 시에도 까다로운 증명서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아서의 대응을 복합적으로 평가한다. 인권 측면에서 보면 결국 인종차별적 법안에 서명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나, 정치 공학적으로는 의회의 폭주를 잠시나마 멈춰 세우고 '20년'을 '10년'으로 줄이는 등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는 동정론도 존재한다.
특히 아서가 이 과정에서 보여준 '거부권의 미학'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중의 광기에 휘둘리지 않고 조약이라는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행정부의 목소리를 냈으며, 이후에도 중국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집행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 법의 통과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미국의 폐쇄적 이민 정책의 신호탄이 되었고, 아서는 자신이 수호하고자 했던 '신사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인종주의적 유산을 남기게 된 셈이다.[ 훗날 아서는 퇴임 직전 지인에게 "이 법안에 서명하던 날의 펜이 가장 무거웠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4.6. 관세 개혁[편집]
1880년대 미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단연 관세 문제였다. 당시 미국 연방 정부는 남북전쟁 이후 지속된 고관세 정책 덕분에 막대한 세수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는 오히려 경제의 흐름을 왜곡하고 물가를 상승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아서는 1882년 연례 메시지를 통해 관세 인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대대적인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탄생한 '1883년 관세법', 일명 '몽그렐 관세(Mongrel Tariff, 잡종 관세)'는 아서의 개혁 의지가 의회의 복잡한 이권 다툼 속에서 어떻게 누더기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미국 재무부는 매년 약 1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행복한 고민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 돈이 시중에 돌지 않고 국고에 묶여 있어 통화 긴축 현상을 일으켰고, 고관세로 인해 생필품 가격이 치솟아 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아서는 합리적인 관세율 조정을 위해 1882년 정치권 밖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관세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는 위원회에 평균 20~25% 수준의 관세 인하 권고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는 당시 공화당의 주류였던 보호무역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나, 아서는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위해서는 당파적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하지만 위원회 구성원들 자체가 산업계의 이해관계자들로 채워지면서, 개혁의 동력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883년 초, 위원회의 권고안이 의회에 제출되자마자 백악관과 의사당은 각 이익 단체의 로비스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철강, 양모, 설탕 등 각 지역구의 핵심 산업을 지키려는 의원들은 아서의 인하안에 독소 조항을 하나둘씩 끼워 넣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통과된 법안은 매우 기괴한 형태였다. 어떤 품목은 관세가 내렸지만, 정작 중요한 원자재 관세는 오르거나 유지되는 등 일관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언론은 이 법안을 두고 "이것저것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종 개견(Mongrel)과 같다"며 '몽그렐 관세'라는 멸칭을 붙였다. 아서는 이 법안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아예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발생할 정국 혼란을 우려하여 결국 서명하고 만다.[ 이 법안은 관세를 평균적으로 고작 1.47% 인하하는 데 그쳐, 사실상 '개혁'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은 아서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공화당 내 보호무역주의자들은 그가 관세를 건드린 것에 분노했고, 반대로 개혁을 원했던 유권자들은 그가 의회의 압력에 굴복했다며 실망감을 표했다. 이 '어중간한' 태도는 1884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하고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당선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은 스스로 부패와 고관세를 시정할 능력이 없다"고 몰아붙였고, 아서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관세 개혁은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명분만 제공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아서의 시도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 그는 관세 문제가 단순히 세수 확보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 거시 경제를 조절하는 정교한 정책 도구가 되어야 함을 미국 대중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몽그렐 관세 사건은 도금 시대 미국 정치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통령이 아무리 합리적인 정책을 제시하더라도, 지역구 이기주의와 이익 집단의 로비에 장악된 의회를 돌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서는 훗날 측근들에게 "의회는 마치 수백 마리의 굶주린 늑대 떼 같다. 그들에게 고기 한 점(관세 혜택)을 뺏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라며 회한 섞인 토로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기 말까지 경제 데이터에 기반한 국정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그의 데이터 중심적 사고는 훗날 현대적 행정 국가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48]
당시 미국 재무부는 매년 약 1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행복한 고민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 돈이 시중에 돌지 않고 국고에 묶여 있어 통화 긴축 현상을 일으켰고, 고관세로 인해 생필품 가격이 치솟아 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아서는 합리적인 관세율 조정을 위해 1882년 정치권 밖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관세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는 위원회에 평균 20~25% 수준의 관세 인하 권고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는 당시 공화당의 주류였던 보호무역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나, 아서는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위해서는 당파적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하지만 위원회 구성원들 자체가 산업계의 이해관계자들로 채워지면서, 개혁의 동력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883년 초, 위원회의 권고안이 의회에 제출되자마자 백악관과 의사당은 각 이익 단체의 로비스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철강, 양모, 설탕 등 각 지역구의 핵심 산업을 지키려는 의원들은 아서의 인하안에 독소 조항을 하나둘씩 끼워 넣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통과된 법안은 매우 기괴한 형태였다. 어떤 품목은 관세가 내렸지만, 정작 중요한 원자재 관세는 오르거나 유지되는 등 일관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언론은 이 법안을 두고 "이것저것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종 개견(Mongrel)과 같다"며 '몽그렐 관세'라는 멸칭을 붙였다. 아서는 이 법안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아예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발생할 정국 혼란을 우려하여 결국 서명하고 만다.[ 이 법안은 관세를 평균적으로 고작 1.47% 인하하는 데 그쳐, 사실상 '개혁'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은 아서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공화당 내 보호무역주의자들은 그가 관세를 건드린 것에 분노했고, 반대로 개혁을 원했던 유권자들은 그가 의회의 압력에 굴복했다며 실망감을 표했다. 이 '어중간한' 태도는 1884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하고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당선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은 스스로 부패와 고관세를 시정할 능력이 없다"고 몰아붙였고, 아서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관세 개혁은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명분만 제공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아서의 시도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 그는 관세 문제가 단순히 세수 확보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 거시 경제를 조절하는 정교한 정책 도구가 되어야 함을 미국 대중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몽그렐 관세 사건은 도금 시대 미국 정치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통령이 아무리 합리적인 정책을 제시하더라도, 지역구 이기주의와 이익 집단의 로비에 장악된 의회를 돌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서는 훗날 측근들에게 "의회는 마치 수백 마리의 굶주린 늑대 떼 같다. 그들에게 고기 한 점(관세 혜택)을 뺏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라며 회한 섞인 토로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기 말까지 경제 데이터에 기반한 국정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그의 데이터 중심적 사고는 훗날 현대적 행정 국가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48]
4.7. 에드먼즈법[편집]
1882년 제정된 에드먼즈법(Edmunds Act)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념과 서부 개척기의 종교적 자유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으며, 아서 대통령은 이를 통해 연방 정부의 권위가 서부의 구석구석까지 미쳐야 함을 분명히 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노예제와 더불어 "쌍둥이 야만(Twin Relics of Barbarism)"이라 불릴 정도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특히 기성 기독교 교단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모르몬교의 결혼 풍습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고 미국의 가정 체제를 붕괴시킨다고 주장했다.
아서 대통령은 본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성향이었으나, 법치주의자로서의 면모 또한 강했다. 그는 연방 대법원이 이미 1879년 '레이놀즈 대 미국 사건'을 통해 "종교적 신념이 법률 위반의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타 지역에서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상황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지 F. 에드먼즈 상원의원이 주도하고 아서 대통령이 서명한 이 법안은 이전의 법률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단순히 결혼식을 올린 것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여성과 한 지붕 아래 사는 행위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여 입증 책임을 완화했다.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자는 투표권은 물론, 배심원 자격과 공직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는 유타 지역의 정치 권력을 쥐고 있던 모르몬교 수뇌부를 정조준한 것이었다. 연방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유타 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당 지역의 선거를 감독하고 부정행위를 차단하도록 했다.
아서는 이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연방 정부가 주(State)가 아닌 영토(Territory)에 대해 강력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49]
아서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할 때 결코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변호사 출신답게 이 법이 특정 종교 집단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소급 적용의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취임사에서 강조했듯 "법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예외적인 성역은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유타 지역에 연방 판사들을 대거 파견하여 법 집행을 독려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모르몬교도가 수감되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진통을 겪었으나, 아서는 이를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에 통합되기 위한 필수적인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남부의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방의 통합과 도덕적 표준 확립에는 단호했음을 보여준다.
에드먼즈법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종교 탄압이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으나,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아서의 '결단력'을 보여준 사례로 칭송받았다. 이 법을 통해 유타는 비로소 현대적인 미국의 사법 체계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사건은 아서 대통령이 단순히 뉴욕의 세련된 신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서부 영토의 통치자로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음을 입증한다. 그는 총칼을 앞세운 정복 대신 '법전'을 앞세운 통합을 선택했으며, 이는 미국이 도금 시대의 혼란을 딛고 거대 연방 국가로 성숙해가는 과정의 일면이었다.[50]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노예제와 더불어 "쌍둥이 야만(Twin Relics of Barbarism)"이라 불릴 정도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특히 기성 기독교 교단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모르몬교의 결혼 풍습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고 미국의 가정 체제를 붕괴시킨다고 주장했다.
아서 대통령은 본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성향이었으나, 법치주의자로서의 면모 또한 강했다. 그는 연방 대법원이 이미 1879년 '레이놀즈 대 미국 사건'을 통해 "종교적 신념이 법률 위반의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타 지역에서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상황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지 F. 에드먼즈 상원의원이 주도하고 아서 대통령이 서명한 이 법안은 이전의 법률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단순히 결혼식을 올린 것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여성과 한 지붕 아래 사는 행위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여 입증 책임을 완화했다.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자는 투표권은 물론, 배심원 자격과 공직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는 유타 지역의 정치 권력을 쥐고 있던 모르몬교 수뇌부를 정조준한 것이었다. 연방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유타 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당 지역의 선거를 감독하고 부정행위를 차단하도록 했다.
아서는 이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연방 정부가 주(State)가 아닌 영토(Territory)에 대해 강력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49]
아서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할 때 결코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변호사 출신답게 이 법이 특정 종교 집단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소급 적용의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취임사에서 강조했듯 "법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예외적인 성역은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유타 지역에 연방 판사들을 대거 파견하여 법 집행을 독려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모르몬교도가 수감되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진통을 겪었으나, 아서는 이를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에 통합되기 위한 필수적인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남부의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방의 통합과 도덕적 표준 확립에는 단호했음을 보여준다.
에드먼즈법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종교 탄압이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으나,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아서의 '결단력'을 보여준 사례로 칭송받았다. 이 법을 통해 유타는 비로소 현대적인 미국의 사법 체계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사건은 아서 대통령이 단순히 뉴욕의 세련된 신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서부 영토의 통치자로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음을 입증한다. 그는 총칼을 앞세운 정복 대신 '법전'을 앞세운 통합을 선택했으며, 이는 미국이 도금 시대의 혼란을 딛고 거대 연방 국가로 성숙해가는 과정의 일면이었다.[50]
4.8. 경제[편집]
아서는 본래 뉴욕의 세속적인 정객 출신이었기에 자본주의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의 경제 정책은 철저하게 '비즈니스 친화적'이면서도 국가 시스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현대 국가들이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재정 흑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관세 수입이 폭증하면서 연방 정부의 금고는 넘쳐났고, 아서 임기 중에는 매년 약 1억 달러 이상의 흑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축복 같아 보이지만, 당시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는 시중에 돌아야 할 화폐가 정부 금고에 묶여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이었다. 아서는 이 과잉 세수를 처리하기 위해 두 가지 길을 택했다. 첫째는 남북전쟁 부채를 조기에 상환하여 국가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었고, 둘째는 해군 현대화와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서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원이면서도, 국가 인프라 구축에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휘그당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금 시대의 경제를 지탱한 기둥은 단연 철도였다. 아서 재임기 동안 대륙횡단철도의 지선들이 촘촘하게 깔렸고, 이는 미국을 하나의 거대 단일 시장으로 묶어주었다. 아서는 철도 자본가들의 로비에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동시에 철도 회사들의 지나친 독점 행위가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1887년 제정되는 '주간 통상법(Interstate Commerce Act)'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규제 논의들을 지켜보며, 국가가 시장의 규칙을 정하는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자였으나, 부패한 정치 기계의 부속품이었던 과거 덕분에 역설적으로 '독점이 가져오는 비효율'이 국가 전체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51]
화려한 공장 굴뚝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서 임기 중에는 '노동 기사단(Knights of Labor)'과 같은 노동 조직들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1883년에는 전신 기사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는 등 노사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아서는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 개인적인 동정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행정가였다. 그는 파업이 국가 경제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을 경계했으며, 정부의 역할은 노사 간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안정적인 통화 정책과 관세 보호를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 중 추진된 공무원 제도 개혁(펜들턴법)은 역설적으로 '능력 중심 사회'라는 신호를 노동계층에 보내는 효과를 낳았고, 이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사회 이동성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미국 경제의 뜨거운 감자는 '금본위제'와 '은화 자유 주조' 사이의 갈등이었다. 서부의 은광 업자들과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통화량을 늘리기 위해 은화 주조를 요구했고, 동부의 금융가들은 화폐 가치 안정을 위해 금본위제를 고수했다.
아서는 전형적인 '동부 금융권'의 수호자였다. 그는 은화의 과도한 발행이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해외 투자자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매년 의회에 은화 주조를 중단하거나 제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보수적인 통화 정책은 도금 시대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아 경제의 펀더멘털을 다지는 데 기여했으나, 서부와 남부의 서민들에게는 "기득권의 대변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2]
아서의 경제 정책은 '안정 속의 점진적 개혁'이었다. 그는 도금 시대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로막지 않으면서도, 그 성장이 가져온 재정 흑자를 국가의 장기적 자산(해군, 국채 상환)으로 전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비록 그는 빈부격차나 노동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부패한 엽관제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적 정경유착'의 고리 하나를 끊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서가 닦아놓은 효율적인 관료제와 안정적인 재정 구조는,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같은 진보주의 대통령들이 강력한 경제 규제와 사회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현대 국가들이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재정 흑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관세 수입이 폭증하면서 연방 정부의 금고는 넘쳐났고, 아서 임기 중에는 매년 약 1억 달러 이상의 흑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축복 같아 보이지만, 당시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는 시중에 돌아야 할 화폐가 정부 금고에 묶여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이었다. 아서는 이 과잉 세수를 처리하기 위해 두 가지 길을 택했다. 첫째는 남북전쟁 부채를 조기에 상환하여 국가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었고, 둘째는 해군 현대화와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서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원이면서도, 국가 인프라 구축에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휘그당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금 시대의 경제를 지탱한 기둥은 단연 철도였다. 아서 재임기 동안 대륙횡단철도의 지선들이 촘촘하게 깔렸고, 이는 미국을 하나의 거대 단일 시장으로 묶어주었다. 아서는 철도 자본가들의 로비에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동시에 철도 회사들의 지나친 독점 행위가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1887년 제정되는 '주간 통상법(Interstate Commerce Act)'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규제 논의들을 지켜보며, 국가가 시장의 규칙을 정하는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자였으나, 부패한 정치 기계의 부속품이었던 과거 덕분에 역설적으로 '독점이 가져오는 비효율'이 국가 전체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51]
화려한 공장 굴뚝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서 임기 중에는 '노동 기사단(Knights of Labor)'과 같은 노동 조직들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1883년에는 전신 기사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는 등 노사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아서는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 개인적인 동정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행정가였다. 그는 파업이 국가 경제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을 경계했으며, 정부의 역할은 노사 간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안정적인 통화 정책과 관세 보호를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 중 추진된 공무원 제도 개혁(펜들턴법)은 역설적으로 '능력 중심 사회'라는 신호를 노동계층에 보내는 효과를 낳았고, 이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사회 이동성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미국 경제의 뜨거운 감자는 '금본위제'와 '은화 자유 주조' 사이의 갈등이었다. 서부의 은광 업자들과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통화량을 늘리기 위해 은화 주조를 요구했고, 동부의 금융가들은 화폐 가치 안정을 위해 금본위제를 고수했다.
아서는 전형적인 '동부 금융권'의 수호자였다. 그는 은화의 과도한 발행이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해외 투자자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매년 의회에 은화 주조를 중단하거나 제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보수적인 통화 정책은 도금 시대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아 경제의 펀더멘털을 다지는 데 기여했으나, 서부와 남부의 서민들에게는 "기득권의 대변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2]
아서의 경제 정책은 '안정 속의 점진적 개혁'이었다. 그는 도금 시대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로막지 않으면서도, 그 성장이 가져온 재정 흑자를 국가의 장기적 자산(해군, 국채 상환)으로 전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비록 그는 빈부격차나 노동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부패한 엽관제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적 정경유착'의 고리 하나를 끊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서가 닦아놓은 효율적인 관료제와 안정적인 재정 구조는,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같은 진보주의 대통령들이 강력한 경제 규제와 사회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4.9. 사후 재평가[편집]
아서는 사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기억되지 않는, 소위 '잊힌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극적인 전쟁을 치르거나 경제 공황을 겪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기 종료 후 1년 만에 병사했기에 자신의 업적을 홍보할 시간조차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역사학계에서는 그를 "미국 근대 행정 국가의 기틀을 닦은 의외의 공로자"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아서가 대통령직을 떠날 때, 미국 대중과 언론의 시각은 그가 취임했을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취임 초 "정치 기계의 부속품"이라며 멸시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가 퇴임할 즈음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헌법적 의무에 충실했으며,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정적이었던 알렉산더 맥클루어(Alexander McClure)는 "아서만큼 대통령직에 들어설 때 불신받고, 떠날 때 존경받은 인물은 없다"는 유명한 논평을 남겼다. 그는 엽관제의 화신으로 불리던 인물이 스스로 그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펜들턴법에 서명한 것을 두고, "정치적 자살행위이자 국가적 회생"이라 평했다. 이러한 당대의 평가는 아서가 사후에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아서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단순히 법안에 서명한 것을 넘어, 공직의 전문성이라는 개념을 미국에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아서 이전의 미국 관료 사회는 선거 승리자가 전리품을 나누듯 관직을 배분하는 난장판이었으나, 아서는 이를 시험과 실적 중심의 관료제로 전환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는 훗날 미국이 거대 강대국으로 성장하며 복잡한 행정 사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아서가 콩클링의 압력에 굴복해 다시 엽관제로 회귀했다면, 미국 연방 정부의 근대화는 수십 년 뒤처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아서는 "도금 시대의 부패한 정치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패를 가장 잘 알았기에 그것을 도려낼 수 있었던 '내부자 출신의 개혁가'로 재평가받는다.
아서가 추진한 해군 현대화 사업 역시 중요한 재평가 요소다. 그가 취임할 당시 미국의 해군은 "고철 덩어리"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으나, 아서는 철갑선을 도입하고 해군 조직을 개편하여 현대적인 함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해군력 강화는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대에 미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해상 패권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현대 미국 해군의 진정한 창설자"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그가 보여준 선견지명이 미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53]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아서는 주로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는 그가 단임에 그쳤고, 카리스마 있는 대중 연설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무 수행의 성실도'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 측면에서는 항상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신의(콩클링과의 관계)보다 공적인 정의를 택함으로써 '권력이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을 몸소 증명했다. 오늘날 아서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의 시스템을 정비한 '조용한 관리자'의 롤모델로 평가받는다. 특히 최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진영 논리를 깨고 원칙을 고수한 아서의 태도는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54]
아서가 대통령직을 떠날 때, 미국 대중과 언론의 시각은 그가 취임했을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취임 초 "정치 기계의 부속품"이라며 멸시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가 퇴임할 즈음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헌법적 의무에 충실했으며,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정적이었던 알렉산더 맥클루어(Alexander McClure)는 "아서만큼 대통령직에 들어설 때 불신받고, 떠날 때 존경받은 인물은 없다"는 유명한 논평을 남겼다. 그는 엽관제의 화신으로 불리던 인물이 스스로 그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펜들턴법에 서명한 것을 두고, "정치적 자살행위이자 국가적 회생"이라 평했다. 이러한 당대의 평가는 아서가 사후에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아서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단순히 법안에 서명한 것을 넘어, 공직의 전문성이라는 개념을 미국에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아서 이전의 미국 관료 사회는 선거 승리자가 전리품을 나누듯 관직을 배분하는 난장판이었으나, 아서는 이를 시험과 실적 중심의 관료제로 전환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는 훗날 미국이 거대 강대국으로 성장하며 복잡한 행정 사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아서가 콩클링의 압력에 굴복해 다시 엽관제로 회귀했다면, 미국 연방 정부의 근대화는 수십 년 뒤처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아서는 "도금 시대의 부패한 정치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패를 가장 잘 알았기에 그것을 도려낼 수 있었던 '내부자 출신의 개혁가'로 재평가받는다.
아서가 추진한 해군 현대화 사업 역시 중요한 재평가 요소다. 그가 취임할 당시 미국의 해군은 "고철 덩어리"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으나, 아서는 철갑선을 도입하고 해군 조직을 개편하여 현대적인 함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해군력 강화는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대에 미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해상 패권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현대 미국 해군의 진정한 창설자"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그가 보여준 선견지명이 미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53]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아서는 주로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는 그가 단임에 그쳤고, 카리스마 있는 대중 연설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무 수행의 성실도'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 측면에서는 항상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신의(콩클링과의 관계)보다 공적인 정의를 택함으로써 '권력이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을 몸소 증명했다. 오늘날 아서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의 시스템을 정비한 '조용한 관리자'의 롤모델로 평가받는다. 특히 최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진영 논리를 깨고 원칙을 고수한 아서의 태도는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54]
5. 사생활[편집]
체스터 A. 아서의 사생활은 그가 대중에게 보여준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깊은 애정과 비극적인 상실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그는 1859년 앨런 루이스 허든(Ellen Lewis Herndon)과 결혼하며 뉴욕 사교계의 중심에 섰으나, 아내의 이른 죽음은 그를 평생 '슬픔을 간직한 신사'로 살게 만들었다. 특히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격랑 속에서 남부 출신인 아내와 북부 정객인 아서의 결합은 그 자체로 당시 미국의 분열상을 상징하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앨런 허든(애칭은 '넬')은 버지니아의 명문 해군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루이스 허든 대령은 아마존 강 탐험으로 이름을 떨친 영웅이었으며, 1857년 침몰하는 SS 센트럴 아메리카 호에서 끝까지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배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 인물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서는 1856년 친구의 소개로 넬을 처음 만났는데, 그녀의 뛰어난 성악 실력과 세련된 남부적 교양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두 사람의 약혼 기간은 꽤 길었는데, 이는 아서가 변호사로서 경제적 자립을 이룬 뒤 당당하게 그녀를 맞이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1859년 10월 29일, 아서의 30세 생일 직후 거행된 결혼식은 뉴욕 상류층의 큰 축복 속에 진행되었고, 아서는 이를 통해 버지니아의 귀족적 인맥까지 손에 넣게 된다.
결혼 생활의 달콤함은 얼마 가지 않아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아서는 뉴욕 주 병참감으로서 북군(연방군)의 보급을 책임지며 승승장구했지만, 아내 넬의 입장은 처참했다. 그녀의 친척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남부 연합군(Confederacy)의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서가 북군의 승리를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동안, 넬은 고향 버지니아에서 들려오는 친척들의 전사 소식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서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녀가 남부의 지인들을 돕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서는 '남부 동조자의 남편'이라는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부부 사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대적 간극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며 가정을 지켜나갔다.[55]
아서가 뉴욕 세관장으로서 정치적 전성기를 구애받던 1880년 1월, 넬은 급성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서는 정치적 업무로 알바니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아내를 잃은 후 아서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무너졌다. 그는 아내의 침실을 그녀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유지하도록 명령했고, 매일 아침 그녀의 사진 앞에 신선한 꽃을 바치는 의식을 거르지 않았다. 훗날 그가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도 그는 끝내 재혼하지 않았으며, 여동생인 메리 아서 매켈로이에게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게 했다. 백악관의 화려한 파티가 끝나고 나면, 그는 아내의 초상화가 걸린 방에서 홀로 시가를 태우며 고독을 씹었다고 전해진다.
아내가 떠난 후 아서에게 남은 위안은 두 자녀, 아들 체스터 앨런 아서 2세와 딸 넬 아서였다. 아서는 아이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아버지였다. 특히 딸 넬을 끔찍이 아꼈는데, 대통령 재임 중에도 딸의 교육과 생활을 직접 챙기기 위해 바쁜 일정 중에도 짬을 냈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 체스터 2세와는 다소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아버지를 닮아 패션과 사교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유럽을 유람하며 돈을 쓰는 '플레이보이' 성향을 보였고, 이는 엄격한 개혁가로 변신하려던 대통령 아서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아서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병세(브라이트병)를 끝까지 숨길 만큼 강한 부성애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아이들에게 또 다른 슬픔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서의 가정사는 '화려한 권력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으로 요약된다. 그는 만인의 신사였으나 정작 단 한 명의 여인, 아내 넬에게는 충분히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안고 살았다. 백악관의 불빛이 꺼진 뒤 그가 마주했던 어둠은, 어쩌면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던 정치적 무게보다 더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아서는 사후 아내 넬의 옆에 나란히 묻혔으며, 그의 묘비에는 화려한 직함 대신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소박한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앨런 허든(애칭은 '넬')은 버지니아의 명문 해군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루이스 허든 대령은 아마존 강 탐험으로 이름을 떨친 영웅이었으며, 1857년 침몰하는 SS 센트럴 아메리카 호에서 끝까지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배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 인물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서는 1856년 친구의 소개로 넬을 처음 만났는데, 그녀의 뛰어난 성악 실력과 세련된 남부적 교양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두 사람의 약혼 기간은 꽤 길었는데, 이는 아서가 변호사로서 경제적 자립을 이룬 뒤 당당하게 그녀를 맞이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1859년 10월 29일, 아서의 30세 생일 직후 거행된 결혼식은 뉴욕 상류층의 큰 축복 속에 진행되었고, 아서는 이를 통해 버지니아의 귀족적 인맥까지 손에 넣게 된다.
결혼 생활의 달콤함은 얼마 가지 않아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아서는 뉴욕 주 병참감으로서 북군(연방군)의 보급을 책임지며 승승장구했지만, 아내 넬의 입장은 처참했다. 그녀의 친척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남부 연합군(Confederacy)의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서가 북군의 승리를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동안, 넬은 고향 버지니아에서 들려오는 친척들의 전사 소식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서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녀가 남부의 지인들을 돕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서는 '남부 동조자의 남편'이라는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부부 사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대적 간극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며 가정을 지켜나갔다.[55]
아서가 뉴욕 세관장으로서 정치적 전성기를 구애받던 1880년 1월, 넬은 급성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서는 정치적 업무로 알바니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아내를 잃은 후 아서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무너졌다. 그는 아내의 침실을 그녀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유지하도록 명령했고, 매일 아침 그녀의 사진 앞에 신선한 꽃을 바치는 의식을 거르지 않았다. 훗날 그가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도 그는 끝내 재혼하지 않았으며, 여동생인 메리 아서 매켈로이에게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게 했다. 백악관의 화려한 파티가 끝나고 나면, 그는 아내의 초상화가 걸린 방에서 홀로 시가를 태우며 고독을 씹었다고 전해진다.
아내가 떠난 후 아서에게 남은 위안은 두 자녀, 아들 체스터 앨런 아서 2세와 딸 넬 아서였다. 아서는 아이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아버지였다. 특히 딸 넬을 끔찍이 아꼈는데, 대통령 재임 중에도 딸의 교육과 생활을 직접 챙기기 위해 바쁜 일정 중에도 짬을 냈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 체스터 2세와는 다소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아버지를 닮아 패션과 사교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유럽을 유람하며 돈을 쓰는 '플레이보이' 성향을 보였고, 이는 엄격한 개혁가로 변신하려던 대통령 아서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아서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병세(브라이트병)를 끝까지 숨길 만큼 강한 부성애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아이들에게 또 다른 슬픔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서의 가정사는 '화려한 권력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으로 요약된다. 그는 만인의 신사였으나 정작 단 한 명의 여인, 아내 넬에게는 충분히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안고 살았다. 백악관의 불빛이 꺼진 뒤 그가 마주했던 어둠은, 어쩌면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던 정치적 무게보다 더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아서는 사후 아내 넬의 옆에 나란히 묻혔으며, 그의 묘비에는 화려한 직함 대신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소박한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6. 로스코 콩클링과의 관계[편집]
아서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고도 비극적인 관계를 꼽으라면 단연 로스코 콩클링과의 관계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동지에서 주종 관계에 가까운 밀월을 거쳐, 종국에는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차갑고 냉혹한 **'절교'**로 끝맺음했다. 아서에게 콩클링은 자신을 출세시킨 '창조주'였으나,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과거의 망령'이기도 했다.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1860년대 후반 뉴욕 공화당의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고해졌다. 콩클링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고, 아서는 그 곁에서 실무를 총괄하며 콩클링의 지시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집행하는 '집사'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서를 가리켜 "콩클링의 구두를 닦아주는 사람"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지만, 아서는 콩클링에 대한 충성심을 숨기지 않았다. 콩클링이 그랜트 대통령과의 인맥을 통해 아서를 뉴욕 세관장에 앉혔을 때, 두 사람의 결속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서는 콩클링의 명령에 따라 세관의 일자리를 콩클링의 추종자들에게 분배했고, 거기서 나오는 정치 자금을 콩클링의 금고로 흘려보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첫 번째 금이 간 것은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였다. 콩클링은 그랜트의 3선을 밀어붙이다 실패하자, 타협안으로 제안된 아서의 부통령 지명을 강력히 반대했다. 콩클링은 아서에게 "그딴 쓰레기 같은 자리는 받지 마라"고 독설을 퍼부었으나, 아서는 처음으로 콩클링의 말을 거역했다. "부통령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라며 지명 수락을 강행한 것이다.[56]
진정한 비극은 가필드 대통령 암살 사건이었다. 범인 찰스 기토가 "나는 스탈워츠(콩클링 파벌)다! 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외치자, 콩클링은 이 기회를 이용해 행정부를 장악하려 들었다. 그는 아서가 취임하면 자신을 국무장관에 임명하거나, 최소한 인사권 전체를 자신에게 넘길 것이라 확신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콩클링은 아서를 만나 노골적인 인사 청탁 목록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서는 이 자리에서 콩클링을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아서는 콩클링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지, 뉴욕의 체스터 아서가 아니오." 콩클링은 격노했다. 그는 자신이 키운 사냥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했고, 언론을 통해 아서를 "배신자", "배은망덕한 흉물"이라며 맹비난했다. 아서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엽관제를 폐지하는 펜들턴법에 서명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콩클링은 아서의 재선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아서가 죽음 직전까지 투병할 때도 단 한 번의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아서는 콩클링과의 절교로 인해 정치적 고립무원에 빠졌다. 스탈워츠 파벌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반대파인 '머드웜프(Mugwumps)'는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서는 끝내 콩클링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옛 보스와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한 명의 독립된 국가 원수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콩클링이 1888년 대폭설 속에 길을 잃고 헤매다 폐렴으로 사망했을 때, 아서는 이미 2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애증으로 얽혔던 두 남자는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아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로스코 콩클링이라는 거대한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은 것"을 꼽는다. 이는 아서 개인에게는 인간적인 배신이었을지언정, 미국 민주주의에는 커다란 진보였기 때문이다.[57]
아서와 콩클링의 관계는 1860년대 후반 뉴욕 공화당의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고해졌다. 콩클링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고, 아서는 그 곁에서 실무를 총괄하며 콩클링의 지시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집행하는 '집사'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서를 가리켜 "콩클링의 구두를 닦아주는 사람"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지만, 아서는 콩클링에 대한 충성심을 숨기지 않았다. 콩클링이 그랜트 대통령과의 인맥을 통해 아서를 뉴욕 세관장에 앉혔을 때, 두 사람의 결속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서는 콩클링의 명령에 따라 세관의 일자리를 콩클링의 추종자들에게 분배했고, 거기서 나오는 정치 자금을 콩클링의 금고로 흘려보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첫 번째 금이 간 것은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였다. 콩클링은 그랜트의 3선을 밀어붙이다 실패하자, 타협안으로 제안된 아서의 부통령 지명을 강력히 반대했다. 콩클링은 아서에게 "그딴 쓰레기 같은 자리는 받지 마라"고 독설을 퍼부었으나, 아서는 처음으로 콩클링의 말을 거역했다. "부통령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라며 지명 수락을 강행한 것이다.[56]
진정한 비극은 가필드 대통령 암살 사건이었다. 범인 찰스 기토가 "나는 스탈워츠(콩클링 파벌)다! 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외치자, 콩클링은 이 기회를 이용해 행정부를 장악하려 들었다. 그는 아서가 취임하면 자신을 국무장관에 임명하거나, 최소한 인사권 전체를 자신에게 넘길 것이라 확신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콩클링은 아서를 만나 노골적인 인사 청탁 목록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서는 이 자리에서 콩클링을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아서는 콩클링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지, 뉴욕의 체스터 아서가 아니오." 콩클링은 격노했다. 그는 자신이 키운 사냥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했고, 언론을 통해 아서를 "배신자", "배은망덕한 흉물"이라며 맹비난했다. 아서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엽관제를 폐지하는 펜들턴법에 서명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콩클링은 아서의 재선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아서가 죽음 직전까지 투병할 때도 단 한 번의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아서는 콩클링과의 절교로 인해 정치적 고립무원에 빠졌다. 스탈워츠 파벌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반대파인 '머드웜프(Mugwumps)'는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서는 끝내 콩클링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옛 보스와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한 명의 독립된 국가 원수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콩클링이 1888년 대폭설 속에 길을 잃고 헤매다 폐렴으로 사망했을 때, 아서는 이미 2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애증으로 얽혔던 두 남자는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아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로스코 콩클링이라는 거대한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은 것"을 꼽는다. 이는 아서 개인에게는 인간적인 배신이었을지언정, 미국 민주주의에는 커다란 진보였기 때문이다.[57]
7. 기타[편집]
- 외모 가꾸기에 거의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그는 대통령 취임 당시 80벌 이상의 맞춤형 바지를 백악관으로 들여왔으며, 상황에 따라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침에는 가벼운 산책용 코트, 오후에는 공식 접견을 위한 프록코트, 저녁에는 화려한 만찬을 위한 턱시도와 실크 모자를 착용하는 식이었다. 그의 패션 감각은 당시 유럽의 최신 유행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는 특히 넥타이의 매듭 모양과 커프스링크의 재질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섬세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거친 개척자 정신이나 투박한 군인 이미지를 강조하던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그를 두고 "거울만 보는 공작새"라고 조롱했으나, 지지자들은 그가 남북전쟁 이후의 혼란스러운 미국에 '문명화된 지도자'의 표상을 제시했다고 찬사를 보냈다.[58]
- 당대 최고의 미식가이자 주당(酒黨)이기도 했다. 그는 백악관의 주방을 일류 호텔 수준으로 격상시켰으며,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하여 매일 밤 화려한 코스 요리를 즐겼다. 그가 주최하는 만찬은 대개 자정 무렵에 시작되어 새벽 3~4시까지 이어지곤 했는데, 이곳에서 제공되는 최고급 와인과 수입 시가는 워싱턴 정계 인사들이 가장 선망하는 초대 대상이 된 이유였다.
- 그는 낚시를 통해 직접 잡은 송어 요리와 캔버스백 오리 요리를 즐겼으며,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안목도 탁월했다. 이러한 '식탁 정치'는 아서가 가진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딱딱한 집무실이 아닌, 풍요로운 만찬 테이블 위에서 정적들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복잡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와 한 번 식사를 해본 사람들은 그가 지닌 해박한 지식과 세련된 유머 감각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적대감을 거두곤 했다.
- 아서가 패션과 식도락에 공을 들인 배경에는 사실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는 엽관제의 수혜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자신을 '품격 있는 국가의 수장'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세련된 취향을 통해 미국이 더 이상 변방의 거친 국가가 아니라,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문화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그의 이러한 화려함은 그가 앓고 있던 치명적인 질병(브라이트병)을 은폐하는 가림막 역할도 했다. 그는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대중 앞에서는 완벽하게 재단된 옷을 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급 시가를 태웠다.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겉모습에 취해, 그가 속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아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낮은 대통령 중 한 명인 탓에 대중 매체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19세기 말 도금 시대를 다룬 시대극에서 병풍처럼 지나가는 조연이나, 엽관제 부패를 상징하는 단역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대중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순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현대 액션 영화의 대명사인 다이하드 3의 결정적인 암호로서였다.
많은 한국인과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체스터 A. 아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뇌리에 박아넣은 매체는 영화 《다이하드 3》일 것이다. 영화 중반부, 테러리스트 사이먼 그루버(제레미 아이언스 분)는 뉴욕 시내 한 초등학교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협박하며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분)에게 퀴즈를 낸다.
존 맥클레인과 제우스(사무엘 L. 잭슨 분)는 "그런 놈이 누구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라며 당황해한다. 이 장면은 미국인들조차 아서를 얼마나 생소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적인 장치였다. 결국 이들은 금고의 비밀번호가 '체스터 A. 아서'라는 것을 알아내고 폭탄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학교 이름마저 '체스터 A. 아서 초등학교'였다. 이 영화 덕분에 아서는 본인의 업적과는 별개로 '퀴즈에나 나올법한 잊힌 대통령'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이나 퓨처라마 등에서는 그가 지닌 특유의 화려한 구수나룻과 세련된 패션, 그리고 낮은 인지도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한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 심슨이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퀴즈를 풀 때 "가장 쓸모없는 대통령" 혹은 "가장 이름이 이상한 대통령"을 언급할 때 단골로 소환된다.
퓨처라마에서는 미래 세계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아서의 머리(Head)가 유리병에 담긴 채 등장하여,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거나 자신의 패션 철학을 설교하는 꼰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역사 소설이나 시대극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앞길을 가로막는 노회한 정치꾼이나, 반대로 주인공에게 의외의 도움을 주는 품격 있는 신사로 등장한다.
에드워드 루더퍼드의 소설 《뉴욕》에서 뉴욕의 역사를 다룬 이 방대한 소설에서 아서는 뉴욕 세관장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매우 세련되고 사교적이지만, 시스템의 부패를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현실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미드 《길디드 에이지》에서 19세기 말 뉴욕 상류층의 삶을 다룬 이 드라마에서 아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최하는 화려한 파티나 백악관 리모델링 소식 등이 상류층 여인들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다. 그는 당시 뉴욕 사교계가 우러러보는 '성공한 뉴요커'의 정점으로 묘사된다.
많은 한국인과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체스터 A. 아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뇌리에 박아넣은 매체는 영화 《다이하드 3》일 것이다. 영화 중반부, 테러리스트 사이먼 그루버(제레미 아이언스 분)는 뉴욕 시내 한 초등학교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협박하며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분)에게 퀴즈를 낸다.
존 맥클레인과 제우스(사무엘 L. 잭슨 분)는 "그런 놈이 누구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라며 당황해한다. 이 장면은 미국인들조차 아서를 얼마나 생소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적인 장치였다. 결국 이들은 금고의 비밀번호가 '체스터 A. 아서'라는 것을 알아내고 폭탄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학교 이름마저 '체스터 A. 아서 초등학교'였다. 이 영화 덕분에 아서는 본인의 업적과는 별개로 '퀴즈에나 나올법한 잊힌 대통령'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이나 퓨처라마 등에서는 그가 지닌 특유의 화려한 구수나룻과 세련된 패션, 그리고 낮은 인지도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한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 심슨이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퀴즈를 풀 때 "가장 쓸모없는 대통령" 혹은 "가장 이름이 이상한 대통령"을 언급할 때 단골로 소환된다.
퓨처라마에서는 미래 세계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아서의 머리(Head)가 유리병에 담긴 채 등장하여,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거나 자신의 패션 철학을 설교하는 꼰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역사 소설이나 시대극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앞길을 가로막는 노회한 정치꾼이나, 반대로 주인공에게 의외의 도움을 주는 품격 있는 신사로 등장한다.
에드워드 루더퍼드의 소설 《뉴욕》에서 뉴욕의 역사를 다룬 이 방대한 소설에서 아서는 뉴욕 세관장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매우 세련되고 사교적이지만, 시스템의 부패를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현실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미드 《길디드 에이지》에서 19세기 말 뉴욕 상류층의 삶을 다룬 이 드라마에서 아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최하는 화려한 파티나 백악관 리모델링 소식 등이 상류층 여인들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다. 그는 당시 뉴욕 사교계가 우러러보는 '성공한 뉴요커'의 정점으로 묘사된다.
9. 어록[편집]
화려한 사교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는 웅변으로 대중을 선동하기보다는 정제된 문장으로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길 즐겼다. 특히 대통령 취임 이후 그가 남긴 짧은 문장들은 그가 겪었던 극심한 정치적 압박과 개인적인 고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려 했던 의지를 잘 보여준다.
"I may b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but my private life is nobody's damn business." (내가 미국의 대통령일지는 모르나, 나의 사생활은 그 누구도 상관할 바가 아니다.)
"The Office of the Presidency is too great a burden to be used for the benefit of any individual or party." (대통령직은 특정 개인이나 정당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기에는 너무나도 막중한 책임이다.)
"Senator Conkling, I have no answer to give you." (콩클링 의원, 당신에게 줄 답변은 없소.)
"I am not a candidate." (나는 후보가 아닙니다.)
"If I have done my duty, that is enough." (내가 나의 의무를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 실제로 아서는 외모 관리에 굉장히 철저했기 때문에 나이에 민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아서는 임종 직전 자신의 거의 모든 사적 기록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는 미국 대통령 중 연구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이 되었다.[3] 이 당시의 잦은 이주는 훗날 정적들이 그의 출생지를 의심하며 '캐나다 출생설'을 유포하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다. 이사가 너무 잦아 기록이 불분명했기 때문.[4] 실제로 아서는 대통령 재임 중 일기에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나를 자랑스러워하셨을까"라는 고뇌를 남기기도 했다.[5] 전미 대학 우등생 선발 협회[6] 실제로 아서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교인 유니언 칼리지에 깊은 애정을 보였으며, 대학의 발전을 위해 남모르게 기부금을 보내기도 했다.[7] 앨런의 아버지는 해군 역사에 남을 영웅이었으나, 그녀의 친척 대다수는 남부 연합군에 가담했다.[8] 훗날 아서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변호사 시절의 서류들을 들춰보며 "그때가 내 양심이 가장 투명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9] 이 재판을 맡았던 윌리엄 록웰 판사는 아서의 논리를 받아들여 "흑인도 백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 승객"이라는 취지의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10] 앨리자베스 제닝스는 평생 아서의 조력을 잊지 않았으며, 아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며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1] 아서는 이 과정에서 수백 건의 영국 관습법 사례를 인용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지독한 공부벌레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12] 당시 아서를 지켜본 한 장교는 "그는 마치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를 하나하나 닦는 사람 같았다"고 회상했다.[13] 아서는 훗날 대통령이 되어 해군 현대화 사업을 추진할 때, 병참감 시절의 경험을 살려 직접 함선의 설계도와 보급 리스트를 검토하며 참모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14] 이 시기 아서는 뉴욕주 공화당 위원회의 집행 위원을 역임하며 사실상 당의 자금 흐름을 완전히 장악했다.[15] 훗날 아서 본인이 공무원 제도 개혁법인 펜들턴법에 서명했을 때, 스탈워츠 동료들이 가장 배신감을 느꼈던 부분도 바로 자신들이 공들여 만든 이 '자금 줄'을 아서가 직접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16] 콩클링은 아서를 "우리의 가장 정교한 무기"라고 칭송했으나, 그 무기가 훗날 자신을 겨눌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17] 당시 세관장은 적발된 밀수품 가액의 일부를 합법적으로 챙길 수 있는 '분배금(Moiety)' 제도의 수혜자였다. 이 때문에 아서의 실제 수입은 웬만한 재벌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18] 결국 이 갈등은 헤이스 대통령이 아서를 전격 해임하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며, 이는 아서 인생의 가장 큰 위기가 된다.[19] 훗날 그는 "정치적 의리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며 회한에 젖기도 했다.[20] 이 시기 아서는 스트레스로 인해 만성 신장 질환인 브라이트병의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화려한 만찬 뒤에서 그는 이미 무너져가는 시스템과 자신의 건강을 동시에 목격하고 있었다.[21] 이 과정에서 아서는 콩클링의 지시에 따라 헤이즈의 인사권을 상원에서 부결시키는 등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펼쳤다.[22] 아서가 대통령이 된 후 헤이즈는 그를 불신했으나, 아서가 진심으로 개혁을 추진하자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23] 당시 콩클링은 "헤이즈는 우리 당의 표로 당선되고도 우리 당의 심장을 찌르고 있다"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24] 실제로 아서는 대통령 취임 후 "나는 세관장 시절의 나를 잘 알기에,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도 가장 잘 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25] 훗날 아서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세관장에서 해임된 이후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해졌음을 직시했고,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고 한다.[26] 선거 직후 아서는 동료들에게 "이제 내 할 일은 끝났다. 나는 그저 상원에서 의사봉이나 두드리면 된다"며 안도했으나, 역사는 그에게 그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준비하고 있었다.[27] 이때의 고립감과 대중의 비난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콩클링과 거리를 두게 되는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28] 이 시기 아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는 등 신체적·정신적으로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29] 이 시기 아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밤 눈물로 기도하며 가필드의 쾌유를 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30] 이 자택은 현재도 뉴욕에 보존되어 있으며, 미국 역사상 백악관 밖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가 이루어진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31] 역사가들은 아서의 취임 과정을 두고 "가필드의 죽음이 아서라는 인간 속에 잠들어 있던 위대한 공복(公僕)의 영혼을 깨웠다"고 평하기도 한다.[32] 이 물품들 중에는 전임 대통령들이 남긴 서류부터 존 아담스 시절의 낡은 가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서는 이를 전부 경매에 부쳐 처분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이때 귀중한 사료들이 대거 유실되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33] 이러한 아서의 변화는 그가 백악관에 들어온 뒤 가필드의 영혼과 대화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급작스럽고도 철저한 것이었다.[34] 아서는 재임 중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금 피곤할 뿐"이라며 위트를 섞어 넘겼다.[35] 실제로 아서는 퇴임 후 뉴욕으로 돌아가 1년 남짓을 더 버티다 사망했는데, 의사들은 그가 백악관에서 보여준 생명력이 오직 정신력의 산물이었다고 진단했다.[36] 아서는 사석에서 "내가 만약 재선된다면, 그것은 나의 사형 집행장에 서명하는 것과 같다"는 비장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37] 실제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취임 후 아서가 닦아놓은 펜들턴법을 존중하며 개혁의 기조를 이어갔는데, 이는 아서가 패배 속에서도 거둔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있다.[38] 결과적으로 이 문서 소각 사건은 아서를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남게 만들었다.[39] 콩클링은 장례식 내내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으나, 지인들에게 "그는 비록 나를 버렸으나 가장 위엄 있는 대통령이었다"는 짧은 소회를 남겼다고 한다.[40] 아서는 사적으로 "만약 내가 개혁을 거부한다면, 가필드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라며 주변에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41] 물론 초기 적용 범위는 전체 연방직의 약 10% 수준이었으나, 이후 대통령들이 그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42] 이 함대들은 훗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43] 아서는 대통령 퇴임 직전까지도 조선소의 공정 상황을 직접 챙길 만큼 해군 사업에 애착을 가졌으며,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함대 건설 예산 확보를 위해 의회를 집요하게 설득했다.[44] 아서는 사적인 자리에서 "내가 그들을 보호한다면, 나는 가필드의 암살범인 기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꼴이 된다"며 괴로움을 토로했다고 한다.[45] 비록 이 조약은 영국과의 기존 협정(클레이턴-불워 조약) 위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나, 훗날 파나마 운하 건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46] 당시 보빙사의 정사 민영익은 아서 대통령의 위엄과 예법에 감탄하며 "태양을 보는 듯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47] 이 사건은 아서가 콩클링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 원수로서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48] 비록 법안은 실패작이었으나 아서가 수집한 방대한 관세 통계 자료는 훗날 클리블랜드 행정부가 관세 개혁을 재추진할 때 핵심적인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49] 이 법은 훗날 1887년 에드먼즈-터커법으로 더욱 강화되어, 결국 모르몬교가 1890년 일부다처제 폐지를 공식 선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50] 흥미롭게도 아서는 이 법을 집행하면서도 모르몬교도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에 대해서는 인도적인 지원을 고려하는 등, 특유의 '신사적인'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51] 그는 "자유 시장은 공정한 기회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52] 이러한 통화 갈등은 훗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황금 십자가' 연설로 이어지는 거대한 정치적 분열의 씨앗이 된다.[53] 실제로 아서급 순양함이나 전함 등에 그의 이름이 명명된 사례들은 그가 해군 내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54] 2000년대 이후 출간된 아서의 전기들은 그를 "비극적이지만 고결했던, 도금 시대의 진정한 신사"로 묘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55] 장남 윌리엄은 3살 때 뇌수막염으로 요절했는데, 이는 아서 부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56] 콩클링은 이때 아서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느꼈으나, 여전히 아서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고 믿었다.[57] 콩클링은 죽기 직전까지도 "아서가 내 충고만 들었어도 미국은 더 위대해졌을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58] 아서는 백악관에 전신 거울을 곳곳에 배치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자신의 복장을 점검하기 위한 용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