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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하와이 국왕
릴리우오칼라니
Liliʻuokalani
파일:릴리우오칼라니.webp
이름
릴리우오칼라니
(Liliʻuokalani)
출생
1838년 9월 2일
사망
1917년 11월 11일 (향년 79세)
미국 하와이 준주 호놀룰루
묘소
마우나 알라 왕릉
재위
1891년 1월 20일 ~ 1893년 1월 17일
서명
파일:릴리우오칼라니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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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카이사르 카파샤케아
어머니 케오호 카롤레
양아버지 아브네르 파키
양어머니 로라 코니아
배우자
존 오언 도미니스
종교
개신교 (성공회, 하와이 교회)

1. 개요2. 생애3. 업적4.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릴리우오칼라니는 하와이 왕국의 8대 군주이자 유일한 여왕이며, 망국의 군주였다. 그녀는 오빠 칼라카우아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재위 기간은 단 2년 남짓이었지만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강인한 의지와 애국심으로 왕권 회복과 민권 신장을 시도했으나, 1893년 미국계 백인들이 주도한 정변으로 폐위당했다. 여왕은 퇴위 후에도 미국의 합병에 저항하며 하와이의 독립을 끝까지 옹호했기에, 훗날 하와이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된다. 또한 그녀는 재능있는 음악가로서 하와이 왕가의 예술혼을 대표하기도 한다 – 그가 남긴 노래 알로하 오에(Aloha ʻOe)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하와이의 상징곡이 되었다.

2. 생애[편집]

릴리우오칼라니(1838~1917)는 하와이 왕국의 유일한 여왕이자 최후의 군주였다. 그녀는 오빠 칼라카우아 왕의 뒤를 이어 1891년 즉위하였으며, 즉위 당시부터 왕권 회복과 민족 자주권 강화를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왕위 계승 전부터 1887년의 “총검 헌법”이 정당한 국민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며, 하와이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녀는 즉위 후 곧바로 새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부당하게 제한된 하와이 토착민들의 선거권을 되돌려 주고자 했다. 1893년 1월, 여왕은 기존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공포하려 했는데, 이는 왕에게 내각 임명권과 비토권 등을 되돌리고, 재산 요건으로부터 하와이 국민들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백인 사업가들과 선교사 후손들로 구성된 미션계 정당(하와이안 리그)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여왕의 새 헌법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지배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즉각 여왕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1893년 1월 17일, 결국 하와이 왕국의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상업회의소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13명의 백인 정객들은 자체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여왕의 퇴위를 요구했다. 미국 하와이에 주재하던 스티븐스 공사는 미 해군 함정 보스턴 호의 해병대를 호놀룰루에 상륙시켜 이들 반란 세력을 묵인·지원하였다. 외세의 무력까지 등판하자 궁정 경비 병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하야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하와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일단 물러났지만, 동시에 미국 워싱턴 정부에 하와이 왕국의 합법 정부 복구를 청원하며 자신의 퇴위가 강압에 의한 부당한 것임을 호소했다. 새로 수립된 산포드 돌의 임시정부는 즉각 미국에 합병을 추진했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 사태를 조사한 뒤 이를 불법적인 정변으로 간주하고 여왕 복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수반 돌은 클리블랜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권을 놓지 않았으며, 하와이 문제는 미국 내 정치 공방 속에 지지부진해졌다​.

1895년 1월, 왕정복고를 노린 마지막 시도가 하와이 충신 로버트 윌콕스 등에 의해 감행되었으나, 왕당파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여파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이올라니 궁전에서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여왕은 옥중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노래와 글을 남기며 지냈지만, 결국 같은 해 1월 24일 자신의 지지자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얻기 위해 공식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1893년 정변 이후에도 명목상 유지되던 하와이 왕정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퇴위 후에도 하와이의 자주권 회복과 민족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오니파아(Onipaʻa)운동을 이끌며 “하와이는 하와이인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미국의 합병 시도를 저지하고자 했다. 1897년 하와이 합병 조약이 미국 상원에 제출되자, 여왕과 민족단체들은 대규모 청원 운동을 벌여 하와이인의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합병안이 부결되기도 했으나, 결국 미서전쟁 직후인 1898년 7월 미국은 공동 결의안이라는 방법으로 하와이를 강제 병합하였다. 왕국이 몰락한 뒤, 여왕은 공식 석상에서 물러나 사생활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인 '하와이 여왕의 이야기'를 1898년에 출판하여 국제 사회에 호소하였다.

그녀는 또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하와이 전통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알로하 오에(Aloha ʻOe)〉는 그녀가 공주 시절이던 1878년 작곡한 아름다운 이별의 노래로, 오늘날까지 하와이를 상징하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여왕은 말년에 미국 연방 정부로부터 연금과 사유 재산을 보장받고, 하와이 국민들로부터 계속해서 존경을 받으며 지냈다. 1917년 11월 11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수많은 하와이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였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생애와 왕국의 몰락 과정은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으로 남아 있으며, 동시에 주권과 문화 상실의 아픔을 겪은 하와이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업적[편집]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치세 업적은 무엇보다 헌법 개정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즉위 당시 시행되고 있던 1887년 베이오넷 헌법이 왕권과 하와이인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1893년 1월, 여왕은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공포하려 하였다. 이 개정 헌법의 핵심은 국왕에게 내각 임명권 등 더 많은 권한을 돌려주고, 당시 외국인 및 백인 소수에게 유리했던 선거권 제도를 개편하여 하와이 원주민 다수에게 참정권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즉, 릴리우오칼라니는 왕권 강화와 함께 하와이 민족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이 헌법은 공표 직전에 쿠데타로 무산되었지만, 여왕의 의지는 명확했다. “내 국민에게 옛 권리를 돌려주겠다." 이 노력은 하와이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쿠데타 세력이 세운 임시 정부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문화 및 사회 방면에서 릴리우오칼라니는 교육과 복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오빠 재위 시절부터 섭정으로 있으면서 공립학교 설립을 후원했고, 여왕이 된 후에도 장학 사업을 장려했다. 또한 하와이 전통문화를 사랑하여,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 《하와이 여왕의 이야기》를 집필함으로써 하와이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해 남겼다. 이는 식민지 시대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한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음악적으로는 즉위 이전부터 다수의 작곡 활동을 했는데, 특히 그녀가 1878년경 작곡한 Aloha ʻOe​는 하와이를 상징하는 노래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릴리우오칼라니는 통치자로서뿐 아니라 문화 예술의 수호자로서도 업적을 남겼다.외교적으로, 그녀는 열강 특히 미국과 평화롭게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 1893년 1월 쿠데타 발생 시, 여왕은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물러서라고 충신들에게 명령함으로써 일단 정권을 내주는 결단을 했다. 대신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쿠데타의 불법성을 밝혀주기를 청원했다. 실제로 그해 말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은 하와이 정변에 미국 외교관이 부당 개입했음을 인정하고 여왕 복위를 시도했으나, 하와이 임시정부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릴리우오칼라니는 워싱턴 D.C.까지 건너가 미국 정치인들을 직접 면담하고, 탄원청원서 운동을 물밑에서 지지하는 등, 하와이의 독립 회복을 위한 외교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작은 나라의 몰락한 군주로서 보여주기 힘든 품위 있고 끈질긴 투쟁으로 높게 평가된다.

4. 평가[편집]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하와이 국민들에게 비극의 여왕이자 불굴의 어머니로 받아들여진다. 그녀의 폐위와 왕국의 멸망은 하와이 민족사에서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았지만, 동시에 여왕이 보여준 고결한 품격과 사랑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쿠데타 세력이 총칼로 위협할 때 끝까지 유혈사태를 막고 백성을 보호하려 한 점, 그리고 폐위 후 연금 상태에서도 하와이의 권리를 국제사회에 호소한 점 등은 그녀를 희생적 지도자로 만들었다. 후대에 밝혀진 1897년 하와이 합병 반대 청원서[1]는 그녀의 영향과 국민적 존경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동시에 릴리우오칼라니는 뛰어난 예술가로서 하와이 문화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알로하 오에를 비롯해 그녀가 작곡한 다수의 곡들은 하와이의 대표 음악으로 남았고, 여왕 자신이 가사에 담은 민족애와 슬픔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그녀는 하와이어로 시와 노래를 만들고, 왕족으로서 서양식 교육을 받아 영어로도 책을 써 남기는 등 동서양 교양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하와이인들은 그녀를 문화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긴다.한편,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여왕의 헌법 개정 시도가 시기상 무모했으며, 그것이 미국계 사업가들에게 구실을 주어 왕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합법적 주권국의 군주가 국민 다수의 요구에 따라 헌법을 개정하려 한 것은 정당한 통치 행위였으며, 오히려 이를 무력으로 전복한 쿠데타 세력이 부당했다고 본다​.

이러한 재평가 속에 릴리우오칼라니는 과거 망국의 군주에서 하와이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써 격상되었다. 1900년대 초 이후 미국령 하와이에서 여왕은 오랫동안 잊혀지거나 왜곡되었으나, 20세기 후반 하와이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그녀의 생일(9월 2일)이 하와이 주 기념일로 지정되고, 동상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오늘날 릴리우오칼라니는 하와이의 마지막 군주로서 비운을 넘어 존엄을 지킨 지도자, 하와이 문화의 위대한 후원자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삶은 하와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권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역사를 상징하며, 그 이름은 하와이의 학교, 공원, 음악회 등을 통해 길이 기억되고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1] 하와이 원주민 95% 이상이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