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7대 하와이 국왕
칼라카우아
Kalākaua
파일:칼라카우아.webp
이름
다비드 라사메아 카마나나카푸 마히눌라니 날로이에후오칼라니 루미알라니 칼라카우아
(David Laʻamea Kamananakapu Mahinulani Naloiaehuokalani Lumialani Kalākaua)
출생
1836년 11월 16일
사망
1891년 1월 20일 (향년 54세)
묘소
마우나 알라 왕릉
재위
1874년 2월 12일 ~ 1891년 1월 20일
서명
파일:칼라카우아의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카이사르 카파샤케아
어머니 케오호 카롤레
배우자
카피올라니 (1863년 결혼)
종교
하와이 교회

1. 개요2. 생애3. 업적4.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데이비드 칼라카우아는 루날릴로 왕의 뒤를 이은 하와이 왕국의 7대 국왕으로, 부흥과 시련의 시대를 모두 겪은 군주이다. 그는 1874년 입법부 선거를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17년간 통치하면서 하와이 전통문화의 부흥과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음악과 무용을 즐겨 “메리 모나크(Merrie Monarch)”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하와이 문화 르네상스를 이끈 공로가 크다​.

한편 그의 말년에는 미국계 백인들의 압력으로 1887년 총칼 헌법(이른바 베이오넷 헌법)을 수용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시련을 겪었다​. 칼라카우아는 하와이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왕으로도 유명한데, 1881년에는 세계 일주를 행한 최초의 군주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재위기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황금기이자 몰락의 전조가 공존한 시대였다.

2. 생애[편집]

데이비드 칼라카우아(1836~1891)는 1874년 선거를 통해 왕위에 올라 하와이의 마지막 왕조를 연 인물이다. 그는 선거에서 전 왕비 에마 여왕을 누르고 즉위하였는데, 평소 유쾌하고 친화력 있는 성격으로 즐거운 군주(Merrie Monarch)라는 별칭을 얻었다​.

즉위 후 칼라카우아 왕은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하와이 전통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 힘썼다. 1874년 그의 대관식과 훗날 거행된 1886년 은혼식 기념 행사는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금지되었던 훌라 춤을 공공연히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칼라카우아는 하와이 왕실의 전통을 강조하면서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현실 정책에도 주력하였다.

19세기 후반 하와이 경제의 중심은 사탕수수 농업과 설탕 수출이었는데, 칼라카우아는 미국과 1875년 자유무역 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 시장에 무관세 수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호혜조약으로 하와이 경제는 호황을 맞아, 설탕 산업의 발전과 함께 많은 외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국왕은 늘어나는 국가 수입을 활용해 근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명으로 1879년에는 알리오라니 관공서 등에 전신이 설치되었고, 1881년에는 수도 이올라니 궁전에 전화기가 도입되는 등 첨단 기술을 빠르게 수용했다. 특히 이올라니 궁전은 1882년에 신축되어 1887년까지 내부에 전기 배선이 갖춰졌는데, 이는 미국 백악관보다 앞선 것으로서 당대 최고 수준의 궁전으로 손꼽혔다.

이러한 현대화는 하와이가 태평양의 진주로 불리며 국제 무대에서 위상을 높이게 했다.칼라카우아 왕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하와이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1881년 그는 세계 각지를 순방하는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 281일간 아시아, 중동, 유럽, 미국 대륙을 돌며 각국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 여정을 통해 하와이인들의 시야를 넓히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하였으며, 유능한 하와이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는 국비 유학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의학, 법률, 공학 등을 배우게 했다. 또한 일본, 중국, 포르투갈 등을 방문하여 계약 이민 노동자를 하와이 농장으로 유치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급증하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칼라카우아는 범폴리네시아 연합 구상을 내세워, 태평양 섬나라들 간의 협력을 도모하려는 야심도 보였다. 예컨대 남태평양 사모아와 조약을 추진하고, 멀리 오세아니아의 피지, 타히티의 군주들과 교류하여 하와이가 폴리네시아 문화권의 맹주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열강의 견제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1880년대에 들어 칼라카우아 왕의 통치는 점차 어려움에 직면했다. 호혜조약은 1887년 갱신되면서 미국 측에 진주만 사용권을 부여하는 조항이 추가되었고, 이로 인해 하와이 내 미국 사업가와 플랜테이션 대농장주들의 입김이 더욱 세졌다. 한편 칼라카우아는 왕실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이올라니 궁전을 짓는 등 과다한 지출로 백성들의 부담을 늘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왕의 측근 가운데 일부, 특히 워터하우스 깁슨 등은 토착 하와이인보다 외국인 이익에 기울어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와이의 백인 사업가들은 비밀결사 하와이안 리그를 조직하여 왕권을 제약하려 움직였다. 1887년 결국 무력 시위가 벌어져 칼라카우아 왕은 이들이 들이민 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개정 헌법은 왕이 총검의 위협 아래 서명했다 하여 “총검 헌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왕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내각과 입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원 선거권에 대해 엄격한 재산·소득 조건과 문해력 시험을 요구하여 대부분의 하와이 토착민과 노동자층의 참정권을 박탈했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아예 투표권을 금지한 반면, 부유한 백인 외국인은 시민권이 없어도 투표할 길을 열어주었다. 이로써 하와이 정국은 친왕파 토착 세력보다 백인 올리가르히 집단이 주도하게 되었고, 군주제는 유명무실한 형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칼라카우아 왕 본인은 1891년 1월 병환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누이 리리우오칼라니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칼라카우아의 통치는 문화적으로는 하와이 전통의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외교적으로는 하와이를 세계무대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지만, 말년의 “총검 헌법” 사태로 왕권이 흔들리며 훗날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불씨를 남겼다.

3. 업적[편집]

칼라카우아 왕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하와이 전통문화의 부흥이다. 그는 즉위 이후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억눌려 있던 하와이 고유문화를 되살리는 것을 국정 과제로 삼았다. 1883년 그의 공식 대관식은 하와이식 전통 관습에 따라 거행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금지되었던 훌라(Hula) 춤을 대대적으로 선보였다. 또한 궁정에 훌라 무용단을 조직하고 옛 의상을 재현하도록 후원하여, 훌라와 하와이 음악이 다시 공개적으로 공연되는 길을 열었다​. 칼라카우아는 스스로도 악기[1]를 연주하고 노래를 작곡할 만큼 예술적 소양이 높았으며, 그의 후원 아래 하와이의 전통 가요, 무용, 언어가 사회 전반에 걸쳐 부흥 운동을 맞이했다​.

오늘날 그를 기리는 “메리 모나크 축제”가 열려 전세계 훌라 경연이 펼쳐지는 등, 칼라카우아의 문화 부흥 정책은 하와이 정체성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가 주도의 건설 사업에서도 눈에 띄는 업적이 있다. 1882년 완공된 ‘이올라니 궁전’은 칼라카우아가 남긴 걸작이다. 그는 근대적인 왕궁의 필요성을 느껴 유럽과 미국의 여러 궁전을 참고하여 호놀룰루에 화려한 새 궁전을 세웠는데, 이올라니 궁전은 당시 세계에서 전기 등 현대 기술을 갖춘 최첨단 궁전이었다. 궁전에는 전화와 전등이 백악관보다도 먼저 설치되었고, 정교한 건축미로 하와이 왕국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이 궁전 건축은 하와이인의 자긍심을 높였으나, 왕실 재정에 무리를 주었다는 논란도 있었다.

칼라카우아는 외교와 국위선양 면에서도 활동적이었다. 1881년 그는 미주, 유럽, 아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일주 여행을 감행하여, 각국 원수들과 회견하고 하와이와의 우호를 다졌다. 이 여행 중 일왕을 만나 노동 이민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소수이지만 1885년부터 공식적인 일본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을 만나 하와이의 독립을 확인받고, 심지어 로마 교황을 알현하여 가톨릭과의 관계 개선도 도모했다. 그는 이 세계 순방으로 국제 사회에 작은 하와이 왕국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며, 귀국 후에는 자신이 접한 최신 문물과 사상을 바탕으로 국내 개혁에 참고했다.

경제적으로, 칼라카우아 시대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그는 1875년 미국과 하와이-미국 상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 시장에 무관세로 수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조약으로 하와이의 설탕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외국 자본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887년 조약 갱신 대가로 진주만을 미국에 제공하는 조건이 붙어 하와이의 주권에 일부 제약이 생기기도 했다. 어쨌든 이 기간 경제 번영으로 하와이는 인구도 증가하고 호놀룰루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4. 평가[편집]

칼라카우아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교차한다. 우선 그는 하와이 문화의 수호자로서 크게 칭송받는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억눌렸던 훌라와 전통 의식을 부활시켜 하와이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를 기념하는 “메리 모나크”라는 별칭 자체가 그가 하와이 예술에 끼친 긍정적 영향을 상징한다. 또한 이올라니 궁전 건설과 세계 일주 외교 등은 야심차고 진취적인 왕의 면모를 보여주어, 그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기억하게 한다. 실제로 칼라카우아의 통치 초기~중기는 하와이 왕국이 주권국으로서 마지막 번영을 누린 시기로 평가된다.하지만 그의 치세 말기에 벌어진 1887년 베이오넷 헌법 사건은 결정적인 오점으로 지적된다. 하와이인보다 힘을 가진 미국계 백인 지배층(주로 대농장주와 상인)들이 무력 밀병을 동원해 칼라카우아를 협박하여 헌법을 강제로 개정시킨 것으로, 이로 인해 국왕은 실권을 거의 상실하고 외국인과 소수 백인들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칼라카우아가 총구 앞에서 헌법에 서명한 굴욕은 하와이 주권이 사실상 침해당한 사건으로, 왕 개인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왕이 보다 결연히 저항하지 못하고 궁정의 부패를 방치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를 자초한 것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칼라카우아가 총리로 기용했던 월터 머레이 깁슨 등이 부패와 전횡을 일삼아 백인 상층의 반감을 산 것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의 지도력 한계가 하와이 왕국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엄격한 평가도 나온다.

한편, 칼라카우아 개인의 사치와 향락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왕실 비용을 대폭 늘려 성대한 파티와 연회를 즐겼고, 이올라니 궁전 건설 등으로 재정을 탕진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일부 백인 신문들은 그를 “방탕한 군주”로 묘사하기도 했다. 다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칼라카우아의 지출이 왕국 위신 강화와 문화 진흥을 위한 면이 컸으며, 이를 단순한 사치로 몰아간 것은 당시 인종차별적 편견이 섞인 과장이라는 시각도 제시한다.

요약하면, 칼라카우아는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군주였다. 민족 문화 부흥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이 있지만, 재위 말기 정치 권한을 상실한 것은 뼈아픈 과오로 남았다. 그는 1891년 산프란시스코 방문 중 병으로 급서하였고,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뒤를 이었다. 칼라카우아의 죽음은 하와이 왕국 몰락의 전주곡이 되었지만, 그의 유산인 전통문화 부흥은 오늘날까지 하와이 문화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5. 관련 문서[편집]

[1] 우쿨렐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