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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조선국
Joseon
파일:조선 어기.svg
어기
파일:나무위키 조선지도.png
1392년~1910년
성립이전
국호변경 이후
체제
중앙집권 왕조국가
주요군주
인구
900만 추정
수도
국가원수

1. 개요2. 역사
2.1. 건국 과정2.2. 태조 ~ 성종: 조선 전기의 국가 발전2.3. 연산군 ~ 명종: 사화의 시대2.4. 선조 ~ 인조: 붕당 정치와 양난, 조선 중기의 변화
2.4.1. 붕당 정치의 시작2.4.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2.4.3. 왜란 이후부터 호란 이전까지2.4.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2.5. 후기
2.5.1. 영조 ~ 정조: 탕평정치2.5.2. 순조 ~ 철종: 세도정치2.5.3. 고종의 즉위
2.6. 대한제국과 멸망
3. 사회4. 정치
4.1. 역대 국왕4.2. 중앙관제
5. 영토6. 군사

1. 개요[편집]

조선(朝鮮), 조선국(朝鮮國), 대조선국(大朝鮮國)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했던 국가이다.

2. 역사[편집]

2.1. 건국 과정[편집]

고려 말기 권문세족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위에선 홍건적이 아래에선 왜적들이 계속 침략했다.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가 침략을 막아내며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했다.

권문세족들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거서 개혁을 설득했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고려가 공민왕 시기 때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땅인 철령 이북 땅을 본인이 원나라를 물리쳤으니 그 땅을 이제 명나라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결심했고, 이성계는 4가지 이유[1]를 들며 반대했으나, 이는 거절되었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게된다.

그러나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이대로 진군하면 병사들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군을 결심한다.(위화도 회군)

이후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왕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사망하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2.2. 태조 ~ 성종: 조선 전기의 국가 발전[편집]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 종묘, 사직, 관아 등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운영을 주장하였다.

이후 1398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이방원)을 필두로한 군사 쿠테타가(무인 정사)발생하여 혼란이 있었다. 이때 정도전도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쿠테타를 일으킨 이방원(홋날 태종)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하여 조선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세종대에 이르어서는 최고 절정을 맏게 된다.

4대 왕 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사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4군 6진을 개척 함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섬)를 정벌했다.

1443년,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하였다. 또한 세종은 장영실 등의 인물을 등용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농사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그러나 5대 왕인 문종이 일찍 죽자 그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다.

세조대에는 세종 30년을 걸쳐 쌓아놓은 제도가 박살나고 반정을 도운 공신들에게 과도한 혜택을줘서 조선을 퇴보 시켜놓는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9대왕 성종대에 이르어서는 유학정치가 다시 부활하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맞는다.

2.3. 연산군 ~ 명종: 사화의 시대[편집]

그러나 성종에 이어 즉위한 10대 왕 연산군대에 이르어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수령들의 기강이 희미해지고 나라가 매우 어려워졌다.

결국에는 박원종 등을 필두로 한 중종을 왕위에 옹립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11대 왕이 된 중종은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3사의 언론 활동을 활성화하고 경연을 강화하여 도학 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현량과를 시행하여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 삭제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다.

이후 중종과 인종[2]의 재위 시기를 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사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1545년에 일어난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사화로써, 이로 인하여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2.4. 선조 ~ 인조: 붕당 정치와 양난, 조선 중기의 변화[편집]

2.4.1. 붕당 정치의 시작[편집]

선조 즉위 후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 청산에 대한 문제를 놓고 기성 사립과 신진 사립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척신 정치란 11세의 어린 나이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뭉정 왕후가 수령청정을 하게 되면서 임금의 외척이 되는 관료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을 말한다.

이 갈등은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심해져 신진 사립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조 전랑이란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의 전랑과 좌랑을 함께 이르던 말로, 이는 3사 인사권을 가졌으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붕당의 형성에는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 그리고 지역적 차이 등이 영향을 미쳤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기성 사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은 척신이라도 믿을 만한 인물과는 협력할 것을 주장하여 척신 정치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반면, 김효원을 중심으로 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은 동인은 척신 정치 청산에 적극적이었다. 동인에는 서경덕,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신진 세력이 적극 가담하였으며, 개성, 경상도 일대의 영남학파 선비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붕당 정치는 붕당 상호간의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면서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진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는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1589년 동인이었던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인물들이 박해를 받은 기축옥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2.4.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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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는 통일 이후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실현하고자 1592년 5월 23일[3]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전쟁초기엔 도성이 점령되고 나라의 존망을 곡정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순신의 전술과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로 보급로를 끊고 왜군을 물리치는 활약으로 전황이 뒤집힌다. 그렇게 강화 협상을 하고 돌아가는 듯 했으나, 1597년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예전만큼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1598년 이순신이 지휘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난다.

2.4.3. 왜란 이후부터 호란 이전까지[편집]

명나라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만주여진은 명나라의 역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다.

그리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제15대 왕 광해군은 후금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에 요청을 거절할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한편,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4.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편집]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의 태종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갑는다는 구실로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 지방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이에 보급로가 끊어진 후금은 먼저 강화를 제안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이후 후금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로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나라에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락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의 병사들은 성 안에 들어가 방어 준비를 했지만, 청나라의 병사들은 성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5일 만에 바로 한성까지 도착했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

인조는 생각보다 청나라가 빨리 쳐들어와서 미처 강화도로 대피하지 못하고 남한선성으로 대피했다.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또한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소현 세자와 훗날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 대군, 그리고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과 삼학사 등을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2.5. 후기[편집]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청나라군이 거쳐 간 평안도, 황해도 일대는 크게 황폐해졌고, 해마다 청나라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 동안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은 문화적 자부심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후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시대 관계에 입각하여 다양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신의 왕례가 활발하였지만, 한편에서는 조선의 문화가 명나라 못지않게 우수하다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청나라를 정벌하여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즉위한 효종은 주전론을 펼쳤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서인 세력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였다. 효종은 성곽과 무기를 정비하고 어영청 등을 설치하여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지만,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많은 대신들이 북벌을 반대하였고,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마저 사망하자, 청나라 정벌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한편 효종 때 청나라와 루스 차르국(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과 교전하였다.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매년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청나라와 자주 왕래하였다. 이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이 조선에 전래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북학론이 제기되었다.

한편, 17세기 말 국경 지역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인삼 채취와 사냥을 하다 청나라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 양국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제19대 왕 숙종 때인 1712년 조선과 청나라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압록강과 토문강[4]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2.5.1. 영조 ~ 정조: 탕평정치[편집]

이후 제20대 왕 경종이 일찍 사망하자 경종의 이복 동생이었던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였고 이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였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에도 힘을 쏟았다.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를 방지하였다.

또한, 영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자 신문고를 부활시키고,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법전인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우리나라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영조의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지만, 이는 붕당의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사실상 영조는 노론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였고, 국왕과 혼인 관계로 이어진 측근 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척신 정치의 패단이 발생하였다.

정조영조의 탕평과는 달리 준론 탕평을 펼쳐 각 당파의 주장의 옮고 그름을 명백히 가렸다. 그리고 영조 때부터 세력을 키워 온 외척과 환관 세력을 배척하여 영조 때 탕평파를 비판하였던 노론, 소론 일부와 그동안 권력에서 제외되었던 남인 계열 등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술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젊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육성하였으며, 국왕 진속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바침하는 군사 기반도 확보하였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곳에 정약용의 주도로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자신의 이상 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정조는 화성에 자주 행차하여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민생에 관한 백성의 의견을 직접 듣고자 하였으며, 이를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다양한 편찬 사업을 통해 문화 발전과 학문 장려에도 힘을 쏟았다. 경국대전,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을 만들어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고, 외교 문서와 사신의 명단 등을 모은 동문휘고, 재정 업무와 관련된 사례를 모은 탁지지, 군사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였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다양한 계층의 성장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붕당 정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정치권력이 국왕과 그 주변의 소수 정치 집단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2.5.2. 순조 ~ 철종: 세도정치[편집]

순조는 갑작스러운 정조의 사망으로 인해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는 순조를 대신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수렴청정을 하였고,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노론 벽파는 1801년 자신들의 지배지체를 위협할 수 있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고, 이를 이용하여 시파 및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 출신들을 몰아내고 국왕 직속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중심의 안동 김씨 세력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도 정치는 헌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풍양 조씨, 철종의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까지 3대에 걸쳐 60여 년동안 지속되었다.

세도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비변사의 요직을 비롯한 정부 주요 관직을, 군사적으로는 훈련도감 등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의정부와 6조, 3사 등이 힘을 잃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권 또한 크게 악화되었다.

한편, 몇몇 세도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자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아예 권력을 잃어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장반이 되었다. 이들은 몰락하여 반란을 꾀하거나 농민 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정치 세력 사이의 경쟁 구도는 물론, 정책 비판 기능 역시 마비되어 세도 가문을 견제할 집단이 없었다. 세도 가문들은 서로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국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은 미약해지고 국가 기강은 점차 해이해졌다.

이러한 정치 기강의 문란은 특히 과거제 운영과 관직 임명 과정에서 크게 나타났다. 세도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고, 과거에 급제하였더라도 새도 가문에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높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관직을 뇌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각종 비리가 만연하였다.

한편, 뇌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그 결과 순조 때인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철종 때인 1862년에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하는 등 백성의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갔다.

2.5.3. 고종의 즉위[편집]

이후 친정을 맡게 된 고종은 서양열강의 위협과 일본의 위협에서 메우 좋지않은 상황이었다 1871년 병인양요가 있었으나 조선은 무시했다 그리고 대원군이 너무 오랬동안 실권을 쥐어서 명성황후와 고종이 몰아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에 침략해서 조선은 결국 열강들과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 운동도 외부의 위협과 조선왕조의 무능에서 일어난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인 개혁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은 일본에 잠식되고 있었다.1896년 연호를 독자 연호인 건양으로 변경했다.

2.6. 대한제국과 멸망[편집]

1897년, 칭제건원을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변경했다.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광무개혁등의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 처럼 너무 늦었다.
그래도 일본의 종주국이 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한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일본이 강제 양위하게 하고, 황제가 바뀌면서 연호가 광무에서 융희로 변경됐다.순종도 3년 남짓하고 1910년 조선은 멸망한다.(경술국치)

3. 사회[편집]

4. 정치[편집]

4.1.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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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중앙관제[편집]

5. 영토[편집]

오늘날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범위가 확정된 시기가 바로 조선시대였다.

5.1.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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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사[편집]

[1]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동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원정길에 나서면 왜구 침략 올 수 있어 불가능하다. 넷째, 장마철에는 활이 고장 나고 전염병 때문에 불가능하다.[2] 겨우 8개월을 재위했으며, 이는 조선 국왕 중 가장 짧은 재위다.[3] 음력 1592년 4월 13일.[4] 現 두만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