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중국 황제[편집]
BC 221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을 통일한 진(秦)왕 정은 본래 천자의 칭호였으나 여러 나라 군주들이 자칭하며 가치가 떨어진 왕을 대체할 새로운 칭호를 필요로 했다.
그는 삼황오제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냈고,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했으니 이것이 한자문화권 황제 칭호의 시작이었다.
진시황의 제국은 그의 아들 이세황제의 치세를 거치며 붕괴되어 불과 20년을 채 못 버티고 다시 왕을 칭해야 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멸망했으나, 농민 출신의 한고제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전한)은 200여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통일중국의 지배자=황제'라는 공식을 굳혀나갔고, 일시적으로 왕망의 신나라에 찬탈당한 시기도 있었으나, 다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이 200여년의 통일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위, 촉한(계한), 동오(손오)라는 3개의 황제국이 공존하는 삼국시대가 열렸고,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킨 서진이 팔왕의 난이라는 내분과 영가의 난이라는 대규모 외침을 겪으며 붕괴되며 다시 도래한 분열기(오호십육국시대)에는 삼국시대보다도 더 많은 황제가 공존하며 황제의 위상이 전국시대의 왕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내려가기도 했다.
오호십육국시대 유목민들이 세운 침투왕조의 군주들은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일부 침투왕조 군주들은 황제가 아닌 천왕(天王)을 칭했는데, 이는 황제와 같은 권위를 확보하면서도 황제를 칭한 한족 왕조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이민족 왕조들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정착되었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황제는 중원 왕조의 대표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청조 멸망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일시적으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기도 했고, 일제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황제로 옹립한 만주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전자는 1년[1] 만에 멸망한 자칭 제국이었고 후자는 괴뢰국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중국사의 마지막 황제국은 청나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삼황오제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냈고,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했으니 이것이 한자문화권 황제 칭호의 시작이었다.
진시황의 제국은 그의 아들 이세황제의 치세를 거치며 붕괴되어 불과 20년을 채 못 버티고 다시 왕을 칭해야 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멸망했으나, 농민 출신의 한고제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전한)은 200여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통일중국의 지배자=황제'라는 공식을 굳혀나갔고, 일시적으로 왕망의 신나라에 찬탈당한 시기도 있었으나, 다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이 200여년의 통일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위, 촉한(계한), 동오(손오)라는 3개의 황제국이 공존하는 삼국시대가 열렸고,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킨 서진이 팔왕의 난이라는 내분과 영가의 난이라는 대규모 외침을 겪으며 붕괴되며 다시 도래한 분열기(오호십육국시대)에는 삼국시대보다도 더 많은 황제가 공존하며 황제의 위상이 전국시대의 왕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내려가기도 했다.
오호십육국시대 유목민들이 세운 침투왕조의 군주들은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일부 침투왕조 군주들은 황제가 아닌 천왕(天王)을 칭했는데, 이는 황제와 같은 권위를 확보하면서도 황제를 칭한 한족 왕조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이민족 왕조들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정착되었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황제는 중원 왕조의 대표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청조 멸망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일시적으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기도 했고, 일제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황제로 옹립한 만주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전자는 1년[1] 만에 멸망한 자칭 제국이었고 후자는 괴뢰국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중국사의 마지막 황제국은 청나라로 간주되고 있다.
2.2. 한국사에서의 황제[편집]
2.2.1. 고려 시대[편집]
고려는 자국 군주들에게 묘호를 올리고, 폐하라는 경칭을 사용했으며, 중화제국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2성 6부제를 사용하는 등 황제국의 제도를 도입하고 광종 시대에는 아예 공식적으로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 군주들은 대놓고 황제를 칭하기 보다는 대왕, 제왕 등의 유사 칭호를 사용했으며, 군주에게 올리는 시호 역시 황제가 아닌 대왕이었고, 광종 역시 중원 왕조와의 외교에 있어서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기에, 완전한 황제국이라기보다는 황제국과 왕국의 제도를 혼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여 본격적인 내정간섭에 시달린 원간섭기에는 관제 격하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황제국 제도의 사용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 군주들은 대놓고 황제를 칭하기 보다는 대왕, 제왕 등의 유사 칭호를 사용했으며, 군주에게 올리는 시호 역시 황제가 아닌 대왕이었고, 광종 역시 중원 왕조와의 외교에 있어서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기에, 완전한 황제국이라기보다는 황제국과 왕국의 제도를 혼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여 본격적인 내정간섭에 시달린 원간섭기에는 관제 격하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황제국 제도의 사용을 포기하게 되었다.
2.2.2. 대한제국 황제(한국 황제)[편집]
조선은 건국 이래 묘호는 꾸준히 사용했지만 황제가 아닌 대왕을 칭하고, 대외적으로는 왕을 칭하며 명나라와 청나라에 칭신했다.
1894년 조선 고종은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황제와 왕 사이의 칭호인 대군주 칭호를 만들고, 경칭 역시 전하에서 폐하로 격상하면서 황제국에 준하는 제도를 갖추었다.
1897년 고종은 공식적으로 황제를 칭하고 광무 연호를 채택하며 국호 역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했는데, 이후 청나라와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워 수교하면서 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의 통일왕조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당하며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1907년에는 고종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 융희황제가 즉위했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식민지로 전락하여 13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894년 조선 고종은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황제와 왕 사이의 칭호인 대군주 칭호를 만들고, 경칭 역시 전하에서 폐하로 격상하면서 황제국에 준하는 제도를 갖추었다.
1897년 고종은 공식적으로 황제를 칭하고 광무 연호를 채택하며 국호 역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했는데, 이후 청나라와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워 수교하면서 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의 통일왕조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당하며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1907년에는 고종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 융희황제가 즉위했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식민지로 전락하여 13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2.3. 일본 천황[편집]
2.4. 베트남 황제[편집]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월족이라 불리는 여러 남방 민족들[2]을 정벌하던 조타(찌에우다)가 진 멸망 이후 남월(남비엣) 황제를 칭한 것이 베트남 황제 칭호의 시초였다.
조타는 한 태조 고제 유방이 중국을 재통일한 이후에는 한나라에 칭신하며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고, 조타 사후의 남월 군주들은 내부적으로도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기에 남월 황제 칭호는 1대로 그쳤다.
남월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베트남이 중국 왕조들의 지배가 장기간 지속된 시대(북속기)에는 전 리 왕조(전이가)를 비롯한 일부 독립 세력 지도자들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진압되었고, 오대십국시대에 중국의 지배를 완전히 종식시킨 응오 왕조(오가)는 황제가 아닌 안남 국왕을 칭했기에 베트남의 황제 칭호는 복원되지 못했다.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응오 왕조를 역성혁명으로 전복시킨 딘 왕조(정가)의 딘보린(정부령)이 대구월(다이꼬비엣) 황제를 칭하면서부터였고, 딘 왕조 이후에는 전 레 왕조(전여가)를 거쳐 들어선 리 왕조(이가)가 대월(다이비엣) 황제를 칭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대월 황제, 대외적으로는 안남 국왕을 칭하는 체제가 18세기 말 떠이선 왕조(서산가)까지 이어졌다.
떠이선 왕조를 멸하고 1802년에 응우옌 왕조(완가)를 세운 세조 자롱 황제(가륭제) 응우옌푹아인(완복영)[3]은 천년 가까이 사용한 대월이라는 국호 대신 고대 국호인 남월을 부활시켜 청나라의 책봉을 받으려 했는데, 청조에서는 남월이 한나라에 저항한 역사를 떠올린다 하여 거절당하자 국호를 거꾸로 뒤집은 월남을 칭하면서 베트남이라는 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1839년에 대남국으로 국호를 격상시켜 베트남 황제의 공식 칭호는 대남국 황제가 되었으나, 청나라와의 외교에서는 계속 월남(베트남)을 칭하고 월남 국왕으로서 책봉을 받았는데, 청나라와 대남(베트남)의 조공 책봉 관계는 청불전쟁(1884~1885)에서 프랑스가 승리하고 대남이 청나라의 조공국이 아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하에서도 응우옌 왕조는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하며 황제 칭호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일부 황제들[4]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황제들은 무기력한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일본군의 베트남 점령과 베트남 제국 선포를 거쳐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호찌민(호지명)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베트민)이 봉기하여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보대제)를 강제 퇴위시키면서(베트남 8월 혁명) 베트남의 황제국 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조타는 한 태조 고제 유방이 중국을 재통일한 이후에는 한나라에 칭신하며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고, 조타 사후의 남월 군주들은 내부적으로도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기에 남월 황제 칭호는 1대로 그쳤다.
남월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베트남이 중국 왕조들의 지배가 장기간 지속된 시대(북속기)에는 전 리 왕조(전이가)를 비롯한 일부 독립 세력 지도자들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진압되었고, 오대십국시대에 중국의 지배를 완전히 종식시킨 응오 왕조(오가)는 황제가 아닌 안남 국왕을 칭했기에 베트남의 황제 칭호는 복원되지 못했다.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응오 왕조를 역성혁명으로 전복시킨 딘 왕조(정가)의 딘보린(정부령)이 대구월(다이꼬비엣) 황제를 칭하면서부터였고, 딘 왕조 이후에는 전 레 왕조(전여가)를 거쳐 들어선 리 왕조(이가)가 대월(다이비엣) 황제를 칭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대월 황제, 대외적으로는 안남 국왕을 칭하는 체제가 18세기 말 떠이선 왕조(서산가)까지 이어졌다.
떠이선 왕조를 멸하고 1802년에 응우옌 왕조(완가)를 세운 세조 자롱 황제(가륭제) 응우옌푹아인(완복영)[3]은 천년 가까이 사용한 대월이라는 국호 대신 고대 국호인 남월을 부활시켜 청나라의 책봉을 받으려 했는데, 청조에서는 남월이 한나라에 저항한 역사를 떠올린다 하여 거절당하자 국호를 거꾸로 뒤집은 월남을 칭하면서 베트남이라는 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1839년에 대남국으로 국호를 격상시켜 베트남 황제의 공식 칭호는 대남국 황제가 되었으나, 청나라와의 외교에서는 계속 월남(베트남)을 칭하고 월남 국왕으로서 책봉을 받았는데, 청나라와 대남(베트남)의 조공 책봉 관계는 청불전쟁(1884~1885)에서 프랑스가 승리하고 대남이 청나라의 조공국이 아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하에서도 응우옌 왕조는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하며 황제 칭호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일부 황제들[4]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황제들은 무기력한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일본군의 베트남 점령과 베트남 제국 선포를 거쳐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호찌민(호지명)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베트민)이 봉기하여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보대제)를 강제 퇴위시키면서(베트남 8월 혁명) 베트남의 황제국 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