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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고려 高麗| Koryo | ||
![]() ■ 1350년대 수복한 영토 ■ 1370년대 수복한 영토 (시대별 강역은 역사 단락 참조) | ||
시대 구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영토 | ||
역사 | ||
수도 | ||
민족 | ||
언어 | 고려어 (중세 한국어) | |
문자 | ||
국교 | ||
정치 체제 | ||
왕조 | ||
국성 | 개성 왕씨 (開城 王氏) | |
현재 국가 |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시대별 사회지배층[편집]
2.2. 건국 과정과 후삼국 통일[편집]
송악[17]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중국과의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 후 궁예의 신하가 되어 수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금성(나주) 지역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얻으면서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918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개성)을 수도로 삼고 개경이라 불렀다.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즉위 이후 웅주(공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에 투항하고, 서원경(청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태조 왕건은 지방의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신라의 화진 정책을 취하여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927년에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자 고려군은 이를 돕기 위해 출전하였지만, 공산(대구)에서 후백제군에게 패배하였다.(공산 전투)
하지만 3년 후인 930년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치하였을 때 고창(안동) 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고려는 후삼국 통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창 전투)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 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이후 고려는 936년 일리천(구미) 전투, 황산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918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개성)을 수도로 삼고 개경이라 불렀다.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즉위 이후 웅주(공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에 투항하고, 서원경(청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태조 왕건은 지방의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신라의 화진 정책을 취하여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927년에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자 고려군은 이를 돕기 위해 출전하였지만, 공산(대구)에서 후백제군에게 패배하였다.(공산 전투)
하지만 3년 후인 930년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치하였을 때 고창(안동) 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고려는 후삼국 통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창 전투)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 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이후 고려는 936년 일리천(구미) 전투, 황산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3. 초기[편집]
3. 상징[편집]
4. 정치[편집]
4.1.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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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중앙관제[편집]
4.2.1. 2성 6부제[편집]
4.2.2. 1부 4사제[편집]
5. 영토[편집]
5.1. 행정구역[편집]
6. 군사[편집]
6.1. 대외전쟁[편집]
[1] 고려의 의장기 중 하나인 봉기(鳳旗)로, 템플릿의 이미지는 1123년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봉기 관련 서술과 조선시대의 벽봉기를 바탕으로 전쟁기념관에서 복원한 것이다.[2] 고려가 멸망하기 3년 전인 창왕 1년(1389)에 발급된 보물 제2062호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에 찍힌 문양을 바탕으로 복원한 그림. 이 그림속 국새는 현존하는 단 2개뿐인 고려시대 국새 문양이다.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적혀있으며, 이 홍패 덕분에 위 사진의 국새 문양이 복원될 수 있었다.[3] 정확히는 함경북도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한반도 일대이다.(1896년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의 지역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후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 동한만 이남에 이르는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고려의 정확한 영토 경계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 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시기별 비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단,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함경북도까지 고려의 통제력과 행정력이 미쳤다고 보지는 않는다.[4] 공민왕기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 지역 일부를 일시적으로 점유하였지만 기간이 매우 짧고 점유 범위 또한 국소적으로 매우 작았기에 실질적으로 고려의 행정력이 미쳤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강역에 포함되지는 않음.[5] 본궐은 태봉국 철원성.[6] 전반부 본궐은 만월대. 임시로 연경궁, 수창궁이 쓰였다. 후반부 본궐은 만월대를 흡수한 연경궁, 공민왕 대엔 수창궁.[7]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본궐은 고려궁지.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부수도가 되었고 충렬왕 34년엔 강화현으로 격하되어 부수도의 지위도 잃었다.[8] 우왕과 공양왕대 각각 5개월 정도 고려의 정식 수도였다. 이러한 남경의 기반 덕에 바로 뒤이은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을 수 있었다.[9] 본궐은 장락궁.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태조 ~ 인종 중반 기간 동안 서경의 지위는 고려의 '부수도'가 아닌 '또 다른 수도'였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수도가 아닌 부수도로 격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지방 행정 부분 참조.[10]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류 민족. 통일신라기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할 만큼 종족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으나, 고려 후기에 고구려인 (발해인), 신라인, 백제인 등의 독자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인은 별도로 빈공과를 쳐야 했다.[11]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 정강의 변, 몽골-남송 전쟁 등의 영향으로 한인들이 유입, 한민족에 흡수되었다. 고려에 귀화해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한인들로는 쌍기, 주저, 채인범 등이 있다.[12] 말갈족은 대부분이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 때 들어왔다. 이후에도 여진족이나 거란족 중 일부가 전쟁 포로나 망명의 형태로 고려인으로 통합되었다.[13]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14] 모든 고려 군주의 공식 존호는 '대왕(大王)'이었다. 광종 재위 중 몇년 간 황제(皇帝)호로 바뀌었다가 대왕호로 돌아왔다. 고려 군주는 독자적 천하관 하에 군주로 군림했다. 고려대왕은 만승(萬乘), 성황(聖皇), 황왕(皇王), 신성제왕(神聖帝王) 등 황제 체제의 미칭을 변용하였다.[15] 광종의 칭제건원.[16] 원 간섭기 이래 인해 원 황제의 제후라는 위상이 국내적으로 구현됐으며 이에 따라 명 성립 이후에도 명에 칭신하고 제후 체제를 유지했다.[17] 개경, 지금의 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