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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 청나라 말기에 그려진 진시황의 초상화로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2] 음력으로는 1월이다. 당시 진나라에서 썼던 《전욱력》(顓頊曆)을 기준으로 이 달은 그레고리력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총 29일간이었다.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장양왕은) 시황을 진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낳았다(生始皇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生於邯鄲).”[3] 《사기》의 원문은 “七月丙寅,始皇崩於沙丘平臺。”라 하여 음력 7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병인일이 없었고 6월, 8월, 9월에 있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는 병인일을 7월이 아닌 8월의 것으로 본 다음 그것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중문 위키백과에서는 《홍범오행전》의 “六月乙丑”을 근거로 사망일을 7월 11일로 기록했다.[4] 음력 5월 26일 병오. 이 날에 장양왕이 죽었다.[5]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재위) 26년, (중략) 왕이 말하기를 "태(泰) 자는 떼고 황(皇) 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帝)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라 부르고, 나머지는 논의와 같이 하라." 했다. 제를 내려 "좋다."라 명했다." (二十六年, … 王曰:「去泰,著皇,采上古帝位號,號曰皇帝。他如議。」制曰,「可。」)[6]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씨와 이름을 합친 시황제의 본명은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에 성을 쓰는 건 여자였고, 남자는 씨를 썼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가는 미성 웅씨여서 초나라의 역대 국왕들은 웅려, 웅장 등 씨를 썼지만 초나라 출신인 진나라의 선태후는 후궁 시절 미팔자('팔자'는 후궁의 직위)로 불렸다. 후세로 내려가며 성과 씨의 구분이 불분명해져 전한시대 즈음엔 구분이 없어졌고, 이에 후세 사가들이 '영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시황제는 영성 조씨이기 때문에 원래는 '영정'이 아니라 조정이 맞는 호칭이다.[7] 《사기집해》는 서광의 주석을 인용해 시황제의 이름이 정(正)으로 된 판본이 있다고 하면서, 성충의 주석에 따라 정월(正月, 음력 1월)에 태어나 '정'으로 지었다고 해석했다. 고대에는 정(正)과 정(政)이 하나의 글자로 혼용되었다. 일례로 정(正)과 정(政)의 동자(同字)적, 다의어적 성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대부 계씨(계손씨) 집안의 제7대 영주였던 계강자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정(政)은 곧 정(正)이다(政者,正也)”, 즉 “정치(政)란 바르게 하는 것(正)이다.”라고 말한 것. 시황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소수들은 원래 이름이 정(政)이고 정(政)의 앞 글자를 따서 아명을 정(正)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진시황의 이름은 政인지 正인지 논란이 있다. 일설로만 전해지는 이름이지만, 진짜로 시황제를 조정(趙正)이라고 부르는 죽간 《조정서》가 발굴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8] 기록에 확인되는 시황제의 자녀들의 수이다.[9] 《태평어람》의 기록(#1 #2)에 따르면 키가 8척 6촌(198cm)에 허리 둘레가 7위(120cm)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연나라의 특사가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을 때, 시황제가 제때 칼을 뽑지 못해 매우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1974년에 진나라 유물 중 1m에 가까운 청동검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키가 190cm 이상인 사람만이 등 뒤에서 1미터 높이의 청동검을 뽑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어 시황제의 실제 키는 190cm 미만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출처 물론 진시황의 키는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장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