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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조선 대조선국 Joseon | |||
어기 | |||
![]() | |||
1392년~1910년 | |||
성립이전 | 국호변경 이후 | ||
체제 | 중앙집권 왕조국가 | ||
주요군주 | |||
인구 | 900만 추정 | ||
수도 | |||
국가원수 | |||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전기[편집]
고려 말기 권문세족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위에선 홍건적이 아래에선 왜적들이 계속 침략했다.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가 침략을 막아내며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했다.
권문세족들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거서 개혁을 설득했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고려가 공민왕 시기 때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땅인 철령 이북 땅을 본인이 원나라를 물리쳤으니 그 땅을 이제 명나라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결심했고, 이성계는 4가지 이유[1]를 들며 반대했으나, 이는 거절되었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게된다.
그러나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이대로 진군하면 병사들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군을 결심한다.(위화도 회군)
이후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왕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사망하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 종묘, 사직, 관아 등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운영을 주장하였다.
이후 1398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이방원)을 필두로한 군사 쿠테타가(무인 정사)발생하여 혼란이 있었다. 이때 정도전도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쿠테타를 일으킨 이방원(홋날 태종)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하여 조선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세종대에 이르어서는 최고 절정을 맏게 된다.
4대 왕 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사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4군 6진을 개척 함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섬)을 정벌했다.
1443년,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하였다. 또한 세종은 장영실 등의 인물을 등용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농사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그러나 5대 왕인 문종이 일찍 죽자 그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다.
세조대에는 세종 30년을 걸쳐 쌓아놓은 제도가 박살나고 반정을 도운 공신들에게 과도한 혜택을줘서 조선을 퇴보 시켜놓는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9대왕 성종대에 이르어서는 유학정치가 다시 부활하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맞는다.
권문세족들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거서 개혁을 설득했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고려가 공민왕 시기 때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땅인 철령 이북 땅을 본인이 원나라를 물리쳤으니 그 땅을 이제 명나라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결심했고, 이성계는 4가지 이유[1]를 들며 반대했으나, 이는 거절되었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게된다.
그러나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이대로 진군하면 병사들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군을 결심한다.(위화도 회군)
이후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왕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사망하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 종묘, 사직, 관아 등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운영을 주장하였다.
이후 1398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이방원)을 필두로한 군사 쿠테타가(무인 정사)발생하여 혼란이 있었다. 이때 정도전도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쿠테타를 일으킨 이방원(홋날 태종)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하여 조선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세종대에 이르어서는 최고 절정을 맏게 된다.
4대 왕 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사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4군 6진을 개척 함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섬)을 정벌했다.
1443년,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하였다. 또한 세종은 장영실 등의 인물을 등용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농사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그러나 5대 왕인 문종이 일찍 죽자 그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다.
세조대에는 세종 30년을 걸쳐 쌓아놓은 제도가 박살나고 반정을 도운 공신들에게 과도한 혜택을줘서 조선을 퇴보 시켜놓는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9대왕 성종대에 이르어서는 유학정치가 다시 부활하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맞는다.
2.2. 연산군의 폭정[편집]
그러나 성종에 이어 즉위한 10대 왕 연산군대에 이르어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수령들의 기강이 희미해지고 나라가 매우 어려워졌다.
결국에는 박원종 등을 필두로 한 중종을 왕위에 옹립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11대 왕이 된 중종은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3사의 언론 활동을 활성화하고 경연을 강화하여 도학 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현량과를 시행하여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 삭제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다.
이후 중종과 인종[2]의 재위 시기를 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사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1545년에 일어난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사화로써, 이로 인하여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결국에는 박원종 등을 필두로 한 중종을 왕위에 옹립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11대 왕이 된 중종은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3사의 언론 활동을 활성화하고 경연을 강화하여 도학 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현량과를 시행하여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 삭제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다.
이후 중종과 인종[2]의 재위 시기를 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사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1545년에 일어난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사화로써, 이로 인하여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2.3. 임진왜란과 계속되는 전쟁[편집]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는 통일 이후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실현하고자 1592년 5월 23일[3]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전쟁초기엔 도성이 점령되고 나라의 존망을 곡정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순신의 전술과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로 보급로를 끊고 왜군을 물리치는 활약으로 전황이 뒤집힌다. 그렇게 강화 협상을 하고 돌아가는 듯 했으나, 1597년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예전만큼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1598년 이순신이 지휘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난다.
명나라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만주의 여진은 명나라의 역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다.
그리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제15대 왕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에 요청을 거절할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한편,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선은 전쟁초기엔 도성이 점령되고 나라의 존망을 곡정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순신의 전술과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로 보급로를 끊고 왜군을 물리치는 활약으로 전황이 뒤집힌다. 그렇게 강화 협상을 하고 돌아가는 듯 했으나, 1597년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예전만큼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1598년 이순신이 지휘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난다.
명나라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만주의 여진은 명나라의 역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다.
그리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제15대 왕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에 요청을 거절할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한편,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편집]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의 태종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갑는다는 구실로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 지방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이에 보급로가 끊어진 후금은 먼저 강화를 제안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이후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로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나라에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락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난 갔으나 끝끝내 항복을 해서 전쟁이 끝난다. 그리고 그의 자손인 효종,현종대엔 참옥한 대기근 까지 닥치니 말 다했다. 그래도 효종은 어떻게든 나라를 안정시키려 노력해서 다행히 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대왕인 숙종대에는 환국 정치성행 했으나 그의 아들 21대왕 영조대에는 탕평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갖히게 해서 죽여서 다음 왕위는 정조가 맡게 된다 정조대에는 "실학"이라는 세로운 학문이 유행한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 지방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이에 보급로가 끊어진 후금은 먼저 강화를 제안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이후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로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나라에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락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난 갔으나 끝끝내 항복을 해서 전쟁이 끝난다. 그리고 그의 자손인 효종,현종대엔 참옥한 대기근 까지 닥치니 말 다했다. 그래도 효종은 어떻게든 나라를 안정시키려 노력해서 다행히 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대왕인 숙종대에는 환국 정치성행 했으나 그의 아들 21대왕 영조대에는 탕평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갖히게 해서 죽여서 다음 왕위는 정조가 맡게 된다 정조대에는 "실학"이라는 세로운 학문이 유행한다.
2.5. 후기[편집]
23대왕 순조대에는 김조순들은 필두로한 세도정치가 성행한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이상황을 타계하려 했으나 급사해서 이세도는 헌종,철종까지 60여년을 이어 온다. 이어 고종이 1863년 즉위한다 이때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그동안 폐단이 되었던 서원,환곡등을 10년 만에 개혁한다. 그러나 서양열강이 강화를 위해 1863년 신미양요,1871년 병인양요가 있었으나 조선은 무시했다 그리고 대원군이 너무 오랬동안 실권을 쥐어서 명성황후와 고종이 몰아냈다.
이후 친정을 맡게 된 고종은 서양열강의 위협과 일본의 위협에서 메우 좋지않은 상황이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에 침략해서 조선은 결국 열강들과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 운동도 외부의 위협과 조선왕조의 무능에서 일어난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인 개혁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은 일본에 잠식되고 있었다
이후 친정을 맡게 된 고종은 서양열강의 위협과 일본의 위협에서 메우 좋지않은 상황이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에 침략해서 조선은 결국 열강들과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 운동도 외부의 위협과 조선왕조의 무능에서 일어난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인 개혁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은 일본에 잠식되고 있었다
2.6. 대한제국과 멸망[편집]
1897년, 칭제건원을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 처럼 너무 늦었다.
그래도 일본의 종주국이 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한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일본이 강제 양위하게 하고, 순종도 3년 남짓하고 1910년 조선은 멸망한다.(경술국치)
그래도 일본의 종주국이 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한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일본이 강제 양위하게 하고, 순종도 3년 남짓하고 1910년 조선은 멸망한다.(경술국치)
3. 사회[편집]
4. 정치[편집]
4.1. 역대 국왕[편집]
#redirect 틀:조선 역대 국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