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인에서 넘어옴
1. 개요[편집]
2. 언어별 명칭[편집]
3. 역사[편집]
3.1. 고대[편집]
3.1.1. 갈리아인(골족)[편집]
고대 갈리아는 켈트계 민족인 갈리아인(골족)의 땅이었고 그들은 갈리아어라는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부족 사회를 형성했다.
3.1.2. 로마의 갈리아 속주[편집]
3.1.2.1. 속주 목록[편집]
-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 갈리아 아퀴타니아 속주
- 갈리아 벨기카 속주
-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3.1.2.2. 갈리아 제국[편집]
3.2. 중세 이후[편집]
5세기 초 서로마 제국의 라인강 방어선을 돌파한 게르만족은 갈리아 각지에 정착하여 부르군트 왕국,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등의 국가를 세웠다.
이들 가운데 프랑크 왕국은 최후의 로마령 갈리아 속주 세력인 수아송 왕국을 486년에 멸망시키며 갈리아 북부를 장악했고, 507년에는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서고트 왕국을 갈리아에서 축출하고[1], 534년에는 부르군트 왕국까지 멸망시킴으로써 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중세 갈리아는 사실상 프랑크와 동일시되었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9세기 이후에도 프랑크라는 명칭은 고대 지명인 갈리아를 대신하여 프랑스라는 국호의 기원이 되었다.
다만 중세 이후에도 갈리아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어가 된 건 아니라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교황청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갈리아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웠고,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서 고대 갈리아인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프랑크 왕국은 최후의 로마령 갈리아 속주 세력인 수아송 왕국을 486년에 멸망시키며 갈리아 북부를 장악했고, 507년에는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서고트 왕국을 갈리아에서 축출하고[1], 534년에는 부르군트 왕국까지 멸망시킴으로써 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중세 갈리아는 사실상 프랑크와 동일시되었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9세기 이후에도 프랑크라는 명칭은 고대 지명인 갈리아를 대신하여 프랑스라는 국호의 기원이 되었다.
다만 중세 이후에도 갈리아라는 명칭이 완전히 사어가 된 건 아니라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교황청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갈리아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웠고,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서 고대 갈리아인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 이후에도 서고트 왕국 자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8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