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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r113 Blame)

r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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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조선]]
r21
2[include(틀:다른 뜻, other1=이 문서는 대조선국(조선국)에 대한 문서입니다. 다른 뜻의 조선, rd1=조선(동음이의어))]
r1
3[include(틀: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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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width=50%><rowbgcolor=#c00d45><rowcolor=#f0ad73> '''성립이전''' || '''국호변경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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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bgcolor=#fedc89> '''[[고려|{{{#670000 고려}}}]]''' ||<bgcolor=#29176e> '''[[대한제국|{{{#fff 대한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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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width=25%><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체제''' ||<-2><width=300><tablebgcolor=#fff,#1e2023>중앙집권 왕조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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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사용자)
13||<-2> '''주요군주''' ||<-2>[[태조(조선)|태조]]
r52
14[[세종(조선)|세종]]
15[[세조(조선)|세조]]
16[[성종(조선)|성종]]
r1
17[[연산군]]
r52
18[[선조(조선)|선조]]
r1
19[[영조]]
20[[정조(조선)|정조]]
21[[고종(조선)|고종]] ||
r18
22||<-2> '''인구''' ||<-2>900만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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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수도''' ||<-2>[[개성]] -> [[한성]] ||
24||<-2> '''국가원수''' ||<-2>[[왕]] ||
r1
25
26[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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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clearfix]
r24
28== 개요 ==
r101
29''' 조선(朝鮮), 조선국(朝鮮國), 대조선국(大朝鮮國)'''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했던 국가이다.
r2
30== 역사 ==
r85
31=== 건국 과정 ===
r46
32[[고려]] 말기 권문세족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위에선 홍건적이 아래에선 왜적들이 계속 침략했다.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가 침략을 막아내며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했다.
r7
33
r53
34권문세족들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거서 개혁을 설득했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고려가 공민왕 시기 때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땅인 철령 이북 땅을 본인이 원나라를 물리쳤으니 그 땅을 이제 명나라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r46
35
r59
36이에 열받은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결심했고, [[이성계]]는 4가지 이유[* 첫째, 작은 나라가 [[명나라|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동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원정길에 나서면 왜구 침략 올 수 있어 불가능하다. 넷째, 장마철에는 활이 고장 나고 전염병 때문에 불가능하다.]를 들며 반대했으나, 이는 거절되었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게된다.
r46
37
r54
38그러나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이대로 진군하면 병사들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군을 결심한다.(위화도 회군)
r46
39
r48
40이후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고 [[왕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r46
41
r85
42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사망하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43=== [[태조(조선)|태조]] ~ 성종: 조선 전기의 국가 발전 ===
44[[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 종묘, 사직, 관아 등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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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r61
46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 운영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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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62
48이후 [[1398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이방원]])을 필두로한 군사 쿠테타가(무인 정사)발생하여 혼란이 있었다. 이때 정도전도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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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이후 쿠테타를 일으킨 [[이방원]](홋날 [[태종(조선)|태종]])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하여 조선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세종(조선)|세종]]대에 이르어서는 최고 절정을 맏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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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r68
524대 왕 [[세종(조선)|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의정부(조선)|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사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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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r100
54뿐만 아니라 [[세종(조선)|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4군 6진을 개척 함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섬]])을 정벌했다.
r65
55
r66
561443년, [[세종(조선)|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하였다. 또한 세종은 장영실 등의 인물을 등용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농사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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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그러나 5대 왕인 [[문종(조선)|문종]]이 일찍 죽자 그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조선)|세조]])가 문종의 아들인 [[단종(조선)|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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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조(조선)|세조]]대에는 [[세종(조선)|세종]] 30년을 걸쳐 쌓아놓은 제도가 박살나고 반정을 도운 공신들에게 과도한 혜택을줘서 조선을 퇴보 시켜놓는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9대왕 성종대에 이르어서는 유학정치가 다시 부활하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맞는다.
r85
61=== [[연산군]] ~ 명종: 사화의 시대 ===
r71
62그러나 성종에 이어 즉위한 10대 왕 [[연산군]]대에 이르어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수령들의 기강이 희미해지고 나라가 매우 어려워졌다.
r70
63
r72
64결국에는 박원종 등을 필두로 한 중종을 왕위에 옹립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11대 왕이 된 중종은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다.
r71
65
66조광조는 3사의 언론 활동을 활성화하고 경연을 강화하여 도학 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현량과를 시행하여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 삭제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67
68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다.
r73
69
70이후 중종과 인종[* 겨우 8개월을 재위했으며, 이는 조선 국왕 중 가장 짧은 재위다.]의 재위 시기를 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사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다.
71
72을사사화는 1545년에 일어난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사화로써, 이로 인하여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r85
73=== 선조 ~ 인조: 붕당 정치와 양난, 조선 중기의 변화 ===
r111
74==== [[붕당]] 정치의 시작 ====
r85
75====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
r57
76[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임진왜란)]
r81
77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는 통일 이후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실현하고자 1592년 5월 23일[* 음력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r57
78
r81
79조선은 전쟁초기엔 도성이 점령되고 나라의 존망을 곡정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순신]]'''의 전술과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로 보급로를 끊고 왜군을 물리치는 활약으로 전황이 뒤집힌다. 그렇게 강화 협상을 하고 돌아가는 듯 했으나, 1597년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예전만큼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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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r38
81그렇게 1598년 이순신이 지휘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난다.
r85
82==== 왜란 이후부터 호란 이전까지 ====
r91
83[[명나라]]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만주]]의 [[여진]]은 명나라의 역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다.
r81
84
85그리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제15대 왕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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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에 요청을 거절할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질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다.
88
r82
89그러나 이에 반발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한편,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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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
r83
91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의 태종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갑는다는 구실로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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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r83
93[[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 지방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이에 보급로가 끊어진 후금은 먼저 강화를 제안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94
95이후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로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96
97결국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나라]]에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락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98
r84
99조선의 병사들은 성 안에 들어가 방어 준비를 했지만, [[청나라]]의 병사들은 성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5일 만에 바로 [[한성부|한성]]까지 도착했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
100
101인조는 생각보다 [[청나라]]가 빨리 쳐들어와서 미처 강화도로 대피하지 못하고 남한선성으로 대피했다.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r86
102
103또한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소현 세자와 훗날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 대군, 그리고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과 삼학사 등을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r26
104=== 후기 ===
r91
105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청나라군이 거쳐 간 [[평안도]], [[황해도]] 일대는 크게 황폐해졌고, 해마다 [[청나라]]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 동안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은 문화적 자부심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r87
106
107이후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시대 관계에 입각하여 다양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신의 왕례가 활발하였지만, 한편에서는 조선의 문화가 [[명나라]] 못지않게 우수하다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청나라를 정벌하여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08
r88
109[[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즉위한 효종은 주전론을 펼쳤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서인 세력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였다. 효종은 성곽과 무기를 정비하고 어영청 등을 설치하여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지만,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110
r91
111이에 많은 대신들이 북벌을 반대하였고,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마저 사망하자, [[청나라]] 정벌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한편 효종 때 청나라와 [[루스 차르국]]([[러시아 차르국|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r89
112
113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과 교전하였다.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매년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청나라와 자주 왕래하였다. 이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이 조선에 전래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북학론이 제기되었다.
114
r94
115한편, 17세기 말 국경 지역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인삼 채취와 사냥을 하다 청나라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 양국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제19대 왕 숙종 때인 1712년 조선과 [[청나라]]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압록강과 토문강[* 現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r106
116==== [[영조(조선)|영조]] ~ [[정조(조선)|정조]]: 탕평정치 ====
r95
117이후 제20대 왕 경종이 일찍 사망하자 경종의 이복 동생이었던 [[영조(조선)|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였고 이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였다.
118
r97
119[[영조(조선)|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에도 힘을 쏟았다.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를 방지하였다.
r95
120
r97
121또한, [[영조(조선)|영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자 신문고를 부활시키고,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법전인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우리나라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22
r98
123[[영조(조선)|영조]]의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지만, 이는 붕당의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사실상 영조는 노론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였고, [[국왕]]과 혼인 관계로 이어진 측근 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척신 정치의 패단이 발생하였다.
124
r99
125[[정조(조선)|정조]]는 [[영조(조선)|영조]]의 탕평과는 달리 준론 탕평을 펼쳐 각 당파의 주장의 옮고 그름을 명백히 가렸다. 그리고 영조 때부터 세력을 키워 온 외척과 환관 세력을 배척하여 영조 때 탕평파를 비판하였던 노론, 소론 일부와 그동안 권력에서 제외되었던 남인 계열 등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126
r104
127또한, 학술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젊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육성하였으며, 국왕 진속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바침하는 군사 기반도 확보하였다.
128
r105
129[[정조(조선)|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곳에 정약용의 주도로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자신의 이상 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r108
130
131또한 [[정조(조선)|정조]]는 화성에 자주 행차하여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민생에 관한 백성의 의견을 직접 듣고자 하였으며, 이를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132
133[[정조(조선)|정조]]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34
135뿐만 아니라 [[정조(조선)|정조]]는 다양한 편찬 사업을 통해 문화 발전과 학문 장려에도 힘을 쏟았다. 경국대전,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을 만들어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고, 외교 문서와 사신의 명단 등을 모은 동문휘고, 재정 업무와 관련된 사례를 모은 탁지지, 군사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였다.
r109
136
137[[정조(조선)|정조]]의 탕평정치는 다양한 계층의 성장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붕당 정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138
139결국, 정치권력이 [[국왕]]과 그 주변의 소수 정치 집단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r106
140==== 순조 ~ 철종: 세도정치 ====
r110
141순조는 갑작스러운 [[정조(조선)|정조]]의 사망으로 인해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에 [[영조(조선)|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는 순조를 대신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수렴청정을 하였고,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42
143노론 벽파는 1801년 자신들의 지배지체를 위협할 수 있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고, 이를 이용하여 시파 및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 출신들을 몰아내고 [[국왕]] 직속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144
145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중심의 안동 김씨 세력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도 정치는 헌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풍양 조씨, 철종의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까지 3대에 걸쳐 60여 년동안 지속되었다.
r112
146
147세도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비변사의 요직을 비롯한 정부 주요 관직을, 군사적으로는 훈련도감 등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의정부]]와 6조, 3사 등이 힘을 잃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권 또한 크게 악화되었다.
148
r113
149한편, 몇몇 세도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자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아예 권력을 잃어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장반이 되었다. 이들은 몰락하여 반란을 꾀하거나 농민 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150
151세도 정치 시기에는 정치 세력 사이의 경쟁 구도는 물론, 정책 비판 기능 역시 마비되어 세도 가문을 견제할 집단이 없었다. 세도 가문들은 서로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국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은 미약해지고 국가 기강은 점차 해이해졌다.
r107
152==== 고종의 즉위 ====
153이후 친정을 맡게 된 고종은 서양열강의 위협과 일본의 위협에서 메우 좋지않은 상황이었다 1871년 병인양요가 있었으나 조선은 무시했다 그리고 대원군이 너무 오랬동안 실권을 쥐어서 명성황후와 고종이 몰아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에 침략해서 조선은 결국 열강들과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 운동도 외부의 위협과 조선왕조의 무능에서 일어난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건 근본적인 개혁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은 일본에 잠식되고 있었다
r85
154=== [[대한제국]]과 멸망 ===
r41
1551897년, 칭제건원을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 처럼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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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그래도 일본의 종주국이 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한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일본이 강제 양위하게 하고, 순종도 3년 남짓하고 1910년 조선은 멸망한다.(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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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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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정치 ==
159===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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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사용자)
160[include(틀:조선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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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중앙관제 ===
162[include(틀: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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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