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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인의 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1. 개요2. 명칭3. 상징4. 칭호 및 작위5. 역사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Hauser Habsburg.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왕위를 보유했던 가문.

초기에는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일개 백작 가문에 불과했으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정략결혼 등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왕위를 획득하여 카페 왕조 계열의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와 함께 유럽 최고 명문가 중 하나로 위세를 떨쳤다.

2. 명칭[편집]

가문의 고향인 합스부르크를 따서 합스부르크 가문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지만, 13세기에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위를 획득한 이후부터는 더이상 합스부르크라는 본래의 가문명이 쓰이지 않고 오스트리아 가문이라 불렸는데, 다시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널리 쓰인 것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3. 상징[편집]

4. 칭호 및 작위[편집]

5. 역사[편집]

5.1. 중세 ~ 근세 초기[편집]

5.1.1. 스위스백작 가문[편집]

라트보트 폰 클레트가우라는 인물이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지역에 성을 쌓고 백작을 칭한 것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작이었다.

초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일개 시골 백작에 불과했기에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5.1.2. 황제 배출과 오스트리아 확보[편집]

13세기 초중반 신성 로마 제국은 기존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되고 유력 공작 가문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50년 가까이 새 황제를 선출하지 못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하 한미한 백작 가문에서 황제를 추대하자고 하여 즉위한 인물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였다.

루돌프 1세는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서 정식 황제가 아닌 로마인의 왕(독일 왕)을 칭해야 했으나 교황으로부터 사실상의 황제 지위를 묵인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할 거라는 공작들의 예상과 달리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위 쟁탈전에 뛰어들어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오타카르 2세를 꺾고 오스트리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합스부르크의 급성장에 놀란 공작들은 루돌프 1세 사후의 황제 선거에서는 다른 백작 가문에서 후보를 물색하여 나사우 백작 아돌프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했으나, 아돌프 사후에는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황제로 선출되어 합스부르크가 다시 제위를 차지했다.

5.1.3. 룩셈부르크와 비텔스바흐의 제위 경쟁[편집]

알브레히트 1세 사후에는 또다른 백작 가문 출신인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대관식까지 치름으로써 정식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7세 사후에는 비텔스바흐 백작 출신 루트비히 4세바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이로써 14세기에는 룩셈부르크와 비텔스바흐의 제위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왕위를,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작위를 확보한 채 제위 경쟁을 벌였는데, 그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 선거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며 영지를 늘리는데 주력했다.

5.1.4. 합스부르크의 신성 로마 제위 독점과 영지 확장[편집]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지기스문트가 사망하자 그의 사위였던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모두 물려받은 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가 부친의 뒤를 이어 선출되고 정식 황제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합스부르크의 제위 독점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뒤를 이은 막시밀리안 1세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상속녀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함으로써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인 저지대 국가[7]를 차지했으며,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 없이도 로마인의 왕이 아닌 정식 황제를 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5.1.5. 전성기: 카를 5세 시대[편집]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리프는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로 재위하다가 요절했는데, 필리프의 아들인 카를은 카스티야의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한 후 외조부 페란도 2세의 아라곤 왕위를 물려받아 스페인 왕국을 형성했으며, 조부 막시밀리안 1세 사후에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로 선출됨으로써 신성 로마 황제위와 스페인 왕위를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보유한 군주였고, 당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아즈텍과 잉카라는 원주민 제국을 멸망시키며 식민제국을 형성했기에, 그의 치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높은 위상을 보유했던 시대였다.

다만 마냥 평탄하기만 한 건 아니라서 가문의 본진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누리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며[8], 독일과 저지대 영지에서는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가톨릭개신교 간의 종교 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5.2. 근세 이후[편집]

카를 5세가 퇴위하면서 그의 영지는 아들 펠리페 2세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5.2.1.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가문[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압스부르고 왕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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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만 보면 신성 로마 황제 칭호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문 내 서열은 카를 5세의 직계인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가문이 더 높아서 합스부르크의 본가 역할을 했으며, 실질적인 국력 역시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우세했다.

5.2.2.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편집]

페르디난트 1세의 가문으로, 본가가 아닌 방계였지만 신성 로마 제위를 사실상 독점했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가 카를로스 2세를 끝으로 단절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 6세가 합스부르크 본가 수장 지위마저 물려받게 되었다.

5.2.3.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편집]

카를 6세가 아들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마저 단절되자,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세습 영지들을 물려받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렌 가문(로트링겐 가문)의 프란츠 1세와 결혼하여 자손을 남겼기에, 그녀의 후손들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해당 가문 역시 그냥 합스부르크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재위 초반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등 비롯한 핵심 영지들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남편인 프란츠 1세를 신성 로마 황제 자리에 앉히는 것까지 성공했다.
5.2.3.1. 오스트리아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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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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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3. 제위 상실 이후[편집]

6. 관련 문서[편집]

[1]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이 보유했던 칭호인데, 프랑스 제2제국의 괴뢰로서 보유한 칭호라 흑역사로 여겨지고 있다.[2] 신성 로마 제국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사실상의 황제 또는 황태자의 작위였다.[3]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 중 하나였기에 합스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위 독점을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작위였다.[4]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 초반에는 신성 로마 황제를 경쟁 가문인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에 빼앗긴 상태라 헝가리 국왕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목상 대표 칭호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에는 비록 황제로 격상되진 않았으나 오스트리아 황제와 맞먹는 위상을 가진 칭호가 되었다.[5]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 단절 이전에는 이쪽이 합스부르크 본가 수장의 대표 칭호였다.[6] 위에서 열거한 작위들에 비하면 급이 낮지만, 가문의 기원이 된 작위다.[7] 지금의 베네룩스 3국.[8] 이때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실질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한 인물은 카를 5세 본인이 아닌 동생 페르디난트 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