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핀란드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선사시대 ~ 고대[편집]
구석기시대부터 핀란드 땅에 인류가 거주했고 신석기시대에는 독일 등 중부유럽의 신석기 문화인 아렌스부르크 문화[1]에 영향을 받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다.
선사시대 핀란드 원주민들은 우랄 산맥 일대에서 이주해온 우랄계 민족에 동화되었는데,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 일대의 원주민들은 기원후까지 살아남아 해당 민족의 언어인 고 라플란드어가 극소량의 기록이나마 남기는데 성공했다.
원주민을 대신해 핀란드를 차지한 우랄족 가운데 라플란드에 자리잡은 이들은 사미족이 되었으며, 핀란드 중남부를 차지한 이들이 바로 핀란드의 주류 민족인 핀족이 되었다.
핀족은 지리적으로 게르만족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으나, 게르만어파 언어나 북유럽 신화가 아닌 고유어인 핀란드어와 핀란드 신화를 유지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의 북게르만족(노르드인)이 국가를 형성한 이후에도 핀족은 오랫동안 부족 사회를 머물렀는데, 이는 북게르만계 국가 스웨덴이 핀란드 부족들을 각개격파하며 정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선사시대 핀란드 원주민들은 우랄 산맥 일대에서 이주해온 우랄계 민족에 동화되었는데,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 일대의 원주민들은 기원후까지 살아남아 해당 민족의 언어인 고 라플란드어가 극소량의 기록이나마 남기는데 성공했다.
원주민을 대신해 핀란드를 차지한 우랄족 가운데 라플란드에 자리잡은 이들은 사미족이 되었으며, 핀란드 중남부를 차지한 이들이 바로 핀란드의 주류 민족인 핀족이 되었다.
핀족은 지리적으로 게르만족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으나, 게르만어파 언어나 북유럽 신화가 아닌 고유어인 핀란드어와 핀란드 신화를 유지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의 북게르만족(노르드인)이 국가를 형성한 이후에도 핀족은 오랫동안 부족 사회를 머물렀는데, 이는 북게르만계 국가 스웨덴이 핀란드 부족들을 각개격파하며 정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3. 스웨덴령 핀란드[편집]
바이킹 시대 이후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인 스웨덴은 이교도 핀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성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른바 '핀란드 십자군'이라는 정복 전쟁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핀란드는 13세기부터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스웨덴이 개신교(루터 교회)를 국교로 삼자 핀란드에도 루터 교회가 전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웨덴계 핀란드인 대주교[2] 미카엘 아그리콜라가 성경을 핀란드어로 번역했다.
1742년에는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령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왕국[3]이라는 괴뢰국을 만들기도 했으나, 1년만인 1743년에 핀란드에서 철수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9세기 초 러시아는 또다시 핀란드를 노렸는데 이번에는 러시아가 승리하여 1809년에 러시아 황제가 핀란드 대공을 겸하는 핀란드 대공국이 성립되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스웨덴이 개신교(루터 교회)를 국교로 삼자 핀란드에도 루터 교회가 전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웨덴계 핀란드인 대주교[2] 미카엘 아그리콜라가 성경을 핀란드어로 번역했다.
1742년에는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령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왕국[3]이라는 괴뢰국을 만들기도 했으나, 1년만인 1743년에 핀란드에서 철수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9세기 초 러시아는 또다시 핀란드를 노렸는데 이번에는 러시아가 승리하여 1809년에 러시아 황제가 핀란드 대공을 겸하는 핀란드 대공국이 성립되었다.
4. 핀란드 대공국[편집]
5. 핀란드의 독립과 내전[편집]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핀란드 대공국 의회에서는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핀란드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주도하에 독립을 선언하려 했다.
그러나 사민당이 독립을 주도하면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질 가능성[4]을 우려한 핀란드 우파는 러시아 공화국의 케렌스키 내각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핀란드 주둔 러시아군이 무력으로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러시아 본토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케렌스키 내각이 무너지고 공산정권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세워지자, 핀란드에서는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해당 총선에서도 사민당이 원내1당을 확보했으나, 공산화를 우려한 우파 유권자들의 결집으로 인해 사민당 단독 과반은 저지되었다.
그러자 사민당의 지지 기반인 도시 노동자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수도 헬싱키에서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적핀란드) 정권을 수립했고, 우파는 이에 맞서 따로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백핀란드 정권을 수립하여 핀란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적핀란드가 수도 헬싱키를 비롯한 남부 공업지대를 장악한 상태이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까지 받아 우위를 차지했으나, 집단지도체제라서 결속력이 미약하여 백핀란드를 조기에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백핀란드는 정치적으로는 원로원장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군사적으로는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을 구심점으로 삼아 결속력을 강화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보다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한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역전시켰다.
결국 1918년 수도 헬싱키가 함락당하며 핀란드 내전은 적핀란드의 멸망과 백핀란드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살아남은 사민당 및 적핀란드 지도부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다만 적핀란드의 집권여당이던 사민당 자체는 해산을 피했는데, 이는 사민당 온건파는 내전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고, 비록 지도부가 날아갔다고 하나 도시 노동자 계층의 사민당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굳건했기에 2차 내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당 자체를 완전히 해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민당이 독립을 주도하면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질 가능성[4]을 우려한 핀란드 우파는 러시아 공화국의 케렌스키 내각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핀란드 주둔 러시아군이 무력으로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러시아 본토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케렌스키 내각이 무너지고 공산정권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세워지자, 핀란드에서는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해당 총선에서도 사민당이 원내1당을 확보했으나, 공산화를 우려한 우파 유권자들의 결집으로 인해 사민당 단독 과반은 저지되었다.
그러자 사민당의 지지 기반인 도시 노동자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수도 헬싱키에서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적핀란드) 정권을 수립했고, 우파는 이에 맞서 따로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백핀란드 정권을 수립하여 핀란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적핀란드가 수도 헬싱키를 비롯한 남부 공업지대를 장악한 상태이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까지 받아 우위를 차지했으나, 집단지도체제라서 결속력이 미약하여 백핀란드를 조기에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백핀란드는 정치적으로는 원로원장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군사적으로는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을 구심점으로 삼아 결속력을 강화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보다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한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역전시켰다.
결국 1918년 수도 헬싱키가 함락당하며 핀란드 내전은 적핀란드의 멸망과 백핀란드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살아남은 사민당 및 적핀란드 지도부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다만 적핀란드의 집권여당이던 사민당 자체는 해산을 피했는데, 이는 사민당 온건파는 내전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고, 비록 지도부가 날아갔다고 하나 도시 노동자 계층의 사민당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굳건했기에 2차 내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당 자체를 완전히 해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