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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더퍼드 B. 헤이스
Rutherford B. Hayes
파일:President_Rutherford_Hayes_1870_-_1880_Restored.jpg
본명
러더퍼드 버처드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es
출생
1822년 10월 4일
사망
1893년 1월 17일
미국 오하이오주 프리몬트
재임 기간
1877년 3월 4일 ~ 1881년 3월 4일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하버드 대학교 재학 시절2.3. 변호사 개업과 초기 법률 활동2.4. 신시내티 정착2.5. 지역 사회 활동2.6. 노예제 문제에 대한 초기 인식2.7. 공화당과의 연결 형성2.8. 남북전쟁 발발과 자원 입대2.9. 정치 활동2.10. 오하이오 주지사 취임2.11. 1876년 대선 이전2.12.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2.13. 대통령 시기2.14. 재선 불출마와 정치 은퇴2.15. 이후의 삶과 사망
3. 평가
3.1. 재건 시대 종결3.2. 행정 개혁과 공직자 임명 정책3.3. 노동 문제 대응3.4. 대통령 권위·도덕성3.5. 대외 인식과 외교·군사 정책의 한계
4. 여담

1. 개요[편집]

제19대 미국 대통령.

공화당 소속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 시대를 공식적으로 종료시킨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러더퍼드 B. 헤이스는 1822년 10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부터 그의 가정 환경은 동시대 중산층 미국인과는 다소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성격과 정치적 태도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출생 이전에 이미 부친을 상실한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점이었다. 헤이스의 부친 러더퍼드 헤이스는 아들의 출생 약 열 주 전 급병으로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친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었다.[1]

부친 러더퍼드 헤이스는 버몬트 출신으로, 법률과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오하이오로 이주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서부 개척이 진행 중이던 오하이오 지역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근면성과 도덕성을 중시하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헤이스 본인은 부친을 직접 기억하지 못했으나, 이후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형성된 부친상은 그에게 하나의 도덕적 기준점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간접적 부친상은 훗날 헤이스가 자기 절제와 책임을 강조하는 성격을 갖추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모친 소피아 버처드 헤이스는 뉴욕 출신으로,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과 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남편 사망 이후 그녀는 홀로 두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이 과정에서 친가와 외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외삼촌인 사디어스 버처드는 헤이스 가정의 실질적인 남성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며, 경제적·정신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모계 중심 가족 구조는 헤이스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작용했으며, 권위적 부권보다는 합리적 조언과 도덕적 훈육에 기반한 양육 환경을 형성했다.

헤이스 가문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상류층은 아니었으나, 안정적인 중산층적 생활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은 교육을 중시했으며, 사회적 체면과 명예보다는 개인의 성실성과 도덕적 평판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헤이스는 유년기부터 과시적 성향보다는 절제된 태도를 보였으며, 자신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입증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는 훗날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급진적 선택보다는 제도적 해결을 선호하는 그의 태도와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출생지인 델라웨어는 당시 급속히 성장 중인 오하이오의 신흥 도시 중 하나로, 동부와 서부 문화가 혼재된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개척 정신과 법질서, 종교적 윤리가 동시에 강조되던 공간이었으며, 헤이스 가문 역시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였다. 델라웨어의 사회 환경은 헤이스에게 질서와 진보가 병존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고, 이는 훗날 재건 시기 남부 정책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 형성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부친 부재라는 개인적 조건, 모계 중심의 양육 구조, 지역 사회의 도덕적 분위기는 모두 그의 성격 형성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후 전쟁과 정치라는 격변의 무대에 나아가기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그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2]

그는 출생 이전에 이미 부친을 상실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19세기 미국 가정에서 기대되던 부권 중심의 가족 구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단순한 개인적 결손을 넘어, 헤이스의 가치관과 대인 관계 형성 방식 전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부친의 역할은 생물학적·정서적 차원 모두에서 공백으로 남았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모계와 외가 친족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구조로 이어졌다.

모친 소피아 버처드 헤이스는 남편 사망 이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두 자녀의 양육과 가계 운영을 동시에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강한 종교적 신념과 엄격한 도덕 의식을 바탕으로 자녀 교육에 임했으며, 감정적 동요보다는 규범과 절제를 강조하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소피아는 자녀들에게 과도한 보호보다는 자기 통제와 책임 의식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으며, 이는 헤이스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훗날 그가 공직 생활에서 보인 신중함과 자기 절제의 기원으로 자주 언급된다.

헤이스 가정에서 남성 보호자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신한 인물은 외삼촌 사디어스 버처드였다. 그는 재정적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조언자이자 후견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버처드는 법률과 행정 문제에 밝은 인물이었으며, 헤이스가 학업과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헤이스는 단일한 부권 인물보다는 복수의 어른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판단하는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사고방식에 타인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성향을 심어 주었다.

모계 중심 가정 구조는 가정 내 의사결정 방식에도 반영되었다. 소피아는 감정적 권위보다는 논리와 도덕적 설득을 통해 자녀를 지도했으며, 가족 내에서 공개적인 대화와 설명이 비교적 중시되었다. 이러한 환경은 헤이스가 유년기부터 언어적 표현과 자기 성찰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고, 이후 방대한 일기와 서신을 남기는 성향으로 이어졌다.[3]

또한 부친의 부재는 헤이스에게 조기 성숙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가정의 정서적 안정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과 친족들은 이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며, 헤이스 역시 어린 나이부터 가정의 명예와 체면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성향은 훗날 정치적 비난과 논란 속에서도 비교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능력으로 나타났다.

19세기 초 오하이오 사회에서 과부 가정은 경제적·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 쉬웠으나, 헤이스 가문은 친족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한 위험을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는 헤이스로 하여금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공동체와 가족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후 정치 생활에서 개인적 영웅주의보다는 제도와 조직의 지속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러한 인식의 뿌리는 유년기의 가족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결과적으로 부친 사망 이후 형성된 모계 중심 성장 환경은 헤이스에게 결핍보다는 대체적 안정과 도덕적 훈육을 제공한 구조였다. 이는 그의 성격을 급진적이기보다는 신중하고, 독단적이기보다는 조정 지향적으로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전쟁과 정치라는 격변의 국면에서도 그가 극단적 선택을 피하는 경향을 보이게 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4]

헤이스가 성장한 오하이오 지역은 19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던 공간 중 하나였다. 오하이오는 공식적으로 주로 편입된 지 오래되지 않은 지역이었으며, 동부에서 이주해 온 정착민과 기존 개척 공동체가 혼재된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전통과 실험, 질서와 유동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독특한 환경을 형성했고, 헤이스는 바로 이 과도기적 사회 구조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오하이오의 초기 정착 사회는 안정된 귀족 질서나 고정된 계층 구조보다는, 개인의 성실성과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헤이스가 자란 델라웨어와 그 인근 지역은 농업과 상업이 병존하는 소규모 공동체 중심 사회였다. 이 지역에서는 혈통이나 출신보다 지역사회 기여도와 도덕적 신뢰가 개인 평가의 기준으로 작동했다. 법률가, 상인, 종교 지도자와 같은 직업군은 사회적 존경을 받았으며, 이들은 공식 직위 여부와 무관하게 지역 내 비공식 지도층으로 기능했다. 헤이스 가문 역시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어린 헤이스가 공동체 규범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오하이오 초기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강한 종교적 분위기였다. 개신교 교회는 단순한 신앙 공간을 넘어 교육과 도덕 훈육, 사회적 연대를 담당하는 중심 기관이었다. 헤이스 가문 또한 이러한 종교적 환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교회 활동은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로 인해 헤이스는 유년기부터 도덕적 판단을 개인적 감정이 아닌 공동체 규범과 양심의 문제로 인식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공직자로서 법과 제도를 도덕적 기준과 결합해 이해하려는 태도로 이어졌다.

정착 사회 특유의 자율성과 책임 의식 역시 헤이스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지방 정부와 연방 정부의 영향력이 아직 제한적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역 사회 문제는 주민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쟁 조정, 치안 유지, 빈민 구호와 같은 문제는 공식 기구보다는 공동체 합의와 비공식 협력에 의해 처리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헤이스는 제도 이전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중시하는 관점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이는 그가 이후 정치 생활에서 법률과 행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는 태도를 보이게 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또한 오하이오는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표면화된 지역이었다. 자유주로서의 정체성과 남부와의 지리적 근접성은 지역 사회 내에서 노예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 충돌을 낳았다. 헤이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에는 이 문제가 아직 전국적 분열로 폭발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지역 담론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헤이스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현실적 갈등과 타협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5]

교육 환경 역시 정착 사회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공립 교육 제도는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지만, 지역 사회는 기본적인 문해력과 도덕 교육을 중시했다. 학교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규율, 근면, 시민적 덕목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기능했으며, 헤이스 역시 이러한 교육을 통해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책임을 분리되지 않은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그가 훗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을 특정 계층의 대변자라기보다는 공공의 봉사자로 인식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공동체 규범과 도덕적 기준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경험은 그의 사고방식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후 전쟁과 재건, 정치적 혼란이라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극단보다는 질서 있는 타협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게 한 중요한 토대였다.[6]

헤이스의 유년기 교육은 제도적으로 정비된 공교육 체계보다는, 지역 사회와 가정이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19세기 초 오하이오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통일된 교육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학교의 질과 내용은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였다. 헤이스가 다닌 초기 학교들 역시 소규모 교습소나 지역 공동체가 운영하는 학교가 대부분이었고, 교육의 목적은 학문적 전문성보다는 기본적인 문해력과 도덕적 훈육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헤이스로 하여금 학문을 개인적 출세 수단이 아니라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유년기 교육에서 가장 강조된 요소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성서 교육이었다. 성서는 단순한 종교 교재를 넘어 도덕 교과서로 활용되었으며, 아이들은 이를 통해 선과 악, 책임과 의무라는 개념을 조기에 접했다. 헤이스 역시 성서 낭독과 암송을 통해 언어 감각과 논리적 사고를 함께 훈련받았다. 이는 훗날 그가 법률 문서와 정치 연설에서 보인 정확하고 절제된 문장 구성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종교적 언어는 그의 사고 속에서 추상적 신앙보다는 실제 행동 지침으로 기능했다.

모친 소피아 버처드 헤이스는 교육 문제에 있어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학교 교육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정 내에서 직접 자녀의 학습을 점검하고 지도했다. 특히 도덕적 판단과 자기 통제에 관한 문제에서는 반복적인 대화를 통해 자녀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했으며, 체벌이나 강압보다는 설명과 설득을 중시했다. 이러한 가정 교육 방식은 헤이스에게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보다는 합리적 이해를 중시하는 태도를 심어 주었다. 이는 이후 군과 정치 조직 속에서도 상급자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그 정당성을 숙고하는 성향으로 이어졌다.

종교적 분위기는 가정뿐 아니라 지역 사회 전반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교회는 예배 장소를 넘어 교육과 사회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헤이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정기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설교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윤리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고, 이는 헤이스에게 신앙과 시민 의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게 하기보다는,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기준으로 확장해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7]

유년기 교육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자기 규율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규칙 준수와 질서 유지를 중시했으며, 학생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고 평가받는 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헤이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게 되었고, 충동적 행동보다는 숙고된 선택을 선호하는 성향을 형성했다. 이는 훗날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고, 충분한 검토 후 결정을 내리는 그의 행태로 이어졌다.

교육 환경의 한계 역시 헤이스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지방 교육은 자료와 교사 모두 부족했으며, 이는 학습에 있어 개인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헤이스는 부족한 환경을 보완하기 위해 독서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조기부터 독학 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독서 중심 학습은 그가 이후 고등 교육 기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교육 기회의 불균형을 체감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공교육과 제도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는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한다.

헤이스의 청소년기는 유년기에 형성된 교육적·종교적 환경이 보다 구체적인 성격과 가치관으로 정착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헤이스는 외향적이거나 즉각적인 리더십을 드러내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숙고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는 부친 부재 속에서 형성된 자기 통제와, 공동체 규범을 중시하는 교육 환경이 결합된 결과로 해석된다. 그는 또래 집단 내에서 눈에 띄는 행동보다는 신뢰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이후 정치적 인간관계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청소년기 헤이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강한 자기 성찰 성향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판단을 돌아보는 데 익숙했으며,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성향은 당시 또래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험적 기질이나 과시적 행동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헤이스는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분출하기보다는 글과 사색을 통해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이는 훗날 방대한 일기와 서신을 남기는 습관으로 발전하게 된다.[8]

가치관 형성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도덕과 책임에 대한 인식이었다. 헤이스는 청소년기부터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안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관점을 내면화했다. 이는 종교적 교육에서 강조된 양심 개념과, 오하이오 지역 사회의 상호 의존적 구조가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규칙을 단순히 외부에서 강요된 질서로 인식하기보다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받아들여야 할 약속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군과 정치 조직 속에서도 법과 규율을 존중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청소년기 헤이스는 학업에 있어서도 성실함을 보였으나, 경쟁적 우월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성적이나 평가보다는 학습 그 자체의 의미를 중시했으며, 특히 역사와 도덕 철학적 주제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단기적 성취보다 장기적 원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강화시켰다. 이는 훗날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즉각적인 인기보다 제도적 안정과 도덕적 정당성을 고려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의 헤이스는 권위에 대한 복합적인 태도를 형성했다. 그는 교사나 종교 지도자와 같은 전통적 권위를 존중했으나, 그 권위가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할 경우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준도 함께 내면화했다. 이는 무조건적 복종이 아닌 합리적 승인에 기반한 존중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은 훗날 정치적 타협 과정에서 명령과 압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제도의 합법성과 도덕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자세로 발전했다.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 헤이스는 폭넓은 교류보다는 제한적이지만 깊이 있는 관계를 선호했다. 그는 친구 선택에 있어 신중했으며, 일단 형성된 관계는 장기간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각적인 이익보다는 신뢰와 지속성을 중시하는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평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청소년기 말기에 이르러 헤이스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점차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 성공보다는 공적 영역에서의 역할에 의미를 두는 경향을 보였으며, 법률과 공공 봉사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이상주의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이후 그가 전쟁과 정치라는 위험과 부담이 큰 영역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리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9]

2.2. 하버드 대학교 재학 시절[편집]

헤이스의 생애에서 하버드 대학교 재학 시절은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격과 가치관이 보다 체계적인 학문적 틀 속에서 정련되는 단계였다. 그는 지방 정착 사회의 비교적 제한된 교육 환경을 거쳐 동부 엘리트 교육의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지적·사회적 충격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버드는 단순한 학업 기관이 아니라, 당시 미국 정치·법률·지성의 핵심 네트워크가 응축된 공간이었으며, 헤이스는 이곳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과 국가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헤이스는 하버드 입학 과정에서 이미 성실함과 학업 능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그는 화려한 재능이나 즉각적인 두각보다는, 꾸준한 노력과 규율을 통해 성과를 쌓는 유형의 학생이었다. 하버드의 엄격한 교육 과정은 이러한 성향과 잘 맞아떨어졌으며, 그는 강의와 독서, 토론을 통해 체계적인 사고 능력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특히 논리적 글쓰기와 고전 독해에서 안정적인 성취를 보였는데, 이는 이후 법률 문서와 정치적 보고서를 다루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

하버드의 교육 환경은 헤이스에게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문적 성취를 두고 경쟁했지만, 동시에 토론과 공동 학습을 통해 사고를 확장해야 했다. 헤이스는 과도한 경쟁보다는 협력적 학습에 익숙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자신의 논증 속에 흡수하는 능력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훗날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 상대 진영의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성향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하버드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헤이스는 이곳에서 다양한 지역 출신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자신이 성장한 오하이오와 동부 사회의 차이를 직접 체감했다. 동부 엘리트 학생들 사이에서는 가문과 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동시에 학문적 성취와 공적 봉사에 대한 이상도 강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헤이스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출신 배경보다 개인의 도덕성과 능력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10]

학문적으로 그는 역사, 철학, 고전 과목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이들 과목은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 국가와 제도의 성립, 법과 도덕의 관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스는 이를 통해 정치와 법률을 개인적 성공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그가 법조인과 정치인으로서 선택을 내릴 때 일관되게 드러난다.

하버드 재학 시절 헤이스는 성격 면에서도 눈에 띄는 급진적 변화보다는 기존 성향의 심화를 보였다. 그는 여전히 절제되고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사교적 명성보다는 신뢰를 중시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전보다 분명한 자기 의견을 형성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기 성찰 성향이, 고등 교육을 통해 공적 담론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헤이스에게 국가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능력을 제공했다. 지역 사회 중심의 시야를 넘어, 연방 전체의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바라보는 훈련은 훗날 그가 남북전쟁과 재건이라는 전국적 위기를 다루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하버드에서의 교육은 그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기보다는, 복잡한 문제를 장기적·구조적으로 분석하는 태도를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개인적 도덕성과 학문적 훈련을 결합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이는 이후 법률가·군인·정치인으로서의 선택 전반을 지탱하는 핵심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11]

헤이스는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학부 과정을 마친 이후, 곧바로 법학 수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선택은 개인적 흥미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역할을 중시해 온 그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서 법률은 정치·행정·경제를 연결하는 핵심 영역이었으며, 법학 교육은 곧 엘리트 공공 인재 양성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헤이스 역시 법률을 통해 사회 질서와 도덕을 제도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그의 진로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법학 교육은 오늘날과 달리 통일된 제도 아래 운영되지 않았으나, 동부 명문 교육 기관을 중심으로 체계화가 진행 중이었다. 헤이스는 하버드에서 습득한 고전 교육과 논리 훈련을 바탕으로 법률 이론을 학습하면서, 규범과 판례를 단순 암기가 아닌 사고 체계로 이해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법률 조항을 개별 규칙의 집합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질서로 인식했으며, 이는 이후 그가 헌법과 법률을 해석하는 태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법학 수학 과정에서 헤이스는 엄격한 자기 규율을 유지했다. 그는 학업과 독서를 체계적으로 병행하며, 감정적 판단보다는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 결론 도출을 중시했다. 이는 청소년기부터 형성된 자기 성찰 성향이 전문 교육을 통해 강화된 결과였다. 법률 교육은 그에게 개인적 신념을 제도적 언어로 변환하는 방법을 제공했으며, 이는 훗날 정치적 신념을 정책과 행정 결정으로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엘리트 교육 환경은 헤이스의 사회적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법학 수학 과정에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동료들과 교류하며, 미국 사회의 계층적·지역적 차이를 보다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엘리트 의식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공공 봉사자로서의 책임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헤이스는 엘리트 교육이 특권의 근거가 아니라 봉사의 의무를 수반해야 한다는 관점을 점차 확립해 나갔다.[12]

법학 수학 시기 헤이스는 정치적 급진성보다는 제도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법이 사회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변화는 합법적 절차와 점진적 개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남북전쟁과 재건 시기의 혼란 속에서도 그가 급격한 제도 변형보다는 법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 시기는 헤이스가 글쓰기 능력을 본격적으로 연마한 시기이기도 했다. 법률 문서 작성은 정확성과 명확성을 요구했으며, 그는 불필요한 수사나 감정적 표현을 배제하는 문체를 습득했다. 이러한 문체는 훗날 그의 연설과 공식 문서에서 드러나는 절제되고 간결한 표현 방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대중적 선동보다는 설득과 설명을 중시하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도덕적 이상을 법과 제도라는 현실적 틀 속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이는 이후 법조인, 군인,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작용하게 된다.[13]

2.3. 변호사 개업과 초기 법률 활동[편집]

헤이스는 법학 수학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학문적 준비가 실제 사회 현실과 맞닿는 단계였으며, 법률가로서의 태도와 직업 윤리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시점이었다. 그는 즉각적인 명성과 수익을 좇기보다는,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쌓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선택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젊은 법률가로서는 다소 느린 길이었으나, 헤이스의 성향과 가치관에는 부합하는 방식이었다.

헤이스의 초기 개업지는 신시내티를 중심으로 한 오하이오 지역이었다. 이곳은 상업 활동과 인구 이동이 활발한 도시로, 법률 수요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토지 분쟁, 상거래 계약, 채권·채무 문제 등 실무적 사건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헤이스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법률이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생활과 직결된 규범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는 사건 하나하나를 단순한 수입원으로 취급하기보다는, 법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장치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초기 법률 활동에서 헤이스가 보여준 특징은 신중함과 성실성이었다. 그는 사건 수임에 있어 무리한 확장을 피했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업무를 처리하려 했다. 이는 단기적 수입 면에서는 불리했으나, 의뢰인과 지역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헤이스는 법정에서 과장된 수사나 공격적 전략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실관계와 법적 근거를 차분히 제시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정치적 논쟁에서도 감정적 대립을 피하고 제도적 논리를 앞세우는 그의 스타일과 연결된다.

이 시기 헤이스는 법률가로서의 윤리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법을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기술로 보는 시각에 비판적이었으며, 변호사의 역할을 사회적 책임과 결부시켜 이해했다. 특히 약자나 법적 지식이 부족한 의뢰인을 대할 때에는 절차와 결과를 충분히 설명하려 했고, 무리한 소송을 권유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행보는 지역 사회에서 그의 평판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 법률 활동은 그의 정치적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사회 문제가 단순히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현실의 간극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법률은 이 간극을 조정하는 도구였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원칙과 현실적 판단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그가 공직에 진출할 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절충을 모색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또한 변호사 개업 초기의 경험은 헤이스에게 인내와 장기적 시야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빠른 성공보다 지속 가능한 경력을 중시했고, 단기적 실패나 한계를 개인적 좌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훗날 정치적 패배나 비판을 경험했을 때도 비교적 담담하게 대응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법률 활동을 통해 그는 시간과 신뢰가 결합될 때 권위가 형성된다는 교훈을 체득했다.

2.4. 신시내티 정착[편집]

헤이스가 신시내티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개인적·사회적 입지가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신시내티는 19세기 중반 오하이오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중 하나로, 상업과 교통, 정치 활동이 집중된 지역이었다. 동부와 서부를 잇는 요충지라는 특성상 다양한 계층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공간이었고, 이러한 환경은 헤이스에게 법률가로서뿐 아니라 공적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현실적 무대를 제공했다.

신시내티 사회는 비교적 개방적이면서도 명망과 평판을 중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헤이스는 이곳에서 단기간에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인 신뢰 축적을 택했다. 그는 법률 활동을 통해 상인, 소상공인, 중산층 시민들과 폭넓게 접촉했고, 이 과정에서 지역 사회의 실제 요구와 갈등 구조를 체감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이후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 추상적 이념보다 현장의 현실을 고려하는 태도를 갖추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신시내티 정착 이후 헤이스는 지역 사회 조직과도 점차 연결되기 시작했다. 종교 단체, 자선 활동, 시민 모임 등은 단순한 사교 공간을 넘어 정치적 의견 교환과 공적 신뢰 형성의 장으로 기능했다. 헤이스는 이러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과도한 자기 과시나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그가 특정 진영의 선동가가 아니라 신중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14]

이 시기 헤이스는 개인적 삶에서도 안정기를 맞이했다. 신시내티에서의 정착은 단순한 직업적 선택을 넘어, 장기적인 생활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가정과 직업, 사회 활동을 비교적 균형 있게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급격한 성공보다는 지속 가능한 삶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정치적 압박과 비난 속에서도 개인적 일상을 유지하려는 그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인식 측면에서 신시내티는 헤이스에게 중요한 학습 공간이었다. 이 도시는 노예제 문제, 경제 정책, 연방과 주의 권한 관계 등 당대 미국 사회의 핵심 쟁점들이 일상적으로 논의되던 장소였다. 헤이스는 법률가로서 이러한 논쟁을 직접 관찰하며, 극단적 주장보다는 제도적 타협이 실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그가 공화당 정치에 참여할 때 급진적 노선을 경계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또한 신시내티는 헤이스가 정치 진출 가능성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지역 사회에서 쌓은 신뢰와 네트워크는 그에게 공적 역할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며, 그는 이를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장기적 가능성으로 인식했다. 헤이스에게 정치란 개인적 야망의 실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사회적 책임의 연장선에 놓인 것이었다.

이 시기를 통해 그는 지역 사회의 신뢰를 자산으로 축적했고, 이는 훗날 전쟁과 정치라는 더 큰 무대에 나아갈 수 있는 실질적 토대가 되었다. 신시내티에서의 경험은 헤이스에게 사회 현실의 복잡성과 점진적 변화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선택 전반에 지속적으로 반영된다.[15]

그는 신시내티에 정착해 법률가로서 일정한 입지를 다져 가던 시기에 루시 웨브 헤이스와 결혼했으며, 이 결합은 단순한 사적 관계를 넘어 그의 가치관과 사회적 행보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결혼은 감정적 유대뿐 아니라 도덕적 신념과 사회적 책임 의식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루시 웨브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높은 교육 수준과 강한 자기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는 종교적 신념이 깊었으며, 절제와 도덕을 중시하는 생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향은 헤이스의 가치관과 높은 수준의 조화를 이루었고, 부부 관계는 일방적 의존보다는 상호 존중과 의견 교환에 기반해 형성되었다. 헤이스는 가정 내에서 권위적 가장의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도덕적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중시했다. 이는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일반적인 가부장적 가족상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16]

결혼 이후 형성된 가정은 헤이스에게 정서적 안정의 공간이 되었다. 법률 활동과 사회적 책임이 점차 확대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정을 단순한 사적 휴식처가 아니라 삶의 중심으로 인식했다. 가정 생활은 그의 일상에 규칙성과 절제를 부여했으며, 이는 외부 활동에서 감정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이스는 가족과의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이후 군 복무와 정치 생활 중에도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가정 형성은 헤이스의 사회적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정된 가정과 도덕적 생활 방식은 지역 사회에서 그의 평판을 더욱 공고히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가정은 개인의 인격과 신뢰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으며, 헤이스 부부는 절제와 책임을 상징하는 사례로 인식되었다. 이는 그가 정치적 가능성을 논의할 때, 개인적 품성에 대한 신뢰를 이미 확보한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헤이스 부부는 교육과 도덕 훈육을 중시했다. 이들은 자녀들에게 권위적 명령보다는 설명과 모범을 통해 가치를 전달하려 했으며, 이는 헤이스가 자신의 유년기 경험에서 계승한 방식이기도 했다. 가정은 그에게 사회 문제를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공간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삶과 직결된 현실 문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교육·사회 정책에 관심을 갖는 태도로 연결된다.

결혼 생활은 헤이스의 정치적 판단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개인적 야망이나 단기적 성공이 가정의 안정과 도덕적 원칙을 해칠 수 있는 상황을 경계했다. 이는 그가 정치적 선택에서 급진적 도박을 피하고, 장기적 책임을 고려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가정은 헤이스에게 단순한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결정을 평가하는 기준점으로 기능했다.

헤이스는 개인적 안정 위에서 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이후 전쟁과 정치라는 격변 속에서도 그의 판단과 행동을 지탱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17]

2.5. 지역 사회 활동[편집]

헤이스는 법률가로서 신시내티에 정착한 이후, 단순히 생계형 변호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사회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며 점진적으로 공적 명망을 쌓아 나갔다. 당시 신시내티는 오하이오주에서도 상업과 교통이 집중된 도시로, 다양한 계층과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헤이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법률 업무를 수행하며 지역 상공인, 종교 지도자, 교육계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고, 이는 이후 정치 진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의 초기 사회 활동은 대체로 자선과 시민 단체 참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헤이스는 지역 교회와 연계된 구호 활동에 참여했으며, 빈곤층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중산층 개신교 사회가 중요하게 여겼던 도덕성과 공공 봉사의 가치와 맞닿아 있었고, 헤이스 자신도 이를 개인적 신념의 실천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개 연설이나 과도한 정치적 주장보다는 조용한 참여를 선호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신중하고 절제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역 사회에 심어 주었다.

법률가로서의 평판 역시 점차 확고해졌다. 헤이스는 상업 분쟁과 재산권 관련 사건을 주로 다루었는데, 극적인 변론보다는 논리적 구성과 문서 정리에 강점을 보였다. 이는 신뢰를 중시하는 의뢰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며, 그를 급진적이거나 편향된 인물로 보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특정 정치 세력과 노골적으로 결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법률가이자 시민으로서의 중립적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지역 사회에서의 명망은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노예제 확산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오하이오 전역에서 확대되면서, 헤이스는 공개적으로 극단적인 발언을 삼가면서도 노예제의 도덕적 문제에 공감하는 입장을 주변에 드러냈다. 그는 급진적 폐지론자와는 거리를 두었으나, 노예제가 공화국의 장기적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중도적 공화당 지지층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헤이스의 사회적 평판은 개인적 성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사교적이기보다는 신중하고 절제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사적인 자리에서도 과도한 언행을 삼갔다. 이러한 모습은 격렬한 정치 논쟁이 빈번하던 시기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인물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장차 공직 후보로 거론되기에 적합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지역 사회 일각에서는 그를 장래의 정치 지도자로 평가하는 시선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지역 사회 활동과 명망 축적은 이후 남북전쟁 발발과 함께 헤이스가 공적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는 이미 지역 내에서 도덕성과 신뢰를 갖춘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는 군 복무와 정치 진출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 단계에서 형성된 평판은 일시적인 인기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사회적 신뢰라는 점에서 이후 생애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8]

2.6. 노예제 문제에 대한 초기 인식[편집]

헤이스가 노예제 문제를 인식하게 된 과정은 급진적 전환이나 특정 사건에 의한 각성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도덕적 판단과 사회적 경험의 누적에 가까웠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을 접했으나, 즉각적으로 강경한 폐지론자의 위치에 서지는 않았다. 오하이오 지역 사회는 자유주로서 노예제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남부와의 경제적·정치적 연계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헤이스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점진적으로 입장을 다듬어 나갔다.

법률가로 활동하던 시기, 헤이스는 노예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을 빈번히 맡지는 않았으나, 도망 노예 문제와 연방 법률의 적용을 둘러싼 논쟁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도망노예법을 둘러싼 갈등은 오하이오와 같은 접경 자유주에서 특히 민감한 사안이었으며, 연방 정부의 권한과 개인의 도덕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헤이스는 법률가로서 연방법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노예제를 보호하기 위해 법이 사용되는 현실에 대해 점차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노예제를 단순한 지역 문제나 경제 제도로 보지 않았다. 헤이스는 노예제가 미국 공화정의 도덕적 기반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점차 확고히 해 갔다. 다만 그는 노예제의 즉각적 폐지가 가져올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충격을 우려했으며, 이로 인해 공개적으로 급진적 주장을 펼치지는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중서부 지역의 중산층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흔한 입장이었다.

종교적 배경 역시 그의 인식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적 윤리관 속에서 성장한 헤이스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정의를 강조하는 설교와 담론에 익숙했다. 노예제를 개인의 죄악으로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구조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제도라는 점에 대해서는 점차 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 그의 글과 사적인 발언에서는 노예제가 결국 국가 전체의 도덕적 부담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헤이스의 노예제 인식은 정치적 계산보다는 개인적 성찰의 성격이 강했다. 그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의 강령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현실 정치 속에서 실현 가능한 방향을 모색하려 했다. 이로 인해 그의 입장은 때때로 모호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극단적 대립을 피하고자 하는 신중함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가 남북전쟁에 자원 입대하고, 전후 재건 문제를 다룰 때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 시기의 노예제에 대한 인식은 헤이스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기초를 형성했다. 그는 노예제를 명백한 도덕적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이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점진성과 제도적 안정성을 중시했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거치며 변화와 수정을 겪게 되지만, 초기 단계에서 형성된 신중한 문제 인식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공적 판단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기능했다.[19]

2.7. 공화당과의 연결 형성[편집]

헤이스가 공화당과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과정은 명확한 입당 선언이나 극적인 정치적 결단보다는, 시대적 흐름과 개인적 신념이 점차 맞물리며 이루어진 점진적 변화에 가까웠다. 그는 처음부터 정당 정치의 중심에 서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법률가이자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한 채 정치적 방향성을 탐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1850년대 중반으로 갈수록 노예제 확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정치적 선택의 필요성이 점차 분명해졌다.

헤이스는 초기에는 휘그당의 온건한 전통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연방 정부의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급진적 변화를 경계하는 태도는 그의 성향과 잘 부합했다. 그러나 휘그당이 노예제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과 약화를 겪자, 그는 이 정당이 더 이상 국가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되던 공화당은 노예제 확산 반대라는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며, 헤이스의 도덕적 인식과 현실적 판단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공화당과의 연결은 지역 정치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신시내티와 오하이오 전역에서 활동하던 법률가, 언론인, 종교 지도자들 중 다수가 공화당 창당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헤이스 역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정치 흐름을 체감했다. 그는 당 조직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토론회나 비공식 모임을 통해 정책 방향과 정치적 원칙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관여했다. 이러한 신중한 접근은 그를 당내에서 극단적 인물로 인식되지 않게 만들었고,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중도 인사라는 평가를 얻게 했다.

헤이스가 공화당과 연결되면서 강조한 핵심 가치는 연방의 유지와 법치의 존중이었다. 그는 노예제 반대를 단순한 도덕적 구호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연방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그는 남부 주들의 분리 움직임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했으며, 국가 통합을 해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러한 관점은 공화당 내에서도 비교적 온건하지만 원칙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공화당과의 연결은 헤이스 개인의 사회적 위치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유능하지만 조용한 지역 법률가로 알려졌던 그가, 점차 공적 사안에 대한 판단을 요구받는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공개 연설이나 선동적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신중한 논리와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발언을 통해 점차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했다. 이 시점부터 헤이스는 단순한 시민이 아니라, 장차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주변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헤이스는 이미 연방과 헌정 질서의 수호라는 가치에 동의하고 있었고, 이는 전쟁이 시작되자 그가 주저 없이 북군에 자원 입대하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정치적 연결은 단기적인 당적 선택을 넘어, 그의 생애 전반을 규정하는 정치적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헤이스가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발을 들이기 직전까지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위치는, 급진적 개혁가나 대중적 선동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신시내티와 오하이오 지역에서 안정된 중산층 전문직으로 인식되었으며, 법률가·시민·가정인이라는 세 역할이 비교적 균형 있게 결합된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위치는 눈에 띄는 정치적 명성을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 신뢰를 축적하는 데 유리한 기반이 되었다.

당시 오하이오의 지역 사회는 남북 간 정치적 긴장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일상적 행정과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헤이스는 이 환경 속에서 법률 업무를 통해 지역 상공인과 중산층 가정의 이해관계를 폭넓게 접했고, 이를 통해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쌓아 갔다. 그는 특정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로 보이기보다는, 분쟁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에 익숙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 야망을 의심받지 않게 하는 동시에, 공직 후보로서의 잠재적 신뢰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헤이스의 사회적 평판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도덕성과 절제된 태도였다. 그는 개인적 생활에서 사치를 피했고, 공개적 논쟁에서도 상대를 공격하는 표현을 삼갔다. 종교 공동체와의 연계 역시 그를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인물로 보이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는 격렬한 당파적 언사가 빈번하던 시대 상황과 대비되며, 오히려 안정과 질서를 중시하는 유권자층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정치 진출 이전의 헤이스는 이미 공화당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지만, 당 조직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그는 당의 이념적 방향에는 공감했으나, 공개적인 당직이나 선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당내 파벌 싸움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특정 정치 노선에 고착된 인물이라는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립적 위치는 이후 정치적 기회가 찾아왔을 때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북 간 갈등이 무력 충돌로 치닫는 조짐이 보이자, 그의 안정된 시민적 삶은 더 이상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연방과 헌정 질서에 대한 그의 인식,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쌓아 온 도덕적 신뢰는 그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를 예고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헤이스는 아직 공직자가 아니었지만, 이미 공적 책임을 수행할 준비가 된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8. 남북전쟁 발발과 자원 입대[편집]

1861년 남부 주들의 분리 선언과 함께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헤이스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미 노예제 확산과 연방 분열에 대해 우려를 표해 왔으며, 공화국의 존속이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을 단순한 정치적 갈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소식이 전해지자 헤이스는 이를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도덕적 책임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군 복무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었다.

헤이스는 안정된 법률가 생활과 가족을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념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치적 계산이나 장래의 명성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자원 입대를 결정했다. 당시 중산층 전문직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헤이스의 결단은 주변 인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오하이오에서 조직된 북군 부대에 합류하며 장교로 임관했다. 초기 임관 과정에서 헤이스는 군사적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력과 책임감을 인정받아 비교적 빠르게 지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군 복무를 정치적 발판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병사들과 동일한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부하 장병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전쟁 초기의 혼란 속에서 헤이스는 군 생활의 가혹함을 빠르게 체감했다. 훈련 부족, 보급 문제, 지휘 체계의 미숙함은 북군 전반에 걸쳐 나타난 문제였으며, 그는 이를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헤이스는 전쟁의 목적이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라, 연방의 존속과 헌정 질서를 지키는 데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그가 군 복무를 단기적 사건이 아닌, 역사적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헤이스의 자원 입대는 이후 그의 정치적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경력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특히 후방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던 인물들과 구별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이후 정치 무대에 복귀했을 때에도 자신을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전쟁을 통해 국가에 봉사한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 시기의 선택은 그의 생애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도덕적 책임 의식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헤이스는 자원 입대 이후 북군 장교로 임관하며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인물은 아니었으나, 법률가로서 길러진 조직력과 책임감, 그리고 절제된 판단력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지휘 체계에 적응했다. 초기에는 신병 훈련과 부대 편성 과정에 집중했으며, 전쟁 초기에 흔히 나타났던 혼란과 미숙함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헤이스는 이론보다는 실제 상황에 기반한 판단을 중시하는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초기 복무 시기의 헤이스는 병사들과의 관계 형성에 특히 신경을 썼다. 그는 장교로서의 권위를 앞세우기보다는, 병사들과 동일한 생활 조건을 감내하며 신뢰를 쌓으려 했다. 훈련과 행군, 야영 과정에서 병사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며, 무리한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현실적인 지시를 내리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태도는 부대 내에서 그를 단순한 지휘관이 아니라, 함께 위험을 감수하는 인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전투 경험이 축적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긴장과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헤이스가 소속된 부대는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에 앞서 경계 임무와 소규모 교전에 투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전장의 긴장감을 몸소 느끼게 된다. 총성과 포성,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군사적 판단의 중요성을 절감했으며, 문서와 규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장의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지휘관으로서 더욱 신중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헤이스는 복무 단계에서부터 부대의 사기 유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전투력의 핵심 요소로 인식했고, 불필요한 체벌이나 모욕적 대우를 피하려 했다. 대신 명확한 목적 의식과 연방을 수호한다는 대의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전쟁의 의미를 병사들과 공유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시 군 내부에서 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헤이스의 개인적 성향과 결합되며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복무는 헤이스에게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단기간에 영웅적 명성을 얻기보다는, 꾸준한 복무와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신뢰를 축적하는 길을 택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반복되는 전투와 부상, 그리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북군 장교로서의 초기 복무는 헤이스가 단순한 시민 자원병을 넘어, 전쟁의 현실을 이해하는 지휘관으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헤이스는 북군 장교로서 복무가 본격화되면서 여러 차례 실전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몸으로 겪게 되었다. 초기의 경계 임무와 소규모 교전 단계를 지나, 그는 점차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전쟁은 추상적인 국가적 대의가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현실로 다가왔다. 헤이스는 전투 상황에서도 후방에 머무르기보다는 가능한 한 전면에서 부대를 지휘하려 했고, 이러한 태도는 그를 반복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전투 경험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지휘관으로서의 책임 의식이었다. 헤이스는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할 때 스스로도 동일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실제 전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적의 사격을 받았고, 그중 일부는 직접적인 부상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 차례 중상에 가까운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장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지휘를 이어 간 일로 동료 장교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부상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에 그치지 않았다. 치료 과정에서 헤이스는 전쟁이 개인의 삶에 남기는 상흔을 깊이 체감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전쟁관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투의 영웅적 측면보다는, 반복되는 희생과 상실에 주목하게 되었고, 전쟁이 결코 낭만화될 수 없는 사건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정치 활동에서 군사적 수사를 절제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스는 부상 후에도 복귀를 반복하며 전선에 남기를 선택했다. 이는 개인적 명예욕보다는, 전쟁 중 이탈이 병사들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는 지휘관이 위험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부대 전체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무모한 인물로 보이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지휘관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기여했다.

전투와 부상의 반복은 헤이스의 성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신중해졌으며, 전투 계획 수립 시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그는 단순한 용기만으로는 부대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지휘관으로서의 판단력과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인식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 군사 문제와 국가 위기를 다룰 때에도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한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단순한 시민 자원병에서, 전쟁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인물로 변모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도덕적 신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공적 삶에서 책임과 희생을 강조하는 태도의 근원이 되었다.

헤이스는 남북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단순히 전투에 참여하는 장교를 넘어, 부대 운영과 지휘 전반에서 두드러진 리더십을 보이는 인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는 전투에서의 용기뿐만 아니라, 병력 관리와 사기 유지, 그리고 규율과 인간적 배려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지휘 방식으로 점차 명성을 쌓았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속한 부대 내부뿐 아니라 상급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게 만드는 요소였다.

헤이스의 리더십은 일상적 군 생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는 병사들의 생활 여건과 보급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으며, 부당하거나 비현실적인 명령이 내려질 경우 이를 조정하려 노력했다. 이는 지휘관으로서의 권위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병사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결과로 이어졌다. 병사들은 그를 무모하게 희생을 강요하는 인물이 아니라, 전투의 위험을 공유하면서도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지휘관으로 인식했다.

전투 상황에서 헤이스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급박한 순간에도 과도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부대를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혼란 속에서도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전투 후에도 부대 재정비가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동료 장교들은 그를 전술적 천재로 묘사하기보다는, 안정적인 판단력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으로 평가했다.

헤이스에 대한 평가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굳어졌다. 그는 상급자에게 과도하게 아첨하지 않았고, 동시에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이러한 태도는 군 내부의 복잡한 위계 질서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의 진급과 보직 배치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투에서의 반복된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 중 형성된 평판은 이후 헤이스의 정치적 경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스로를 전쟁 영웅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았지만, 군 복무 경험은 그를 공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특히 전쟁의 고통과 희생을 직접 경험했다는 점은, 그가 이후 정치 무대에서 국가 통합과 질서 회복을 강조할 때 설득력을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남북전쟁을 직접 겪으며 형성된 가치관과 현실 인식은, 전쟁 이전의 신중한 법률가이자 시민이었던 모습과는 다른 깊이를 부여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제도와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지키려는 개인의 책임 있는 행동이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군 복무는 헤이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정치인들과 달리, 연방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직접 감내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이는 이후 선거 과정에서 그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으며, 특히 참전 용사와 그 가족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헤이스 자신은 이러한 이미지를 과도하게 활용하려 하지 않았지만, 군 복무 경력은 자연스럽게 그의 공적 신뢰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전쟁 경험은 그의 정치적 성향에도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는 급진적 개혁이나 격렬한 당파적 대립이 가져올 혼란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로 인해 질서와 안정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전쟁이 사회에 남긴 상처를 경험한 그는,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점진적이고 제도적인 접근을 선호했다. 이러한 태도는 전후 재건 문제와 인종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군 복무는 또한 헤이스에게 지도자의 책임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을 심어 주었다. 전장에서의 지휘 경험은 명령 하나가 수많은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했고, 이는 그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에도 신중함을 유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단기적인 인기나 정치적 이익보다는,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때로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모한 정책을 피하게 만드는 안전장치로 작용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연방의 분열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직접 확인했으며, 이로 인해 국가 통합을 최우선 가치로 삼게 되었다. 이는 이후 그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며, 지역적·당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발언과 행동을 시도하는 배경이 된다.

그는 전쟁을 개인적 영광의 원천으로 삼기보다는, 공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로 해석했다. 이러한 인식은 전후 정치 입문과 공직 수행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었으며, 그를 남북전쟁 이후 세대 정치인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2.9. 정치 활동[편집]

헤이스는 남북전쟁이 종결된 직후, 군 복무를 마치고 민간 생활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향후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전쟁 이전까지 그는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공직 역시 가능성 중 하나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국가의 존속과 헌정 질서가 얼마나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한 그는, 단순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책임이 다해지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된다.

전쟁 직후의 미국 사회는 전례 없는 혼란과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 파괴된 남부 지역, 그리고 노예 해방 이후의 사회 질서 재편 문제는 국가 전체가 감당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헤이스는 이러한 상황을 개인적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며, 전쟁 동안 쌓은 경험과 신뢰를 공적 영역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점차 확고히 했다. 그의 정치 참여 결정은 특정 직위나 권력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전후 국가 재건 과정에 책임 있게 관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정치 참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신중함을 유지했다. 즉각적인 출마 선언이나 대중적 행보를 택하기보다는, 지역 사회와 공화당 내부의 흐름을 관찰하며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했다. 군 복무를 통해 형성된 명성은 이미 그를 잠재적 공직 후보로 부각시키고 있었지만, 헤이스는 이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 단순한 명예나 보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전쟁을 겪은 인물로서 더욱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인식했다.

정치 참여 결정에는 주변 인사들의 권유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지역 공화당 인사들과 참전 용사들은 헤이스가 지닌 신중함과 책임감, 그리고 전쟁 중 보여 준 리더십이 전후 정치에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그는 자신이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적 기대와 책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 참여를 개인적 야망이 아닌 공적 의무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쟁 직후 정치에 발을 들였지만, 극단적 주장이나 급진적 개혁을 앞세우기보다는 안정과 질서를 중시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전후 정치 무대에서 중도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그는 군 복무를 통해 얻은 경험과 신뢰를 개인적 자산으로 남겨 두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기로 선택했다. 이 선택은 이후 연방 하원의원, 주지사, 그리고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정치 경로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전쟁과 정치가 그의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선상에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20]

헤이스는 군 복무를 통해 얻은 명성과 도덕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섰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반복된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이러한 경력은 오하이오 지역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전쟁 영웅이라는 상징성은 전후 혼란 속에서 질서와 안정, 그리고 국가 통합을 중시하던 분위기와 맞물려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공화당의 지지를 받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1864년 선거에서 그는 오하이오 제2선거구를 기반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치러졌으며,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 수행과 연방의 유지, 그리고 노예제 문제였다. 헤이스는 선거 과정에서 전쟁의 정당성과 연방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군 복무 경험을 통해 자신이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임을 부각시켰다. 이 점은 경쟁 후보들과의 차별화 요소로 작용했고, 결국 비교적 안정적인 표 차로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하원에 입성한 헤이스는 스스로를 적극적인 입법가라기보다는 성실한 행정형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그는 화려한 연설이나 강경한 당파적 발언보다는, 위원회 활동과 표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당시 연방 의회는 전쟁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 있었으며, 급진 공화파와 온건파 사이의 노선 차이도 뚜렷했다. 헤이스는 이 가운데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연방의 권위를 유지하되 과도한 보복이나 급진적 사회 개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의정 활동에서 그가 특히 중시한 사안은 참전 군인에 대한 예우와 전후 사회의 안정이었다. 그는 군인 연금 문제와 전쟁 피해 보상과 관련된 법안에 관심을 기울였고, 전쟁을 통해 희생된 이들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는 자신의 군 경력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였으며, 유권자들과의 정서적 연결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연방 재정의 건전성에도 일정한 관심을 보이며, 전쟁으로 급증한 국가 부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실무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노예제 폐지 이후의 문제, 즉 해방된 흑인들의 지위와 남부 재건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명확한 급진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헤이스는 헌법적 틀 안에서 시민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했지만, 연방 정부가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남부 사회를 재편하는 데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재건 정책을 종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사상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의 그는 아직 재건 문제의 핵심 인물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 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헤이스의 하원의원 경력은 길지 않았지만, 정치적 전환점으로서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는 의회를 통해 연방 정치의 실제 작동 방식을 직접 경험했고, 당파 간 갈등과 타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몸소 체득했다. 또한 전국적 이슈를 다루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인에서 전국 정치인으로 시야를 확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오하이오 주지사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하원의원 시절은 단순한 경력의 한 구간이 아니라, 전후 미국 정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모색하던 형성기의 핵심 단계로 평가된다.[21]

헤이스의 연방 하원의원 시절은 짧았지만, 그의 정치적 성향과 의회 내 위치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 시기였다. 그는 스스로를 당파적 투사라기보다는 헌정 질서와 행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인물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의회 활동 전반에 일관되게 반영되었다. 당시 연방 의회는 남북전쟁의 여파 속에서 급진 공화파와 온건 공화파, 그리고 전쟁 패배 이후 재편 중이던 민주당 세력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공간이었다. 헤이스는 이 복잡한 구도 속에서 급진적 언사나 과격한 입법보다는 조정과 절제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의회에서 그의 입지는 두드러진 지도자라기보다는 신뢰 가능한 중견 의원에 가까웠다. 그는 주요 상임위원회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출석과 안정적인 표결 행태를 통해 동료 의원들로부터 일정한 신뢰를 얻었다. 연설 빈도 역시 높은 편은 아니었고, 공개 연단보다는 위원회 내부 논의나 비공식 협의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성향은 정치적 존재감을 단기간에 크게 부각시키는 데에는 불리했지만, 반대로 극단적 진영 논리에 휘말리지 않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정책적 성향 면에서 헤이스는 연방의 권위 유지와 법치의 회복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그는 전쟁을 통해 연방이 분열될 수 있다는 위험을 직접 체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국가 통합을 해칠 수 있는 급진적 시도에 대해 본능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노예제 폐지 이후의 사회 재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해방된 흑인의 법적 지위 보장이라는 원칙에는 동의했으나, 연방 정부가 장기간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해 남부 사회를 관리하는 방식에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재건 정책 종결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초기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헤이스는 또한 행정부와 의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보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의회가 행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잠식하는 것을 경계했고, 반대로 대통령 권력이 헌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역시 우려했다. 이러한 균형 감각은 남북전쟁이라는 비상 상황 속에서 일시적으로 확대된 권력이 전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전시 체제가 평시 헌정 질서로 복귀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의원들과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정당 내부에서의 위치 역시 뚜렷한 파벌에 속하지 않는 형태였다. 급진 공화파는 그를 지나치게 신중한 인물로 평가했고, 반대로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은 그의 도덕적 엄격성과 반노예제 이력 때문에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중간적 위치는 정치적 고립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으나, 동시에 다양한 세력과 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헤이스는 이러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정치적 경험을 축적하는 데 집중했다.

이 시기의 의회 경험은 헤이스에게 정치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이상과 원칙만으로는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타협과 인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그는 하원에서 체득했다. 동시에 의회 정치의 속도와 효율성에 대한 회의도 점차 커졌는데, 이는 이후 그가 행정 책임자로서 보다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주지사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하원의원으로서의 그의 입지와 성향은, 이후 행정부 중심의 정치 경로를 선택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능했다.[22]

헤이스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남북전쟁의 종결과 함께 본격적인 재건 문제가 제기되던 과도기였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큰 정치적 과제는, 분열되었던 연방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결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재건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노예제 폐지 이후 남부 사회의 정치·사회·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연방 의회 내부에서도 극심한 의견 대립이 나타났다. 헤이스는 이 논쟁의 중심에서 급진적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성향에 기초해 점진적인 입장을 형성해 나갔다.

그의 재건 인식은 무엇보다도 전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전선에서 남부 지역을 직접 목격했고, 패배한 사회가 겪는 혼란과 피로를 체감했다. 이러한 경험은 남부를 도덕적으로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헤이스는 연방의 승리가 남부 사회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장기적인 국가 통합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화해와 제도적 복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전후 즉각적인 강경 조치를 주장하던 급진 공화파와는 분명히 다른 시각이었다.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된 흑인의 지위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복합적인 태도를 보였다. 헤이스는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제도였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전쟁의 결과로 자유를 얻은 이들에게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 보호의 방식과 범위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그는 연방 정부가 남부 각 주의 정치와 사회 전반을 장기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오히려 반발을 키우고, 궁극적으로 흑인의 안전과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인식은 법과 제도의 정착을 중시하는 그의 행정적 사고와 맞닿아 있었다.

의회에서 진행된 재건 관련 논의 속에서 헤이스는 헌법적 정당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확대된 연방 권력이 평시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건이 헌법 질서의 예외 상태로 고착되는 것을 우려했다. 남부 주들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경우 연방으로 복귀하는 과정은, 보복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급진 개혁의 선봉에 서게 하지는 않았지만, 장기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헤이스의 재건 인식은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의회 활동과 지역 여론, 그리고 개인적 성찰을 통해 점진적으로 다듬어진 결과였다. 그는 북부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재건에 대한 피로감이 확산되고 있음을 인식했고, 무제한적 개입이 정치적 지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고려했다. 동시에 남부에서 보고된 폭력과 혼란, 특히 해방 흑인을 대상으로 한 탄압 소식은 그로 하여금 단순한 방임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두 가지 인식 사이에서 그는 균형점을 찾으려 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재건에 대한 그의 입장은 훗날 대통령 재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재건을 도덕적 과제이자 정치적 현실 문제로 동시에 인식했으며, 이상과 실행 가능성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방향으로 사고했다. 하원의원 시절의 경험은 그에게 재건 문제를 추상적 논쟁이 아닌, 실제로 관리해야 할 행정적 과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기는 단순한 의견 형성 단계를 넘어, 헤이스의 정치적 정체성이 구체화되는 과정으로 평가된다.[23]

2.10. 오하이오 주지사 취임[편집]

연방 하원의원으로서의 짧지만 밀도 있는 경험을 마친 헤이스는 점차 입법부보다는 행정부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을 굳혀 갔다. 의회에서 체감한 당파 갈등과 느린 의사결정 구조는 그에게 일정한 회의를 안겨 주었고, 반대로 행정 책임자로서 직접 정책을 집행하는 위치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개인적 성향과도 맞물려 있었는데, 헤이스는 원래부터 이론적 논쟁보다는 실제 문제를 관리하고 조정하는 역할에 더 적합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하이오 주 정치 무대는 그에게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로 떠올랐다. 오하이오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거점 중 하나였으며,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었다. 동시에 재건 문제, 노동 문제, 재정 관리 등 복합적인 현안이 집중된 지역이기도 했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도덕적 이미지와 전쟁 경력을 갖춘 인물을 주지사 후보로 내세우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유리했으며, 헤이스는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헤이스의 주지사 출마는 갑작스러운 결정이라기보다는, 점진적으로 형성된 정치적 흐름의 결과였다. 그는 하원의원 재임 중에도 오하이오 지역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꾸준히 유지했고, 주 정치의 현안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전후 경제 재건과 사회 안정이라는 문제는 연방 차원보다는 주 정부 차원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실질적 행정 경험을 쌓을 기회로 보였다. 이러한 판단은 그가 주지사직을 단순한 경력의 한 단계가 아니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선거 과정에서 헤이스는 급진적 개혁가나 강경한 당파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전쟁을 통해 검증된 충성심, 개인적 청렴성, 그리고 절제된 개혁 의지를 강조했다. 이는 전후 혼란과 급격한 변화에 피로를 느끼고 있던 유권자들의 정서와 비교적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오하이오가 직면한 문제를 이념적 투쟁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질서 회복과 점진적 개선의 대상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선거 전략은 대립보다는 안정과 신뢰를 중시하는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일정한 호응을 얻었다.

주지사 선거에서 그의 군 복무 경력은 여전히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다. 전쟁 영웅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위기 상황에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동시에 그는 전쟁의 상처를 직접 경험한 인물로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재건 이후 사회 통합을 중시하던 오하이오 유권자들의 기대와 맞닿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헤이스는 공화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되었고, 치열한 선거 끝에 오하이오 주지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의 당선은 개인적 성취인 동시에, 공화당이 전후 정치에서 어떤 노선을 취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급진적 변혁보다는 관리와 조정, 그리고 제도적 안정에 무게를 두는 인물이 주지사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북부 정치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결과였다.

연방 의회라는 집단적 공간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정 단위를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는 단순한 전쟁 영웅이나 전직 하원의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정 책임자로서 평가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경로 역시 이 주지사 경험을 토대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24]

오하이오 주지사로 취임한 헤이스는 화려한 개혁가나 강경한 정치 지도자보다는, 질서와 효율을 중시하는 행정 책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주지사직을 이념적 투쟁의 장으로 삼기보다는, 전쟁 이후 혼란을 겪고 있던 주 정부의 행정 체계를 안정시키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성격과 경력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으며, 특히 연방 의회에서 체득한 정치적 타협의 중요성이 행정 운영 전반에 반영되었다.

헤이스가 주지사로서 가장 중시한 원칙은 공정성과 청렴성이었다. 그는 공직 임명에서 노골적인 연줄이나 당파적 보은 인사를 경계했고, 최소한의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인물을 기용하려 노력했다. 이는 당시 주 정부 전반에 만연해 있던 정치적 후견 관계와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려는 시도였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당내 일부 세력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동시에 주 행정의 신뢰성을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헤이스는 단기간의 정치적 이익보다는 장기적 제도 안정에 무게를 두었다.

행정 운영의 실제 과정에서 그는 세밀한 관리와 절차를 중시했다. 주 예산 편성과 집행 과정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재정의 투명성을 높이려 했다. 남북전쟁 이후 주 정부의 재정은 군사 지출과 사회적 혼란의 여파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재정 관리 능력은 주지사의 핵심 역량으로 평가되었다. 헤이스는 과도한 확장보다는 균형 재정을 지향하며, 주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법과 질서의 회복을 중요한 행정 과제로 인식했다. 전후 사회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범죄와 사회적 갈등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고, 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었다. 헤이스는 경찰과 사법 기관의 기능을 존중하면서도, 과도한 강압보다는 제도적 안정과 절차 준수를 강조했다. 이는 군 복무 경험에서 비롯된 강경 이미지와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으며, 평시 행정 책임자로서의 현실적 판단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입법부와의 관계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하이오 주의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공간이었고, 주지사의 권한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 헤이스는 의회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공개적인 대립보다는 비공식 협의와 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방식은 즉각적인 성과를 내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기적으로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행정 운영 전반에서 드러난 그의 스타일은 점진적 개선이었다. 그는 한 번에 큰 변화를 추진하기보다는,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수정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전후 사회가 이미 충분히 불안정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급격한 개혁이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그는 안정 속에서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행정 운영 방식은 대중적 인기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평가를 받는 데에는 성공했다. 헤이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기보다는 신뢰 가능한 관리자로 인식되었고, 이는 그가 이후에도 주 정치에서 계속해서 중용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주지사로서의 이 경험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실질적인 행정 능력을 입증하는 단계였으며, 훗날 대통령 재임 시 행정부 운영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사로 작용한다.

헤이스의 오하이오 주지사 재임 기간은 남북전쟁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사회 구조 변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철도, 제조업, 금융 부문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오하이오는 경제적 활력을 얻는 동시에 새로운 갈등 요인들을 안게 되었다. 노동 조건의 악화, 임금 문제, 실업과 빈곤, 그리고 재정 압박은 주 정부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대두되었고, 헤이스는 이러한 복합적 문제에 행정 책임자로서 대응해야 했다.

노동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은 기본적으로 질서 유지와 중재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실제 경제적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파업과 집단 행동이 사회 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헤이스는 주 정부가 노동과 자본 어느 한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기보다는,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노동자 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급진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무력 진압을 기본 수단으로 삼는 강경 노선과도 일정한 선을 긋는 방식이었다.

재정 문제 역시 그의 주지사 재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전후 오하이오 주는 인프라 복구와 사회 안정 비용으로 인해 재정 부담이 누적된 상태였다. 헤이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무리한 지출 확대를 경계하며, 주 정부의 신용과 장기적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강조했고, 단기적인 인기 정책보다는 재정 구조의 안정화를 우선시했다. 이러한 태도는 즉각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일부 유권자들에게는 소극적으로 비칠 수 있었지만, 행정 책임자로서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서도 그는 점진적 접근을 선호했다. 전쟁 이후 사회에는 참전 군인과 그 가족,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 도시 빈곤층 등 다양한 지원 대상이 존재했다. 헤이스는 이들에 대한 공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주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포괄적 복지 정책에는 신중했다. 그는 민간 자선과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일정 부분 존중하면서, 주 정부는 제도적 틀을 제공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 대응 과정에서 헤이스는 행정 권한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주지사가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경계했고,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지를 비교하며 최선과 차선을 구분하려 했다. 이는 정치적 수사보다는 행정적 판단을 중시하는 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그는 사회 갈등이 방치될 경우 더 큰 정치적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상황을 관리하려 했다.

노동·재정·사회 문제에 대한 이러한 대응은 헤이스를 급진적 개혁가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안정 지향적 행정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기여했다. 그는 변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이는 이후 전국 정치 무대에서 그가 비교적 온건한 대안으로 부상하는 배경이 되었다. 오하이오 주지사 시절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대통령 재임 중 노동 분쟁과 재정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25]

헤이스의 오하이오 주지사 재임은 그에게 본격적인 행정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주 정치의 구조적 한계 또한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 시기였다. 그는 주지사로서 다양한 현안을 다루며 행정 책임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과정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리고 제도적 제약이 정치 행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감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의 정치적 사고를 보다 현실주의적으로 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주 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진 한계는 권한의 분산이었다. 오하이오 주 정부는 주지사 개인에게 집중된 권력이 크지 않았고, 입법부와 각종 위원회, 지방 정부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스는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실제로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다수의 이해관계자와 타협해야 했다. 이러한 구조는 독단적 통치를 방지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일관된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그는 주지사직이 결단력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정당 정치의 한계 또한 그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로서 그는 당의 지지를 기반으로 집권했지만, 당 내부의 파벌과 이해관계는 언제나 행정 운영을 제약했다. 그는 당내 급진 성향 인사들과 보수적 인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고, 어느 한쪽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은 그를 강한 당 지도자로 부각시키기보다는, 조정자이자 관리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주 정치 경험을 통해 그는 대중 정치의 성격도 보다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유권자들은 장기적 제도 개혁보다는 단기적 성과와 명확한 메시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그의 신중하고 점진적인 행정 스타일과 반드시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헤이스는 정치적 인기와 행정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으며, 때로는 비인기 결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정치적 결단의 대가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을 심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지사 시절은 그의 정치적 역량을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재정 관리, 노동 문제, 사회 안정 등 복합적인 사안을 다루며 행정 능력을 입증했고, 이는 공화당 내부에서 신뢰를 쌓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극단적 노선을 피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행정을 유지한 점은, 전국 정치 무대에서 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동시에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헤이스는 강한 정치적 색채나 대중적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않았고, 이는 주 정치에서나 전국 정치에서 모두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불리했다. 그는 스스로를 개혁의 상징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문제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인식했으며, 이 점은 정치적 서사 형성 측면에서는 약점으로 남았다.

오하이오 주 정치에서의 경험은 헤이스에게 명확한 교훈을 남겼다. 제도와 현실을 무시한 이상은 지속될 수 없으며, 반대로 이상 없는 관리 역시 정치적 설득력을 잃기 쉽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이후 전국 정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주지사 시절에 축적된 경험과 드러난 한계는, 그가 대통령이라는 더 큰 책임의 자리로 이동하게 되는 전 단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6]

2.11. 1876년 대선 이전[편집]

헤이스가 전국 정치의 중심 무대로 다시 떠오르기 직전, 미국 사회는 남북전쟁 이후 약 10여 년간 지속된 재건 체제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전쟁의 상처는 제도적으로는 상당 부분 봉합되었지만, 정치적·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연방 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1876년 대통령 선거를 단순한 정권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전후 질서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둘러싼 분수령으로 만들었다.

재건 정책에 대한 피로감은 북부와 남부를 가리지 않고 확산되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연방 군대 주둔과 공화당 주 정부에 대한 반감이 지속되었고, 북부에서도 장기화된 개입과 반복되는 정치적 갈등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특히 선거를 둘러싼 폭력과 부정 의혹, 그리고 주 정부 운영의 혼란은 재건이 더 이상 이상적인 도덕 프로젝트로만 인식되기 어려운 현실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안정’과 ‘정상화’라는 키워드는 점점 더 강한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경제적 상황 역시 정치 환경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남북전쟁 이후의 고속 성장 국면은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둔화되었고, 재정 문제와 실업, 노동 불안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 모두 재정 건전성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경제 운영에 대한 정치적 책임론이 대두되었다. 유권자들은 더 이상 이상적 구호보다는, 경제적 안정과 질서 회복을 기대하게 되었다.

정당 정치의 측면에서 공화당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전쟁 승리와 노예제 폐지라는 역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으로 인한 피로와 내부 분열이 누적되고 있었다. 급진 공화파와 온건파의 노선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고, 행정부 내부의 부패 문제는 당 전체의 도덕적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당은 대중적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보다는, 신뢰와 안정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는 후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민주당 역시 완전히 유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쟁 책임과 분리주의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민주당 후보는 재건에 대한 반대와 지방 자치의 회복을 강조할 수 있었지만, 전국적 차원에서 연방 보존과 통합을 위협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 이로 인해 선거 구도는 명확한 이념 대결이라기보다는, 신뢰성과 안정성의 경쟁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정치 환경은 헤이스와 같은 인물에게 상대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전쟁 영웅이자 행정 경험을 갖춘 인물로서, 극단적 노선과 거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동시에 개인적 청렴성과 도덕성에 대한 평판은, 공화당이 직면한 부패 이미지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여겨졌다. 헤이스는 전국적 인지도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그만큼 기존 정치 갈등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1876년 대선을 앞둔 정치 환경은 결국 ‘누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보다는 ‘누가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재건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경제적 불안, 그리고 정당 정치에 대한 피로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헤이스는 스스로를 시대의 구원자로 내세우기보다는, 갈등을 완화하고 제도를 정상화할 수 있는 관리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인식은 곧 그의 대선 후보 부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12.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편집]

헤이스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개인적 야망의 결과라기보다는, 공화당 내부의 정치적 계산과 시대적 요구가 맞물린 산물이었다. 그는 전국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유력한 대선 주자로 공개적으로 내세운 적도 드물었다. 그러나 1876년을 앞두고 공화당이 직면한 상황은, 기존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보다 비교적 갈등에서 자유롭고 도덕적 이미지를 갖춘 인물을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공화당 내부에서는 이미 심각한 분열이 존재하고 있었다. 급진 공화파는 재건 정책의 지속과 강경한 연방 개입을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온건파와 실무 중심 인사들은 장기화된 재건이 당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행정부의 부패 문제로 인해 대중적 신뢰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이스는 특정 파벌에 깊이 속하지 않은 인물로서, 당내 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절충적 선택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헤이스의 주지사 경력은 그의 출마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오하이오는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였고, 그곳에서 주지사를 역임했다는 사실은 전국 정치에 필요한 경험과 기반을 갖추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는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비교적 청렴한 행정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잃어가던 도덕적 우위를 회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요소였다. 당 지도부는 헤이스가 부패 스캔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공식적인 대선 출마 선언 이전부터, 헤이스의 이름은 당내 논의에서 점차 언급 빈도가 늘어났다. 그는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보다는, 주변의 권유와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러한 태도는 소극적으로 보일 위험도 있었지만, 동시에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공화당 지도부 일부는 이러한 점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당대회로 향하는 과정에서 헤이스는 강력한 조직 기반이나 열성적인 지지층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결정적인 약점이라기보다는, 경쟁 후보들 간의 세력 균형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각 파벌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무난한 후보를 찾고 있었고, 헤이스는 극단적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인물로서 점차 합의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187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의 지명 과정은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했다. 여러 차례의 투표와 조정 끝에, 헤이스는 최종 후보로 선택되었다. 이는 당내에서 특정 노선의 승리를 의미하기보다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선거를 치를 수 있는 현실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헤이스 개인의 정치적 색채보다도, 그가 상징하는 안정과 청렴성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된 이후, 헤이스는 자신이 당의 구원자이거나 급진적 개혁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약속보다는, 재건 이후의 혼란을 정리하고 제도를 정상 궤도로 되돌리겠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출마 과정과 메시지는, 1876년 선거가 혁신의 경쟁이 아니라 정상화의 경쟁이라는 시대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27]

=== 선거 결과 논란과 헌정 위기 ===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는 곧바로 미국 정치사를 뒤흔드는 심각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헤이스와 민주당 후보 간의 경쟁은 예상보다 훨씬 박빙이었고, 몇몇 핵심 주의 결과가 전체 선거의 향방을 좌우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문제는 단순한 접전이 아니라, 선거 결과 자체의 정당성이 서로 충돌하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점이었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헌정 질서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논란의 중심에는 여러 주의 선거인단 결과가 있었다. 일부 주에서는 서로 다른 선거 결과가 동시에 제출되었고, 어느 쪽이 합법적인 결과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정당하다고 주장했으며, 상대 측의 개표와 인증 과정에 대해 부정과 압박이 있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정치 공방을 넘어, 헌법이 예상하지 못한 위기 상황으로 발전했다.

헤이스 진영은 자신들이 확보한 표가 합법적이며, 연방 헌정 질서에 따라 인정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동시에 그는 공개적으로는 절제된 태도를 유지하며, 폭력이나 무력 충돌로 사태가 번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개인적 성향과도 맞닿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도 공화당이 질서와 법치를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였다. 헤이스는 선거 결과가 어떻게 귀결되든,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 측은 선거 과정 전반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특히 남부 지역에서의 공화당 주 정부와 연방 개입이 선거 결과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헤이스가 대통령직을 차지할 경우, 그것이 합법적 승리가 아니라 조작된 결과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려 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재건 정책에 대한 반감이 컸던 남부와 일부 북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이로 인해 미국 사회 전반에는 헌정 위기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었다. 두 후보 모두 승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무력 충돌이나 정권 이중화 가능성까지 거론되었다. 남북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던 시점에서, 또 다른 국가적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는 현실적인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연방 정부와 각 주 정부, 언론과 시민 사회 모두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헤이스 개인의 태도는 이 위기 속에서 비교적 절제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자신이 승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지만, 이를 강압적으로 관철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법적·제도적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사적인 발언에서도 내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그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인물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 논란은 단순히 한 선거의 문제를 넘어, 재건 이후 미국 헌정 체제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였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헌법은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치적 타협과 임시적 제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위기는 곧 다음 단계인 조정 기구 구성과 정치적 합의로 이어지게 되며, 헤이스의 대통령 취임 역시 이러한 복잡한 과정 속에서 결정되게 된다.

1876년 대선의 개표 결과가 확정되지 못한 채 연말로 접어들면서 미국 정치 체제는 심각한 헌정적 위기에 직면했다. 헤이스와 새뮤얼 J. 틸든 중 누구도 선거인단 과반을 공식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플로리다·루이지애나·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여러 주의 선거인단 배정이 동시에 분쟁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 주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상반된 개표 결과를 주장하며 서로 다른 선거인단 명단을 워싱턴으로 제출했고, 헌법과 기존 법률은 이러한 상황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대통령 선출 권한을 둘러싼 해석 차이가 의회와 행정부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논란의 핵심은 상·하원과 부통령, 그리고 각 주 정부 중 누가 최종 판단권을 가지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틸든의 승리를 주장했으나, 공화당이 우세한 상원은 헤이스의 당선을 옹호했다.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릴 경우, 상대 진영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거론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불과 십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정치적 분열이 다시 폭력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의회는 특별 기구 설치라는 절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상원과 하원, 그리고 연방 대법원 판사들로 구성된 선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는 분쟁이 된 선거인단 표를 하나씩 심의하여 어느 후보에게 귀속시킬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형식상 초당적 구성이었으나, 실제 구성원들의 정치 성향은 공화당에 다소 유리하게 작용했다. 위원회는 장기간 심의 끝에 모든 분쟁 선거인단 표를 헤이스에게 배정하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형식적으로는 합법적 절차를 따른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이 곧바로 정치적 안정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 지도부와 남부 정치인들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일정한 정치적 양보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이른바 1877년 타협이라 불리는 비공식 합의였다. 공화당 측은 남부에 주둔하던 연방군을 철수시키고, 재건 정책을 사실상 종료하는 데 동의하는 대신, 헤이스의 대통령 취임을 저지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를 얻어냈다. 이 타협은 문서로 공식화되지는 않았으나, 이후 실제 정책 집행을 통해 그 존재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타협의 성립은 헌법적 절차와 정치적 현실 사이의 긴장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선거위원회의 결정은 법적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 결정이 실제로 수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 정치 세력 간의 거래와 이해관계 조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헤이스는 헌정 질서의 붕괴를 막는 선에서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그 정통성은 취임 순간부터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이 타협은 재건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분기점이 되었으며, 남부 지역의 정치·사회 구조에 장기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28]

2.13. 대통령 시기[편집]

1877년 3월 초, 헤이스의 대통령 취임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선거 결과를 둘러싼 분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수의 국민과 정치인들은 그의 당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워싱턴 정가는 취임식 당일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우려했고, 이러한 불안 속에서 헤이스는 관례를 깨고 공개 취임식 하루 전날 비공개로 선서를 진행했다. 이는 헌법적 공백이나 무정부 상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동시에 그의 대통령직이 정상적 정치 과정이 아닌 비상 상황의 산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했다.

공식 취임식이 열린 다음 날에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헤이스를 “타협의 대통령”으로 규정하며 선거 도용의 수혜자라는 비판을 이어갔다. 언론 역시 엇갈린 반응을 보였는데, 일부 신문은 헌정 질서를 지켜냈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다른 매체들은 선거 결과가 정치적 거래로 뒤바뀌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한 정파적 비난을 넘어, 대통령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헤이스 본인 역시 이러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당파적 승리를 강조하기보다는 국가 통합과 화해를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남북전쟁과 재건을 거치며 누적된 지역 간 불신을 완화하는 것이 자신의 최우선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정통성 논란을 정치적 성과와 도덕적 명분으로 상쇄하려는 시도였으며, 동시에 재임 기간 동안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현실적 판단이기도 했다.

취임 직후 행정부 구성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드러났다. 헤이스는 공화당 내 강경파뿐 아니라 비교적 온건한 인물들을 내각에 포함시키려 했고, 남부 출신 인사의 기용 가능성도 검토했다. 이는 선거 과정에서 형성된 타협의 연장선으로 해석되었으며, 남부 정치 세력에게는 재건 이후 새로운 정치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공화당 급진파는 이러한 인사를 원칙 후퇴로 간주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정통성 논쟁은 단기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의회에서는 헤이스의 정책 제안이 “논란의 대통령”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더욱 엄격한 검증 대상이 되었고, 행정부의 권위는 이전 대통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기반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스는 자신이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선출되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 애썼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적 정치적 이득보다는 대통령직의 제도적 안정성을 중시한 선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결국 헤이스의 취임과 그를 둘러싼 논쟁은 19세기 후반 미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회복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는 논란 속에서 출범한 대통령이었으나, 그 출발점 자체가 헌정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타협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정통성 논쟁은 이후 그의 재임 전반을 규정하는 배경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재건 정책과 남부 문제에 대한 결정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29]

헤이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가장 중대한 선택 가운데 하나는 남부 재건 정책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사안은 단순한 지역 행정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전쟁 이후 연방 정부가 유지해 온 정치적·군사적 개입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문제였다. 이미 선거 조정 과정에서 남부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헤이스의 선택지는 사실상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재건 정책을 지속할 경우 정통성 논란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었고, 반대로 이를 종료할 경우 연방 정부가 흑인 시민의 권리를 방기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재건 말기의 남부는 형식상 공화당 정부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군사력과 연방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였다. 루이지애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일부 주에서는 주 정부의 정통성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었고, 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폭력과 선거 방해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방군은 주 정부를 보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남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점령군이라는 인식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헤이스는 이러한 긴장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877년 봄, 헤이스 행정부는 남부 주에 남아 있던 연방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재건 정책의 실질적 종료를 의미하는 조치였으며, 남부 각 주가 연방 정부의 직접적 개입 없이 자체적인 정치 질서를 형성하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헤이스는 이 결정을 통해 지역 자치의 회복과 남북 화해를 촉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군사력에 의존한 정치 질서가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남부 문제를 정치적 설득과 제도적 정상화의 영역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즉각적인 결과는 이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연방군이 철수하자 남부의 공화당 정부는 급속히 붕괴되었고, 민주당 세력이 주 정부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흑인 유권자의 투표권과 시민권은 조직적인 억압에 직면했고, 재건 시기에 제정된 헌법적 권리는 사실상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헤이스는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다시 군사 개입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이는 재건을 군사력으로 유지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그의 정치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헤이스의 재건 종료 결정은 공화당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진적 공화당원들은 이를 전쟁의 성과를 포기한 배신 행위로 규정했으며, 흑인 시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연방 정부의 책임을 저버린 선택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온건파와 일부 민주당 인사들은 이 결정을 국가 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평가했다.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재건 정책 자체가 이미 정치적 합의의 기반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헤이스의 선택은 재건 시대의 종언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정은 단기간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으나, 장기적으로는 남부 지역에서 인종 차별적 제도가 제도화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이 지점을 두고 크게 갈리며, 헤이스를 화해와 정상화를 추구한 현실주의자로 보기도 하고, 연방 정부의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인물로 비판하기도 한다. 재건 정책 종료는 그의 재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논쟁적인 선택으로 남았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타협과 정의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례로 자리 잡았다.

헤이스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정통성 논란과 재건 정책 종료라는 거대한 전환점 위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사건과 갈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는 스스로를 과도기적 대통령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재임 기간 동안 급진적 개혁보다는 제도의 정상화와 행정의 도덕성 회복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공화당 내부의 이해관계, 노동 문제의 격화, 그리고 연방 정부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과 맞물리며 지속적인 갈등을 낳았다.

가장 두드러진 사건 가운데 하나는 공무원 제도 개혁을 둘러싼 충돌이었다. 헤이스는 관직을 정당 보상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행이 정치 부패의 근원이라고 보았으며, 능력과 자격에 기반한 임용 원칙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행정 명령을 통해 연방 공무원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고, 특히 세관과 우체국 같은 주요 기관에서의 당파적 인사 관행을 억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개혁 성향 인사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았으나, 기존 정치 기구에 깊이 뿌리내린 정당 지도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와 함께 재임 중 가장 심각한 사회적 갈등으로 평가되는 것은 대규모 노동 분쟁이었다. 1877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철도 노동자 파업은 임금 삭감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연방 질서 유지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업이 폭력 사태로 번졌고, 주 정부의 요청에 따라 연방군이 투입되었다. 헤이스는 이를 불가피한 질서 유지 조치로 정당화했으나, 노동자들과 개혁 성향 지식인들은 정부가 자본의 편에 섰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은 산업화가 본격화되는 시기 연방 정부가 노동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안정적인 노선을 유지했으나, 서부 확장과 관련된 정책은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 철도 건설과 정착 정책은 경제 발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원주민 사회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다. 헤이스 행정부는 보호와 동화를 병행하는 정책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토지 상실과 강제 이전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에는 국가 발전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식되었으나, 후대에는 심각한 인권 침해로 평가된다.

정당 내부 갈등 역시 재임 내내 헤이스를 괴롭혔다. 그는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 지도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급진파는 그를 원칙 없는 타협가로 비판했고, 보수파는 개혁을 명분으로 한 당 기구 약화를 문제 삼았다. 이러한 고립은 그의 정책 추진력을 제한했으며, 의회와의 관계에서도 반복적인 마찰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스는 재임 기간 동안 개인적 청렴성과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을 절제된 방식으로 행사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결정이 단기적 정치 이익보다 제도의 장기적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즉각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공무원 제도 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헤이스의 재임 중 주요 사건과 갈등은 19세기 후반 미국이 직면한 구조적 변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산업화, 노동 문제, 인종 갈등, 정당 정치의 변형이 한 시기에 집중되었고, 헤이스는 그 한가운데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재임은 뚜렷한 성과보다는 갈등 관리와 과도기적 조정의 성격이 강했으며, 이러한 점이 그를 평가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30]

2.14. 재선 불출마와 정치 은퇴[편집]

헤이스는 대통령 재임 초반부터 스스로를 장기 집권을 염두에 둔 정치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 이전부터 단 한 차례만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주변에 밝혔으며, 재임 중에도 이 입장을 공개적으로 유지했다. 이러한 태도는 정통성 논란 속에서 출범한 자신의 행정부가 정치적 욕망보다는 제도의 안정과 도덕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었다. 동시에 당내 파벌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남으로써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려는 현실적 판단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공화당 내부에서는 헤이스의 재선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의 공무원 제도 개혁 시도는 정치 기구의 반발을 불러왔고, 재건 정책 종료 이후 남부 문제를 둘러싼 비판은 당내 급진파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이스가 재선 의지를 명확히 부인하자, 공화당 지도부는 차기 후보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 재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대통령직이 당내 권력 투쟁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헤이스는 재선 불출마를 정치적 은퇴 선언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대통령직을 개인적 경력의 정점으로 삼기보다는, 공적 봉사의 한 단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재임 말기로 갈수록 그는 후임 행정부가 안정적으로 출범할 수 있도록 정국 관리에 집중했으며, 주요 정책에서도 급격한 변화보다는 연속성을 중시했다. 이는 논쟁적 유산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재임을 과도기의 조정 단계로 남기려는 의도였다.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 헤이스는 개인적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진행했다. 그는 워싱턴 정치의 중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국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으나, 직접적인 정치 참여보다는 도덕적 조언자이자 원로의 위치를 택했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대통령들이 흔히 보이던 정치적 영향력 유지 시도와는 대비되는 모습으로, 그의 성격과 가치관을 잘 드러낸다.

1881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헤이스는 공식적으로 정계를 떠났다. 퇴임 과정은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그의 재임 전반에 걸친 절제된 태도와 일관성을 이루었다. 그는 더 이상 공직에 출마하지 않았고, 정치적 논쟁의 전면에 서는 일도 피했다.

일부는 이를 정치적 영향력 부족의 결과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헌정 질서와 권력 순환의 원칙을 존중한 선택으로 높이 평가한다. 헤이스의 이 결정은 그의 대통령직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을 일정 부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그를 개인적 야망보다는 제도적 안정에 헌신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31]

2.15. 이후의 삶과 사망[편집]

헤이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워싱턴의 정치 무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교적 조용한 삶을 선택했다. 그는 퇴임 직후 오하이오로 돌아가 가정과 지역 사회에 다시 정착했으며, 더 이상 공직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태도는 대통령직을 정치 경력의 연장선이 아니라 공적 봉사의 한 단계로 보았던 그의 인식과 일치했다. 퇴임 이후의 헤이스는 국가적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발언은 계속 이어갔다.

퇴임 후 헤이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분야는 교육과 사회 개혁 활동이었다. 그는 특히 흑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부와 서부 지역의 교육 기관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다. 재건 정책 종료 결정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던 그는, 최소한 교육을 통해 시민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시기 그의 발언과 활동은 대통령 재임 중의 정책 선택과 대비되며, 개인적 신념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헤이스는 교도 행정과 사회 복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범죄를 단순히 처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교정과 재사회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교도 제도 개선을 위한 논의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진보적인 관점으로 평가되었고,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공공선에 기여하려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말년의 헤이스는 정치적 논쟁보다는 개인적 성찰과 기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일기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재임과 당대 정치 상황을 돌아보았으며, 이러한 기록들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기록들 속에서 헤이스는 자신의 선택이 항상 옳았다고 주장하기보다는, 당시의 제약과 현실 속에서 최선이라 판단한 결정을 내렸음을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대통령직을 단순한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89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고령으로 인한 쇠약과 여러 만성 질환이 겹치면서 외부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고,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 중심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오랜 정치 생활과 공적 봉사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비교적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93년 1월 17일, 헤이스는 오하이오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전국적 애도보다는 차분한 평가의 계기로 받아들여졌으며, 언론과 정치권은 그의 삶을 논쟁보다는 절제와 봉사의 상징으로 회고했다. 사망 이후 그는 미국 정치사에서 화려한 성과보다는 과도기의 안정과 도덕적 기준을 중시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었다. 퇴임 이후의 삶과 사망에 이르는 과정은 헤이스가 공직과 개인적 삶을 분리하고자 했던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그의 전 생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종결점으로 남아 있다.[32]

3. 평가[편집]

러더퍼드 B. 헤이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오랫동안 엇갈린 평가 속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서도 대중적 인지도와 상징성이 낮은 인물로 분류되어 왔으며, 한동안은 율리시스 S. 그랜트제임스 A. 가필드 사이에 끼인 과도기적 존재로만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재임 기간이 비교적 짧았고, 재건 시대 종결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즉각적인 정치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정치사 연구가 제도·윤리·행정 능력 중심으로 확장되면서 헤이스에 대한 평가 역시 점진적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초기 역사 서술에서 헤이스는 대체로 소극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한 대통령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1877년 철도 대파업에 대한 강경 진압, 남부 연방군 철수, 그리고 흑인 시민권 보호 실패는 그의 한계를 상징하는 사례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 이 시기 역사학자들은 그를 “재건을 끝낸 대통령”이라는 단일한 틀로 환원했으며, 이는 곧 재건의 이상을 배신한 인물이라는 도덕적 평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헤이스가 남북 화해를 명분으로 삼아 연방정부의 책임을 회피했고, 그 결과 짐 크로 체제의 형성을 사실상 방조했다는 비판이 중심을 이뤘다.

반면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수정주의적 연구들은 헤이스의 정치적 선택을 보다 구조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 이들은 재건 말기의 정치 환경이 이미 연방정부에 극히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북부 유권자들의 재건 피로감, 공화당 내부 분열, 대법원의 시민권 제한 판결 등은 어느 대통령이 집권하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헤이스는 이상을 포기한 배신자가 아니라, 제한된 조건 속에서 헌정 질서의 붕괴를 막으려 했던 현실적 관리자에 가깝게 평가된다.

특히 행정 윤리와 공직 개혁 측면에서 그의 위상은 재평가의 핵심 대상이 되었다. 헤이스는 취임 전부터 단임을 공언했고, 이는 정치적 연임 계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전리품 제도에 비판적이었으며, 공직자의 능력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기준을 도입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후 체스터 A. 아서 행정부에서 제도화되는 공무원 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점에서 헤이스는 실패한 개혁가라기보다는 과도기적 선구자로 자리매김된다.

대통령 개인의 성품 역시 후대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헤이스는 사적인 삶에서 청렴과 절제를 중시했으며, 백악관에서 주류 제공을 금지하는 등 도덕적 기준을 실천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부패 스캔들이 잦았던 19세기 후반 정치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적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다만 이러한 개인적 덕성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도덕성은 긍정적 평가와 정치적 무력함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종합적으로 볼 때, 헤이스는 극단적인 실패나 위대한 성공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최선을 모색한 대통령’이라는 중간적 평가에 가깝다. 그는 미국 사회의 근본적 갈등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무질서한 권력 경쟁과 헌정 불안을 일정 부분 수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변혁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안정의 관리자,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신중한 현실주의자로 이해된다.

오늘날 헤이스는 미국 재건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근대적 행정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적 대통령으로 재위치되고 있다. 그의 선택들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단순한 도덕적 평가를 넘어 당시 정치 구조와 제약 속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비교적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역사 교과서의 각주에 머무는 인물이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서 점차 주목받고 있다.[33]

3.1. 재건 시대 종결[편집]

헤이스의 대통령 재임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도 미국 재건 시대의 종결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취임 직후 남부에 주둔하던 연방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렸고, 이 조치는 사실상 재건 정책의 공식적 종료로 받아들여졌다.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남북전쟁 이후 지속되던 정치적·군사적 긴장을 정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북부 공화당 내부에서는 장기간 지속된 남부 개입이 정치적 피로를 낳고 있었고, 남부 백인 엘리트들은 연방군 주둔을 점령 상태로 인식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헤이스의 조치는 흔히 1877년 타협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는 논란 끝에 대통령직을 확보한 인물이었고, 남부 민주당 세력과의 정치적 합의 없이는 통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타협에 따라 연방군이 철수하면서 남부 주 정부들은 다시 백인 보수 세력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이는 흑인 유권자와 공화당 정치인들의 정치적 기반을 급속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점에서 헤이스는 재건의 이상을 포기하고 정치적 안정을 선택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에서는, 헤이스의 결정이 장기적인 국가 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남부에 대한 군사적 통제는 이미 효과를 상실하고 있었고, 연방정부가 이를 무기한 유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건 말기에는 남부 각지에서 무장 충돌과 선거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으며, 연방군의 존재만으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맥락에서 헤이스는 갈등을 봉합하고 헌정 질서를 정상화하려 한 현실주의자로 평가된다.

반면 부정적 평가는 훨씬 날카롭다. 연방군 철수 이후 남부에서는 짐 크로 법 체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고, 흑인들의 참정권은 각종 법적·비법적 수단을 통해 박탈되었다. 헤이스는 개인적으로 흑인 시민권에 공감하는 발언을 남겼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이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연방정부는 남부의 선거 조작과 폭력에 대해 사실상 방관적 태도를 취했으며,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될 인종 차별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또한 헤이스의 선택은 공화당의 장기적 기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재건 종결 이후 남부는 이른바 ‘솔리드 사우스’로 불리며 민주당의 확고한 지역 기반이 되었고, 공화당은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남부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 점에서 그의 결정은 단기적 정치 안정은 확보했지만, 공화당과 흑인 공동체 모두에게 전략적 후퇴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종합하면, 재건 시대 종결에 대한 헤이스의 평가는 그의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는 남북 화해와 행정 정상화를 이끌어냈지만, 그 대가로 시민권 보호라는 연방정부의 핵심 책임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 때문에 그는 링컨이나 그랜트처럼 도덕적 상징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지 못하며, 재건을 끝낸 대통령이라는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이미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34]

3.2. 행정 개혁과 공직자 임명 정책[편집]

러더퍼드 B. 헤이스의 행정 개혁과 공직자 임명 정책은 그의 대통령 재임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일관되게 긍정적 평가를 받는 영역 중 하나이다. 그는 취임 이전부터 엽관제가 미국 정치와 행정 전반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혀 왔으며, 대통령에 오른 이후 이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려 한 드문 19세기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당시 연방정부의 공직은 선거 승리의 전리품처럼 여겨졌고, 정당 충성도와 개인적 연줄이 행정 능력보다 우선시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헤이스는 이러한 관행이 행정의 전문성과 국민 신뢰를 훼손한다고 판단하였다.

헤이스의 개혁 의지는 취임 직후 공직 임명 원칙을 정비하는 데서 드러났다. 그는 공직을 정치적 보상이 아닌 공적 책임으로 규정하며, 능력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한 임명을 강조하였다. 특히 재무부우정국 등 부패가 만연하다고 지적되던 부서에 대해 강도 높은 내부 점검을 실시하였고, 정치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문제 인사를 교체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 공화당 정치 기계, 특히 뉴욕을 기반으로 한 당내 실력자들과의 정면 충돌로 이어졌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체스터 A. 아서앨론조 코넬의 해임이다. 두 인물은 뉴욕 항만 세관을 장악한 공화당 내 강력한 정치 세력과 연결된 인사들이었으며, 오랫동안 엽관제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해 왔다. 헤이스는 이들이 행정 개혁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해임을 단행했는데, 이는 당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상원의 인준권을 무기로 삼은 당 지도부는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약하려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헤이스의 임기 동안 공화당 내부 갈등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스는 원칙을 후퇴시키지 않았다. 그는 연방 공무원에게 선거 운동 참여를 금지하고, 정치 자금 모금 활동에서 행정부를 분리하려는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는 훗날 펜들턴 공무원 개혁법으로 제도화되는 개혁의 선행 단계로 평가된다. 비록 그의 재임 중 법률 차원의 근본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행정부 차원에서 엽관제를 공공연히 문제 삼고 실제 인사 조치를 통해 대응한 점은 이전 대통령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평가자들은 헤이스의 행정 개혁이 실질적 성과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의 임기는 단 4년에 불과했고, 의회 다수를 장악한 정치 세력의 반대 속에서 제도적 변화를 완수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분명했다. 또한 강경한 개혁 노선은 당내 지지 기반을 약화시켜 다른 정책 추진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헤이스가 제시한 원칙과 선례는 이후 행정 개혁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헤이스의 공직자 임명 정책은 단기적 정치 이익보다 행정의 도덕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한 시도로 평가된다. 그는 엽관제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지만, 대통령이 당파적 인사 압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그는 행정 개혁의 과도기에 위치한 인물로 이해되며, 후대 개혁가들에게 제도적·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한다.[35]

3.3. 노동 문제 대응[편집]

러더퍼드 B. 헤이스 재임기의 노동 문제 평가는 그의 대통령직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영역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스스로를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인식했으며,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의 사회 갈등을 근본적인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공공질서의 위협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노동 정책 전반에 반영되었고, 결과적으로 헤이스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산업혁명의 본격화로 인해 철도, 철강, 광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자본이 형성되는 한편, 도시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노동 조건은 열악했고,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안전장치의 부재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연방정부 차원의 노동 관련 법률이나 제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노동 문제는 각 주와 기업의 자율 영역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헤이스 역시 이러한 전통적 자유방임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1877년 철도 대파업이다. 이 파업은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철도를 비롯한 주요 철도 회사들이 임금을 반복적으로 삭감하면서 촉발되었으며, 단기간에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파업 과정에서 철도 시설이 점거되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방화와 무력 충돌까지 발생했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 사회가 경험한 최대 규모의 노동자 집단 행동이었다.

헤이스는 이 사태를 노동 분쟁이라기보다는 치안 위기로 규정했다. 그는 주지사들의 요청을 받아 연방군을 여러 도시에 파견했으며, 군대는 파업 노동자 해산과 철도 보호에 직접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연방정부가 명백히 자본가 편에 섰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헤이스는 개인 일기에서 파업 사태를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폭동”으로 표현하며, 공권력 투입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그의 시각이 명확히 드러난다.[36]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에서는, 당시 연방정부가 대규모 노동 분쟁을 조정할 제도적 수단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헤이스의 선택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철도는 국가 경제의 핵심 기반 시설이었고, 운송망의 붕괴는 식량과 석탄 공급 중단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대통령이 군사력을 동원해 질서를 회복한 것은 헌법상 행정부의 책임 범위 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파업은 군대 투입 이후 빠르게 진정되었고, 전국적 혼란은 단기간에 수습되었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는 훨씬 지배적이다. 헤이스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중재하거나 조사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고, 임금 삭감의 정당성이나 기업의 책임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연방정부가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고 노동자를 잠재적 폭도로 취급했다는 인상을 강화했다. 이후 노동 운동 세력은 공화당과 연방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노동조합의 급진화와 계급 갈등의 심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헤이스는 노동 문제를 인종 및 이민 문제와 분리해 사고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지닌다. 당시 도시 노동자의 상당수는 이민자였으며, 남부 출신 흑인 노동자들도 북부 산업 현장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노동 갈등은 단순한 임금 문제를 넘어 민족적·인종적 긴장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헤이스 정부는 이를 통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회 갈등은 노동 문제 해결 없이 억압을 통해 관리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장기적으로 볼 때, 헤이스 재임기의 노동 대응은 연방정부가 노동 문제에 개입하는 첫 사례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개입 방식이 중재자나 조정자가 아닌 무력 집행자로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후 정부와 노동자 간 관계의 불행한 선례가 되었다. 훗날 클리블랜드와 맥킨리 정부 시기에도 유사한 방식의 군대 투입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헤이스의 선택은 하나의 전환점이자 부정적 유산으로 평가된다.

결국 노동 문제에 대한 헤이스의 평가는 그의 통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사회 질서와 법 집행을 중시한 대통령이었지만, 급변하는 산업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그는 노동자 권리 신장의 관점에서는 거의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며, 산업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국가 권력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37]

3.4. 대통령 권위·도덕성[편집]

러더퍼드 B. 헤이스에 대한 평가에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개인적 도덕성은 비교적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요소이다. 그는 논란 속에서 취임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 기간 동안 사적 이익이나 권력 남용과 거리를 둔 태도를 유지했으며, 19세기 후반 미국 정치에서 드물게 ‘청렴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확립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는 단순한 미담 수준이 아니라, 당시 정치 문화와의 대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헤이스가 취임한 시기의 미국 정치는 전리품 제도가 만연해 있었고, 대통령과 정당 지도부가 공직을 사적 보상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행이 당연시되었다. 이전 행정부들에서 대통령 권위는 정당 기구와 결합된 후원 네트워크 위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행정부 수반의 도덕성은 정치적 효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헤이스는 대통령직을 개인적 성공이나 정치적 보상의 정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공적 책임의 자리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개인적 성품은 재임 이전부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미국 남북전쟁 참전 경험, 부상 이후에도 복귀한 경력, 그리고 주지사 시절의 절제된 행정 태도는 그를 신중하고 원칙적인 인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그는 사교적 행사와 정치적 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백악관 운영에서도 절약과 규율을 중시했다. 특히 부인 루시 헤이스와 함께 백악관에서 주류 제공을 제한한 조치는 상징적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단순한 금욕주의라기보다 공적 공간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대통령 권위 행사 방식에서도 그는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헤이스는 대통령 권한을 광범위하게 확대하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적 대중 동원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의회와의 관계에서도 충돌을 최소화하려 했다. 이는 일각에서는 지도력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헌정 질서 내에서 대통령직의 한계를 인식한 성숙한 태도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대통령 권위를 개인적 카리스마나 강경한 조치에서 찾기보다는, 법과 제도의 정당성 위에 두려 했던 인물이었다.

도덕성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부분은 부패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헤이스는 연방 행정부 내 부패 관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특히 세관과 같은 수익성 높은 기관에서의 부정 행위를 강하게 문제 삼았다. 이는 공화당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지만, 그는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원칙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체스터 A. 아서 행정부에서 본격화되는 공직 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다만 그의 도덕성이 항상 정치적 성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헤이스는 원칙을 중시한 나머지 정치적 타협과 전략적 설득에 서툴렀고, 이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제도화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도덕적 신뢰 위에 세워졌음에도, 그는 이를 활용해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결집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의 권위는 존경받았지만 두려움이나 강력한 영향력을 동반하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또한 헤이스의 도덕성은 인종 문제와 결부될 때 복합적인 평가를 낳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흑인 시민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남겼고, 도덕적 차원에서는 인종 평등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 권위를 활용해 이를 강제하거나 보호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이는 그의 도덕성이 정치적 결단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로 지적된다. 이로 인해 그는 ‘선의는 있었으나 책임은 회피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38]

종합적으로 볼 때, 러더퍼드 B. 헤이스의 대통령 권위와 개인적 도덕성은 19세기 미국 정치사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영역이다. 그는 부패와 사적 이익으로 얼룩진 정치 환경 속에서도 일정 수준의 윤리적 기준을 지켜냈으며, 대통령직을 도덕적 책임의 자리로 인식하려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성은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으로 전환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권위는 상징적 존경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그는 위대한 개혁가나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되기보다는, 한계와 미덕이 동시에 공존한 과도기적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3.5. 대외 인식과 외교·군사 정책의 한계[편집]

헤이스의 외교·군사 정책은 그의 재임 기간이 비교적 짧고, 국내 정치 현안이 우선시되었던 탓에 종종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처한 국제적 위상과 군사적 현실을 고려하면, 그의 대외 정책은 19세기 후반 미국 외교의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헤이스는 적극적인 팽창이나 무력 개입보다는 안정과 절제를 중시했으며, 이는 대외적으로는 신중함으로, 국내적으로는 소극성으로 인식되었다.

헤이스 재임기의 외교 기조는 기본적으로 고립주의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는 유럽 열강과의 직접적 충돌을 회피하고, 미주 대륙 내에서의 영향력 유지에 집중하는 방향을 유지했다. 이 시기 미국은 아직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하기 이전 단계였으며, 대규모 상비군이나 해외 주둔군을 운용할 정치적·재정적 여력이 제한적이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헤이스는 외교를 국가적 명성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다는, 분쟁 관리와 통상 안정의 도구로 인식했다.

중남미 정책에서 헤이스는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 가능성과 관련하여 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으며, 미주 대륙에서의 유럽 개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기존의 먼로 독트린 해석을 재확인했다. 다만 이는 적극적 개입보다는 선언적 차원에 가까웠고, 실제로 군사적 압박이나 외교적 공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헤이스의 중남미 정책은 원칙은 분명했으나 실행력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시아에 대한 정책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기존 통상 체제를 유지하려 했고, 이민 문제와 관련된 갈등을 완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서부 지역에서 확산되던 반중 감정과 배타적 이민 요구에 대해 그는 공개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이는 인종적 편견을 외교 문제로 비화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으나, 동시에 서부 유권자들의 불만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군사 정책 측면에서 헤이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해외 군사 개입의 부재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대외 전쟁이나 대규모 군사 충돌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는 남북전쟁 이후 피로감이 누적된 사회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그는 군을 국가 통합의 상징이 아닌, 질서 유지의 최소한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이 때문에 그의 군사 정책은 안정적이었으나, 동시에 전략적 비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군사력 활용과 관련해서는 철도 파업 진압을 위해 연방군을 투입한 전례가 대외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부 세계에서는 미국 군대가 해외보다는 국내 질서 유지에 주로 사용되는 모습으로 비쳤고, 이는 미국이 아직 국제 경찰이나 패권 국가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윌리엄 매킨리 행정부 시기의 적극적 대외 정책과 대비되며 더욱 부각된다.

대외적 이미지 측면에서 헤이스는 강력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신중한 관리자에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는 외교 무대에서 개인적 카리스마나 공격적 수사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는 유럽 외교관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상대라는 평가를 낳았다. 반면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국력 상승을 외교적으로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헤이스의 외교·군사 정책은 실패라기보다는 한계의 산물로 평가된다. 그는 미국이 아직 세계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이전 단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무리한 확장을 피하고 내적 안정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의 재임을 대외 정책 측면에서 존재감이 희미한 시기로 남게 했다. 후대의 시각에서 그는 제국주의로 나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신중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 소극성은 비판과 이해를 동시에 받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39]

4. 여담[편집]

  • 부인 루시 헤이스는 백악관에서 술을 금지시켜 "레모네이드 루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부부의 종교적 신념과 금주 운동 지지 때문이었다.
  • 헤이스는 백악관에 전화기를 최초로 설치한 대통령이다. 전화번호는 "1"이었다.
  • 그는 대통령이 된 유일한 하버드 로스쿨 졸업생이다(법학 학위 기준).
  • 대통령 재임 중 매년 백악관에서 부활절 달걀 굴리기 행사를 시작했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남북전쟁 중 5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그 아래 깔린 적도 있었다.
  • "사기꾼 헤이스(Rutherfraud B. Hayes)" 또는 "그의 사기"(His Fraudulency)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논란 많은 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 그의 자택 스파이겔 그로브는 현재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대통령 도서관의 초기 형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 부친의 사망은 헤이스의 가족 구조와 양육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 헤이스의 성장 배경은 훗날 그가 ‘도덕적 행정가’로 평가받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3] 헤이스는 생애 전반에 걸쳐 일기를 꾸준히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다.[4] 헤이스의 정치적 중도성과 타협 성향은 종종 그의 성장 환경과 연결되어 설명된다.[5] 오하이오는 남북 간 정치·사회적 완충지대로 기능한 지역 중 하나였다.[6] 헤이스의 정치적 성향은 종종 오하이오라는 지역적 맥락과 결부되어 해석된다.[7] 헤이스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교적 신념을 공적 윤리와 연결지어 사고했다.[8] 헤이스의 일기는 그의 성격과 사상 변화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된다.[9] 헤이스의 공공 봉사 지향성은 청소년기 가치관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0] 헤이스는 하버드 시절 동부 엘리트 문화에 비판적이면서도 배타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다.[11] 헤이스의 정치적 신중함과 제도 존중 성향은 하버드 시절 형성된 사고 습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12] 헤이스는 교육받은 계층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인물로 평가된다.[13] 헤이스의 합법성 중시 태도는 법학 수학 시기 형성된 핵심 신념 중 하나로 평가된다.[14] 신시내티 시기 헤이스의 평판은 ‘조용하지만 성실한 법률가’로 요약되곤 했다.[15] 헤이스의 정치 경력은 신시내티 시절 형성된 사회적 기반 위에서 출발했다.[16] 루시 웨브 헤이스는 이후 대통령 영부인 시절에도 독자적인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평가된다.[17] 헤이스의 절제된 정치 행보는 안정된 가정생활과 분리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존재한다.[18] 헤이스의 초기 사회 활동과 평판은 개인 일기와 동시대 신문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19] 헤이스의 노예제 인식은 주로 사적인 서신과 일기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20] 헤이스의 전후 정치 참여 결정 과정은 개인 서신과 지역 정치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21] 헤이스는 하원의원 임기 중에도 군 복무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으며, 이는 당시 전쟁 상황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22] 헤이스는 의회에서의 발언 빈도와 달리 개인 서신과 일기에서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헤이스는 재건 문제에 대해 공개 발언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개인 기록에서는 연방 개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24] 헤이스의 주지사 후보 지명은 당내에서도 비교적 무난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그가 강한 적대 세력을 만들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25] 헤이스의 주지사 재임기는 산업화 초기 단계의 사회 문제를 다룬 사례로, 이후 연방 차원의 노동 정책 논의에서 간접적으로 참고되기도 했다.[26] 헤이스는 주지사 재임을 통해 정치적 명성보다는 행정적 신뢰가 자신의 강점임을 자각한 것으로 평가된다.[27] 헤이스는 대선 후보 지명 이후에도 적극적인 선거 운동보다는 당 조직과 지지자들의 활동에 의존하는 방식을 유지했다.[28] 선거위원회 구성과 결정 과정, 그리고 1877년 타협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 미국 헌정사에서 선거 분쟁 해결의 선례로 자주 언급된다.[29] 1877년 취임 과정에서의 비공개 선서와 공개 취임식은 미국 역사상 드문 사례로, 선거 분쟁이 대통령 권력 이양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30] 1877년 철도 파업에 대한 연방군 투입은 연방 정부가 대규모 노동 분쟁에 개입한 초기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31] 헤이스는 취임 전부터 단임을 공언한 드문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이는 재임 중 정책 선택과 정치적 태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존재한다.[32] 헤이스의 퇴임 후 일기와 서신은 그의 정책 선택과 개인적 가치관을 해석하는 주요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33] 헤이스 재평가 흐름은 20세기 후반 미국 정치사 연구의 구조사적 전환과 맞물려 강화되었다.[34] 재건 종결과 연방군 철수의 정치적 배경은 19세기 후반 공화당 내부 분열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35] 헤이스의 인사 개혁은 1880년대 초반 공무원 제도 개편 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36] 헤이스는 파업의 원인보다 질서 회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37] 1877년 철도 파업은 이후 연방 차원의 노동 정책 논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38] 개인적 신념과 국가 권력 행사 사이의 간극은 헤이스 평가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요소이다.[39] 19세기 말 미국 외교의 전환은 헤이스 이후 행정부에서 본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