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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태국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타이족 도래 이전[편집]
타이족 도래 이전 태국에서는 원주민인 몬족이 드바라바티, 하리푼자야 등의 국가를 형성했고, 이후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3. 타이족의 도래[편집]
4. 시암(싸얌) 시대[편집]
타이족 도래 이후부터 태국의 주도권을 잡은 타이족 국가는 시암(Siam)[1]이라 불렸으 며, 시암 이외에도 여러 지방 국가들이 공존했다.
4.1. 시암(싸얌) 왕국[편집]
4.1.1. 수코타이 왕국[편집]
13세기 초에 수코타이를 수도로 삼아 건국된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태국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태국 문자(타이 문자)를 발명하고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는 등 태국인 정체성 형성의 기초를 다졌다.
4.1.2. 아유타야 왕국[편집]
14세기에 아유타야를 수도로 삼아 건국된 아유타야 왕국은 수코타이를 멸망시키면서 태국을 장악한 후, 동쪽으로는 버마(지금의 미얀마), 서쪽으로는 대월(지금의 베트남)과 대륙부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을 다투었다.
4.1.3. 톤부리 왕국[편집]
1767년 버마 꼰바웅 왕조의 침공으로 아유타야가 함락당하자, 딱신이라는 장군이 버마군을 격퇴한 후 톤부리라는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아 왕국을 세웠다.
딱신은 북서부의 란나 왕국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드는 등 시암을 다시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나, 재위 말기인 1782년에 프라야 쑨이라는 인물의 반란에 의해 폐위되었다.
프라야 쑨의 반란은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딱신의 측근 짜크리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 당시 딱신은 이미 프라야 쑨에 의해 살해당한 후였다는 설과 프라야 쑨의 반란이 진압될 당시에도 유폐된 채 연명하고 있었으나 짜끄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딱신의 톤부리 왕국은 이 시점에 막을 내리고 짜끄리 왕조의 라따나꼬신 왕국(이후의 타이 왕국)이 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딱신은 북서부의 란나 왕국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드는 등 시암을 다시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나, 재위 말기인 1782년에 프라야 쑨이라는 인물의 반란에 의해 폐위되었다.
프라야 쑨의 반란은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딱신의 측근 짜크리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 당시 딱신은 이미 프라야 쑨에 의해 살해당한 후였다는 설과 프라야 쑨의 반란이 진압될 당시에도 유폐된 채 연명하고 있었으나 짜끄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딱신의 톤부리 왕국은 이 시점에 막을 내리고 짜끄리 왕조의 라따나꼬신 왕국(이후의 타이 왕국)이 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4.1.4. 라따나꼬신 왕국[편집]
1782년에 시암의 왕으로 즉위한 짜끄리는 풋타엿파쭐라록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는데, 이후 라마 1세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톤부리에서 방콕의 라따나꼬신 섬으로 천도하여 라따나꼬신 왕국을 세웠는데, 이후 수도의 범위가 방콕 전역으로 확대되며 방콕을 수도로 하는 근현대 타이 왕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라따나꼬신 왕국은 라마 4세 시대에 근대화의 초석을 닦았고, 라마 5세 시대에는 내부적으로는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대외적으로는 대영제국과 프랑스라는 두 식민제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제국주의 시대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라마 6세 시대에는 1차 대전에 연합국(협상국)으로 참전하여 영국 및 프랑스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철폐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내치에서는 방만한 재정 운영과 낭비로 선왕 라마 5세가 성장시킨 경제를 악화시켰으며, 그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라마 7세 시대에는 대공황까지 겹쳐 시암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그는 톤부리에서 방콕의 라따나꼬신 섬으로 천도하여 라따나꼬신 왕국을 세웠는데, 이후 수도의 범위가 방콕 전역으로 확대되며 방콕을 수도로 하는 근현대 타이 왕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라따나꼬신 왕국은 라마 4세 시대에 근대화의 초석을 닦았고, 라마 5세 시대에는 내부적으로는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대외적으로는 대영제국과 프랑스라는 두 식민제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제국주의 시대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라마 6세 시대에는 1차 대전에 연합국(협상국)으로 참전하여 영국 및 프랑스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철폐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내치에서는 방만한 재정 운영과 낭비로 선왕 라마 5세가 성장시킨 경제를 악화시켰으며, 그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라마 7세 시대에는 대공황까지 겹쳐 시암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4.2. 기타[편집]
4.2.1. 북서부(란나): 란나 왕국[편집]
태국 북서부의 란나 지방은 시암과 같은 타이족이 다수였으나 오랫동안 시암에 속하지 않는 독립 왕국인 란나 왕국이 존재했는데, 톤부리 왕국 시대에 시암에 복속되어 명목상의 국체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4.2.2. 북동부(이싼): 라오계 국가[편집]
태국 북동부 이싼 지방은 라오스 최초의 통일국가인 란쌍 왕국과 그 후신인 비엔티안 왕국[2]의 영토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시암에 정복당했다.
4.2.3. 남부 말레이계 지역(파타니)[편집]
태국 남부의 5개주(파타니, 얄라, 나라티왓, 송클라, 사뚠)은 상좌부 불교를 믿는 타이족이 아닌 말레이계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이었고, 파타니 술탄국이라는 이슬람 술탄국도 있었으나 19세기 시암에 복속된 후 1902년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5. 근현대 타이 왕국[편집]
5.1. 라마 7~8세 시대[편집]
5.1.1. 1932년 시암 혁명과 인민당 정권[편집]
근대화 이후에도 태국은 오랫동안 전제군주제를 유지했으나, 청년 장교들과 지식인들이 결성한 인민당이 1932년에 혁명을 일으켜 국왕 라마 7세에게 입헌군주제를 요구하고 관철시킴으로써 태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인민당은 라마 7세를 계속 왕으로 두고 법조인 출신의 마노빠꼰 니띠타다라는 인물을 초대 총리로 옹립했으나, 1년만아 1933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를 축출한 후 인민당의 지도자인 파혼 폰파유하세나가 직접 총리직에 올랐고, 1935년에 이르러서는 국왕 라마 7세가 어린 손자 라마 8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라마 8세는 스위스에 유학 중이었기에 총리 파혼 폰파유하세나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으나, 다른 인민당 간부들과 권력을 나눠가졌기에 1인 독재는 시도할 수 없었고, 1938년에는 경제난으로 인한 책임론과 인민당 내 당권 투쟁 등의 여파로 사임했다.
이후에는 국방장관이었던 쁠랙 피분송크람이 총리로서 집권했는데, 그는 국호를 정식으로 시암에서 타이 왕국(태국)으로 개칭하고 타이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일제 군국주의 정권을 모방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고,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기까지 했다.
인민당은 라마 7세를 계속 왕으로 두고 법조인 출신의 마노빠꼰 니띠타다라는 인물을 초대 총리로 옹립했으나, 1년만아 1933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를 축출한 후 인민당의 지도자인 파혼 폰파유하세나가 직접 총리직에 올랐고, 1935년에 이르러서는 국왕 라마 7세가 어린 손자 라마 8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라마 8세는 스위스에 유학 중이었기에 총리 파혼 폰파유하세나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으나, 다른 인민당 간부들과 권력을 나눠가졌기에 1인 독재는 시도할 수 없었고, 1938년에는 경제난으로 인한 책임론과 인민당 내 당권 투쟁 등의 여파로 사임했다.
이후에는 국방장관이었던 쁠랙 피분송크람이 총리로서 집권했는데, 그는 국호를 정식으로 시암에서 타이 왕국(태국)으로 개칭하고 타이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일제 군국주의 정권을 모방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고,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기까지 했다.
5.1.2. 2차 대전 직후의 짧은 민주주의[편집]
5.2. 라마 9세 시대[편집]
5.2.1. 냉전기의 군사정권[편집]
1946년 라마 9세가 즉위하고 1년만인 1947년에 쁠랙 피분송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하면서 태국에는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1차 집권 당시 일제 군국주의를 모방했던 것과 달리, 2차 집권 이후의 쁠랙 피분송크람은 친미, 반공 논리에 기반한 군사정권을 이끌며 10년간 집권했는데, 1957년에 사릿 타나랏과 타놈 끼띠까촌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1957년 쿠데타 이후 총리로 취임한 사릿 타나랏은 쁠랙 피분송크람 정권의 잔재를 제거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입헌군주제 실시 이후 실추되었던 국왕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리는 정책을 폈고, 이로써 라마 9세는 비록 전제군주는 아닐지언정 감히 신민들이 비판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었다.
사릿 타나랏이 1963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쿠데타 동지로서 총리가 된 타놈 끼띠까촌에 의해 군사정권이 유지되었으나, 1973년 민주화 시위로 실각하면서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이렇게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듯 했으나, 1975년에 인도차이나 3국[3]이 공산화되며 반공 정서가 극대화되자 1976년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이에 반대하며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탐마삿 학살이라 불리는 대학살로 끝났다.
이후 12년에 걸친 군사정권이 이어지다가 1988년에 민간인 출신 총리가 선출되며 다시 문민내각이 들어섰고, 마침 국제정세도 냉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기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듯한 분위기가 다시 싹텄다.
1991년에는 수찐다 크라쁘라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듯 했으나, 1992년에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국왕 라마 9세가 수찐다 내각을 불신임하면서 다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1차 집권 당시 일제 군국주의를 모방했던 것과 달리, 2차 집권 이후의 쁠랙 피분송크람은 친미, 반공 논리에 기반한 군사정권을 이끌며 10년간 집권했는데, 1957년에 사릿 타나랏과 타놈 끼띠까촌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1957년 쿠데타 이후 총리로 취임한 사릿 타나랏은 쁠랙 피분송크람 정권의 잔재를 제거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입헌군주제 실시 이후 실추되었던 국왕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리는 정책을 폈고, 이로써 라마 9세는 비록 전제군주는 아닐지언정 감히 신민들이 비판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었다.
사릿 타나랏이 1963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쿠데타 동지로서 총리가 된 타놈 끼띠까촌에 의해 군사정권이 유지되었으나, 1973년 민주화 시위로 실각하면서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이렇게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듯 했으나, 1975년에 인도차이나 3국[3]이 공산화되며 반공 정서가 극대화되자 1976년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이에 반대하며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탐마삿 학살이라 불리는 대학살로 끝났다.
이후 12년에 걸친 군사정권이 이어지다가 1988년에 민간인 출신 총리가 선출되며 다시 문민내각이 들어섰고, 마침 국제정세도 냉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기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듯한 분위기가 다시 싹텄다.
1991년에는 수찐다 크라쁘라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듯 했으나, 1992년에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국왕 라마 9세가 수찐다 내각을 불신임하면서 다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5.2.2. 탈냉전 시대의 민주주의[편집]
5.2.3.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편집]
2006년 쿠데타로 탁신 친나왓 내각을 붕괴시킨 군부는 태국 헌법재판소를 압박하여 2007년에 탁신의 당인 타이락타이마저 해산시켰다.
그러자 탁신의 지지자들은 같은 해에 인민역량당이라는 군소정당에 대거 입당하여 당을 점령한 후, 탁신의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을 대표로 추대하여 총선에 임하여 탁신 축출 1년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총리로 취임한 솜차이 웡사왓은 탁신을 사면하려 했으나, 2008년 태국 헌법재판소가 인민역량당 역시 해산하여 솜차이 웡사왓 내각을 붕괴시키면서 탁신의 복귀는 무산되었다.
절치부심한 탁신 지지자들은 같은 해에 창당된 위성정당인 프어타이당(태국인당)을 중심으로 뭉쳤고, 2011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이때 총리로 취임한 인물은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었는데, 잉락은 솜차이보다 오래 집권하긴 했으나, 2014년에 탁신 사면을 시도했다가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쿠데타의 주역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이 총리로 취임했고, 쁘라윳 내각 초기인 2016년에 국왕 라마 9세가 사망하면서 70년에 걸친 라마 9세 시대는 종식되었다.
그러자 탁신의 지지자들은 같은 해에 인민역량당이라는 군소정당에 대거 입당하여 당을 점령한 후, 탁신의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을 대표로 추대하여 총선에 임하여 탁신 축출 1년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총리로 취임한 솜차이 웡사왓은 탁신을 사면하려 했으나, 2008년 태국 헌법재판소가 인민역량당 역시 해산하여 솜차이 웡사왓 내각을 붕괴시키면서 탁신의 복귀는 무산되었다.
절치부심한 탁신 지지자들은 같은 해에 창당된 위성정당인 프어타이당(태국인당)을 중심으로 뭉쳤고, 2011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이때 총리로 취임한 인물은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었는데, 잉락은 솜차이보다 오래 집권하긴 했으나, 2014년에 탁신 사면을 시도했다가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쿠데타의 주역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이 총리로 취임했고, 쁘라윳 내각 초기인 2016년에 국왕 라마 9세가 사망하면서 70년에 걸친 라마 9세 시대는 종식되었다.
5.3. 라마 10세 시대[편집]
라마 9세 시대 말기에 시작된 쁘라윳 짠오차 군사정권은 라마 10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군부는 쿠데타 이후 5년만이고 2011년 총선 이후 8년만인 2019년에 이르러서야, 해당 총선은 공민역량당을 비롯한 군부의 승리로 끝났다.
2020년에는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해당 시위는 정권 퇴진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202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3년 총선에서는 진보 정당인 행동전진당이 원내1당으로 약진하고, 탁신계 정당인 프어타이당이 원내2당을 차지한 반면, 친군부 정당들이 몰락하면서 9년간 장기집권하던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취임했다.
그러나 행동전진당의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군부와 야합한 사법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프어타이당이 친군부 정당들과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완전한 군정 종식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탁신은 20년 가까이 대립한 군부의 비호를 받으며 귀국한 후 형식적인 수감 생활을 거쳐 사면받을 수 있었다.
이후 행동전진당은 태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하고 인민당[5]으로 재창당했다.
한편 군부와 야합한 프어타이당은 초기에는 세타 타위신을 총리로 옹립했으나, 그가 2024년에 법원 판결로 총리직을 상실하자 탁신의 딸인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로 취임했다.
군부는 쿠데타 이후 5년만이고 2011년 총선 이후 8년만인 2019년에 이르러서야, 해당 총선은 공민역량당을 비롯한 군부의 승리로 끝났다.
2020년에는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해당 시위는 정권 퇴진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202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3년 총선에서는 진보 정당인 행동전진당이 원내1당으로 약진하고, 탁신계 정당인 프어타이당이 원내2당을 차지한 반면, 친군부 정당들이 몰락하면서 9년간 장기집권하던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취임했다.
그러나 행동전진당의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군부와 야합한 사법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프어타이당이 친군부 정당들과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완전한 군정 종식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탁신은 20년 가까이 대립한 군부의 비호를 받으며 귀국한 후 형식적인 수감 생활을 거쳐 사면받을 수 있었다.
이후 행동전진당은 태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하고 인민당[5]으로 재창당했다.
한편 군부와 야합한 프어타이당은 초기에는 세타 타위신을 총리로 옹립했으나, 그가 2024년에 법원 판결로 총리직을 상실하자 탁신의 딸인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