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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페르디난트 1세 시대2.2. 보리스 3세 시대2.3. 시메온 1세 시대2.4. 멸망 이후
3. 정치
3.1. 차르3.2. 총리3.3. 의회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08년부터 1946년까지 불가리아 일대에 위치했던 왕국.

군주의 칭호로는 중세 불가리아 제1제국제2제국 시절처럼 차르를 사용했으나, 이미 불가리아어에서 차르의 위상이 황제보다 낮은 칭호로 격하된 상태였기에 세계 각국 언어에서 불가리아 제국이 아닌 불가리아 왕국에 대응되는 단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2. 역사[편집]

2.1. 페르디난트 1세 시대[편집]

1908년 불가리아 공작 페르디난트 1세[1]차르를 칭하며 불가리아 왕국이 수립되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수도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을 위협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후처리 과정에서 만족할만한 보상을 얻지 못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제2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가 오스만 제국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라는 5개국을 동시에 상대하는 처지에 몰려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에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국력에 비해 선전했으나, 1차 대전은 1918년에 동맹국의 패배로 종식되었고, 차르 페르디난트 1세는 패전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출생 당시의 모국인 독일로 돌아갔다.[2]

2.2. 보리스 3세 시대[편집]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보리스 3세는 퇴위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후 불가리아를 재건하는 임무를 떠맡았으나 그의 치세는 좌우 정당들 간의 극한 대립과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점철되어 혼란이 지속되었고, 그 중에는 차르 본인이 사주한 친위 쿠데타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보리스 3세는 어떻게든 왕위 자체는 유지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추축국에 가입할 수 밖에 없었고, 독소전쟁에도 나치 독일 편에서 참전해야 했다.

다만 보리스 3세는 추축국 가입 이후에도 히틀러와 껄끄러운 관계를 계속 유지했는데, 실재로 그가 1943년 불가리아를 방문한 히틀러와 회담을 가진 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2.3. 시메온 1세 시대[편집]

1943년에 즉위한 보리스 3세의 아들 시메온 2세는 아직 6살의 어린아이였기에 숙부 키릴 왕자를 비롯한 중신들이 섭정을 맡았다.

시메온 2세 재위 기간 동안 전황은 추축국에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 1944년에는 소련군이 불가리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섭정 키릴 왕자를 비롯한 섭정단은 1945년 종전 직전에 처형되었다.

소련2차 대전 직후에도 불가리아 군주제를 당장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불가리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정치결사 불가리아 조국전선은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고, 1946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시메온 2세의 폐위와 왕정 폐지를 의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멸망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

2.4. 멸망 이후[편집]

어린 나이에 폐위된 시메온 2세는 4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불가리아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한 그는 2001년 불가리아 총선에서 승리하여 4년간 불가리아 공화국 총리로 재임하기도 했으나, 2005년 총선 패배 이후 은퇴하여 이후로는 정치권과 거리를 두면서 현재까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3. 정치[편집]

3.1. 차르[편집]

  • 삭스코부르고츠키 왕조

3.2. 총리[편집]

3.3. 의회[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독일 제국 구성국 왕실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분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 출신이었다.[2] 독일은 아예 패전 직전에 일어난 1918년 11월 혁명으로 인해 군주제 자체가 폐지되어 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교체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의 본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역시 영지를 상실한 상태였다.